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연곡리석비 (백비) 

 문화재 고려시대 비, 보물 404호, 충북 진천연곡리 소재.

 

 

 

백비/ 보탑사에 들렀을 때 만났던 문화유산이다.

백비로 유명하다는데...베를 세울 때는 분명 대단한 공덕비였나본데  아마도 무슨 잘못을 저질러 그런 형벌아 주어졌는지? 역사는 말이 없을 뿐.....

비를 바치고 있는 거북이의 머리 상단부를 칼로 두부를 자르듯 잘라낸 흔적과 비문의 글을 깨끗하게 닦은 듯 없는 걸로 보아 인위적으로 행한일임을 추측만 할 뿐...

3층목탑 특히나 정원이 아름다운 비구니승들의 보탑사를 가시면  정원 한 켠에 위치한 백비도 찾아보세요!!

 

 

 

 

 진천연곡리석비

지 정 : 보물 제404호(1964. 9. 3)
시 대 : 고려초기
규 모 : 높이 3.6m (전장) 높이 2.2m, 가로 0.8m, 세로 0.6m
재 료 : 석조 (화강암)
위 치 : 진천읍 연곡리 485-4


더욱이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404호인 백비(비문을 새기지 않은비)가 있는 곳으로 흥무대왕 김유신장군 탄생지와 태실, 만뢰산 산책로 등과 최근 진천군에서 조성한 생태공원까지 연결돼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거북받침(龜趺)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비머리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 불려 더욱 유명한 비석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얼굴면이 손상되어 말머리같이 되었으며 앞 발톱이 파손되었다. 등 무늬(龜甲紋)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주고 비몸을 받치는 받침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비머리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거북모양 받침돌의 머리 형태와 비의 규모에 비해 얇은 몸,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형태 등 고려 초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립 연대나 양식상 월광사 원랑선사비와 비교 되는 작품이다.

 

 

 

 이 비에는 글씨가 쓰여지지 않았으며, 또한 비의 주인공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처음부터 비문을 새기지 않은 것인지 지워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비머리에도 네모진 비의 이름을 쓰는 자리만 마련되어 있을 뿐 글씨는 없다.

받침부분은 비몸돌과 머리부분을 지탱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으로 거북머리의 모양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말(馬)의 머리에 더 가깝다. 비의 윗부분에는 아홉 마리의 용을 새겼다.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조각기법도 우수하다.

조형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석비로 추정된다.

 


 

 

 

 

 

 

명 칭 : 고성 송학동 고분군

구 분 : 사적 제 119호 (1963.1.21지정)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470번지 일원

 

“무덤 안이 온통 빨개요. 빨리 와봐요”

늦더위가 한창이던 2000년 8월27일. 일요일인데도 필자는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의 급박한 전화연락을 받았다. 긴급 발굴 지도위원회였다. 긴급 지도위는 ‘깜짝 놀랄 만한 발굴거리’가 생겼을 때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열리는 것. 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가뜩이나 1980년대부터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곳이 아닌가.

◇일출의 광채 같이 나타난 채색고분=필자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발굴현장으로 날아갔다. 현장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터널처럼 마련된 널길, 즉 연도를 따라 무덤방인 석실(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온통 붉은 빛이었다. 전등 불빛에 비친 무덤 내부 천장과 주변은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보이는 광채 같았다.

실로 발굴 인생 30여년에 처음 보는 채색고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채색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한다. 규슈지역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110여기의 무덤에서 확인된, 일본 특유의 무덤내부 장식이다.

“마치 일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요”. 심봉근 교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본 규슈대에 유학하여 일본 고고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의 채색고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채색고분이 이곳 고성에서 확인되다니.

