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원목열

2013년 3월 13일 10시 15분경의 목책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몸소 실현 한 해상제국의 건설자 장보고의 발자취를 찾아 완도로 접어들었다.

 

완도하면 청해진의 유적지 장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다녀간지 몇 달 되지 않지만 내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 때 해변원목열을 처음 보았는데, 이번에는 자세히 살펴보고 지난 번

찍어두었던 사진과 함께 글로 써 보기로 했다.

 

1200년이 지난 오랜세월에도 썩지않고 화석처럼 돼버린 목책!!

바다를 지키려는 우리 선조들의 투철한 정신의 화석인 것 같아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지금도

 

 

청산도를 들어갈 여행 스케쥴은 카페리에 차를 싣고 하려면 10시 50분까지는 연안터미널로 가야하기 때문에 마음은 바빴다.

들은 장도를 둘러보게 하고 나는 물이 빠진 시간을 감사해하며 마음 조급하게 남쪽 해변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고 바닷물은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신발에 뻘만 잔뜩 묻힌채 돌아나오는데...<목책원목열100m>라고 씌인 고마운 안내판이 서있다.

마음이 너무 급해 보질 못했다. 얼마나 고마운지....갯벌이 아닌 모랫길을 100m 쯤을 내달려 갯벌쪽을 바라보니

이런 고마울데가...깃발도 꽂혀있다.

깃발과 안내판이 새로 생겨 고맙긴 한데 뭔가 조금 더 신경써주는 안내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싶다.

 

 

물이 날 때를 기다렸다가 작업을 했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해 본다.
질벅거리는 자칫 무너지는 지름 80cm의 U형의 뻘구멍을 파내어 직경 40cm정도 크기의 소나무를 일렬로 촘촘히 세워

울타리를 둘러덨 흔적들~
1200여년이 지난 지금, 뻘 위로 드러난 부분은 썩어서 없어지고 뻘속에 박힌 부분만 남아있지만, 작업을 했던 그 옛날의 광경을

생각하니 ....1200년 후 그 흔적을 구경하러 나와서는 좀 전에 신발에 묻은 뻘을 투덜대던 자신이 웬지 부끄러워진다.

 

 

 

 

 

목책에 관련된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역사적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城)을 가리키기도 한다. 급히 방어시설을 만들거나 임시로 성을 만들 경우, 또한 대량의 노동력을 구할 수 없는 도서(島嶼)지방에서 사용하였다. 한국의 성곽은 토성(土城) ·석성(石城)이 흔히 알려져 있으나, 목책으로 울타리를 만드는 경우도 많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만들어져왔다. 경기도 행주산성(幸州山城)에는 석성을 쌓기 전에 목책이 있었는데 이것은 임시로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단종실록》(4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제도(巨濟島) 등,  도서 요충지에 목책을 세워 방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唐 해적 막으려 완도군 해안 1000여개 설치 본문장보고가 설치한 1200년전 목책 ‘방치’…唐 해적 막으려 완도군 해안 1000여개 설치전남 완도군 장좌리 장도(장군섬)섬 입구에서 남쪽 해변 선착장까지 해안을 따라 설치된 총 연장 331m의 목책(원목렬)은 장보고가 당나라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방어용 목책이다.

 

 

청해진 유적지(완도, 장도)

 

 

 

장도 청해진유적지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將軍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사유적이다.1984년 9월 1일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던 곳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少將)에 오른 장보고는 중국인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비로 삼는 데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 왕에게 해적의 노략질을 근절하기 위해 청해(淸海:莞島)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828년(신라 흥덕왕 3) 그는 청해진대사로 임명되어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설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해상무역의 패권도 장악하였다. 유적으로는 해중에 나무 말뚝을 박아 두른 방책(防柵)이 있고, 1만 명의 식수정(食水井)으로 사용하였다는 청해정(淸海井)이 있어 지금도 맑은 물이 솟으며, 이 밖에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고, 기와 파편 등도 출토되었다.

 

 

 

 

다시 되돌아가게 해준 고마운 안내판

현재 300여m에 이르는 목책 부근에 칼라 깃대도 세워놓았지만

멀리서는 잘 보이질 않았다.

드디어 해변원목열 발견

목책이 윗부분은 사라졌지만

1200년을 그대로 있다는 건....산 역사의 또렷한 증거다.

아직도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중한 유적지의 목책이다.

 

 

:+:+:+:+:+:+:+:+:+:+:+:+:+:+:+:+:+:+:+:+:+:+:+:+:+:+:+:+:+:+:+:+:+:+:+:+:+:+:+:+

 

2011년 10월 14일 오후 2시 15분경의 목책

 지난 사진이지만

 

그 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물은 서서히 빠져 나가는 중이었고

그동안 장도 앞에 있는

장보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물은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갯길을 걸어 장도로 들어갔다.

처음 본 목책은 감동이었다.

방금 물이 빠져나간 목책에는 다슬기가...

방금 물에 씻기운 듯 깨끗한 목책을 볼 수 있었으니...

아마도 내리는 비 탓도 있었나보다.

 

 

 

 

 

 

 

 

 

 

 

 

 

 

 

 

:+:+:+:+:+:+:+:+:+:+:+:+:+:+:+:+:+:+:+:+:+:+:+:+:+:+:+:+:+:+:+:+:+:+:+:+:+:+:+:+

 

동남 치에서 바라 본 완도 바다 

.

.

