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포구에 있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등록문화재 341호(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윤동주님의 2년 후배인 정병욱님이 부모님 살던 곳에 윤동주 유고시집인

서시. 자화상, 십자가, 별 헤는 밤, 등   시를
어머니께 꼭 보존해 달라며 부탁하자

정병욱 어머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양조장 마룻바닥에 숨겨 놓았던 곳입니다.
정병욱 가옥은 1925년 망덕포구에 건립된 양조장이 딸린 점포형 건축물이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19편이 수록된 육필원고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곳으로 문화사적 큰 의미가 있다.

윤동주(1917~1945)는 1941년 그의 절친한 친구인

정병욱(서울대 국문학과 교수)1922-1948 이곳에 보관되다가 1948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서시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암울한 상황,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하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가겠다는 의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건한 순명(順命)의 의지, 도덕적으로 결백한 삶의 소망했던 윤동주~~

윤동주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영혼의 울림이 있는 시로 윤동주는 일본인들에게도 찬양하는 명시가 되었다 한다.




그의 절친 정병욱도 대단하지만 그의 모친도 예사분이 아니니 잘 보존되었겠다.

사람들이 숱하게 드나들던 마루장 아래에 육필원고를 보관한 그의 어머니!!

훗날 정병욱은 윤동주의 매제가 되었다 한다.


시골투어 감사합니다.

망덕포구를 다녀갔지만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청먕과니로 다녀갔답니다.

광양시청 문화관광과에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마루짱을 뜯어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보존했다.













망덕포구(남파랑길)

섬진강꽃길 걷기


망덕포구는 봄이면 벚굴로 가을이면 전어로 유명한

맛집이 즐비한 포구로  탈바꿈 되었다.




데크로 깨끗하게 꾸며진 길을 걸으면

섬진강(해파랑길)을 바라보며 섬진강 꽃길을 걸어보자!



여기는 호남정맥의 시발점 망덕포구입니다.

란 글귀가 찡하다.

이런 비린내 나는 포구에서 저다지도 별처럼 영롱한 시를 품을 수 있었다니....

광양이 달리 보일줄이야~~



호남정맥의 최장맥이면서 명당이 많이 있다는 망덕산과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힐링 할 수 있는 강변 데크 산책로!

망덕산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한 시비와 그의 시로 꾸며진 공원이 있습니다.




망덕포구 가을전어를 맛보는 가을여행


망덕포구 사진 왼편에 전어 조형물이 서 있다.

가다가 돌아섰다.

저녁 메뉴는 전어란다.

전어굽는 냄새에 아마도 회가 동했나 보다.


나루터 식당이다.

응...밤에 봐도 눈에 익은 이 포스는 뭐지?

4 년 전에 와서 벚굴을 먹었던 식당이다.


그 땐 바보처럼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했던가?>

저 멀리 있는 정병욱 생가도 모르고 다녀갔다.



섬진강 재첩 해산물은 물론이고 벗꽃이 필 때면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매달리는 크고 맛난 굴....벚굴

도다리!

가을철 최고의 별미인 가을전어까지 고루 즐길 수 있는

망덕포구위 매력에 흠뻑 빠져 봅시다.


봄 벚굴과 도다리쑥국을 시켜 실컷 먹었다.

바로 이 집<나루터 식당>


오늘은 때가 때이니 만큼 가을전어로...

전어회를 시작으로 전어구이 전어무침으로 마무으리!



















 

 

 

일시//2019년 10월 12일(토) 16:00~18:00

장소 /영주 소수서원

 

오늘은 만화가이자 교수인 이원복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이 글을 씁니다.

처음 초판으로 만났던 이원복님의 <먼나라 이웃나라>의 회상속으로 빠져가며....

 

지금은 장성하여 다 결혼한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30년 전)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분명 서점에 가서 <먼나라 이웃나라 >를 한질 구입을 했었습니다.

제가 먼저 읽고는 넘 좋았습니다. .