남아있는 부장유물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가야는 물론 신라·백제 토기와 함께 일본의 토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 발굴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가야·신라·백제·왜 문화가 ‘총집합’한 고분=문제가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란으로 ‘민감했던’ 송학동 고분인데 느닷없는 채색고분 발견으로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열도에 보이는 채색고분이 왜 이 지역에 나타나느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야·백제·신라·일본계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발굴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나라에 유적답사차 나와 있던 일본 고고학 관련 연구자들이 일정을 바꿔 현장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그만큼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군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은 이같은 논란 속에 지난해 6월30일, 3차의 발굴조사를 끝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는 일단락됐다. 그 결과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쟁은 종식됐다.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방후원분’의 ‘후원(後圓)’으로 주장됐던 후원분의 위치에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양식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을 중심으로 모두 17기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방(前方)’부로 생각됐던 곳에는 바로 채색고분인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또 이들 무덤 사이에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종합하면 이 고성 송학동 제1호 고분은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등 3가지 무덤 형태가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그런 만큼 외형상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지,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가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형식이 모여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는 이 고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흥미롭다.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그렇다면 과연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일단 이 고분에서 가야·백제·신라는 물론 일본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고분의 ‘다국적’ 출토 유물에서 보듯 고성은 주변과 나아가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여기서 일본식으로 붉게 칠한 ‘굴식 돌방무덤’과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을 주목하자. 먼저 채색된 ‘굴식 돌방무덤’. 이 형태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장식고분의 한 유형임을 감안하자. 그렇다면 피장자 역시 일본과 연관있는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다음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 소가야는 서기 532년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발굴단은 바로 이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소가야 마지막 임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소가야는 가야연맹체 가운데서 해상 루트를 통해 신라·백제·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교류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결국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인 소가야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왕비가 채색고분인 ‘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 아닐까. 이른바 ‘부부묘의 개념’이다. 왜 일본식 채색고분(굴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보는가. 심봉근 교수는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고 밝혔다.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주변국가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만그라스는 4~5세기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지역의 고급 물건들이 교역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왕비는 왜에서 시집온 여인?”=뿐만 아니라 채색고분 안에서 유구열도(琉球列島·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조개인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수습된 것도 이러한 교역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무역상들의 상주지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고성이란 가야지역에 신라계·백제계·일본계 등 ‘다국적 유물’이 나타나고, 그와 함께 일반적인 가야묘제와는 다른 특수한 묘제가 마련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규슈지역 유력집단의 여성이 소가야 왕에 시집와 죽음으로써 마련된 묘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나서 고성에서는 옛 고성의 이름찾기운동 세미나가 열렸다. 즉 가야연맹체 가운데 ‘작은 가야’라는 뜻인 ‘소가야’라는 명칭은 유적발굴조사를 통해 봐서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소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서 5가야에 대한 설명 중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고성이 신라에 통합되고 나서 고자군(古自郡)이라고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란 표기가 있다. 따라서 소가야보다는 원래의 이름인 고자미동국, 또는 고자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유적발굴조사가 이루어지다 보면 이를 통해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등한시했던 고대사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하려는 새로운 노력의 한 형태라 할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heny1004.do?Redirect=Log&logNo=60005311873

 

고성은 가야시대 소가야지역으로서 이 고분군은 당시 정치적 세력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전방후원분으로서 논란이 되어왔던 제1호분을 중심으로 11개의 봉분이 형성되어 있으며, 가야시대 대표적인 축조방법인 수혈식 석실분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호분B 지구 고분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내부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국내최초로 확인된 채색고분이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신라,백제,일본,가야지역의 다양한 유물로 확인되고 있어 일본과의 관계 확인을 위한 고고학계의 중요한 연구자료로 가치가 높아 일본학계에서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 '99∼2000년 송학동 고분군 시굴 및 발국조사 경과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3개의 쌍분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 조사됨

출처 : http://www.gngs.net/sitemap/s-fram512.htm 

 

 

"장고형 고분, 그러니까 전방후원분은 어떤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 건가요?"
"원형(圓形)의 분구에 직사각형 또는 사각형 분구를 붙여놓은 평면형을 나타내는 무덤을 말하는 거지."
"저기 있는 제1호분이 한때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일었던 그 고분 아닌가요?"

국내 최초의 채색고분이라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으로 가는 차창에서 바라보는 남도의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아직도 단풍 빛이 울긋불긋하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 누가 스러져 가는 단풍 빛과 기세 등등하게 다가오는 동장군을 막아낼 수가 있으랴.

추수가 모두 끝난 텅 빈 들판. 한 아낙네가 방금 뽑은 듯한 싱싱한 무와 배추를 한아름 안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마에 연초록 빛 띠를 두른 채 성숙한 여인의 장단지처럼 통실하게 잘 자란 허연 무. 노란 속내를 행여나 누구에게 들킬까 봐 부끄러운 듯 동그랗게 말아 올린 배추. 어디로 가져가는 것일까.

빈 들판 위에 놓인 푸른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제법 떠 있다. 차창을 조금 열자 아까부터 씽씽 소리를 내며 버스를 뒤쫓아오던 싸늘한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 안으로 세차게 몰려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동행한 이선관 시인이 헛기침을 몇 번 내뱉는다. 추우니 얼른 차창을 닫으라는 신호다.

