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내렸다.

미리 선약이 있어 못 온다는 셋째 빼고는 독수리 오형제가 다 모였다.

다들 마중나와서 사직동 아버지 계신 공원묘지로 향했다.

아버지 예순도 안돼 일찍 돌아가셔서 어마니 묘소는 마련 안했더니 어머니마저 5년 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좀 뚝 떨어진 양산에다 모셨다.

참말로 "졸혼"인 셈이다.

얼마나 사이가 좋으셨는지....싸움 구경 한 번 못보고 우리는 자랐다.

늘 이른 아침이면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으신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곤 하셨다.

우리들도 이젠 다 늙었다.

죄다 육십이 넘었다.

참으로 세월무상이다.

부모님 보다 모두들 장수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리도 일찍들 가셨는지......


10월 5일 수서역발 SRT를 타고 내려간 부산. 3박 4일 오흐 5시 15분 srt까지......사연도 많았고 재미도 있었다.

다음에는 오형제가 다 모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들 건강하게 다시 만날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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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궁...안 연휴 무리를 했는지.....고뿔이 대단하다.


10월 16일 낑겨넣은 글


















재령 이씨 종가 음식

쿵쾅, 쿠르르,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진다. 코끼리 무리가 달려드는 듯하다. 잘 생긴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박사가 펄쩍 뛴다. 가파른 절벽을 내달린다. 성궤가 눈앞에 있는데! 영화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1981)의 한 장면이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한국판 ‘레이더스’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은 단연코 <음식디미방>일 것이다. 조선시대 고서적 <음식디미방>은 영화 속 ‘잃어버린 성궤’만큼 330여년 전 주방의 비밀이 가득한 보물이다. 장금이도 탐낼만한 음식의 비법들이 꼼꼼히 적혀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석계 이시명 선생과 결혼한 장계향 선생이 75살이 되던 해(1672년)에 쓴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이다. 이전에 허균의 <도문대작>이나 김유의 <수운잡방> 등의 요리책들이 있었지만, 모두 한자로 기록된 책들이었다. 이 책에는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 선생의 종가음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빛을 드러내다

이 보물책이 세상에 나오된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다. 1960년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김사엽 박사가 이시명 선생의 둘째 아들 존재 이휘일 선생의 후손 서가에서 책을 발견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서책’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김사엽 박사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전통음식연구가들은 금은보다 엄청난 보물이 이 책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5년 황혜성 선생(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기능보유자. 2006년 12월 타계)은 <음식디미방>을 보기 위해 경상도로 길을 나섰다. 그는 버스에서 한 학생에게 ‘재령 이씨댁’을 물었는데, 그 학생이 재령 이씨 13대 종손 이돈씨였다. 당시 그는 대학 1학년이었다. 장계향 선생의 285주기 불천위(집안의 뛰어나신 분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이렇게 황혜성 선생과 인연이 닿은 <음식디미방>은 <다시 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저), <음식디미방 주해>(백두현 경북대학교 교수 저) 등의 여러 권의 책과 각종 논문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책은 경북대 고문서 보관실에 있다.

 

13대 종손 이돈(71)씨와 종부 조귀분(60)씨는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집안의 음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씨가 만든 석이편(석이버섯떡)은 단맛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찹쌀가루, 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고 그 위에 잣가루를 얹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 첫 맛은 너무 거칠어 떡인지 의심이 간다. 하지만 한 개, 두 개, 먹을수록 자꾸 손이 가게 하는 묘한 맛이 있다. 이 떡을 만드는 법은 <음식디미방>의 면병류 석이편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종부는 “장씨 할머니 음식 중에 잡채, 대구껍질느르미, 동아느르미, 모시조개탕 등이 인상 깊다”고 말한다.

 

 

집안 몰락으로 흩어진 유물 찾으려 돈 버는 일부터 나서


지금 수원에 살고 있는 종손과 종부는 노구에도 조상이 남긴 유산을 아끼고 세상에 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장계향 선생이 노년을 보낸 고택(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 옆에 집을 지어 종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최근엔 <음식디미방>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곧 고향에 내려갈 예정이다.


6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종부는 안동 지역에서 열리는 종가포럼에 참여하고 종가음식에 대한 강연도 한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추운 겨울에도 고운 한복을 여며 입고 길을 나설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 300여년 전 총명했던 장계향 선생을 보는 듯하다. 그는 “후손으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그저 평탄한 삶을 산 듯 보이는 종손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의 아버지 이병흠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집안은 황폐해졌다. 전쟁통에 집안의 유물들은 하나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씨는 종손으로서 그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쟁이로는 뜻을 이루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10년간 잡아온 교편을 접고 37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가방회사는 1970~80년대 ‘백만불 수출탑’에 이어 ‘오백만불 수출탑’을 탈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안의 유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전가보첩>은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집안의 유물이다. “할머니를 알리는 일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종손은 지금도 생각한다.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나눔에도 큰 손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답니다.”종손의 기억이 곱다.


 

 

 

 

 

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기록된 모든 음식 개량화해서 좀 더 실용적으로 복원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종손과 종부만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결성돼 일부 음식을 재현하고 있다. 2009년엔 영양군청에서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최근까지도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모든 음식을 개량화해 좀더 실용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책에 기록된 음식법이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복원이 쉬웠다. 하지만 면 요리는 까다로웠다”고 말한다.


복원을 위해 한 가지 음식을 수십 번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기록한 양은 엄청나게 많아요. 평상시에 늘 먹는 요리가 아니라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집안의 큰 행사, 보양이 필요할 때 만들어 먹었던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 교수가 복원한 <음식디미방>의 음식은 저칼로리 건강식이다.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찌는 방법을 사용해 담백하다. 그 중에서 ‘느르미’가 독특하다. 밀가루가 들어간 소스 같은 것이다. 잡채도 특이하다.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종부 조귀분씨는 이 복원작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맛을 보거나 만드는 방법을 지켜보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강한 불은 ‘매운 불’, 고명은 ‘교태’, 부패한 건 ‘독한 고기’


<음식디미방>의 뜻은 ‘음식 맛을 아는 법’이다. 그 법을 살짝 들여다보자. 총 146가지 조리법이 있다. 면병류(면과 떡)가 18가지, 어육류(생선과 고기)가 74가지, 주류 및 초류(식초)가 54가지. 부록으로 ‘맛질방문’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난 것이 많다. 밥과 죽에 대한 요리법이 없다. 밥짓기는 너무 평범해서 뻔 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국수는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와 녹두가루로 만들었다. 당시엔 귀한 음식이었다.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임진왜란 때라고 하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대신 천초, 후추, 마늘, 파가 들어간다. 육류요리가 많은 데 재료는 주로 소의 위나 개고기, 꿩고기다.  개고기의 창자로 만든 순대는 별미 중 별미다. 개장찜, 개장느르미, 누렁개 삶는 법까지 세세하다.

 

곰발바닥 요리도 있다. 각종 한과와 떡 만드는 법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숭어나 모시조개, 참게로 만드는 요리들도 있어 다양하기까지 하다. 양반집답게 술 빚는 법도 여러가지다. 다식은 두장의 기왓장을 붙여 불에 데워 만드는데, 오늘날 과자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허 교수는 “버섯종류로 추정되는 진이나 곰발바닥, 자라, 참새, 개 등만 빼면 요리법에 들어가는 많은 식재료가 지금도 구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부록 ‘맛질방문’은 장계향 선생의 외가댁 맛질마을(지금의 예천)의 맛을 기록한 것이다.


장계향 선생의 표현법 역시 재밌다. 그는 강한 불을 ‘매운 불’, 고명을 ‘교태’, 부패한 고기를 ‘독한 고기’라고 불렀다. <음식디미방>을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책의 표지에 적힌 한자 때문이다. 후손들이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있는 한글 ‘음식디미방’은 장계향 선생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 맞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맛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 보물책을 보기 위해 누구든 ‘인디아나 존스’가 될 것이다.

SUBJECT   貞夫人 安東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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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두들마을)

[원리 쉼터]

정부인 안동 장씨(1598∼1680)는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속에서 총기 있던 소녀는 10여세의 어린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敬身吟(몸가짐을 조심하다)> <蕭蕭吟(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

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약포 정탁의 3子/초서의 대가)은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

두들마을은 1640년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 1590~1674)선생이 丙子胡亂(병자호란)을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조선 고종 때 광제원(廣濟院)을 이곳에다 세웠다.  

선생은 석계위에 집을 짓고 호를 석계라 하고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정부인 장씨도 선생의 학명 못 지 않게 효행과 부덕 ,학문 예술, 등을 겸비한 학자로 세인이 신사임당과 동등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정부인 장씨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녀는 나이 19세에 아버지의 제자 석계 이시명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 김씨와 1남1녀를 둔 27세의 홀아비였다.
남편과는 8살 차이, 게다가 재취로 들어간 자리였으나,
장씨 부인은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업고 다니는 열성을 다해 키웠다한다.

이후 그녀는 6남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완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루는 동네잔치로 이웃들이 모두 모여 기생을 부르고 음악을 베푸는가 하면, 처용무를 펼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임신 중이던 그녀는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접한 친정아버지는 "너는 내게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구나"라며 탄복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택이었을까,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3녀를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 중에서도 둘째 존재 휘일, 셋째 갈암 현일, 넷째 숭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시댁으로부터 200여리 떨어진 친정엔 돌보아 드릴 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는 부모가 계셔서, 무남독녀인 장씨 부인은 친정에 계신 부모가 항상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환갑이 되던 해 한살 연상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차마 떨어질 수 없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 하에 친정에 2년을 머물면서 아버지를 모셨으며, 또한 계모를 맞게 하여 친정의 대를 이었다.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계모와 4남매를 시집으로 데려와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리고 시집 근처에 외가의 사당을 짓고 조상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 살아 계실 제, 아들 상일·휘일·현일 삼형제를 외조부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배려로 슬하의 아들 7형제 모두가 문명으로 현달해, 안릉가 '7룡'으로 알려졌다.

특히 셋째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영남을 대표하는 사림으로 천거되어, 1692년(숙종 18)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창이던 현종∼숙종 연간(17세기 중, 후반)에 남인의 영수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이현일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을 울리게 된 상황에서, 그녀는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라며 늘 자식들의 사람됨을 훈육 하였다.

장씨는 혼담이 오간 18세 이후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서화며 글씨들을 모두 접었다.
10대 초반에 이미 상당한 재능을 드러냈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붓을 잡은 적이 없었다.
손자 온과 재에게 학문을 권하는 시를 쓴 67세 때까지 그녀는 시를 쓰지 않았다.
남편 이시명도 그녀의 나이 46세가 되어서야 어린 시절의 시작 '聖人吟(성인을 읊다)'와 '소소한 빗소리' 등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작품에 감복한 남편 이시명은 詩들을 모아 단아한 행서체로 '傳家寶帖(전가보첩)'이라 이름 붙였고, 둘째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일곱 아들을 상징하는 여덟 마리의 용을 그곳에 수놓았다.  

가문에서 전승되는 八龍繡帖(팔룡수첩)'이라는 서책이 이것이라한다.
청담선사가 애송했다는 아래‘蕭蕭吟(소소음)은 불과 13세 때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투시한 禪詩(선시)의 깊이로 느껴진다.


蕭蕭吟(소소음)


창 밖에서 보슬보슬 비가 나리니

보슬보슬 빗소리 자연스럽네

자연스런 빗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마냥 자연스럽네



聖人吟(성인을 읊다)



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서

성인의 모습 뵈옵지 못했으나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어

성인의 마음 쓰심을 넉넉히 알리



敬身吟

이 내 몸은 부모님께서 주신 몸인데

감히 이 몸을 공경하지 않을 손가

이내 몸을 욕되게 한다면

이것은 어버이 몸을 욕되게 함이로다



'鶴髮詩 三章(학발시 3장)'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자식은 멀리 만리 되는 수(戍)자리에 갔구나

만리 밖 수(戍)자리의 내 아들

어느 달에 오려는가               * 수(戍)자리:국경을 지키는 일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지쳐 누었는데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

무심한 하늘은 막막하여 대답조차 없구나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나간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부인은 다른 여성들의 글과는 달리 철학적 사색과 학문에 대한 감회를 표현했다.
서민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고단한 삶을 노래했다.  

그 당시 양반집 출신의 많은 여류 시인들의 시적 주제는 자연, 효심, 님에 대한 그리움, 옛날의 회한 등. 주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에 비춰 볼 때 인류애를 희구하는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鶴髮詩 三章(학발시 3장)'은 이같은 인간미를 보게 된다.

학의 털과 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읊은 3장의 詩라는 의미다.
열다섯살에 아들과 남편을 변방에 보낸, 이웃 동네의 어느 가난한 집을 다녀온 후 지은 이 시는 사언(四言)의 고시(古詩)로 "장부인 實紀(실기)" 마지막 부분에 초서로 쓰여 있다.  

내용만 보면 그 나이에 지은 詩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초들의 처절함이 알알이 배어 있다.
시를 지은 동기부터 갸륵하기 그지없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겨 시어머니를 모시지만 만리 먼 변방에 군역 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이 없다.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깜박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80이 넘은 애절한 시어머니를 보고 나도 슬퍼 이 시를 짓는다.”

그 내용은 지금도 보는 이의 애를 끊는다.

기다림에 지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삶.
불쌍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환영을 찾아 병든 몸을 이끌고 찢어진 속옷을 펄럭이며 아들의 환영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쫓아 뛰어나가 붙잡고 함께 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貞夫人 安東 張氏

 

 

 

 


 

한국 음식학의 기초를 놓은 貞夫人. 안동 장씨

 

 

 

 

 

 

조선시대 각각의 음식에 대한 조리과정과 음식을 종류별로 체계화시켜 펴내 장씨는 330년 전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요리책 저자이다. 안동 양반집 정부인의 삶 속에서 요리는 어떠한 가치였을까. 그녀를 통해 조선시대 식생활문화와 여인으로써의 그녀의 삶을 엿본다.



“녹두 껍질을 벗기고 뉘 없이 되게 갈아서
기름을 잠기지 않을 만큼 붓고 끓여라.
간 녹두를 조금 떠놓고,
껍질 벗긴 팥을 꿀에 반죽하여 소를 넣어라.
그 위에 녹두 간 것을 덮어 기름종이 빛처럼 구워야 맛이 좋다.”



이 글은 정부인 안동 장씨張氏가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에서 빈대떡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146가지의 조선시대 음식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을 지은 장씨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인에게 조선시대의 어머니로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보통 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년이나 한석봉의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 중의 한 사람으로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1598∼1680년를 빠뜨릴 수 없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어떤 사람일까. 가족과 이웃에 미친 장씨 부인의 행실과 인품, 탁월한 어머니로서의 역할, 뛰어난 예술적 재능, 그리고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등 그녀가 이룩한 다양한 업적을 알게 되면, 그녀가 왜 조선의 어머니로 기억되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 미친 자애로움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1598년에 태어났다. 19세에 재령 이씨 집안의 이시명과 혼인하였는데, 장씨 부인이 살았던 집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두들 마을)의 석계고택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시명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온 장씨는 육남이녀를 두었는데, 전처의 자식까지 거두어 모두 칠남삼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다.

 

 

장씨 소생의 둘째 아들 현일은 미수 허목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셋째 숭일은 현감을 지냈으니, 두들 마을의 재령 이씨 가문에서 장씨 부인에게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마을 앞에 유적비를 세우는 까닭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집안을 이렇게 크게 일으켰으니 장씨 부인이 남자였다면 가히 중시조 대접은 받았을 듯하다.

 

 


정부인 안동 장씨 실기’에는 그녀의 인품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왜놈이 일으킨 임진왜란 병화로 백성들의 기근이 참혹할 때, 가마솥을 마당에 내걸어 놓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니 원근에 의탁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 부지기수로 모여들어 조석에 이백여 권구眷口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 때 행랑에 있는 한 양반이 향사 모임에 가려 하나 도포가 없어서 가지 못하자 이시명이 입었던 옷을 벗어 주려 하였다. 장씨 부인이 가로대 “남을 주면 새 옷을 주어야지 어찌 입던 헌 옷을 주리오” 하면서 갈무려 두었던 새 옷을 주면서, “이 옷을 다시는 찾지 아니할 것이오”라 하였다.

 

 

집안의 비복들이 부인의 어진 마음씨에 저절로 감화되어 마음으로 복종하니 동네의 다른 집 하인들이 “우리 몸이 이렇게 세상에 나서 저 댁의 노복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 늙고 의탁 없는 이와 어린 고아를 구제하여 평생 유덕함이 이러하니 사람들이 왕왕이 지성으로 축수하는 말이, “이 아기씨님, 수복 무강하옵소서. 우리 몸이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을 한 번 갚기 소원이라” 하였다.

 

 



내로라하는 문학과 예술적 재능


 

 

 

'장씨 부인은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준다. 장씨 부인이 지은 한시와 그것의 유묵들이 몇 점 전하는데 부인이 열다섯 살에 지은 ‘학발시’鶴髮詩 등이 있다. 부인이 어렸을 때 80세의 이웃 할머니가 자식을 수자리에 보내고 해포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숨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노파의 슬픈 사연을 시로 지었으니 이것이 곧 학발시이다.




鶴髮臥病 行者萬里

          흰머리 늙은이 병들어 누웠는데 멀리 간 자식은 만 리 밖에 있구나.
行者萬里 曷月歸矣

         멀리 가 만 리 밖에 있으니 달이 차도 어찌 돌아오리.
鶴髮抱病 西山日迫

   흰머리 늙은이 병을 안고 있으니 저무는 인생의 해는 서산으로 달려가네.
祝手于天 天何漠漠

           하늘에 축수하여 빌어 보건만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한고.
鶴髮扶病 或起或?

           흰머리 늙은이 병든 몸을 붙들고 일어나다가 또 넘어지는구나.
今尙如斯 絶?何苦

           지금 오히려 이와 같으니 헤어져 사는 것이 어찌 괴롭지 않으리.

 

 



군대 간 아들의 무사 귀향을 기다리는 백발 노파의 안타까운 모습이 열다섯 살 처녀의 눈에 애틋하게 비쳐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했으니 이웃에 대한 부인의 자애로운 마음은 천성이었던가 보다. 이 자애로운 천품이 팔십 평생 동안 가족과 이웃에게 두루 미쳤으니 그 훈화의 넓고 깊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시구에 녹아 있는 연민과 애정은 부인의 익숙한 붓놀림으로 더욱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부인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학발시의 글씨가 예사롭지 아니하다. 빼어난 기품에 유연한 부드러움이 획을 따라 미끄러지듯 흐른다.

 

 



한국 음식학의 기초를 놓다 - <음식디미방> 저술

 

 


 

 

'장씨 부인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한국 음식 연구의 토대가 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흘러간 시간 속에 묻혀 버렸지만, <음식디미방>은 현대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원천 자료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1670년경에 저술된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쓴 조선 최고最古의 음식조리서로서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부인은 당시의 음식 조리법을 대대손손 전하려는 뜻에서, 노년의 침침한 눈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동안 익혀온 각종 조리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만두법, 상화법, 빈자법, 박산법 등 약 146개 항목에 달하는 각종 음식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붕어찜, 족탕법, 연계찜, 개장국, 누른 개 삶는 법 등 흥미로운 조리법도 나온다. 그리하여 한국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오늘날 전통 한식을 연구하고 옛 음식을 복원하는 전문가들은 이 책의 도움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음식디미방>의 권말에는 부인이 직접 쓴 다음과 같은 필사기가 씌어 있다.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라.”

 

 



노년의 어두운 눈으로 간신히 이 책을 썼으니 그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책은 본댁에 간수하여 오래 전하라고 당부한 내용이다. 이 당부가 후손들에 의해 그대로 실천되어서 오늘날까지 온전한 모습 그대로 경북대학교 고서실에 보존되어 있고, 그 영인본이 여러 번 간행되어 한국 음식학의 고전이 되었다. 부인의 멀리 내다보는 생각과 선조가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이 책을 지켜 온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서로 감응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 글_ 백두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_ 백두현, 경북영양군청 문화관광과

게시일 2008-07-29 09: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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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재령 이씨 도토리 죽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 조용헌
우리나라에서 도토리 죽으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바로 영덕군 영해에서 살았던 재령 이씨(載寧 李氏) 집안이다. 지난번 칼럼에 나간 영양군 석보에 있는 400년 된 참나무 이야기를 읽고 소설가 정동주(61) 선생이 이 집안 도토리 죽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써야 한다!'고 필자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영해의 재령 이씨들이 1년 동안 수확한 도토리의 양이 자그마치 200가마 분량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두 가마도 아니고 어떻게 도토리를 200가마씩이나 수확을 했단 말인가!

이씨들은 당시 '마당 6000석'을 하던 부자였다.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창고의 쌀은 제외하고 추수가 되면 본가의 마당에 쌓인 쌀이 6000석이었다는 의미이다. 영남에서 5위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도토리 죽을 끓여 주었다. 배고픈 이웃을 돕는 것이 양반이 해야 할 처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경상도는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도토리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집안에서는 하인 수백 명을 시켜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모으도록 하였다. 그 분량이 1년에 200가마였다.

영해의 재령 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의 안주인인 진성 이씨 부인과 그 셋째 며느리인 장 부인(張桂香)이 중심이 되어 대문 밖의 은행나무 밑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하루에 평균 300명분의 도토리 죽을 쑤었다고 한다. 이 죽을 먹으려고 경북 북부 일대의 기민(饑民)들이 몰려들었다. '이씨 집에 가면 죽을 준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에 700명분의 죽을 끓여야 할 정도였다.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

영양군 석보로 분가를 한 석계 이시명과 장 부인은 이사오자마자 도토리나무부터 심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도토리 죽을 끓여 댔고, 선대의 그 공덕으로 재령 이씨 후손들이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경부인 장씨 13대손 인터넷 관련 자료 검색

조선시대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교육을 받지못했다. 남자들이 사서삼경()을 배울 때 여자들은

여사서(書)라고 해서 여자들이 지켜야할 법도와 예절을 배웠다. 그런데 대학자의 집안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정부인 장씨는 집안의 분위기와 타고난 총명함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교육과정 중 최고의 수준이라는 시경과 서경까지 터득했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학식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이런 체계적인 요리책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서는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
삼경은 시경() · 서경(經) · 주역()
 
여사서는 한서()를 지은 반고()의 누이동생 반소()가 지은 것으로, 재가 · 질투 · 오락을 여자가 가장 삼가야 할 것으로 금하고 있으며, 유순 · 정숙 등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이 음식디미방이 나오기전에 요리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요리책은

음식디미방보다 100여년 전인 1540년에 탁정정 김수(濯淸亭 金○)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다.

그리고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1611년 바닷가로 귀양 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유배지의 거친 음식들을 먹게되자, 전에 먹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대로 적은 책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을 뿐아니라 음식에 대한 간단한 소개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은 146가지 음식의 조리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조리방법에 대한 정보를 주는 본격적인 조리서인 것이다. 더욱이 각각의 조리과정에 대한 설명이 어찌나 자세하고 구체적인지 지금도 이 책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인터넷 검색 저자 소개
* 이문열 *

 

1948 년 경북 영양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수학.

 

1979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색하곡'으로등단.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 '젊은날의 초상' '영웅시대' '시인'

'오디세이아 서울'

 '황제를 위하여' 등

 

중단편소설 '이문열 중단편 전집'(전5권)

산문집 '사색' '시대와의 불화'

 

대하소설 '변경' '대륙의 한'

평역소설 '삼국지' '수호지'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수상. 

 

  제1부 비구름 걷힌 뒤의 달을 보며

 

세상의 슬픈 딸들에게

 

 나는 조선왕조 연간에 태어나 숙종 연간에 이 세상을 떠난 한 이름 없는 여인의 넋이다.

이 세상에서나를 특정하는 유일한 기호는 아버지의 핏줄을드러내는 장이라는 성씨와

훌륭한 아들을 기려 나라에서내린 정부인이란 봉작뿐이다. 그나마 그 둘을 결합해서야

겨우 딸이거나 며느리 또는 할머니라는 여인 보편의 이름에서 나를 특정해 낼 수 있다.

 나를 수백 년 세월의 어둠과 무위 속에서 불러낸것은 너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웅녀의

슬픈 딸들이었다. 너희 성난 외침과 괴로운 부르짖음이 나를 영겁의 잠에서 깨웠고 삶을

덧없어 하는 한숨과 그 속절없음에 쏟는 넋두리가 이제는 기억에서 아련해진 내 한 살이를

돌아보게 하였다. 고단하고 성가실때도있었지만 아쉬움 없고 뉘우침 없는 이 땅에서의

팔십년을, 그 숱한 크고 작은 선택들을.


 내가 듣기에 너희 성난 외침은 크게 두 갈래로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한 갈래는 남성들의

질서로 조직된 세계에 대한 항의이고 다른 한 갈래는 이제부터라도 그 불합리함에

저항하자는 너희 서로간의 고무와 격려이다.

 오랜 세월 너희는 틀림없이 억압받았고 착취당했고능욕 당해 왔다. 원시 상태에서

물리적인 힘의 우월을 배경으로 자라 온 그 같은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와 의식에 대해

너희가 성낼 만도 하다. 또 예속과굴종이 오랜 습성이 된 너희들에게는 그 명백한 불합리에

저항하는 데도 예사 아닌 각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생산에서든 자기 방어에서든

물리적인 힘의 우월이 예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이르러서도 의연히 옛 질서를

고집하는 남성들에게 효과적인 저항을 하기 위해 너희는 반드시 서로 고무하고

격려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항의가 뒤틀린 이로에서 비롯되거나개인적인 원한에 바탕한 표독스런 저주와

악담처럼들릴 때는 걱정스럽다. 너희간의 고무와 격려도 남성을 상대로 한 투쟁의 선동

또는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자유와 성취를 화려하게 분식한 무책임한 유혹처럼 들릴 때는

역시 그렇다.

 세상에 여자만의 문제란 없거나 지극히 적다. 여성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남성에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성의 문제란 언제나 남성과 관련된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상대인 남성을 적대 개념으로 다루고 방법을투쟁만으로 일관한다면 너희 선택의 폭은 너무 좁고 비극적이 된다. 곧 이겨서 포악한 상대를 온전히 제압하거나 져서 이전보다

더 엄혹한 예속과 굴종에 떨어지는 길밖에 없다. 더 있다면 남녀의 철저한 결별로 인류사의

진행이 중단되는 것 정도일까.

 너희가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으로 보이는 도덕적인불성실과 이기, 그리고 정신적인 나태는

