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 목 보물  제592호
    명 칭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고본
    수량/면적 3종12책
    지 정 일 1975.05.16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립중앙박물관
    관 리 자 국립중앙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유물을 보면『동해비첩』1책,『금석운부』2책, 『고문운부』9책으로 총 3종 12책이다. 이것들은 모두 허목의 대표적 전서체 작품들로서 그의 필체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인 허목(1595~1682)의 자필고본.
    허목 /허목수고본(17세기), 〈고문운부〉에서, 보물 제592호, ...

    보물 제592호. 3종 12책. 선진(先秦)의 전서(篆書)를 통해 문과의 본원을 회복하고 회화성이 강한 상형미와 창고미(蒼古美)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허목의 서예세계와 특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해비첩 東海碑帖〉(세로 50cm, 가로 32.7cm) 1책은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한 이듬해인 1661년에 동해송을 짓고 고문자로 쓴 동해비의 저고본(底稿本)으로, 그의 대표적인 전서체 작품으로 꼽힌다. 〈금석운부 金石韻府〉(세로 34.5cm, 가로 22cm) 2책은 금석에 나타난 전서를 모아 꾸민 자전이다. 〈고문운부 古文韻府〉(세로 24.5cm, 가로 22.7cm) 9책은 금석을 비롯한 각종 고문을 모은 전서의 자전으로 사성별(四聲別)로 순서를 정한 뒤 각 글자마다 정서체를 쓰고 그 다음에 각 체의 전서를 썼다. 여러 종류의 전서체가 망라되어 있어 허목의 고문수집 성격과 함께 그의 전서연구에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허혁(許)이 소장하고 있다.

     

     척추 동해비- 허목선생

     

     

     

    허목 동해비첩

     

    종    목 보물  제592-1호
    명     칭 동해비첩(東海碑帖)
    분     류 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 1책
    지 정 일 1975.05.16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종    목 보물  제592-2호
    명     칭 금석운부(金石韻府)
    분     류 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 2책
    지 정 일 1975.05.16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일반설명 | 전문설명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옛 금석문에 나타난 전서를 총망라하여 만든 전서자전으로, 석판으로 영인간행된 적이 있다. 크기는 가로 22.7㎝, 세로 34.5㎝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고문운부

     

     

    종    목 보물  제592-3호
    명     칭 고문운부(古文韻府)
    분     류 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 9책
    지 정 일 1975.05.16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옛 문헌 및 금석에 나타난 옛 전서문을 운별로 정리하여 먼저 해서를 쓰고 다음에 각 체의 고문과 전을 기입한 고문자전이다.『금석운부』는 금석자료에 한정되었으나 이 책은 고문헌까지 망라하였으므로, 내용이 더욱 방대하다. 크기는 가로 22.7㎝, 세로 34.5㎝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1.   서   론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산정에 있는 높이 175㎝,  넓이 76㎝, 두께 23㎝의 큰 비석으로서 조선 현종 때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인 미수(眉수) 허목(許穆 : 1595∼1682)선생이 세운 비석이다. 1660년(현종 원년)에 허목이 삼척 부사로 부임할 당시, 동해에는 조석간만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다. 조수가 삼척 시내까지 올라와 여름철 홍수 때는 강하구가 막히고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창적인 전서체로 써서 1661년<을축> 3월 정라진(汀羅津)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 지고,거친 풍랑도 이 신비로운 문장의 위력에 감동되어 그 후로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원래의 비는 1707년, 풍랑에 파손되어, 1709년에 재차 건립한 것이 지금의 비이다.

    비 전면

    본고에서는 허미수 전서가 조선 중기 서예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동 비문을 풀이해본다.


    2.  허 목 의  생 애

    허목 (1595∼1682 선조 28∼숙종 8)은 경기도 연천출신으로서   본관은 양천, 호는 미수(眉수),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허목 영정

    29세 때인 1624년(인조2) 광주(廣州)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정진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3. 비 의 내 력

         비의 전면과 측면 

    허목은 1660년 10월부터 2년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조수가 들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하자 '퇴조비'를 세웠다. 훌륭한 목민관(牧民官) 치적의 일환으로 척주동해비가 탄생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한퇴지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한 고사를 따라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비를 세우니, 과연 그  날부터 조수의 환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이 것이 이 비를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글은 허목 자신이 지었으며 비제(碑題)와 본문을 모두 허목 독특한 고전(古篆)으로 썼다. 비제(碑題)인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본문은 판독이 쉽지 않은 과두문자이다. 본문은 그의 문집, 기타에 수록되어 있는 매우 유명한 문장으로서, 실상 200여 글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와 함께 대단히 유명하다

    <일화1> 허목은 다시 같은 문자의 비를 별도로 만들고 죽서루(竹西樓) 밑에 몰래 묻은 다음, 소리( 少吏)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때가 되면, 서인(西人) 수재(守宰)로, 나와 원수간에 있던 자가 와서 이 비를 파쇄할 것이오. 그렇게 된 즉, 조환( 潮患)이 여전하겠기에 네게 별도의 비석 뭍은 곳을 알려 주는 것이니 너는 명심코 누설치 말라"하였다 한다. 뒷날 이 말이 과연적중하여 다시 퇴조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다시 세운 비가 곧 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라는 것이다.

    <일화2> 퇴조비를 세운지 49년이 지난 숙종36년(1710년), 새로 부임한 부사, 박래정(朴來貞)이 이 비석의 영험함을 전해듣고, 미신이라며 철거해 버렸다. 그후 다시 해일이 일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박 부사가 근심에 쌓여있었다.

    비의 후면

    나이 많은 통인이 아뢰기를, 허미수 전 부사께서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때 가장 나이 어린 저에게 당부를 하고 임지를 떠나셨습니다. "장차 퇴조비에 이상이 있거든 동헌 마루 밑에 퇴조비 하나를 묻어 두었으니 쓰도록 하라"   박부사가 동헌마루를 파보니 과연 퇴조비가 묻혀 있었다. 이에 잘못을 뉘우치고 퇴조비를 다시 세우고 나니 해일이 멎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퇴조비를 수화불침(水火不侵)의 영물로 여기고 재앙을 막기 위해 소장하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석의 내력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구전설화에 불과하며, 비석의 측면에 각한 추기(追記)에 따르면, 재차 비를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다만, 대자(大字)로 된 구본과 소자(小字)로 된 신본에 관한 이야기만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으로 본다면 신비(新碑)를 새긴 연대는 1709년(肅宗 35)임이 분명하다.

    아래의 문장이 측면에 해서로 쓰여진 추기인데, 이에 의하면 비석은 당초   정라도에 세웠으나(1661년), 풍랑으로 파손되어 바다 속에 잠겼으므로(1707년),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써 주어, 비석 앞 면의 큰 글자는 구본(舊本,즉 원래 비의 탁본)으로 사용하고, 뒷면의 작은 글자는 신본(新本)을 사용하여,숙종 35년(1709년)에  재차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1710년) 것으로 풀이가 된다.

    육향산정의 비각 <1961년에 이 자리로 옮겼다>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澈沈 先生聞而 改書 今 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 上之三五年乙丑春三月也>
    현종 2년 선생이 이 곳에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짓고 써,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물 속으로 잠기니,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주었다. 이제 신,구의 두 가지를 참고하여,"척주동해비"라는 큰 글자는 구본<옛 비석의 탁본을 말하는 듯함>을 사용하고,작은 글자인 비문은 신본을 써서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다.  때는 숙종 35년 을축년 봄 3월이노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허목은 1682년에 사망하였으므로, 1709년에 다시 비문을 써준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1708년 비석이 부서져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문생(門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한 것을, 1709년 2월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지금의 육향산) 동쪽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는 김구용의 [척주지](1848) 내용이 옳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先生聞而 改書" 부분의 풀이가 명확치 못하다. 또한 미수 재임시 비의 파손으로 재차 건립하였었다는 설도 있으나, 학술적으로 좀더 전문성이 있어야 확인되겠는데, 여하튼 이 비는 이렇게 세월을 맞이해오다가, 세워져있는 위치가 음지인 관계로 훼손의 여지가 많아, 유지들의 건의에 따라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으로 다시 이전 준공하였고,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니, 동일한 비가 두 번씩이나 제조되고, 장소는 3군데나 옮겨다니는 진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비문을 지니고 있으면 재액이 물러가며,가정에 안녕과 번창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 허목 후손의 댁에 소자(小字)로 씌여진 고본(稿本)이 전하고 있다.

