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717호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에 있는 소수서원에서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을 만났습니다.

공사로 어수선한 가운데 있었지만... 선생의 사당에 걸려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로 알고 있는데,  소수서원에서 볼 수 있다니... 사당문은 열려있고 이렇게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아마도 영인본이지 싶습니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그림은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과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군요.

박물관에는 주세붕선생에게 숙종이 하사한 술 항아리가 있더군요. 그 모양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나게도 동물형상인데  양, 돼지, 코끼리의 형상이었습니다.

제 소견에는 하사품의 술병들이 교학(敎學) 진흥에 힘쓰는 주세붕 선생에게 賞으로 주어지는 축수의 기원이 담기지 않았나 상상해봅니다.

양은 순하고 어진 백성을 상징하고. 돼지는 富를 상징하고 코끼리는 道를 상징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선생께 숙종은 양민을 잘 다스리고 넉넉한 고장으로 선생의 학식으로 잘 이끌거라 믿는다는 그런 격려차원의 뜻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선생님은 풍기지방에서 조선최초로 인삼의 인공재배를 성공하셨고,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셨을때 개성에도 인삼의 재배를 성공해 개성상인의토대를 만든분이십니다. 유학자일뿐 아니라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아이템을 만드셨죠. 조선의 백자와 더불어 명산품인 인삼의 개발자이십니다. 

 

/글: 이요조

 

 

                                                                                         왼쪽 첫번째가 이황, 다음이 주세붕

 

 

 

 

 소수서원 강학당(보물제 1403호)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소수서원 전사청

 

이 건물은 중종37년(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히였다.

 

서원에서 전사청은 향사 전날 미리 제사상을 진설하는 건물로서, 평소에는 제기와 제례 용구를 보관한다.

이 곳은 제향 공간 가까이에 위치하며 제기고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그 위치는 사당 영역에 인접하고

제수를 마련하는 고직사와도 연락이 잘 되는 곳에 놓인다. 공통적으로 제상을 보관하는 마루방을 설치한다.

 

 

 안내판은 아크릴판이 얼룩이지고 글씨는 얼룩져서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소수서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음 포스트로 미루고,

 소수서원엔 화초류가 없단다.

젊은 서생들이 봄이오면 마음이 요동하는데

정원에 화사한 꽃마저 피어있다면 ...그 심사를 배려했다한다.

소나무, 오죽, 사철나무,,,,꽃이 없는 나무들로 꾸며져있다. 

담장 너머 강학당으로 고개를 디민 향학열의 소나무

 

 

 

 

    목 보물  제717호
명     칭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소수서원
관 리 자 소수서원
설     명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옷의 깃을 낮게 표현한 것은 다른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1495(연산군 1) 경남 칠원~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개요

주세붕 /주세붕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주세붕 /주세붕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성리학 이념의 보급을 통한 교화와 향촌사림(鄕村士林)의 배양을 위해 최초로 서원(書院)을 건립했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생애와 관직생활
아버지는 문보(文)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홍문관의 정자·수찬,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1537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피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으나 이듬해 파직당했다. 이후 승문원교리를 거쳐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성균관사성에 임명된 후,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뒤에 대사성·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중앙에 있을 때는 주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敎學) 진흥에 힘썼다. 지극한 효행과 청빈한 생활로 조야에 신망이 높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교학진흥
그는 도학(道學)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유교 이념의 보급을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행을 건의했다. 풍기군수 재임시에는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썼고 당시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복구했다. 1542년 순흥(順興) 죽계(竹溪)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祠)를 설립했고, 1543년 풍기의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다. 건립 때는 감사 임백령(林百齡)·이언적(李彦迪)·황빈(黃彬)의 도움을 받아 재정을 확보했고, 자주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큰 열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으나 1550년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후 향촌사림의 정치·사회활동 기구로 자리잡았다. 155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여 최충(崔)을 봉사(奉祀)했다.

저서로는 〈죽계지 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 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 心圖彛訓〉·〈심경심학도 心經心學圖〉 등이 있고, 문집으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가 전한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과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쇼셔'  

 

홍랑

 

홍랑(洪娘)은 선조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의 기생이다. 이병기(李秉岐)의 <국문학전사>에 의하면, 홍랑은 1573년(선조6) 가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이 북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갔을 때 그를 따라가 막중(幕中)에 머물면서 정이 깊었는데, 이듬해 봄에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마침 비가 오자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다. 그 후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고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경성에서 7주야를 달려 서울에 왔는데, 그 때 양계(함경도와 평안도)에 통행을 금지했고 명종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여 평일과 같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말썽이 되어 그가 벼슬을 내놓게 되고 홍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최경창이 1576년에 성균관 전적으로 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는데 그가 북평사로 나갔을 적에 관비를 첩으로 삼았다는 이유였다.

 

 최경창1은 이 노래를 번역하여 자신의 문집에 ‘번방곡(?方曲)’이라는 이름으로 실었다. 한역은 “버들을 꺾어서 천리 밖 님에게 보내노니 / 나를 생각하여 뜰 앞에 심어보소서. / 하룻밤 사이에 새잎이 나면 아실 것이니 / 초췌하고 근심 띤 얼굴은 바로 저의 모습이리라.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라고 하였다. 이 시조는 헤어지는 님에게 바치는 이별시로 잘 알려진 절창이다. 초장은 한시에서 전통적으로 이별을 상징하는 버들을 소재로 하여 헤어지는 님에게 이 이별의 상징물을 보낸다는 것이다. 버들을 꺾어주는 것이야 관습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자신의 상징물로 옮겨가는 독창적 수법이 참신하다고 하겠다. 중장은 이 버들을 가져다가 님이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라고 하여, 제 스스로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자신의 정이 실린 이 분신을 가까이 심어두고 보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별의 상징인 버들을 자기 자신의 화신으로 변화시킨 독창적 상징물로 삼았다. 종장에서 밤비에 새 잎이 나면 그 새 잎이 돋은 버들가지를 마치 자신인 듯이 반겨달라고 하였다. 헤어질 때에 마침 비가 내렸다고 했다. 그 비에 버들가지는 쉬이 움틀 것이고 그래서 님을 바라는 듯이 여린 잎을 낼 것이다. 그것은 님을 이별하고 울며 돌아가 초췌한 모습으로 님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애틋한 서정을 버들가지 하나에 부쳤으니 그 정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 그의 묘를 지키다 죽었고, 최씨의 선영 한쪽에 묻혔다고 한다. 