평소 가보고 싶어했던 익숙한 나라들의 의식주를 너무나 세세하게 표현해놓으셔서 이런 귀한 학습만화에 시쳇말로 홀딱반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영국인들의 요리는 찌고 삶고

단순해서 요리를 별반 기대할 것 없다는...몇 십 년이 흘러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지금은 제일 이상적인 조리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바꼈습니다.

 

제가 아직 영국은 못가봤지만 아마도 가고 싶었나 봅니다.

영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는 우유에 가까운 밀크커피라고요ᆢ. ㅎ

 

그 책을 아이들에게 제발 좀 읽으라고 채근을 그토록 했건만 그 책을 잘 읽던 딸은 먼나라들을 두려워 않더니 지금은 미국에서 뿌리내려 잘 살고 있어요.

남편이 해외 장기근무를 할 때 짐속에 <먼나라이웃나라>를 넣어주었더니...정말 좋은 책이라며...

그런데 귀국할 때 그 책을 누가 즐겨 읽길래 두고 왔답니다

이를 어째요?

 

지금껏 아니 내평생에 소장해도 좋을 만화책을 말입니다.

다시 사고싶었지만 그 때만해도 만만찮은 가격에 포기했습니다.

 

♧♧ 나,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들이 무조건 만화를 못보게 하셨다.

하나도 득 될 게 없다시며

우리 오남매는 부모님께서 큰집으로 기제사나 명절 때 자리를 비우시면 동생을 만화방으로 심부름 시켜 만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을 밝혔다.

어머니가 잔뜩 해놓으신 명절 음식도 마다하고 갓 나와서 그 맛이 황홀했던 라면만 주구장창 끓여 먹어가며 다들 엎디어서 참으로 열심히도 읽어대던 만화책!

그 때 기억으로 <엄마찾아 삼만리>같은 건 눈물없이 볼 수가 잆었다. TV도 없었던 때니 어련하였을까?

무시때도 만화는 보고싶고 부모님은 무섭고 벽장에 숨어들어가서 1cm쯤 문을 열고 그 틈새 빛으로 만화를 보았다.

그랬는데 이원복님의 <먼나라이웃나라>초판본을 읽고는 ㅡ 이렇게 만화가 유익하고 좋은데..활자뿐인 일반 책보다 나은데...그시절 그 땐 왜 그랬지?

그래선지 내 눈만 나뻐졌잖아

초등 6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던 억울한 기억을 다시금 소환해보며...♧♧

 

이원복하면 <먼나라 이웃나라 >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스테디셀러 작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덕성여대 석좌교수인 그는 74세로 독일에서 3번째 안에드는 뮌스터공립대 대학원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그의 작품은 감수없는 학습만화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며 익히는 절대적인 배움의 만화가 되었다지요.

 

그의 책 제목처럼 <만화로 교양히라>는 말이 '일물일호'의 표현이 되어 가슴에 와닿습니다.

 

이번 인문캠프에 모시는 분이 이원복교수님이란 걸 알고는 요근래에 읽은 책이 없어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습니다.

 

 

도서관엘 갔습니다.

그 분을 만나러 가면서 최소한 예의는 갖춰야하겠기에...

내 아이들 어렸을 적 읽었던 까마득한 초판본 기억으로 어찌 나간단 말입니까?

도서관에서 검색을 하고 위치를 출력(책위치) 쪽지를 들고도 쩔쩔매는 내게 도움을 주며 하는 말이

<만환데요?> <네, 알아요>

도서관에서 검색을 하니 <이원복 교수의 신 세상만사 신 유럽만사> 2004년 전 책이 비치되어 있길래 대납해왔습니다.

응 그런데 제 나이 때문인가요?

주로 생소한 나라들로 몇 페이지씩 할애된 내용은 제 흥미를 끌지 못한채 반납일만 기다리며 그냥 <백두대간인문캠프> 빈손으로 왔지요. 집중력이 일흔 넘어서니 많이 떨어지는 것 그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 책의 서두문에서 읽었을까요?

정보오루로 잘못된 책은 전량 수거 없앴다는 것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책임을 느끼며 글과 그림을 그리시는구나!