    4. 조선 중기서예의 흐름과 허목의 전서

     (1) 17세기 중국의 전서

    일반적으로 전서의 입문은 금문(金文),대전(大篆)을 거쳐, 진(秦. BC221-205)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그 전범(典範)으로 하고, 당나라 이양빙(李陽氷)의 전법(篆法)을 거치는 것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허신과 이양빙의 연대 차이는 약 900년 정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도판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양빙의 삼분기(三墳記)는 옥조전(玉조篆)이라는 전서로서, 운필(運筆)이나 결구(結構)에서 설문해자와 큰 차이가 없다. 이는 허신 이후 당(唐) 중기까지 전서의 변화가 많지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양빙 이후 약 1,000년이 경과한 17세기경 청(淸)에서 주로 쓰여진 전서 역시, 이양빙의 전서와 비교하여 차이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전서는 서체가  실용성이  적어, 쓰임새가 많지않다보니 자연히 연구가 활발치 못하게 되므로서 빚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 비액이나 인장등 극히 한정적인 용도에만 사용되어,폭넓은 변환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唐 李陽氷의 三墳記碑(762년)

    이후 약 100년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다가 , 등석여(鄧石如 1739-1805)가 출현하여 일신된 전법(篆法)을 제시하면서, 이후 서령8가(西령8가)등 여러 전각가와 오창석(吳昌碩),등산목(鄧散木),제백석(齊白石)등 전서,전각의 대가들이 출현하여 중국 금속예술의 꽃을 피우지만, 그렇게되기 전, 17세기 초중반의 전서는 그 모양이 단아하고 정돈된 세련미를 특징으로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예술성을 추가하지 못하므로서, 행서나 기타 서체의 발달에 비한다면 정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암(李암)의
    문수사장경비전액(文殊寺藏經碑篆額)(1327)
     

    (2) 조선중기의 전서   

    이렇듯,당 이후 송,명,청에 이르기까지 전서의 답보적 상태는 조선 중기 우리 서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중국과의 교류에 의해서 행서 위주의 변화는 꾸준하였으나, 전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워낙 부족하고,또한 좋은 교재를 입수하기가 어려웠던 때문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였다.

    금석학의 중국 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조선으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조선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1953)이 전서와 전각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니, 조선에 전서 명가는 있었어도 명품은 없다시피한 것은 이러함에 기인한다.

    조선 중기의 전서는 여말이나 선초의 전서와 크게 변화없이 소전(小篆)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주로 행서와 초서가 쓰여지던 시대였다. 고려말 조맹부(趙孟부)의 영향을 받아 소위 송설체(松雪體)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 초의 서풍은 다시금 왕희지(王羲之)풍으로 복고하면서 사자관(寫字官)   한호(韓濩 1543 - 1605 )의 서풍이 조선 전역에 큰 흐름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국을 풍미하는 행서 일변도의 서풍에 상대적으로 해서,예서는 그 중요도가 떨어지게되었으며, 그 중 전서는 현상이 더욱 심하여,  비액을 쓰거나 인장을 새기는 경우등을 제외하면 그 쓰여지는 예가 극히 드믈었다.

    이렇게 빈곤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전서가 명맥만은 유지하고 있었으니, 대표적인 서가로는 김상용(金尙容 1561- 1637), 김수환(金壽恒.1629-1689), 이정영(李正英,1616-1686), 김진홍(1621-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김상용은 대전과 소전을 두루 갖추어 굵은 획으로 비액(碑額)을 많이 썼는데, 특히 평양에 있는 숭인전비(崇仁殿碑) 두액(頭額)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정영 역시 엄정한 소전풍으로 전서를 썼으며, 미수의 고전(古篆)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다.

    篆韻(전운)이란 전자운서(篆字韻書)를 지은 신여탁(申汝擢),삼전도비 전액을 쓴 여이징(呂爾徵),전문자관(篆文字官)으로서 전자편람(篆字便覽)을  펴낸 경유겸(景惟謙)등도 전서를 잘 썼다.

    송계(松溪) 김진흥(金振興. 1621-   )은 전대학(篆大學)이란 학습서와 전자운서(篆字韻書)를 지어 고전(古篆)의 보급에 기여했는데,  그의 묵적으로 알려진 동명(東銘)은 소위 고전38팔체(古篆三十八體) 가운데에서 기자전(奇字篆)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특유의 도안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도안 형태의 전서는 비명(碑銘)에는 잘 쓰이지 아니하고, 그림이나 서책 또는 전각등에 사용되는데, 당시 제작된 계회도(契會圖) 의 제목글씨로 많이 쓰여져  조선 중기 전서의 한 부분을 장식하게 되었다.

    김상용(金尙容)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두액( 頭額) (1613)

      

    김진흥(金振興)의 동명(東銘)(1667)

    )

    허목의 고문운부(古文韻府)

    (3) 허목의 전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허목은 하(夏),은(殷),주(周),삼대문자(三代文字)인 고전(古篆)을  집중 탐구하여 특유의 전서를 창안했는데 그 연구결과는 그가 평생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펴낸 고문운부(古文韻府) 9책,금석운부(金石韻府) 2책,고문운율(古文韻律) 4책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영조때 학자이며 일세의 문장가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자신의 시문에서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대해(大海)와 같고 그 소리가 놀란 파도와 같아 만약 해령(海靈)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 질 것이나,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썼겠는가"라고 감탄했으며, 미수의 학덕과 인품을 흠모하던 정조(正祖)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에게 명을 내려 허목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대궐안에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반면, 당시 온건한 필법으로 서예계를 대표할 만했던 이정영(李正英) 같은 사람은 그의 광서괴행(狂書怪行)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나머지 왕에게까지 그의 체를 금할 것을 청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집비(集碑)에서 배운 서체라 자칭, 여전히 이 법을 고수하였다 한다. 이정영의 이러한 간섭을 냉소하며 지었다는,"朝日上東嶺 煙霞生戶窓 不知窓外事 墨葛寫과두" 운운하는 풍자시는 이러한 서풍을 고집하는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규상(李奎象)은 "미수의 획은 철획법(鐵劃法)으로 삼엄하기가 진한(秦漢)  이전의 획과 같았다." 고 말하고 있으나, 근대의 한문학자   임창순은 "중국에서 수입된 위조 하우전(夏禹篆)등 고전이 아닌 위전(僞篆)으로 익혔으나, 전서를 쓰는데 행서의 필의를 운용하고 행초에는 전법을 구사하는 등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여 이채를 띄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정영(李正英)의
    김성휘묘갈명두전(金成輝墓碣銘頭篆) (1690)

    허목의 전서

     

    허목의 행서 - 잡지(雜誌)

    미수의 전서는 자형이 매우 복잡하며, 편봉을 과감히 사용했다. 반면 그의 행서에서는 오히려 전서 쓰듯 엄정하게 써내려간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행서보다는 전서가 더 엄중하게 느껴지게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미수의 경우 전서는 변화무쌍하고 가는 획인 반면, 행서,또는 행초의 경우 무게가 있고 장중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미수가 그의 전법을 완성함에 있어 고전에 근거하였다고는 하나,문자학적 측면에서 볼 때 정통성에 의아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즉, 설문해자 또는 이양빙의 전서를 입문치 아니하고, 금석운부(金石韻府)와 같이 조작된 글자가 많은 자본(字本), 또는 후인의 위작(僞作)이라 하는 하우(夏禹)의 비 등을 답습한 데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심지어 그의 전서를 잡전(雜篆)이라하여 정통서예에 비하여 하잘 것없는 자체(字體)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학습입문과정에서는 그러하나,그가 독창성과 개성을 두드러지게 하여 풍부한 예술성을 살리므로서 전서의 다양화에 기여하는 고전(古篆)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는 가치를 부여해야한다. 