다시

2012 3월13일 11시 30분 배를 타고 청산도로 이동

완도여객터미널에서 출발~

 

천연기념물 28호 [주도]를 뒤로하고....

사진에 보이는 배 옆으로 절반만 보이는 더벅머리 작은 섬이 주도이다.

다도해새상공원의 수많은 섬중에 상록활엽수림이 유난히 울창한 보고이다.

3,000여평에 소나무, 붉가시, 광나무, 황칠, 후박, 동백나무등 목초본류 137종이 서식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

 사진에 마주 보이는 저 곳 청산도까지

45분을 뱃길로 가야한다.

마침 바람도 없고 봄날씨처럼 따뜻하다.

 완도타워가 산 너머 보인다.

저 타워에 올라가니 완도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는데...

 

완도는 이젠 섬이 아니다. 완도대교가 놓이고 지금도 새로운 다리를 건설중에 있었다.

완도의 섬 청산도로 향해 .....뱃길로 달린다.

봄을 찾아 나선 남해안 여행길이다.

 

 

 

 

 

 

 

 

KTX가 개통되고 신경주역 문화재 전시관이 개관을 했다.

 

신경주역사 안에 박물관이 있다니...과연 천연고도 경주다운 생각이다.

신경주역을 거쳐가는 숱한 발길들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문화재를 보고 얫 선조들을 생활을 엿보게 하는 문화재박물관!!

 

덕천리의 철기, 청동기, 옥장신구, 방내리의 기와, 송선리 석기, 월산리 석기, 방내리 고분군의 토기~

다양한 문화재 발굴품들을 전시한 고도 경주의 문화재 뮤지엄!!

개인적으로 토기를 무척 좋아하나보다. 예전에는 토기도 수집, 꿈에도 흙을 파서 토기를 품에 안는 꿈만꿔도 며칠 기분이 좋았고

어렵게 구하거나 선물로 받으면 몇 달이든 배가 불렀던...그런 시절이...

.

모 목사님의 정령운운 하시는 바람에 나를 돌아보니 너무 칙칙하고 어둡고...괜한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뱁새가 황새를 쫓을 수도 없을 뿐더러....무소유가 소유려니.....손을 놓고나니 편안해졌다.

집안 분위기도 밝아졌다. 몇 개 안되는 곰팡내날 것 같은 물건도 모두 박스에 넣어 지하실행....한 점 두 점 사라지거나....

.

아주 초보지만 토기를 좋아하는 내겐 너무 좋은 눈요기다. 아니 호사다.

그냥 사진으로 담아와서 두고두고 볼 요량으로 블로그에 올려보며...

 

 

 

 

 

 

 

 

 

 

 

 

 

 

 

 

 

 

 

 

 

 

  

 

 

 

 

 

 

 

 

 

 

 

 

 

 

 

 

 

 

 

 

 

 

 

 

 

 

 

 '아수라'                                석굴암팔부중상's                                 '긴나라'   

 

 

신경주역 문화재 전시관   2011/11/01 뉴스 더보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KTX 신경주역 개통 1주년에 맞춰 1일 이곳 역 구내에 문화재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한국철도공사(사장 허준영)가 만든 이 전시관은 경부고속철도 경주 구간 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곳 가운데 신라 초창기 고분이 밀집한 덕천리 유적을 비롯한 6개 신라 관련 유적 발굴성과를 선보인다.

   덕천리 유적은 2006년 발굴조사 결과 200여 기에 달하는 초기 신라시대 목관묘ㆍ목곽묘ㆍ옹관묘가 확인됐고 청동 마형 대구(말모양 허리띠 버클)와 옥 장신구, 철제 무기류 등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전시관 내부 대형 유리 바닥 밑에는 덕천리에서 옮긴 목곽묘를 배치했으며 몽고 침략으로 소실된 황룡사를 디지털로 복원한 첨단 동영상을 상영한다.

   전시관을 설계한 시공테크 박세웅 과장은 "신경주역 문화재전시관은 국가 기간시설 건설 중에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되살려 사회에 환원한 선례로 기록될 것"이라며 "다른 유사한 공사 지역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문화시설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시관 운영은 경주에 기반을 둔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조사단이 맡는다.(2011/11/01)

 

 

 

서산에 도착하자마자 들렸던 곳이다.

가히 그런 비중을 두고도 남을 곳 임을 인정하듯  올라가는 길목은 좁고 가파르고....

그 좁은 산길에 秋色이 가득찼고....단체 관광객, 또는 학생들로 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를 보려고 비탈길이 미어졌다.

올라가는 길에는 그럭저럭 사람들이 많다 여겼는데, 갑자기 몰려온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어졌다.

겨우 오르는 줄 하나 내려가는 줄 하나....조심 조심 서로 비켜나며 길을 오르내렸다.

 

그 좁은 곳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기억밖에 없지만... 

대충 요약된 글을 시청 홈페이지에서 옮겨다 놨다.

문화재를 보호한답시고 건축물로 가렸다가 햇살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미소를 잃고는

급히 다시 해체했다고 한다.

자세히보니 지붕역활을 해주는 암석도 바로 불상위에 있더만.....

불상이라면 대개는 무게로 근엄한 표정이었는데,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덩달아 편안해지는 저 미소....