감동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선생님을 만나뵙고 함께 기념 사진도 찍고 좋은 말씀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런데말입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마치 재미았는 만화책을 읽는 듯하는 이런 현상은 뭐라고 해야 하는지요? ㅎ

 

선생님은 누가 뭐라셔도 만화로 세상을 이야기하는 지성인, 글로벌 시대의 문화 통역자입니다.

오늘 그 분을 뵙고 재미있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그만 반쪽의 나라가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세계 속의 한국의 문화유산을 글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는 유럽에서도 인정하는 만화를 그려냈었고,

가치를 폄하하던 만화시장을 어른들도 즐기는 교양만화라는 장르로 개척해내셨지요.

글로벌 시대 문화 통역자로서 교수님의 존재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한 주욱 ㅡ계속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강건하세요.

박수를 보냅니다.

학습만화 교양만화로 장르를 개척하는 자리매김을 해주셔서요 :)

음식의 꽃, 발효미학, 한국의 전통주가 삼대에 걸쳐

재현되는 당진의 신평양조장 '김용세' 명인과 함께하다.



요즘 전통주가 대세! 

농민들이 힘들 때 갈증과 허기를 달래려 마시던 농주가

이젠 서민이 즐겨찾는 술이되었고 외국까지도 진출했다.

우리 집도 예외없이 전통주 열풍이 일었다.

신평양조장의 얼굴 '백련막걸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가 2007년, 이후 갑자기 불어닥친 막걸리 붐을 타고 백련막걸리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청와대 만찬술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신년 하례술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세계 유명 술 품평회에 초대되어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해 김용세 장인은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변치 않는 술맛을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열 두번 이상을 술창고에 드나들어 술맛을 다스리고 있을 따름이라고....






#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가 함께 주관하는 문화여행~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대상수상작품인 백련!

당진 '신평양조장'의 술빚는 장인 "김용세" 명사를 만나다.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대상수상작품인 백련!


"신평양조장은 80년 전통을 3대째 이어오는 우리술 품평회 1위인 양조장으로
대표 제품은 백련잎과 당진 해나루쌀을 원료로 사용해 만든 백련막걸리로
2010년도에는 청와대 만찬회 만찬주로 인정받았다."


우리의 술 막걸리

인기방송 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전국 5대 막걸리를 소개할 때도 항상 앞자리를 차지하는

신평양조장이었다.

2대째 술빚는 장인 바로 이 집의 주인 "김용세"다.

행정학 석사까지 받은 옛날의 잘나가는 집안의 도련님이었지만 부친의 가업을 잇기위해

술도가로 들어왔다.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시 결정해도 똑 같았을 거라는 그의 심지곧은 대답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장인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1933년 문을 연 이래로 신평양조장의 술은 그저 맛있어서 잘팔리는 술이었다.

그러나 김용세 장인은 기존 막걸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어르신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젊은 사람들과 여자들도 좋아하는 막걸리 맛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술에 넣을만하다 싶은 온갖 것들을 첨가해 술을 빚고 버리기를 수 없이 했다. 그러다가 자주 들리던 절에서 연잎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님이 연잎차를 주시는데 맛이 좋더라고, 그래서 술을 담가보면 어떨가하고 스님께 물었더니 옛날에 연잎으로 곡차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셨어."


김용세 장인은 이를 계기로 연곷과 연잎으로 술을 빚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연잎을 찌고 썰어서 고두밥에 넣기도 하는 등 수십번의 시도와 실패끝에 평소 좋아하고 관심이 많았던 차 만드는 과정을 접목해 보았다. 연잎을 찻잎처럼 불에 덖고 말린후 밑술과 함께 숙성을 시켰더니 아주 맑고 향이 좋은 술이 되었다.

"오랫동안 이어온 술의 전통에는 단지 술을 빚는 기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정서,

일과 휴식에 대한 철학과 문화가 녹아 있다"   김용세 장인의 혼이 깃든 말씀이다.



이날 명사와 함께하는 여행에는

KBS아나운서 서주희와 함께 했다.

반듯한 외모처럼 아주 매끄러운 인텨뷰와

사회진행을 했다.