    또한 그는 중국,조선 양국이 공히 전서를 중히 여기지 아니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고문을 깊이 연구하여, 전에 볼 수 없었던 특유의 서체를 개발하고,그의 문인들에게 물려주므로서, 조선사회 전서의 내재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서예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의 전서작 중에서 척주동해비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며, 이외에도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구산사비음기(龜山祠碑陰記) 등 많은 금석을 남기고 있으나 , 단지 유감스러운 점은 그의 복잡 미묘한 필획에 대한 각을 정교히 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금석문에서는 육필과 같은 생동미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목의 천마비명(天摩碑銘)

     

    5.  비 문 풀 이

    州古悉直氏之地 在예墟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都護府史 孔岩 許穆書

    척주는 옛날에 실직씨의 땅이요, 예나라의 터 남쪽으로, 서울로부터 700리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여 있다. 도호부사 공암 허목 쓰다

    註 :

    悉直氏

    신라 사바왕 때 이 곳을 지배하던 토호로서 102년 신라에 항복하였다.  

     

    예맥 예. 예맥은 옛 우리나라 동북방면밖에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다.

    瀛海망瀁   영해망양

    바다 가없이 일렁이고

    瀛   바다 영
    망   아득할 망
    瀁   넓고출렁일  양

    百川朝宗   백천조종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朝   흘러들 조
    宗   흘러들 종  

     

    其大無窮   기대무궁

    그 큼이 끝이 없어라

     

     

    東北砂海   동북사해

    동북은 모래바다

     

     

    無潮無汐   무조무석

    밀물 썰물 없으므로

     

     

    號爲大澤   호위대택

    대택이라 이름했네

     大澤 - 동해를 이름

     

    積水稽天   적수계천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稽    다다를 계

     

    渤휼汪濊   발휼왕회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渤    물솟아오를 발
     휼    샘솟을 휼
     汪    넓을 왕
     濊    물많은모양 회

    海動有에   해동유에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 있네

     에    음산할 에

    明明暘谷   명명양곡

    밝디 밝은 양곡은

     暘    해돋을 양
     暘谷 - 해 뜨는 곳

     

    太陽之門   태양지문

    해뜨는 문이로다

     

     

    羲伯司賓   희백사빈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羲    복희 희
      伯   맏 백

     羲伯 - 요임금 때 천지와 사시를 다스리던 관원

     

    析木之次   석목지차

    석목의 위차요

     析木 - 동쪽(寅方)에  위치하는 두 별

     

    牝牛之宮   빈우지궁

    빈우의 궁으로

     牝   암컷 빈
     牝牛 - 丑方의 두 별

     

    日本無東   일본무동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之珍   교인지진

    교인의 보배와

     鮫   상어교
     鮫人 - 물속 괴물. 울면 눈
     물이  모두 구슬로 변한다.

     

    涵海百産   함해백산

    바다의 온갖 산물

     涵   적실 함   포용할 함

     

    汗汗漫漫   한한만만

    많기도 하여라

     汗   땀 한   물많을 한
     漫   물넓을 만

     

    奇物譎詭   기물휼궤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譎   속일 휼
     詭   속일 계

     

    宛宛之祥   완완지상

    너울대는 그 상서는

     宛   완연할 완    굽을 완

     

    興德而章   흥덕이장

    덕을 일으켜 나타남이로다

     章   글월 장   드러날 장

     

    蚌之胎珠   방지태주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蚌   조개 방  
     胎   태아 태  처음 태

     

    與月盛衰   여월성쇠

    달과 함께 성하고 이지러지며

     

     

    旁氣昇비   방기승비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고

     旁   곁 방   도울 방
     비   눈비많이내리는모양 비

    天吳九首   천오구수

    머리 아홉인 천오와

     天吳  - 水伯으로 머리는 범과  같고  몸은 사람 같다.

     

    怪夔一股   괴기일고

    외발 달린 기는

     夔  외발달린소 기. 용같이 생긴 외발달린 짐승.

     

    태回且雨   태회차우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태 -  큰 바람 태

    (風+幷)

    出日朝暾   출일조돈

    아침에 돋는 햇살

     暾   해돋을 돈

     

    교軋炫煌   교알현황

    찬란하고 눈부시니

     교   섞여 어지러울 교
     軋   서로다툴 알
     炫    밝을 황
     煌    밝을 황

    紫赤滄滄   자적창창

    자주 빛 붉은 빛이 일렁거리네

     滄    넓고아득할 창

     

    三五月盈   삼오월영

    삼오야 둥실 뜬 달

     

     

    水鏡圓靈   수경원령

    물은 거울이 되어 주위를 신령스레 되비추니

     圓靈 - 하늘

     

    列宿韜光   열숙도광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韜   덮어가릴 도
     列宿 - 별자리

     

    搏桑砂華   부상사화
    (搏은 扶의 잘못인듯)

    부상의 사화와

     搏   잡을 박   칠 박 
     扶桑 - 동해에 있는 神木.  그
     아래에서 해다 돋는다고 함.
     砂華 - 동해에 있는 나라

     

    黑齒麻羅   흑치마라

    흑치의 마라와

    黑齒,麻羅 - 남만에 있는 종족

     

    撮계보家   촬계보가

    상투 튼 보가며

     撮    모을 촬
     계   상투나 쪽 계
     보   풀이름 보
     보家 - 부족,종족이름

    단蠻之호   단만지호

    단만의 굴과 조개

     단<연>   종족이름 단 
     蠻   오랑캐 만
     호   굴조개 호
     단<연>蠻 - 부족의 이름

    爪蛙之후   조와지후

    조와의 원숭이

     蛙   개구리와 

     후   원숭이 후
     爪蛙 - 부족,종족이름

    佛齊之牛   불제지우

    불제의 소들은

     佛齊 - 부족,종족이름

     

    海外雜種   해외잡종

    바다 밖 잡종으로

     

     

    絶黨殊俗   절당수속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同유咸育   동유감육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유   동물을 기르는 동산 유

    古聖遠德   고성원덕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쳐서

     

     

    百蠻重譯   백만중역

    모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서

     

     

    無遠不服   무원불복

    멀리까지 복종하지 않는 곳이 없었네

     

     

    皇哉凞哉   황재희재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皇   임금 황   밝을 황
     凞   화할 희

     

    大治廣博   대치광박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遺風邈哉   유풍막재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邈    멀 막
     遺風 - 세대에서 남긴 풍속과  교화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澈沈 先生聞而改書 今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 上之 三五年 乙丑春三月也

    현종 2년 선생이 이 곳에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짓고 써,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물 속으로 잠기니,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주었다. 이제 신,구의 두 가지를 참고하여,"척주동해비"라는 큰 글자는 구본<옛 비석의 탁본을 말하는 듯함>을 사용하고,작은 글자인 비문은 신본을 써서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다.  때는 숙종 35년 을축년 봄 3월이노라

     

    6.  결   론

    전술한 대로 허미수의 전서는  문자학적 정통성 확보라는 면에서 찬반이 뒤섞인다. 하지만 고전(古篆)을 연구하여   이를 체계화하고 책을 펴내 보급하며, 더구나 전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조선에 전서를 인식시키므로서 행서 일변도의 서예계를 다변화시겼다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서예사적 공헌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세인들로부터 괴기하다는 평을 들은 추사나 미수의 글씨.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산으로 쌓여질 때, 비로서 우리 민족 특유의 대동서예(大同書藝)가 정착될 것이다. 단,민족적 긍지를 살리는데 급급하여, 결점에 대한 비판은 덮어둔 채, 장점만 과대평가하는 것은 학술적 자세로 볼 수 없으며, 결국 민족에게 해가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스크랩>

    .

     

     유형문화재(145호)인 보광루를 바라보며

     

    사천왕문

     

     

    구룡사

    백두대간의 주맥이 오대산을 거쳐 서쪽으로 태기산을 지나, 국동의 명산 치악산에 이르고 거기에 영서의 대찰 구룡사(龜龍寺)가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 놓는 형상을 한 천하의 승지”인 치악산에 구룡사는 서기668년(신라 문무왕8년)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셨으며 나말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구룡사는 원주시 소초면 학곡2리 치악산(1288m) 국립공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장목(금강송)숲길의 일주문(원통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 구도의 계단을올라 문화재인 보광루밑을 나오면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단 : 대한불교조계종
    전화 번호 : (033)732-4800
    소재 주소 :

    220-830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번지

     

     

     

     

     

    8월 14일이었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에 들린 날은

    비가 간간히 내리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하는 더운 날이었지만 치악산 계곡은 엄청스레 시원했다.

    원래 명산은 좋은 사찰들이 다 자리하고 앉았다지만 치악산 입구에 구룡사가 버티고 있다.