 

 

 

어려서는 그저 무삼심하게 여겼던 홍랑의 시 한 수~~

그래선지 곧잘 고어 시험문제로도 나왔지만 어느새 가뭇하게 잊고 있었다.

2008년 10월 영암 여행길에서  왕인박사 유적지를  향하며 시간에 쫓기고 있었지요.

구림마을을 지날 때가 오후 5시가 살풋 넘었으니 서둘러가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다더군요,

왕인 유적지를 다 돌고나니 하늘에는 달도 별도 나오고 아주  캄캄해졌지요.

그냥 버스에서 지나치며 문화해설사가 구림한옥마을을 지나치며 '최경창의 고향집'을 일러주었습니다.

실제 최경창이라는 이름보다 우리에겐 '홍랑'이  어쩌면 더 가차이 들릴지도 모르지요.

'홍랑'을 아십니까? 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가 그저 무삼하게 알고 있는 시 한편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그 숨은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알게 된 후로 얼마나 만나고 보고 싶었던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접한지 무려 5개월이 흐른 후에야 겨우 시간을 내어 달려갔습니다.

 

 

최경창의 호가 孤竹(고죽)입니다.

두 사람은 다 詩에 능하고 악기에 능한 예인들이었습니다.

정작에 저는 보지 못했지만 모tv방송 '역사스페셜'에 '지독한 사랑'으로 방영된 바가 있다네요.

첫 눈에 반하여 출충한 두 남녀가 만났으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임에도 홍랑은 그가 아프다는 전갈에 불원천리하고

7주야를 달려가서 회복시켰으나 이어 최경창이 죽자  얼굴에 자해를 하고 시묘살이를 했다 전합니다.

최경창의 자료가 여태껏 전해지는 것도 홍랑의 덕으로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는데,

해주최씨문중은 홍랑의 시신을 문중선산에다가 모셨다고 하니 그 당시 옛날 양반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

으니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도 그러하려니와 그 사랑을 인정해 준 최씨문중까지도

이 얼마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인지....감동입니다.

 

*서구림리 상대포*

孤竹 최경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1539년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특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17살 때 왜구가 침입하자 구슬픈 퉁소 소리로 왜적들의 가슴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러가게 할 정도로 악기 연주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1568년 과거에 합격하였고, 5년 후인 1573년 북도평사 발령을 받아 함경도 경성에 근무하게 되었다. 북도평사란 국경을 수비하는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최경창의 이때 나이는 34살이었으며 물론 유부남이었다. 옛날 기생이 가장 많았던 곳은 국경을 지키는 변방의 군대였다.

국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현지처 구실까지 할 수 있는 기생을 나라에서 특별히 배려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최경창은 운명적으로 홍랑을 만나게 된다.

문학적 교양과 감수성을 지니고 재색을 겸비했던 방년의 기생 홍랑을 만나 북방의 겨울 군막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다.
문학적 깊이에서 더욱 살갑고 애잔한 감성이 두 사람을 더욱 저리게 했다. 불장난이 아니라 그건 진정한 사랑이었다.
최경창은 그의 문집에서조차 그 사랑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양반 신분으로 기생과의 진정한 사랑을 솔직히 토로한 그의 자유정신, 예술적 열정이 부럽고 느꺼웁다.


 최경창이 떠나게 됐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남자의 임지가 바뀌면 그것으로 인연을 끊어야 되는 것이 기생의 운명이다.
따라가고 싶어도 기생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한 해 겨울 진진한 사랑을 익힌 홍랑은 이듬해 봄, 연인을 떠나보내면서도
무엇을 어찌할 처지가 못되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쇼셔"

 

 홍랑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따라가 연인과 서러운 이별을 하고 돌아가던 길에 날이 저문 함관령에서 하염없이내리는 봄비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사모의 정을 이렇게 적어 연인에게 보냈다. 최경창은 홍랑의 시조편지를 보고 저미는 가슴에 망연히 서성이다가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고죽(孤竹) 최경창이 홍랑의 시조를 편지로 읽고 한역해 애모의 글과 함께 보낸 답서가 지난 1981년 발견되었는데, 2000년 가을 홍랑의 친필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오세창 집안에 내려오는 유물인데 여기에는 1930년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친필 확인 평문까지 실려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한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나라법을 어기고 문병차 서울까지 찾아온다.
그리움으로 속을 태우던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떠했겠는가. 다시 만난 그들은 서울에서 다시 지극한 사랑을 태운다.

그러나, 기생을 서울까지 불러들인 이 사건은 결국 사헌부 탄핵의 빌미가 되고 최경창은 딱하게도 관직에서 파면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때는 명종비의 국상 기간이었는데 관리가 기생과 놀아난다는 풍문이 돌았으니 어찌 온전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황진이 무덤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고 그리움에 울었던 백호 임제가 관리의 체통과 권위를 망가뜨렸다고
 파면 당한 일만큼이나 이 사건도 멋지고 상큼한 일이로다. 한 여인의 간절한 사랑을 이토록 흐붓하게 받은 사나이라면 그까짓 벼슬이나 체통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최경창은 결국 파당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45세 때 객지에서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소식을 들은 기생 홍랑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다율리 해주 최씨의 선산 최경창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고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빗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다.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이 있는 것처럼 꾸며 수절하였다는 기생 이야기는 있어도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들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말고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대단한 절개가 아닐 수 없다. KBS<역사 스페셜>에 소개된 제목처럼 '지독한 사랑'이다.


해주 최씨 후손의 말에 따르면, 고죽 최경창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절대적인 공로는 바로 기생 홍랑의 공적이란다.

 

임진왜란이 나자 고죽의 작품들을 가지고 고향으로 피난한 사람이 바로 홍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랑이 이처럼 절개를 지키고 최씨 문중 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최경창과 애첩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여기의 아들이 홍랑의 아기라는 주장이다.