연세가 좀 있으신 장인임에도 불구하고

좌중을 웃기게끔 유도하며 찰지게 사회를 맡았다.


분위기에 이끌려선지 옛날 이야기를 하시던 장인, 갑자기 옛날에는 말통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던 사람의 흉내를 내주셔서 좌중을 웃게해주셨다.

<아~ 그래서 술 잘먹는 사람을 말술이라는 말이 생겨났구나 ㅎ~ >



명사와 함께였으니 사진이 빠질 수는 없다.

양조장 뒷켠에는 낮은지대의 부지에 수많은 큰대야를 포트삼아 연꽃을 키운다.

연잎을 조달하기도 한다는.....


양조장 왼편에는 신평양조장의 선대 춘부장께서 사신 집이다. 고택의 본채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안채 마당에 들어서면 대대로 사용하던 옛 옹기들이 있는데(5~60여년 전)

모두 다 장렬히 전쟁을 치르다 부상한 장병들처럼 여기저기 깨진 곳곳을 철심으로 꿰매고 붙이고 바르고 한 항아리들이 지금은 쉬고있다.

옛날에는 항아리를 꿰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잇대고 붙인 항아리에서 3대째 내려온 막걸리家의 장인 정신이 묻어난다.



밑술(단양주)만들기 체험도 해보았다.

가운데가 장인 김용세님의 영식(그 역시나 해외유학파로 직장을 그만두고 선대의 가업을 물려받고 있다) 








막걸리칵테일 만들어 시음하기

즉석에서 팀별로 다양한 맛으로 배합하는 방법을 배워보고, 직접 자신만의 칵테일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술에는 거의 초보지만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외려 더 정확할 수 있다.
나의 맛 진단은 백련이 역시 깨끗하다.

1박2일 주안상 씨리즈에 신평양조장의 강남 가로수길에 있는 세막이 나오고 누룩전이 유명세를 탄단다. 물론 맛이 좋으니까~

고르곤졸라피자 스타일이다.

재생하지 않은 누룩을 가루로 내어 만든 누룩전이란다.

위에는 파미지아를 그라이팅했다는데 오묘한 맛이다.

Pink 황진이는 복숭아와 크렌베리로 만든 칵테일

Blue 인당수는 블루큐라소와 애플을 섞어 만든  막걸리 칵테일

 

Pink 이름이 "황진이" 詩와 풍류를 아는 기생, 황진이!

Pink 황진이는 복숭아와 크렌베리로 만든 칵테일

칵테일막걸리

빛깔 고운 셰막의 막걸리 칵테일이다.



김용세 장인과 함께~




신평양조장 http://www.koreansul.co.kr/

당진시 신평면 신평로 813
☏ 041-362-6080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 회암사!

전 10월 20일 그냥 다녀오면서 핸폰으로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잡상들 사진을 좀 찍어왔습니다.

여태껏 잡상이라면 원숭이 정도 쯤으로 생각한 제 편견을 확 깨버린 날이었습니다.



 

 

 


 

 

 

명종이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섭정을 하면서 불교중흥책을 편다.
문정왕후와 보우스님~

 (제가 활자로 분명 읽고 알았던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은 지워지고 약간 왜곡된 듯 하다는 ....)
보우수님이 제주도로 귀양가서 피살당하고.........

회암사에는 사찰 사이로 수로가 흐르게 만들어 절대 불걱정은 없게 지어졌는데...화마에 전체가 완전 소실되었다는 점!!
알수 없는 수수께끼등이 약간은 지워지고 왜곡되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이요조

(역사엔 문외한이지만...)

