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LP 음반 수집 붐이 심상치 않다. 클래식만을 선호했던 과거 LP전성 시대와는 달리, 천덕꾸러기로 푸대접했던 가요음반이 주 모으기 대상이다. 어지간한 1960~70년대 가요음반은 대부분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을호가한다. 특이한 것은 각종 인터넷 음악 커뮤니티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요즘의 LP 콜렉터들은 빅 히트 음반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오히려 거의 무명에 가깝고 조명 한번 받지 못하고 지하로 묻혀 버렸지만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가수의 음반에 열광한다. 이들은 음반 수집 뿐 아니라 가수들에 대한 발굴과 재평가작업까지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최근 들어 천편일률적인 주류 대중음악계에 좀처럼 무대에서 만나볼 수없었던 작가주의 성향의 가수들이 노래하는 무대가 생성되는 분위기는 이들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11년 공백 털고 의미있는 기지개
인터넷 시대가 탄생시킨 새로운 흐름은 강원도 산 속에서 운둔에 가까운삶을 살며 도저히 대중 앞에 설 것 같지 않았던 포크가수 김두수를 세상으로 불러내는 마력을 발휘했다.
그는 80년대 중반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로 데뷔해 주목 받았던 고려대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다. 자신이 그리는 이상향의 세계를 독특한 가락과가늘게 떠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으로 불러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었다. 지난11년 동안 깊은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던 그의 음악은 '80년대 3대 포크가수'라는 LP팬들의 재평가 속에 부활했다.
오랜 공백은 오히려 자기 음악완성의 기회였다. 작년, 그는 더욱 완숙하고정제된 음악성으로 무장한 4번째 앨범 '자유혼'을 발표했다. LP팬들을 위해 365장 한정판 LP발매도 잊지 않았다. 그의 신보는 예상대로 '2002년 네티즌 선정 최고의 한국가요 앨범'으로 선정되는 호평을 이끌어 냈다.
또한 작년에 나온 그의 LP는 벌써 15만원에 거래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저는 컴맹입니다. 그래서 500여명의 팬들이 제 팬 클럽을만들었다는데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멋쩍게 웃는 김두수는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리둥절해 한다.그는 전화도 없이 대관령에서 8년을 살았다. "4집을 내면서 처음으로 직업가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그는 지난 달 경기도 양평으로 둥지를 옮겼다. 자신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온 아내의 공부 때문. 처음에는 아름다운 남도 지방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내의 의견을 따라 예전에 거주했던양평을 택했다. 도시로 들어가기엔 아직 적응력이 떨어지고 사는 비용도부담스러웠다. 새롭게 구한 집은 허름하지만 아담한 2층 양옥집. 요즘 아내와 함께 직접 페인트칠을 하면서 집 보수 작업에 열심이다.
데뷔 20년만의 첫 단독콘서트
이사 후 첫 무대는 김민기, 양희은이 탄생했던 명동 YWCA 청개구리 음악회였다. 사실 80년대 중반이후부터 비범한 네 장의 포크 앨범을 발표했지만, 폭넓은 대중에겐 여전히 무명 가수이다. 그런 그가 포크 팬들에 의해 부활된 청개구리 콘서트 9월의 가수로 선택되었다.
유명한 가수들이 즐비하건만 투표를 통해 그가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대학시절 무명 통기타 가수로 드나들었던 명동 한복판에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몇 차례 작고 비공식적인 공연을 했었지만이번 공연은 데뷔 후 20년 만에 치른 공식적인 그의 첫 단독 콘서트였다.
강진 남녁교회 임의진 목사는 김두수의 음악을 접한 후 열렬한 팬이 되어지금껏 우정을 쌓아오는 음악 형제. 그
바람에 작년 7월 임 목사가 주관하는 광주 증심사 풍경 소리 음악회 오픈 공연과 금년 봄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전남 강진 남녁교회, 광주 소도선방, 지난 5월에는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팬클럽 회원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노래만을 목적으로하는 최초의 단독 콘서트에서 그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면한 팬들은 감격의눈물을 훌쩍거리기도 했다.방송출연도 시작했다. 부산, 대구, 마산, 춘천 쪽 지방 FM 방송과 불교,교통방송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최근 SBS 시사 프로 '라디오 오디세이'에서는 '이 시대의 가인'이라는 타이틀로 1시간 동안 그를 소개했다. 유명 가수가 아닌 그를 1시간 특집으로 심도 깊게 방송을 했다는 사실또한 놀랍다.SBS 라디오는 처음으로 그를 '가인'이라 표현했다. 아마도 대중의 기호에맞추어 노래하기보다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정신을 가슴으로 노래해온 그의 음악 인생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음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던 범상치 사연을 지니고있다. 대표 곡 중 하나인 '보헤미안'이 그랬다. 이 노래를 들은 한 여성이자살을 했었고, 또 자살을 하려던 한 남자는 삶의 의욕을 찾기도 했다. 이처럼 양극 적인 음악적 반응에 혼란을 가졌던 그 자신도 지독한 병마(경추결핵3기)와 싸우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았던 비운의 가수였다.10년 전 도시의 삶이 '번잡스러워' 강원도 산골인 대관령 왕산으로 들어가 운둔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은 70년대 포크의 질감을 유지한 채 장르와 분석이 힘든 다양한어법으로 프로그레시브, 포크 록 등을 넘나 들고 있다. 또한 부끄럼을 지닌 듯 순박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파열음을 내는 다소 난해한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의 흐느적거리듯 나른한 멜로디와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시적인 노랫말은 삶이 버거운 사람들에겐 노래 이상의 존재로 다가간다.
한국 정통포크의 희망
벌써 데뷔 20년이 되어간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 그는 가난하지만 늘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추억의 전당인 '미사리'밤무대에는 서지 않고 있다. 가난해도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노래 분위기와 신념과 맞지않은 곳은 앞으로도 거리를 둘 생각이다." 그래서인가 미당 서정주의 장례식 때 초청되었지만 가지 않았다. 아마도미당의 친일 행적에 대한 당시의 뜨거운 논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의 노래 '귀촉도'는미당의 장례식장에서 조곡으로 들려졌다.김두수는 75년 대마초파동이후 단절된 한국 정통 포크의 완성을 꿈꾸게 하는 희망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김두수는 우리가 오랫동안 간과해 왔던 가난한 풍요로움의 아우라를 질박하고 단호하게, 그러나 명료하게 제시한다. 김민기와 한대수, 조동진과 정태춘이 한국 음악의거대 신화라면, 김두수는 그 거목들 뒤로 수줍게 펼쳐진 산중 초원의 들국화의 강인한 향기를 품고 있다"고 평가한다.
“내게 있어 음악은 그저 일상이다. 완벽하기보다는 털털한 느낌이 나는….” 그가 말하는 자기 음악이다. 김두수의 음악은 자신의 노래처럼 '보헤미안'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기슭으로 가는 배'처럼, 추억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 가고 있다. '이 시대의 가인'으로불리기 시작한 그의 노래를 한번 들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