 

옛날 서자 기록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 그것을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홍랑이 병구완을 하고 시묘를 할 수 있었던 정황이나, 오늘날 선산에 묻힌 당당한 연유를 추리하는 논거로 귀담아 들을 대목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홍랑은 기생 신분으로 사대부가의 선산에 자랑스럽게 묻혀있다.
그리고 후손으로부터 '할머니'호칭을 받고 있으며, 시제때면 따로 한 제물을 받고 후손들 음복하는 자리도 바로 홍랑의 무덤 벌안이라고 하니
비록 그녀는 갔어도 시조와 함께 후손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기생 신분으로 절대 사랑을 추구한 자유 문인 홍랑의 삶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기생 애첩의 신위를 받아들여 단정한 묘소를 가꿔오고 있는
해주 최씨 문중의 넉넉함도 저으기 아름답다. 참 좋은 일이로다.

 

홍랑은 관북인 즉 홍원 태생의 기생으로서 고죽의 풍류반려였다는 기록 외에 어떠한 자료도 없다.
기생의 운명인 것이다. 홍랑의 무덤은 본래 파주군 월롱면에 있었으나 1969년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출처] 백광훈, 서익, 홍랑의 시조 (정암 서당)

 

영암을 다녀온 5개월 후, 드디어 궁금했던  파주 홍랑의 묘를 찾았다.

찾기가 좀 애매해서 다음 <스카이뷰> 항공사진을 올리려니 아마도 군사지역이라 안내가 안되는 모양인갑다.

네비게이션에 친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산 102-2 를 쳤지만

부근에 도착하였습니다로 끝나는 멘트..

주변엔 신설 아파트공사가 난립하고 딱히 물어 볼 곳이 없다.

 

부근 언덕배기에 다다르면 좌측으로 경동택배가 보이고 그다음은 운정성당이 보인다.

더 가면 좌측으로 청석교회가 보이지만 청석교회까지는 아니고

좌측 청석자동차가게 옆으로 작은 소롯길이 2시 방향으로 나있다.

200m만 더 들어가면 11시 방향에 묘소가 보인다.

제대로 된 입구길이 없었던 것 같다.

 

묘소 제일 가까운 곳의 집 주인인듯한 아저씨가 궁금해 하시길래(아마도 최씨문중분인 듯)

묘소왔다고 이야기 드리고 아직은 빈밭인 밭둑을 걸어 가로질러 갔다.

낯 선 방문객에 놀란

산옆에서 키우는 댓마리의 개가 줄을 끊고 달려올 듯이 온 산을 컹컹대며 짖기 시작했다.

 

 바로 마주 바라보이는 저 곳이다.

 나처럼 빈밭을 많이 가로질러 나닌 듯...길이 나있다.

 고죽(최경창)시비

 홍랑가비

 

 

 본래는 무덤이 월롱면에 있었으나 1969년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홍랑의 묘

 비의 후면

 홍랑비의 측면

 

상수리 낙엽이 오그르르 상석아래로

바람을 피해 모여있었다.

 

 양쪽, 낙엽을 걷어냈다.

한 잔의 술을 올리는 대신  .....

 

 지독한 사랑이 아니라....참 대단한 사랑을 한 그녀 '홍랑'

 윗무덤은 정부인이씨와 최경창의 합장묘

바로 그 아래가 '홍랑'의 묘

 

 파주군 월릉이나, 다율이나 지척이니 마찬가지 심심산골 이런 곳에

아릿다운 기녀가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으니

그 얼굴 누가보면 혹 흑심을 품을세라 자해를 하고 몸담장을 기피하고  이런 외진곳에서 기거를 했다니... 

어느새 세상은 바뀌어 아파트 빌딩숲이 점차 자리를 넓혀가며 포위하기 시작한다. 

 

 동그마니 매달린 까치집 하나~

 고개를 내미는 쑥.....

 

 떼구르 굴러떨어진 작은 도토리야~
나뭇가지 진흙이겨 집을 지은 까치야~
지독한 겨울을 이기고  고개를 디밀어 쏘옥 돋아나는 새 쑥아~
여기가 어떤 이의 무덤곁인지 알고나 있느냐?

사랑, 사랑이란다.

오로지 사랑에 목숨 건 아름다운 여인의 무덤이란다.

 

사랑이 실종한 시대............................이요조

 

 

 

좌측에서 바라 본 능 봉의 선이,  

실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나의 눈에 비치기를

홍랑의 젊은 시절 아미(蛾眉)를 연상시키 듯  가늘고 길게 굽어져 단아하게 보였다.

 

 세월은 흐르되....아름다운 사랑은 정녕 퇴색되지 않고녀~~

  1. 최경창/조선시대 시인.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본문으로]

 

 

<미수 허목을 만나러 가는 길> 을 잘 써내려 오다가 막상 본문을 쓰려니 막상 어줍기만 하다.

서예가로 또는 의술가유명했던 미수허목선생의 고향인  연천인군에서는 호를 일러 <허미수>라고 불렀다.

눈에 묘역이 확 들어오는 순간, 특이하게도 검은색 일색인 장명등 문인석등이 유난히 품위있고 멋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그림 서예 문장에 특히 능하셨다니...아마도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막연한 꿈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정월대보름이 아니던가!

나는 허목선생의 비를 어루만지며  언감생심이지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흠모하는 제게도 그 은사를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라고....

언감생심이라고 했든가?  허목선생의 동해척추비, 일명 퇴조비에서 그가 짓고 쓴 글에서조차 신묘한 능력이 있다는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가!!

 

1660년 10월부터 2년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삼척이 동해에 가까워 조수가 들어 주민들의 피해가 심하자 '퇴조비'를 세웠다. 훌륭한 목민관(牧民官) 치적의 일환으로 '척주동해비'가 탄생된 것이다  선생은 당나라 한퇴지가 조주(潮州)에서 악어를 제축(祭逐) 한 고사를 따라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비를 세우니,

과연 그  날부터 조수의 환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이 것이 이 비를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14일날 보름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밤하늘에 만월처럼 두둥실 뜬 달을 바라보고 지났기에 날자가 헷갈렸다.

막상 대보름 밤에...아차! 오늘이 대보름밤인데...  불현듯 달을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뜨락에 내려섰으나

子時를 접어든 시각의 하늘엔 구름이 달을 가리고 뿌우연 달문 자리만 내 정수리위에 와있다.