 

 

 

2015년 가을관광주간을 맞이해서 10월21(수)~11월1일(일)까지
양주회암사지 박물관은 무료입장 행사 중입니다.
행사기간 중 휴관일 10월26(월)

 


주소/ 경기 양주시 회암사길 11

(지번) 양주시 율정동 299-1
전화031-8082-4187홈페이지
museum.yangju.go.kr
박물관이용시간
동절기 09:00~17:00
하절기 09:00~18:00

 


회암사지박물관 특별전

마루장식기와, 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담다

마루장식기와는 건물의 지붕면과 지붕면이 맞닿는 마루위에 올리는 기와로 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보여주는 장식기와입니다.
회암사지박물관 특별전 ‘마루장식기와, 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담다’는 취두, 용두, 잡상, 토수 등의 마루장식기와를 한자리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전시로 회암사지 출토 조선전기 마루장식기와를 중심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후기까지의 마루장식기와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전시를 통하여 마루장식기와의 의미를 되새기고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중교통 이용시

지하철 및 버스환승

1호선 양주역이나 덕정역에서 하차하여 역 앞에서 78번으로 환승 후 회암사지 정류장에서 하차 (약10분 소요)

 

 

 

 

자동차 이용시

네비게이션 주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

  1. 양주시청 사거리 → 3번국도 호국로를 따라 덕정역 방향 → 회정삼거리에서 양주 예쓰병원 방향 우회전 → 회천3동 주민센터에서 좌회전 → 칠봉초등학교에서 우회전 → 회암사지박물관
  2. 양주시청 사거리 → 부흥로를 따라 고읍신도시 방향 → 장거리교차로(타이어테크 양주고읍점)에서 어하터널 방면 우회전 → 삼숭교차로에서 좌회전 → 상신섬유에서 우회전 → 회암사지박물관

 

 

 

 

특별전시전 볼거리 정말 다양합니다.

가을의 계절에 소풍삼아 멀리 나오셔서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시면 무척 유익할 듯~~

 

회암사지박물관  http://museum.yangju.go.kr/

 

가시는 길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
250m
© Kakao, Samah

대중교통 이용시

지하철 및 버스환승

1호선 덕정역에서 하차하여 역 앞에서 78번으로 환승 후 회암사지 정류장에서 하차 (약10분 소요)

 

 

 


 

주간모습/경복궁의 봄

아래는 경회루

 

 

 

 

 

 

 

야간개장을 한다는 경복궁은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 인파는 줄을 이었다.

사람에 휩쓸려 다녀야 하므로 구경은 뒷전!!

 가 볼 사람들은 다음에 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경회루의 야경은  연못에 비친  경회루의 반영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듯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5월의 끝자락에서 연녹색으로 물들어 가는 고궁의 야경속을

거니는 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가히 나무람이 없을 정도로 봄 꽃 향내가 솔 솔...

풍겨오는 고궁의 봄 밤은  아름답다.

 

 

야간이 너무 붐빈다면 아예 낮에 가보는 것도 추천하며,

경복궁 미술관과 고궁 박물관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라 하겠다.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

 

번잡하다 못해 추태를 보이는 시민까지...외국인들 볼까 두렵군요.

매표소에서 일정 인원만 한정한다면 고궁 관람이 더 쾌적하지 않을까요?

무조건 매표해서 인신인해를 이루는 것도 문화재보호가 아님을 분명 아실터인데,

관계자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경복궁 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는 태종 12년(1412)에 기존에 있던 연못을 확장해 만들어 왕이 신하들이나 사신들과 함께 큰 연회를 열던 곳이다.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으로, 1층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2층은 마루를 깔았다. 2층의 마루바닥은 가운데는 높고 주변은 낮은 3단 구조로, 중앙에 위치한 가장 높은 1단은 3칸, 한 뼘 아래의 2단은 12칸, 가장 낮은 바깥쪽의 3단은 20칸으로 되어있다. 이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1년 12달을, 바깥의 20칸에 세워진 24개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

“국난을 견딘 경회루”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던 경회루는, 1867년 고종 때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의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경회루의 돌기둥과 석상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지만 다른 부분은 모두 건재하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5월 23일 야간개장 첫 날!

인산인해!! 

 

 

 

 

 

 


 

 

 

 

 

 

 

경회루

경회루의 야경 

 

 경복궁 근정전


 

 

                                      ▼  근정전 월대의 조각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략
유득공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화(禍)를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이 석견의 죄란 말이냐"며,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 모름지기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석견에 주목하는 것은 근정전이라는 엄숙한 공간에 이처럼 해학적인 조각상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경복궁 건축의 디테일은 치밀하고 여유롭다는 점 때문이다.[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경복궁 미술관과 고궁 박물관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조각상


새끼가 없는걸로 보아 숫놈인 듯...ㅎ

 광화문,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주작도

주작은 상서로운 새를 말하므로, 신년 신수에 많이 쓰이기도 한다.