"강인구 교수는 장고형 고분의 원류가 우리나라라고 했다면서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에 대해서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지."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던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지난해 6월 30일, 3차 발굴조사에서 이 고분이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전방후원분)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판명됐어."

 
 
▲ 지상으로 돌출된 봉분은 모두 11기다 
 
ⓒ2003 이종찬

 

고성 송학동 고분군. 지방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송학동 고분군은 고성시외버스터미널 오른쪽 진주, 사천으로 가는 길목 50m쯤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가운데 제1호분을 중심으로 지상으로 돌출 된 봉분은 모두 11개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모두 17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고분군은 대부분 가야시대 대표적인 축조방법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발무덤)과 횡혈식(굴식 돌방무덤),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 석실분으로, 특히 1호분 B지구의 횡혈식 석실분은 국내 최초의 채색고분으로 내부가 아주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또한 다양하다. 가야는 물론 신라, 백제 토기에 이어 일본 토기까지 출토되었단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라고 한다. 또한 이 때문에 일본에서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올 정도로 이 고분군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내부가 붉은 색으로 채색된 채색고분은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으로 논란이 일었던 이 고분군에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채색고분은 주로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곳에 가야와 신라, 백제, 일본의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채색묘의 주인은 왜에서 시집 온 여인이다? 
 
ⓒ2003 이종찬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출토유물을 보면 6세기 전반에 해당되니까 그때 이 지역에서는 신라, 백제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류도 빈번했다고 볼 수가 있지.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공은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겠지."

송학동 고분군에 채색묘가 발견되면서 일어난 논란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심봉근 교수는 채색묘에서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 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면서 왕비가 왜에서 시집 온 여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채색묘에서 발굴된 유물이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있으나 이는 무역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방후원분도 결국 3∼4세기경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발굴조사결과 송학동 제1호 고분은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발무덤) 구조와 횡혈식(굴식 돌방무덤),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3개의 쌍분이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 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이 모여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가야지역에서는 고성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 제1호분 내부 
 
ⓒ2003 고성군
"그렇다면 수혈식 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인 소가야의 마지막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그 왕비가 뒤에 죽어 채색고분인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여튼 이 제1호분은 부부묘의 개념이니까. 하지만 무덤의 주인이 소가야 마지막 왕인지, 왕비가 일본에서 건너온 여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 않았어."

지금의 고성에 있었던 소가야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후 소가야는 삼국사기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소가야를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소가야가 아니라 '쇠가야'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건 왜요?"
"당시 이곳에서 쇠를 많이 생산했다는 기록에서 연유한 것이겠지. 하여튼 이곳 사람들은 소가야, 즉 '적은 가야'라는 이름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국가의 이름을 '적은 가야'라고 썼을 까닭이 없다는 거지."

 
한국사 미스터리](13)‘장고형 고분’(下)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上)편에서 밝혔듯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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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석불좌상

 

 

  백제 불교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부여정림사지 박물관에 들리고 오층석탑을 반드시 둘러 봐야만 한단다.
부여정림사지는 지금 발굴 중, 정림사가 아니라 정림사지라함은 절은 없고 빈터만 남아 있어서다.


정림사 박물관은  어린아이서 부터 어른가지 불교문화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시도했다.

퍼즐맞추기라든지 영상관이라든지 벽에 걸린 지도위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설명하는 브라운관이라든지 여러 형태의 디오라마라든지... 불교는 우리 민족들에게 스며든 역사가 하 오래되어선지 익숙하긴 하다.

백제 불교와,,,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불교의 경로는 중국이지만 길은 달랐다.

 

 

박물관은 불교를 이해하고 불교와 친숙해지는 공간이다. 

불교의 문양을 돌로 깍은 퍼즐로 이어맞추기 하며 그냥저냥 한 바퀴 잡담하며 둘러나와도 좋을 아주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보기에 아주 좋았다.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은 돌인데도 그 느낌은 부드럽다.

마치 낯 선 사람과의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낯설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6월 뜨거운 뙤약볕에 그늘을 벗어나기가 무서웠지만 오층석탑 뒤로 보이는 곳이 부쩍 궁금해졌다.

 

가까이 다가서자, 어떤 놀라움!!

천년의 세월을 견디다 못해 불타고 사라진 정림사지에서 찾아내어 조각을 맞추었다는 석불....