그러나 흐믓했다. 허목선생의 비를 만져보며 소원을 빌었으니 이 어찌 알차지 않은가?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나는 빙긋 웃고 있었다.

 

임진강가에서 무속굿을 벌리는 아낙이나 무에 다르랴...잘 되고 싶은 애오라지 염원이거늘....

 

 

2009년 2월 9일 이요조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29세 때인 1624년(인조2) 광주(廣州)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정진하여 그의 독특한 필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장명등과 비석

비문은 손수 써놓고 운명하신 듯...

이 곳 비석 역시나 전쟁의 상흔이 빗겨갈리 만무하다.

아마도 비석을 의지하여 한 생명이 몸을 숨기고 총격전을 벌인 당시 참상이 여실하다.

 

 

흰 비문은 일월석(日月石)이라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랍니다.(연천향토문화사 이준용님의 말씀)

비석의 옆구리는 뎅겅 잘려나가고...

향로석과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이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입니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곳까지 가져온 돌입니다. (이준용님의 해설) 

 

문인석 뒤로 보이는 구덩이에 초병이 발을 헛디뎠다.

난데 없는 홀에 의아해하는 것 같아

비틀거리던 초병에게 나는 아는 척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마도..이 것은 궁궐에 가면 양 쪽으로 물이 담긴 석물이 있는데 굳이 고쳐서 이름지으라면 방화수다.

화마가 들어오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음..벌써 누가 먼저왔군> 하며 돌아간다는...토템적인 방화수가 목적이다.

무덤 양쪽에 ...특이하게 아주 낮게 지면 아래로 설치되었다. 비오면 자동으로 괴이고 증발은 더디되겠다.

아래 해태(물 속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화마를 지켜준다는 속설)는 인평대군의(포천) 묘에서 찍어 온 것이다.

물론 양옆으로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비교/인평대군 묘역의 해태석상 

 

 

상석과 향로석이 있는데 단순하나 향로석에는 글자같은 문양이 보인다. 

 

 

벼슬을 한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문인석은

무덤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세우는데 다양한 종류가 있다.

 

 

 

흰대리석으로 비를 세웠다.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

허목선생은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비석의 후면

비석의 후면은 고인 생전의 업적을 나타낸다.

 

 

찾아가는길/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

북삼교를 지나 (허브빌리지/좌측) 직진(2~3분)  징파리 초소 

신분증 맡기고 초병의 안내를 받아 4km가량 더 들어가서 오른편 둥근 돌모양의 안내석이 있음

우측으로 더 들어가면 입구 좌측에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잔디마당이 나옴

주차공간도 있음  오른쪽 동산.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허목(許穆.1595 ~ 1682)의 묘이다. 허목의 자는
문보․화보이며, 호는 미수,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
해군 7년) 정언웅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2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를
완성하였다. 관직에 뜻이 없었던 듯 여러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

1657년 정계생활을 시작, 1674년(현종15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
천으로 돌아와 저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
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효종 사
후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동사≫≪미수기언≫≪경설≫≪경례유찬≫등이 있고, 특히 전서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
사를 받았는데, 선생의 묘비 글과 삼척의 동해척주비를 통해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허목묘의 석물은
독특하게 검은색이며, 예술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①임진강 풀리자 '미수허목'을 찾아 떠난 길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6에 글에 연하여 씁니다.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는 민통선 안에 위치했다.

징파 초소까지 다다라서 어떻게 왔냐는 말에 여차저차 이야기를 하니 좀 기다려 보란다.

마침 페인트 깡통을 두 병사가 들고 나온 곳으로 다가가서 묻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찾아왔다는데요. (안에)있습니까?> <응, 있어>

하사라고 한다. 초소의 고참인 모양이다. 어떻게 왔냐고 묻고 신분증을 맡겨놓고 병사를 한사람 대동하고 들어가란다.

그리고 나중에 카메라를 한 번 확인시켜주시면 된단다.

 

한 200m들어가자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긴한데 좌측으로 4km더 가서 있다는 안내판이다.

초병에게 물어보니 그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어떤 분인지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초병에게 안내를 받는 게 아니라 그저 감시를 받는

감시병 한 사람을 달고 직접 두리번거리며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길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무튼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래도 고맙게 두어군데 안내표지판이 있었고 큰돌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일일이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흔히 공덕비라고도 말하는 신도비가 있고 오른쪽으로 산위로 오르기 쉽도록 깨끗하게 단장된 계단을 올랐다.

어림잠작으로 아마도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닐까 싶었는데...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종중이니 모두가 양천허씨가 맞긴 맞다.

대리석계단은 동산의 봉우리 위쪽으로 더 연결이 되었고 그 위로 올라가니 근간에(1994년) 의정부 송산리 묘역이 개발로 인해 수용당하여

이 곳으로 이장하여 다시 세운 묘였다.

 

부근 일대가 모두 양천허씨 종중묘역이므로 그제사 다시 둘러보니.. 바로 옆으로 자그마한 동산이 또 있다.

특이하게 검은 문인석들로 둘러싸인  묘 한 기 <아, 맞어...연천군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그 묘소가 이제야 기억속에 들어오다니~>

서둘러 다시 내려와 우측 안쪽으로 들어가니 5백여평 쯤 되보이는 너른 잔디 마당이 나온다. 정자도 있고 간이 화장실도 두 개나 설치된 걸로 봐서

문중에 초상이 나거나 벌초를 할 때나 문중 행사를 갖는 장소인가 보다.

잔디를 얼마나 곱게 심었는지 동산자체를 큰 왕릉 못잖게 손질을 해두었다.

 

입구 계단을 오르려 다다르자 이상한 돌무덤 같은 게 보인다.

<아!  石棺이다>......이모저모 사진을 찍고 내 발걸음으로 길이를 재어보니 보통 행보로는 네 걸음이요 성큼성큼은 세 걸음의 길이다.

여섯자가웃은 좋이 되겠다.  안을 비쳐서 요리조리 사진도 찍어보고....신기하기만 하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훈(薰) 이라면 방금 다녀온 곳의 동산 정수리에  이장한 듯 새로 만들어진 묘의 임자가 아니던가?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우리말로는 널이라고 불러지는 관(棺), 500년이 된 석관을 이렇게 자세히 만져보다니....