어디 어느곳에서 또 만나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어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지며 빛과의 조화에 의하여 진가를 보이도록한 백제인의 슬기가 놀랍습니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가여래입상은 머리 뒤의 보주형 광배와 미간의 백호공, 초생달 같은 눈썹, 미소짓는 그 입술은 매우 친근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현지대중교통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운산행 시내/시외버스(운산면 승강장에서 하차 후 시내버스 이용)
10~15분간격으로 운행되며, 30~40분 소요됨
자가운전
1.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 32번국도 → 운산 → 고풍리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2.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아산 → 예산 → 45번국도 → 덕산 → 운산(원평리) → 618번지방도 → 고풍리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논산을 대표하는 사찰!

어제 들린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불교에서, 일정한 교구의 본사(本寺)에 딸린 작은 절을 이르는 말)


충남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般若山)에 있는 절, 관촉사
초행길이다. 은진미륵불이야 가 보지 않아도 그 크기(18M)를 잘 알지만
크기가 대단하다는 은진미륵을 직접 보러간다니 그 궁금증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날은 비가 추적추적내리고 있었다.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은진미륵불의 본래 이름은 석조미륵보살상이라 한다.
은지미륵외에도 보물 제232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다는데...해탈문 석문의 묘한 매력에 빠져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해가며 나는 해탈이 아니라....해찰을 하고 있었다.

문화재자료 제79호  다른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사찰중문역활을 한다고 한다.

해탈문(석문)사이로 비치는 이쪽과 저 쪽의 경계가 뚜렷하다.

내 보기엔 이쪽도 저쪽도 ,,,다 아름답다.  이 석문을 드나드는 해찰을 지기느라.....해설사의 중요한 이야기는 다 놓쳐버렸다.

그치만 나는 아이들마냥 신났다.

은진미륵불 만나러 왔다가 작은 해탈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지금의 미련한 나처럼..... 

 

 

관촉사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에 있는 . 고려 광종 19년(968)에 혜명()이 창건한 것으로, 동양 최대의 석조 미륵보살 입상인 은진 미륵으로 유명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에 의해 창건될 때 조성된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名僧) 지안(智眼)이 와 예배했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법당은 1386년(우왕 12) 건립해 1581년(선조 14)과 1674년(현종 15)에 중수했으며 1735년(영조 11) 다시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관음전·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현충각 등의 당우가 남아 있으며, 석조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을 비롯해 사리탑·연화배례석·사적비 등이 있다.

 

 

 

윤장대안에는 경전들로 가득차서 윤장대를 한 번만 돌려도 그 경전을 다 읽은 것이다 여겼다.

그런데..윤장대를 배울 때 어디서 뭘 잘못 배웠는지 자꾸만 <윤판>이라고 한다. 이 글 쓴 다음부터는  절대 잘못 부르진 않겠지? (혼자만의 다짐)

은진미륵(보물 제218호)

상부와 하부로 나뉘는 조각, 어떻게 이 무거운 것을 올렸을까?

큰 고인돌 만드는 방식으로?  키는 18m에 귀만 3,3m 란다. 머리가 좀 커서 가분수같아 우수꽝스럽다지만...그 점으로 인해 자비가 더 돋보이는 것 아닐까?

하는 나만의 생각을 해본다.

 

 

 

 

석등 (보물 제232호)

 

 

 

석등 (보물 제232호)
은진미륵불 앞에 서있는 석등

미륵불의 크기나 규모에 맞추어 꽤나 큰 석등, 그 앞에 놓인 배례석충남 유형문화재로 지정 

아쉽게도 배례석을 미처 알아채지못하여 사진에는 없지만
예배, 즉 절을 하기 위한 곳에 둔 돌이라고 한다.
그 예배를 올리던 돌은 여러 가지 청정한 연꽃 무늬나 아름다운 구름송이와 같은 당초문을 새겨 넣었으며,

그것을 다른 말로는 배례석(拜禮石)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탑의 이름을 놓쳤다. 해탈문에서 해작노느라 막상 중요한 것을 놓쳤다.

이 탑이 사리탑인가?  석문처럼 마음을 쏙 끈다.

비스듬하게 서서 적당히 떨어져 나가기도 한 모습으로 서있는

벅수처럼  말도 없고 멋도 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속으로는 내밀한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을 것 같아보여~~

 

 

 

관촉사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041)735-4296

 

 

 

 

 

 

 

 

   유리창에 비친 인증샷

 

 

 

 

정면5칸 측면 3칸인 돈암서원의 학문을 연마하던 '응도당" (강당)

 

돈암서원은 조선 선조~인조 때 문신이었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인조 11년(1633)에 창건되고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서원으로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려준 서원이다. 논산평야를 배경으로 들파에 일정한 중심축이 없이 강당과 사당 재실 등이 꾸며져 있다. 재실뒤로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당의 담은 꽃담으로 잘 꾸며져 있다. 사계선생을 중심으로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네분을 모시고있다.

 

 

돈암서원중 특히 응도당은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의 강당인 응도당. 응도당은 보물 제156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눈썹지붕

풍판에다가 또 덧대어 눈썹처마를 덧붙인 것을 눈썹처마라 한다.
돈암서원 응도당에서 (맞배지붕)

양쪽으로 설치된 눈썹치마를 볼 수가 있다. (건축학적 가치) 

눈썹치마는 들이치는 비도 가리지만

누마루에 비치는 여름 햇살도 가려준다.(돈암서원)

 

 

풍판?

맛배지붕에서 볼 수 있는 풍판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설치.

 

고려시대 맞배지붕에는 풍판이 없는대신

양쪽 측면에 지붕을 좀 더 길게 빼어

즉 서까래를 밖으로 길게 내어 풍판역할을 대신 했다.

