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이몽룡 생가

1610년경 건립되었다는 창녕 성씨 '성이성'의 생가에 들렀다. 지금은 그의 대 후손 성원기(61세)씨가 관리하고 있었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일대가  사적 관광지로 개발들어갔다고 한다.

도로에서 250미터 시야에 환히 들어오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번 가을에 우연찮게도 연이어 두 번을 방문할 행운의 기회가 주어졌다. 

 

왜? 이몽룡이라면 이도령이지~ 성도령일까?

TV프로그램 역사스페셜 에서도 이몽룡 실존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다뤄진 적이 있었다.

예전 양반가의 자제가 기생과 염문이 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겨 성도령은 이도령으로 춘향이는 성춘향으로 각기(소설에서)

성씨가 바뀌었을 거란 추측이다.

 

 

가평리 계서당(溪西堂)


  이곳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위치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이 1610년

(또다른 문헌에는 1613년)에 건립하여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팔작 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간 문으로 연이어져 있다. 
 

현재는 정자 1동과 방안간 1동, 강당 1동과 일부 담장 등은 허물어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1984. 1. 10) 관리되고 있다.

 

성이성 실존인물에 대한 문헌사료.

http://tour.bonghwa.go.kr/heritage/heritage_07.html 

 

 대문으로 들어서니

 '계서당' 이 반긴다.

 

▲ 팔작 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간 문으로 연이어져 있다. 

 

▲ 왼쪽이 사랑채와 중간문, 오른쪽이 계서당

계서당은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 곳으로 전해진다.

좌측 열려있는 중간문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나오고, 

중간문으로 들어가면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 안채 마루의 모습이다.

 

 

▼ 성이성 사당(祠堂)


  성이성 선생의 강직 개결(介潔), 소신과 의연(毅然)하였던 청백리 성이성 선생을 추모 흠모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 계서당 건물의 정면향 우측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후손 성원기(61)씨가 감사하게도 사당을 개방해주셨다.

 

 성이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성, 부인의 위패

 

'성이성' 즉 '성도령'의 부인은 '봉성 금씨'로

품계가 숙부인으로 봉해졌나 보다. 

 사당의 문을 열고 계서당으로 다시 나왔다.

 

 그런데....이 건 뭘까?

아주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깜짝놀랐다.

한옥이란 원래 화장실을 불결하다하여 멀리 뚝 떨어져 집 귀퉁이에

숨겨져 있거늘.....어찌된 이유ㄴ지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계서당 오른쪽에 붙은 

 '붙박이장'처럼 생긴 용도는 과연 뭘까?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니 이렇게 생겼다.

 

 남자들만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은 간이 화장실이다.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는 계서당인즉,

공부를 하다말고  먼- 화장실까지 들락이느니.....

바로 곁에서 이렇게 해결을 했던 곳인가 보다.

 

 

아마도 필자가 사진을 찍는 바로 이 자리에

통을 받쳐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에서 위를 보며 찍은 사진

 

 위에서 아래로 보며 찍은 사진

머리부분만 두고 전신은 가려지게 되어있다.

 

마루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남자용 간이 화장실 맞다. 아마도 밤에 계서당에서 주무실, 훈장님이나 어르신들이

어두운 밤에 화장실을 나서기에 계서당이 너무 높으당하기도 했다.

눈이 온 밤이나 비가 온 밤에...칠흑처럼 어두운 야밤에 자칫 높은 곳에서 댓돌을 헛짚기라도 한다면?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갸륵한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고 한다.

 

계서당이란 옥호(屋號)의 유래는 성이성이 서쪽 개울가에서 탄생되었다는 이유로 '계서당' 이라고 지어졌다 한다.

역사적고증이야 자칫 잘못 쓰게되면 (왜곡)오류가 날터...

나같은 길손이야 여행을 다니며 숨겨진 뒷 이야기나

이삭처럼 줍는 재미도 솔솔해서~

만족할 터이다. 

 

글/사진:이요조

 

 

첨부글 

그냥 별 꾸밈없는 집이 맘에 들었어요.
성이성이 <강직 개결(介潔), 소신과 의연(毅然)하였던 청백리>상을 왕으로 받았다는 역사적 고증처럼
웬만한 고택을 둘러보면 멋진 정원을 꾸미고 담장을 높이는 등.....

그런 권위 같은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게....청렴결백 강직한 분 맞습니다.

 

아이콘 어사화(御賜花)
  성이성이 1627년(인조5)에 치러진 신년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임금이 직접내린 종이꽃 어사화 (廣寒香)가 그 꽃받침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아이콘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남원부사, 광주목사, 제주목사 등을 지낸 성의성의 부친 성안의(成安義, 호 芙蓉堂 : 1561∼1629)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계서당으로 부터 우측으로 약 5백 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당의 관리사와 같이 있다.
아이콘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 성덕비(成德碑)
  성이성이 13세부터 16세에 이르기까지  사또 자제로 남원에 머물게 하였고, 뛰어난 이재(吏才)와  간 곳 마다 치적(治績)이 쌓였으며, 남원부사로 5년간이나 있으면서 쌓아온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성덕비가  전라북도 남원시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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