경복궁 광화문의 홍예문 천장에 선명하게 그려진 주작도가 있다.

▲ 주작도가 그려진 천장

 

 

 

 

 

광화문과 수문장 교대의식

 수문장과 수문장 교대

 

수문군은 복장에 따라 사진과 같이 구분된다.

종사관과 수문장이 맞례를 한 후 수문장이 광화문 정면으로 걸어 나온다.

 

고궁 박물관 

 

경복궁 찾아가는 길

 

경복궁 야간 개장
5월 22~26(일요일)까지
관람 시간/ 오후 6~ 밤10시
관람료는 3천원 온라인 예매가능
http://t.co/jWY88gYcSA

 

 

 

 

 

숭의전을 찾았다. 흰 이팝나무 눈 부시게 피어 하늘거리는 5월 중순~~

숭의전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 정상부 못 미쳐 징파강이 내려다 보이는 잠두봉에 위치해 있다.

제례만 지내는 엄숙한 이 곳!! 뭐라 표현 할 길 없는 ....선조들의 위패들 앞에 그저 바라만 보고 돌아 나올터인데

숭의전에 숨겨진 전설같은 옛 이야기를 알고나니 더욱 더 유적지가 친근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한다.

 

 

 

지정별 사적 제223호
소재지 미산면 아미리 7번지 일대
지정일자 71.12.28
지정면적 17,851㎡

 

 

숭의전지는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 정상부 못 미쳐 조성된 아늑한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임진강이 북동방향에서 남서방향으로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유적 현황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숭의전전경(군청 홈페이지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숭의전지[高麗 崇義殿址]는 고려의 종묘라고 말할 수 있으며,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며 숭의전[崇義殿]은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고 임진강변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 10에 위치해 있다.

 

징파강(임진강의 별호) 내려다 보이는 곳

어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나 해볼까나!!

가운데(중앙)문은 제례때 영혼이 드나들게 열어두는 문!!

숭의전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배신청

태조의 위패와 영정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지은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이 어W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위에 떠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조선은 생색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 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이 칠언절구는 1789년(정조 13년)마전군수였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담아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겨둔 것이다.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제례를 올리기 전 의관을 정제하고 준비하는 곳!!

 

 

 

 

 

숭의전 입구

 

 

더보기

 

문화재 소개

요약설명

조선시대의 사당 터. 고려 왕조 7명의 왕의 신위와 16명의 공신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터만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태조 왕건을 위해 앙암사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짓고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그리고 현종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세종 때 조선도 다섯 명의 왕 제사를 받드는데 고려 왕조의 8명의 왕을 모시는 것은 맞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네 명의 왕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문종 때 이르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16인의 고려 충신들의 제사도 지내게 되었다.

현재 숭의전지의 전각은 1972년에서 1973년까지 복원된 것으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외에 16공신의 위패가 모셔진 배신청, 숭의전을 청소하거나 보수할 때 위패를 잠시 모셔두는 이안청, 제사 때 쓸 음식을 장만하는 전사청, 향이나 초와 같은 제례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앙암재와 다른 부속 건물이 있다. 숭의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500년 도읍지는 무너지고 인걸은 간 데 없는 망국의 한, 숭의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먼저 고려 왕조의 상징인 고려 왕들의 위패를 걷어 배에 실어 강물에 띄어 보내버렸다. 그렇게 나라를 잃고 배에 실려 떠돌던 배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동이리 썩은소에 닿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쇠닷줄을 매어 놓고 사당을 지을 곳을 물색하였는데 하루 만에 그 쇠닷줄이 다 삭아 그만 배가 떠내려가고 말았고 배가 멈춘 곳이 ‘누에머리’라 불리는 잠두봉 절벽 위의 앙암사 아래였다. 사람들은 앙암사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의 숭의전이다. 그 후부터 쇠닷줄이 하룻만에 삭아버린 곳의 지명이 ‘썩은쇠’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썩은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상세설명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후 세종 5년(1423), 문종 2년(1452)에 고쳐 지었다. 문종 때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의 충신 15명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 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완강하게 조선을 거부하였던, 고려시대의 왕씨 문중들이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옛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숭의전지 → 연천 숭의전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붓글씨는 잘 모르지만 나는 미수 허목의 팬이다.