남성만의 약점이 아니다. 거기서 연유된 단정치 못한 성적행실,참기 힘든 이기적이고

무리한 요구들, 그리고 상대에대한 무성의도 그렇다. 곰곰이 따져 보면 기회와 여건의

차이일 뿐 너희들도 그 약점을 나누어 가졌고그래서 너희들 불화는 남성들과 여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된다. 정도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몰아대지 말아라.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약점을 부인하고 오직 남성만을 단죄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하지만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 쯤으로 정의되고간음은'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어쨌거나 굳세고 용기 있는 여인들이지만 그들을 시대의 선구자로 인정하기에는 왠지 망설여진다.
듣기로 종교 집단 초기의 전도열처럼 추악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전파열이 있다고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불특정 다수를 향한복수감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냉정히 따져 보면 이기적이긴 해도 당연한 다수 확보라는 편이 옳다. 나병 환자가 성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회는 나병 환자들을우선적으로 고려한 제도를 가질 것이고 후천성 면역결핍증 환자가 더 많은 사회에서는 또 그들 다수의편의를 위주로 조직될 것이다.
나는 너희 시대의 선구자들이 모두 그 같은 이기적인 전파열에 빠져 있다고는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의 열정에서는 다분히그런전파열의 혐의가 간다. 더 많은 여인들을 자신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소수의 서러움과 불리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있지도 않는 이상의 남성 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기준으로 이 세상 남자들을 난도질하는 이들을 보면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거기에 걸맞은 이상의 여인이 되어야 하건만 그걸위해 노력 할 의사도 성의도 없이 남성에게 요구만하는 그런 이들의 파탄은 불을 보듯 뻔하다.그리하여 실제는 남성에게 외면 당해 놓고도 자신이 용감하게 결별했다고 우기면서 명백한 자신의 부주의와 나태마저 오로지 남성의 악덕으로 전가해버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여인들은 아직 소수다. 세상에는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만큼이나 자신도 이상에근접시키려고 노력하는 여성이 여전히 다수이다.점점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룩한 것만큼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소박하고 겸손한 여인들이아직은 더 많다.
그 바람에 증폭된 자기 방어의 본능은 소수 쪽의전파열을 뜨겁게 달군다. 소수의 서러움과 불리에서벗어나기 위해 그녀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거세질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더 많은 동성들을 자신의깃발 아래로 불러모아 다수를 확보함으로써 자신들을변호하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진실이아니라힘에 의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기실 그것은 남성들의오랜 악덕이던 폭력성의 한 변형일 뿐이다.
도덕적인 부패 혹은 윤리의 착종도 이 시대를 시끄럽게 하는 이기적 전파열의 한 근원이 된다. 인간만의 미덕이던 여러 도덕적 윤리적 원리들은 근년들어턱없이 팽창한 이기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귀찮으면 낡은 시대의 억압이 되고 지키기에 힘이 들면기성 세대의 위선이나 독선이 된다. 특히여성 해방과 성적인 방종은 어디서나 단단히 혼동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부패와 착종은 다행히 아직도소수의 일이다. 귀찮고 힘들어도 다수는 여전히 지금껏 우리를 이끌어 온 원리들을 존중하거나 적어도외경은 품는다. 상대인 남성 쪽의 반응도 아직 불리하다. 특히 여성 해방과 성적인 방종을 혼돈 하는 논리에 박수를 보내는 남성은 아첨으로밖에는 여성의 호감을 살 길이 없는 못난이나 그런 여성이 많아야만한몫 볼 수 있는 바람둥이뿐이다.
따라서 이미 부패와 착종의 길로 깊숙이 들어버린이들에게 다수의 확보는 절실하고도 시급한 과제가된다. 어차피 남성과 무관하게 살수는 없다는 점에서성윤리의 부패와 착종은 특히 그러하다. 알게 모르게나타나는 사회의 경계와 차별도 괴롭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좁아져 버린 남성 선택의 폭도그들 소수의 일탈자들에게는 견뎌 내기 어려운 불리일 것이다. 아첨밖에는 쓸모가 없는 못난이나 무책임한 바람둥이의 성적 노리개로 젊음을 탕진하다가 쓸쓸하고고달프게 삶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서도 좀더 많은 동성들을 부패와 착종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불성실이든 나태이든 또는 도덕적 부패이든 윤리적착종이든 그들 나름의 논리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그렇다 쳐도 선택과 감염은 다르다. 비록 그게 천형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면 기쁘게 견딜수 있다. 그러나 감염으로 얻은 것이라면 사소한 병이라도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된다.현혹은정신적인 감염의 딴이름이다. 온당치 못한 외침들에현혹되어 너희 시대가 오히려 불행해질까 나는 두렵다.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도 내게는 성난 외침만큼이나걱정스럽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견줄 수는 없지만지금 너희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르고 따뜻하며너희 주거는 안락하다. 문명의 여러 이기들은 옛적수십 명의 노비가 하던 일을 대신해 주고 발달한 사회제도는 미래까지도 일부 보장해 준다. 거기다가 대가족의 중압도 없고 남존여비에서 오는 차별도 거의철폐되었다. 그런데도 너희 괴로운 울부짖음이 지금처럼 이 땅에 높게 울려 퍼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진정으로 괴로운 사람에게는 비명도 신음도 겨를이없다. 괴로움을 견딜 만하면서도 그것을 내세워 얻고자 하는 무엇이 있을 때 비명과 신음 소리는 높아진다. 내가 너희 괴로운 울부짖음을 애처로워하면서도걱정하는 것은 거기서 진하게 풍기는 과장의 혐의 때문이다.
오랜 세월 너희는 남성의 짐이 과장됨으로써 생긴부당함을 겪어 왔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그들 몸의 수고로움이 과장되어 폭력적 지배의 근거를 이루었고 그 마음의 괴로움은 불합리한 가부장적 권위의원천이 되었다. 원래 너희와 똑같이 나누어야 할 세상의 지분이 남성에게 지나치게 넘어간 것은바로 그가정에서 비롯되었다.
설령 마땅히 되찾아야 할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할지라도 턱없는 과장은 좋지 않다. 그것은 논의의진실성을 해치며 때에 따라서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희가 괴로워하는 짐은 많은 경우 너희만의 짐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지게 된 짐이며 남성들도 함께 지고 있다. 또 출산처럼어떤 짐은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다같이져야 하는 짐이라면, 끝내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조용히 지고가는 것도 아름답다.
거기다가 삶을 즐김과 누림으로만 파악한 데서 터져나오는 너희 괴로움의 울부짖음에 이르면 나는 걱정과 아울러 괴이쩍은 느낌까지 든다. 이 무슨 근거없으면서도 불리하기 만한 삶의 이해 방식이랴. 기쁘고 즐겁기 위해서 온 것이라면 이 세상은 태어나는순간부터 고통의 도가니이다. 반대로 삶을 견디며 채워 나가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면 과장해야 할 고통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백 년 세월을 거슬러 내 대단찮은 한살이를 되돌아보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삶을 덧없어하는 너희 한숨 소리와 그 속절없음에 쏟는 너희넋두리였다. 한 인간으로서 삶의 덧없음에 한숨짓고그 속절없음을 하소연하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수 있고, 낙관주의 유명한 철학조차도 삶의 그러한본질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허망감과 무력감이오직 여성이기 때문이라면 나는 실로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너희 시대가 즐겨 쓰는 말을 빌려 얘기해 보자. 내가 알기로 너희를 그 같은 한숨과 넋두리에 빠지게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것은 요즘들어 부쩍 크게, 그리고 자주 거론되는 '여성의 자기성취'란 말이 아닌가 한다. 언필칭 여성을 위한다는잡지 치고 그걸 떠들어대지 않은 잡지는 없고다른대중매체들도 여성 상대의 지면과 시간만 나면 질세라 그걸 들고 나와 찧고 까분다.
남자들은 자기의 일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성취도있다. 자녀들도 나이가 차면 제 일을 가지고 저마다의 성취를 향해 떠난다. 그런데 주부에게는 무엇이남느냐. 남편 뒷바라지, 아이 기르기로 좋은 청춘 다가고-. 그렇게 나이 든 주부들을 심란케 하다가 한술 더떠 가장 여성을 위하는 체 들쑤셔댄다.지금이라도 나오너라.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에서 해방되거라.
그런데 내게는 그 '여성의 자기 성취'란 말과 거기따른 논의처럼 애매하고 수상쩍은 것도 없다. 애매한것은 자기 성취란 말의 내용과 그 실현 방식이다.
그리고 수상쩍은 것은 그 애매한 논의로 여성을 충동질하는 저의이다.
자기 성취 내용을 특수하면서도 그 가치가 사회적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한정짓는다면 남성에게도 그런 자기 성취는 흔한 일이 아니다. 빼어난재능과 노력으로 남들이 다 인정할 만한 성취를 이루는남성은 많아야 백에 하나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기 성취를 못한 것이 불행이라면 그것은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자기 성취의 내용을 겸손하게 낮춰도 마찬가지다.평범한 재능이라도 나름의 성의와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을 때 그것을 모두 자기 성취로 쳐준다면이번에는 모두가 자기 성취를 한 셈이 된다. 아무도노력과 성의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 도대체 이 세상이란 게 그렇게 수월하게 살 수있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크건 작건 나름의 자기 성취를 하게 되어 있고 그 점에서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어떤 뜻으로 말하든 여성의 자기 성취에서는 가정에서의 성취가 제외된다는 점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는일은 여성이 가장 오랫동안 해 왔고 또 가장 효율성이높은 분야인데도 대중적으로 자기 성취를 논의하는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뒷전으로 밀려 버리고 만다. 지금껏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 온 중년의 자랑스런 주부를 갑작스런 허망감과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는 해괴한 논의이다.
그렇지만 애매함을 넘어 수상쩍은 느낌까지 주는것은 이 시대가 다투어 권하는 자기 성취의 방식이다. 앞서 보았듯 너희 논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자기의 일을 가져라. 자아를 되찾아라.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라. 가정에서 해방 되라^5,5,5^. 그런데 내게는 그런 권유들이 마치 자기 성취를원하는여성에게는 가정은 감옥이고 남편은 폭군이며 아이들은 족쇄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현모양처란 무능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고 내조와 양육은 허송세월의 동의어인 듯하다.
거기다가 더욱 수상쩍은 것은 그렇게 끌어낸 여성들을 이 시대가 몰아가는 곳이다. 어제까지도 성실한주부로서 나름의 성취를 이뤄 가고 있던 여성들이 그애매하기 짝이 없는 자기 성취 여력에 휘몰려 걷게되는 길을 보라. 형편이 좋으면 느닷없이 서투른 예술가 흉내를 내거나 뒤늦게 가망 없는 학문으로 뛰어든다.
그렇지 못한 쪽은 난데없는 여류 사업가 또는 기능인의 꿈에 젖어 사기에 얹히거나 별 소득도 없는 일에심신이 아울러 녹초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런 저런 단체가 좌판처럼 펼쳐놓은 싸구려 문화 강좌나 벌써 오래 전부터 정원 미달인 하류 대학의 대학원에서 혼자 황홀한 몽상에젖어 있는 사이에, 또는 연고 판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조악한 상품의 외판원이 되어 친지들을 괴롭히고다니거나 나이든 비숙련공으로 헐값에 노동력을 팔고있는 사이에 가정은 뿌리째 흔들린다. 점심을 라면으로 때운 아이들은 갑작스레 늘어난 자유시간을 만화가게나 비디오 방에서 폭력과 음란부터 익힐 것이고,남편은 썰렁하고 성의 없는 저녁 밥상머리에서 역시아무 이룬 바 없이 늙어 가는 자신을 새삼 우울하게돌아보게 될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유행하는 여성의 자기 성취에 관한 논의에 영악하고 탐욕스런 자본주의의 간계가 끼어들지않았는지 솔직히 의심이 간다. 문화마저 상품화에 성공한 자본주의가 방대한 시장 개척을 위해 여성에게걸고 있는 집단 최면이 바로 그 요란한 자기 성취의논의는 아닐는지. 또는 그들의 논리로 보면 가정에사장되어 있는 값싼 노동력을 거리로 끌어내기 위해창안해 낸 효과적인 구호가 바로 그 여성의 자기 성취는 아닐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너희들의 모든 자기 추구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날의 내조가 허락한 경제적 여유와 잘자란아이들이 준 여가를 예술적 재능의 연마나 배움을 넓히는 데 쓰는 것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편리해진 만큼 쓰임새도 늘어난 세상에서 가장의벌이가 부실할 때 그를 도와 넉넉한 살이를 도모하는 것도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너희 중에는 한 범용한 남성을 도와 집안을 일으키고 별 가망도없는 아이들을길러 제 구실이나 하도록 하는 데 묻어 버리기에는아까운 재주를 타고난 이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세상은 변하였다. 남녀를 확실하게 구별해주던 출산의 기능마저도 머지 않아 과학과 기계가 대신하게 될지 모르는 이런 시대에 유독 너희만을분별하여 들려줄 얘기가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너희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사백 년 가까운 세월도 나를자신 없게 하기에는 넉넉하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틀림없이 세상 많은 것은 변하지만 더러는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어떤 것들은 시간의 파괴력을 이겨내어 존재하고 어떤 원리들은 시대의 변화를 뛰어 넘어 작용한다. 사람의 딸로태어난 너희가 이 세상에서 걸어가야 할 길에도 그런것들은 있다.
나는 바로 그 믿음에 기대 이제 너희에게는 자칫 뜻없이 지루하기만 할지도 모르는 내 한 살이를 되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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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검제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땅은 그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뜻을 키우고 마음도 닦아준다. 이에 선현께서도'그 사는 땅이 어질면 아름답다'라 하셨고, '슬기롭기를 바란다면 어진 곳을 골라 살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조선 선조 31 년 왜장 소서행장이 그 마지막무리를 이끌고 이 땅에서 쫓겨나기 하루 전인 동짓날스무나흗날 안동 서쪽 20리쯤 되는 검제에서 태어났다.
검제는 낙동강의 한 갈래인 솔밤내 상류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 이름이다. 달리 금지, 금음지, 금제로 불리기도 하는데 밖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은 금계촌이다.
사람의 몸을 기르는 것이 곡식과 어염 뿐이라면 검제는 그리 넉넉한 땅이 못된다.
북으로 조골산, 서로 학가산, 남으로 갈라봉이있어들이 넓지 못하고,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하나 수운이 닿지 않는 지류여서 그에 따른 이익도 얻기어려웠다.
하지만 가까운 산세는 부드럽고 골짝마다 흐르는 맑은 물은 사철 마르는 법이 없어 넓지 않은 들이나마그곳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에게 입성과 먹을거리를대는 데는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옛부터 검제가 '천년불패의 땅'이라 불린 까닭은오히려 사람의 심성을 다스리고 이끄는 그 지형과 수상에 있었던 듯 싶다. 나지막하면서도 저마다의웅위와 품자를 지닌 봉우리와 언덕들, 그리고 군데군데우뚝 선 잘생긴 바위들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금계천과 더불어 숨어사는 선비가 뜻을 키우고 마음을 닦는데 더할 나위 없는 도량이 되어 주었다. '나이 많은노인을 뫼시는 집이 많아 일향의 사람들이 모두 (검제를) 노인촌이라 부른다.'는 기록도그런 산천의 혜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검제는 아래로 만운촌으로부터 복당 사망 알실 부로동 금장동 효자문 미산 춘파 가음동 봉림에 이르기까지 스무남은 마을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다.모두가 나름으로 문벌과 인재를 지닌 마을이라 '열두 검제'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그 마을이란 게기껏해야 대여섯 채의 집이 모여 만든 작은것인데다가 그마저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하회와 같은 규모는느낄 수가 없다. 여기서 다시 '들을 검제지 볼 검제는 아니다'란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땅이 어질다는 것은 산천의 풍미나 풍토의 순조만을 말함은 아닐 터이다. 일찍이 그 땅에 살다 간 사람들의 성취도 뒷사람에게는 유념해야할 택리의 조목이 된다. 그런 면에서 검제도 헛되이 이름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났을 때만 해도 백죽당을 비롯해 단계 선생의곡절 많은 사자와 용재, 마애, 동호, 그리고 학봉 선생의 옛집들이 곳곳에 남아 그 땅에 살다간 선현들의자취를 전해 주었다. 송암과 임연재도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으며 그 밖에도 열 손가락으로는 다헬 수 없는 존숭받는 이름들이 눈부신후광처럼 그땅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능곡에 흩어져 있는 삼태사(고려 건국 공신으로 안동 김씨의시조인 김선평, 안동 권씨의 시조인권행,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의 묘우나 서애 선생의 윗대 제사인 영묘당은 비록 그 땅에서 나지는 않았으나 한 시대를 떨쳐 울린 이들의 삶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검제에서 나고 자라는 뒷사람들에게는 그들 모두가긍지요 격려요 지향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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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대
내가 자란 곳은 '열두 검제' 중에서도 춘파라는 마을이었다. 춘파는 당시 봄파리라고 불리었는데 벽상삼한중대광아공신태사 휘 정필을 시조로 하는 안동정씨들이 대여섯 집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태사공은 원래 화하 분으로 당나라 말기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공자의 화상과 일흔 제자들의 위판을 모시고 해동으로 건너오셨다. 그 때에 많은 경전과도적도 함께 가져오신 공은 먼저 인동 땅에 자리잡으시고 제자를 기르시다가 뒤에 다시 안동으로 옮기셨다.비록 도래인이나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공의문하에 많은 제자가 모이니 곧 안동의 호족을 이루셨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럽기는 이 땅도 마찬가지여서때는 후삼국이 한창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무렵이었다. 마침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안동부근에서 한바탕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때 태사공께서는 안동의 다른 호족 김선평, 권행과 함께 더불어 왕태조를 도와 견훤을 크게 무찔렀다.감격한왕태조는 세 사람을 나란히 태사로 봉하니 이가 곧안동의 삼태사이다. 그 뒤로 삼태사의 후^36^예들은안동을 본관으로 삼고 인근에 흩어져 번성을 누렸다.
춘파에 사는 안동 장씨 입향조의 휘는 의이고 고려말에 후릉참봉을 지내셨다.
이씨들의 득세로 나라 운세가 글러감을 매양 한탄하다가 시조공의 묘소에 가까운 산 속으로 물러나 사시게 되었다. 그 뒤 자손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바로춘파이고 나의 친정 아버님은 입향조의 6 대손이 된다.
나는 아버님 휘 홍효와 어머님 안동 권씨 사이의외동딸로 태어났다. 비록 여자로 태어났으나 검제의빼어난 산수와 인물들은 어린 내 정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소문보다는 볼품없는 시골 마을이 되고 말았지만 숲이 짙고 물이 마르지 않았던 옛 검제는 천년불패의 땅이라 믿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광을 지니고있었다.
거기다가 그 시절 특유의 도참이 더해져 골마다 용이노니는 못이요 봉우리마다 봉이 깃드는 둥지였으며금계가 알을 품고 주작이 춤추며 날았다.
하지만 내 어린 기억과 감동에 생생하기로는 아무래도 검제의 인물들이 남긴 일화들이 된다. 그 살아있는 전설들은 때로는 엄숙한 교훈과 더불어 내삶이지향해야 할 곳을 넌지시 일러주었고 때로는 애틋한감회와 함께 어린 꿈에 아로새겨졌다. 비록 내 자신의 삶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내 삶에 영향을 미친만큼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 속을 떠도는 몇몇만 추려보자.
어린 여자아이의 감수성에 걸맞게 애절하면서도 감동적이기는 단계 선생의 후사에 얽힌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세상에 이르는 바 사육신 가운데 한 분인단계하위지는 계유정난 뒤 어쩔 수 없어 세조의 벼슬을받았으나 그 녹은 먹지 않고 따로이 모아두었을 만큼개결한 인품을 지닌 절신이었다. 뒤에 성삼문 등과함께한 음모가 발각나 수레에 몸이 찢겨 죽고 그 아들 호와 박도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때 둘째아들 박은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금부도사에게청해 어머니에게 결별하면서 말했다고 한다. '죽는 것은 두렵지않사옵니다.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제가 어찌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시집갈 누이는 비록 천한 종년이 되더라도 어머님은 지어미된 의를 지켜 한지아비만을 섬겨야 될 줄 압니다.'  그리고 태연하게죽음을 받으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해 마지 않았다.내 어린 마음에도 지어미된 의와 더불어 자식을 잘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섬뜩하게 느끼게 해주는 애사였다.
애절하면서도 감동적인 얘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역 죄인으로 멸문을 당하는 만큼 아직 강보에싸인 단계 선생의 어린 조카 원도 죽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선생이 부리던 비복의 충성과 기지로 원은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자라 후사를 잇게 된다. 금부도사가 선생의 집으로 들이닥쳐 가솔들을 끌어갈때 마침 원과 비슷한 어린애를 기르던 여종이 자신의 아이와 원을 바꿔치기 하여 살려 낸 것이었다. 그 뒤 단계 선생의 충절을 기린 검제의 안동 권문이 종의 품에서 장성한 원을 사위로 맞아들여 선생의 후사를 잇게 했는데 그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검제 초입에 있는 솔밤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그 얘기에서 통상 자신의 핏줄을 죽여가며 주인의 아들을 구해 낸 비복의 피를 토한 듯한 충성에 감동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바꿔치기를 생각해낸 그 기지를 칭찬했다. 그러나 내게는 왠지 그렇도록 비복을 돌본 선생의 인품이 먼저 떠올랐고 아울러진정한 주종 관계란 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따져보게 해주었다.
풍류스럽고 호방하기로는 백죽당의 고사가 있다.백죽당 배상지는 여말에 사복 시정을 지낸 이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검제에 내려와 봉림이라는 곳에자리잡고 살았다. 아들 넷 모두 등과 하여 각기 사헌부지평, 관찰사, 감찰, 이조정랑이 되었고, 그 형 상도는 대사성을 지냈으며 아우 상공은 판서에이르렀다.거기다가 조카들 역시 등과하여 관찰사와 이조정랑을지냈으니 그 집안은 검제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이 다알아주는 문벌이 되었다.
그 백죽당의 세 아들이 급제하기 전 가까운 죽림사란 절에서 학업을 닦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기생 셋을 불러 술을 마시는 데 갑자기 백죽당이 아들들을보러 왔다. 모처럼 풍류를 즐기던 세 아들은 아버지의 느닷없는 방문에 놀란 나머지 기생을 껴안고 이불을 덮어써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백죽당은빙긋이 웃으며 벽에 시 한 수를 적어 놓고 그 곳을 떠났다.
배가 한 놈 배가 한 놈에 또 배가 한 놈이라
세 배가 놈 모인 곳에 봄바람이 도는구나
절 이름은 죽림이나 대나무 숲만은 아니로세
대나무 숲 깊은 곳에는 복숭아꽃도 피었다네
일배일배부일배(하나 일, 성씨 배, 하나 일, 성씨배, 다시 부, 하나 일, 성씨 배)  삼배회처춘풍회(석삼, 성씨 배, 모일 회, 곳 처, 봄 춘, 바람 풍,도아올 회)  명시죽림비단죽(이름 명, 옳을 시, 대나무죽, 수풀 림, 그를 비, 다만 단, 대나무 죽)
죽림심처도화개(대나무 죽, 수풀 림, 깊을 심, 곳처, 복숭아 도, 꽃 화, 열 개)
사람들은 흔히 그런 백죽당의 인품과 도량에 감탄하고 그 호방스런 골계를 재미있어 한다. 혹은 풍류를 이해하는 그 멋스러움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나는 그 시에서 아들들에 대한 백죽당의 다함없는 믿음을 본다. 그 아들들도 뒷날 나란히 대과에 올라 그런 아버지의 믿음에 보답했다. 비록 어린나이에 그얘기를 들었지만 그때조차도 부모의 믿음과 거기에보답하려는 자식의 분발이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으로 내 가슴 깊이 와닿았던 듯하다.
내 아버님의 스승되시는 학봉 선생은 그 생애 전체가 좋은 본보기가 되실 분으로 그 학덕과 훈업을 말하자면 열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동방부자퇴도 선생의 고제로 서애 선생과 나란히 조정에 나가전상호(임금도 겁내지 않는 강직한 신하)란 별호을얻을 만큼 도학 정치를 펼치는 데 힘썼다.임란 전일본 사행에서 돌아와 조정에 적정을 그릇 알린 허물이 있으나 이는 정사인 황윤길과의 불화에서 비롯됨보다는 상하의 경동을 우려함이 크셨기때문이었다.그러했음에도 임진년의 변란을 당하자 스스로에게 허물을 묻듯 감영도 군사도 없는 감사로서 이미 왜적의땅이 된 경상도로 뛰어들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왜적과 싸웠다. 목사가 산중으로 달아나 버린 진주성에이르러서는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시며 판관김시민을 목사로 세우고 경상좌우도의 의병을 규합하여 마침내 진주대첩의 공을 이루셨다.
그러다가 과로에 질병이 겹쳐 두 번째 싸움을 앞두고진주성 안에서 돌아가시니 평생 그를 미워하던 서인들조차도 그 의열에 감복해 했다고 한다.
학봉 선생은 중년에 윗대부터 살아온 임하에서 처가가 있는 검제로 옮겨 사시게 되었는데 내가 자랄때는 이미 돌아가신 지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 그러나 내 어린 날의 기억에 남은 선생은 언제나 기개와재치가 넘치는 개구쟁이일 뿐이다. 그 까닭은 아마도선생이 남긴 유년 시절의 일화들에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선생은 장난이 심했다. 한 번은 상주의 손님이 찾아와 굵직한 버드나무 상장을 사랑 난간에 기대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린 선생은 좋은 장난감을만났다는 듯 그 버드나무 막대를 두 다리에 끼우고말타기 놀이를 하다가 근처 버드나무 숲에다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다른 놀이에빠져 잊고있다가 손님이 돌아가려고 지팡이를 찾자 칠언절구로그 있는 곳을 일러주었다.
이 말은 어는 해에 대완을 떠났는고
올 때 응당 옥문관을 지났으렷다
이제 바야흐로 천하가 평온하니
봄바람 하늘거리는 버들가지 사이에 한가로이 묶여있네
차마하년출대완(이 차, 말 마, 어찌 하, 해 년, 나갈 출, 큰 대, 굽을 완)  내시응답옥문관(올 래, 때시, 응할 응, 밟을 답, 옥 옥, 문 문, 관계할관)방금천하정무사(모 방, 이제 금, 하늘 천, 아래 하,바를 정, 없을 무, 일 사)  한계춘풍세류간(한가할한, 맬 계, 봄 춘, 바람 풍, 가늘 세, 버드나무 류,사이 간)
사람들은 흔히 그 일을 선생의 타고난 재주가 일찍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여 천재니 신동이니 하며 흠모한다. 그러나 어린 내가 부러워한 것은 그들이알지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선생의 노력과 이르고 눈부신 그 성취였다. 나는 아직도 온전히 하늘로부터만받은 그런 재능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검제 사람들이 즐겨 전하는 선생의 어릴 적 일화로는 이런 것도 있다. 선생이 예닐곱 나던 해의 어느여름날이었다. 선생이 또래들과 놀이에 빠져 있는데멀리서 신관 사또의 위세 좋은 행차 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기와 함께 은근히 심술이 발동한 선생은 길가 배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가 그 아래로 지나가는사또의 가마 지붕에다 오줌을 갈겼다. 성난 사또가선생을 배나무에서 끌어 내려놓고 보니 양반집 자제라 벌로 시 짓기를 시켰다. 선생은 별로 겁내는 기색도 없이 벙글거리다가 시 한 수를 내놓았다.
그대는 어찌 먼저 벼슬길에 오르고 나는 이리 늦는가  봄 난초 가을 국화 저마다 그 때가 있으니
오늘 소나무가 평상보다 낮다고 말하지 말라
뒷날 그 소나무가 자라면 그 평상이 오히려 낮으리라
군하선달아하지(임금 군, 어찌 하, 먼저 선, 도달할 달, 나 아, 어찌 하, 더질 지)  추국춘난각유시(가을 추, 국화 국, 봄 춘, 난 난, 각자 각, 있을유, 때 시)  막도금일송저탑(아닐 막, 길 도, 이제금, 날 일, 소나무 송, 낮을 저, 긴 걸상 탑)  송장타일탑반저(소나무 송, 길 장, 다를 타, 날 일,긴걸상 탑, 반대할 반, 낮을 저)
이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흔히 선생의 남다른 재주와 아울러 사내다운 기개에 감탄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꾸는 꿈의 크기와 아름다움이다. 선생은 그때의 어린아이들이 꿀 수 있는 꿈 중에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꿈을품고 계셨음에 틀림이 없다.
그 밖에도 검제에서 살아간 이들로 그 값진 삶의자취가 어린 내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이들은 더있다. 무오사화 때 억울하게 죽인 절개 있는 선비용재 이종준, 한때 권신 김안로와 손을 잡고 천하를 주물렀으며 뒷날 이조판서까지 오른 마애 권예, 이제는'독락팔곡'이란 경기체가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송암 권호문, 역시 퇴도 선생의 문하로 그 배움을 목민에 펼치다가 순직한 임연재 배삼익 같은 분들의 행적도 그 시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아직 잘 모르는 내게는 한 지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일에는 필경 무거움과 가벼움, 길고 짧음, 깊고 얕음이 있게 마련이다. 검제의 산수가하나같이 용지 봉소라 해도 모든 이에게 다 같이 검제일 수는 없고 춘파라고 모두에게 다같이 춘파일 수는 없다. 검제 안에 춘파가 있듯이 춘파안에는 또내 마음의 춘파가 따로 있다. 그 땅을 살다간 사람들도 그러하다. 그들이 끼친 아름다운 자취가 뒷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더러는 그삶을 이끌었다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같을 수는 없다. 어떤 이는 그저부러움을 사고 어떤 이는 다만 우러름을 받을 뿐이다. 어떤 이는 때를 당하여 지침이 되며 어떤 이는일생을 따라야 사표가 된다.
그러나 저 사람의 사표가 곧 나의 사표는 아니다.
내 마음의 춘파는 한 개의 크고 잘 생긴 바위 혹은바위 언덕이다. 그 성취의 길은 달라도 내가 일생을우러르며 이루고자 했던 그 땅의 사람은 나의 친정아버님이다. 그리고 그 둘은 내 기억 속에 너무도 굳건하게 이어져 있어 생겨날 때부터 하나인 것처럼 언제나 함께 떠오른다.
그 바위는 내 살던 옛집에서 멀지 않은 곳, 금계천가의 작은 산 발치에 가파른 언덕을 만들며 박혀 있었다. 한 덩이 큰 화강암으로 열 아름 너비에 높이는스무 길쯤 될까. 날랜 들짐승도 오르기 어려울 만큼높이대로 곧추 치솟다가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겨우몇 평 넓이를 그 옆 꼬불꼬불한 산길로 돌아힘들게오른 이에게 내주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 곳의 경관을 사랑하시던 아버님은 그 바위에 제월대란 이름을 붙이셨다. 비 갠 하늘에 돋은 달을 바라보던 곳^36,36^그 무렵 겨우문자를 깨쳤던 나는 그 이름에서 풍류와 문아를 아울러느꼈다. 뒷날 학자로 자리를 잡아가던 아버님이 제월대 아래 광풍정이란 정자를 지으셨을 때도나는 그이름에서 소장 도학자의 절제된 풍류밖에는 느끼지못했다.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정자란 강학과 수신의터에도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광풍 제월에서 깊어가는 아버님의심학을 느끼게 된 것은 아버님의 오랜 벗이신 인재최 선생이 쓴 '광풍전기'를 홀로 터득하고 나서부터였다. 인재는 조리와 기품을 아울러 갖춘 문체로 그정자와 바위에 붙은 이름을 풀고 있는데 대강 기억하면 이러하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의 달처럼 밝고 깨끗한 것이나칠정의 구름이 덮고 의혹과 완매의 안개가 끼어 그원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 정자에서 성현의 가르치심을 맑은 바람으로 삼아 그 구름과안개를 걷고 본성을 되찾으며, 저 바위에 올라 비 갠뒤의 달을 우러르며 그같이 밝고 깨끗한 본성을 지키고 기르리라^5,5,5^.'
아성께서 가르치신 이른바 존심양성의 이치가 바로그 두 이름에 담겨 있던 셈이다. 인재는 또 쓰기를,'일찍이 공은 정부자(송나라 정경 형제를 높여부르는 말)를 깊이 읽어 그 요체를 '경'에서 찾고 스스로경당을 호로 삼았다^5,5,5^.'