물론 용산 박물관에 있는 석관처럼 그림이나 글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석관은 아니지만 그 투박하고 단순함이 마음에 차왔다.

<미수 허목>의 묘역을 둘러보지 않아도 그리 서운하지 않을 것 같은 흡족한 마음이다.

 

석관 내부를 찍어보았다.

열려진 석관위로 한줄기 햇살도 들어오고, 파르라니 뭔가 새싹도 움트고, 낙엽도 찾아들었다.

 

처음 잘 모르고 찾아올라간 묘역이 목적인 <미수 허목>의 묘가 아니라고 실망하며 괜히 올라갔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뵙고 무려 500여년을 누워계시던 관을 이리도 만져보니 그 게 도리고 예의가 아닌가?

 

잘 가꾸어진 계단을 조금 더 오르자 비로소 그분의 묘소가 한 눈에 들어왔다.

(다음글③로 계속)

 

 

우리나라의 관은 재료에 따라 목관(木棺)·옹관(甕棺)·석관(石棺)·와관(瓦棺)·도관(陶棺)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목관은 신분에 따른 구별없이 거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평양 정백동 유적, 백제 무령왕릉, 신라 천마총 등의 목관이 대표적이다. 옹관은 토기그릇을 시체 담는 관으로 대용했던 것으로서, 단옹식 옹관과 조합식 옹관으로 구분되며 부여 송국리 독무덤이 잘 알려져 있다. 돌을 재료로 한 석관으로는 고발식석관(刳拔式石棺)과 조합식석관이 있다. 와관은 기와를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유적에 남아 있다. 화장이 성행하면서 많이 제작되었던 도관은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것으로서, 공주시 마암리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검색

 

 

 

미수허목의 묘역에 들어서다.

 

계단을 향해가는 오른편에 석관이 놓여있다.

 

 여기 석관은 협천공 훈(증 좌찬성)과 배위 정경부인 고성이씨의 석관으로 서기 1994년 12월 12일 의정부 송산에서 이 곳으로 이장 모실 때 출토된 것이다.

약 500년 전 것으로 우가(오른쪽)공 좌가(왼쪽)비의 것이다. 출토당시에는 네 귀가 정밀하게 맞추어지고 이음새는 모두 석회로 잘 다져져 있었다.

양천허씨 협천공파 종회

 글이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낙엽들이 찾아들었다. 햇살도...새 생명도 움이트고,

 의정부 송산의 도시계획으로 94년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한다.

 오른쪽이 (薰)공의 것이고 좌측이 비의 것이다.

 뒤로 고즈넉한 민통선안의 풍경이 보인다.

 빛이 있으니 생명을 가진 새싹도 움트고...

 석실내부는 충분히 넉넉해보인다.

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보아도 역시 아름답다.

널이 아름다운 것인지...돌이 아름다운 것인지....나 역시 구분이 잘 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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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잘 못알고 올라갔던 묘 

 

 

근래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역입구에는  미수 선생의 생애와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미수 선생과 그의 증조부 許磁님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 곳에서부터는 양천허씨 종중 묘역을 알리는 입구인 셈이다.

 

 미수 허목의 신도비

 

문인석이 세워진 이 묘로 착각했었다. 

 6.25 전란의 참사가 이렇듯 흉흉한 사실로 남아있는 곳!

흉탄은 문인석의 왼쪽 어깨를 날려버렸다.

등 뒤를 보면...얼마나 총탄의 위력이 쎈지...

순간 소름이 오싹끼쳤다.

 전란중에는 북쪽 땅이다가 (3,8선 이북)

전후에는 우리땅이지만....민간인은 출입을 할 수 없는 곳! 

 

문인석에 핀 돌이끼가 세원무상을 말해주는 듯...오른쪽 문인석의 건너편 귀부분 아래가 <미수 허목>의 묘역이다. 

 

잘 못 찾아간 양천 허씨의 훈공묘 ↗ 

계단을 더 오르니

 새로 이장한 묘였다.

 바로 석관의 주인인 셈이다.

석관이 출토된지 대략 500여년으로 셈하니 <미수 허목>은 300여년 전에 가셨으니

200여년을 앞서신 선조 할아버지인 셈이다.

 

(다음 글로 이어씁니다)

 

이요조

 

 

 

 

 씨 풀리자 근질거려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다.

감기기운이 지끈지끈 오는 것 같아 누웠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산뜻한 바람이나  운동삼아 쐬고오자고 나선 길이다.

사실인즉슨 겨우내 참고 살았던...절절히 만나고싶은 인물이 꼭 있었다. 300여년전에 돌아가신 대학자 '미수허목'과 기생 '홍랑'이다.

영암에 갔을 때 홍랑과 최경창(崔慶昌)이 머물었던 곳도 사진을 찍고 시비도 보고,,,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400여년전 고운 사람이  파주에 누워있단다. 난, 홍랑도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홍랑은 <묏버들 꺽어~~>란 시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정도로만 알았는데 기막힌 러브스토리라니~

또 하나, 경북 봉화 여행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하여 귀동냥으로 처음 만나본 '미수허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만치 캄캄했었다.

우의정까지 오르고 시 서화에 능하며 특히 전서체로는 동양의 제 1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가 계신 곳!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만 외우고는 무작정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상하게 왕징면에만 오면 네비게이션이 기를 못피고 정신줄을 놓는다. 나중에사 알고보니 군사지역이 가까워서 그런 모양인데..

주소만 겨우 적어 온 군남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를 내 무슨 재주로 찾는단 말인가?

겨울 산골에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군남면, 화이트교를 건느려는 찰나, 도로에서 지나치며 이정표를 보고는 반가움에 무조건 우회를 하고는 그 동네 부근에 비슷한 묘역이 있나싶어

낮으막한 동산을 오르내렸다. 헛수고였다. 동네라고는 한결같이 빈집같은 적막감 뿐~어쩌다 마주친 사람도 전혀 모른다는 도리질 뿐~

이대로 돌아 가야하나 싶었을 때,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고...다행히 너무 자세히 가르쳐주긴 했지만...혼자선 갈 수 없는 곳이란다.