미수 허목의 서체를 안동여행에서 하회마을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만나고는

입이 헤~ 벌어지며 기분이 급 좋아졌다.

씩씩하게도 그를 찾아 군사분계선까지 군인을 하나 달고 찾아가지 않았던가?

 

충효당

예안이씨 충효당은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준교이다.
예안이씨 충효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홍인의 충과 이홍인의 8세손
이한오의 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을 띤 유서 깊은 집이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담장 안은 화장실이다.

 

 

담장안을 들어오니 솟을 대문이 또 따로있다.

마주보이는 곳이 충효당 본채이다.

 ▼

 

눈에 띄이는 여러게의 소화기만 봐도

충효당 가치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보물 제553호

 

 

현재 후손이 충효당 왼켠의 또 다른 담너머 안채에 기거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장마철이라도

그렇게 (습기로)누지진 않겠다.

습기를 피해 전체 돌을 쌓아 지은 것이 꽤나 보기에도 좋고

실용성도 있어보인다.

 

 

 

충효당 현판은 정침의 사랑마루에 게첨되어 있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미수의 전서체가 아주 재미있다.

충성충忠은 가운데 받들어 모시는 태양 즉 임금을 뜻하며

효는 孝 노인老을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며

집당堂은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형상의 전서체가 볼수록 그림으로 다가오듯 재미있다.

 

미수를 꼭 만나보러

나는 2009년 2월에 연천군 왕징면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미수의 묘역을 찾았다.

 

미수 허목을 만나보다. 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8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예안이씨 충효당
종목 보물 553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안채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전화번호 054-858-4768

 

 

 

청암정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걸린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허목선생은 호가 미수여서일까?  우연일까?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보물 제592-1호 
 동해비첩(東海碑帖)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고문운부*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

충재박물관에 있는 원본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으로
일월석(日月石)이라는 귀한 흰 돌에 새겼다 한다.

 

6,25동란중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난무하다.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은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이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 곳까지 가져온 돌이라는 설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송시열의 일화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안동으로 떠난 여행(봉정사)

 

천등산 봉정사

 

11월30일 분명 늦가을이라고 우길 수도 있는데...

올해 가을은 실종하고 만추부터 모진 한파로 괴롭다가

안동에 도착하자 그나마 남쪽이라 군데 군데 남아있는 가을의 흔적들!!

국화와 낙엽이 꽃다이 예쁘다.

 

 

 

 

바람은 코끝에 쌩-하지만

햇살은 따사롭게 보이는 ...봉정사를 오르는 송림숲길이 예쁘다.

 

 

 

 

퇴계 선생이 머물었다가 물소리에 반했다는 명옥대

여름이면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옥소리로 들릴 듯하다.

 

 

천등산 봉정사 일주문을 통과해야만...

악업이 씻겨지고 부처님을 배알 할 수가...

 

 

비보

쌓아둔 돌의 의미는

옛날에 풍수지리상 기가 허한곳을 이렇게 막아주고 보호한다.

 

 

6,25 전란통에 모든 역사기록서가 다 불에 타고...

건물도 소실되어 옛모습으로 재건되었겠지만

눈에 보이는 봉정사의 자태는 예사롭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 모두에게 자랑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봉정서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영가지'에 따르면 '북서쪽 30리에 있는 천등산 아래에 있다. 신라시대에 이름난 절이 되었다.


가정 병인년(1566) 봄에 퇴계 선생께서 절의 동쪽 낙수대 건물에 붙인 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 중 하나인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의 창건으로 보고있다.