라고 하여 아버님의 호가 경당이 된 유래를 밝혔다. 제월대와 아버님의 기억 속에 그토록 굳건히 묶여 나만의 본향을 이루게 된 것은 아마도 그날 이후가 될 것이다.
줄지어 찾아드는 문도들에게는 배움의 터요 이따금먼길을 오는 동도들에게는 사귐의 마당이 되었던 광풍정은 제월대의 일부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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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경당
내 아버님의 휘는 흥효요 자는 행원이며 호는 경당이시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길에 나가지않으시고,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시는 일로 오로지 하셨다.
뒷날 학문과 덕행이 조정에 알려져 창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교지가 이르기 전에 돌아가시니 지평이 추증되었다. 문하에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으며뒷날 경광서원에 배향되셨다.
조선 중기 이후 영남의 학맥이 대개 그러하듯 아버님의 학맥도 도산 이부자(이퇴계를 높여 부르는 말)로 발원한다. 부자의 수많은 문도 중에 팔고제라하여특히 높이는 여덟 분이 있는데 누가 적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후세에 영향을 미친 학통으로 따지면 대개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네 분을 손꼽을 수 있을 듯하다.
아버님은 그 네 분 학봉 문하에서 먼저 학문을 시작하셨다. 학봉 선생이 임하에서 검제로 옮겨 사시게된 까닭은 흔히 부인 권씨에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권씨가 무남독녀라 장인이 죽고 홀로 남은 장모를 돌볼 사람이 없자 선생께서 처가에 옮겨 앉으셨다 한다. 춘파에서 몇 마장 되지 않는 곳인데 무엇보다도그런 지리적 인연이 아버님을 학봉 문하에 들게 하신것으로 보인다. 추측건데 학봉 선생이나 아버님이나모두 안동 권씨 가문의 문객이었다는 점도인연의 한실마리는 되었을 것이다.
듣기로 아버님은 '근사록'을 위주로 하시되 모든경전에 두루 통하셨으며 배움에서는 언제나 읽고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고구를 더해 간추려나가셨다 한다. 일찍이 도산 이부자께서 말씀하신'박약양지(진리를 널리 배우고 그것을 요약할 줄 아는 학문의 두 경지를 함께 이룸)'를 흠모하셨음이라.거기다가 품성과 인격을 높이는 일에도 게으름이 없으니 스승되신 학봉 선생께서도 그런 제자에게 기대하신 바가 크셨던 듯하다.
'이 사람은 장차 크게 성취 할 것이니 제자 가운데이런 사람을 얻게 됨은 실로 나의 복이다.'
학봉 선생은 이따금 벗에게 아버님을 가르키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하지만 다시 벼슬길에 오른선생은 임진년의 국난을 만나 동분서주하시다가 한을품으신 채 진주에서 병몰하시고 말았다.
아버님께서 유일하게 학업을 등한히하신 시절이 있다면 그 역시 섬 오랑캐의 침노로 이 땅의 신민이 어육 났던 그 일곱 해 동안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뜻있는 선비가 창을 베개로 삼을 때이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나라를 위해 죽을 날'이라는 스승 학봉 선생의초유문이 이르자 어버님은 서책을 덮어놓고 그 부름에 응하셨다.
그리고 난리가 끝나던 날까지 의병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으는 궁리로 분주하셨다.
하지만 왜적이 이 땅에서 물러나자 아버님도 선비의 본업으로 돌아오셨다. 스승을 잃고 검제로 돌아오신 아버님은 인근 학우들과 교우 하면서 홀로 학문의길을 걸으셨다.
서애 유성룡 선생이 검제에 돌아오신 것은 내가 태어난 이듬해였다. 전해 북인 이이첨과 정인홍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신 선생은 그해 정월 하회로 돌아오셨다가 능곡에 있는 조상의 묘소를 둘러보러 오신 길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이 때 서애 선생을 찾아뵈온 뒤 서른여섯의 나이에도 늦다 아니하시고 다시문하에 드셨다. 학봉 선생의 동문이요 오랜 지기였던서애 선생이라 그때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신 스승을뵙는 듯한 감회도 있으셨으리라.
그로부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신 서애 선생이 돌아가시기까지 여덟 해 아버님은 선생의 문하에서 이미 성숙한 학문을 가다듬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존심양성지요와 이기의 본질을 위주로 논구하셨듯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두 번씩이나 영의정을 지냈던 늙은 스승과 이미 불혹을 넘은제자가 밤늦도록 등잔불을 밝히고 성리를 논하다가문득 스승이 등잔불을 가르키며 물었다.
"불의 허한곳이 이인가?"
아버님께서 공손하게 대답하셨다.
"허와 실은 대립하는 것이나 이는 대가 없으니 허를 곧 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자 서애 선생이 즉시 고쳐서 말하셨다.
"그렇겠지. 허에는 허의 이가 있고 실에는 실의 이가 있다."  아버님께서 경당이란 호를 쓰기 시작한것도 그 무렵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버님의 학구는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서애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한강 정구 선생께서 안동 부사로 오시자 아버님은 다시 늙으신 한강 선생의 문하를 찾으셨다.
그때 아버님은 이미 쉰을 넘으셨고 인근의 유생들이 배움을 구하여 찾아들 만큼 선비로서 이름도 얻고계셨다. 거기다가 회연급문록(한강 정구의 간행서)에오를 만큼 스승과 제자의 구별이 확연하지는 않으나아버님께서 한강 문하에, 그것도 여러 해에 걸쳐 배움을 구한 일만은 지울 수가 없다. 따라서아버님께서는 실로 퇴도 문하 세 고제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하셨으니 그 적전을 이으셨다 함 만하다.
사람의 머릿속에 든 학식이나 마음속의 덕망은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나 도산의 심학은 그 볼 수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 나는 아버님의 경당을통해그것을 보았다.
아버님의 하루는 첫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의관을 정제한 뒤 가묘에참배하고 다시 주자의 화상에 배례하시는데 그 엄숙하고 경건하심은 신심 깊은 산승의 예불에 비할 바가아니었다. 그런 다음 서실에 드시면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시고 밤이와도 읽기나 깨달음에 막힘이 있으면 늦도록 자리에 들지 않으셨다. 또 날마다 깨달은 것과 실천한 바를 적으시고 경과 신이 모자라지 않았는가를 짚어보셨다. 안다는 게 무엇이고 깨닫는 게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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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운세: 어린선택
아버님의 경당의 학문은 두루 미쳐 널리 성취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역학에 밝으셨다. 호방평(송나라 유학자)의 '역학계몽통서'을 읽고 그 분배절기도를 매양 의심쩍어 하시더니 스무 해나 고구 하신끝에 십이권도를 추연 하셨다. 또 강절 소 선생(송나라 유학자)의 '황극경세'에 나오는 원회운세의 수와세월일진의 수를 열두 달 스무네 절기에 더하여 '일원소장도'를 지으시니 여헌 장현광 같은 당대의 석학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나에 관한 기록이나 구전은 한결같이 그 원회운세의 수에 관련된 내 어릴적 일화와 함께 시작된다. 내가 열두어 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님의 수십 명문도들이 잘 깨닫지 못한 어려운 수리를 홀로 깨쳤다는투인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아직 '일월소장도'도 완성하지 못했고 광풍정도 짓기 전의 일이었다. 소장학자로 자리를 잡아가던 아버님은 찾아온 유생들을 사랑채에서 가르치셨는데그날은 마침 원회운세와 천문도수에 관해 강론하시게 되었다. 평소에 전심하시는 바여서인지 그날따라 강론은 소상하면서도 힘찼다.
"세상의 시간은 각기 단위를 가지고 원을 이루며보다 큰 단위로 나아간다. 여덟 각은 한 시를 이루고열두 시는 한 날을 이루며 서른 날은 한 달이 되고열두 달은 한 해가 된다. 그렇다면 순환의 가장 큰단위는 해에서 그치는 것일까. 더 큰 천지의 시간은없는 것일까. 이에 강절 소 선생은 원회운세론을 내어놓으셨다. 곧 서른 해는 한 세를 이루고 열두 세는한 운이 된다. 다시 서른 운은 한 회를 이루고 열두회는 한 원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해와 같이 천지는 한 원을 단위로 열리고 닫히며 한 원은 열두 회의변화를 거친다. 자회에서는 하늘이 열리고 축회에서는 사람이 생겨났으며 인회에서는천황씨 지환씨가땅을 가꾸고 사람을 가르쳤다."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시작하시어 해회에 천지가 다시 혼돈되며 일원기를 마감하게 되는 원회운세를논하신 뒤 제자들에게물으셨다.
"너희들 이 뜻을 알겠느냐? 지금은 어느 회에 이르렀으며 언제 지금의 원이 다하느냐? 도대체 한 원은몇 년이나 되느냐?"
그러나 좌중에서는 아무도 대답하는 제자가 없었다. 그때 나는 사랑채 툇마루에 기대 아버님의 강론을 엿듣고 있었다. 가만히 손가락으로 수괘를 집어가며 암산해 보니 대답할 수 있을 것도 같았으나 나설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안채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점심 나절이었다. 강좌를 마치시고 안채로 돌아오신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물으셨다.
"얘야 너는 원회운세의 수리를 알겠더냐?"
아버님께서 내가 뒤꼍에서 엿듣고 있었음을 아시고물으시는 듯했다. 나는 안채로 돌아와 홀로 셈해 본대로 원회수세의 수를 말씀드렸다. 내가 한 회는일만 팔백 년이요, 한 원은 십이만 구천 육백년임을 손으로 집어내자 아버님은 벌써 놀라시는 기색이었다.거기다가 그 승제법과 선천후천운회술까지아는 데로아뢰자 감탄과 탄식을 함께 쏟으셨다.
"어허, 이게 어찌 십여 세 난 여자의 지각이라 하겠는가. 내 집에 복이 적어 네가 여자로 태어났구나."
국문으로 된 내 실기 (정부인 장씨 일기)는 이 일을 적으면서 내가 수리의 재주를 타고난 천재인 양떠받들고 있다. 허나 실제 내막도 그렇지 못하거니와그 같은 이야기 방식은 너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다.
나는 그 때의 내가 그렇도록 나이와 학식에 비해수리에 밝았던 까닭을 어린 날의 유별난 선택에 있었다고 본다. 나는 예닐곱 되어 사물을 분간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다른 성장의 길을걸어왔다. 그녀들이 꼭두각시를 안고 소꼽장난을 재미있어 할 때 나는 사랑에서 아버님의 접빈객과 고담준론을 보고 들으며 보냈다. 그녀들이 고운 댕기나노리개를 탐낼 때 나는 아름다운 말과 앞선 사람들의빛나는 성취에 가슴 두근거렸고, 더욱자라 그녀들이바느질과 부엌일을 맴돌 때 내 가슴은 벌써 문자와책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내가 그렇게 형성되어 간 데는 틀림없이 환경도 무시 못할 작용을 했다. 지식과 그 지식을 통한 자기완성의 열정에 불타는 소장학자의 가정이라는 것이그러했고, 그런 아버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며 오가는 선비들로 이루어진 남성적인 문화가 그러했다.내 어릴 적 기억에 있는 여성은 오직 어머님뿐이었고그 문화의 힘도 형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내가 아버님 경당에게 당시로서는 아주 늦어서야본, 아들 없는 외딸이었다는 점도 나를 그렇게 기르는 데 한몫을 했다. 아들 없이 늙어가는 서운함에서였는지 아버님은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부터또래의 여자아이들로서는 받기 어려운 훈도를 베푸셨다. 그 점은 국문으로 된 내 실기에도 잘드러나 있다.
'^5,5,5^ 선생이 늦도록 남자아이 하나 없으시고여자로도 오직 부인 하나 길러 내어 사랑하시고 기대함이 세상에 이뿐인데, 아침이나 저녁의 가르침이모두 성인의 경전이고 현인의 말씀이라. 옛 어른의 좋은 행적과 일동일정은 대인군자가 자신 몸을 지켜 나가는 방법임을 일러주셨다^5,5,5^.'
따라서 어떻게 보면 내 선택은 선택이라기보다는환경의 소산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어떤 선택이 그 처한 환경이나 주어진 여건과 온전히무관할 수 있는가. 거기다가 내가 감히 선택이라고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는 내가 그 선택에 바친 주의와 집중력이 더 있다.
비록 나와 같은 환경이고 같은 여건이 주어졌더라도 주의와 집중력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게서와 같은 자기 형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은 굴레, 벗어나고 싶은 짐이 될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주의와 집중력으로 그걸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자발적인 열정으로 그런세계에대한 동경을 길러갔다.
물론 어느 시기까지는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을 알게되는 즐거움보다는 아버님의 감탄과 기쁨이 내 주의와 집중력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자랑하는즐거움도 틀림없이 어린 내 주의와 집중력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그게 내 선택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그 진정한 의미를깨닫고 이루어지는 선택이란 게 있어야 얼마이겠는가.
원회운세를 둘러싼 내 일화도 실은 그런 주의와 집중력의 작은 성과일 뿐이다.
이전부터 아버님은 '황극경세'에 심취해 계셨고 말만의 가르치심이었지만 원회운세의 수리에 대해서도 일러주신 적이 있었다. 다만 내가 그걸 깨우치지라고기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혼잣말하신 것이나 다름없이 잊고 계셨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주의 깊게 들어두었다가 혼자만의 궁리를 더해 깨우쳐 내자 그토록 놀라고 감격하신 것이었다.
내가 수리의 천재여서 한 순간에 원회운세의 이치를 깨우쳤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허황되고 무의미한얘기가 될 것인가. 몇백 년 만에, 혹은 몇백만중에어쩌다 하나쯤 태어나는 천재의 얘기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참고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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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발삼장과 초서 적벽부: 한때의 성취들
주의와 집중력도 노력의 일부로 본다면 원회운세를깨우치기 위한 내 남모르는 노력은 기대하지 않았던대가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아버님의 문자와 서책에의한 가르침을 내게 베푸시게 된 일이 그랬다. 나를가르치시는 태도도 이제는 사랑하는 딸이 아니라 새로 맞은 제자를 대하시는 듯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한자를 익혔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안방에서 배운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정도여서 '내칙'이나 '여사서'를 읽기도 모자랐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아버님이 손수 '소학'과'십구사'를 가르치시며 학문할 바탕을 키워 주셨다.
감히 드러내 놓고 청하지는 못했지만 오래 마음속으로 바래왔던 일이라 그렇게 정식의 배움이 시작되자 내 주의력과 집중력은 배가되었다. 아버님을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도 내 성취를 더욱 빠르게 했다. 실기에서 이른바 '일첩람기' '무불관통'은 바로그런 내 성취를 이르는 말이었다. 나중에 내가 듣게된 '여자 선비'란 별명도 내 학문적 성취를 추켜세운말일 것이다.
무릇 사람의 배움이 겉으로 드러나는 길은 여러갈래기 있다. 가장 윗길은 덕망으로 우러나는 것이요다음은 행실로 드러나는 길이며 마지막이 글과 말로나타내는 것이다. 또 말과 글로 나타냄에도 상품과하품이 있으니 상품은 이치를 풀어서 말하는 것이요하품은 정의로 드러내는 것이다.
내 비록 정성을 다하여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학문을 익혔으나 배움이 오래지 못한데다가 재주마저 따라 주지 않으니 어찌 윗길과 상품을 바라겠는가.
서너 해가 지나면서 겨우 말과 글로 배움을 드러낼수 있게는 되었으나 그것도 이치가 아닌 정의였다.열대 여섯이 되면서 제법 시문을 희롱하게 되었는데먼저 기억 나는 게 '성인음'이란 오언이다.
성인의 시절에 나지 못해
성인의 모습은 뵙지 못하나
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으니
성인의 마음은 볼 수가 있네
불생성인시(아니 불, 살 생, 성스러울 성, 사람인, 때 시)  불젼성인면(아니 불, 볼 견, 성스러울성, 사람 인, 뵈올 면)  성인언가문(성스러울 성, 사람 인, 말씀 언, 가히 가, 들을 문)  성인심가견(성스러울 성, 사람 인, 마음 심, 가히 가, 볼 견)
이는 막 배움에 눈을 뜨면서 그 느낌을 읊은 것이다. 열대 여섯의 여자아이가 쓴 기로는 읽어줄만하나뒷사람의 칭찬은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홍에서 였는지 그 무렵 한창 익어가던 행서로 갈무리해 두었다. 또 그 무렵에 쓴 시로 '경신음'이란 게 있다.
이 몸은 어버이께서 주신 몸이니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으리
이 몸을 함부로 욕되게 함은
바로 어버이의 몸을 욕되게 함이어라
차신부모신(이 차, 몸 신, 아버지 부, 어머니 모,몸 신)  감불경차신(감히 감, 아니 불, 존경할 경,이 차, 몸 신)  차신여가욕(이 차, 몸 신, 같을여,가히 가, 욕되게할 욕)  내시욕친신(이에 내, 즉 시,욕되게할 욕, 친할 친, 몸 신)
이 또한 내가 배움에 눈 뜨면서 나름의 정과 의로효를 읊어 본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는 희미한 감동밖에는 주지 못하나 그 무렵의 효는 충과 나란히세상을 지탱하는 윤리의 두 기둥이요 참된 배움이 마땅히 지양해야 할 으뜸가는 덕목이었다. 이 시는 정이잘 어우르지는 못해도 뜻은 귀한데가 있다.
그 다음 역시 그 무렵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은 '소소음'이다. 어느 보슬비 오는 날 홀로 마루에 앉았다가 문득 감흥이 일어 단숨에 읊은 오언이다.
창밖에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
보슬보슬 저 소리는 자연의 소리여라
내 지금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네
창외우소소(창문 창, 바깥 외, 비 우, 퉁소 소, 퉁소 소)  소소성자연(퉁소 소, 퉁소 소, 소리 성, 스스로 자, 이룰 연)  아문자연성(나 아, 들을 문,스스로 자, 이룰 연, 소리 성)  아심역자연(나 아, 마음 심, 또 역, 스스로 자, 이룰 연)
뒷사람은 이 시에서 깊은 철학적 사색까지 읽으려하나 내게는 분에 넘친다.
그러나 보슬비 오는 날 어린 소녀가 읊은 감흥치고는이만하게 다듬어지기도 드물 것이다. 그때는 나도 자못 득의해한 듯 역시 행서로 갈무리해 둔 '성인음'과'소소음'은 아버님의 경당에 의해 장성한 내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이를 보신 군자(여기서는 남편을 이름)께서 새로이 글씨를 쓰고 둘째 며느리가 그 의에푸른 깁을 덮어 수를 놓은 뒤 다시 아래위로 여덟 마리 용과 그름을 수놓은 뒤 다시 아래위로 여덟 마리용과 구름을 수놓아 이른바 '팔룡수첩'을 만들었다.그렇게 만들어진 팔룡수첩은 시와 서와 수가 아울러뛰어났다 하여 '이씨 삼절'의 하나가 되었고 또 후손들은 '전가지보'란 표지를붙여 대대로 물려 가며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로서 그때 내가 가장 득의해했던 것은아마도 '학발삼장'이었던 듯하다. 이는 새장으로 된고시인데 그걸 짓게 된 데는 애절한 사연이 있다.
역시 내 나이 열 여덟 이전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다. 무슨 일로 가까운 민촌을 지나다가 어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엎어치락자빠지락 하며내닫고 한 젊은 여인이 뒤쫓으며 붙잡는 걸 보았다. 둘다 울고 있는데 붉은 노을을 등지고 벌어지는 그 광경이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도 종내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아 이튿날몸종을 풀어 알아보니 그 둘은 고부간이었다. 젊은여인의 남편이 멀리 변방으로 수자리를 떠났는데필순의 어머니는 병이 들어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전날 내가 본 것은 그런 노모가 그리움을 못 이겨 아들을 부르며 병석을 뛰쳐나오자 며느리가 뒤따라 나와 울며 말리는 정경이었다.
그 일을 들은 내 머릿속에는 옛 사람들의 새하곡이나 오가와 같은 시상이 떠올랐다. 죽음을 앞에 둔 늙은이가 아들을 그리는 애절함과 군역으로 민초들이겪어야 하는 살이의 고단함이 어우러져 곧 세 장의사언고시로 흘러나왔다.
학같이 센 머리로 병들어 누웠는데
아들은 만리 먼 길을 떠났구나
만리 밖 수자리 간 내 아들아
네 돌아올 날은 언제이러뇨
학같이 센 머리로 병을 안고 바라보니
서산 붉은 해는 이제 막 지려 하네
두 손 모아 하늘에 빌고 또 빌어봐도
하늘은 어찌 이리 아득하기만 한가.
학같이 센 머리 병마저 무릅쓰고
일어났다 쓰러졌다 아들을 찾네
애절한 그리움 이제 저 같으나
옷자락 떨치며 떠났으니 어찌하리.
학발와병(학 학, 터럭 발, 누울 와, 병들 병)
행자만리(행할 행, 아들 자, 일만 만, 이수 리)
행자만리(행할 행, 아들 자, 일만 만, 이수 리)
갈월귀이(어찌 갈, 달 월, 돌아갈 귀, 어조사 이)
학발포병(학 학, 터럭 발, 안을 포, 병들 병)
서산일박(서쪽 서, 뫼 산, 해 일, 핍박할 박)
축수간천(축하할 축, 손 수, 방패 간, 하늘 천)
천하막막(하늘 천, 어찌 하, 아득할 막, 아득할막)
학발부병(학 학, 터럭 발, 도울 부, 병들 병)
혹기혹(혹 혹, 일어날 기, 혹 혹)
금상여사(이제 금, 오히려 상, 같을 여, 어조사사)
절거하약(끊을 절, 옷자락 거, 어찌 하, 어조사약)
고시의 맛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의에 있다. 이시는 밖으로 알려지면서 여러 가지로 과분한 칭찬을들었다. 어떤 이는 백낙천의 '사부미'에 견주기도했고 더 나아가서는 민중시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고맙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과찬이다. 그때 나는 틀림없이민초들의 어려운 삶을 마음아파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실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는 세상의 고조나 제도에 대해서는 의혹이 없었고 그들과 함께한다는 의식 같은 것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내게도 자랑은 있다. 유협은 시를 지라고말하였다. 지를 시인이 일생 안고 가꾸어가는 정의라고 소박하게 이해한다면 이 '학발삼장'은 바로 그지를 얻은 시이다. 그때 보인 어려운 이들에 대한 내동정과 연민은 일생 유지되어 기회만 주어지면 작으나마 베풂으로 나타나게 된다.
형식의 아름다움도 나름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내가 쓴 시들 중에서 하나만 남기라면 나는 아마도이 '학발삼장'을 고를 것이다. 내가 그때 한창 익어가던 초서로 이 시를 쓰고 그 뒤에는 그것을 짓게 된동기까지 보태 따로 시첩을 만들어둔 것도 그런 애착에서 비롯되었다.
뒷날 아버님 경당은 그 시첩도 내 아들들에게 전해주셨다. 후손들은 그 시첩에 좋은 종이로 겉장을 만들고 '학발시첩'이란 제첨을 붙여 팔룡수첩과 나란히전가지보로 삼았다. 그러나 그 시첩이 전가지보가 된데는 나의 또 다른 성취와 관련이 있다.
나는 문자를 배움과 아울러 글쓰기도 익혔다. 서^36^예는 학문과는 달리 아녀자에게도 장려되는 교양이어서 나는 일찍부터 두터운 바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학문이 허용되어 드러내놓고 지필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되자 성취는 더욱 빨라졌다.
돌이켜보면 스승이 따로 있는것도 아니었고 좋은법첩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으나 서^36^예에 관한 내정성과 몰두만은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성싶다. 나는아버님을 졸라 어렵게 구한 법첩과탁본들을 스승삼아홀로 육서를 익혀나갔다. 한창 글씨에 재미를 붙여가던 열서너 살적에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줄도 모르고 묵향 속에 취해 지낸 적도 있다. 어릴 적에는 이따금씩 내 임무를 도와 주시던 아버님도 그 무렵에는그런 내 진전에 흐뭇해하시면서 가만히 내려다보시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대략 내 나이 열여섯 무렵에는 육서에두루 잘 쓴다 소리를 들을 만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가장 큰 성취는 행서와 초서에 있었던 듯하다.특히 초서는 아버님께서도 고개를 끄덕이실만큼 되었다.
아버님의 지우 중에 호를 청풍자로 쓰시는 정윤목이란 분이 있다. 임란 때 좌의정으로 계시면서 충무공 이순신을 힘써 구해 주신 약포 정탁 대감의 셋째아들로 경서에 두루 통하고 문장에 뛰어나신 분이었다. 글씨도 육서를 두루 잘 썼는데 그중에서도 초서는 당대 첫손가락에 꼽히었다.
일찍이 광해군이 그 학덕과 덕망을 듣고 여러번 불렀으나 청풍자는 광해조의 어지러운 정치를 꺼려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 고향인 예천 삼강에서 시와술을 벗삼아 한가롭게 지내면서 인근의 이름있는 선비들과 사귐을 즐겼다. 나중 인조반정이 있은 뒤에도끝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산림에서 일생을마치니실로 맑은 바람이라는 그 호에 어울리는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청풍자가 아버님을 보러왔다.멀리서 온 귀한 벗을 맞으신 아버님은 며칠동안 제자조차 받지 않으시고 고담준론을 나누셨는데 그 끝에이야기가 글씨에 미쳤다. 그때 아버님은 내가 초서로써둔 적벽부를 슬그머니 내보이시면서 말씀하셨다고한다.
"이 글씨가 어떤지 좀 봐주게. 아직 미숙한 딸아이가 쓴 것이라 대가인 자네의 강평과 지도를 받고 싶네."
그러자 놀란 눈으로 그 글씨를 보던 청풍자는 아버님으로 하여금 나를 불러들이시게 했다. 내가 영문도모르고 사랑으로 불려 들어가자 청풍자가 물었다.
"이 글을 정녕 네가 썼단 말이냐?"
그리고는 지필을 꺼내 직접 써 보게 했다. 내가 마지못해 몇 자 써 보이고 나오자 청풍자는 아버님께말랬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 글씨가 동국사람이 쓴 게 아니라고보았네. 필체가 힘차고 호기로운 게 대국의 명필쯤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자네 여식이 쓴 것이라니그저 놀라울 뿐일네."
하지만 그 적벽부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초서로 된 '학발시첩'만 남아있다가 오랜 뒤에야 내 아들들에게 전해졌다. 그런데도 청풍자란 이름이부풀려 놓은 소문은 세월을 돌고돌아 '근역서화징' 같은옛 책에서 뿐만아니라 근세의 위당(정인보)이나 노산(이은상)같은 이의 글에도 내 글씨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욕심에서였겠지만 그림에도 나는 약간 성취가있었다. 우리 시대에는 문인화라 하여 그림도 선비의교양에 들어 있었다. 나의 그림의 출발은 그 문화인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문화인는 범위가 좁고 정해진 규범에 갖혀있어 내 욕심에는 차지 않았다. 사군자에서 저충화훼로 넓혀져 간 내 그림은용호와 산수에서 제일 볼 만한 경지를 이루었다.
내 그림은 특히 낙화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낙화란 달군 인두로 목관을 지져 그려내는 그림이다.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은근함은 없으나 바탕의나뭇결과 달군 쇠의 지져진 자국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산수도 나름의 아름다움과 멋이 있다.
그렇지만 시나 글씨보다 더 종족을 찾을 수 없는게그림이다. 이제 남겨진 것은 호랑이를 비롯한 두어점의 소품뿐, 당시에 성가 높았던 낙화 산수는 한폭도찾아 볼 길이 없다.
그 밖에 성취랄 것까지는 없어도 어느 정도 조^36^예를 얻었던 것으로 의약이 있다. 신농씨가 백초를맛보아 분별해 낸 이래로 의약 역시 선비가 지녀야할 교양의 일부가 되었고 나도 시작은 그랬다. 그러나 나중에는 제법 본초학을 말할 수 있었고, 특히 동의는 구급을 당하면 베풀 줄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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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기: 새로운 선택
그런데 이제쯤은 너희에게도 묻고 싶은 일이 있을것이다. 그토록 다양한 내 성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사임당이나 난설헌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못하고 그 넘겨진 자취조차 적은가 하는 물음이 그러하다. 이젠 그런 물음에 답할 때가 되었다. 조선 후기 삼백년 내내 정치권력에서 소외당해 온남인의 영수를 내가 낳고 길렀다는 것도 그 원인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보다는 두 번 째 선택이 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학문의 길과 거기에서 따르는 여러기^36^예의 연마에 몰두해 세상을 보내는 사이에 나는 어느덧 열여덟이 되었다. 여자 나이 열여덟에미혼이라면 당시로는 과년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주의를 둘러봐도 또래의 규수들은 모두 출가하고 더러는 해산을 위해 친정을 다녀가기도 했다.
이제 너희들에 이르러서는 많은 게 달라졌지만 그시절의 여자들에게 혼인은 삶의 확정이란 의미를 가졌다. 삶의 성패와 행 불행은 다만 결혼 뒤의 세월에따라 결정되며 결혼 전의 삶은 미정이요 유^36^예일따름이었다. 따라서 내 삶이 남들보다 오래 미정과유^36^예 속에 남아있다는 것은 낭연히 남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중에서도 어머님은 하마 내 나이 열여섯을 넘기면서 불안을 나타내셨고 열일곱을 넘기게되자 근심의 빛까지 띠셨다.
그렇지만 내가 자신의 선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 것은 그 같은 미정과 유^36^예가 준 부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갈수록 막막해지는내 길의 끝이 조금씩 불안해졌고 내가 바치는 노력과 열정의 효용이 의심스러워져서였다는 표현이 옳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배움을 시작한 동학들은 그 사이 자라 모두 관자가 되고 개중에는 향시를 거쳐 소과에 합격한 이도 있었다. 또어떤이는 일찍부터 사림에 뜻을 두어 오로자 학문애만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자 여인은 내게는 그 어느 쪽도바랄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닦은 재^36^예도 그것만으로는 삶을 온전하게 채울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여자가 시사에 찬란함은 창기의 본색'이란 말이 보여주듯이 시문애서의 작은성취도 나이가 들수록 힘든 짐으로 변해 갈 뿐이었다. 창기가 아니면서도 시문을 남긴 이로서 사임당 신씨와난설현 허씨 같은 이들이 있었으나 사임당이 우러름을 받는 것은 시문 때문이 아니었고, 난설헌의 삶은양가 규수에게는 아무런 참고가 되지 못했다.
글씨도 그러했고 그림도 그랬으며, 의약은 더욱 그러했다. 이룩하면 진기한 성취가 되지만 그 자체만의가치와 목적은 획득하지 못해 어떤 경우에도 삶에 갈음할 수 없는, 한 여기일 뿐이었다.
나를 가르치는 아버님의 목소리도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경전을 가르치다가도 자구 해석을 넘어 심오한 논변으로 들어가게 되면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우러나는 한숨과 함께 탄식하기 일쑤였다.
'우리집이 복이 없어 내가 여자로 태어 났단 말인가'  잘된 시문어나 글씨, 낙화를 보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당신이 득의해하시는 역리에 이르면아버님은 더욱더 드러나게 허망감을 나타내셨다.
'어렵게 깨우친다 한들 이 어디 쓸꼬. 네 정성이가긍할뿐이로구나.'  내 어린 욕심에 가리워져 있던삶의 진상은 그렇게 점점 뚜렷해져 갔다. 거기다가나이가 찰수록 점점 더해지는 결혼의 중압이 나를 한층 자신없게 만들었다. 어쩌면 시대와 성을 무시한내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그선택 안에서 나는 앞서가고 이룩한 편이었으나 나의성에 예정되어 삶 쪽에서 보면 오히려 뒤지고 이룩하지 못한 축이 될지도 모른다^36,36^요샛말로하면 그쯤 되는 불안이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새로운 선택을재촉하는 일이 집안에 생겼다.
그해 봄 어머님꺼서 윤감을 앓게 되신 게 그랬다. 나중에 장질부사라고도 불린 윤감은 오눌날에도 여전히큰 병이기는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무서운 병은 아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열에 대여섯은 죽는무서운 병인데다가 길고 까다로운 회복기간이 있어구료에 어려움이 많았다.
어머님이 윤간에 걸려 눕게 되시니 그 동안 모르다시피 지내온 집안일이 일시에 내 어께를 눌렀다. 우리 집안은 나까지 합쳐 세 식구만의 단촐한 살림이었다.
구러나 원근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사흘을 멀다하고찾아드는 아버님의 벗들로 언제나 분주했다.
안팎으로 종들이 두엇 있어 거든다 해도 접빈객의힘든 일은 거의가 안주인의 몫이었다. 집안을 닦고비질고 손님을 맞는 데서부터 음식 수발이며 정성(작은 선물.
주로 음식물임.) 마련, 적바람(보내온 물건에 대해고맙다는 인사 편지), 배웅에 이르기까지 종들에게마길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모두가 어머님을대신하고 안살림은 안살림대로 따로이 꾸려가야 하니서책 한 번 못펴고도 하후 해가 짧을 지경이었다. 처음 집안 일을 도맡게 되면서 난느 한동안 그런 일에골몰해 일생을 보내야 하는지 여자의 삶이란 것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이 무슨 낭비란 말이인가.
성현의 귀한 말씀을 읽을 틈도 없고 새로운 걸 배워알 틈도 없다. 시문으로 가슴 속의 아름다운 정의를풀어 볼 수도 없고 붓끝으로 공교로운 재^36^예를 펼칠 길도 없다. 그러면서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이 허망한 몸과 마음의 소모라니.
그러자 마음의 눈길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삶에까지 미쳤다. 지아비에게 바쳐야 할 정성과 헌신, 회임과 출산의 고통이며 양육의 성가시고 힘듦, 시부모를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일의 까다롭고 번다함^36,36^머잖아 친정을 떠나 남의 아내가 되고 오모나거 되고며느리가 되고 자손이 되어 겪게 될 여자의 삶이었다. 나는 곧 그때까지 알고 있던 고귀함이나 거룩함과는 무관하고 아름다움이나 참됨과도 얼른 연결이안 되는 세월의 낭비가 나를 기다리고있다는 생각에암담해졌다.
여자로서의 삶이 암담하게 느껴지면서 남자의 삶은더 크고 화려하게 비쳐왔다.
자질구레하고 빛 엋없는 일에서는 나면서부터 해방되어 있는 삶. 복종과 헌신의 요그를 권리처럼 타고난삶. 노동은 언제나 생산으로 나타나고 생각은빛나는자취로 남는다^5,5,5^.
주로 아버님과 어머님의 삶을 비교하여 얻어낸 남자의 모습이지만 한때 나는 거기에 강한 반발까지 느꼈다. 이 무슨 그릇된 세상인가. 공평하지 못한역할분배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 첫 번째 선택도 아주 무용하지는 않았다. 차차 집안일이 몸에 익어 고단함이줄어들면서 그 동안의 배움이, 여러 밝고 어진 이들의 말씀과 본보기가 내 마음속에서 빛을 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에 의지해 치우침 없는 안못으로 세상을 보고 비틀림 없는 이로를 따라 그 짜임을 풀이해보았다.