풍판은 맞배지붕에서 측면에 대는 비바람 막이 판이다. (용원서원)

얇고 긴 판재를 세로로 붙여대는데 사이사이는 졸대로 연결한다.

풍판은 주로 조선시대 등장하는데 이전건물은

 

측면부분의 지붕이 밖으로 많이 빠져 나와 있어서

어느 정도 비바람이 뿌리치는 것을 막아줄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목재의 부족으로 지붕을 많이 빼지 못해

건물측면을 비바람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편으로 풍판이 생겨나게 되었다.

풍판은 직선으로 혹은 곡선으로도 덧댄다.(경순왕릉)

 

 

.

 

 

응도당에 눈썹처마가 필요했던 이유? 

다음 스카이뷰에서 캡쳐한 돈암서원

응도당은 북쪽으로 난 건물이었다. 동과 서쪽으로는 문이 있었고

남쪽으로도 가운데 바라지창이 아예 틔워져 있다.

동서로 들어오는 여름 햇볕은 길고 귀찮다. 아마도 그래서 눈썹치마를 달아낸 게 아닌가 여겨진다.

,

,

돈암서원은

1880년에 지어진 것을 1971년 옮겨지었다는데... 돈암서원원정비에 보면

<현재의 건물들은 비문에 적혀있는 건물배치와 다르다.>

는 것을 감안할 때 이 건물의 위치는 정반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남쪽으로 바라보는 건물이었을 터이다.

즉 눈썹처마 동쪽이 서쪽, 지금의 서쪽 처마가  동쪽이었을거란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어느 누가 북풍을 마주하고 건물을 지었을까?

그런 궁금증이 생긴다.

 

 

 

응도당 주초석 소금기둥 

 

 

겹처마 주심포 건물로 지어진 응도당은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했고 누마루 안쪽은 모두 문을 달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응도당은 그 규모가 웅장하기 때문인가 모든 부재가 특이하다.
화강암으로 사용한 주초석  밑면은 네모나게 조성하고,  그 위를 원형으로 올리면서 위를 좁게 했다.
주초석안에는 나무기둥의 오랜 보존을 위해 소금을 넣어서 기둥을 세웠는데 아직도 그 소금 간끼가 올라와서 오랜 세월 뒤에도

아직도 그 흔적이 역력하고  손으로 만져서 입에 대어서 맛을 보면 아주 짠 맛이 그대로 난다.

 

 

 

 

 

  

돈암서원원정비

이 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때 물이 차므로 고종(17년)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는데, 

그 때 비석도 옮겨왔다. (크게 확대 click~) 

배롱나무(목백일홍)이 아름다운 돈암서원 

  

  

 

  

  

강학을 할 때는 3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는.. 

소수정예의 유학도를 양성 배출했나봅니다. 

돈암서원에는 상주하는 해설사가 주야로 4분이 번갈아 가며  봉사를 합니다.

 

 

주소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전화 041-736-0096
홈페이지 www.donamseowon.com

 

 

 

 

 

포스팅하기에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늘...참 좋은 포스팅을 늘 그저 넘어갈 수는 없고

이 무더운 날 아침부터 선풍기 끼고 앉아 백과 사전 글 그대로 옮겨놓더라도 글을 써봐야겠다.

 

요즘 밀폐공포증이 생겼는지 어쨌는지...

박물관이나 전시관 안에 들어가면 첫째 호흠이 불편하며 갑갑하다.

물론 절전으로 에어컨시설도 아주 미약하지만 갑자기 50명이 들어 간 공간은 훅 찌는 찜통이다.

그리고 만든지 얼마 안되는 박물관이나 전시관 깊숙한 곳은 숨쉬기에 여러가지 냄새와...알지못할 표현하지 못할

갑갑한 면이 없잖아 있어서 이 번 여행에서 박물관이나 전시관 설명은 하나도 따로 들은 게 없다.

여름이라 더 그렇고...인원이 더 많아 그럴 것이다.

해설사를 쫓아 다닐 수가 없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얼른 벗어나고 만다. 그러니 막상 글을 쓰려니 아는 게 너무나 없다.

글은 쓰지 않아도 되지만...이 여름 나는 스스로 정한 과제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여름을 날 것이다.

무령왕릉!!

내게는 참 어려운 미션이다.

역사선생님은 당숙과 친구로 너무 온유하셨다.

난 그 빌미로 늘 역사책 아래 소설책을 놓고는 지리한 선생님의 학습보다  아예....독서시간으로 바꿔버렸던 옛 시간을 후회하며....

그리고 옛 역사 수업은 정말 지리하고 재미없었다.

이제사 철 드나보다 (나만 그런가?)ㅎㅎ

 

아래 글들은 거의 검색글로 채워졌습니다.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지금도 아주 고가로 팔릴 것 같은 고급스런  이 문양의 벽돌들은

왕이 죽기 11년 전부터 512년 이미 굽고 있었다 한다.
묘에는 28가지의 벽돌 무늬가 있는데 연꽃무늬가 가장많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과 그 밑에 창문시설까지 설치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공간이다.
무덤방에는 5개의 감실(동감)이 설치되어 있는데 양쪽 벽에 두 개씩 그리고 북벽에 1개가 있다.

사진의 이 벽돌들은 왕능 고분군을 건설하면서 새로 구운 이미지 벽돌로

건물 통로 내부 장식을 한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그냥 아름다움을 감상만 하십시오!