뭔말인고 하니 민통선 안에 묘역이 있다는 것이다.

북삼교를 지나 직진하면 초소가 있단다. 이...그랬어~ 이제사 기억이 난다.

전두환씨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브빌리지를 찾아왔을 때, 그 때도 네비게이션이 허브빌리지를 눈 앞에 두고도 빙빙돌려서

골탕을 먹이던..그래서 초소까지 갔다가 물어보고 되돌아나갔던 적이있었다.

징파 나루가 있다는 북삼교, 나루의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민간에서는 미수나루라고도 불린단다.

허목이 나들이를 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나루에 당도하여 술막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공에게 “미수 왔다!”라고 고함을 질러 나룻배가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 징파(澄波)나루.

얼었던 강물이 슬슬 풀려나는 정월대보름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랬는데......어허...낭패로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겨울 철새떼가 하늘을 가득 덮고있었다.

날씨 풀리자 날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움직임 같아 보인다.

 

 

먼-길 떠나기 위한 도약인지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북삼교에서 바라본 허브빌리지 뒷배경

 

 

254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진강 중에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구간은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임진강의 상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한강과 만나는 하류지역도 절반은 모르고 산다.

한강을 만나기 위해 남으로 흐르는 오후 임진강은 햇살을 수직으로 받으며 꽂꽂이 흘렀다.

군데군데 얼음이 눈치를 보듯 슬슬 풀려 녹아났다.

 

난데없이 다리위까지 들려오는 징소리...멀리 좌측 강가에 바짝 세워둔 차가 한 대 보였다.

 

 

부쩍궁금해보여서 줌인으로 당겨보니 굿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음력 정월 대보름!

용왕신에게 기원하는 중인가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다리 아래에 무려 3군데나....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기원을 새기는 걸까?

 

 

줌인으로 당겨보니 돼지머리와,  떡 과일, 쌀푸대등이 보인다. 거창하다.

 

 

바다에서는 만날볼 수 없는 그 무엇...강은 의연하게 침묵한다.  

 

 

얼었던 산골짜기 물들이 흘러흘러 이념따위는 상관없는 철새떼처럼 돌아 흐른다.

 

옛전설에 이 곳  절벽바위에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부엉바위로 부르다가 벙바위로 불려지기도 한다는....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 바위를 보니 고양이 형국이고

강 건너 마을은 쥐형상이더란다. 그래서 그 마을을 찾아가봤더니...쇠미해지고 있는 마을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저 벙바위,,아니지 고양이 바위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주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났더니....마을이 기가돌고 살아나서 한 사람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왕의 신임을 받게되자

안하무인이 되었고 고양이 눈을 가리는 일도 잊어버렸다한다.

끝내는 그 행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마을이 다시 피폐해지더라는 ....

<실제 이야기로 검색글에서 그 시대와 왕과 그 사람의 관직까지 알았는데...재차 검색이 되지 않는 애석함>

이 곳 사람들은 붉은 벙바위에게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한다.

지금은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이  그 곳에다가 허브빌리지란 이름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봄오자 녹아 흐를 것을 물은 얼어서 빛깔마저 달리하고.... 

모질게도 강물을 다 얼구어버린 한겨울의 江, 그 위로 흰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겨울 임진강을 보고싶다.

 

 

징파나루쪽(右) 

 물그림자 도도하고...

 

징파나루란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맑고 잔잔한 여울이 감미로와 보인다.

물이 맑아 징파라 했다지만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임진강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곳이 '군남댐'인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임진강은 홍수로 몸살을 앓고 들판이며 민가까지 질편하게 누워버리는 통에 아예 몸풀 곳을

마련해주느라 댐을 건축중인 모양이다.

 

 

이 곳은 기원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미수허목'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민통선 안에 모셔져 있다는데, 나는 과연 들어 갈 수가 있을까?

임진강 최북단의 다리 북삼교위에서 지금은 흔적뿐인  그가 드나들었다는 다리 북쪽의 나루를 바라본다.

지난해, 경북봉화를 두 번이나 거푸 방문을 했었다.  늦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선제일의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에 올라보고 점점 미수허목의  절필인<청암수석> 을 마지막으로 영면하셨다는 그 분이 궁금해졌다.

아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는 점점 만나고싶은 간절함에 솔직히 안달이 났었다.

나는 강서리 산 48번지를 찾아 삼북교를 건너 민통선 검문소, 징파리 초소를 향해 곧장 직진했다.

(다음글로 계속........./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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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이 글을 써 두신 후 15일만인가 운명하셨 전한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미수허목'을 알게되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다양한 옛 문서가 비치된 충재박물관

 

충재권벌은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큰 수석의 등위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둘레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거북이가 물 가운데 정자를 업고있는 형상으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충재권벌이 독서를 하는 곳으로 겨울에는 청암정 바로 앞의 건물에서는 겨울을 나고 바람을 쐬고(下사진 左) 

여름에는 즐겨 독서를 하거나 시문을 지었다는 정자로  닭실마을 황금들판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과거시험 답안지

 

경상북도 봉화 닭실마을 충재박물관에서 문과 과거시험 답안지를 보았다.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유뮬관, '충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완전한 논술형 답안지다. 여태 상상으로는 웬만한 크기인 걸로 짐작을 했는데, 무려 답안지의 크기가  전지 한 장 크기 세필로 빼곡히 채워나간 방대한 서식에 놀랐다. 

그리고 부정행위 방지에 대한 일목요연함에도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문화해설가님 말씀을 녹음을 해오면 무척 유용했을텐데, 다녀온지 시간이 흐르고 나는 늦게야  답안? 작성에 이 빠진 듯 건성 쓰고 있나니....완전 낙방이다.

화제가 주어지면 전지 한장을 다 메꾸도록 답안지 작성을 논리정연하게 써내야 하는데....이렇게 대처방안이 있는 걸로보아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여전히 존재했었고 부당채점관도 있었나보다,  물론 현재처럼 쪽집게 과외도 있었다는 재밌고도 놀라운 사실이다.

 

 

1/답안지 머릿부분이 잘라진 것은 응시자의 이름을 쓰는 곳이라 한다.