먼저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졌을 때는 이렇게 되어야 할 까닭이 있었으리라는 것, 그 까닭을 모른다 해서 까닭 없다거나 그릇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라는것이 세상에 대한 무턱댄 반발을 가라앚혀 주었다. 이어 남녀의 위치를 바꾸어 봄으로써 어느 쪽도 거부할 수 없는 그 까닭을 나는 더 강하게 추측 할수 있었다. 어떤 일은 신체의 구조나 기능 때문에 대체가불가능하고 어떤 일은가능해도 현저하게 효율이 떨어진다.
혹시 힘을 가진 남성들이 그 까닭을 자신들에게만유리하게 과장하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과장의 누적이 여성들에게 불리한 제도로 나타나지 않았는가하는 의심은 있었다. 하나 그때만 해도 여성의 능력이제대로 증명 되어 본 적이 없어 자신있는 답을 얻을수가 없었다.
이로가 막힐 때 흔히 의지 하게 되는 것은 사례의관찰이다. 나는 다시 어머님꺼서 돌아와 그 문제를생각했다. 어머님이 복종을 굴욕으로 여기시고 봉사를 손익으로만 따져 내조를 거부했을 때, 혹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어떤 일에 몰두하시어 아버님께 가사분담을 요구해 오셨을 때 과연춘파의 경당이란 선비가 있을 수 있었을까. 아버님께 학문적인 깊이와 수양을 준 그 여가와 마음의 평온과 집중이 허용되었을까. 출산의 고통이 두렵고 기르는 성가심이 싫어 나를 낳고 기르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의고상한 선택과 그 선택이 품었던 꿈은 어디서 피었을것이며 우아하고 기품있는 규수로서의 나날은 어떨게유지 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의 노년은 조시는 듯한 평안한 속에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며 조상의 영혼들인들 따뜻한 음향을 누리실 수 있었을까.
볼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존재하는것이 있음을 아는것이 사람의 귀함이다. 사람이 가장높게 치는 가치는 오히려 그렇게 몸으로 느낄수없는형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참됨이 그러하고 아름다움이 그러하고 착함이 그러하고 거룩함이 그러하다.
가정 안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하는 여성의 생산은 대개가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는 것들이다. 출산은 생산의 원형이기는 하지만 거기서도더욱 중요한것은 한 새로운 존재를 이 세상에 끌어내는 일보다는그 뒤에 이어질 수십 년의 양육이란 보이지 않는 생산이다. 그런데도 여성의 생산은 생산이아니며 거기에 바친 노고는 인생의 낭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 생산은 누군가 하지 않으면 세상은 유지 돌수 없다.
그러자 생각은 다시 내가 이미 했던 선택과 성취쪽으로 돌아왔다. 이 선택과 성취가 세상에 내놓을생산도 오래전부터 널리 그 가치를 인정받아 온 것들이다.
앞으로 긴 세월 학문에 정진하면 나는 사람의 본성과우주의 원리에 대해 앞선 사람들이 모르던 것을 더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 아름다운 시문을지을 수도 있고 더 좋은 글씨와 그림을 남길 수도 있다^36,36^아직은 여자에게 그런 삶이 허용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어린 선택은 대단찮은 그 성취에 집착을 보였다.
하지만 내 배운이 헛되지 않아 그 집착과 미련을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할 수없다면, 결국 어느 한 쪽을 우선시키지않으면 안된다면 내 선택은 바뀌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있겠는가.
그리하여 그해 늦가을 마침내 어머님이 자레에서일어나셨을 때 난느 또렷리 아뢸 수 있었다.
"시 짓고 글씨 쓰는 일은 여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일은 아닌 듯 합니다.
이제부터는 안채와 부엌을 떠나지 않고 여자의 본업을 매우겠습니다."  실로 그랬다. 나는 그날로 지난날의 선택을 감연히 버렸다. 서책은 사행에 관한 것을 빼고는 모두 사랑채로 옮기고 시문과 글씨와 그림은 이미 남에게 주어버린 것 외에는 모두 살라 없앴다. 그나마 '소소음'과 '성인음', 그리고'학발시첩'이 남게 된 것은 아버님께서 말려 주신 덕분이었다.
하기야 이 새로운 선택에 대해서도 그것은 선택이아니라 순응이었을 뿐이라고 이의를 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길로는 더 갈 수가 없어 시대가 허용하는 길로 갔을 뿐이라고, 잘해야 현실과 타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틀림없이 그런 면도 있다. 만약 나의 시대가 남자가 여자의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문화적 기술적으로 발전되고, 국가가 어머니보다 더 영양이풍부한 식단과 전문적인 교육능력으로 육아를 맡아주며, 사회 보장 제도가 늙은 부모를 즐겁고 편안하게모셔준다면 나도 나의 첫선택을 지켜갔을지도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선택 중에 상황이나 여건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란 과연 있던가. 더군다나 그 어떤 세상이 온들 남녀 서로를 보살피고 다독이며 조화롭게 세상을 유지하고 그 자녀들을 통해 보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때 그 일을 새로운 선택으로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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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골 이진사
나는 열아홉 나던 광해 8 년 영해부 나라골 재령이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군자의 이름은 시명이요 자는 희숙인데 뒷날 호를 석계로 쓰셨다. 너희는 내가남편을 군자로 높여 존대함을 양해하라. 나에게는 일생을 공경하는 손님처럼 대했던 분이니 아니 계신다고 어찌 함부로 이르랴.
당시의 혼인은 남녀의 개별적인 만남이라기보다는가문과 가문의 연결이란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신랑신부는 첫날에야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게상례였다.
그런데 그 점에서 군자와 나는 달라 혼전에 이미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상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내가 군자를 처음 뵈온 것은 열살 이쪽 저쪽의 일로 군자께서 아버님 경당에 문하에 드시던 날이었다.도굴산에서 글을 읽으시다가 도산 이부자의 도락을들으시고 그 적전의 맥을 짚어 검제에 이르시게 된것이라 한다. 뒷날에 인연이 끌려서였는지 어린 마음에도 훤출하면서 기품있는 용모가 깊게 남았다.
아버님도 그 새로운 제자를 받고 몹시 기뻐하셨다.그날 안채로 돌아오신 아버님이 흐뭇하신 표정으로군자에 관해 오래 말씀하신 까닭에 나도 알게 된게많았다. 거기다가 본가가 있는 영해 나랏골이 우리검제에서 이백리가 넘는 곳이라 군자께서도 짧게는며칠이요 길게는 몇 달씩 검제에 머물며 아버님의 강론을 듣는 일이 많았다. 그 바람에 나는 군자의 학문이며 행신이며 가문에 대해 더욱 소상하게 알 수 되었다.
군자께서는 뒷날 내 시아버님이 되신 운악공 휘함과 정부인 진성 이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운악공은 실직으로는 김천도 찰방으로 시작하시어 의령 현감에 그치셨으나 대과에 두 번이나 급제하신 별난 이력을 지닌 분이셨다. 나중에 이조참판에추층되신 까닭에 참판공이라고도 불린다.
군자께서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기절이 있으시어 사람들의 기대를 모을 만큼 일화도 많았다.혼인 전에 들은 얘기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셋있다.
그 첫번째는 군자께서 열두어 살 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군자께서는 조부님이신 승지공을 따라 서울에 머무르고 계셨다. 집이 저잣리에 가까워 시끄러울뿐만 아니라 시정 잡배들의 오감이 많았다. 그러자군자께서는 깊은 산중에 있는 듯 아침부터 저녁까지단정하게 앉아 책읽기에만 힘쓰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중에도 그 저잣거리를 떼지어 휩쓸며 주먹을 휘두르던 건달 패거리가 있었는데 저희들끼리 말하기를,"저 아이는 어떻게 생긴 물건이기에 이 번잡한저잣거리레 살면서도 학문에 힘씀이 저와 같은가.그게 한낱 겉꾸밈이 아닌지 지켜보리라." 하며 시일을 두고군자를 살폈다. 그러나 몇날이 지나고 몇달이 지나도 군자의 근신하고 정진하는모습이 변함없자 어느날 잘 익은 복숭아를 바치며 말했다고 한다.
"도령님의 근고하심이 이 같으니 장차 귀히 되실분이십니다. 저희가 비록 주먹질로 저잣거리를 휩쓸고 자니는 무리이긴 하나, 작은 정성으로 여겨 받아주십시오."
두 번째는 군자가 열여덟 때의 일이다. 시아버님운악공이 의령 현감으로 외직을 사시게 되니 군자도따라갔다. 하루는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운악공을만나러 왔다가 군자께서 근신하며 면학하는 것을 보고감탄해 마지 않으며 이르셨다고 한다.
"내가 보니 관직에 있는 이의 자제는 하나같이 주색에 빠져 서로 다투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는 학문과 절조를 숭상함이 이 같으니 그런 무리와견줄 수 없는 품위를 지녔구나."
세 번째는 군자께서 이미 장성하여 진사과에 오른뒤의 일이다. 무슨 일로 서울에 가시게 되었는데 그때 이조판서로 있던 우복 정경세 선생이 군자의재질을 사랑하여 집으로 불렀다. 군자께서 찾아뵈니 기다리고 있던 우복 선생이 군자의 등을 쓸며 은근히 권하셨다.
"그대의 명성을 들은지 오래인데 이제 다행히 서로보게 되었구나. 내 사위 송군 준길리 이곳에거 거자(과거 보는 선비)의 글을 익힉 있으니 그대도 여기머물면서 내 사위와 교유해 봄이 어떤가?"
당대의 거유요 시임 이조판서인 우복 선생의 권유이니 어지간한 선비이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나 군자께서는 공손하게 사양하셨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유림의 사표이시고 동남(영남)의 영수이시니 우리들 소학이 누군들 문하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다만 이제 전형(이조판서의 별칭. 사람을 뽑아 쓰느 자리라는 뜻에서 나옴)을 맡으시어요직에 계신데 제가 선생의 사위분이 있는 집에 들어친함을 도모한다면 천하의 곧은 선비들이비웃을 것입니다."  그러자 우복 선생은 군자를 더욱 애중히여기시어 긴 시간 함께 천도를 논하셨으며 나중에는그 일을 경연에서까지 진달하셨다고 한다.
이같이 군자께서는 여럿의 아낌과 기대를 모았고어린 나도 흠모의 눈으로 우러른 적이 있으나 나와혼인으로 맺어질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군자께서는 아버님의 문하를 찾아올 때 이미 성가한 몸이셨기 때문이다.
군자께서는 열아홉 나시던 해에 예안현 외내의 명문 광산 김씨 문중으로 출입했다. 규수는 역시 당대의 이른난 선비 근시재 김해 선생의 따님이었다.들리는 말로는 군자를 도산의 심학으로 이끈 이가 바로빙장되시는 근시재 선생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도 처음에 군자를 그저 앞날이 기대되는제자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스물다섯에 상배하시면서 아버님의 뜻도 달라지신 듯하다.
그때 나는 한창 나이 열여섯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경당 선생의 외딸이요 재주있다는 소문에 용색이반드시 추루한 것도 아니어서 사방에서 혼담이일었다.
그런데 그 모두를 마다하시고 나를 열아홉까지 미혼으로 잡아두신 까닭은 아마도 군자의 탈상을 기다리기 위함이셨던 듯하다.
하지만 혼인이란 상대가 있는 일이라 아버님의 뜻이 아무리 간절하셔도 저쪽이 응해 주지 않으면 어쩔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지식한 군자는 아버님께서 은근히 눈치를 주셔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베필을 잃은슬픔도 잊으시고 말없이 학문에 정진하실 뿐이었다.
기다려도 청혼이 없자 마침내 참지 못한 아버님께서 먼저 군자를 부르셨다고 한다. 스승의 부름을 받고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군자께 아버님이 불쑥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보다시피 내 딸이 혼기를 놓쳐 과년하니 자네가 마땅한 사윗감 좀 구해 주지 않겠나?"
"선생님께서는 그런 큰 일을 하필 저에게 물으십니까?"  스승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신 군자께서 여전히 고지식하게 반눔하셨다.
"자네가 미더워서 하는 말이네. 생각해 보게. 어디좋은 사윗감이 없겠나?"  "사윗감이^5,5,5^ 어떠했으면 좋겠습니까?"
군자께서 마지못해 그렇게 머뭇거리며 물으시자 아버님께서는 한번 더 능청을 부리셨다.
"신언서판이라고 하지 않나. 이 경당의 사위이니첫째로 학문은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겠지. 벼슬이야하건 말건 사마시쯤은 합격해야 하고^5,5,5^"  "또무엇이 있습니까?"
"가문은 시들어가는 명문보다는 차라리 기세 좋게뻗어가는 토반 쪽이 낫겠네.
행신도 반듯했으면 좋겠고^5,5,5^ 인물 역시 여럿 속에 있어도 눈에 띌 만은 해야지."
아버님께서 그렇게 늘어놓으시니 군자께서 이번에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으셨다 한다.
"그런 사람이^5,5,5^ 세상에 잘 있겠습니까?"
"왜, 자네가 있지 않나?"
아버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반문하셨다.그제서야 군자께서도 스승의 뜻을 알아듣고 황망하여목소리를 떨었다.
"그러시다면 저같이 여러 가지로 모자라는 사람도따님을 마음에 둘 수 있다는 뜻 입니까?"
"자네가 어때서? 요즘 세상에 자네 같은 사람이 어디 쉬운가?"  "저는 천성이 게으른데다 자질마저 우둔하여 크게 학문을 이룰 재목이 못 됩니다.
게다가 타고난 복마저 없어 벌써 한 지어미를 떠나보낸 터인데 저 같은 놈에게 귀한 따님을 주시겠다는말씀이십니까?"
"실은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어 자네를 불렀다네.내 딸을 부탁하네. 제대로 가르치지는 못했으나 남의눈에 벗어나는 일은 없을걸세."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혼사를 매듭지으셨다고 한다. 어떻게 두 분, 앞날의 옹서간이은밀히 나눈 얘기가 밖으로 흘러갔는지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친정 동리에 널리퍼져 있다. 뒷날 부군의 술회도 내거 처녀적 들은 이야기와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로이 매파를 놓을 것도 없이 부군께서 돌아가 운악공께 아버님의 뜻을 전하니 운악공도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이어 내 혼사는 거칠 것 없이 진행되었다.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운악공의 욕심으로 미뤄보면 그 혼사를 감히 청하지는 못해도 마음속으로 바라마지 않으시던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너희 눈에는 처녀의 몸으로 상처한 홀아비의 재취가 되는 일이 마땅치 못하게 비칠지는 모른다. 더구나 그때 군자께서는 이미 광산 김씨 소생의어린 남매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흠될 일이 아니었고 나도 당연히 그 법도를 받아들였다. 젊어 죽은 김씨는 무덤까지 함께 쓸 수있는 또다른 나였으며 그녀가 끼친 남매는 바로 나의 자식이었다.
해를 넘기지 않으시려는 아버님의 배려와 잇단 상사로 주부자리가 비어있는 나랏골 시집의 급한 형편이 겹쳐 혼례는 그해 가을에 치러졌다. 그리고 재인행의 형삭을 빌어 혼례 후 사흘 만에 나는 나랏골로향하는 이백 리 가마길에 올랐다.
그것은 또 내가 새로운 선택과 그 성취를 향해 떠나는 길이기도 했다. 가마창 밖으로 훔쳐본 가랫재(안동에서 영해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높고 험했던재)의 단풍이 눈부시던 계절이었다. @ff
@[  제2부 자미화(보라색 자, 장미 미, 꽃 화) 그늘 아래서
세상의 고달픈 아내들에게
사람이 제도를 만들고 거기 참여하는 본래의 뜻은이내몸에 이로움을 얻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제도란 한 번 만들어지면 자신의 생명과 운동 원라를가지는 까닭에 언제까지고 자기보존의 열정에 빠져방어 본능을 한 권리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억압 장치로 변질되기도 한다.
제도와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우선시켜야 하는가는 그 시대의 상황이나 유행하는 이념에따라 달라진다. 제도가 공동선 또는 누구도 거역할수 없는 지상 과제를 창안하여 그 시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괴롭지만, 개인은 그것을 위해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개인이 비대해져 개인의 평안, 개인의 행복 위에 어떤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면 제도는 비웃음속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쉽게 소멸될 수 없는 제도와 또한 마찬가지로 쉽게 소멸되지 않을 개인의 충돌이다. 이를테면 국가나 법 같은 통치 제도는이따금씩 무정부주의나 무위자연설 같은 주장에 강하게 도전을 받지만 없어지기를 기다리기는 어려운 제도이다. 개인의 자유 또한 어떠 가혹한 억압 속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욕구이다. 이 둘이 충돌 할경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어느 편도 완전한 우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가까운 역사로 보면 사회는 대개 개인을 지지하는쪽으로 발전해 온 듯 느껴진다.
그러나 안목을 길게 해보면 우리는 또 다른 방향의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의 사회사는 제도의 발전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제도 지향적이다.그리하여 전체로 짐작되는 것은 아직도 진행중인 고리이며, 어쩌면 정치사 혹은 사회사는 그런 변증의고리를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혼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족 보존의 본능과 성적 쾌락의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결혼은 그 두 가지 목적을 안정되고 지속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점차 인류의 특징적인 제도로 자리잡아 갔다.
다른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과 기능을 이념화하게 되면서 점차 개인에 대한 억압 구조로서 모습을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남성우위의 사회는결혼 제도를 여성에게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억압 구조로 왜곡시켰다. 그런 남성 우위가 어느 정도동의에 기반한 역할 분담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물리적폭력에 의지한 비합리적 지배냐에 대해서는 다소간의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이 결혼제도에가한 왜곡은 치명적이었다.
이른바 가부장적 가족제도란 것으로, 특히 유가적 이념과 결합된 이 땅에서는 단연 이채를 띤다.
이 땅의 전근대적 결혼 제도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된 것은 종족보존의 기능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한 종족보존의 기능은 남성에게는 권리로, 여성에게는 의무로만 분배되었다.겉으로는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으로 자못 정연하게 분배되어 있는 듯해도 실제로는 낳는 고통도, 기르는 수고로움도 모두가 여성의몫이었다.
여성은 제 살과 피를 덜어내고 열 달의 불편과 짐스러움을 견뎌낸 뒤 어떤 모진 형벌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피 흘려가며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태어난아이는 별로 힘들 것도 없는 원인을 제공한 남성의것이 되고 오직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만 '무자'란항목의, 변명 할 기회도 없이 내쫓길 죄가 된다.또아이를 기르는 일로 손발이 닳도록 수고롭고 애간장이 마르는 것은 여성이지만, 잘 자란 아이가 성취한것은 오직 남성의 가계를 빛낼 뿐이고 잘못되면 먼저손가락질 받는 것은 여성이다.
당연히 쌍방적이어야 할 정조 의무도 우위를 확보한 남성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난교를 따른 혼란과 분쟁을 피하기 위해 약속된 이신의성실의 원칙은 오직 남성의 혈통 보전과 독점욕만을 위해 강화되었다. 남성들은 여러 편리한 예외규정과 명분을 지어내고 그 약속을 어기면서, 여성들이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은 아득한 옛 자유를 되살려내면 무섭게 화를 내며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아니,그 이상으로 성 자체를 억압하고 그 최소한의 욕구해소를 위한 의사 표시조차 비천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성들의 약속 위반에 대한 항의조차 '투기'란 이름으로 가차없이 내쫓길 죄로 만들었다.
한 경제 단위로서 부부간에 이루어졌던 노동 분담도 차츰 억압구조로 바뀌어 갔다. 아득한 옛 적 수렵과 채취의 시절처럼 남성들이 잦은 위험에 노출되거나 초기 농경 시절처럼 남성의 근골에서 우러난 힘이생산에서 비교 우위를 지녔던 때에는 가사 노동을 여성이 잔담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절 혹은 그런 상황이 지난 뒤에도 여성의가사 분담은 움직일 수 없는 관례로 남았다.
하루 종일 남편과 나란히 들일에 시달리다 돌아온 농부의 아낙네에게도, 사랑에 빈둥거리는 유생의 내자에게도 성가시고 궂은 집안일은 그네들만의 일로 떠맡겨졌다. 남성들은 자신들의 위엄과 관계된 금기를지어내어 그 뒤로 숨어버리고, 근거없는 의무로만 남은 그 가사 노동은 일방적인 강제 노역이나 다를 바없었다.
그 같은 결혼 제도의 왜곡은 흔히 여성 문제의 일부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왜곡의 그 근원을 살피면문제는 다시 제도 일반이 가지는 문제와 닿아있고,결국 우리가 겪은 전 시대의 왜곡은 결혼 제도가 전개하는 변증의 한 고리임을 알 수 있다.
동양적 가부장제가 의지하는 자기 확대 또는 집단적성취의 이념 때문이다.
결혼이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아닌 다른 무엇에 바쳐져야 하는 것인가는 생각보다답하기가 쉽지 않다. 오직 이기만을 추구한다면 언젠가 제도로서의 결혼은 소멸 할 것이고, 초자아적 이념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결혼이 가진 원래의 의미는 제도나 제도가 설정한 집단 속에 매몰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개인 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자신의 쾌락과 편의를 위해 배우자와 아이들을 버리지만, 집단적 삶을우선한 고대의 어떤 도시 국가에서는 그 국가에튼튼한 구성원을 낳아주기 위해 자신의 허약한 배우자와아이들을 버렸다.
만약 결혼도 국가나 법처럼 인간의 어떤 특성이나필요 때문에 쉽게 폐지할 수 없는 제도로 본다면, 그또한 끊임없이 진행하는 변증의 고리라고 할 수있을듯 싶다. 앞서 말한 그 두 극단을 정과 반으로 삼고나와 내가 아닌 것의 조화라는 합을 향해 진행하는변증의 고리로, 우리가 방금 겪은 것은 바로초자아적 이념이 우세했던 단계였다. 거기에 유가의 논리로무장한 남성의 편의주의가 가세하여 여성에게 그토록불리한 제도의 왜곡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바람의 방향은 바뀌었다. 전 시대의 억압과 질곡은 끝나고 여성들은 제도 속에 매몰되었던 자아를 찾아나섰다. 이제는 누구도 이세찬흐름을 되돌려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를보는 이 마음이 기껍기만 하지는 못한 이유는 무슨까닭일까.
우리는 역사에서 수많은 혁명의 밤을 찬연한 꿈으로 지세웠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달라진 것은 통치자의 이름과 빼앗고 억누르는 구실뿐이었음을 홤멸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지나친 비관일지 모르지만 나는 결혼 제도를 둘러싼 의식의 혁명적인 전환에서도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 두렵다. 왜곡되고 경직된 전시대의 이념에서 힘들여 벗어난 결혼과 가족 제도가그대로 벌거숭이 이기에게 내맡겨지는 것같아 불안하기 그지없다.
나도 너희들 중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너희의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정신이 있음을 안다. 하루 아침에한 극단에서 맞은편 극단으로 내달은 모든 혁명이 실패했음을 돌이켜보는 슬기가 있음도 알고, 남성과 여성, 개인과 집단이 택일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꿰뚫는 밝음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겸손하고수줍어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거리 가득 울려퍼지는 것은 천박한 복수의 구호거나 벌거숭이 이기주의의 전파열뿐이다.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 갖기를 거부하는 여성에게나는 오직 자기의 혈통 승계를 위해 출산을 강요했던전 시대 남성들의 독선적인 논리와 다름없는 맞은편의 극단을 본다. 성가심과 불편함을 이유로 임신을회피하는 너희들에게는 지난 시대 남성들의 무책임에못지않은 또 다른 무책임을 느끼며, 젊음을즐기는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또는 몸매를 망친다는 이유로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너희들에게서는 전시대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진 종족 보존 기능의 그어떤 왜곡보다 더한 거부를 읽는다.
정조 의무에 대한 너희 일부의 견해도 나를 불안하게 한다. 네가 그러니까 나도, 하는 식의 논리는 탈선을 변호하지는 못한다. 잘 알겠지만 '눈에는눈,이에는 이'라는 대응 방식은 오래된 법 원리이기는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이미 그것을 포기 하였다. 세상의 강도가 많다고 해서 내가 강도가 되는게 정당해지지는 않는다.
성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 따르는 것이 선이라는일반적인 논리로 피해가도,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흐름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걸로 미학적인치장을 해도, 간음은 간음일 뿐이다. 그 보다는 전 시대 남성들의 뻔뻔스런 반칙이 더 정당해 보인다.
가사 분담에 대한 너희들의 과격한 요구도 가끔씩은 못마땅하다. 기계와 기성복과 즉석 식품 및 세탁소 같은 가사 용역업의 발달은 남자들의 일터가안전하고 편리해진 만큼이나 집안에 있는 너희들의 성가심과 수고로움도 덜어주었다. 또 남편과 같이 일터로나간다 할지라도 그게 바로 모든 가사가남녀에게 균분되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남녀의 노동 분배가반드시 논리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타고난신체적 구조나 성향에 따른 자연적인 분배도 있었음을 기억하는게 좋다. 거기다가 더욱 경계할 것은 가사 노동에 전 시대의 피해 의식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사랑과 조화라는 말이 있을자리에 지배와 복종이라는 말을 끌어들여 감정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너희에게 고통아니 가사 노동은 없다.
하기야 아직 너희 많은 아내들에게 전 시대의 억압과 질곡이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끝났다하더라도 그것은 남성의 폭력으로 생긴 눈두덩이의피명이 겨우 삭고, 마를 줄 모르던 너희의 눈물이 이제 말라간다는 정도이다. 너희 대부분은 아직 제대로난 새 길을 출발하지도 못했는데 어쩌다 앞서게 된천방지축의 동성 몇이 한 실수를 너희 모두의 잘못처럼 꾸짖는 내가 가홋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곧 뒤따라 출발하게 될 너희가 그 화려한 겉꾸밈과 선동적인 외침에 홀려 그들이 닦은 길을 가게 되면 그들은 바로 너희 선구자가 되고결혼제도는 합으로 가는 변증의 고리가 아니라 또 다른반을 부를 일시적인 정에 그치고 말 것이다. 남녀의불화로 인류의 지속이 심각한 위협을 받거나더 큰반동에 의해 너희가 보다 가혹한 제도의 억압과 질곡속으로 되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옛적에 있었던 일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까닭은 없다. 라마인(로마인)들은 가장 먼저 민주주의의 맛을 본 사람들이지만 치욕스런 제정으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이제 내가 빛낼 것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아애로서의 내 삶을 돌이켜보려는 것은 어쩌면 기우 일지모르는 그런 걱정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한 남자의아내로 살았던 그 시대는 억압과 질곡이 그 절절을이루었더 삼백여 년 전이다. 이미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아내들은 불행했던시절의추억 삼아, 아직도 온전히 헤어나지 못한 아내들은고잔한 삶을 헤쳐나가는데 참고로 들어주기 바란다.그리고 아주 드물겠지만, 다른 쪽을 선택할 기회가있었는데도 나와 같은 길을 선택한 이들이라면 모자라는 대로 본보기를 삼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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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세가
시댁이 있는 나랏골은 친정인 춘파에서 가맛길로이틀이 걸렸다. 나랏골은 영해부 인상동에서 인하동에 걸친 마을 이름으로 그곳이 나랏골로 불리게 된데는 두 가지 풀이가 있다. 하나는 땅의 생김이 학이날아가는 형국과 같다 하여 '나ㄹ^5,3456^(날개)골'으로 불리다가 점차 나라골로 변했다고 한다.나라골이 한자로는 익동 혹은 비개동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나라골은 삼한 진한 시대 진한에 속한 우시국의 도읍지여서 나라가 있었던 마을이란뜻으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때는 한자로 쓰면 국동이 된다.
유서 깊은 땅이 대개 그렇듯이 나라골에도 풍수에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행악이다. 나라골의 지세를 두루 살펴본 이여송은 앞으로 큰 인물이 날 것을 염려하여 여러곳의 지맥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맞은편 원구동의 시리목재와 쟁이골, 목애 들에 사기 말뚝을 박거나 산등성이를 허물어 땅기운의 흐름을 막거나 끊어버린 일이다.
그 다음은 역시 이여송과 함께 이 나라에 왔던 두시충의 지세 풀이다. 그는 나라골을 둘러보고 마을앞 곡강의 물맛을 본 뒤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상서로운 기운이 한 길이나 높이 서렸고단물이 기름진 들을 둘렀으니 반드시 큰 인물이 날것이다.'
뒷날 들어 안 것이지만 우리 풍수로도 나라골은 자못 뜻있는 땅이 된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태백산맥은 일월산에서 갈라지는데 그 한 맥이 동으로 빠져나와 칠보산을 이룬다. 칠보산은 서북에서 남으로 흘러 형제봉 독경산울령 맹동산을 거느리고 영해부를 성처럼 두른다. 그리고 다시 그 한 지맥은 동으로 뻗어 나라골에서 맺혔다가 송천 들판을 이룬 뒤에 동해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나랏골에 이른 것은 춘파를 떠난 다음날 해거름께였다. 비록 그 시절로는 나이가 찬 축이었다고하나 난생 처음가는 시집 마당에서 가마에서 내리는새색시에게 사물이 제대로 분별될 리없었다. 빙 둘러서 보고 있는 대소가 사람들과 큰일을 도우러 온 안팎 아낙네들의 눈길이 천근인 양 정수리를짓눌러 발제길 곳마저 제대로 살필 수 없을 만큼 이마를 수그리고 오직 부축에 이끌려 신행의 첫걸음을 떼어놓았다. 비록 대문에서 대문에서 가마를열어주신 것은다정한 군자이시고, 낯익은 하님에 아버님도 상객으로 따라오셨으나 내 느낌은 온전히 낯선 곳에 홀로던제진 것 같았다.
그런데 중문으로 들어설 때쯤이었을까, 그 총중에도 무언가 날카로운 빛살처럼 내 눈을 찔러왔다. 움찔하며 곁눈으로 가만히 살펴보니 안마당 서쪽 모퉁이에 서 있는 한그루 자미수(백일홍나무)였다. 이미꽃도 잎도 지고 가지만 남은 아름들이 자미수가 묘한뒤틀림으로 저무는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다.
갓 신행온 새색시의 눈길을 먼저 끄는 것은 여러가지일 수가 있다. 어쩌면 이제부터 함께 살 게 될시집사람들으르살펴두는 게 더 급할 것이고, 그 안에살게 될 시집의 가옥 구조도 마당 한구석에 선 나무보다는 미리 살펴두는 게 나을지 모른다. 또 나무라고 해도 내가 마당에 내린 바깥 마당에는 그자미수보다 훨씬 굵은 공손수(은행나무)가 있었고, 사랑채 뒤곁으로는 대숲이 있었으며 사당 앞으로는 키큰 회화나무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자미수가 그토록강한 인상으로 내 눈길을 끈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뒷날의 내 삶과 연관된 어떤 신비한 끌림이었던것 같다. 자미화(백일홍)는 바로 시가인 재령 있들의꽃이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내려온 재령 있들이 그한 그루의 나무에다 가문의 소식(번성하고 쇠퇴함)을걷게 된 연유가 있다.
관향으로도 짐작가는 일이겠지만 원래 재령 이씨는근거지가 남쪽이 아니었다.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우청니란 분이 재령을녹읍으로 받고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경주 이씨에서분관 한 그 자손들은 대대로 재령에 자리잡고살았다.
뒷날 휘 대봉이란 분이 다시 안릉군에 봉해져 안릉이씨로 불리기도 하고, 상장군 휘 소봉은 공민왕의부마가 되어 그 대소가가 개경으로 옮겨 살기도하나그때까지도 그들의 근거지는 재령과 황해도 일대였다.
그러다가 고려조의 쇠망과 더불어 재령 이씨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상장군공의 손자 중에 휘 신이란분이 계셨다. 고려조의 사헌부 지평으로 간관 김진양과 더불어 조준, 정도전, 남은의 죄를 적은 상소를올려 조준을 귀향보냄으로서 일시 이성계의 힘을 꺽었다. 또 대사한 강회백 등과 더불어 장주를올려 조준을 극형을 처할 것을 청하고, 이성계의 또 다른 수족인 오사충을 탄핵하여 쇠망해 가는 고려를 지켜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 성원하던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방원의 쇠도리깨에 죽음을 당하고 이성계일파가조정을 휘어잡자 지평공도 무사할 수 없었다.없는 죄를 뒤집어 쓰고 형옥을 치른 끝에 유배를 가시다가,받은 형이 모질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지평공의 아우되시는 모은공의 휘는 오로 공민왕때 성균관 진사가 되신 분이다.
우러르던 포은 선생과 가형이 잇따라 죽음을 당하고나라의 운세가 글러감을 보자 진취에 뜻을 잃으셨다.한때 여러 선현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가불사이군의 뜻을 새기면서 지내시다가 다시 은밀삼현 중에기자의 예를 따라 멀리 남쪽 함주 모곡에 숨으셨다.
자미화가 재령 이씨의 꽃이 된 것은 그 이후가 된다. 모은공이 모곡에 터를 잡으신 것도 바로 그 자미화 때문이었다. 망국의 한을 품으신 채 남녘 땅을 정처없이 헤매시던 공은 그곳 깊은 골짜기 수풀사이에힌 그루 자미화가 활짝 피어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멈추셨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 사랑스러움을 돌아보시다가 마침내 그곳을 숨어 살 땅으로 정하시고 띠풀을 베어 집을 얽으시니 그게 재령 이씨가 남쪽에 살게 된 연유요, 자미화가 재령 이씨의꽃이 된 시작이다.