    아마 진입 경관도(치악산중에서) 제일 나으리라.

    처음엔 사찰이 치악산 입구를 가로막아 입장료 2,000원을 내라기에 투덜대었는데....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은 반감되었다.

    <음...이 정도면 (청소)유지비로도 그렇게 받아야 하겠는 걸....너무 싸서 아무나 아무렇게나 사용한다면

    망가질 꺼 같애>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나두 차암~~

    구룡사는  마침 <템플스테이>하기 수련중이었다.

    구룡사라기에 얼핏 9룡을 생각했으나 거북 龜자였다. 구룡사에서 긁어 온 이름 전설이 재미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한참 걸어올라가면 구룡교가 나온다.

    다리 양 난간으로 용이 용트림을 하고....거북이도 중간에 보인다.

    약수를 한모금 마시고 함께 걸어보실까요?

    차례대로 찍었습니다.

     

     

    일주문 이름이 원통문이군요.

     

    여기서부터 황장목 숲길인 금강송길이다. 

     

     부도가 보이고

     

    고령수 은행나무가 입구에서 반깁니다. 

    가을,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비오는 어느날....

    후드득..떨어져 쌓였을 때 다시 오고싶어지는 곳입니다.

    지형이 그런지라

    계단식으로 지어진 게 특이합니다. 

     보광전(좌)아래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웅전이 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지붕의 서늘이 곱습니다.

     

     

     

     

    ▼ 

     ▲ 삼장탱화 및 복장유물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자세히 보니 유리로 덧문을 대었군요. 무척 단아한 형태입니다. 

    나리꽃 루드베키아... 여름꽃이 정겨운 화단

     

    불자가 아니라서 백등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용다사 동종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천왕문이 까마득한 언덕 아래에 있군요 

    건물 하나 하나가 거의 계단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입구에서 보면 까마득합니다.

    키가 큰 소나무가

    잘 버팅기게 받쳐주는 것 같습니다. 

     이요조/글,사진

     

     

     

     

     

     

     1억년 전, 태초에 공룡이 살았던 고성 어촌마을

     

    하일면에도 공룡의 흔적이 무수히 많건만

    좌(東)로는 당항포 공룡축제, 우(西)로는  상족암!   좌청룡 우백호에 가려져

    공룡발자취 입구는 진입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고성군 하일면과  상족암군립공원 이 있는 하이면으로

    넘어가려면  달막재를 넘어야 한다.

    달막공원에서 고성 자란만이 휜히 바라다 보인다.

     여행목적지는 하일면이다.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지가 많아서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

    구비구비 깊은 산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갯마루 정상에 오르면

    차가 두 대 쯤  머물만한 공간이다. 

     

    갯장어, 멸치, 생굴, 새송이, 딸기, 취나물, 대하

    물론 적힌 것은 모두가 반농 반어의 고성일대의 특산물이다.

     

    하일면은 천하에 제일 살기좋은 면으로 천하제일면을 줄인 말이라고 현지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

    본 하일면은 서기1914년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 2호로 고성군을 병합할때 하일면이라고 개칭하고

    춘암, 오방,학림,송천,동화, 용태,수양의 7개리를 두었다.

     

    하일면은 고성읍에서 서쪽으로 25.5Km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삼산면, 남쪽은  

    바다건너 통영군 사량면,서쪽은 하이면 북쪽은 상리면에 접하여 바다쪽은 한려수도를 끼고 자란만에 임하고 있다.

    특히 자란만은 청정해역으로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인정한 해역이다./검색
      

    리아스식해안(2005년 12월에 찍은 사진)

     

    지도상  다도해 섬들이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그 섬들은 태초에는 육지였다가 해수면이 올라와서 침식되어 형성되었다,

    학교 다닐 때 달달 무조건 외우던 피오르드 해안과 리아스식 해안

    우리나라 다도해는 단연코 리아스식 해안이다.

    만입이 깊고 물도 잔잔하여 선박의 대피에는 유리하지만,

    후배지(後背地)가 적기 때문에 큰 항만의 발달에는 불리하다.

       

    2007년 6월에 찍은 사진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서서(보이지는 않지만) 

    西(右)로는 하이리 상족암...우측으로 더 가면 남해군,

    남(앞)쪽 바다 건너로는 통영의 한산대첩, 東(左)으로는 고성의 당항포, 그리고 더 좌로는 거제도 옥포, 등이 있어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교묘하게 거북선을 만에 숨겼다가

    왜선을 지리멸렬하게 전멸! 지리적 요건을 백분 활용하여 전승을 거두었다.

      

     

    내 고향 남쪽바다 잔잔한 무울♪....눈에 보이네~♬ 

    남해바다는 왜 잔잔함의 대명사격일까?

     

     

    위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리아스식 해안은

    만입이 깊고도  바다가 잔잔하여

    수산물의 양식· 양어에는 유리하다.

    온바다에 부표가 하얗게 수평선을 가로지르기도~

    또는 연등처럼 ....꽃처럼,

    바다 위를 수놓는다.

     

     
    2004년 9월 매미의 피해로 복구된 방파제(2005년 12월 사진) 

     

    2007년 6월 방파제모습

     

    친구(남편)의 배도 있다.

    배가 쥔이 없어  바닷물에 할일없이 늘 잠겼으니

    퉁퉁 불겠다며 우스개를 했다.

     

     

    배 자체의 가격보다 어업허가까지 붙었으니

    작은 배 한 척값은 예상외로 비쌌다.

     

    다닥냉이와 각시멧노랑나비 

     

    뭐든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길가의 피사체들은

    내게....함성을 지른다.

    <저, 여기있어요>

    그 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열고....눈을 크게해서 두리번 거려야 하는....

     

    낯 선 곳을 찾아 여행하는 신비함이다.

    돌멩이 하나에도,

    풀 한 포기에도,

     

     

    바라보고 사는 이들에겐

    새롭지도

    경이롭지도 않겠지만

    지쳐 발길 머문 나그네에겐 이 모든 생경함이

    발전기처럼

    삶의 에너지로  거듭난다.

     

     

    여행이란?

     

    언제나 마음을 열고 뭐든 받아 들이려면

    빈-마음으로 길을 나서야 한다.

     

    마음의 빈 폴더엔

    수용이란 이름표를 달아

    배낭에 챙겨넣고

    길- 떠나면,

     

     

    돌아갈 때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않은 이질적인 것들의 화합처럼

    다소나마

    모가 궁글어진 나를 만난다.

    배낭  한 가득히 채워진

    나에게 주는

    선물꾸러미다.

     

     

    말없이 엎드린 산처럼

    제 그림자를 그러안고

    오늘도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다. 

     

     

    숭어들이 

    잔잔한 수면을 가르고 

     은빛 몸으로 솟구치듯 높이 뛰어 오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곳!

     

     

    매미태풍으로 보상받은

    새로 지은 멋진 집들은 해안가를 한발자욱이라도 뒤로 물러났다.

    두고 떠나간 빈 집은

    내버린 집주인 대신 바다를 품기로했다.

     

     

     키 큰 자리공

    여릿한 분홍꽃대를 피워물고

    자라올라 바다를 향한 채  빈-집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하얗게

    피어났다가

    노랗게 시드는 금은화

    <인동초>도 갯가 돌틈에서 힘들게 피어나고,

     

     

    精苟縱心(정구종심)
    추사 선생님 말씀에 <정을 주면 이 세상에 예쁘지 않은 풀이 없다>네!

     

     

     빈-집은 어구를 넣어두는 창고로 바뀌었다.

     

     

    여름철이면 바빠지는 

    고성의 특산물인

    하모(갯장어)를 잡아 올릴 주낙(줄낚시)이다.

     

     
     
    하일면도 공룡발자국이 있다.
    하이면의 상족암이 20여년 전 개발되고
    2006년  공룡 세계엑스포로 고성은 세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엑스포가 열린 당항포도 동으로 두고 상족암의 하이면은 서쪽을 두고있는
    하일면은 좌청룡 우백호 탓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하일면 공룡자취 길은 날카로운 가리비, 조개껍데기가  지천이라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자란만은 청정해역으로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인정한 해역답게 바다지만 고요한  면경지수가 따로 없다.

     

     

     

     

    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맑다.

     

    1억년 전, 태초에 공룡이 살았던 어촌마을  

     

    고성은 쥐라기공원 아닌 백악기공원  

     

    특히 하일면의 공룡발자국은

    세갈래 난  큰 새의 발자국 같은 형태였는데....