그 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왜 나는 한하운님의 시가 떠오르는 걸까? 坐佛이 아니라 다리가 문드러진 그런....욕되게도 그런 생각이 듦은 어쩔 수가 없다. 마침 하늘위로 새가 날아올랐다

한하운님의 파랑새?...........난, 백제의 불교지에 와서 천년역사를 가진 석불 깨어지고 문드러진 , 역시 님의 전라도길을 떠올렸다. 발가락이 빠진 게 아니라 무르팍이 다 닳아 없어진 형상이다.

 

어찌보면 돌하르방을 닮아있는 듯 해학적으로도 보이고, 아마도 시대적 불상을 대표하는 거겠지 생각한다.

불상은 민중을 닮는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대의 백성들이 이렇게 얼굴이 둥글고 평온하였지 싶다.

마침 누군가 수박 한 덩이 보시한 것이 사진상 그 크기를 가늠하기 쉽게 한다.

연좌대는 그런대로 모양이 살아있어 뭍사람들의 기도의 손길이 닿아서 반질반질 윤이났다.

 

파아란 하늘에 구름은 둥둥..흘러가고... 옛날의 흔적을 되찾으려도 오층석탑과 석불좌상은 아무 말이 없고

아직 발굴중인 정림사지 빈 공터엔 개망초꽃, 강아지풀 금계국이 바람에 흔들리며 피고 있었다.

 

글/이요조

 

 왼쪽 상공에 잡힌 새 한 마리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

 

*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건립시기 : 7세기 중반

 * 크기 : 현재 높이 8.8m

 * 국보 9호 

* 특징 : 백제 석탑의 정형화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석탑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좁고 얕은 단층 기단(基壇), 사각형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층 옥개석(屋蓋石)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등이 목조탑파(木造塔婆)의 구조와 비슷하며, 또한 이런 점이 특징이다.

제1탑신(塔身) 4면에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紀功文)이 있어 속칭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각부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부 수법은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이며, 전체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풍겨 후세에 모방품(模倣品)이 많이 나왔다.(검색)

 

   

목 윗부분은 찾을 수 없어 근세에 맞춰넣은 것이라 한다.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 (부여)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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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제가 처음 찾았을 때 그 때는 주민증을 맡겨놓고 들어가야하는 민통선 안에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열심히 먼-길을 달려갔는데도 여름날 긴긴 해가 아직 중천에 걸렸지 싶었는데 오후 4시가 넘었다며 출입을 허락해주지 않아 못내 안타까워하며 돌아섰던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늘....마음속 한 켠에 자리잡고 있던 아쉬운 곳, 그 곳을 지난해 여름 8월에 다녀왔지요.

차일피일 포스팅을 못하다가 우연히 임진강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을 흘러보다가  임진강 적벽 너머 고량포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기억해냈습니다.

 

 

왜?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엉뚱한 이 곳...예전으로 치자면 고려땅인 이 곳에 누워계실까?

의아했더랬습니다. 그 의구심 하나만으로도 여행의 목적, 더구나 문화유산기행의 키워드로 흥미를 충분히 유발시킵니다.

역사공부는 그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짚이지도 않아 달달외우기만 했을 뿐, 그닥 기억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 것들이 직접 다녀보고 이해를 하면 아득한 옛날,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찬란한 역사의 신라,  천년고도 경주를 두고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고량포.....인가 하나없는 민통선에 왕릉이라~

무척이나 궁금했더랬습니다. 세월은 흘러 10년 그 사이에 민통선 경계선이 조금 뒤로 물러나 앉아  이젠 자유로이 출입을 할 수야 있지만 엔간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가기가 무척 어려운 곳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한 이유중에 들겠지요. 

 

 

네비게이션도 잘 되지않는 곳이라, 적성 두지리, 두지삼거리에서 이정표에 의존하셔도 좋습니다.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강을 따라 가시면 민통선까지 가시면 됩니다. 물론 군데군데 경순왕릉 표지판도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입구 숲그늘 길을 200m도 못되게 걸어가면 왕능이 보입니다.

제 눈에 처음 들어 온 왕릉은 그다지 크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박해보였습니다.

경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곳에 묻힌 경순왕은 임진왜란 때 失傳되었다가 영조 3년에 발견 여러 해 뒤에 재정비를 했으나 육이오 동란당시 다시 실전되었다가 이 곳 육군장병에 발견되어 수차례의 정비를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합니다. 

참으로 살아 생전이나 사후 능으로나  하여간 혼돈의 세월을 겪은 셈입니다.

아직까지도 민통선 코 앞의 지뢰밭 한가운데 있으니 말입니다.  