채점자는 누구의 답안지인지 모르게 찢어 따로 보관을 하는데 그 때 검수관의 사인과 일치해야한다. (찢어진 가운데 글씨)

응시자의 이름은 물론 친부의 성명과 조부의 성명, 외조부의 성명까지도 써야한단다.

 

2/답안지 중간 중간에 도장이 찍힌 것은 현장에서 틀린 글자를 바로잡을 때 즉시 현장에서 오자를 정정했다는 도장을 받아두어야 한단다.

아니면 채점할 당시에 고쳐진 것일지도 모르므로,

 

3/三之二...의 뜻은 들었는데 까맣게 잊었다. (맹꽁!)

                    이제와 추측컨대 갈지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응시장 좌석 배열이 아닐까도 싶다. 지금으로 치자면 수험번호?

삼지이(三之二)라는 뜻은 병과의 이등을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사진도 없었던 옛날인데 인물대조는 어떻게 했으며  부정행위를 막는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대처했을지  그 것도 무척 궁금했었다.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조선시대 최고 지배층은 관료였고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통해야 했으며 양반 구실을 하기 위해 유생들은 과거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있었다.

 

①남의 글을 빌려 쓰는 일(차술차작)

②책을 과장에 가지고 들어가기(수종협책)

③과장에 아무나 들어가기(입문유린)

④답안지 바꾸기(정권분답)

⑤과장 밖에서 답안 작성(외장서입)

⑥문제지 사전 유출(혁제공행)

⑦시험관리요원 바꾸어 출입하는 일(이졸환면출입)

⑧답안지에 장난치는 일(자축자의환롱) 등등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① 의영고 : 콧속에 커닝종이를 숨기는 것

② 협서 : 작은 커닝종이를 붓대 끝에 숨기는 것

③ 혁제 :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는 행위. 이것을 막기 위해 암송시험때는 응시자와 시험관을 분리시키는 장막을 쳤다. 
             또한 역서라고 하여 시험관이 과거 응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가 붉은 글씨로 다시 쓰기도 했다.

④ 절과 :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붙이는 행위로, 학력있는 사람과 미리 공모하든지 매수하여 저질렀다.

             또 옆사람과 답안지를 바꾸는 것은 환권이라 한다.

⑤ 차술 :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 시험을 보는 것

⑥ 이석 : 과거 응시자는 시험보는 도중 차를 마시거나 소변을 보기 위해 딱 한번 자리를 뜰 수 있는데, 이것을 이용한다.

⑦ 낙지 : 답안지와 초고지를 땅에 떨어뜨려 답안을 보게 하는 것

⑧ 설화 : 옆사람과 은밀히 말을 나누는 것

⑨ 고반 :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 보는 것

⑩ 음아 : 입속에서 중얼거리는 행위로, 특히 시문을 지을때 많은 암시를 줄 수 있고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커닝 수법이 다양해지면서 그 벌도 엄했는데, 과거장에 책이나 문서를 가지고 들어갔을때는 3~6년동안 과거 시험 자격을 박탈했고, 다른 부정행위때는 곤장 100대와 징역 3년에 처했다.

 

조선시대 <쪽집게과외>

  조선시대 양반들은 원래 4대 이상 과거에 급제하는 이가 나오지 않으면 평민의 지위로 떨어 지게 되어 있었다.

혼례 등을 통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도 과거에 합격 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조선시대 과거에 쪽집게 문제가 횡횡 했다.  이런 책자를 일러 초집(秒集)이라고 하였다.

초집에는 이미 출제된 문제와 모범답안, 그리고 앞으로 출제가 에상되는 예상 문제가 있었다.

마음 급한 선비들은 이 초집을 이용해 시험에 임박 했을때 벼락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07년 6월에 완공된 충재박물관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곁에 건립되었다.

 

 

 원본을 보시려면 click~하세요!

 

 

충재권벌의 연표를 보다가 또 하나 깜짝 놀랄 일이... 

 

 

연산군 10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내시 '김처선'1의 '처'자가 글 속에 있다하여 취소되다.

 라는 글이다. 아마 이 때가 '김처선'이 내처졌을 때 일이었나보다.

 

수정한 곳은 반드시 정정했다는 도장을 즉석에서 이렇게 받아야 한단다.  

 

 

 

근래에 재연한 과거시험장 모습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직접 보실 수가 있습니다. 

가시기 전에 문화해설사님을 요청하세요(봉화군청 문화체육과)

 

이요조

 

 

 

  

김처선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죽은 뒤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고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금되었으며, 본관인 전의도 없어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06년(중종 1)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각주를 사용했으나 text가 길어서 잘린고로 다시 올립니다.

 

 

  1.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 [본문으로]

 

 

청암정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경북 봉화읍 유곡리에는 오래묵은 정자가 무려 101개나 존재한다.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태백산 백설령하에 금계포란형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100여호의 가옥이 산자락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다.
닭실마을은 충재권벌의 입향조인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안동권씨 종가집이 있다.
종택에는 반달형월문과 자연석상에 지어서 둘레에 물을 대어 연못형식으로 만든

청암정이있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이 15년간 은거하면서  도학연구에 몰두하며 장자 권동보와 함께

초가을의 청암정 모습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등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 일대는 사적및 명승 제 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초가을이지만 날씨가 아직은 더운날,

전날 밤에 이곳에서 야외음악회가 열렸다고한다.

가설무대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냇가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500m

이렇게 죽 이어져서 청암정에 물을 대어주고 돌아 흐른다.

 

충재는 독서를 즐겨했다고 한다.

왼쪽 가옥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른쪽 청암정에 올라 머리를 식히고...

겨울엔 충재당에서 여름엔 시원한 청암정에서,  

 

본시 이자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을 깎아 자연석 계단을 만들고 정자를 올렸다는데,

거북이는 물에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고 ....물을 끌여 들였다 한다.

 

 

물속에는 참개구리 한 마리~~ 

 

  

유배된 충재는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
(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
(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순당에서 '문정왕후'와 충재권벌 선생의 독대장면 연출디오라마 

을사사화당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소윤일파)에게 화를 입은 윤임등...에 대한 무고함을 간헌을 올리는 모습이다.