 

 

 

왕의 유물

왕의 금제관식 (국보 154호)국보 154호 : 금제관식
국보 156호 :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국보 159호 : 금제뒤꽂이
국보 165호 : 족좌(발받침)
허리띠
신발
동제수저

 

왕비의 유물

왕비의 금제관식 (국보 155호)국보 155호 : 금제관식
국보 158호 : 금제경식
국보 160호 : 은제팔찌
국보 157호 : 금제수식부이식(귀걸이)
국보 164호 : 두침(베개)
두침(베개), 족좌(발받침)
다리미
신발

 

허리띠, 수문경

베개

목관의 모조품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나는 금송으로 밝혀졌으며,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금송은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목 과재는 수령 3백년 이상인 거목이었는데 금송은 키가 30미터 지름이 1미터 정도가 보통이다. 금송은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관재로 최고급으로 여겨지며 일본에서는 지배계층만 사용하였다. 왕의 관은 동쪽에 있고 왕비의 관은 안쪽, 즉 서쪽에 놓여 있었다.

 

무령왕릉 현실 단면의 '석수'

'석수'

석수 (국보 162호)널길의 입구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으며 재료는 응회암제이다. 뭉뚝한 입을 벌렸고 코는 크나 콧구멍은 없고 높은 콧등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고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불룩 튀어나온 긴 무늬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 융기 위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의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에 날개모양 갈기가 새겨져 있다. 출토 당시부터 오른쪽 뒷다리는 파손되어 있었다. 이 석수는 중국 한 대(漢代)이래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뜻으로 무덤내부 앞에 세우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국보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령왕릉의 구조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원형 구모양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무령왕은?

무령왕(武寧王, 461년 혹은 462년~523년, 재위: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무령왕릉의 지석에 따라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보인다.[1]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재위 20년, 나이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즉위와 전쟁
무령왕의 아우이자 전왕(前王)이었던 동성왕은 왕권전제화 시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병 백가를 위시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왕은 오히려 한솔 해명과 함께 502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4],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5] 507년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세력의 균형이 이룬 무령왕은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서해안으로 진출하였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였다.


[편집] 왕권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양서에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왕족을 지방통치에 이용하여 대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하였는데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귀족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편집]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 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즉위 6년에 왜에 이미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한편,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銅鏡)[6]을 하사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516년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편집] 붕어
62세에 붕어하여 무령왕릉에 묻혔으며 1971년 음력 7월 공주시의 송산리에서 이 능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며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영왕릉 현실 단면 (출토당시 재현) /실제 출토현장 모습▼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뮬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오수전(엽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고
지석뒤에는 석수(돌로만든 무덤지기)가 입구쪽을 향해 서 있었고
묘실의 관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장신구류와 수많은 부장유물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한다.

발견된 청자 등 중국 물품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대에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숱한 역사가 함께 묻힌 왕릉

1500여년 전 만들어진 왕릉이 1971년 발굴되어

40년이 지난  지금은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유적지가 되었다.

 

2011, 7, 06  다녀오다.  이요조

 

 

 

 

 

 

 

 

 

 

 

 

 

마곡사를 찾았습니다.

들어가는 길이 계곡을 끼고 시원합니다.

아름다운 입구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마곡사 경내에 도달했습니다.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절.

마곡사 /마곡사5층석탑(고려 후기, 보물 제799호,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로 현재 충청남도 70여 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마곡사를 아침 일찍 찾은터라...더구나 제겐 생소한 곳이고

문화해설사나 특별한 안내자가 없으니 완전 청맹과니 맞습니다.

출발하기 전 으례히 해설사가 있으려니 하고 예습 하나 안하고 맞닥뜨린 곳입니다.

경내에 들어왔지만 어디서 어떻게 돌아야 할지를 하나도 모르겠는 거 있지요?

마곡사 대웅보전과 대광보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도...

문화재정밀실측조사를 하고 있으며 방문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고 양해를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글이 씌였군요.

오층석탑은 중요한 문화재임이 분명하군요.,

일단 사진을 찍고 집으로 간 후, 검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마곡사5층석탑 (고려 후기), 보물 제799호,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탑. 보물 제799호. 높이 840cm. 1782년 대광보전 화재 때 많이 파괴되었으나 현재 화강암으로 보수되어 있으며 1972년 탑을 해체·보수할 때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특이한 상륜이 놓여 있는 구조로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안쪽으로 둥근 형태의 기둥이 1개씩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석(甲石)은 높고 폭이 넓은 편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며 상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높은 2단 굄이 있다. 탑신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석은 각 층마다 양쪽으로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로 1층 탑신의 남면에는 문비(門扉)와 자물통이 조각되어 있고, 2층의 각 면에는 불좌상 1구씩을 새겨 사방불(四方佛) 형식을 취했다. 2단받침의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며 처마 끝부분의 반전(反轉)이 심해 장식화 경향을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위에 풍마동(風磨銅)이라는 청동제로 된 부재가 놓여 있는데, 그 형태는 3층의 전각형 건축물 위에 원형의 복발(覆鉢)과 보주(寶珠)가 놓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륜부의 형식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중국 원대의 라마식 보탑과 유사하여 원나라와 문화적으로 교섭이 빈번했던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적어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점과 옥개석의 심한 반전 등에서 고려 후기 석탑의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차 한 잔을 앞에두고 생각에 잠긴 스님

 실례를 무릅쓰고 찍었다.