 

 

비석에 무수히 나있는 탄환자국~

후백제 견훤에게 괴롭힘을 당하느니 신라의 백성을 생각해서 민심이 기울어지는 신흥 고려 왕건에게 선선히 나라를 물려준 뒤 왕좌에서 물러났다는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능이 그의 파란만장한 왕권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곳은 개인이 온다기보다는 단체로 많이 찾아오는 인기있는 문화관광지라고 합니다.

제가 처음 ..아니 두번째 제대로 방문한 날 역시나  서울 모 구청에서 대학생들이 주가되어 구청장님이 다녀갔는데....간단한 제례를 올렸는데 요즘 젊은이들 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문화해설사님, 기염을 토하십니다.

 

주차장에도 바리케이트에 매달려 있는 지뢰란 빨간 글씨들....

문화해설가님 등 뒤로도 지뢰란 글씨가 사적지 왕릉과 묘한 대비를 보입니다.

이번 봄, 5월에 다시 찾아간 경순왕릉을 되돌아 나오며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눈에 담아두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나라를 넘겨줘야하는 비통함,

경순왕의 운구를 경주로 되돌려 보낼 경우 흉흉할 민심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는 말로  죽어서도 고려땅에 묶어둔 이유로 사후에도  신라 경주로 되돌아 가지 못했던 말못할 유골의 애통함....

조금은 알 것도 같아 가슴이 싸아해졌습니다.

 

 

글/이요조 

 


 
지정번호  사적 제244호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長南面) 고량포리(高良浦里)
시대  고려 초기
크기  지정면적 3,967㎡. 높이 3m
종류  능
 
사적 제244호.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 고량포리(高良浦里) 소재. 지정면적 3,967m2. 높이 3m. 능 앞에는 단조로운 형식의 비가 있고, 그 전면에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간략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봉분 둘레와 능 주위에는 각각 호석(護石)과 곡장(曲墻)을 돌렸고,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경순왕릉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 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신라의 왕도인 경주 지역을 벗어나 타지역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망국 후에 조성된 때문인지 왕릉으로서는 매우 소박하다. /검색

 

 

 

 

 

 

능은 작고 소박하지만...그 경계는 그런대로 넓혀두었고 청정지역이라 제절로도 깨끗해보였다. 

잔디도 좋고,,,,이렇게 관리하기까지 연천군청의 손길임을......  

 

 

 

 

 

 

 

 

 

 

 

 

 

 

 

 

 

 

 

 

 

 

 

 

 

 

       고량포 역사기행   

  

  

  고량포를 찾아서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물 적벽을  흘러돌아  절경을 바라보다가  아쉽게도  고량포 여울목 가차이 가서는 그만 되돌아 나온다.

민통선에 가로막힌 것도 사실이지만  고량포 여울목에는 수심이 얕아  사람이 그 저 건너가게도 생겼단다.

멀리서 고량포를 바라보자니 흐끄므레한 그 모습이 바로 이 자갈마당이었나 보다.

이런 자연적인 자갈마당이 질편히 드러누웠으니 물턱이 생기고  낮고 좁아진 턱으로 통과하는 물살은 드쎄어서 여울목이라....

여울이란 이름은 그저 듣기에 어감은  예쁘지만  아서라~  당찬 물살이다.

사진에서도 그 여차없는 물길의 맥이 짚어진다.

 

 

그러나 어이없는 일은 며칠 전, 황포돛배안에서   마주 바라다보이는 고량포가  어드멘지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북쪽이라는 것만 알 뿐....바로 코앞이 민통선이고....경순왕릉이 있단다. 그제서야.....아!! 내가 가봤던 곳임을 알아차렸다.

블로그를 쓰기도 전에 경순왕릉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군 초소가 있었고  아직 해가 걸린 당낮인데도 출입이 허용된 시간을

지났노라는 말에 애써 달려간 길을 되돌린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경순왕릉을 지난 여름에야 찾아갈 수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라니~~

각종전파기기의 장애로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한 마리 벌처럼 귓속이 이명감으로 앵앵거려왔다.

<아 거기가 거기였구나~~~>  민통선안에 위치한 미수허목의 묘역도 주저치않고 통과시켜달라며 홀로 찾아 갔지 않은가?

 정 그렇다면 고량포를 당연 찾아가봐야지~~  생각한  곧  나흘 뒤 고량포를 다시 찾아들었다.

 

 

아는 것 만큼만 보인다고 했던가?  알고 난 뒤의 고량포는 새삼 느낌이 다르게 닿아온다.