뒷날 고려가 망하자 공은 호를 모은으로 삼고 사는곳을 고려동, 붙이는 밭을 고려전이라 이름하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인근 두심동에숨어살며 만은을 호로 삼던 전 판도판서 홍재, 전 공조전서 조열과 더불어 그 자미수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며나라 잃은 선비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셨다. 그때 남기신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둥치라도 남으면 꽃이 필 수 있는 것을
해 저문 산속 외딴 집에도 봄은 찾아왔구나
슬픈 노래 부르면서 서로 따르는 이 자리
서울 가 다시 벼슬 살기는 부끄러움일 뿐이네
교목여존가가화(높을 교, 나무 목, 같을 여, 존재할 존, 가히 가, 가짜 가, 꽃 화)  왕춘유도모산가(임금 왕, 봄 춘, 생각할 유, 도달할 도, 저물 모,뫼 산, 집 가)  비가이영상수지(슬플 비, 노래 가,뒤로 이, 읊을 영, 서로 상, 따를 수, 땅 지)  취향장안재착사(부끄러울 취, 향할 향, 길 장, 편안할안, 다시 재, 도착할 착, 깁 사)
중종 때 홍문관 교리를 지낸 하옥이란 분은 모은공의 행장을 적기를, 당시의 절개 있는 사람들은 그 시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백이숙제의 채미가와 기자의맥수가에 비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 자미수 곁에정자를 지어 자미정이라 이름하고 그 연유를 기에 남겼다.
'^5,5,5^ 서산의 고사리는 은 왕가의 해와 달을 홀로 보존했는데, 한 번 전해져서 진처사(도연명)의 율리 장미화가 되고, 두 번 전해져 우리 선조의자미수가 되었다^5,5,5^.'
그 뒤로 재령 이씨는 자미화를 가문의 꽃으로 귀히여기고 그들이 가는 곳에는 그 나무를 심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져 한강 정구 선생도 '함주지'를 찬술하면서 자미화는 이씨들과 성쇠를 같이 한다는 구절을남겨 놓았다.
어쩌면 그날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그루 자미화의기이한 자태가 아니라 그 나무와 내가 앞으로 그 일원이 될 가문의 쓸쓸하면서도 끈끈한 인연이었는지도모른다. 그것이 어떤 예감으로 마음 한 자락을 건드려 내 눈길을 그리로 끌었음에 틀림이 없다.그리고그 예감이 어긋나지 않았음은 며칠 안 돼 시아버님운악공의 말씀으로 밝혀졌다. 그날 신행 사흘 만에방간으로 내려간 내가 무슨 일인가로 안마당을 지나는데, 창두(노비)들로 하여금 밤 사이에서러진 그자미수 밑둥을 짚으로 싸게 하고 계시던 시아버님이나를 부르셨다.
"이 나무는 모은 선조 이래 우리 성씨와 소식을 함께 해온 것으로 나라골 처음 자리를 잡으신 큰아버님(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 당신께서 뜰 안 양지바른곳을 골라 손수 이 나무를 심으신 뜻은 근본을 잊지말라는 데 있다.
무릇 나무는 반드시 뿌리가 있은 뒤에야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되고, 사람 또한 근본이 있어야 종파와지파가 널리 퍼지게 된다.저 우뚝 솟은 줄기가썩었다가 다시 싹이 트고 싹이 자라 다시 큰 줄기를 이루니, 나무의 피어남과 시듦은 덧없지만 바람과 서리를겪고도 오래 남을 수 있는 것은 그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그러하되 비록 뿌리가 튼튼하더라도 이를 북돋우고 보살피지 않으면 나무는 죽어 없어질 수도 있다.
사람이 근본을 잊지 않음도 그와 같다. 우리 선조의 훌륭한 자취와 아름다운 공덕은 뒷사람을 가르쳐이끌 만하다. 우리 족중이 중외에 흩어져 살며 크게세력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이름을 중하게 여겨 행실을 힘써 닦고 염치를 지켜 세상에 아첨하기를좋아하지 않으니 선조의 끼치신 덕이 아직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나무의 줄기가 썩었다가 다시 싹을 틔우고 잎과꽃을 피우는 것과 같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냐. 너도이제 이 집의 사람이 되었으니 아무쪼록 이 집의 뿌리를 복돋우고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모은 선조께서는 두문동 서원 표절실 항절반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유런으로 무덤에 백비(글자가 없는 비석)를 세우게 하실 만큼 새 왕조와 화해 없이돌아가셨다. 다음 대도 윗대의 뜻을 이어 은일로 세상을 마쳐 이씨들이 다시 벼슬길로 나가는 것은 그다음대에 이르러서가 된다.
모은 선조의 손자되시는 근재공 휘 먕현이 대과에장원하면서 먼저 조정에 들어가고 이어 율간공 휘 중현이 다시 대과에 올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부터금곤옥우(금 같은 형과 옥 같은 아우)란 칭송을 들었다. 형제가 나란히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고 경연에서임금의 자별한 권애를 입었다. 특히 근재공은 나라에서 재택을 하사받았고, 그 부고가 들리자 슬퍼하신성종께서는 후한 부의와 더불어 풍수관을 보내 양주금대산 해좌원에 유택까지 잡아주셨다.
내게는 시증조부가 되시고 영해 인근의 이씨들에게는 파조가 되시는 통정공은 휘를 애로 쓰시는데 바로근재공의 여섯째 아드님이시다. 여덟 살에 아버님을여의고 중부 율간공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 뒤 율간공이 영해 부사로 나가시게 되자 책방 도령으로 따라오신 게 인연이 되어 당시 영해의 호족이던 진성 백씨의 무남 독녀와 혼인하고 나라골에 자리잡게 되셨다.
중종 10 년 무과에 급제하시어 사헌부 감찰, 무안현감, 경주 판관 등을 거치시다가 중년에 몸을 상해벼슬을 그만 두셨다. 명종 15 년에 기로의 은전을받아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으시니 이로 인해 통정공이라 불리운다. 또 그 아랫대도 문음으로 충무우 부사직을 제수받았으나 영해로 드신 이래 두 대모두 행세하는 반가에서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번듯한 벼슬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안동처럼 오래된 고을에서 수백 년 터를 잡고 살아온 유서 깊은 문중들에게 영해같은 물편 가에, 그것도 자리잡은 지 몇 대 안 되는 이씨들같이 작은집안은 자칫 업신여김을 받기 쉽다. 그런데도 그들이 스스로 안릉세가를 칭하며 안동의 명문들과 당당히 혼반을 열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윗대로이어지는든든한 근본에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가문의 근본보다 시아버님 운악공의 북돋우신과 돌보심의 힘이 더 큰 것같이 느껴진다.
가문에 대한 시아버님 운악공의 남다른 열정과 집착은 이미 현구례 때 느낀 바가 있었다. 그때 시아버님께서 태산가틍ㄴ 자약하심으로 말하셨다.
"거두시면 돌려주시는 법, 하늘이 이미 다섯이나거두어 가셨으니 이제 이 집안은 되받을 일만 남았다. 네가 모두 되받아 이 집안을 일으키거라."  이야기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 몇 해 시아버님은 참상이라 해도 지나칠 것 없는 슬하의 죽음을 거듭 보아 오셨다. 네 해 전에는 내게 둘째 시아주버님되시는 우계공이 과거를 보고 돌아오시는 길에 원인 모를 병으로 스물 일곱에 요절하시고 다시 그해에 맏아주버님되시는 청계공이 역시 과거길에 올랐다가 돌아오시는길에 상주 산양 객사에서 서른일곱의 한창 나이로 운명하셨다. 두분 다 일찍이 사마시(생원과)에 합격하고 돈독한 행실과 학덕을 갖춰향리에서 기대받던 인재들이었는데, 특히 청계공은 태학생으로 뽑혀 사람들의 기대가 더욱 컸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사랑하는 두 아들의 요절만으로도 모든 뜻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거기다가이태 전에는 셋째 며느리 되는 군자의 전취 광산김씨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둘째 며느리인 무안 박씨가 자결했다.
무안 박씨는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워 무의공에 봉해지고 호조판서가 추증된 박의장의 따님으로 우계공의 배위였다. 우계공이 돌아가시자 강보에 싸인유복녀를 밀쳐둔 채 고침(상주가 괴는 짚으로 만든 베개)아래 벌레가 이도록 밤낮으로 엎드려 슬퍼하다가 아이가 죽자 냉연히 말하였다.
"이 몸이 죽지 못함은 다만 늙으신 어머님께서 살아 계심이라."  그러더니 그해 늙으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성복을 지내고 바로 순절했다. 비록 나라에서정문을 세워 그 정렬을 표했으나 며느리도 자식이라어버이 된 마음에 어찌 애통함이 없겠는가. 이미 육순을 넘긴 연세로 단 네 해동안 두 아들과두 며느리를 앞서 보낸 이에게 무슨 바람이 더 남을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운악공께서는 그 모든 애통함을 누르시고 이제는 외아들이 된 군자와 이몸에게 가문의 기대를 옮기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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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 운악공
시아버님 운악공은 휘가 함이요, 자는 양원이시다.호가 운악이시라 세인에게는 운악 선생이라 불렸다.명종 9 년 나라골에서 태어나셨는데 모은 선조께는잉손(7 대조)이 되고 통정공에게는 손자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성품이 너그러우셨으며 효성이 지극하셨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경과 사에 밝으셨고 문장이 힘찼다. 당대의 석학 대계 황응천의 문하에서 수학하셨으며 뒷날에는 학봉 형제와 종유하여 그심학을 듣고 그대로 따르셨다.
약관이 되면서 이미 여러번 향시에 입격하여 인근에 이름을 얻으시더니 선조 21 년에는 사마시에 들었다. 그때 영해 부사 최경희는 크게 잔치를 열어자기고을에 인재가 난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몇 해 안돼 모친상을 당하고 이어 임진왜란이 터지니 과업을잠시 덮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이 입은 참화는 전란만이 아니었다. 왜적들의 행패로 가뜩이나 농사 짓기 어려운데다 가뭄까지겹쳐 흉년이 드니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널리었다. 비록 상중이기는 하나 공은 나라와 백성들의 그같은 어려움을 보고 비분과 강개로 우셨다. 나라 수군을 도맡고 있던 충무공같이 이도 눈앞에 덤벼오는왜적과 싸움을 미루고 상을 치르던 시절이라 함부로몸을 떨쳐 일어알 수 없고, 다만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를 일로 삼으셨다.
공이 창고를 풀어 기민들을 먹인다는 소믄이 나자부황한 사람들이 문간이 비좁도록 모여들었다. 공은마당에 큰 가마를 걸고 죽을 쑤어 여럿을 먹이셨으나창고의 곡식은 다함이 있게 마련이다. 아이를 업고늙은이를 부축해 모이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에 이르니 마침내 곡식 창고가 비고 말았다.이에 공은 도토리를 주워 삶아 굶주린 이들을 먹이니 비록맛은 떨어져도 사람들은 공의 도토리를 곡식보다 더달게 여겼다.
공은 또 어려움에 빠진 나라도 잊지 않으셨다. 순찰사 한효순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진안(진보)을 지나가는데 군량미가 떨어져 군사들이끼니를 거르고 있었다. 이를 들은 공은 가진 힘을 다해 쌀 수심 섬을 보내 그 위급을 구해 주었다. 순찰사 한공은 행재소에 장고를 올려, '영해 이아무개는비록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일을 걱정하여 처음부터 상을 바라는 일없이 군사의 어려움을 구해주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 뒤 명나라 군사가 원병을 왔으나 이미 나라의모든 창고가 텅 비어 원병의 뒤를 댈 물자가 나올 데가 없었다. 그때 운악공도 상복을 벗은 터라 순찰사한공은 동해 염장을 공께 맡겨 거기서 나는 조세와이문으로 명군의 군량을 대게 하였다.
벼슬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찮은 자리였으나 공은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 일에 힘과 정성을 다하였다.
그때 뒷날 오리 정승으로 널리 알려진 오리 이원익선생이 체찰사로 내려왔다.
선생은 공이 염장을 맡아 오래도록 노고하였고, 그성과가 크므로 이름을 공적에 올리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그 같은 겸양에 더욱 감동 된 오리이 선생은 조정으로 돌아가자마자 힘써 공을 천거하여 드디어 공에게 김천도 찰방이 내려졌다.
김천은 영남의 허리가 되는 땅이나 심한 전란으로황폐해져 있었다. 관아와 민가는 불타고 문서와 사람은 흩어져 모든 게 두서가 없었다.운악공은 밤낮으로궁리하여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흩어진 사람을 모았다. 또 백성이 입은 병화를 헤아려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이속들의 기운을 돋워주니 차츰 아래위의 손이맞고 김천을 떠나 여기저기 흩어다니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그때 성주에는 중국 장수 남방위가 유격장으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사졸들의 행패가 아주 심했다.성주 목사가 견디지 못해 잇따라 관직을 버리고,아전과 백성들도 아울러 숨어 고을이 비게 되었다. 이에 끼니마저 떼울 수 없게 된 명군의 행패가 더욱 심해지니 이미 여러 번 운악공의 기량과 재주를 본 순찰사가 서찰을 보내 공으로 하여금 성주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곧 성주로 달려간 공은 숨어 있는 주의 강기(주의사무를 맡아보는 주부의 별칭)를 찾아 일이 이렇게된 까닭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그 상세한 전말을적은 글을 남 유격에게 보내니 유격이 읽고 매우 반가워하며 공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공이 진중으로 찾아가자 남 유격이 마주 나와 손을잡고 사과했다.
"실로 그런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구료. 공이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이 있었겠소?"
그러고는 술자리를 열어 공을 대접했다. 술잔을 받으며 공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 고을의 수토관이 장군의 위엄을 두려워해 무릇여쭐것이 있어도 바로 여쭙자 못한 까덝에 이런 일이생긴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는 진중에서 실제로소요되는 물자와 경비를 상세히 적어 우리 고으레 넘기시어 거기에 따라 조달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주고 받는 쪽에 모두 법도가 았어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남 유격은 그 자리에서 사람을 시켜장졸과 군마의 수를 밝히고 거기 소요되는 군량과 마초 및 여타 물자를 세밀하게 적어 주었다.
관아로 돌아온 공은 먼저 고을의 문서를 조사하여아전들이나 군민이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빼돌리거나 사사로이 축낸 관아의 물품들을 채워 놓게하고다시 고을의 재력 있는 식자들을 불러모아 도움을 청했다. "이제 나라일이 매우 위급한데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높고 낮음을 가리지 말고 신민 된자는 모두 가진 바 성의를 다해 나라의 어려움을 덜어야 할 때이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서로 권유하여 힘을 다해 바쳐, 비었던창고는 곧 채워지고적지않은 물력이 모이게 되었다. 공은 그 물력으로명군의 소용을 대는데, 전에 남 유격에게서 받은 세목에 따라 하니 들어가는 것은 열에 아홉이 줄어도양쪽 모두가 넉넉했다. 그 일로 명나라 군사의 행패가 씻은 듯 없어지고 고을 안이 평온해지자 고을 사람들은 공을 부모처럼 우러르고 명나라 장졸들도 공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특히 남 유격은 공이 일시 겸임했던 성주 목사를 그만두자 몇 가지 귀한 중원의 물품을 예물로 보내 경모의 뜻을 나타냈다.
공이 남다른 기개와 자긍을 드러내는 일은 왜구가물러난지 이태 만인 경자년에 있었다.바란 바는 아니었으나 벼슬 길에 들어서게되자 나라가 어려울때 세운 작은 공로에 의지해 벼슬살이 하는 걸 구차하게여기신 공은 마흔일곱의 나이도 늦다 아니하시고 과거에 응하셨다. 그만큼 당신의 학문에 믿음도 있으셨을 것이다.
복시를 당당히 지나신 공은 선저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전시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대(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답하는 책문)의 말을올리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감탄한 사관들이장원으로 뽑고 임금께 올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벌어졌다. 책문을 보신 선조 임금께서는 공이 장자의말을 인용했다하여 과방에사 이름을 빼게 하고 파직까지 명하셨다.
그 기막힌 처분에 망연한 것은 공만이 아니었다.대궐 안팎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억울하게 여겨 유분의 옛일에 비하기까지 했다. 유분은 당시 당나라문종 때 사람으로 현량의 책문에서 환관들의 잘못을 꾸짖었는데 시관은 그의 글에 탄복하면서도 환관들의권세가 두려워 그를 급제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 여러 해 공은 벼슬없이 지냈으나 선조 36 년에 다시 대신의 추천이 있어 의금부 도사가 되고 이어 사재감 직장, 주부를 거쳐 의령 현감으로 나가셨다.
하나같이 크신 뜻에 비해 하찮은 자리였으나 공은 재주와 성의를 다해 일을 임하시니 가는 곳마다 선성이높았다.
그러다가 선조 임금께서 돌아가시자 공은 다시 한번 과장을 찾았다. 광해군 원년 공은 쉰여섯의 연치로 문과에 급제 하시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공을아는 선비들은 한결같이 기뻐하며 이제야 공의 큰 뜻이펼쳐질 것이라 기대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공은 벼슬살이가 싫어지셨고 몸도 편치 않으셨다. 거기다가 광해조의 난정이 조짐을드러내자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나라골로 돌아오셨다.
대략 내가 시집오기 대여섯 해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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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가문에 대한 공의 집착과 열정이 온전히 자손들에대한 기대로 바뀐 것은 낙향뒤의 일로 보인다. 젊은날에 꾸꾸었던 빛나는 성취가 더는 가망 없는 것이되어버리자 그걸 자손들에게 옮기신 듯하다. 가문이라고 하는 의제된 존재이 틀 속에서 조상과 당신을동일시했던 것처럼 이제는 당신과 자손들을 동일시함으로써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달래보려하셨음이리라.
나라골로 돌아오신 공이 먼저 하신일은 이여송이끊어버린 인근의 지맥을 되살리신 것이다. 공은 곡식과 돈을 아끼지 않고 사람을 풀어 이여송이 박았다는사기말뚝을 뽑고 흙과 돌을 져날라 잘라버린 혈을 잇게 하셨다. 그리고 어떤 곳은 물길을 돌리고 언덕을높여 비보를 대신하기도 하셨다.
풍수 따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모두가 헛된노력이요 낭비로 보일 것이다.
더구나 막히고 잘린 지맥을 되살려 놓는다 해서 반드시 큰 인물이 당신의 자손들 속에서 나리라는 보장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요 염원이다. 부모의 믿음과 염원이 얼마나 많은 범용한 정신들을 고귀하게 또는 위대하게 만들었던가.
어쩌면 공은 풍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 대한당신의 믿음과 염원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끊어진 지맥들을 이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은 또 재물을 아끼지 않고 만 권의 책을 모으신뒤 수하들에게 이르셨다.
"집안에 만 권의 책이 있으면 문창성이 비치어 귀한 자손이 나고 대대로 글이 끊어지지 않는다 한다.그러하되 책이 많다는 것만으로 무엇을 이루랴.힘써읽고 익혀야 하늘도 도우리니 너희는 이 뜻을 잊지마라"
하지만 공의 이력을 꼼꼼히 살피며 자손에 대한 예사 아닌 욕심을 공이 드러내시기 시작한 것은 그 낙향보다 몇 해 앞섬을 알 수 있다. 춘추 마흔아홉나시던 해 공은 시댁 왼쪽 본채와 이어진 산기슭에 집한채를 더 하셨다. 청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정면 네칸, 측면 두 칸의 ㄱ자형 건물로 두 칸 장 방하나에나머지는 대청으로만 된 정자같은 건물이었다.
자신을 위한 강학의 터로, 또는 제자들의 학습당으로 그 같은 건물을 살던 집에 더하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영남의 행세하는 집안에는 처음부터 있었건 나중에 지었건 혹은 별채의 일부이건 반드시 그런 기능을 하는 건물이 있다는 편이 옳다. 별난 것은그 건물이 아니라 그 정면 벽에다가 운악공이 현판대신 구해 붙인 '충효당'이란 인본 당호였다.
충효는 그 시대의 최고 가치가 되는 이념이자 생활구석구석 침투하여 숨 한 번 몸짓 하나에까지 관여하는 실천 항목이었다. 그 가치에 의지하면 한 몸이 현달하고 한 가문이 일어나는 길이 있고 저버리면 한몸이 망하고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위로는 삼정승 육판서로부터 아래로는 밭두렁의 농군까지 자나깨나 외는 주문같은 것이 충효였다. 그러나무거우면서도 또한 너무 흔해 진지하게 되뇌려면 오히려 망설여지는 말이기도 하다.
영남의 세가 중에는 충효당이란 당호를 가진 집이여럿 있다. 그러나 대개는 나라에서 그 편액을 내렸거나 천하에 충효의 귀감으로 자랑할 만한 주인을가졌을 때 붙이는 것이지 함부로 자호하는 법이 아니다. 기휘를 범하는 말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비록 삼한이래 근본을 자랑한다 해도 시댓 또한 그때까지는그같은 당호를 자호할 만한 집이 못 되셨다. 그런데도 공께서는 스스럼없이 그 당호를 붙이셨다.
사람들은 흔히 그 일을 공의 대단한 기백 혹은 자기 소산으로 본다. 특히 그 무렵은 공이 3 년 칩거끝에 다시 대신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선 때라 더욱그리 믿기 쉽다. 그러나 바로 임금으로부터 과방삭제와 파직의 처분을 받은 상처가 3 년 만에 어찌 아물것이며, 대산의 천거가 있었다 한들 암금의 눈밖에난 처지에 무슨 큰 영달을 바랄 수 있겠는가. 실제로그 뒤 공이 받은 벼슬도 의금부 도사니 사제감 직장이니 하는 대단찮은 종품직이었다.
어떤이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공이 오르시게 되는대과에서 그 기백과 자신의 근거를 찾는다. 실제 공은 충효당을 지으신 서너 해 뒤에 문과에 급제하시게되지만, 이미 말했듯 그 일은 공이 벼슬길에 물러날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응시는 패기와 자신으로 하셨는지 몰라도 가문을 당신 스스로 우뚝 일으켜 세우겠다는 패기와 자신은 이미 잃으셨다고 보는 편이 옳다.
따라서 운악공께서 충효당을 자호한 것은 당신보다는 자손들을 향한, 그만큼 간절한 기대와 염원으로이해하는 게 옳다. 더구나 그때 공의 네 아드님은거기에 값할 만큼 잘 다듬어져 있었다. 맏이인 청계공은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생으로 뽑혀 성균관에 있었으며 둘째인 우계공과 셋째인 군자께서도나란히사마시에 올라 대과를 앞두고 계셨다. 그리고 막내인호군공마저 무장의 꿈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해 한창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곧 이따른 상명역참(자식이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사)으로 그 태반이 무너지고말지만 적어도 당시로는 충분히 그런 기대와 염원을걸 만한 아드님들이었다.
'내 이제 이 이름을 붙여놓았으니 너희들은 기필코그 실질을 채워라!'  나는 충효당의 현판을 바라보면언제나 그런 공의 말씀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받는다.
공의 그 같은 염원은 벽에 걸린 인본 당호에서도읽혀진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출가 전에 글씨를 조금 써본 적이 있어 자랑할 만한 성취는 없어도 남이써놓은 글은 가려 볼 만한 안목은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충효당이란 필체가 웅혼하고 기품이 있어 절로공께 글쓴 이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명나라 고황제의 글씨니라. 충효로 이름 높은 중화의 명문가에 손수 써서 내리신 편액인데, 연행하는지인에게 당부해 천금을 주고 떠왔느니라"  아무리어필이라도 탁본이 되면 그 값어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공에게는 글씨로 이름난 지인이 많은데도 천금을 주고 명나라 황제의 어필을 탁본 해 온까닭이 그때는 얼른 짚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거기서도 간저란 염원을 읽을 수 있었다. 천하의 주인이 너희들의 집에 이 이름을 내린 것인 양 여기고부디 그 실질을 채워라.
그밖에 당호의 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전통이 축척되는 과정에 대한 공의 통찰이다. 시댁의 본채는입향조 통정공께서 황무지를 다듬어 일으키신 마흔칸의 뜰집으로 규모도 적지 않거니와 하마 백 년세월이 흘렀건만 이렇다 할 당호가 없었다. 그런데 공이새로 지은 그 건물에 충효당이란 당호가 붙자그것은그대로 시댁의 당호가 되고 세월이 지날수록 무게를더해 갔다. 그리고 고황제의 인본도 나중에 다시 현판으로 새겨져 걸리자 이 땅에서는 희귀한 현판이 되었다. 한 가문의 전통은 앞세대의 빛나는 성취 위에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뒷세대의 성취를 향한 낲세대의 욕심으로도 형성될 수있음을 공은 알고 계셨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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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첫번째 선택
"무슨 운수로 이 복 없는 사람의 집에 왔는가. 앞으로 천근을 지고 높은 산을 오르듯 할 것이니 그 어린 몸이 지탱해 낼까 실로 알시럽네(안쓰럽네).허나차일시면 피일시라 종내 그러하지는 않을 터인즉 과히 분별(걱덩) 마소"  신행 첫날밤에 군자께서는 가만히 내 손을 잡으시면서 어두운 얼굴로 그리 말씀하셨다. 그때는 이 같은 날에 어인 분부실까, 싶었으나그 연유는 차차로 밝혀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군자께서는 운악공의 셋째분이셨고 나는 셋째 며느리였다. 셋째 며느리도 가문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가문의 내면적인 성패를 고스란히짊어져야 하는 맏며느리와는 달리 다소간 그런 부담에서 비켜선 자리에 있다. 그러나 셋째 며느리도 재취로 들어간 내게 주어진 것은 맏며느리보다더한 가문의 부담이었다.
네 해 전에 둘째 시아주버님우계공이 돌아가시고,그해 맏아주버님 청계공이 세상을 버리시자 군자께서는 갑자기 몇 해나 더 늙어버리신 듯한 운악공을대신해 어쩔 수 없이 가독을 맡으셔야 했다. 역시 나이드신데다 잇따라 자제분들을 (저승길) 앞세운 참사로소소한 집안일레 뜻을 잃으신 시어머님을대신해 젊은 안주인으로서의 모든 역할과 책임을 져야 하는 데는 나도 군자와 처지가 같았다. 두 분의 맏며느리요내게는 맏동서가 되는 무안 박씨가아직 살아 계셨으나 그분은 그때 이미 부군 청계공을 따라 갈 마음을굳히고 계셨다. 고침을 눈물로 적시며 방낮으로 청계공의 빈소를 떠나지 않으시니안의 일은 절로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겨우 열아홉 난 새댁으로 위로는 가만히 계셔도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시부모님과 돌보는 이만 없으면 곡기를 끊는 맏동서에 산사람과 다름없는정성으로 받들어야 할 빈소 둘을 모셔야 했다. 또 손아래로는 아직 살림을 나지 않은 시아주버님 호군공과 미성인 처사공에 신일과 부일을 비롯한 청계공의 다섯유자녀며 상일을 비롯한 군자의 전취 소생 세 남매를돌봐야 했다. 거기에 군자를 더해 어느 누구 함부로대할 수 없는 식구만도 열넷 이었다. 집안이 거느린안팎 종들과 드난살이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사랑에는 언제나 손님이 끊어지지 않고 갈 데없는 일가친척들도 식구대로모여 마흔 칸뜰집이 언제나 비좁을 지경이었다.
아침저년으로 모이는 권구가 많을 적에는 이백명이넘고 한 끼에 익혀야 할 곡식이 말로 해야 할 양이니비록 안팎 비복들이 있다지만 방간 일만으로도하루해가 짧았다. 거기다가 챙겨야 할 식구들의 입성도만만찮아 늙은 침모만으로는 사랑채의 의대 수발도바빴다. 시간을 쪼개고 잠을 아껴도 할 일은나날이태산처럼 쌓여가기만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손발의 수고로움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절로 내게만 쏠려오는 가문의 무게였다. 시부모님의 기력이 쇠해 가실수록, 그리고 군자께서 학문에 몰두하면 하실수록, 가문을 지탱하고 일으키는 자잘하고 궂은 일 뿐만 아니라 그 정신적인바탕의 형성까지 내게로 넘어왔다. 그런데 내게는 아직 그런 것까지 감당해 낼 마음의 채비가 되어 있지않았다.
내 시대의 가문이란 자아가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지금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원천적인 억압 구조이다. 가문을 이루는 것은 개인이지만 한 번 가문이란틀이 형성되면 개인은 그 속에 매몰되어 독립된 존재를 부정당한다. 가문은 개인을 우선하며 가문의 요구가 있으면 그 구성원들은 무엇이든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남성은 그리 억울할 것이 없다. 가문이란가부장적인 대가족 제도의 동양적인 이념형과 같은것으로, 개인은 거기에 자신을 바침으로서 자아를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무한히 확대할 수있다. 누구든 가무느이 한 사람이 이룩한 것은 곧 가문의 성취가 되고 그것은 또한 거기에 속한모든 구성원들의 성취로 전화한다. 가문은 시간을 뛰어넘는생명력을 가져 앞서 살아간 조상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도 한가지로 그 구성원이다. 그건데 그 가문은 남성의 혈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남성 쪽으로 보아서는 그대로 끝없는 자아의 확대가 된다.
하지만 여성쪽에서 보면 가문은 대가 없이 희생만요구하는 억압 구조일 뿐이다.
제도적으로 성취의 길이 막혀 있어서이겠지만 여성의성취는 가문의 성취에 들지도 않고 남성 구성원들의성취가 여성 구성원들의 성취로 전화하는 것도극히제한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문의 권화라고 할수 있는 족보의 표기법에서 잘 드러난다. 극히 드문예외를 빼면 여성의 거의 이름이 없고 브계의 성씨들로만 특정된다. 가문의 일원으로 나눠 갖는 성취도대개는 남편이나 자식들의 특벼한 영달을 반영하는외명부로서의 봉작이 고작이다.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도 우리 시절 갓 시집간여성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그 가문의 문제이다. 여성들은 무슨 자명한 진리처럼 가문의 소중함을교육받고 그대로 순응해 왔다. 솔짓히 말하면 비록시아버님 운악공의 강조가 인상적인 것이기는 해도내사 시댁 가문의 소중함을 내 것으로 껴안게된 데는 출가전 친정에서 주입받은 고정 관념의 힘이 더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나는 출가 전에 깊이는 아니지만 학문의 맛을 본 사람이었다. 대단하지는 못해도그런대로 성취를 누려보았다. 따라서 그 두가지기억은 여느 새댁네들관느 달리 내가 고정 관념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학문은 가문이라는 것이 개채로서의 나를 우선 할 만한것인가를이치로 따져보게 했고 포기했던 성취들은 과연 가문이 그것들 중 어느 하나와도 바꿀만한 값어치가 있는것인가를 헤아려보게 했다.
첫 번째로 가문이 나를 우선할 수 있는가의 문제,바꾸어 말하면 가문이란 것이 진정한 자아 확대의 수단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는물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너는 육십 년 혹은 칠십 년의 제한된 시간만을 살고 가야 한다. 그러나 가문이란 것이 너를 던지고 동일시를 얻게 되면 그 안에서 앞서 살아간 조상들의 삶을 네가 이었듯이 대대로 이어질 네 자손에게까지 네 삶은 연장된다. 또 내 삶은 한정된 공간에갖혀있다. 높아야 여덟 자에 못 미치는시각과 멀어야 십리에 못 미치는 시력과 빨라야 한 시간에 백리도 이동하지 못하는 몸 속에 갖혀있다. 그러나 아직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구성원들까지포함된 가문이란존재의 틀 속에 들어가게 되면 너의 공간은 무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넓어진다. 그 확대된 시각과 공간의 성취가 모두 너의 것이된다^5,5,5^.'
가문을 통한 자아 확대의 논리는 대강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두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영혼 불멸 혹은 영혼의 존재성에관한 믿음이다. 우리 혼이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스러지는 육신과 마찬가지로우리 영혼도 사라져 죽음이란 것이 우리를무로 되돌려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음 뒤를 향한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존재의개인별 부인이다. 존재는 개별적으로는 무의미하거나결코 완전할 수 없고 오직 집단을 통해서만 그 완전한 실현 양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일 때만 가문의 논리는 승인된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그게 가치 있는 것이라 한들,그걸 통해 내 내 삶이 시간적으로 연장되고 공간적으로 확대된다 한들, 그 속에 한 번뿐인 삶을 선뜻내던지기는 어렵다. 그것이 요구하는 일생의 인내와 복종과 희생을 자아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그런데 그두 가지 전제는 어느 쪽도 명확히 검증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가문의 대표성에는 거의 참여할 수 없는여성 구성원으로서의 저항감도 있었다. 이미 말했듯여성은 그렇게 불확실한 전제 위에 세워진 가문의이념에마저 직접적으로 자신을 투영시킬 수 없었다. 부부일신이라는 또 한 번의 동일시, 혹은 개별성의 부인을 겪고서야 가문의 일원에 겨우 끼어든다. 두 번의 자기 부인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가문의 이념이란 것이 진정 내가 껴안을 만한 가치일 수 있는가.
내 신혼의 어느 시기까지였는지 모르지만 상당 기간 나도 그 때문에 갈들을 겪어야 했다. 검증되지도않은 전제들 위에 세워진 가설, 오래전부터 그렇게믿어왔다는 것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의제에 그대로 나를 맡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그것이 내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노동이나긴장을요구힐 때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시댁의 가문을 기꺼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보다 큰 성취에 나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 수있게 한 나 자신의 최종적인 논리만은 아직도 선명히기억한다. 요즘 말투로 요약하면 대강 이러할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확실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믿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존재가 죽음으로 온전히무가 되는 것보다 증명하기 어려운 영혼이라도 영원히 이어가는 것이기를 바란다. 작고 무력한 개별성보다는 비록 거듭된 의제일지라도 피로 확대된 존재의큰 틀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싶다.