그림이 참 좋아보여서요. 아마도 차탁위가 복잡한 걸로 보아

손님들이 한 차례 몰려 간 뒤끝이라...심신을 갈아 앉히고 계시는 듯 보이는...스님의 명상!

돌담아래 봉숭아....바라만봐도 좋아요!!

 

 

마곡사심검당및고방(麻谷寺尋劍堂및庫房)

그냥 사다라가 아주 재미있어 찍어왔는데....중요한 자료군요!!

심검당을 보시고 아래 검색글을 읽어보시면...(검색글 참조)

 ▲직접 그 사다리를 올라가보니 의외의 안정감이 있었다.  내려올때도 좋고...

사다리 한 개를 수직으로 벽에 붙여 놓고 사용하는 것을 방송(티베트)에서 보았다.

....(이 사진은 동행의 블로그 사진에서 계단을 올라보는 나,)

 

 

고방과 같이 있는 심검당은 스님들이 거처인 요사채였는데

돌아나오는 길에 굴뚝의 형태가 특이해서 찍다.

 

마곡사심검당및고방(麻谷寺尋劍堂및庫房)

종별 충남 유형문화재 135호 
 소재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규모 심검당-정면6칸,측면4칸 고방-정면4칸,측면1칸  /지정일 1991-12-03 
 조성시기 신라시대 
 
   [문화재소개]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은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한벌의 기단(基壇)을 조성하고 덤벙 주초석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공포(拱包)는 간결한 양봉만 결구되어 있는 납도리 계통의 접으로 내부에는 우물천장이 가설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6칸•측면 4칸의 동향한 본채에서 북단 4칸, 남단 2칸을 동쪽으로 5칸씩 달아낸 형태이다. 또 남쪽 중간에는 사방 2칸을 달아내어 방과 마루를 들여 요사(寮舍)로 쓰고 있다.

심검당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고방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남향집으로 '一'자형 평면이지만 심검당 동쪽에 있다. 심검당의 앞마당을 막고 있으므로 심검당과 함께 보면 'ㅁ'자 집 배치가 된다. 마치 규모가 큰 조선 양반집과 같은 모습이다. 이 고방은 2층 구조인데 아래층은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룻바닥이며, 사괴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은 자연석인 둥글넓적한 주춧돌이다. 아래층 기둥은 둥그런 원주를 세우고 상층은 방주를 세워 일반적으로 중층 건물의 경우 위아래 기둥을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데 비하여 여기서는 아래, 위층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아래층의 문은 심검당 안마당 쪽으로 내고, 벽은 흙을 바른 심벽(心壁)으로 만들었으며, 위층의 벽은 나무로 막은 판벽이다. 이 고방도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본다.

 

마곡사심검당

 

종무소

 

 

대광보전

조금 이상한 점은 사찰 큰 마당에 들어서면 제일 크게 위치한 자리에 대웅전이 있는데

대광보전이 있다. 대웅보전은 대광보전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고 문화재 조사단의 가림막에 막혀

대웅보전은 못찍어 왔지만  대광보전의 아름다움에 홀려 정신을 놓았다는 게 옳다.

마곡사대광보전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 목조건물. 보물 제802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51년에 각순대사가 대웅보전과 함께 중건했으나 1782년 다시 소실된 것을 1788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평면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로 평방(平枋)을 두고 외3출목(外三出目)·내4출목(內四出目)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살미첨차는 3앙1수식(三仰一垂式)으로 앙서 위에는 연꽃 봉오리가 표현된 데 비해 뒷면에는 중첩된 교두(翹頭) 형태의 살미첨차가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는 무고주(無高柱)·1고주·2고주가 절충된 형식으로 공간구성이 특이하며, 우물마루의 바닥에는 갈참나무 껍질로 만든 자리를 깔아놓았다. 천장은 2단의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대량(大樑)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불단을 서쪽에 설치하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상 1구를 동쪽을 향해 앉힌 배치방법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문화재 조사단이 사용하는 공사장 계단같은 곳을 올라가서 퇴색한 단청을 찍고

고개를 돌려보니.....이 더위에 가림막뒤에서 이렇게 수고하면서

꼼꼼하게 문화재 정밀 실측조사를 하고 있었다.

정밀하게 자로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재고 기록하고....이렇게 까지 세심한 작업일 줄 몰랐던 사실이다.

대광보전을 받치고 있는 나무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광보전 부처님은  불단을 서쪽에 설치하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상 1구를 동쪽을 향해 앉힌 배치방법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영주, 부석사처럼 스님도 서쪽을 향해 계신다.

나무기둥도 도량을 많이 닦은 듯...영겁의 허물을 벗어내린다.

그저 좋다.

이런 걸 요즘 젊은이들은 엔틱이라 좋아들 하더라만.....유구한 숨결을 담아낸...

얼이 깃든 재목 옹이 하나 하나마다 역사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 듯 보인다.

대광보전은 목하 문화재 진단 중.....

 

경내를 흐르는 내가 있고...

내를 건느자....아름다운 사찰 풍경이 다시 펼쳐진다.