    보긴했는데 <...설마? 공룡?...>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 자리에다 팻말을 두면 파도에 휩쓸릴까?

    표시석이라도...그럼 또 훼손일까?> 

     

      

    돌아 나와서 팻말 뒷쪽을 읽어보니...

    바로 그 발자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공룡 긴뒷발굽 발자국이라네요....에혀,

     

     

     사층리(斜層理,Cross bedding)
    이 곳에서는 사암으로 구성된 한 지층에서 사층리 구조가 잘 나타나며 수평면을 따라 길게 연장되어 있다.

     

     

     

    이렇게 물맑고 경치가 좋은 곳인데,
    안내가 따로 없으니
    관광객들은  이 곳은 전혀 모른채 그저 스쳐지나가 버리는 곳이 되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아래 사진은 두 개를 동시에 보려고 찍은 것!!'

    1억년전 발자국 표시가 날만큼

    지금의 우리 눈에도 흡사 진흙 구덩이처럼 유난히도 물렁하게 보이는

    ▼ 표층이다. 

     

     

     짤피라고도 하고 찔피라기도 하는 해초!!

    예전에는 많이 먹었단다.

     

     

     해안을 걸어나오며

    떠 밀려온 부표에 매달린 싱싱한 청각을 많이 따왔다.

    나중에사 동네 주민말로

    썰물 때, 청각을 하러(줏으러) 가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란다.

     

    외지 사람들이 와도  종아리정도의 물에만 들어가도 큰 양파자루로 서너자루는 해간단다.

    잘 씻어서 깨 마늘파 참기름, 식초 약간에 무쳐두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꺼내면 국물이 잘박한 시원한 해초무침이 된다.

    그냥 말려두었다가

    김장김치 속으로도 사용하고

    동치미에도 넣으면 시원하다.

    요즘은 보기드문 귀한 해초가 되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이동,확대,축소가 됩니다. 
     
     
     하일면 용태마을 앞
    자란만을  물들이던  낙조는 오늘도
    곤한 몸을 잔잔한 바다의 품에 스며누이고 있었다.
     

    글:사진/이요조

     

     

    등대에서 언니,형부

     

     

     
     

     

     

     

     

     

     

     

    식사 후, 포만감에 운동삼아 늘 걷던 곳이라....주머니엔 언제나 똑딱이 디카 뿐...
    사진이 조금 그렇습니다. (솜씨 없어 안반 탓하는 격이지만~) 올 여름 여행에 좋은 정보가 되었으면 합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1983년 포로수용소, 잔존유적문화재로 지정

    1950년 11월부터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하다.
    이듬해 6월까지 인민군포로 15만, 중공군포로 2만명 등, 17만3천여 명의 포로들을 수용하였으며 그 중에는 300여명의 여자포로들도 있었다.
    그러나 반공포로친공포로간의 유혈살상이 빈번하였고...종내는 거제도포로폭동사건 [巨濟島捕虜暴動事件] 을 일으키기도 했다.

    잔존 유적지의 흔적은 거제공고에도 비슷한 흔적이 5동 있으며 지금은 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장마중에  유월, 오후 태양은 뜨겁다 못해 이글거린다.  그 날과 똑같은 유월의 바로 그 날이 아닌가?

     

     

     

    대동강을 건느는 피난민들( 1,4후퇴)

     

    여행길에 올랐다.
    경남의 남쪽바다 일원이다. 고성, 충무, 거제도.....

    거제도 고현리,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일대가 거의 다 포로수용소였다고 한다.

     

    시작된 장마와 함께 떠난 여행이었지만 용케도 비 사이로 누비며 다닌 셈이다.
    19일 떠난 남해여행에서 6월 25일 마지막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발을 드려 놓았다. (오후 2시경)
    우연치고는 너무나 딱 들어맞는 날이다.


     장마 날씨 덕에 구름을 쓰고 그런대로 시원하게 잘 쏘다니다가  25일은 제대로 드러난 작열하는 태양에  한풀 꺾인 식물처럼 오금을 못 필 정도로 다들 비실거렸다.
    유적관내 전시물들은 거의가 센서로 설치되어서 관람객이 앞으로 지나갈 때 맞춰 기차소리, 함성, 포탄소리에 깜짝 놀라곤 했다.
    군가가 울려 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육이오 노래!
    아! 오늘이 육이오로구나~~
    한국전쟁의 아우슈비츠라 불리는 거제포로수용소,

    그 곳 전시관에 안에는 처참한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되어있지만 이 번 여행길에 사진을 찍긴 했지만 따로 올리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여성포로수용소에 관한 자료사진 몇 개와 현 잔존 유적지 전경만 올려본다.


    우리 모두 평상시엔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 역사다. 동족상잔의 부끄러운 역사를 내심 모르는체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그런 유적 관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다만 4년 전 유월에 방문했을 때와 다른 점은 여타 유적지에 비해서 꾸준히 변모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적지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윗부분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의 녹색 철골구조가 풍겨주는 생뚱맞은 뉘앙스는 좀 아니다.
    우리 역사의 상흔인 육이오의 포로수용소 유적지쯤이야~ 과거일 뿐, 우리는 미래를 향해 계속 변모하며 달려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가리키려는 것일까?

      

     

    2007년 6,25 글:사진/이요조

     

     

     

     

        유월의 꽃, 엉겅퀴

         

         

        #1

         

        젊은이~


        육이오를 아시는가?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던

        차마 하늘이 노랗도록 부끄럽던..


        유월, 이맘때면

        피어나는 가시풀꽃이 있지

        온몸을 마구 콕콕 찔러대는..

         

        젊은이~

         

        유월의 피를 아시는가?

        애오라지 다른 이념 하나로 

        산천을 피로 물들이던 애먼 젊은 죽음들..


        핏빛! 그 혈흔으로 피어난

        유월의 가시풀꽃!

        엉겅퀴를 그대는 아시는가 ?

         


        #2

         

        콘크리트 바닥에  짓눌린 절망 켜켜이

        모질게 가슴을 찌르며 자라나 흔들리던 가시풀꽃,

         

        역사의 슬픈 내력을 저 혼자  알고있을까?

        보라빛 엉겅퀴,  혈흔으로 녹이 쓴 철조망을 닮아 있다.


        사랑도 깊어지면  물 든 이념처럼  맹목적 그리움을 수태하고, 

        수직으로 곧게 곧게 파내려간  메꿀 수 없는 골!
        .

        시방은 울도 담도 없는 수용소에  누가 가두지 않아도

        백줴 원귀처럼 떠도는 응혈진 회한(悔恨)은

         

        이념보다  더  서슬 푸르게 날이 선, 스러지던 젊은 꿈의 사금파리!

        피 빛, 가시 꽃으로 다시 피어난

         

        아!

        엉겅퀴...

        엉겅퀴..

         



        글/이요조

        2003년 6월15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다녀와서 쓰다.

         

         

        유월이면

        삼천리 방방곡곡 지천으로 피어나는 가시풀꽃!

         

        엉겅퀴가 피어있었다.

        허물어져 잔해만 남은 막사....그 막사를 가르는 녹 쓴 철조망,

        역사의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월 보랏빛 엉겅퀴만 무심하게 길손을 맞고 있었다. (2003년 6월 15일엔)

         

        곧 여름휴가가 시작되면 막상 어디로 가야 멋진 휴가를 보내게 될지 고심 한 두 번 안해 본 사람 없을 것입니다.

        관광지로는 해양관광도시가 산재한 남쪽바다를 추천합니다.  

        관광지로는 산과 바다,  볼거리등, 그리고 푸짐하고도 신선한 해산물 먹거리등 이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주는 곳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한 번 쯤 들려보시면 정말 후회하지 않으실 정도로 좋습니다. /조

         


     

     이렇게 잔존의 건물은 미군들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포로들이 기거하는 곳은 그냥 맨바닥이거나  작업장 정도는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모포 한 장을 덮고 생활하는 정도였다.

     이제는 거제도 구시가지 중앙이 돼버린 곳이다.

     

     

     

     


     

     

     

    거제대교⇒사등(삼거리)⇒신현읍⇒고현⇒시청⇒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대중교통은 고현 시내 순환버스
    밖에 없습니다.