세상은 얼마나 믿기 위한 미신으로 가득차 있는가.엄밀히 따지면 세상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어서 만든 믿음의체계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주관적인 환상에지나지 않더라도 불가지의 혼란과 방황보다는 낫다.시간과 공간에, 그것들이 강제하는 허무와고독에 속절없이 드러나 있는 존재를 감싸줄 수 있는 것이라면전혀 검증될 수 없는 미신일지라도 나는 믿고 싶다.'
피할 수 없는 강요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게 마련이다. 맹목적인 순응과 적그적인 수용은 다르다. 우리시대의 여성들에게 가문은 피할 수 없는 강요였다.그러나 나는 그런 나름의 논리를 통해적극적으로 그이념을 껴안았고, 그런 뜻에서 감히 가문을 내가 결혼 뒤에 첫 번째로 한 선택이어다고 말하고싶다.
@[  제2부 자미화(보라색 자, 장미 미, 꽃 화) 그늘 아래서
귀한 손님처럼
이제 한 지어미로서의 내 삶을 돌이켜볼 때가 되었다. 옛적의 법도로 보면 가문에서 지어미의 무게는다른 역할보다 앞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 며느리로서가 가장먼저 얘기되어야 하거나 어머니로서, 혹은가문의 새로운 안주인으로서의 삶이 먼저 얘기되어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듣는이가 요즘 사람인만큼 그무겁게 여기는 바에 따라 나도 지어미를 앞세우고자한다.
뒷사람이 쓴 내 실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5,5,5^ 부인이 군자를 받들어 섬기기를 존빈같이공경하여 육십 년을 해호하되, 한결같이 입문지초의공경이요 한 번도 용모 사기(말과 얼굴빛)에 설만한의사를 보이지 아니 하더라. 매사를 품한 후에 행하시며 아무리 조급하고 절박한 일이라도 군자께 종순하여 임으로 천단함이 없으시고 상해(늘상)하시는 말씀이 '유화하고 공손한 도리는 부녀의 직분이라, 밖에서 하는 일은 부녀가 간섭하여 내간 소리 높이 나면 바로 옛 사람이 훈계하신 바 새벽암탉 소리는 인간의 재앙이라, 그아니 두려우랴' 하시더라.'
남편이 고함을 치면 맛고함을 치는 게 남녀 평등이요 모든 결정은 혼자서 제꺽제꺽 내릴 수 있는게 유능한 주부로서 알고 있는 요즘 여성들로서는 이같은구절에서 봉건 시대의 굴욕적인 여성상밖에는 읽을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새벽 암탉^5,5,5^' 부분에서는 심한 모멸감을 느낄는지도 모른다.
어떤 자유로운 정신은 여기서 그 시절의 여성에게가해진 구조적 억압 혹은 정싱적 폭력에 치를 떨 수도 있다.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하였으면한인간에게서 그처럼 굴종적인 행태를 끌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를 동정해 마지않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그런 시대에 살지 않게 된 것을 그지없이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내가 보인 순종과 공손함의 자발성을 인정해 준다해도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로서일 뿐이다. 곧 군자의 완성된 인격이 나를 감화시켜 순종과 공손함을이끌어냈거나 내가 타고난 성품이 특별히 순종적이었다는 설명이 그렇다. 내가 피나는 자기 수양으로 그런 행실을 쌓을 수 있었다고 설명해도 예외적이기는마찬가지다.
그밖에 또 하나 그 구절에 가능한 현대적인 해석은과장의 혐의이다. 아내로서의 기나긴 섦에서 남보다는 다소간 니은 부분을 극도 과장하여 그런 구절을남겼다고 보는 관점이다. 성인도 노여워함과 성냄이있거늘 한 남녀의 속된 삶에 있어서랴.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아내의 자리매김을 그같이하게 된 데는 틀림없이 그 네 가지 설명 모두가 한몫을 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렇게 교육받았다. 군자께서는 일생을 자 기 완성을 위해 싸우신 참다운 선비였고 나 또한 삶을 누리러 온것이 아니라 힘드려 채우러 왔다는 일념으로긴장을풀지 않았다.
거기에 뒷사람의 부질없는 더해져 그런 구절로 아내로서의 삶이 요약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한 가지 꼭 보태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도 아내로서의 내 삶을 그렇게 괴분하게 요약할 수 있게 한 큰힘은 역시 선택에서 왔다는 점이다.
나는 아내로서 남편과의 관계를 스스로 그렇게 선택했는데 그 열쇠는 군자를 자리매김한 '존반'이란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혼을 해 놓고 친정에서 본낸 여러 날뿐만 아니라신행후의 한동안도 나는 군자가 내게 누구인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는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가지며 나는 어떻게 그를 맞아야 하는가. 그리고 함께 살아갈 긴 삶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요즘도 남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말은 아주 많다. 흔한 것은 성별이 다른 벗이라는 것인데 아마도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정신적인 추구의 협력자 또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경제 행위의 동반자도 넓은 의미의 벗에 들어 갈 것이다. 육체의 정념을 풀고 살이의 고단함과 외로움을함께 달래는 상대로 볼 때도 벗의 뜻이 들어있다.
보호자나 후견자 남편의 오래된 딴이름이다. 남편은 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봐주고 감싸주는 존재로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인데 남녀의 평등이 손상받는다는 점에서 요즘은 널리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그러나 워낙 전통이 깊은 데다 현대의 부부 생활에서도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적용될 수밖에없다는 점에서 쉬 없어지지 않을 남편의 딴이름이다.
반대로 남편은 모성애의 대상으로 이름을 가질 수도 있다. 의식 표면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얼마나많은 여성들이 모성적인 보호 본능에 이끌려 남성에게 다가가는가. 남녀의 평등이 실현된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아내들이 아이를 보살피는 기분으로남편을 돌보는가.
그런가 하면 어떤 여성들에게는 남편이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에게 남편은 몸을 위해 필요한 물질과 쾌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권력이나 명성같은 정신적 허영을충족 시켜 주며, 고독이나 허무 같은 인간의본질적인 불행까지도 위로받을 수 있는 수단이다. 걷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존재로서, 어쩌면 겉으로는 부인해도 현대여성들에게가장 널리 퍼져있는 남편의 딴이름이 아닐지 모르겠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그 반대편의 이름도 남편에게 남아있다. 여성이 자신을 바쳐 그의 수단이 되고싶은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은 여성이 극도로자신을 비화한 나머지 가지게 된 이상 실리로만 이해되어 농담조로 쓰이는 '하늘같은 남편'이란 말 속에나 겨우 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동서양을 가릴것 없이 가장 오래된 남편의 딴 이름이다.
남편이란 칭호는 어쩌면 그런 여러 이름을 두루 합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시대나 상황이 여성들에게그중의 한 이름을 고르게 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에 무게를 주고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표현은 오늘날 같지 않아도 우리 시대의 여성들 역시 그 같은 남편의 여러 이름을 알고 있었고 니름으로 선택했다. 따라서 겉으로는 그 시대의 법도나인습의 강요로 비슷한 외양을 띄는 행동도 내용은 그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경이라도먕목적인 순종과 자기를 위한 수단과 진심에서우러난 행동 원리가 어찌 같은 것일 수가 있겠는가.
군자의 자리매김을 두고 한 내 여러날의 고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남편에게 순종함은 우리시대의 철칙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난 내 행동 원리가 되기를 바랐다. 강요에 따른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 한 선택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군자의 딴이름은 실기에서 이른바 '귀한 손님'이었다.
이제와서 돌이켜보아도 내가 군자를 그같이 자리매김한 것은 자랑할 만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귀하다는것은 군자를 향한 내 우러름과 사모함을 간략하게 드러낸 말이다. 손님은 비록 가깝고 익숙하더라도 예를잃지않으리라는 내 다짐의 표현이다.
이 세상에서 군자의 짝이 될 수 있는 여성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군자께서는 그중에서 나를 찾아주셨다. 그게 군자의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인연이거나생판 우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아닌 바로이 몸과 맺어진 일^36,36^이 얼마나 귀한가.
자애로우시던 어버이도 이윽고는 우리를 떠나고 다정하던 형제도 끝내 함께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군자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와 함께하신다.
기쁠 때나 글플 때나 그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을 분^36,36^이 얼마나 귀한가.
세상이 지금 이대로 끝나게 도어 있지 않다면 다음세대를 놓고 기르는 일보다 더 크고 무거운 일은 없다. 후손들을 통한 자아의 확장 같은 것은 믿지않아도 좋다.
사람들의 세상을 이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도 넉넉한무게와 같은 값을 지닌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세상을 나와 함께 마련하고 가꾸어 나갈 분이 군자이시다.-이 얼마나 귀한가.
이 귀하다는 말 속에는 다함없는 정과 우러름과 살가움이 들어 있다. 그런 뜻으로 찾아보면 군자가 이나에게 귀한 존재 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 밖에도수없이 많다. 어찌 보면 남편이 가진 모든 남편이 가진 딴이름도 이 귀하다는 말의 대상이 될 수 있다.어떤 이름으로 받아들이든 남편은 귀한 존재일 수 있건만 요즘 너희 여성들은 너무 그 귀함을 찾아내지못하는 것이 아닌지. 혹은 너무 무디어져 그 귀함을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물론 너희도 상대인 남편에게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남편들은 그 귀함을 이전에도 알아주지않았고 많이 나아진 지금도 충분히 알아주는 것 같지는 않다.
너희에게 틀림없이 불만일 것이나^36,36^그렇다고 그게 너희 무성의나 무딤을 변명해 주지는 않는다. 귿이 성현의 말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귀하게여김을받고자 한다면 너희부터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한다.남녀가 진정으로 평등한 존재라면 권리의 주장은 의무의 이행을 전제로 한다. 너희가 할 바를 게을리하고 상대에게만 요구한다면 수천 년 남성의 부조리를이번에는 너희가 되풀이하겠다는 뜻과 무엇이 다르랴.
내가 부부사이에 예를 끌어 들여 군자를 자리매김한 말에 '손님'을 넣은 것도 너희에게는 석연치 않거나 불평스러울 것이다. 일생을 한 집안에서 함께할사람, 서로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언제나 익숙한 사람, 피와 살을 합쳐 태어난 자손들로 인해 죽은 뒤조차 나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을억지스런예절로 대하기는 선뜻 내키지 않거나 힘들기조차 하다.
하지만 남편이란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대하는 데 오히려 예가 필요하다. 사람과 삶을 맺는관계 중에서 본능이 가장 깊게, 그리고 오래 관여하는 것이 바로 부부관계이다. 본능은 예로 조절되지않으면 금세 그 이기심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런데부부는 함께하는 긴 세월 때문에 가장 많이그 본능의 이기심과 폭력성에 노출되어 있다. 짐승의 암수와사람의 부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 뿐이다.
실기의 과장스런 요약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연 군자를 '귀한 손님'으로 잘 받들었는지는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일생을 그렇게 살고자 애쓴 것만은 틀림이 없고 뒷사람도 그 성의와 노력을 높이 사서 그같이 적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그런 받듦과 섬김이 반드시 눈먼 따름을뜻하지는 않는다. 더러는 군자의 뜻을 받들기 어려운때도 있었으나 그때조차도 예를 다하고 공경함을 잃지 않았을 뿐이다. 그중에 하나가 군자의 거취를 둘러싼 우리 내외간의 불알차와 그것을 풀기 위한 내고심이었다.
의리는 정대한 것이되 분한에 사무치면 지나칠 수있고 개결을 숭상함은 아름다운 일이나 외곬로 치달으면 편벽되기 쉽다. 군자께서는 일생을 의롭고개결하게 살고자 애쓰셨고 나도 그 뜻을 우러러 받들었다. 그러나 세상과 시절이 맞지 않으니 군자께서도지나치고 치우친 바 없지 않으셨다.
군자가 세상을 등지기 시작하신 것은 삼전도 치욕이 있었던 병자년부터가 된다.
그해 남한산성에서 밀려든 청나라 대군에게 에워싸인채 외롭게 항전하던 인조 임금께서 주화파의 논의를받아들여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게 되자 군자는이런시를 남기셨다.
하늘과 땅 너르게 아득히 끝이 없고
해와 달 곧게 치추이기 예와 다름없건만
누가 오랑캐의 먼지로 (이 땅을) 더럽혔나
남한산성 한 계책이 조선을 그르쳤어라
건곤호탕대무변(하늘 건, 땅 곤, 넓을 호, 펼칠탕, 큰 대, 없을 무, 끝 변)  일월정명자고연(해 일,달 월, 곧을 정, 밝을 명, 스스로 자, 옛 고, 그럴연)  수유호녹생오장(무구 수, 유산 유, 오랑캐 호,먼지 녹, 살 생, 더럽힐 오, 더럽힐 장)
남성일계오조선(남녘 남, 재 성, 하나 일, 계산할계, 그르칠 오, 아침 조, 맑을 선)
이미 소장 학자로 인근에 이름을 얻고 계셨지만 그때까지도 군자는 과업을 단념하지 않으셨다. 친상을당해 여러 해를 여막에서 성경을 다하시느라 불혹을넘기기는 해도 등과는 일찍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의한을 풀어드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삼전보 비보가 이르자 군자께서는과업을 폐하시고 세상과 등지기 시작하셨다.
신종 황제의 은의를 저버리고 오랑캐에게 무릎을꿇은 임금은 이미 마음을 다해 충성 할 대상이 못 되었고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하는 사문난적(여기서는양명학)의 무리가 들끓는 조정은 이미 도산 이부자의성리학을 받드는 선비가 발 디딜 곳이 못 되었다. 때마침 청계공의 맏이 신일이 장성하여 가족을 맡길 만하자 군자께서는 시어머님 진성 이씨를 모시고 운악공의 산소가 있는 한밭(영양군에 있는 땅 이름)으로들어가셨다. 그리고 이태 뒤에는 더욱 한갓진 산골석보로 들어가 그곳 물맑은 석계 위에 집을 지으시고스스로 호를 석계라 하시었다. 그 후부터 세상사람들은 군자를 석계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무렵지으신 '우음'에 이런게 있다.
맑은 냇물에 두 발을 씻고
푸른 소나무 아래 바람을 쐬네
마음에 바깥 생각 전혀 없으니
구름 또한 한가로운 모습이로구나
세족청천수(씻을 세, 발 족, 맑을 청, 내 천, 물수)  승량벽헌수(이을 승, 서늘할 량, 푸를 벽, 소나무 송)  심전무외념(마음 심, 전할 전, 없을 무,바깥 외, 생각할 념)  운물역한용(구름 운, 사물 물,또 역, 한가할 한, 얼굴 용)
시가 지요 의라면 군자께서는 그때 이미 은거의 뜻을 굳힌 듯하다. 그러나 몸소 '유거기'를 지으시어세상에 널리 그 뜻을 알린 것은 수비산으로 드실때가 된다.
자상을 당해 나라골로 돌아오셨다가 석보로 돌아오신지 삼 년 만이요,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힘없고 못난조국의 매 아래 돌아가신 그해 이다.
병자년의 국치가 있고 오래잖아 아직 군자께서 온저히 세상에 뜻을잃지 않으셨을 때의 일이었다.조정에서 내린 벼슬도 마다하시고 상소를 올려 오랑캐를무찌를 계책을 극언하시던 군자께서는 같은 뜻을 품은 임경업 장군을 찾아가 반청의 대의와 방책을 논하셨다.그때 감동한 장군은군자께 절을 올리며말하였다 한다.
"하늘의 뜻이 포악한자를 싫어하여 왕사를 일으킨다면 병기를 잡고 앞장서는 일은 내가 맡을 것이니계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일은 선생의 말씀을 따르겠소"  그런 충민공이 오랑캐와 한번 싸움다운 싸움조차 벌여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시니 군자의 낙담이 오죽하셨으랴. 그때 군자께서 눈물을 흘리시며탄식하신 구결에 이런 게 있다.
벽에 기대 부질없이 천하의 일을 생각하네
신주 회복을 뜻 하는 이 이제 아무도 없구나
여기서 신주는 이태 전 의종의 죽음으로 사실상 망해버린 명나라를 가르킨다.
그리고 그때부터 군자의 지나침은 시작된다. 군자께서는 반청의 대의를 대명절로 바꾸시고 명나라가 망할 때의 연호를 빌어 숭정거사를 다시 자호 하시게된다. 또 영양현 일월산을 수양산에 비한다하여 수비산이라 이름하고 그 한 자락을 골라 숨으셨다.
명나라가 백만 대군을 보내 왜적에게 짓밣힌 이 땅을 구해 줌으로써 우리는 틀림없이 명나라의 은의를입었고, 은의를 베푼 이를 잊지 않음은 아름답다.
짐승같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도 모자라 충성스런장수까지 제 손으로 죽인 조정도 틀림 없이 외면 받아 마땅할 만큼 힘 없고 못났으며, 그 조정에 벼슬하기를 마다한 것은 깨끗한 선비답다. 그러나 스스로명나라의 신하를 자처하고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절의에 일생을 거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쳐보인다.
군자의 지나치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상에뜻을 잃으심과 아울러 가사조차 돌보지 않으시니 집안살이가 전 같을 수 없었다. 비록 시아버님 운악공으로부터 약간의 분재가 있었으나 그때 이미 열명의자식을 거느린 큰 살림을 나 홀로 꾸려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못 견딘 것은 숨어 사는 외로움이나넉넉잖은 살이의 고단함이 아니었다. 비록 대의가 아름답다 해도 종내 아무 남기는 것 없이 군자의 삶이허비되는 게 무엇보다도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수비산으로 든 지 몇 해 뒤 나는 마침내 군자께 아뢰었다.
"세상은 망해도 사람은 길러야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아름다운 뜻이 무승 소용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슬하의 여러 자질이 아무 배움도 없이 나이만먹어가니 장차 이 일을 어찌 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그 뜻은 군자를 거스르는 것이었으나나는 예를 다했다. 여러 날을 고심해 군자의삶을 그지나치심과 치우치심에서 끌어낼 구실을 궁리하였고정성스러움과 공경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드러냈다.성품이 엄중하신 군자였으나 예를 갖춘거스름에는역정을 내지 못하셨다. 그날은 무연히 들으시더니 다음날 내게 조용히 이르셨다.
"부인의 정성이 그러하니 내 차마 외면할 수 없네.매달 초 하루와 보름에는 사랑을 열 것이니 아이들더러 그때 들라 하시오."
그리하여 내가 먼저 데리고 있던 아이들이 배우기시작하고 이어 나라골의 족질들이 고개를 넘어왔다.소문이 퍼져 인근의 유생들이 몰려들자 곧 숨어사는선비의 사랑으로는 다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여기서 뒷날의 영산 서원이 자라났다.
비분과 강개를 의탁할 곳이 생겨서인지 군자께서도은거자의 음울과 침체에서 벗어나셨다. 초하루와 보름이라는 날짜는 끝내 지키셨으나 그날이 오면열성으로 사서와 삼경, '근사록' 등을 가르치시다가 때로는 유생들에게 이르셨다.
"우리 동방의 요즘 사세는 금의 침략을 받아 시달리던 남송 시절과 합치되는 일이 많다. 오랑캐의 억압이 엄해 당장은 서쪽으로 달려가 대의를 위해싸울수 없더라도 적을 무찔러 원수를 갚는 일이 오늘날가장 먼저 해야 할 급한 일임을 너희들은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소매에서 주자의 봉사(임금께 올리는 글)를내어 큰소리로 읽으신 다음 눈물을 짓기도 하셨다.
하지만 수미산은 너무 깊고 외진 곳이라 자손들과더불어 오래 터를 잡을 곳은 못 되었다. 자라는 아이들의 학문과 진취를 위해서도 좀더 세상에 가깝고 트인 땅이 필요했다. 이에 나는 숨어살고 싶어하시는군자의 뜻을 다시 한 번 거스리기로 작정하고 이번에는 세월과 재력을들여 채비를 갖추었다.
내가 자란 춘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실원이란 땅이 있었다. 지세가 순하고 들이 기름진데다 도산 이부자 이래로 추로지향(공자와 맹자가 난 곳과 같은땅이라는 뜻)이란 이름까지 얻고 있는 안동에서 멀지않아 한 번 자리잡아 볼 땅이었다. 나는 가만히 사람을 풀어 아무도 살지 않는 부근의 땅을 헐값에 사들인 뒤 그곳에 논과 밭을 열었다. 그런 다음 농막 몇개를 넣고 동내 이름을 대명동이라 쓰게 하니 원래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라 곧 모두에게그렇게 불리게되었다. 그 일에 여러해가 걸려 그때 내 나이는 벌써육순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참고 기다리다가그 모든 채비가 갖춰지고서야군자께 말씀드렸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먼저 가르칠 만한 재목을고르는 일에서 비롯된다고 들었습니다. 십철(공자가가르친 열 명의 뛰어난 제자)이 없고 어찌 공부자가있겠으며, 도산 이부자인들 팔고제 분이 없으셨다면어찌 오늘날만한 성세를 누리실 수 있었겠습니까. 이곳 수산(수비산)은 너무 깊고 외진 곳이라군자께서즐거움을 줄 만한 인재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안동근방만 해도 한결 나을 법 합니다만."  이번에는 군자께서도 완강하셨다.
"그곳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나 다를 바 없네. 내어찌 그 더렵혀진 땅에 다시 발을 딛겠는가."
그러시면서 왼고개를 트셨다. 나는 더욱 얼굴빛을부드럽게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아뢰었다.
"촉한의 봉추(방통)는 낙봉파란 땅 이름을 듣고 자신이 죽을 곳을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내 들으니 두실동에 대명동이란 동네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라면숭정처사가 살아도 욕되지 않은 땅이 아닐는지요."
그러자 군자께서는 한동안 가만히 헤아리시더니 처연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수비산에 은거한 지 거의 스무 해 만의 일이었다. 나중에 군자께서는 그때의 심경을 글로 남기시기를,'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머리에 쓸) 갓과 (발에신을) 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바뀌었다. 사방을 둘러보되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안동부에 대명동이란땅이 있어 황조의 옛 이름에 들어맞으니 백수의 외로운 신하가 그 죽을 곳을 얻었다.' 라 하셨다.
이로 미루어 군자께서는 뒷날까지도 대명동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지 못하신 듯하다. 속임은거스름 중에서도 큰 거스름이니 나는 그때 군자를크게 거스른 셈이 된다. 그러나 조금만 뜻이 달라도 낯성부터 먼저 내고 심하면 맞고함에 삿대질조차 서슴치 않는 요즘의 너희에게는 그게 거스름 축에나 들지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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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학을 위한 비명: 정절에 대하여
소녀 시절 글씨 공부를 할 때 나는 안노공의 법첩을 더러 보았다. 그중에서 '쌍학명'이란 게 있는데글씨가 힘찰 뿐만이 아니라 내용이 애절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서문은 안노공이 그 비명을 쓰게 된경위를 적은 것으로 대강 이러하다.
'성오란 스님이 학을 좋아하여 두 마리를 못 가에놓아 길렀다. 그 두 마리 학은 정답게 물을 마시기도하고 모이를 쪼기도 하면서 자적하였는데, 어느날그 중 한 마리가 다리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자남은 한 마리도 모이를 끊고 며칠이나 슬피 울다가따라 죽고 말았다. 이를 보고 감동한 성오는 그두마리 학을 묻은 뒤에 비석을 세우고 내게 이런 비명을 청했다^5,5,5^.'  이에 안노공은 붓을 들어 먼저그 두 마리 학이 살아 있을 때의 다정한 모습과 한마리가 죽은 뒤에 남은 한 마리가 슬퍼하는 모습을그렸다. 그리고 이어 홀로 살기 보다는 죽어 한 구덩이에 묻히기를 바라는 의를 찬양한 다음그 날짐승보다 못한 세상의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말로 비명을 맺었다.
뒷날 절의를 지켜 죽은 사람답게 안노공은 오직 그날 그 날짐승의 의만 말하고 암수의 정에 대해서는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다감한 소녀 시절이라 그랬는지 나는 그 두 마리 학이 암수일 것 같았고 남은 한 마리의 순사도 남성적인 의보다는 여성적인 정절을 지키기 위함으로 느껴졌다. 따라서 내사'쌍학명'에서 받은 것도 의로움이 주는 교훈보다는애절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었다.
그런데 나라골로 시집온 지 세번째가 되던 해 나는바로 내 눈 앞에서 이번에는 사람이 연출하는 그 아름다움을 섬뜩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내게는 맏동서가 되는 청계공의 배위 무안 박씨가 마침내 순절하신것이다. 내가 시집 오기 얼마전에 자결하신 우계공의배위 무안 박씨에 이어 한 집에서 두 번째로 보는 순절이었다.
청계공의 배위 무안 박씨는 무의공 박의장의 아우요, 임란 때 통신 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조서의 기개를 보인 목사 박홍장의 따님이시다. 우계공의 배위무안 박씨와는 종반으로 나란히 한 집안의 며느리로드셨는데 내가 시집 오던 그해 여름 청계공이 돌아가시자 그분도 이미 순절한 아우 동서처럼 부군을 따라죽을 뜻을 굳히고 계셨다.
한 지아비를 향한 여인의 정절은 비록 삼강오륜에는 들어있지 않아도 그 어떤 것보다 엄중하게 요구되던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 요구는 아주 세련되고기교적인 형태를 띠었다. 물론 여기서도 위반은 엄한처벌이 있었으나 그보다 더 자주 활용된 것은 포상을통한 장려였다. 마을마다 문중마다 서 있었던열녀문과 비각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흔히 순절을 포상해 세워지는 열녀문과 비각은 시집 가문의 명예일 뿐더러 그녀를 길러낸 친정집의 자랑이기도 해서 순절은 양가 모두에서 장려되었다. 따라서 지아비를 따라 죽는 일은 때로 종교 초기의 순교열만큼이나 세찬 열기로 우리네 옛 여인들을 충동했다. 특히 나이 젊은 과부의 술절은 가문의 명예를더함과 아울러 아직 다 불태우지 못한 여인의 정념을지켜보고 돌보아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어서시집의 방조 또는 은근란 협력 아래이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청계공의 배위되시는 맏동서 무안 박씨의순절은 경우가 달랐다. 이미 둘째 동서 우계공의 배위께서 순절하여 나라에서 정문이 내려진 터라 아무리 가문을 위한 욕심이라도 참혹한 순절을 두 번씩이나 원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때 맏동서는 마흔을바라보는 나이였고 무엇보다도 길러야할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었다.
처음 맏동서가 순절의 뜻을 보일 때부터 집안은 아래위가 한마음이 되어 달래보려 애썼다. 특히 내게는신행 이튿날부터 그런 맏동서를 지켜보는 일이맡겨졌다. 나는 보는 눈만 없으면 곡기를 끊는 맏동서를달래 끼니를 챙겨드려야 했고 둘이 있을 때는 그 뜻을 돌려보려 정성을 다했다.
"형님, 아직 어린 저 아이들은 어쩌시렵니까. 돌아가신 시아주버님의 뜻도 결코 형님같이는 않을겝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식구들이 지켜보며 말리자 그분은 보다 은밀하고 끈질긴 순절의 길을 택하였다. 권하면 억지로 수저를 드셔도 기름기는물론간장조차 잡숫지 않으시니 밥맛이 날 리 없고 양분이갖춰질 리 없었다. 또 상중의 애도까지 말리지 못함을 틈타 밤낮으로 고침에 엎드려 울며 몸을 혹사하셨고 겨울이 와도 솜 놓은 옷을 입으시지않아 병을 부르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탈상을 하루 앞두고 고침에엎드린 채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도 나는 그런 맏동서의 죽음을밝고 어진 선택으로는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는 그분에게는 길러야 할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지아비를 향한 정성이 크다 해도 어미된 도리를 져버리는것까지 덮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고침에 엎드려 잠자듯 숨져있는 그분에게서 어떤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거친 베옷에싸여 있었지만 그분은 무언가 거룩한 빗살 아래잠들어 있는 한 마리 희지힌 학처럼 느껴졌다. '의는 홀로 살지 아니하고 죽어 한곳에 묻히기를 바라노라.'라는 '쌍학명'의 구절을 절로 연상케 하는정경이었다.
순절이란 극단으로 이념화한 정조 의무가 빚어낸인간 특유의 행태이다.
'쌍학명'에서처럼, 혹은 원앙이나 어떤 종류의 짐승들에게도 순절과 비슷한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들에게는 인간에게와 같은 이념미가 없다. 전혀 우연이거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생태적인 연유로 홀로 살 수 없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정조 의무가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이유로 순절을 보는너희 현대 여성들의 눈길이 곱지 않음을 나는 안다.잘해야 그릇된 이념화의 희생이요, 심하게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거나 피학음란증 같은 정신병적 증상까지 찾으려 들 것이다.
설령 남성들이 충실하게 정조 의무를 이행했다 하더라도 순절을 미화하기는 어렵다. 어떤 계약도 생명까지 다른 존재에 종속시킬 수는 없다. 하물며오늘날처럼 개인 중심의 세계관에 있어서야.
하시야 순절을 시차가 있는 정사라고 본다면 오늘날의 사람들도 이해 못 할 것은 없다. 모든 정사는우리에게 아름다운 환상을 품게 한다. 자신이 사랑한사람과 죽음을 함께 하였다는 사실은 되풀이 윤색되어도 언제나 쉽게 우리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내게는 순절이 그릇된 이념화의 희생이라고 해도 감동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이 목숨을 바쳐온 이념이 언제나정당하고 합리적이었던가. 인간은 영악하기로 이름났지만또한 대단찮은 이념에 죽기도 하는 어리석음과 미련스러움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리석음과 미련스러움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도하다. 자신이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한 것, 혹은 가장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은 섬뜩하지만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핸히도 나는 군자와 함께 육십년을 늙어갈 수 있어 순절의 문제와는 부딪혀보지 못했다. 군자께서는품행이 단정하셨으며 나의 시대는 전란도 없고신분의 변동도 심하지 않아 정조 의무로도 시련을 겪지않았다. 그런데 순절한 윗동서들의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까닭은 너희 잘난 이론가들에 의해부인될위험마저 있는 정조 의무에 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여성의 정조 의무를 약화시키거나 부인하는 논리가상호 주의에 바탕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 남선들의의무 불이행에 대한 항변으로서라도 누구도 그런주장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나친 상호주의가문제를 악화시키거나 여성쪽의 좋지 않은 성적 행실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그 포기를 권할 수는 없다. 그 주장은 여성의 당연한권리이며 포기는 일반적인 권리 의무의 문제가 아닌개인적 미덕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은 정조 의무를 인간 본성에관한 억압으로 보고 그것을 여성 해방과 연결짓는 논리다. 긴 말 할 것 없이 결혼을 요즘 너희들 식으로설명한다 해도 그 억지스러움은 금세 드러난다. 결혼계약에는 당연히 정조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권리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의무만 경감하거나 면제받겠다는 것은 계약을 파괴 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거기다가 더욱 해괴한 것은 자연과 본능을 무슨 자랑스러운 부적처럼 앞세운 성 해방의 논리다. 도대체자연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선이란 단정은어떤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자연과 본능은 거의 무한정한 물욕을 주었다. 그렇다면 그 물욕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것을 훜치고 빼앗는 것이 선인가. 자연과 본능은 우리에게 공격충동을 주었다. 그 공격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힘센자가 약한 자를 흠씬 패주는 것이 선인가. 만약 우리모두가 자연과 본능에 충실하게만 산다면 세상은 당장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편리도 하지. 오직 성에서만 자연과 본능을 따르는 것만이 선이라니, 정조 의무따위는 가볍게 비웃을줄 알아야똑똑하고 잘된 여자가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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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인으로서
요즘 여인네들이 아^36^예 잊어버리고 살거나 잘못해석하는 아내의 다른 이름 중에 안주인이라는 것이있다. 지어미된 여자가 안주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그품격까지 아울러 잃게 되고, 잘못 해석하면 권리의주인으로만 알아 집안이 어지러워 진다.
무릇 주인됨이란 어떤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한다는 뜻이지만 그 주인됨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땅히하여야 할 바가 앞서 있다. 안주인도 그렇다. 안주임은 집안의 살림을 오로지하는 사람이지만 또한 그 권리는 만저 하여야 할 바를 다한 데서 온다.
나의 시대 안주인의 하여야 할 바 큰일은 흔히 제사를 받드는 일과 손님 맞이로 요약된다. 두 가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는 별로 큰 뜻을 지니지 못한일이 된듯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바뀐 것은 표현양식이지 의미가 아니다.
제사를 받드는 일은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적 행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가문의 정싱적 전통을 이어가는 의식이기도하다.