스님들의 선방인 수행처<태화선원>

첫 걸음에 이만큼 알았으면 족하다 싶어서 ...다은으로 또 기약하고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승려로 머물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98년 23세 청년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처단하고 붙잡히는데, 이후 과감히 탈옥해 마곡사에 들어오게 된다.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삭발을 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기 이전의 '열혈 청년 김구'의 고뇌와 상념을 함께 느껴보고 싶다면,

백범 김구선생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위해 일명'백범명상길'로 조성한 솔바람길도 있다는데

마곡사로 가는 길도 이렇게 좋은데...조성한 길이 어찌 이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고즈넉한 산사에 노송사이로 조성한 솔바람길이 이채롭다는데 가보지 못해서 아쉬움을 더한다.

http://www.magoksa.or.kr/

 

11' 7, 6 이 요조

 

 

 

 

 

연못가에서 바라본 윤증고택 전경. 사가 정원에 자리한 연못치고는 그 규모가 꽤 크다. 원래는 연못 주변으로 담장이 있고 솟을대문도 있었다는데,

그사이 다 무너지거나 소실되고 지금은 전체적으로 담장이나 경계물 없이 꽃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좀개구리밥이 연못 전체를 다 덮고 있다.

 

 

예정에도 없던 프로그램이다. 잠깐 부근에 있는 고택을 들러갈 것이라 한다.
名題도 헷갈렸다. 파평윤씨 문중 고택이라 해서 윤중고택인줄 알았다.
논산시에서 꼭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에 우리는 멋모르고 갔다가 눈도 마음도 카메라 렌즈마저 즐거워지는 살아 숨쉬는 고택을 만났다.

후손이 아직도 부지런하게 기거하고 있는 집이라 빈껍질이 아닌 윤기 반질반질한 아름다운 고택을 만났으니 아름다운 한옥을  피사체로 신들린 사람들처럼 우리 모두는 렌즈에 고택을 담느라 말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서 장에다가 깨끗히 빤 수건이 차곡히 놓여있고 치솔들이 있어도 그저 고택체험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 곳을 벗어나 육군항공학교 쯤 이르렀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3년 전인가 인터넷으로 논산 명재고택을 접하고는 가보고싶은 마음에 형제들에게 논산으로 가자고 전화까지 넣었다.
논산까지? 거기에 머시기 입영할 때 갔더니 아무것도 없던 걸....<아냐 그 게 아냐~~> 하며 반론을 제기하다가...

내 마음에 불만 지르다가 그냥 잿불 사그라들 듯,  그렇게 잊혀져 간 그 곳!   바로 몇 해 전만해도 간절히 가보고 싶었던 그 고택임을......

 

명재고택이 바로 윤증고택임을.....윤증선생의 호가 명재임을.....아!! 그렇게나 가고싶었던 곳을 돌아서서야 알아보다니,

그리운 이를 앞에 두고도 지나친 무심함~~ 그리웠던 님을 미처 못 알아채고  돌아선 마음이 이토록 쓰릴줄이야~~

 

 

 

 

 

▲ 사랑채로 가는 가운데 길과 안채로 들어가는 길(좌)이 나뉜다.

왼쪽 측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정면에 보이는 한 칸 높은 건물이 사랑채 누각. 

 

17세기 말 소론의 거두였던 명재 윤증(明齎 尹拯) 선생의 사가인 윤증고택. 조선시대 상류 양반 가정의 주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이 3백 살 가까운 고택에는 대를 이은 두 명의 종부가 한 편의 수묵화같이 깊고 단아한 풍경으로 살고 있었다.

 

논산명재고택은 조선 숙종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정의 표본이 되는 주택으로 안채는 ㄷ자형, 사랑채까지 포함된 구조는 ㅁ자형의 목조와즙단층건물이다. 안채 북쪽중앙의 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대청과 연결되어 뒷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대청의 서쪽에는 안방(2칸X1칸)과 웃방(1칸X1칸) 그리고 남쪽에는 넓은 부엌이 있고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대청 동쪽으로 건너방과 웃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사랑채 정면 4칸 측면2칸 규모에 2칸통의 대청과 누마루가 꾸며져 있고 중앙의 2간×2간 규모에는 온돌방을 만들고, 온돌방 뒤에 고방과 또 다른 방이 연결되어진다.
특징 안채의 ㄷ자와 행랑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등의 배치가 검소하고 품위가 있으며, 지붕틀의 특수한 형태는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고, 평면배치, 구조적인 연결, 창호의 처리는 기능성과 다양성이 있다.

 

명재 윤증 선생은 ‘백의정승’으로 불린다. 평생 과거 시험에도 응시하지 않고 벼슬길에도 나가지 않았으나 학문이 높아 세상에 알려지고, 열여덟 번이나 벼슬을 제안받았으나 끝끝내 마다했던 이력 탓이다. 선생을 시조로 모시는 파평 윤씨 노종파의 종갓집이 바로 윤증고택이다. 충남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 눈앞에 마주한 윤증고택은 생각보다 훨씬 단아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정진했던 학자의 고가다운 정갈한 기품이 느껴지는 외관이었다.

 

안채 대청에 앉아 바라지문을 다 열면 바라보일  뒷마당 장독대가 시골집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뒷마당에서 바라지문으로 대청 마루를 엿보다.

 

광채

안채 서쪽에 위치한 이 건축물은 전면 4칸과 측면 2칸의 규모로 안채(부엌) 쪽으로 출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 쪽에서 주로 사용함을 알 수 있고 각종 세간살이를 보관하는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도 마루가 있어 수납공간의 기능을 세간살이의 종류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공간의 가변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쪽 곳간채와 이루는 긴 통로, 지붕 처마가 비스듬하다.