    (문의전화 : 055-639-8125)

    오전 09:00 부터 17:00 까지이며 관람소요시간은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가량 소요됩니다.
    입장료 일반 : 3,000원

     

     

     

     

    윤증[尹拯]1629 ~ 1714, 조선 중기의 문신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유계(兪棨),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성리학을 기본으로 당대의 정통 유학을 수학하였다.

    17세기 조선조의 격동기를 살다간 성리학자, 예학자로서 한국 유학사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분이다. 그는 평생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지만 수많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수없이 임금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며 재야에서 묵묵히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명재는 살아 생전에 영의정까지 제수받았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명재 윤증은 한국적 心學을 태동시킨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하곡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했던 윤증은 훗날 조선 후기의 實學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조 유학을 형이상적 理氣論이나 지리한 心性論으로 재단해 왔었다. 그러나 유학의 실천성을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독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론 중심의 학풍을 좇는 데 주력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서구 철학의 영향이 해방 이후 우리 학계를 지배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명재 윤증은 보기 드문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덕행을 실천하는 데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인 知行兼竝의 참다운 지식인이었다. 선생은 항상 '務實'과 '實心'을 강조하였다. 헛된 담론을 일삼거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잘못된 공부 방법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참된 도리를 제대로 깨우쳐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군자와 소인이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했던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명재 윤증(김길락, 유명종, 윤사순, 한우근외 19명)' 중에서

     

    ▲ 고택 안내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택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숙종 때 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건물은 19세기 중반의 건축 양식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으로서 조선시대 중기때 상류층의 전형적인 살림집으로 보여진다.

    가옥은 상류 양반 가정의 표본이 되는 목조단층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안채는 ‘ㄷ’자형이며,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있다. 대청 뒤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서쪽에는 정면 2칸과 측면 1칸의 안방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웃방이 있다. 남쪽에는 부엌이 넓게 꾸며졌고, 부엌 위에 다락이 있다.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대청과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그 뒤에 또 다른 방이 이어졌다. ‘ㄷ’자형의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어 ‘ㅁ’자형 구조를 갖추었으며, 대청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되었다. 지붕이 특이하게 조성되었는데, 그 형태가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다. 구조적인 면과 배치 형태, 창호의 처리 등에서 기능성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건축물 남쪽에는 넓고 평평한 바깥공간이 있는데 그 곳엔 네모진 연못이 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수공간(水空間)인 방지원도(方地圓島)로 조성되어 전통적인 연못의 기법을 나타낸다.

     

     

    특히 대문에서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은 외부사람의 조심스런 접근과 내부사람의 독립성(privacy)을 고려한 완충적인 공간으로 거부감 없이 조절하고 있다.

     

     

    ▲ 안채로 들어가는 길과 우측으로 노출되어 있는 사랑채

     

    사랑채 공간도 남성적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안채와 떨어져 독립성을 주면서도 안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윤증선생 고택의 지혜이면서 멋이다. 

    윤증선생 고택의 사랑채는 마을을 향해서 열려 있다. 밖으로 자신감 있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사랑채는 한 가족만이 생활공간을 넘어서 마을이라는 공동체로 열린 공간이다. 사랑채 건물을 좀더 분석해보자.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있다.  뒤에서부터 낮아지는 지형의 차이를 활용하여 기단부를 수직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벽체는 전면에서 볼 때 네 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칸은 사랑방, 그러니까 온돌방으로 막혀있고 양축은 한 칸씩은 누마루 그리고 대청으로 비워져 있다. 누마루는 높이 들어올린 마루를 말하는 데, 격식을 갖춘 한옥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누마루는 전면의 연못을 조망하거나 앞의 경관을 감상하는 기분좋게 시야가 열리는 장소이다.  사진에서는 누마루의 창문이 닫혀있지만 이것을 열어서 들어올려 매달면 이 모퉁이 칸은 완전히 개방된다. 여기서 허와 실의 대비적인 구성을 볼 수 있다. 한옥은 독특하게도 온돌과 마루를 한 채 내에 가지고 있는데, 이 두 요소를 잘 결합하여 구성함으로써 여러 가지 미학의 원리들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옆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의 합각이 있는 지붕이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팔작지붕은 위계가 높은 건물에 많이 쓰였다. 팔작지붕은 형태적으로 단정하고 완결적이다. 전통 건물들을 보면 비례적으로 지붕의 비중이 크고 육중해 보인다. 실제로 지붕의 무게는 대단했다. 그래서 그 지붕을 구조적으로 또 ,미적으로 어떻게 지시하는가 하는 것이 전통 건축의 큰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윤증선생 고택의 사랑채에서 그런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비운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육중한 지붕이 부유하는 듯하다. 지붕의 처마 곡선이 휘어 올라간 것도 그러한 느낌에 도움을 준다.

     

    ▲ 사랑채의 누마루

     

    완전히 트여있는 구조가 아니라 방처럼 벽과 창으로 막혀있다. 윤증고택에서는 사랑채를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약간의 실비를 내면 숙박이 가능하다.

     

     

     

     

     

     

     ▲ 우물

     

     ▲ 연자방아의 흔적

     

     

     ▲ 도로변에서 바라본 고택 측경

     

    ▲ 윤증선생 모친의 정려각

     

    고택 앞 남쪽 작은 언덕이 안산을 이루며, 안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외부로부터 집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또한 안산에는 윤증 모친의 정려각(호란 때 윤증일가는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빠져 나오기를 시도했다. 가족 대부분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고, 모친 공주 이씨는 자결하여 정조를 지켰다)이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우환이 많다고 하여 정려각의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참고

    - 현영조(이학박사) : 전통문화연구원

    - 한필원 : 한남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김봉렬 교수의 앎과 삶의 공간에서

    - 윤증고택 http://www.yunjeung.com

    출처 : 비상(飛上)
    글쓴이 : 벨프랜드 원글보기
    메모 : 찾아가는 길...안내지도 http://www.yunjeung.com/about/map.html

     

    해양관광휴양도시 경남 통영의 강구안 병선마당에 있는 거북선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본시 한강에 설치되었던 거북선이 제 고향을 찾아 내려와 정박하고 있다는군요.

    통영에는 가로수가 주로 동백입니다.

     

     

    통녕어항 강구안의 시장길도 기웃거려 보다가....

     

    강구안 풍경입니다.  파도도 피해갈 만큼  오목하게 생긴 아늑한 항입니다.

     

    좌측이 시장길이고,,,,정면이 유명한 충무김밥집이 즐비한 골목이 있습니다.

    상호엔 서로 원조라고 되어있지만....아무데나 들어 가셔도 다 맛있습니다.

    넓적하게 썰은 무와 한치를 넣어 잘 식힌 깍두기가 충무김밥의 참 맛입니다.

    통영인데 왜 충무김밥이냐고요?

    옛날이름인 통녕에서 충무로.....다시 옛이름 되찾기로 통영시로 복원되었기 때문입니다.

     

     

     100년전 통영항의 모습(사진출처 : 통영민박넷 tyminbak.net)

    400년 전 이 일대는 “병선마당”이라 불렸다.
    조선 수군의 본영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이 고장 두룡포(현재의 통영시)에 있었고 통구선(통영 거북선)을 포함한 그 예하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수군의 정기가 어린 이곳에 일제는 개간사업이란 명목으로 많은 부분을 매립하였다.
    해방후, 그 매립된 터에 부산~통영~여수를 오가는 연락선 선착장(구 여객선터미널)이 있어, 수많은 배들이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80년대 “엔젤호”(현재 사량도에 그 때 그 배가 전시되어 있다.)는 선수가 물위로 부상하여 달리는 쾌속선으로‘날으는 여객선’이라 하여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뱃사람들과 부산~여수를 오가는 여객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충무김밥’은 ‘국풍 81’에서 전국방송을 타며 일약 충무(현재의 통영)의 명물이 되었다./검색



    강구안 병선마당

     

    예전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자리엔 ‘문화마당’이라는 조그만 광장이 생겨 시민들과 여행객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도시 한 가운데에서 바람에 실린 갯내음을 맡으며, ‘물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 흔하진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곳 병선마당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입니다.

     

    - 임진왜란시기 거북선 유형

    1. 통제영 거북선

    ☞ 한편에 노가 10개씩 20개. 좌수영 거북선보다 크며 화력이 강함. 좌우에 각각 12개의 포혈.