개성이 가까우므로 개성에서 쓸 물자를 서울 마포나루를 위시 경기북부지역의 농산물을 이 곳 고량포까지 배로 실어 교역을 했던

곳이라 한다. 개성으로 보내는 물자가 부려지는 규모가 큰 나루로 전쟁 전 경기도 장단군이었고 그 당시 화신백화점이 있었으며

문산 인구의 3배가 넘는 번화한  곳으로 장단군 사람들은 개성으로 걸어다니거나 자건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개성에서도 자건거를 타고 고랑포로 놀러왔는데 1시간 가량 걸렸다고 한다.


 

물이 얕아서 고랑포 여울목으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 탱크부대가 건넜고 1968년 북한 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건너왔던 곳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량포에서 1km더 가면 북한공비들이 침투한 장소라고 이정표를 보고 더 깊숙히 들어갔으나....

이런~ 정말 민간인 출입금지의 바리케이트가 민통선임을 실감케했다.

차를 되돌려 나오는 길에 보이는 팻말이 <지뢰조심> 이란다,  머리끝이 쭈뼛서는 살벌함....아직 이 곳은 전쟁터다.

그리고 보니 여기저기 강둑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길은 바리케이트가 쳐져있고 계속 <지뢰> 표시가 되어있다.

 

 

개성이 가차운고로 학자들과 문사들이 즐겨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는 곳,

황진이가 부운거사 김경원이를 눈물지으며 그리워했다는 ........바로 이 곳! 임진강!

개성 송악산이 눈앞에 바로 보이는데, 민통선에 가로막혀 물길 타고 흘러보지 못하는.....연결될 수 없는 두지나루와  임진나루~~

언제쯤이면 임진강은  철조망에서 풀려나 적벽루 아래를 거침없이 오가며 풍류를 즐기는 묵객들이 노닐까?

그래 ...단 두마디의 말, 자유!! 

묵묵히 서있는 저, 적벽도  침묵의 강물도  시퍼런  자유의 염원을 恨으로 품고  흐르고 있을 터!

아~ 애달퍼라~~


 

5월의 임진강은 너무 화창한날이어선지 되레 뿌우옇다.

 

마음같아서는 바지가랑이 듬성듬성 걷어붙인 남편 등을 떠다밀어 투망이라도 던지라고 해볼까? 

 

남쪽으로 내려오던 강물이 북쪽으로 휘어져 흐른다. 자유로를 지나 다시 남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영화를 찍어도 좋을 장소같은 곳....

나룻배를 타고 님을 떠나보내는 눈물바람의  별리의 장소로도 어울릴 것 같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풍광이다. 

이 곳이 철조망으로 묶인지 어느덧 56년이 흘렀다니....왜 아니 그럴까......

이 곳은 56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이다. 

 

 

나도 치마끝 뱅뱅 싸잡아 돌려 속옷에 질러넣고 강물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꼬물거리는 다슬기가 연신 잡힐 것만 같다.

 

고량포구에 다다랐다.

 

고량포구는 철책으로 굳게 닫겨있었다.
민간인 출입을 금한다는 빨간 글씨의 경고판이 터억 가로막는다.

 

 

황포돛배안에 걸린 번성했던 고량포구의 옛사진

 

대신 아쉬운 맘 달래라고 고량포구를 조망할 수있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詩碑가 서있고... 

 

시비의 전문을 읽자니....(성원경詩)

'내 고향은 장단 고량포외다. 달밝은 밤일랑 징개미 춤추었고 비에젖은 날이면 자라 덩실 노닐었소

봄이면 장구채, 삘기,찔레, 싱아먹고....~~~어이타 인가없는 휴전선이 웬말이오!

 

오른쪽  고량포, 적벽이 보인다.

 

와글와글...지금이라도 옛사람들의 자취가 눈에 밟히는 듯.....환청이라도 들려 올 듯 한 이 곳!
왁자지껄 분산했을 고량포구의 죽은 듯....고즈넉함이 웬 말인지.....

 

고량포구의 옛모습

 예전 고량포구에는

학교가 있고  문방구가 있고 우체국지소, 화신백화점,변전소,금융조합, 곡물검사소, 우전시장, 여관, 시계포 등이 있어서 번화하던 곳~

 

가까이 다가가니....더 보이질 않는다.

 

바로 이 곳이 어림잡아 시계포가 있던 저잣거리일테다. 그 오른쪽이 화신백화점이 있던 장소일테고.

오른쪽 2~3시 방향으로 들어가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이 있다.