그주에서도 특히 종교적인 행사 측면은 세련된 세계종교의 무차별적 세례를 바등ㄴ 요즘 사람들에게 미신으로 치부되기조차한다. 하지만 신이란 것이육체를 갖지 않은 정신이라면, 그 어떤 신이 있어 우리에게 피와 살을 나눠준 조상의 혼령보다 더 따뜻하게우리를 보살필 수 있으랴.
한 가문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의미도 그렇다. 이세상을 먼저 살아간 정신 중에는 분명 조상들의 그것보다 우월한 정신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단지조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급한 정신에 얽매여 있기 보다는 가문 밖의 우월한 정신을 볻받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이룩한 문화의 위대함은 자주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다양성에 힘 입은게 아니던가.
당장은 비교 우위에서 뒤지더라도 자신의 뿌리를잊지않음은 상이한 전통을 잇고 길러간다는 뜻만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그같이 상이한 전통에바탕한 정신의 다양한 성과들이 어우러져 문화의 깊이와 폭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가문의 정신적인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반드시 외부의더 우월한정신을 배척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물며 우리 전통적인 가문의 가르침들 중에는 열린 정신과 진리에 대한승복을 강조하는 것이 더 많음에랴.
그런데도 옛여인들의 실기나 행장에는 제사를 받드는 데 들인 그들의 정성이나 노력이 전혀 들어 있지않다. 나의 실기에도 그렇다. 그 일이 엄중한 만큼또한 너무나도 당연하여 따로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다만 그 실패의 끔찍한 예나 불경으로인한 재앙만이 전설로 이어져 올 뿐이다.
옛적 어느 좋은 문중에 참한 종부가 있었다. 하루는 불천위 제사가 들어 시루에 떡을 앉혔는데 때가되어도 김이 오르지 않았다. 족내 족외의 제관들과집안의 어른분네들이 제상을 차려 놓고 헛기침을 하며 시루떡 틀이 들기만을 기다리는데 시루에는 김이오르지 않으니 그 종부의 급함이 오죽 했을까.
장작불을 높이고 시루 가운데 구멍을 내어 보았지만 끝내 김이 오르지 않자 종부는 방간 대들보에 목을 매고 말았다. 요새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 종부에게는 재물을 주관하는 안주인의 품격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뒤 문중은 그렇게 죽은 종부를 애닯게 여겨 제사에 시루떡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부정한 땔감으로 재물을 마련했다가조상의 노여움을 사 화를 입은 얘기도 있다. 뒷간을뜯은 나무로 제삿밥을 짓고 탕을 끓여 올리자 그걸안 조상의 영혼이 호롱불을 뒤집어 집고 재산을 모조리 태우고 아이까지 데이게 했다는 얘기가 그 한 예이다. 땔감조차 그토록 엄하니 직접 제상에 오르는재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제사에 큰 생선이나 굵은 과일을 쓰면 큰 자식을 낳는다며 제수 장만에 바치는 안주인의 정성을 부추기기도하고 술을아껴 잔을 다 채우지 않으면 눈이 움푹 들어간 자식을 낳는다며 제물의 인색함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똑똑한 여인네들 중에는 제례의 의미를 승인하면서도 불평등한 노동의 분담을 들어 안주인에게 맡겨진 의무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이가 있다.
아마도 의미와 관계하는 측면은 남자에게 독점되고여인네들에게 주어진 몫은 다만 제물의 준비라는 노동적 측면 뿐이라는 점에 착안한 듯하다. 그리하여한발 더 나가면 봉제사의 소임 또한 남성들의 편의를위해 고안된 여성 노동력 착취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의미와 관계없는 노동이 있는가. 더구나제물은 정성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아마도 그 같은논의는 노동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비하시켜 이해한데서 왔을 것이다. 가문을 통해 자아의 확대를 인정한다면 거기서 어떤몫을 담당하든 제사는 주인된 이의 당연한 의무이고 권리이다.
어려움이 있다면 오히려 많은 것이 달라진 오늘날의 너희삶에 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정의하는일이다. 지속적인 산아 제한은 종통이나 가문 형성을어렵게 하고 제사도 친기조차 없는 집에서 많은 핵가족 시대를 열었다. 거기다가 제사의 종교적 의미마저퇴색해 버린 이런 시대에 고색찬연한 제사의 의미를그대로 되뇔 수는 없다.
하지만 애써 찾아본다면 너희 시대라고 제사의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뿌리를 되돌아 보는 일, 너희들 배운 이들이 즐겨 하는 말투를 따르면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상기하는 작업쯤으로 쳐도 제사는 여전히 소중한 의미를지닌다.
그리고 형태야 사진 앞에 꽃이나 바치는 추모식이 되건, 그마저 생략되어 추모담으로 남든 그러한 작업의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안주인의 몫이 된다.
그런데 있는 친기조차 더러는 신앙을 구실로 더러는 낭비를 잘못 이해해 제사를 마다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을 보면 다음 세대가 실로 근심된다. 너희는 거창한 세계 시민을 길러낸다고 믿을 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뿌리없는 정신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그런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만드는 또 다른한 세상이 있겠지만, 알지 못할레라, 이미 뿌리가 없는데 어찌 열매 맺기를 바라리오.
제사를 받드는 일 못지않게 안주인의 중요한 소임이 손님 맞이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한글로 된 내 실기에도 몇 가지 예화가 있다.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그 의미를 풀어 나가자.
'이때에 임진년 병화가 창만하야 흉년 기근이 참혹할새 참판공(시아버님 운악공)이 기민을 진휼하고 유개(떠도는 거지)를 구활 하기를 일삼으시거늘부인이이 뜻을 받들어 날마다 기민을 먹이시더라. 사방의왕래 행인이 풍성을 듣고 모여들어 가마와 솥을 밖에걸어놓고 죽밥을 지어내어 사람마다 포식하여 보내니원근에 의탁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 부지기여수로 찾아들어 충효당 너른 집에 방방이 유숙하야 달로 유련하는 이와 해포 의탁하는 이로 아침저년 끼니때마다항공 이백여 권구가 끌어나되(들끓되) 부인이 종시여일로 한 번도 사색간에 염권하난 모양을 보지 못할레라. 한 번은 행랑에 있던한 양반이 향사당 잔치에가고자 하되 도포가 없어 못 가거늘 참판공이 입었던옷을 벗어주려 하시매 부인이 가로되, '남을 주면 새것을 주지 어찌 입던걸 주시리오'하고 상자에 갈무렸던 옷을 내어주며 '이 옷 다시 찾지 아니하리라'하더라.'
'비자를 거느리되 마치 어린 딸자식처럼 쓰다듬으시고 병이 들면 반드시 몸소 음식을 먹이고 한온을간검하시며 잘못이 있으면 조용히 타이름으로 깨우쳐순순히 계도하시어 조금도 포려한 성음과 분요한 안색을 베풀지 아니하시더라. 비복들은 그른 마음과 힌익힌 기습이 절로 감화되어 복종하고 다시금조심하여 마침내 마음으로 따르니 이웃 종들과 동네 하인들이 다 원하는 말이 '우리는 몸이 어찌 나서 아무댁노복이 되지 못 한게 한이라' 하더라.
부인이 천성이 자애하여 환과고독과 늙어 의탁할데 없는 이를 보면 마치 내 몸에 병이 난 것처럼 여겨 아무리 가난하고 곤궁한 중이라도 주급하여 구제해야 할 사람이라면 가만히 둘러주어 구활하고 마침내 그 사람이 모르게 하시더라. 부인의 평생 끼친 덕이 이러하기에 왕왕이 지성으로 축수하야 하난 말이'이 아기씨님 수복무강하시옵소서. 우리 몸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 한번 갚기 원이나이다' 하더라.'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런 구절들이 손님 맞이와 무관하게 여겨질뿐더러 은근한 제자랑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세월이 손님이란 말의 뜻을 너무 줄여버린까닭이다.
옛 사람에게 손님은 나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 나아가 나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이로운 사람도 있고 해로운 사람도 있다. 더하려고 오기도 하지만 앗거나 덜어가려고 오기도 한다. 사는 즐거움을 보태 주기도 하지만사는 괴로움을 키우기도 한다.
그런데 반드시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특성은 나에게 이로운 손님만 골라 받을 수 없게 한다.너희들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 존재의 표현은 다른사람과의 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관계만 맺고 살 수도 없다. 따라서 손남을 맞는다는 것은 옛사람의 인간 관계 전반을 규정하는 중요한 일이 된다. '소학'의 앞머리에 쇄소 응대를 넣어 손님을 맞는 법도를 행실의 기본으로 삼은 이치가 거기에있다.
따로 사무실이나 일터를 갖지 않은 옛 사람들이 그손님을 만나는 곳은 대개 집안이 된다. 곧 손님맞이는 그 시절로 보아서는 인간 관계 형성의 출발점이자남에게 나를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마당이다. 그때 안주인에게 맡겨진 역할은 공적이고 의례적이기 쉬운 사랑방의 기능을 정의와 성심으로 보완하는 데 있다.
나에게 이롭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손님을 반가이맞고 정성으로 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해가 분명하지 않은 손님도 예를 잃지 않고 맞을 수는 있다.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손님은 대개 그런 부류만을 가르키는 듯하고, 실은 우리 시대에도 안주인의 교양미는 먼저 그런 손님을 맞이하는태도에 좌우되었다.
하지만 그런 손님에게 예절과 정성을 다하는 일은너무도 당연하여 내 실기에는 올라있지 않다. 나도통상의 경우는 구태여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다만 너희에게 직은 참고라도 될까 하여 군자께서 계시지 않을 때 찾아오는 사랑 손님을 맞이하던 법도만전한다.
군자께서 출타하셨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하인을보내 맞아들이게 하고 찾아온 연유를 알아본다. 그런다음 손님과 연배가 맞는 집안 바깥분을 모셔와군자를 대신해 응대하게 하고 군자가 돌아오실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신다. 만약 손님이 집안에 군자가 계시지 않음을 꺼려 들기를 마다하면 동네의알맞은 집을골라 그리로 모신다.
손님을 치는 정성이 흔히 음식 범절에서 드러난다.그 점에서도 나는 할 수 있는 바를 다했다. 내가 그들을 대접하는 사이에 익힌 조리법이 뒷날 내가쓴'규곤시의방'이란 요리서의 바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잡대하는데 기울였던 내 정성을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
정작 접빈객의 어려움은 나를 필요로 해서 오는 사람,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오는 손님을 맞는데 있다. 어려움을 당한 친족이나 지인이 그러하지만넓게 보면 과객도 그러하고 기민도 그러하다. 아마도내 실기를 쓴 사람은 그런 손님을 맞는 어려움을 헤아려 특히 그 부분을 적어 놓은 듯하다.
'재령 이씨 분재기' 라 하여 조선 중기 사족들의재산 상속법과 경제 관념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문서를 남겼을 만큼 살림살이에 규모 있는 시댁이었고,남에게 널리 베푸는 일은 시아버님 운악공 이래의 가풍이라, 어떤 이는 실기에 적힌 손님 맞이에서의 내선택을 의심하기도 한다. 있는 재물에 어른들이 시키는 데로 했을 뿐이라는 추측이 그러하다. 하지만 설령 스스로를 내세우는 일이 될지라도 나는 그 선택또한 한 선택이었음을 주장하고 싶다.
잘난 서양인들의 철학이 아니라도 우리가 어울려살아야 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조금의 지각만 있으면 누구든 깨달을 수 있다. 거기다가 비록얻으려 왔다 해도 세상의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집을 지목해 찾아왔으니 어찌 그런 손님을 외면 할수 있겠는가.
재물도 그렇다. 군자께서 충효당을 나오실 제 약간의 분재가 있얶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대명절의를 쫓아 동서로 은거하심에 이르러서는 입에 담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손님 맞이로 살림이 줄어드는걸 난들 어찌 걱정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는 믿었다. 그들에게 군색함이 없어야 내가더 넉넉해진다는 것을, 남의 군색함을 돌아보지 않는나의 넉넉함은 다만 재앙이요 화근일 뿐이라는 것을.
비복의 일을 손님 맞이에 넣은 것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랬다.
비록 당시로는 사람축에 들지도 못하는 생령이긴 하나 내 집을 찾아 깃들었으니 어찌 귀한 손님이 아니랴. 그런데 주인이 되어 어찌 손님에게 소홀할수 있으랴.
어버이를 잃은 자식이나 지아비를 잃은 지어미나자식없는 늙은 이를 거둔 일도 그러하다. 밝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핀다면 천지간에 목숨을 받은 것치고내 손님이 아닌 이가 어디 있으랴. 천지간을 내 집삼아 넓게 사는 이에게는 그 모두가 나를 찾아든 손님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남자들은 거의가 집밖에서 공적인 일터나 사무실을 따로 가지고 '사생활의 평온'은 형법으로 엄중히 보호된다. 사랑방이란말은 사어에 가깝게 되었으며 또 사랑방이 있다 해도안주인이 집안에 남아있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거기다가 집으로 찾아드는 손님조차 드물어진이런 시대에 안주인의 손님 맞이가 어찌 예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되 이 역시도 제사를 받드는 일과 마찬가지로 형식은 달라도 그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찾아오지 않는다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인되어 손님을 모른다 할 수 있는가. 새 둥지 같은 아파트 한칸과 내 남편 내 자식만이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마저 푸대접으로 내쫓는 오늘날의 안주인들을 보면 나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 다음 세상이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내가보기에 간밤에 자정이 넘어 취한 그대의 남편과 함께 찾아와 술을 조르다 그대의 차가운 눈초리에 번쩍 술이깨어 돌아간 남편의 옛 친구는 귀하디귀한손님이다.며칠 전인가 무언가 아쉬운 일로 찾아왔다가 그대의쌀쌀맞은 대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간 시댁 피붙이는 물론 어제 하루 종일 그대를대신해 집안의궂은일을 해준 중년의 파출부도 모두 귀한 손님이다.그런 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 정연한 이해득실의 인간관계와 핵가족으로만 짜여진 세계란 얼마나 부스러지기 쉽고 외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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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버이의 자식
'여사서' 곳곳에서 강조되는 항목중에 사구고란 게있다. 출가한 여인네가 시부모를 섬기는 예를 이르는말이다. 요새 사람들에게는 일쑤 마음에서 우러남보다는 단련과 수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것으로이해되는 여인네의 덕목이다.
나의 시부모 모시기도 어쩌면 그런 옛 가르침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에 관한 실기의 몇몇 구절도 내가 그렇게 이념화된 미덕을 지향한 것으로나와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내 선택은 있었다. 예와 이치만으로는 진심으로 웃어른을 우러르고 받들 수가 없다.
내가 옛가르침에 더하여 찾아낸 사구고의 대의는군자와 나의 동일시에 바탕한다.
내가 사모하고 우러르는 군자를 낳고 길러주신 분들,내가 그 군자와 혼인으로 일체를 이루었다면 그분들은 당연히 나의 부모이다. 군자를 사랑하면서,군자를 사랑해 주신 분들을 어찌 소홀히 모실 수 있으리.
또 나는 검제에서 외롭게 남아계신 친정 아버님 어머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모셨다. 누군가친정집으로 들어온 며느리가 내 아버님 어머님을그렇게 모셔주기를 바라는 만큼의 정성으로 나는 시부모님을 모셨다. 청계공 우계공 두 분 시아주버님과그 배위의 잇따른 참상으로 상심해 계시던 시부모님께서 내게 마음을 여신 것도 예와 이치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엄한 법도에 따른 며느리로서보다는 새로 얻은 딸 같은 사람을 받았다고믿는다.
한 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이웃 동리에 사는 시아버님의 친구분이 마름을 보내 오셨다. 마름은 민물에서 나는 말의 일종으로 잘 다듬어 무치면 늦은봄의별미가 되었다. 겨우 입맛을 잊고 계시던 시아버님은내가 조리한 마름을 달게 잡수신 뒤에 물으셨다.
"마름은 이 마을에 나지 않는 물건인데 어디서 났느냐?"  "관어대 영감댁에서 보내 오셨습니다."
"참으로 잘 먹었다. 겨우내 편치 않던 몸이 다 개운해진 듯 하다. 적바람(고맙다는 인사편지)을  내야할 터인데 내 이 생광스러움을 나타낼 구절이 마땅치않구나."  시아버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생각에 잠기셨다. 그때 문득 내게 시아버님의 뜻을 담을 한 구절이 떠 올랐다.
"수국춘색이 홀등반상하니 향미담래에 가득소병이라 하면 어떨는지요?"  그러자 시아버님께서는 천천히 그 구절을 되뇌시더니 무릎을 치며 감탄하셨다.
"물 나라에 봄 빛깔이 홀연히 상 위에 올랐구료,그 향그러운 맛이 오래된 병을 낫게 하였소이다^36,36^네가 꼭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하구나. 성가전에 여자선비란 소리를 들었다 하더니 그게 빈말이아니로구나"  며느리가 시아버님 앞에서 문자를 희롱함은 당시에 엄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있다.그러나 그때 나는 그런 시아버님에게서 친정 아버님경당을 느꼈고, 시아버님도 내게서 예와 이치에 따른며느리가 아니라 정으로 이어진 딸으로느끼셨던 것으로 안다. 시어머님을 모시는 데도 나는 예절바른며느리이기 보다는 살가운 딸이고자 하였다.
출가외인이란 말을 흔히 결혼이 친정과의 절연을뜻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고, 심하게는 자식으로서의모든 의무로부터 면제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실로 잘못된 이해이다. 그 말이 엄하게 해석되던 옛날에도 여인의 출가가 자식의 도리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나의실기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이씨 사는 영해서 안동이 이백리 길이로되부인이 반드시 일년에 한 번씩 근친하여 이미 출가한몸이나마 부모님에게 조금도 성효를 게을리 아니하시더라.
(친정 어머님) 권부인이 하계하시고 경당 선생이 육십에 환거하여 아들 하나 없이 계시거늘 부인이 판서공께 비는 말씀이, '여자 몸이 아무리 중히 여기는바가 다르다 해도 인정은 분간이 없으니 져근듯(잠깐동안만) 춘파에 돌아가서 외로이 앉으신 어버이 봉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니, 판서공이 그경지를 긍측히 여겨 허락하시거늘 부인이 이 길에 일년이 넘도록지성으로 (친정 아버님을) 봉양 하였으되 비록 충중한 효자로도 미치지 못할레라. 그러다가 경당 선생이실(여기서는 재취)을 두신 뒤에야 충효당으로 돌아오셨으나 선생은 삼남 일녀를 낳으시고 맏자제가 겨우 여덟 살일 때 하계하시니라. 과고(여기서는 경당선생의 후취와 어린 아이들) 의탁할 때 없는 데다 사가(여기서는 친정집) 방락 하야 어느 지경이 될 지모르거늘 부인이 판서공께 사뢰어 가로되, '우리 친정 가세 저러하니 저 집 말글(곧 경당 선생의 학문)붙들 도리 우리 내외 아니하면 우리 부모, 우리 종사그 아니 참혹하리잇가' 하시고, 즉시 고아 과택을데려다가 한 집에 봉솔하여 사시절 봉제사를 때로 비품하야 행하시고 모든 고아를 극진히 교양하야 차례로 성취하되가례취부를 하나도 실시 아니하시니 시절 사람들이 석계댁(부인의 시댁 택호) 고의를 칭송하고 부인의 성효를 탄복하더라.'
여기서도 내가 친정을 드문 일로 칭송하고는 있으나 출가한 딸에게도 효의 본분이 이어짐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옛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 장황하고난삽하여 이제 사람이 잘 알아듣기 어려우므로 그 일을 다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내 친정 어머님께서 세상을 버리신 것은 내가 출가한 지 일곱해 만의 일이었다.
그때의 아버님의 춘추 예순, 홀로 남으시게 된 것도애닮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데걱정되었다. 이에 실기에 적힌 것처럼 군자께 아뢰고검제로 돌아가 친정집을 보게 되었다.
돌아간 첫 해에 내가 가장 힘쓴 것은 아버님께 계실을 얻어드려 수발들게 함과 아울러 친정집의 후사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일은 쉽지가 않았다. 아버님 경당이 비록 명망 높은 학자라 하나 가사가 적빈 한데다 연치마저 높으시니 마땅한 규수가 나서지 않았고, 그렇다고 함부로 사람을 들여얼자로친정 집의 핏 줄을 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러군데 사람을 놓아 규수를 찾던 나는 마침내 외가곳인 안동 권씨 문중에서 새어머니로 모실 규수를구할 수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먼 친척되시는권몽일이란 분이 아버님의 학덕을 사모하여 그 따님을 허락하신 덕분이었다. 규수도 행실이나 심덕 모두흠잡을 데 없었다.
아버님께서 이듬해에야 채취의 예를 치르시니 그사이 군자께 받은 한 해가 다 지나버렸다. 하지만 나는 충효당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계모가 나보다열살이나 어린데다 오래 안주인이 없어 두서 없이 된친정 살림이라 그대로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모든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계모를 도와 살림살이를 익히게 하는 동안 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갔다.그런데 이번에는 계모의 회임이 나라골로 돌아가려는나를 붙들었다. 친정집에 한 가닥 자손 운이 남아있어 아버님의 혈맥으로 뒤를 잇게 될 지도 모른다는생각이 들자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이듬해 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외동딸로난 나는 실로 이십칠 년만에 남동생을 본 것이다. 그해산 구류까지 마치고 그제서애 시집으로 돌아가니군자 곁을 떠난 지 삼년째 들던 해였다.
그 뒤 젊은 새어머님은 아들 둘과 달 하나를 더 낳아 하마트면 끊길 뻔 했던 아버님의 혈맥을 되살려놓았다. 나는 열일곱 난 맏아이 상일과 겨우 열살난둘째 휘일을 검제로 보내어 외조부의 높은 학덕을 배우게 하는 한편 친정을 돌보는 내눈과 귀로 삼았다.
아버님은 일흔 되시던 해에 어린 사남매와 아직 서른도 안 된 새어미님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평생학문에만 전념한 유자의 집이라 쌓아둔 재물이있을리 없고 족중이 번성하지 못해 따로 의지할 만한곳도 없으니 버려진 바나 다름없는 어린 동생들과 젊은 새어머니 였다. 나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그들을나라골로 데려오기로 했다.
"효에 따로 아들 딸의 분간이 있겠는가. 좋이(잘)생각했네."  군자께서도 그렇게 나를 격려해주어 나는 그들의 살이를 돌보는 한편 조상 향화를 잇게했다. 새어머님이 낳은 사남매중 둘째는 어려서 죽었으나 나머지 삼남매는 잘 자라주었다. 군자께서도 두남동생을 문하에 거두어 가르치시니 훗날 경당 종가의 기틀이 그렇게 마련되었다. 계모와 동생들은 그로부터 십여년이 지나서야 검제로 돌아갔다. 맏동생이성가하여 손아래 남매와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으로돌아간 것인데 그때도 나는 약간의 전답과 짐을 마련해 주었다. 뒷날 셋째아이 현인은 내 행실기에서 그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모두 내 아버님의 너그러우심이었다. 하나그 보다는 어머님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여 아버님이 따라 주신 것이라.' @ff
@[  제3부 현빈(검을 현, 암컷 빈)의 꿈
혼란에 빠진 시대의 어머니들에게
어머니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여인의 가장 중요한 생산은 자녀이며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 양육이다^36,36^우리는 오랫동안그렇게 배워왔고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 영원히 폐할 수없는 진리일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르러 그 이름을 포기하는 여인들이 적잖이 생겨났다. 자식은 다른 생상으로 갈음되고 어쩌다 생산을 해도 그 양육에서 어떤 성취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젊은 여성들은 그런 관점과 사고야말로 진보적이라고 믿으며 한술 더 떠 그실천을 여권의 신장과 연결짓기도 한다.
세계는 오직 비극의 무대이고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자녀의 생산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며 낭가서는 철학의 문제이다.인생의 실상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그 믿음과 거기 따른 선택의 시비의 대상이 되지못한다.
누구도 명백한 비극의 재생산을 강요할 수는 없다.아무런 동의도 구함이 없이 한 생명을 무에서 끌어내고통과 부조리의 세계에 내동댕이치는 일은 오히려끔찍한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현명하다고 우러른 사람중에도 그런 믿음에서 당므 생산을거부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여성들이 어머니 되기를 기피하는 것은 그런 비관론에 바탕한 세계 인식 때문인 것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시대 젊은이들은 앞서의그어떤 시기보다 긍정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이해한 듯 보인다. 우리는 누리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이 세상은 몇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살 만하다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세께와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인 것 같기 때문이다.
자녀에게서 자기 존재의 연장을 보는 관념적 자아확대의 믿음에 더 이상 동조하지 못하게 된 것도 이시대의 여인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로 들 수있을지 모른다.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불행한 숙명 중의 하나는 허무이다.누구도 시간과 싸워 이긴 인간은 없다. 모든 존재는길든 짧든 언젠가는 허무에게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인간은 그런 허무와의 싸움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고안해 냈다. 육체보다 오래 지탱하는 그 무엇, 시간이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찾아내 거기에자신을 실음으로써 존재의 연장을 꾀하기도 하고 시간을초월하는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해 거기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존재의 허무로부터 구원받고자하기도 했다. 학문과 예술이 그러하고 진리와 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는 본능의차원에 머물러 있는 생식을 관념적으로 갈고 닦았다.자신의 형질을 물려받은 자손에게서 존재의 연장 혹은 확대라는 개념을 찾아냈고 심하게는 동일시의 믿음까지 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동물적인 생식을시간과 싸우는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이 시대에 들어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어온 많은 것이 실은 주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이판명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젊은이들은휘황한 관념보다는 간명하고 확실한 현상을 더 믿고이성보다는 감각에 더 의지하게 되었다. 지난 시대허무와의 싸움에서 우리를 결려했던 여러 가치들은도처에서 의심받고 진리의 불변성이나 초월적 존재에관한 옛 믿음들은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한다. 아울러자녀에게서 시간을 이겨 남은 자신을 기대하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애써 갈고 닦은 자아 확대 내지 동일시의 관념은 본능으로 환원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이 시대 어머니들의 출산 기피가 모든 인간은 홀로와서 홀로 가며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에게서만 끝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그것은 인생관의 문제이며 또 다른 철학의 문제이다.우리 존재의 본질이 어떠한가에는 아직 명확한 답이없고 누가 어떤 답을 인식의 기초로 선택 했는가 또한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기에서 비롯된 출산 기피는 존재의 허무와 홀로 맞서겠다는 당당한 결의로 해석되어 격려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발달된 이 시대의 문화 놀이와 노동 체계를 출산기피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허무와함께 존재의 또 다른 숙면인 고독에 착안한 논의이다.
부모의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잊게 하는 자녀의 역할이 이 시대 특유의 제도와 장치들로 대체되어 그 출산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음을 뜻한다.
오락적 기능만 강조된 오늘날의 대중 문화나 번창하는 향락 산업은 우리의 근원적 고독감을 마비시키거나 잊게 해준다. 상품화로 한층 풍부하고 다양해진여가 활동도 삶의 무료함이나 외로움에 훌륭한 위로장치로 혹은 망각 장치로 기능한다. 발달한 전자 오락 기기만으로도 심각하거나 외롭지 않게시간을 보낼 수 있는게 오늘날의 젊은 세대이다.
여자들까지 일터로 끌어내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후기 산업 사회의 노동 체계도 어떤 면에서는 망각 장치나 위로 장치의 역할을 한다. 쓸데없이 벌여놓기만한 현대사회는 자기 유지에 필요한 잡다한 기능들을 불편없이 수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럴 듯한노동의 명분과 제도들을 고안해 냈다. 흔히일 또는추구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우리를 혹사시키는 체계로 , 그것은 우리의 심심함과 외로움을 잊게 하거나아^36^예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다.
틀림없이 자녀는 부모의 무료함과 고독을 달래주는데 중요한 몫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녀를 낳고기르는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고, 설령 그렇다고는쳐도 이 시대의 여러 장치나 제도가 그 몫을 대신할수도 없다. 아무리 다양하고 풍부하게 발달한다 해도그것들이 부모와 자식사이의 신비한 교감까지는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거기다가 이 시대의 은근한 추세가 되어 있는 젊은이들의 출산 기피가 그런 관념적인 배경을 거지고 있는지는 실로 의심스럽다. 드러나는 현상을 감각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시대의 속성에 너무나도 어울리지않는 까닭이다. 그보다는 좀 더 실질적이고 드러나는원인을 찾아보는 게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뜻에서는 사회 보장과 보험 제도의 발달에 자녀의 생산과 양육을 기피하는 원인을 찾는 쪽이 훨씬조리 있게 들릴 수도 있다. 이 시대의 발달된제도들이 자녀에게 기대되는 보장 보험 기능을 대신해 주기때문에 자녀가 필요 없어진다는 말인데, 수명과 연관된 우리 삶의 특성은 그 같은 논의를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수명이 다른 동불보다 길다는 것은 그만큼예측 못할 위험과 어려움에 빠질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자신의 몸을 스스로 다 감당하지못하는 노년이 유달리 길다는 것은 그만큼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기간이 길다는 뜻이 된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자신의 먹이를 스스로 구할 수없는 때가곧 죽음의 순간이다.
낳고 기른 은혜로 빚지운 자녀들은 우리가 빠지게되어 있는 그런 위험과 어려움에 틀림없이 보험 보장제도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필요성을거기서만 찾는 것은 너무 물적 기반에만 얽매어 놓는 해석이다. 야소씨(예수)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목숨이 깃드는 것은몸이지만몸을 기르고 돌보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근년의, 그리고 일부 과격한 여성쪽의 논의이기는하지만 출산과 육아에 대한 가치 부여를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주도해 왔다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설령 자녀를 통한 자기 확대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부계 혈통에 독점되고 여성은 다만 그보조자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거부의 이유를 찾아낸다.
그리고 심하게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무의미한 봉사를할 수 없다는 결의로까지 발전한다.그 불평은 충분히이유가 있고 방법도 어쩌면 가장 효율적일 수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근본과 지엽이 뒤바뀌어서는안된다. 그것은 여성의 가계 상속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근거는 될지언정 출산과 육아 자체를 거부할 명분은 되지 않는다.
그밖에 공동체를 위한 산아 제한의 대의가 증폭되어 개인의 신념으로 전화된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지구는 충분히 복잡하기 때문에, 혹은 이미 우리나라는 인구 과잉에 빠져있으므로, 나만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식의 논의가 그러하다.
진지한 고려 끝에 한 결정이라면 갸륵한 자기 희생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엄격히 따지면 여기서 문제삼는출산 기피는 아니다. 그런 이들이 지구 환경 혹은 민족 공동체의 생존 여건이 허용하면 자녀를 낳고기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피라기보다는 일시적이고 조건부의 유보일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쯤은 종합과 절충의 이익을 노려볼 때도 되었다. 곧 앞서 짚어본 여러 원인들을 종합하거나 그중의 몇 가지를 절충하는 일이다. 그러하면이론적으로는 이 시대의 출산 기피 경향을 설명할 수있는 완전에 가까운 답, 혹은 적어도 비난하거나 부정 못할 답은 니올 수가 있을 듯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흔하게 토론되고 있는 출산 기피의 논리다. 요즘 젊은 너희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런 종합과 절충은 너희가 어머니되기를 거부하는 이유와는 거의 무관하다. 내가 너희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다만 가치관의 전도와 천박하게만 이해된 개임주의 혹은 편의주의, 그리고 오해된 여권과 벌거숭이 이기뿐이다.