의로움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된 일이라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재권벌은 평안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닭실마을 담장은 흙으로 쌓았다.

사이사이 돌멩이를 지지대로 삼아서...

권씨의 종가

대문이 반달형(월문)으로 특이하다. 

 

종가집 마당 

문화해설가님께 들었는데..잊었다.(짚으로 엮은 것)

이 표시는 아직도 삼년상을 끝내지 않았다는 표식이란다. 

 한여름에 올라서면 드넓은 들판이 탁 트여서 무척 시원하다.

단촐하게 지어진 ' 충재당' 의 서실인 셈이다. 

지붕 양 옆으로 풍판을 대었다. (비바람을 가리는 용도) 

  

 

종가집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청암정이다. 

 청암정의 가을 

 물을 대지 않았다.

물이 없는 청암정의 가을 

 

  

 

 

이 바위의 용도가 무엇인가 궁금했더니 봉화는 지역 특성상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소나무를 베어와서 쐐기를 박아 나무를 키대로 길게 4쪽으로 나누어 놓고는

하나씩 이 곳에 지지대로 삼아 눕혀두고는 불을 밝혔다 한다.

다타면 또 당겨서 이 돌위에 걸쳐놓고 하면서,

 

밤에 야간집회(공부?) 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불붙은 소나무 가지를 걸쳐두었던 돌이라 한다.

소나무는 송진이 많아 바람에 불도 잘 꺼지지않고 오래가고 밝았다고 한다. 

 

 

 

 <닭실마을의 한과> 

닭실마을은 또 제사때 쓰는 한과로도 유명하다.
문중 부녀자들이 500년간 전해내려오는 방식으로 한과를 빗는다.
고추실로 문양을 넣고 쌀 튀밥으로 고명을 얹어 한과에 눈꽃이 핀 듯 빗어낸다.
시중 한과와는 달리 바삭한 느낌과 고소한 뒷 맛이 월등하다.  

 

 

 

 

 서원의 소나무도 공부를 한다? 라는 뜻의 소혼대 소나무도 서원 담장너머로 기울어져 있다.

 

가을이라 하지만 아직은 녹음이 짙은 초가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경북 영주시에 있는 소수서원1을 다녀왔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2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조선 중종37년)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소수서원명륜당, 일신재, 직방재,등이 한참 보수공사중이어서

그렇게 구석구석 상세하게는 살펴볼 수가 없었지만....

어느 한 군데 할 것없이 아주 문화재적 가치가 많고 그 이야기가 무궁무진한지라

감히 어느 부분서 부터 풀어서 필설로 이어가야 할지 난감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나마 다녀온 그 감흥마저 사라지기 전에

미흡하나마 느낌대로 차근차근 요약해야겠다.

 

 

이 곳은 소수서원의 공원, 즉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잠시 머리를 식히던 곳으로,

소혼대(消魂臺)라 불리워지며

유생들의 머릿수대로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한다.

 

 

옮겨쓰자면,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자리로서 <안연소혼자 유별이이의>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詩 <별부>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려말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에 보이는 <숙수루/宿水樓>의<별대>로 比定이 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부다.

국가가 지원했으니 공립의 대학교인 셈이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해설사님을 통해서 절반은 듣고 절반은 흘려도...

얼마나 무궁무진 재미가 나던지...석달하고도 열흘을 다뤄도 끝간 데가 없을 지경이다.

나는 언제나 뒷이야기가 관심사다.

 

 

 

  소수박물관3


박물관 또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사액[賜額]4 으로 받은 현판

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현판(탁본용)을 탁본뜨다.
 

 

실제 현판이나 비석의 탁본은 아니고 탁본이 어떤 것인지 일러주기 위한 양각의 글씨에 손 쉽게

먹물 방망이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 (비석이나 돌에서)탁본을 뜨면 음각위에서 행해지므로 글씨는 하얗고 종이에 먹을 자근자근 묻히면 되겠다.

무슨 탁본이든 그 자체에 바로 먹물을 발라 뜨지는 않는다.

먹물도 화학품이므로 오랜세월 풍화에 시달려온 모든 사물은 독한 먹물에 바스러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발달하지 않던 옛시절에 탁본을 통해 귀한 글씨를 채탁해 서첩으로 꾸며 글씨 연습에 이용하기도 하고,

표구를 해서 걸어두기도 했다 한다.

 

 

 

탁본요령

 

1/탁본판,수건, 솔에는 절대 먹물을 묻히지 않는다.
2/탄본판에 종이를 얹고 분무기로 적당히 물을 뿌린다.(지면이 매끈한 쪽이 윗부분)
3/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다.
4/탁본판의 글씨가 도드라지도록 수건으로 꾹꾹 눌러준다.
5/작은 글씨나 세밀한 부분은 솔로 가볍게 두드린다.
6/먹물을 묻힌 솜방망이를 다른 솜방망이나 종이에 두드려 농도를 엷게 조절한다.
7/솜방망이로 탁본판 글씨를 따라 골고루 두드려준다.
8/완성이 되면 살며시 떼어내어 말린다.

 

 

오른쪽 敬(공경할 경)자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다.

소수서원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물 가 바위에 새겨진 '敬' 글을 탁본해 두었다.

이  한 글자에 아주 재미나고 비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한다. (다음글로~)

 

 

실은 솜방망이 둥근 자국이 나지 않게 깔끔하게 떠야 옳은데...

 

 

탁본의 떠 오는 게인의 의미는 글을 쓴 사람의  글씨를 직접 뜨므로

글씨속에 내포된 정신세계까지 엿보려 함이다.

그런데..마지막 '명종대왕'의  중요한 낙관을 제대로 못찍었다는 점이다.

 

 

흔히들 낙관을 서예나 그림을 그리고 찍는 도장만을 이름하는 줄 흔히 알고있지만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 말입니다.

글씨를 쓴 사람의 연대와 호등을 간단하게 쓰는 것을 총칭 아우러 말함입니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연이어 쓸 생각입니다.

 

글/사진:이요조

 

  1.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본문으로]
  3. 영주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한 공간인 셈이다. [본문으로]
  4.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조정에 상주하여 명종(明宗) 임금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을 받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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