신라의 왕이 왜 이 곳에 ? 라는 질문이 생기지만 다음글로 미루기로 하고~~

 

북한공비가 바로 침투했다는 곳....

고량포에서 1km를 더 들어가자니 바리케이트가 앞을 처억가로막네요.
 차를 돌리려는데....그제사 눈에 보이는 <지뢰>란 글자들~~

 

산나물,지뢰....지뢰...산나물....산나물이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다는...지뢰, 지뢰밭이란다......

지금 이곳은 전쟁중!!!

돌아 나오다가 먼-눈으로 홀깃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강!  우리나라 7대강중의 하나인 임진강~~

 

고량포, 묻혀버린 역사속으로....다가가보니

철조망에 갇혀버린 고량포  적벽만이  임진강 여울목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다음글/경순왕릉

 

 

아산에 있는 공세리 성당입니다.

카톨릭과는 무관한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저 아름답다는 표현외에는....이 아름다운 뜰에서 어찌 사랑이...신앙이 깊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0년 전에 지은 건물이라는데...이렇듯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신앙심 아래 결속된 노동의 기도가 아니고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이룰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지금은 박물관으로 봉헌된 건물은 예전에는 사제관으로 쓰였다는데, 예전 사제관의 생활은 일부 생활을 도우는 여성들과의 접촉을 꺼려

도르레를 사용 이층에서 생필품을 전달받았던 디오라마로 재현되어 있더군요. (카메라 사용은 불가구요)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있어 순례객들의 발길이 아어지고 있었지요. 맨 아래 그림에 두 팔을 벌리고 서 계신 예수님 상이

서있는 곳이 바로 피정의 집입니다.

 

 

공세리 성지 성당은 근대 교회 건축 가운데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7월28일 도지정 문화재 144호로 지정되어 연간 20만명 이상의 내,외국인들이
찾는 천주교 성지이며 관광명소입니다.
교회사적으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1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조선 성종 9년부터 중종 18년까지 공세곶 창고지였으며 , 건축학적으로 근대 고딕식
조적조 종교건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순교성지입니다.

 

이곳에서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보수하여 2008년 9월6일에 박물관으로 봉헌하였습니다.

-공세리성당 홈페이지발췌문-

 

 아산시 안주면 공세리 194 ☎ (041) 533-8181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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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의 유규한 역사를 간직한 고려말 옛살림집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한 아산의 맹씨행단을 찾았다.

조선 세종 때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1360~1438)이 살았던 집이다.  

맹씨 고택은 아늑하고 옛정취가 물씬 나는 곳에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었다.

맹씨 고택을 처음 접한 순간, 여태껏 보지 못했던 구조를 지닌 게 특이해보였다.

 

 맹씨고택은 독특한 고려식 건물로  대청이 한 가운데 두칸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이 한 칸씩 있으며 공(工)자형 맞배지붕이 특징이다. 

工자형 건축물이 얼른 와닿지 않는다면 H형 건축물이라고 바꿔말하면 우선 나 부터라도  이해도가 더 빠르기도 하다.

 

아산 맹씨행단이 잘못 전달되면 아산맹씨로 착각하게 된다. 아산은 지명이고 맹씨행단은 문화재명이다.

신창맹씨의 고택으로 가옥은 원래 고려말 최영(1316~1388)장군의 부친이 지어서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맹사성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한 기지를

지켜본 최영이 그를 손서(손녀사위)로 삼고 집을 물려주었다 한다.

 

행단이라는 말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행단(杏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나 후학에게 글을 가르치며 공부하던 자리의 의미이기도 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년 된 은행나무

 

 

아래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 살림집 맹씨 고택(孟氏 古宅)이다.

 

맹씨고택은 독특한 고려식 건물로  대청이 한 가운데 두칸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이 한 칸씩 있으며 공(공)자형 맞배지붕이 특징이다.

 

 

 

 

 

 기둥과 도리사이에는단포가 용의 혀로 장식되어있다.

 

 

댓돌을 따로 두지 않고 전체적으로 한 칸 올려서 드나들기 편하게  낮게 만들었다.

아궁이와 방구들의 높이가 얼마잇지 않아서 장작같은 직화로는 ..조금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구들이 그리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검색글에서 읽었다.

아마도 가축의 분뇨같은 것으로 난방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들게 한다. 

방에서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정겨웁다.

 

 

공(工)자형  측면 드나드는 용도는 아닌 바람맞이 여닫는 봉창인듯 하다.