그 이유는 남쪽의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해를 받아들이고

뒷쪽이 좁아지는 것은 북풍을 막고자 함이다. 광채와 부엌이 서늘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건축구조에 고개를 갸웃해서 바라보는 나....드나들 햇빛과 바람의 통로를 잘 알고 이렇게 지었다면 가히 깜짝 놀랄 일이다!!

분명 북쪽 길목 통로도 처마끝도 좁아지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보면 넓이가 반듯한 통로가 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그리고 찍힌 사진으로만....귀신 곡할 노릇이다.

해설사도 요즘 발견한 사실이라는데...도깨비통로?

모두들 신기해하며 걸어보고....렌즈에 담아보고...

종이함지박...집안 곳곳에 오래 된 물건들이 산재해있다.

 

안채

안마당은 널찍하고 반듯하며 정갈하다. ㄷ자형의 안채가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다.

기둥 사이의 간살이가 넓어 보인다. 편안하게 구조된 것이다.

 

 

바라지문으로 뒷마당 장독이 보이고.

좌우 도합 3개인 바라지문을 다 열면 한 여름 더위도 물러갈 대청마루!!

 

가운데 (우측을 향해있는 가운데 문)창살이 드러난 이 창을 불발기창이라 부른다.

 불발기창은 집에 따라 그 살대의 꾸밈이 다르다.

안채에서의 일품구조는 양명한 햇볕이 가득한 넓은 대청이다.

바라지창을 활짝열면 후원이 다가선다.

육간대청이라 하면 썩 넓은 대청을 의미한다. 이집 대청은 8칸이다. 육간보다 2칸이 더 많다.

우물정짜로 잘 짜여진 마루판!

 

 

 

 

▲그 유명한 간장 맛의 비결도 바로 이 샘물에서 비롯됐나 보다.

윤증선생댁의 첫 인상은 아무래도 정갈하게 놓여진 많은 항아리가 먼저 들어온다.

이 댁의 <전독간장>은 300여년간 항아리채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전독간장 이라 불려지고 노서(윤선거:명재의 부) 종가만의 전통법으로 전수되는 명품이란다.

교동(校東)이라고 불리는 별칭은 향교가 고택옆으로 이전하여 오면서 향교의 동쪽에있는 집이라서 얻은 것이며, 간장을 달이는 날에는 온 동네에 장 냄새가 진동을 하여 몸져 앓아 누워있는 환자도 교동댁의 간장 좀 먹었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로 간장의 명성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게  신빙성 가는 사실은 장단지가 많은 곳을 그렇게나 많이 드나들어도 장내의 특유한 짠내와 꼬릿한 냄새가 있는데, 이 댁만은 유독 달큰한 장맛이 느껴지는 곳은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도 모든 장을 담그는 내가 느끼기에도  장맛이 단 집!!  인정!

 

사랑채, 사랑으로 드나드는(좌측문) 우측공간

누각 내부. 사랑채 삼면이 창이라 문을 열면 더할 수 없이 바람이 시원하다

 

  여닫이 미닫이문 

여닫이 미닫이

경복궁인가 여닫이 미닫이가 있고 사가에서는 국내 유일한 자료라고 한다.

사랑방 아랫목 북쪽 뒷방으로 들어가는 샛장지이다.

만살창으로 만든 네 짝의 미닫이인데 가운데 두짝을 좌우로 밀어 끝의 짝에 겹치게하고 열면 여닫을 수 있다.

밀고 열고...또는 문 자체를 떼내기도 할 수 있는 다용도 문이다.

해설사가 서 있는 곳에  음식을 두면 문을 밀고 사랑안으로 옮기는데...상이 클 경우

문을 열기도 하고...또는 작은 단독의 공간이 필요할 때...문틀채로 떼내서 공간확보를 할 수가 있다고 한다.

 

.

 

그냥 재미로 찍은 사진 2장   左는 무슨 벌렌지 궁금하고....

右는 방충망에 붙인 엽전이다. 엽전을 붙이면 모기가 방충망에 드러붙지 않는 모양이다.

정성스럽게 꿰어 매달아 둔 정성을 보면....ㅎㅎㅎ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 ☎041-735-1215

*큰사랑 : 12만원
*작은사랑, 안사랑 : 각8만원
*작은사랑과 안사랑 : 15만원
*사랑채 전체(큰사랑,작은사랑,안사랑,누마루) : 40만원
*건너방(마루방포함) : 15만원
*초가(방2개, 단독화장실) : 15만원
*작은도서관(세미나 및 작은공연 가능, 방1개) : 30만원

 

 

 

종학당 시도유형문화재 제 152호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95-1

파평 윤씨 문중의 자녀와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이 모여 합숙교육을 받던 교육도장이다. 인조 21년(1643) 윤순거가 문중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후 종약(宗約)을 제정하였다.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가 1970년 윤정규가 지금의 종학당을 다시 지었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가운데 2x2칸은 대청을 겸한 트인 마루를 두었고 양쪽 칸은 방을 설치하였다. 1910년까지 운영된 종학당은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 ※(1999년 ~ 2003년) 4년여에 걸쳐 원형을 복원하고 주변정비를 하였다.

 

 

우리가 당도하였을 때는 글읽는 소리가 낭낭하였다.

집이 흥하려면 글읽는 소리와 애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된다는데....

 파평윤씨 자녀와 내외척 처가까지....가 아니고 요즘은 일반인들도 일주일씩 수강 신청을 할 수가 있다 한다.

환경이 이런 곳에서라면  여름 학당스테이로도 꽤 좋을 듯...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