①임진강 풀리자 '미수허목'을 찾아 떠난 길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6에 글에 연하여 씁니다.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는 민통선 안에 위치했다.

징파 초소까지 다다라서 어떻게 왔냐는 말에 여차저차 이야기를 하니 좀 기다려 보란다.

마침 페인트 깡통을 두 병사가 들고 나온 곳으로 다가가서 묻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찾아왔다는데요. (안에)있습니까?> <응, 있어>

하사라고 한다. 초소의 고참인 모양이다. 어떻게 왔냐고 묻고 신분증을 맡겨놓고 병사를 한사람 대동하고 들어가란다.

그리고 나중에 카메라를 한 번 확인시켜주시면 된단다.

 

한 200m들어가자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긴한데 좌측으로 4km더 가서 있다는 안내판이다.

초병에게 물어보니 그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어떤 분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초병에게 안내를 받는 게 아니라 그저 감시를 받는

감시병 한 사람을 달고 직접 두리번거리며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길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무튼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래도 고맙게 두어군데 안내표지판이 있었고 큰돌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일일이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흔히 공덕비라고도 말하는 신도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산위로 오르기 쉽도록 깨끗하게 단장된 계단을 올랐다.

어림잠작으로 아마도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닐까 싶었는데...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종중이니 모두가 양천허씨가 맞긴 맞다.

대리석계단은 동산의 봉우리 위쪽으로 더 연결이 되었고 그 위로 올라가니 근간에(1994년) 의정부 송산리 묘역이 개발로 인해 수용당하여

이 곳으로 이장하여 다시 세운 묘였다.

 

부근 일대가 모두 양천허씨 종중묘역이므로 그제사 다시 둘러보니..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동산이 또 있다.

특이하게 검은 문인석들로 둘러싸인  묘 한 기 <아, 맞어...연천군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그 묘소가 이제야 기억속에 들어오다니~>

서둘러 다시 내려와 우측 안쪽으로 들어가니 5백여평 쯤 되보이는 너른 잔디 마당이 나온다. 정자도 있고 간이 화장실도 두 개나 설치된 걸로 봐서

문중에 초상이 나거나 벌초를 할 때나 문중 행사를 갖는 장소인가 보다.

잔디를 얼마나 곱게 심었는지 동산자체를 큰 왕릉 못잖게 손질을 해두었다.

 

입구 계단을 오르려 다다르자 이상한 돌무덤 같은 게 보인다.

<아!  石棺이다>......이모저모 사진을 찍고 내 발걸음으로 길이를 재어보니 보통 행보로는 네 걸음이요 성큼성큼은 세 걸음의 길이다.

여섯자가웃은 좋이 되겠다.  안을 비쳐서 요리조리 사진도 찍어보고....신기하기만 하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훈(薰) 이라면 방금 다녀온 곳의 동산 정수리에  이장한 듯 새로 만들어진 묘의 임자가 아니던가?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우리말로는 널이라고 불러지는 관(棺), 500년이 된 석관을 이렇게 자세히 만져보다니....

물론 용산 박물관에 있는 석관처럼 그림이나 글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석관은 아니지만 그 투박하고 단순함이 마음에 차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둘러보지 않아도 그리 서운하지 않을 것 같은 흡족한 마음이다.

 

석관 내부를 찍어보았다.

열려진 석관위로 한줄기 햇살도 들어오고, 파르라니 뭔가 새싹도 움트고, 낙엽도 찾아들었다.

 

처음 잘 모르고 찾아올라간 묘역이 목적인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니라고 실망하며 괜히 올라갔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뵙고 무려 500여년을 누워계시던 관을 이리도 만져보니 그 게 도리고 예의가 아닌가?

 

잘 가꾸어진 계단을 조금 더 오르자 비로소 그분의 묘소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다음글③로 계속)

 

 

우리나라의 관은 재료에 따라 목관(木棺)·옹관(甕棺)·석관(石棺)·와관(瓦棺)·도관(陶棺)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목관은 신분에 따른 구별없이 거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평양 정백동 유적, 백제 무령왕릉, 신라 천마총 등의 목관이 대표적이다. 옹관은 토기그릇을 시체 담는 관으로 대용했던 것으로서, 단옹식 옹관과 조합식 옹관으로 구분되며 부여 송국리 독무덤이 잘 알려져 있다. 돌을 재료로 한 석관으로는 고발식석관(刳拔式石棺)과 조합식석관이 있다. 와관은 기와를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유적에 남아 있다. 화장이 성행하면서 많이 제작되었던 도관은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것으로서, 공주시 마암리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검색

 

 

 

미수허목의 묘역에 들어서다.

 

계단을 향해가는 오른편에 석관이 놓여있다.

 

 여기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양천허씨 협천공파 종회

 글이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낙엽들이 찾아들었다. 햇살도...새 생명도 움이트고,

 의정부 송산의 도시계획으로 94년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한다.

 오른쪽이 (薰)공의 것이고 좌측이 비의 것이다.

 뒤로 고즈넉한 민통선안의 풍경이 보인다.

 빛이 있으니 생명을 가진 새싹도 움트고...

 석실내부는 충분히 넉넉해보인다.

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보아도 역시 아름답다.

널이 아름다운 것인지...돌이 아름다운 것인지....나 역시 구분이 잘 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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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잘 못알고 올라갔던 묘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역입구에는  미수 선생의 생애와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미수 선생과 그의 증조부 許磁님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 곳에서부터는 양천허씨 종중 묘역을 알리는 입구인 셈이다.

 

 미수 허목의 신도비

 

문인석이 세워진 이 묘로 착각했었다. 

 6.25 전란의 참사가 이렇듯 흉흉한 사실로 남아있는 곳!

흉탄은 문인석의 왼쪽 어깨를 날려버렸다.

등 뒤를 보면...얼마나 총탄의 위력이 쎈지...

순간 소름이 오싹끼쳤다.

 전란중에는 북쪽 땅이다가 (3,8선 이북)

전후에는 우리땅이지만....민간인은 출입을 할 수 없는 곳! 

 

문인석에 핀 돌이끼가 세원무상을 말해주는 듯...오른쪽 문인석의 건너편 귀부분 아래가 <미수 허목>의 묘역이다. 

 

잘 못 찾아간 양천 허씨의 훈공묘 ↗ 

계단을 더 오르니

 새로 이장한 묘였다.

 바로 석관의 주인인 셈이다.

석관이 출토된지 대략 500여년으로 셈하니 <미수 허목>은 300여년 전에 가셨으니

200여년을 앞서신 선조 할아버지인 셈이다.

 

(다음 글로 이어씁니다)

 

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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