 

  

 양쪽에 하나씩 있는 방의 아궁이가 연결된 두 개의 굴뚝모습

 

 

 

측면에서 본...좌우를 자른 이 그림만 보면 흡사 팔작지붕 모습을 하고있다.

 

 

 

 

눈여겨 보면 

아궁이가 여느집처럼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하면서 군불을 넣는 방식이 아니다. 

부엌과 화장실이 모두 별채로 따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특이할만한 점이다.

하루이틀이면 몰라도....요즘 주부들이라면 그 동선(動線)에 다들  두려워 할 거리다.

비바람치거나 눈이 온 날은 식사를 어떻게 준비했을까? 

 

 맹씨고택 배면과 굴뚝

 

 

 

 

 

맹씨행단 사당인 세덕사(世德祠)

 

 

 맹씨고택 뒤안에 있는 세덕사의 아름다움

 

 

사당, 세덕사 입구에는

조팝나무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세덕사를 둘러보고 나오자 입구에 있는 이 건물은 맹씨행단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불 맹사성의 유물들을 전시해두었는데, 옥으로 다듬어 만든 피리 옥적

정교한 장식의 비녀 수정죽절비녀 ,채석포도문일월연 인 자색벼루, 옥으로 만든 사각형의 도장 백옥방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 (041)546-3027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이순신이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지냈던 외가다.

옛날에는 대체로 처가에서 사는 게 지금처럼 흉은 아니었나보다.

신사임당은 이율곡을 친정 강릉에서 양육했고 .....아산의 맹씨고택도 최영장군도 손서 맹사성에게 살던 집을 물려준 것을 보면...

물론 이순신의 친가가 가난해서 이 곳 외가로 와서 자랐다고는 되어있지만...요즘과는 달리 대체로 외가의 성장이 흔했나 보다.

장군이 마시던 우물도 있고 무과에 급제하기 전 연습하던 활터도 있고 그의 아들 이면과 그의 장인 장모의 묘소도 있는데,

이 문화재가 경매에 붙여지다니......참으로 어이상실이다. 네티즌들의 모진 입방아로 이슈화되고도 남겠다.

 

사실이지 문화재 500m이내에는 사유재산이라 할지라도 증개축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하자면

응찰자도 없어 번번이 유찰되는 건 따논 당상,

현충사내의 이충무공의 고택이 설령 사유재산으로 그 권리권을 행사하기란 요원하다.

 

하지만....이 게 무슨 날벼락인지, 숭례문을 태워먹고도 모자라서 이젠 문화재 경매라니~

그러나 사실인즉슨

국가지정문화재라도 국가가 사들이지 않은 '사유지'의 경우 소유권자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지 '경매 대상'이 될 수 있단다.

몰라서 그렇지 한 두 번의 일이 아니라...그런 일이 간간이 있어왔다 한다.

그래도 현충사내에 있는 이순신의 고택은, 아니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살아있는 성웅, 이순신은 그 느낌부터가 좀 남다르지 않은가?

아마도 문화재청 아니면 아산시에서라도 입찰을 볼 것이라 한다.

5월28일 충무공탄신일전에 무슨 좋은 전언이 있으리라고 가늠된다.

 

 

 

 

 응찰자가 있다면 당연히 국가에 환수해야한다고들 말하지만

누가 응찰하려들까? 사우지로는 아무런 행사조차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인 것을

 

 

 어라~ 이상하다.

집안마당이 바뀌었다. 이런....누가 이런 짓을....

 

 마당에다 씨멘트를 깔았다.

대체 누군가? 차라리 돌을 군데 군데 깔아 옛정취를 돋구면 몰라도

요즘 일반 주택에서도 잘 하지않는 시멘트마당을....

아마도 보리훓어서 도리깨질하는 농가로 착각했나보다.

도대체...어떤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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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새해 방문했을 때,

사진 몇 장 비교하자면

 

 

 마당은 이랬었다.

눈녹아 낙숫물이 떨어져 홈이 패여나고..그런대로 좋았다.

차라리 흙마당 그대로 두지....

아니면 디딤돌 듬성한 잔디마당을 하든가...

 

 

수령 5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는 이순신장군의 어릴적 모습을 알고 있으리라~~

아들 '이 면'의 묘와 장인장모의 묘가 있는 곳이다.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맹연습 하였던 장군의 활터

 

 

 붉은 명자꽃이

아픈 듯...붉게 떨어져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은 채 현충사를 돌아나오는 길,

벚꽃이파리....하르르르.....

길 위에  나뒹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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