 

창건 이 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 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6,25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紙)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얼마전까지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육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시에 상량문에서 고려말에 제작됐다는 묵서가 발견돼 지금까지 한국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국보15호)로 인정받게 되었고 극락전의 건립연대는 적어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2000년,2월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대웅전 지붕의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북서쪽 종보 보아지에서 발견된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중국연호인 선덕 10년 <1435년, 조선조 세종 17년>에 쓴 글)
라고 적힌 상량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가 직접 썼고 자사 新羅代五百之余年至 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이라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봉정사의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대웅전 창건 연대가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辛丑支正二十一年 鳳亭寺 啄子造成 上壇有覺澄 化主戒珠 朴宰巨](지정 21년 <1361년,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하다.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도 처음 확인,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건물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새로 발견된 상량문에는 2층 누각 신축, 단청을 한 시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사찰규모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 당시 봉정사는 팔만 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결(1만여평)의 논밭에다 안거스님 100여명에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봉정사는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 15호인 극락전, 국보 제 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덕휘루,무량홰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늙어 굽은 소나무가 길손을 반기는 듯~~

 

 

절 집 방문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오랜 세월 마음을 갈고 닦은 사람들의 영들이 오르내리는 것만 같아서...

 

 

오랜 세월의 묵은 때가 보이는 듯한

사찰 누각을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아직도 꽃이 피어있는 절집 경내는 햇살이 조용하다.

 

 

사찰누각 아래

따사로운 햇살도 모여 구도 중인듯...

 

 

이렇게 누각을 오를라치면

대웅전앞에 탑이 먼저 반기는데 탑이 없다.

탑은 극락전 앞에....그 이유는 뭘까?

 

 

 

국보 제 311호인 대웅전 

그닥 넓지 않은 조붓한 대웅전마당이

겸허하게 다가온다.

 

 

대웅전 문살이 화려하지도않고

단정한 모습이라 내 눈에는 더 좋아보인다.

 

 

국보 제 15호인 극락전

배흘림기둥에 토벽의 두 개 창살문은 마치 옥사같은 느낌이 들도록 생뚱맞아 보여..
예전 그대로 두었으면 좋았을 껄 여러번의 복원을 거쳐 고려의  옛건물이란 생각과는 멀어지는 느낌이다.

 

통상 대웅전마당에 탑이 세워져 있는데..극락전앞에 있음은

봉정사가 극락전의 건축이 먼저고 후순은 대웅전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극락전 앞 뜰에 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면,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 석탑이다.

  2중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비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82호

 

이 건 뭘까?

물이 고이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뭔가 소중한 물건을 올리는 모양이다.

등불? 제례음식? 해설사도 모르겠단다.

 

 

해설사의 해설을 놓쳤다. 매우 궁금해지는 ....지하 사용도다.

 

 

불현듯 영주 부석사의 느낌이 들었다.

 

 

절집을 나서며 길을 내려오는데...

배추밭에는 고라니가 뜯어먹은 듯 배추 윗둥이 다 뜯겨졌다.

아마도 절집 텃밭인 듯...

 

그대로 다 먹으라고 이젠 내어 준 듯~~

그래 함께 먹고사는 다 함께 부둥켜 안고가는 세상!!

부처가 어디 절 집에만 앉아 있더냐

사람 마음 마음마다 다 부처가 앉았거늘...

 

 

봉정사 솔숲길

소나무 정령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서 있는 것 같다.

아! 좋다!!

 

봉정사의 창건설화는 아랫글에 따로 있으니 참조 바라며 많은 소나무와 시원한 냇물과 맑은 공기로
산중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안 믿든 더 없이 좋은 쉼(休)의 장소로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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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작은 것에 감동을 받는다.

비구니승이 있는 사찰의 아름다운 정원도 보아왔지만

겨울 황량한 정원에 무슨 꽃나무인지 표식을 해 둔 것이 감동이다.

구도자가 이렇게 작고 섬세한 아름다움에도 눈을 뜬다면 필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실 도량의 스님임을.....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2

전화054-853-4181

 

 

 

 

봉정사를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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