    2. (전라)좌수영 거북선

    ☞ 한편에 노가 8개씩 16개. 통제영 거북선보다 소형으로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을 갖춤.

     

    - 임진왜란 후 거북선

    장대가 있는 거북선으로 19세기까지 건조 및 수군에서 운용.

     

     

    거북선이 좀체 길어서 한 샷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나눠서 앞부분 뒷모습으로....

     

    자,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임진왜란때 전과를 거둔 조선 수군의 돌격용 전선으로 거북 모양의 등 위에는 창칼을 꽂고 배의 앞에는 용머리를 달았으며,  배의 좌우에는 각 6개의 대포구멍을 내었습니다.

    승선 인원은 130여명이었으며,  사천포 해전때  처음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거북선은 한산대첩 학익진의 중심에서 출충한 활약으로 승전의 깃발을 더 높이 올리게 했으리라 봅니다.
     

     

    거북선내부에 설치된 화포

     

     

    들어가자 마자 장군님이....얼떨결에 목례를.....(...당연 해야지요. ㅎ^ㅎ^ㅎ^)

     

     

    거북선의 선장방

     

    거북선 수기

     

     장령방(officer room) 좌측

     

     

     장령방(officer room) 우측

     

    거북선을 정박시킬때 쓰던 닻 -

     

    나무로 만들어졌고 묶는 부위만 쇠붙이였음
     

     

    그저 멋지기만 합니다. 전쟁에 쓰인  철갑선이 아니라....무슨 예술품을 만난 듯 하더군요.

     

     

    임진왜란 이후 해전이 없자 수군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였으나(19세기)그 이후 거북선은 사라지고

    현재는 고증에 의하여 다시 복원, 그러나 그 내부가 3층이었다, 아니다 이층이다. 복층이다는라는 말이 많다고 한다.

     

     

    상상외로 내부가 꽤나 넓직합니다.

     

     

    내부가  무척 깨끗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해군은 청결을 중시한다는 말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통영 강구안

     

      거북선 내부의 천자총통

     

    임금님께 받았던 교지(임명장)

     

    이순신 장군이 받으셨던 교지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전자총통 시연 사진등이 있는데..아마도  조선시대 말에 찍은 듯,

     

    사진에 교지처럼 참으로 얼룩진 세월이었고 이순신장군님의 삶도 눈물이었고 시름이었겠지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한산섬 달 밝은 밤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나의 애를 긋나니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한산도월명야  상수루

    撫大刀深愁時

    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하처일성호가갱첨수

     

                 「閑山島歌」

                  한산도가

     

    -일성호가(一聲胡?): 한 가닥의 날라리(태평소) 소리

     애를 긋나니 에서 현대어로는 끊나니

     

     복층(다락?)으로 된 거북선의 수병 휴게소

     

    이 사진은 가져왔습니다. 제가 미처 못찍었나봅니다.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화장실이랍니다.

     

     

    항구가 아늑하게 생겼지요?  美港인 이 곳이 일제강점기, 우리 수군의 정기가 어렸다니 좀 믿어지지 않지만 이곳에 일제는 개간사업이란 명목으로 많은 부분을 매립하였다니~ 안타깝고 어이없습니다. 

     

     

    우리 수군의 정기가 어린 바다라니...보고 또 바라보며 갑니다.

    지금도 대통영고속도로를 통하여 많은 분들이 통영을 방문하여 병선 마당의 거북선과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비경과 여러 먹거리를 탐미하러 관광객들은 연일 발길이 멈추질 않습니다.

     

     

     

    좋은 정보로는 2007년 4월 20일부터 통영시티투어가 개설되어.....친절한 가이드가 하루 종일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즐거운 통영 여행의 안내를 책임진다고 합니다. ........................글:사진/이요조

     

     

     

     

     

    천혜의 절경과 문화가 함께하는 해양관광휴양도시 


    여행경비 계산하기
    http://tour.gnty.net/sub7/index7.html
    시티투어 http://tytourday.com/tytour_ctour_intro.php

    통영찾아가기 교통편 http://tour.gnty.net/sub7/index2-2.html

     

     

     

     

     ...  

     

     

    4월 중순이라지만 비는 흩뿌리고 날씨는 춥고 변덕을 부렸다.

    통녕, 세병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세병관은 통영 여황산 자락에 있다는데, 충렬사처럼 번듯한 사거리에 있는 게 아니어서 동네 골목길로 접어 들어야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안에서 대충 촬영을 했다.

     

     

    충렬로 사거리에 있는 충렬사도 지나치고...

    충렬사는 두세 번 왔었지만...그 땐 딱히 여행글을 쓸 때가 아니어선지 아니면 나이 어려 철이 없었는지.......그저 칼이 차암 크구나~ 무지 무겁겠는 걸?

    역시 (이순신) 장군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런 생뚱맞은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골목길로  접어 들어간 곳은 마치 동네 주차장을 방불케했다.

    복원도를 클릭!  크게 확대해서 보세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이 통제영의 일부이군요~

    복원사업이 어머어마한 규모로군요!  앞으로 복원 완료될 통제영은 통영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 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제영 복원사업, 5일 유적지 발굴조사 성과 보고

     ▲ 발굴 작업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통제영지 발굴현장.

    뒤로 보이는 건물이 통제영의 일부인 세병관(국보 305호)

     

     

    세병관 오르는 돌계단에서 .....  고맙게도 어느정도 웃비가 그쳤다.

     

    입구 돌계단 위로 보이는 근대에 복원한 누각   망일루

     

     

    예전에는 바다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높은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통영시내가 복잡해져서

    바다가 있으리라는 짐작뿐인 조선소의 호이스트만 보일 뿐...위치는 아늑한 곳에 자리잡았다.

     

     

     

    춘백이 길손을 반긴다.

     

     세월의 궤적이 담긴 돌계단

     

    망일루 사이로 통영시가  바라다 보인다.

    지붕위에 있는 용머리는 잡상이 아니고 용의 얼굴을 한 토우다 잡상은 궁궐이나 기타 임금님과 연관있는 건물에만 오릴 수 있다. 홀수로 올린다. 물론 용머리 토우는 뺀 숫자가 잡상의 수인데,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한다.

     

     

    그 곳에는 봄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나포리라 부르는 미항, 통영! 통영시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수항루 (受降樓)

    조선 전기에 북쪽 변경에서 자주 노략질하던 야인(여진족)의 항복을 받고서 이것을 징표로 남기기 위하여 누각을 짓고 붙인 이름인데, 함북 종성(鐘城)의 성내에 있는 3층 누각

     

     

     

    귀한 금목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정성어린 손길에 무척 단아한 모습이다.

     

    남쪽에서만 생육이 되며 만리향이란 다른 이름도 있으며 서향이라고도 불리운다.

    노란꽃이 피는 금목서, 흰꽃이 피는 은목서...꽃이 피면 그 향내는 무척이나 대단하다.

    격이 있는 선비를 비교하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지과문(止戈門)

    '창을 거둔다'는 뜻으로 '세병'과 함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을 담고 있다.


     

      

    止와 戈를 합하면 굳셀 무(武)가 된다.
    어쩌면 전쟁으로 맞서 싸우는 굳센 의지가 내포되었다는 일설도 있다고 한다.

     

     

     문화재명 : 통영세병관 (統營洗兵館)
     
    지정번호 : 국보 305 호 (지정일 : 2002-10-14) 
     
    소개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건물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1동)
     
    시대구분 : 조선시대 중기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1

     

    왜 이름을 세병관(洗兵館)이라 했을까?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 '洗兵馬行'의 마지막 두 구에 그 답이 있다.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서 /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서 / 다시는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할까?'에서 '병기를 깨끗이 씻는다'는 뜻의 한자말인 '세병'을 따다가 이름을 붙여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다.  ------------------- 이봉수<이순신이 싸운 바다>에서

     

     

     

     

    우물마루 연등천장을 설치하여 멋을 한층더내었다.

     

     

     

    안쪽의 중안3칸은 한단을 올려 전태단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 하였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을 총지휘하던 통제영의 객사(客舍)입니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목조 건물. 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전면 9칸·측면 5칸의 단층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호나 벽체가 없이 통간(通間)이어서 그 규모가 웅장하다. 보물 제293호.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웅장한 풍채만은 크게 뒤질 바 없는 객사이다.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성과 관아를 지었으나 세병관만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보수되었으며 이때 경내도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세병마(洗兵馬)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병마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두보의 대표적인 시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뿐아니라 현판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나 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문들은 다 올려져 있다.* 그림들이 오랜세월 퇴색하여서 흐리다.

      꽤나 방대한 객사이다.

     

     

     

    문에도 드나드는 법이 있다한다. 東入西出이란다. 중간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한다.

    문설주에 작은 해태가 받치고 있었다. 해태는 물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를 예방해 준다고 믿었다.

     

    뭘까? 어디선가 말을 매어두는 것과 비슷한데....이 위에는 계단으로 올라....사람이 머무는 객사 지금으로 치면 영빈관인데....웬 주차장? (뭘까?)

     

     

     

     

    비를 머금은 동백꽃~

      

     

     

     

    두륭포기사비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 구인후 제19대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의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 이학재, 이승주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가 없어진 듯하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아름다운 수항루 모습!

     

     

     

    '통영 세병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했던가? ..... 이순신장군과 직접적인 연관이야 없지만...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통영을 지나치며 안 가볼 수 없는 곳,  세병관이었다.

     

     

    이순신의 후일담은 드라마로 불멸의 이순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나, 어디까지나 그 건 소설이요 드라마였다. 선조는 난을 피해 다니며 전전긍긍 왕좌를 유지했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계획의 전란으로  무수한 공을 거뒀으나 선조는 그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한다.

    학설에는 선조와 이순신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있다한다.

    아무튼 아주 치밀한 전투계략을 도모한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통영를 여러번 왔지만  한산대첩이 있었던 한산도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으로...기약해얄 밖에...

     

     

    글:사진/이요조

     

     한산도 한산대첩현장/시 홈페이지에서

     

     

                 

     

     

     찾아가시는 길

     

    1) 대중교통

    통영시외버스터미널앞 시내버스(도남동,봉평동 방면 승차) → 중앙동 백화점앞에

    서 하차 → 세병관까지 도보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2) 자가교통

    통영시 원문검문소를 지나 시내 간선도로 진입 → 세종병원(직진) → 북신사거리

    (2차선에 붙어 시내 방면 진입) → 중앙동 백화점 앞 신호등 우회전 →문화동 샛

    길(사거리 우회전) → 세병관까지 200미터 정도 가면 된다.

     

     

     

    덕수궁에 있는 양관의 하나 정관헌(靜觀軒)


     

    정관헌(靜觀軒)은  뜻글대로 풀이하자면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란 뜻을 가졌다는군요.

    1900년 지어진 정관헌은 정면과 좌우 측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발코니와 서로 다른 양식의 기둥들, 회색과 붉은 색 벽돌을 사용한 벽면 등 서양풍 건축 양식과 전통 건축 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형태의 건물입니다.

    2006.08.05부터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는군요.

     

     

    ▼ 문화재청 이미지 (정관헌 내부)

    .

     ▲ 정관헌 / 백과사전 이미지

     

    '고종의 휴식처' 정관헌은

    대한제국 광무 4년(1900)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서,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다과를 들며 음악감상을 하는 등 휴식을 취하던 곳이라는군요. 함녕전 뒤뜰 동산속에 1900년에 지은, 서양식 휴식처로 고종이 다과를 들며 쉬거나 외교관 연회처로 사용되었습니다.  벽을 트고 서양식 주방을 놓고 지붕은 동판임이 특징입니다.

    정관헌은 커피의 맛을 배운 고종이 러시아의 건축가를 시켜 지은 건물인데,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 고종은 이 카페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순간만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한때 태조, 공종화제, 순종황제의 영정을 모시기도 하였답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직사각형 평면이며 내부 공간은 중심인 내진과 바깥쪽 둘레인 외진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내부의 높은 기둥은 굵고 둥글며, 외부의 기둥 윗부분에는 로마네스크형 장식을 하였습니다. 앞쪽 기둥 사이의 윗부분은 모양을
    새기고 나머지 부분을 파내는 투각으로 장식하였고, 아랫부분은 소나무,사슴,박쥐,덩굴 무늬 등 상서로운 동식물을 새긴 철제 난간으로 한국적인 장식을 하였습니다. 지붕에는 간결하게 얇은 동판을 이었습니다.

     

    조선왕실을 표시하는 오얏꽃 문양과 검은 박쥐와 거꾸로 복이 쏟아지도록 붙인  표주박 병들...

    발코니 난간이라고 해야하나요?  화려한 철제난간에도 역시 십장생의 무늬로 꾸며졌습니다.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분도 기웃거리길래....모올래 함께 찰칵!!

      남정네 각선미에 오금 저린 (할)줌마~

     

     

    '덕수궁 야간 들차회'  

     

    덕수궁에서 차를 무료로 마시며 봄 밤을 즐긴다. 덕수궁관리사무소는 4월 28일 오후 6시부터 7시 30분까지 덕수궁 정관헌에서 ‘야간 들차회 체험 행사’를 연다. 정관헌은 고종이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겼던 곳이다. 관람객은 녹차와 가루차 홍차 꽃차 등 다양한 차와 우리 전통 다식을 무료로 맛볼 수 있다. (02)771-9951

     

    '덕수궁 야간 들차회'  정관헌의 전통다례 체험행사가 있다고 문화재청 안내 멜이 왔길래 들렀습니다.  시간내서 참 잘 왔구나 싶었지요.

     

     

    다례(茶禮)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 1년(1401년)에 처음 나오는데, 그 뜻은 다(茶)를 극진한 예절을 갖추어 올리는 예의 범절이라 하였습니다.

     

     

    한국전통차 연합회 회원님들이 모여서 각차들을 분담해서 시음장을 연 것입니다.

    저녁 6시부터 시연이라...준비에 여념이 없으신 다도회 회원님들~~

     

    전...준비중인 모습만 찍고는 나설 수 밖에 없었지요.그래도 부지런하신 다도회 두어군데서는 시음을 하고 있었지요. 덕분에 사진은 찍어 올 수가 있었습니다.

     

     

    연잎 형상의 다포에 다기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회원들의 한복차림새나 색감이  너무 야하지도 않고 은은해서 더욱 좋습니다.

    아마도 야했다면 차향이 주눅들지 않았을까?...그런 노파심이었는데....

     

     

     

    조용히...고요롭게 차를 마시며 세상을 관조하는 곳,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고운 손길들이 있어 지나치는 길손들의 눈길, 발길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바쁜 손길중에 반가운 지인도 있었습니다.

    그도 저도 바쁜터라....그냥 조용히 사진만 찍고 떠나왔습니다.

     

     

     

    아기자기한 손길들이 준비한 다구들....

     

    그녀들의 한복입은 모습도 다기만큼이나 우아하게 격조있었습니다.

     

     

    마련하는 손길이 분주합니다.

     

      

    아름다운 다구와 다기들을 실컷 눈요기했습니다.

      

    입은 한복 만큼이나 다들...자태가 곱습니다.

     

     

    제일 먼저 준비한 처자(처녀) 모습입니다. 다소곳하고.....정숙하고,

     

    그 손길 하나 하나에 정성이 잔뜩 묻어났지요.

     

    사진으로 보셔도 그렇지요?

     

     

    저도 딸을 가진 엄마로서 저런 예절을 익혀서 시집보내면 좋겠더군요.

     

     

     

     

     

     

     

     

     

     

     

     

     

     

     

     

    마련해온 아깃자깃한 부제에 더 정신이 홀린.....나!

     

    철쭉보다 예쁘고....

      

    가을 아니어도 봄이라 더 푸르러서 좋은 자잘한 붉은 꽃을 물고 있는 청단풍도....

     

    화려한 모란도....

    고궁의 우아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이 무색하리만큼 차를 준비하는 그녀들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들차 시음은 못했어도 마음만은 차향이 향그럽게 마구 피어나는 저녁이었습니다.

     

     

    글:사진 이요조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을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으로, 또 부귀를 뜻하는 식물로서 부귀화(富貴花)라고도 부른다.
    모란꽃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향기가 나지 않는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의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중국 당나라 왕이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보내왔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모란꽃에서 대단한 향기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선덕여왕만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모란 씨를 심어 꽃을 피워보니 향기가 나지 않아 모두 선덕여왕의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작약과 비슷하나 작약은 목본식물이 아니라 초본식물이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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