너희 중에도 공부나 일을 핑계로 출산을 마다하는이가 있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이 깊이있는 사유와성실한 검토를 거친 결론 같지는 않다. 내게는 오히려 다분히 유행적이고 조작의 혐의가 짙은 자기 성취의 논리에 혼란된 경우가 많아 보인다. 성취의 가망도 별로 없고 가치도 의심스럽지만 어머니됨의 힘들고 고단함보다는 편안하고 겉보기가 그럴싸하다는 점에서 이루어진 가치관의 전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란 이름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가 요즘처럼 이리 흔할수 있으랴.
자녀는 예 속의 빌미가 되기 때문에 어머니되기를마다하는 논의도 있다. 곧 자녀를 낳는 것은 남성에게 인질이 내어주는 일이 되어 불만스러우면서도남성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너무 비관적인 예단이며 남녀의 관계를대립적으로만 이해한 논의다.
사람의 수컷처럼 오래 자기 새끼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명하는 동물의 수컷은 없다. 그것은 자녀의 또다른 역할을 암시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녀가어울려 사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양태라면 자녀보다 더 든든하게 양성을연결하는 고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고리를 족쇄로만 이해하고 더구나그 단절을 여성의 권리 신장과 관련 짓는 논의는 어딘가 크게 어긋나고 삐뚤어진 데가 있다.
출산으로 가사노동의 양이 늘어나고 특히 양육의수고로움은 오직 여성에게만 부하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출산 기피를 설명하려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계 상속권의 문제에서처럼 남성에게 공정한 노동부담을 요구할 근거는 되어도 출산 그 자체를 거부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또 육아가 요구하는 잡다한 노동과 주의력의 집중이 어머니의 정싱 세계를 제한하고 나아가서는 퇴행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출산을 꺼리는 여인들도 있다.
그들은 흔히 육아에 골몰한 상태를 아이처럼 바보가되어간다고 표현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생각이실로 바보스럽다. 육아에 가치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그것은 새로운 지시과 경험의 축척이며 여성을 어머니로 한단계 성숙시키는 과정이다.어쩌면 아이를 갖지 않은 여성들이 일터에서 주워들은 시시껍절한 수작보다는 훨씬 가치있을 수도 있는.
삶을 즐기고 누리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주장되는 출산 거부는 우리 시대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천박해지고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가될 것이다.
기껏해야 성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여유를 대상으로하는 부담을 들어 당당하게 자녀를 마다하는 그 주장에서는 개인주의나 편의주의를 넘어 인간성의황폐까지 느껴진다.
출산이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현저하게 떨러뜨리기때문에 싫다는 여자들도 있다.
여자의 매력을 성적인 방향으로만 국한시키면 어느정도는 사실이고, 그걸 잃게 되는 것은 여성으로서는쓰라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처녀적의매력만으로 일생 남성들로부터 음란스러운 눈길을 느끼며 살겠다는 뜻인데 그 억지스러움은 따로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미 결혼까지 해 놓고몸매가 망가진다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주장을 들으면 그저 거대한 벌거숭이 이기가 아연할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시대에는 출산과 육아가 여성개인의 선택 사항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의무로서 거부는커녕, 신체적 결함에따른 불이행조차도 여성이 내쳐지는 일곱 가지 죄악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회임의거북함과 분남의 고통은 있었고, 새로운 생명을 이땅에불러내는 모체의 주저와 불안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내면적인 선택이 있어야 했다.
회임과 분만을 자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내가 먼저 주목한 것은 우리가 몸두고 사는 세상의본질이다. 그때 사람들은 삼재라 하여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들었다. 그이고 논자에 따라서 하늘을 으뜸으로 치기도 하고 땅이나 사람을 으뜸으로 치기도 했다.
세상의 대부분은 하늘과 땅으로 메워져 있고 많은일들은 그 둘의 오묘한 질서로 다스려진다. 사람은그것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자고 힘없다. 그리고 그질서에 얽매여 얼핏 보면 그 일부거나 하찮은 예속물같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하면 사람의 세사은 어차피 사람이 으뜸일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펼쳐진 모든 것은 저마다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말하는것은 우리에게 감지되거나 인식된 것들로 이루어져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에 어짐이 무엇이며 의로움이 무엇이며 예절이 무엇이며 앎이 무엇인가.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이며 사람이 알수 없는 진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거룩함은 무엇이며 착함은 무엇인가.
가치를 좀더 속되게 이름을 붙이면 사람이 없는 세상의 뜻없음은 더욱 밝게 드러난다. 권력과 명성과부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가장 몸달아 뒤쫓는 가치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세상에 명성이 무슨 자랑이 되며다스릴 사람이 없는데 권력이 무슨 뜻을 가지겠는가.재물도 그렇다. 사람이 없으면 억만금을 쌓아놓은 듯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사람이 곧 세상이다.
그런 뜻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세상의 바탕을 이룩하는 일이 되고 그 한가지만으로도 출산의가치를 부인하는 천만 가지 교묘한 논리를 대적할 수있다.
세상을 있게 하는 일,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들에이름을 매기고 뜻을 주고 값을 셈하는 존재를 만드는일^36,36^그 보다도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더있겠는가.
도가에서 만물을 형성하는 도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신령스러운 암컷' 혹은'위대한 어머니'쯤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한 비유나상징으로 그 이름을 끌어다 썼지만 자못 절실하게 어머니란 이름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나는 회임과 분만을 자랑과 기쁨으로 끌어안기 위해 먼저 그 현빈의 꿈을 골랐다.
크게 보면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자체로도하나의 세상인 생명을 나는 몸안에 품고 낳으려 한다. 그 세상이 어찌 자라고 성숙할지는 그 다음문제다.
당장은 새로운 세상을 품고 낳으려 함만으로도 크고아름다운 꿈이 된다. 그 일에 내 몸이 수고롭고 뼈와살이 덜어진들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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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됨을 위한 준비: 태교
옛 말에 이르기를 '스승에게 십년을 배우기보다 어머니의 태교 열 달이 더 중하고, 태중 열 달의 가르침보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 귀하다.'고 했다.
아는 사람을 기르고 가르침에 있어 무엇이 그 근본이되고 무엇이 가지가 되는지를 잘 일러주는 말이다.바르지 못한 심성에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따라서 옛 여인들이 태교는 낳고 기르는 일에 못지않게 중시되었고 그 내용도 일찍부터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 곧 부녀가 잉태하면,  잠잘 때 모로눕지아니하며
맛이 이상한 음식은 먹지 아니하며
앉을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설 때 한쪽 발에만 의지하지 아니하며
반듯하게 썬 음식이 아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아니하며
눈으로 좋지 못한 빛을 아니 보고
귀로는 바르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밤에는 소경으로 하여금 시(시=시경)를 외게 하여듣고  옳고 바른 일만 이야기 한다.
하여, 그대로 따르도록 하였다. 이는 뱃 속의 아이를 위태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그 아이에게주신 맑은 성품을 오욕칠정으로 흐려진 부모의 기질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태교의 그러한 효능은 오랫동안 동양의 지혜의 오만하기 그지 없었던 서구의 현대 과학도 어느정도 인정하는 듯하다. 처음에는 태아의 건간에대한동양인들의 별난 관심으로 비웃던 그들의 모태 심리상태가 태아의 의식 형성에 관계함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나도 그 태교에는 그 어떤 훌륭한 어머니에 못지않게 힘을 쏟았는데 한글로 된 내 실기에는 그 부분을이렇게 적고 있다.
'부인이 태기 있으면 반드시 '열녀전'의 경계한 말을 역력히 명념하여 그대로 행하시되, 음식을 당하여도 빛이 다른 것과 맛이 변한 것과 보기에 부정한 것은 일변 아니 자시며, 예에 맞지 않는 일은 아니 보시며, 유탕한 노래는 아니 들으시며, 기운 자리에 아니 앉으시며, 위태한 땅에 아니 서시며,포려한 성음이 없으시며, 급거한 기색이 없으시며, 행보를 반드시 안정히 하시며, 신체를 기울게 아니하시더라. 하루는 동네 어떤 집에 회갑 잔치를배설하여 내외 친척이 모이게 되었는데 창기와 풍물을 갖추고 광대놈이 떡달(탈)을 쓰고 온갖 희롱을 벌이거늘 남녀노소둘러서서 구경하더라. 부인이이때 마침 잉부로서 이모임에 참예하였으나 종일토록 머리 한 번 들어보지아니하시고 자약히 놀다 돌아오시니 경당 선생이 그일을 들으시고 탄식하여가로되 "너는 진실로 배운바를 버리지 아니하였그나!" 하시더라.'
그렇지만 내가 받아들인 태교의 대의는 반드시 옛사람들의 가르침에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모체를 안전하고 평온한 곳에 두어 태아를 보호하는 것은중한일이고, 모체의 바른 몸가짐과 옳고 맑은 마음씀이태아의 심성을 바르게 이끈다는 가르침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교의 더 큰 뜻은 머지않아 어머니가 되려는 여인네의 자기 수련과 준비에 있다고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어머니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이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고 중한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비대할대로 비대해진 자기에 가리워져 다소퇴색한 느낌을 주지만 그래도 그 이름을 떠나 성취될여성의 위대함은 흔치 않다. 우리에게 세상의 위대함은 종종 인간의 위대함이며, 어머니는 바로그 인간을 생산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맡게 되는 하찮은 일에도 나름의각오와 다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크고 중한 일을 맡으려 하면서 어찌 거기에 걸맞는 준비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찮은 일이라도 이미 준비를 갖추고 시작하는 이와 아무런 준비없이 당하는 이가 같을 수는 없다. 하물며 어머니됨이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 달을 보낸 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되면 의지할 것은 동물의 모성 본능밖에 없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희노애락에 따라 새끼를 빨고 핥고 하다가 버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짐승의 암컷이 될 뿐이다.
태교는 바로 그같이 크고 중한 어머니 됨을 위한준비이며, 그 부분에 대한 실기의 기록은 과장이 없다. 나는 오히려 그러고도 어머니가 되려는 내 마음의 준비가 모자랄까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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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인의 길을 쫓아: 심성의 바탕을 바로 다지고자
나는 여섯 아들과 두딸을 낳았고 일곱 아들과 네딸을 길렀다. 광산 김씨 소생인 한 아들과 두 딸은태교를 베풀 겨를이 없었으나 어김없이 내 자식이며가르침과 기름에도 분별을 둔 적이 없다.
내가 열하나나 되는 아이들에게 훈계할 말은 일일이 다 기억하기도 어렵거니와 기억한다 해도 여기에다 늘어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셋째 현일이 쓴'행실기'와 후손들이 엮은 '선조비 실기', 그리고 규중에서 엮어진 듯한 '정부인 안동 장씨 실기'에 들어난것들에 의지해 대강 더듬어보기로 하자.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른바 '금양학파'를 일으켜 도산의학맥을 이었으며, 세상사람들에게 갈암 선생으로 추앙받던 셋째는 나이 예순에 이르러내 '행실기'를 썼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현일은 어머님께서 말씀하실 제 아직 나이 어리고미련하여 그 뜻을 모두 기어가지 못하나, 지금도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깜짝 그날의 가르치심이 귓가에쟁쟁하게 떠올라 다시 들리는 듯하다. 내가 밝고 어질지 못해 어머님의 지극한 가르치심을 모두 지키지는 못했으되 그래도 이룬 것이 있다면 다른사람을대하는 언행에서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여러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나는 한 번도 더럽고상스러운 말씨나 버릇없는 몸가짐으로그들을 대한적이 없었다고 믿는다. 이는 모두 어머님께서 어렸을적 금하고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내가 아이들에게무엇을 가장 힘써 가르쳤는가를짐작할 수 있게 하는구절이다.
사람을 곧 세상으로 보고 그들과의 관계를 우리 삶의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본 내 가르침을 셋째는 늙도록져버리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나는 아이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 먼저 세상에는 함부로 거스르고 여겨서는 안 될 존귀한 것이있음을 가르쳤다. 존귀함을 아는 것은 모든 배움의바탕이 된다.
어버이가 존귀함을 알면 효도를 받아들이게 되고 나라가 존귀한 것을 알면 충신의 길을 배우게 된다. 학문이 존귀한 것을 알면 선비의 도를 배우게 되고 성현의 가르침이 존귀한 것을 알게 되면 그 몸을 닦을줄 알게 된다.
나는 또 출산하는 딸들에게 경계하였다.
'아이에게 먼저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라. 불효와 역적과 흉험 패륜이 모두 존귀함이 있음을 배우지 못함에서 나오느리라.'
다음으로 어미가 할 일은 아이의 기상을 길러주는일이다. 아이는 다음에 만들어질 세상이며 그걸 향한꿈은 커서 지나치는 법이 없다. 아이의 기상을기른다는 것은 그 꿈을 다듬고 북돋아주는 일이다.
그런대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 그 둘 모두를혼동 하고 있는 듯하다.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으로 잘못 알아 겁나는 것이 없는 아이를 길러놓는다. 아이의 요구를 무턱대고 받아주는 것만이 아이의 꿈을 키워주는 것으로 믿어 절제할 줄 모르고참을성없는 심성을 부추긴다. 그래서 겁나는 것 없고욕구를 절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공공의 장소를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떨고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제 아이 기 살아있는 것만 좋다고 웃는다.기껏 나쁜 버릇만 길러놓고 기상을 길렀다고 단단히오해하고 있다.
내 보기에 그런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라 새끼 딸린 암컷에 지나지 않는다.
집안에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거든 그 새끼를 한 번걷어차 보라. 새끼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암컷은단번에 허연 이를 드러낼 것이다.그 암캐와 버릇없는아이를 나무라는 노인에게 하얗게 눈을 흘기며 덤비는 요즘의 젊은 어머니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아이의 기상을 기른다는 것은 크고 아름다운 꿈과그것을 실현할 선한 의지를 붇돋아 주는 일이다. 국문으로 된 내 실기에는 그와 관련된 훈계가 여럿보인다.
'착하게 되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일이다.아무리 어린아이라고 착하다고 해주면 기뻐하고 나쁘다고 나무라면 성낸다. 그렇듯 착함을 좋아하는것은착한 마음을 타고났다는 뜻이며,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착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 마음을 키우면 성현이 따로 없고 군자가 따로 없게 될것이니 어찌 귀하고 값지지 아니하랴. 너희들은 부디너희 마음속에 있는 그 보물을 잊지 말아라.'
'성인이라는 분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니,만일 여느 사람과 본시 다르게 태어났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들을 배울 수가 있겠느냐? 생김도 말도 우리와 같고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행신하는 바일것이다. 하지만 그 행신도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걱정스럽지 애써 배우려 든다면 어려울게 무었 있겠느냐?'  그러다가 아이들이 학문에 들게 되면 나는 그학문의 마지막 쓰임이 어딘가를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너희들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예절의 시작은 그 어울림에서 상대를맞게 행신하는 것이니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버릴것은 버릴줄 아는 것이 그 내용이다. 존중하여야 할 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패역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고 존중하지 않을 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비굴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비루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착하다, 악하다는 사람을향한 분별이다. 남을 해치고 착한일은 없으며 남을이롭게 하고 악한 일은 없는 법이다. 이로를 비틀어악한 일을 착하게 꾸미고 착한 일을 악속에 파묻어버릴 수는 있으나 이는 가을 아침의 안개와 다름없다. 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해가 뜨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글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나는 너희들이 글을 잘 한다하여 특히 귀이 여기지는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착한 일을 배워 실천함으로써 너희 어진 행실을 밖에서 듣게 된다면 비록그 일이 작더라도 나는기뻐 잊지 않겠다.'  아이들이 점차 나이가 찬 뒤에는 나라와 군주에 대해서도내가 아는 바대로 마음가짐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사람이 중하되 그중에서도 피가 같고 한 땅에 살며 말이 통하는 겨레가 으뜸이다.
나라는 그 겨레가 어울려 만든 것이니 사람이 겨레와나라를 떠나 천지간에 몸둘 곳이 어디 있겠느냐.'
'선비의 직분은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었으나 송나라 이래로 재추의 권한을 말하는 이들이 생겼다. 이는 왕좌의 이치를 신권의 강변으로 뒤튼 것인데대성께서 우러르신 주의 문물이 아니다. 상고해 보면 임금보다 힘있는 신하가 다스려 잘되는 나라가 없지는않으나, 주공보다는 위조 왕망의 무리가 더많았다.행여 너희는 그런 논의에 가담하지 말라.'
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철든 아이들과 동리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일렀다.
"천한 북쪽 오랑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해 나라와임금이 아울러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옛적 제 나라의 노중련은 조나라에 노닐다가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하자 분연히 외치기를, '저 진은 예의를 버리고 단지 싸움터에서 적의목을 많이 베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잔인 무도한나라이다.
선비를 꾀와 속임수로만 부리고 백성을 포로처럼 학대하는 것들이니 그 왕이 천자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면 나는 그 신화가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동해를 밟아 죽을 뿐이다!'라 하고, 그 의기로 마침내 진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이제 내가 병기와 군량을 댈터이니 너희들은 충의로 일어나 남한산성에 외로이에움을 당해 계시는 임금님을 구하라.'
비록 그 논의가 제대로 익기도 전에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으나 내 그 같은 말을 아이들에게 고루 자취를 남긴 것으로 안다.
재물에 관한 가르침은 주로 경계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아이들이 재물을 알 나이가 되면 나는 재물 또한 사람과의 일로 바꾸어 가르쳤다.
'사람이 몸을 기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게 재물이나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 때문에 죽고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은 재물로하여 상한다. 재물도 사람과사람의 관계를 떠나서는 값이 없다. 남이 모두 넉넉할 때내 재물이 많은 것은 자랑과 여유가 되지만 남이 모드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집은 재앙일 뿐이다. 도둑들의 말에 필부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죄가있다 하였다. 남이 모두 굶는데 홀로 가득한 곳간은마침내 화를 부르는 문일 뿐이니 너희는 그 이치를알아 재물을 대하도록 하여라.'
'내가 늘 사람을 안타까이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재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바로 쓰지 못해 의리를해치고 서로 멀어지는 일이다.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재물은 지금 없디 하더라도뒷날에 다시 생길 수 있으나 의리는 한 번 깨어지면되살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가.'
'내가 제갈공명을 흠모하는 것은 그 재주가 뛰어나서도 아니고 학식이 깊어서도 아니다. 그런 재주와학식을 가졌으면서도 몸소 밭을 갈며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던 그 인품이다. 공명의 그 같은 인품은 뒷날 선주 유비의 삼고초려를 입어 군사가 되어서나 선주께서 붕어하신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안에서는 온백성들이 우러르는 승상이요 밖에서는 삼군이 떠는명장인데다가 후주가 아버지처럼 의탁하는 바니 그가얻고자 하면 무엇을 얻지 못하였겠느냐. 그런데도 그가 죽을 때 그가 지녔던 재산은 뽕너무 팔백 그루와밭 열 다섯 이랑뿐이었다. 대장부 진군자란 그런 사람ㅁ을 이름이다.'
자식을 자신의 것인양 여기고 자식의 삶을 오로지제 뜻대로 결정하는 것은 나는 매양 경계해 왔다. 그러나 한 가닥 아름다운 꿈을 자식의 삶에 거는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는 그꿈을 후부인의 삶에서 찾아냈던 듯하다.
후부인은 송나라 낙양의 사람으로 정향의 부인이요정자 명도 선생과 이천 선생 형제분의 어머니 되시는분이다. 성풍과 행실이 단정하고 학식이 높았으나 사장을 숭상하지 않고 법도로 자식을 가르쳐 형제를 나란히 명현으로 길러내셨다. 특히 명도 선생은 세상사람들에게 '맹자 이후 오직 한 사람'이라일컬어 졌으며, 아우인 이천 선생도 학문의 정밀함과 깊이가 형에 뒤지지 않아 흔히 형제가 이정으로 묶이어 불리운다.
내가 후부인의 행적을 읽은 것은 나라골로 시집오기 얼마 전이었다. 비록 사는 땅이 다르고 천 년가까운 세월이 벌어져 있으나 후부인의 삶은 내 머릿속에아름답게 새겨졌다. 그때껏 골몰했던 시사와 화필을끊은 뒤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내가 아이들을 선비로 길러내기 위해 내린 가르침들은 어떤 행장이나 실기에도 잘 눈에 띄지 않고 나 자신의 기억에도 별로남아있지 않은 점이다. 나와 아이들의 삶에 너무도 속속들이 스며든 정의의 교감이 있어 말로 드러낸 것이오히려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내일곱 아들의 삶을 더듬어 짐작해 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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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이 상일(오히려 상, 편안할 일): 정묵재(고요할 정, 침묵할 묵, 가지런할 재)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나라골로 시집 갔을 때 맏아이 상일은 벌써 다섯 살이었다. 군자의 전취 광산 김씨 소생이라 태교 열 달은 베풀지 못했으되 상일은 틀림없이 나의 아들이며 그 아이에게 바친정성 또한 세상의 그 어떤 어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자부한다.
앞서 말했듯이 신행해 들어갈 무렵 충효당은 안팎으로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두분 시아주버님과 군자의 광산 김씨의 참상에 손윗동서 무안 박씨의 순절에 더해 집안은 거의 상중이나다름없었다. 이때에 군자께서 시아버님을 대신해 집안을 돌보고 계셨으나 원래가 학문에만 여념하던 서생인데다 상처한 시름이 있으니 그 가독이 세심할 리없었다.
거기다가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그 큰 집안의 어머니의 정성과 욕심이 시들어버린 일이었다. 시어머님진성 이씨는 운악공이 상심할까 주야로 위로하시느라집안을 살피실 겨를이 없고 맏동서 무안 박씨는 그때이미 순절을 다짐한 터라 아이들이 이미 마음 밖에있었다. 그러다보니 상일은 나이 다섯에 이르도록 가르침 다운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먼저 군자께 상일의 일을 말씀드려 보았다.하지만 그때 군자께서는 전혀 동몽을 가르쳐보신 적이 없을뿐더러 아직 그럴 겨를이나 홍심도 없으셨다.이에 하는 수 없이 이웃에 알아보니 마침 나라골 십리쯤 되는 곳에 남경훈이란 선비가 서당을 열고 동몽을 받고 있었다. 나는 어린 상일을 업고 그서당을찾아가 첫 배움을 열어 주었다. 시집 가던 첫해 겨울이니 내 나이 열 아홉일 때였다.
그 뒤 상일이 소학을 익힐때까지 거의 5 년 동안이나 나는 그 아이를 업고 그 십리길을 오갔다. 사람들은 계모된 어려움을 말하나 나는 진심으로 말하거니와 내 아이로 그를 길렀다. 그 5 년의 내 정성은 그아이에게 못 베푼 태교 열 달에 갈음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았다.
조상의 유덕에 자신의 노력을 더하여 상일은 훌륭한 선비로 자라주었다. 상일은 관례 뒤에 자를 익세라 하고 호를 정묵재로 썼다. 인조 11 년에 진사과에나갔고 뒤에 다시 유림이 천거로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맏이어서 군자의 대명절의에 영향받은 바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자랑은 불출로 여기나 나는 이아이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물과 덕망은 장자의 풍도가 있었고 특히 문장이 뛰어나 향사들이 기꺼이 머리를 숙였다. 서른두 살에단산 서원 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그 학식과 인품을엿볼 수 있다. 출입은 하였는데 곧 서애 유 선생의손서가 된다. 문집 세 권을 남겼고 뒷날 이른바 '칠산림'의 하나로 추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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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휘일(아름다울 휘, 편안할 일): 존재(존재할존, 가지런할 재)
이 아이는 빼어난 재주로 나를 기쁘게 하였으나 그만큼 어미의 가르침에서는 일찍 벗어났다. 대여섯살때 이미 '오경요어'를 읽었으며 아홉 살 때는 이미연구를 지을 정도라, 내 깊지 못한 학식으로는 잘못이끌까 두려워 일찍 가르침을 사랑채로 넘겼다. 열셋에 '구인략'을 읽고 또 '주역'을 읽은 소감으로 시를지어 시아버님 운악공께 바쳤다.
복희씨의 하도 장난 그림 같으나
곰곰히 생각하니 그 이치 끝이 없어라
여덟이 각기 여덟 가지의 뿌리가 되니
천지 만물 모든게 그 안에 있더라
복희횡도여희화(엎드릴 복, 황제이름 희, 가로 횡,그림 도, 같을 여, 희롱할 희, 그릴 화)
세사기리거무궁(세부 세, 생각할 사, 그 기, 이치리, 갈 거, 없을 무, 끝없을 궁)  원팔위근각팔지(근원 원, 여덟 팔, 할 위, 뿌리 근, 각자 각, 여덟팔,가지 지)  천지만물재차중(하늘 천, 땅 지, 일만 만,물건 물, 있을 재, 이 차, 가운데 중)
공이 그 같은 시를 보시고 감탄하여 맹자의 '오륜설을 손수 써서 내리시며 면학을 격려하셨다.
그 사이 경황을 되찾은 군자께서도 이 아이는 눈여겨보시고 가르침을 내리셨다.
그러나 병자년의 치욕을 당하신 뒤 세사에 뜻을 잃고수비산으로 들어가시니 가르침에도 홍심을 잃으셨다.이에 나는 첫째 아이 상일과 둘째 휘일을 나란히 친정아버님 경당의 문하에 들여보내 도산의 적전을 잇게 했다. 셋째 현일이 현달하여 도산의 학통이 아버님 경당에게서 현일에게로 이어졌다고말하나 내가보기에 아버님의 적전을 물려받은 것은 둘째 아이 휘일이다.
휘일은 자를 익문 호를 존재라 썼다. 아버님 경당의 훈계를 받아 제자백가서를 두루 익히고 이어 '근사록' '심경' '심리대전' '역학계몽' '주자서절요''퇴계집' 등 이학 저서에 정통하였다. 특히 맹자의수심양성에 뜻을 두고 전심하여 학행을 닦았으며 상재의례의 제도와 절목에도 밝았다.
휘일의 그 같은 삶에 잘 드러내보이는 글로는 금성휘란 사우에게 보내는 오언고시가 있다.
군자의 참된 도는
그 재주를 드러냄이 아닌 것을
그것을 내 한몸에 잘 갈무리하면
덕은 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리
이와 같은 이치가 책 속에 갖춰 있어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는도다
소이군자도(바 소, 써 이, 군자 군, 아들 다, 길도)  부귀로기영(아니 부, 귀할 귀, 이슬 로, 그 기,꽃부리 영)  온지재일신(쌓을 온, 갈 지, 있을재,하나 일, 몸 신)  덕용자온청(덕스러울 덕, 얼굴 용,스스로 자, 따뜻할 온)  차리구방책(이 차, 이치 리,도구 구, 향할 방, 책 책)  병연여일성(자루 병, 그럴 연, 같을 여, 해 일, 별 성)
그안에 있는 이 같은 구절은 둘째 휘일이 평생 의지한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 아이는 학문에 요심이 지나쳐 종당에는그 몸을 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이 쉰에'홍범연의'를 지으면서도 과도한 독서로 소갈병에걸렸는데 그때 내가 글로 일러,  '여섯째 아이편에 듣자니 네가 물을 많이 마시어 수척하다는구나. 부모의마음으로 네 마음을 삼아 안정하여 병조리를하면 부모의 기쁨이요, 또한 그것이 효도가 아니겠느냐. 그런 연유를 배우고 또 배워 천하의 쓸모있는 그릇이되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 아이가 답해 올리기를,'엎드려 편지 받자옵고 부모의 마음을 몸으로 알도록애써서 천하의 쓸모있는 그릇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라 하니, 고희를 넘은 어미와 지명에 이른 자식 간에 주고받는 글로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알았으리요, 그 몸을 침노한 병의 뿌리가 모질어 둘째는 끝내 주저 '홍범연의'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쉰넷의 나이로 어미에 앞서 세상을 버렸다.
옛말에 이르기를 '죄가 삼천가지라도 불효보다 더한 죄가 없고 불효가 삼천 가지라도 부모 앞에 죽는것보다 더 큰 불효가 없다.'하였다. 이 아이에게도불효의 죄를 물어 마땅히 하나 길지못한 생애에 닦은학문이 깊고 후세에 끼친 이름이 아름다워 다만 애통함이 있을 뿐이다.
둘째 휘일은 일찍히 학행으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된 적이 있으나 첫째처럼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나라골에서 멀지 않은 오촌동에 명서암을 지어 연거와 강도의 터로 삼았다. 또 갈천 입구에 뇌택정을 지어 소요자적하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퇴도 선생의 삼간 제자로서의 면모는 둘째 휘일이도산 서원에 남긴 자취로 잘 드러난다. 휘일은 벌써서른에 도산 서원에서 강도하였고 쉰넷에 눈감을때까지 전후 합쳐 열 한해나 도산 서원장을 지냈다. 뒷날 셋째 현일이 퇴도 문하의 세력을 둘째 휘일이 도산 서원을 중심으로 닦아둔 기틀에 힘입은바 컸다.
이 둘째아이의 우모소로는 유림의 발의로 세워진진안의 백호정이 있다. 눌은 이광정이 그 이름을 지었고, 대산 이상정이 그 상량문을 썼으며 그사당김낙행이 기문을 썼다. 거기다가 내게 크게 위로가 된것은 살아 둘째를 배향하는 인산 서원이 나라골에 서는 것을 본 일이다.
그 서원은 뒷날 조정의 명으로 훼철되기는 하나 자식이 배향된 서원을 보는 복은 그리 흔히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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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현일(검을 현, 편안할 일): 갈암(칡 갈, 초막암)
셋째 아이의 이름은 현일이요 자는 익승이다. 호는갈암으로 썼는데 뒷날 사람들에게는 따로이 남악 선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시호는 문경을 받았고 내게정부인이란 외명부의 직첩이 내려진 것도 이 아이의현달 덕분이다.
일생 학문에만 전념한 손위 두 형들과 달리 셋째현일은 어려서부터 곧잘 경셰의 뜻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 '영화왕'이란 시에서 이르기를,  꽃의 왕봄바람이 일었네
높은 단 위에 말없이 있네
여러 꽃 다투어 피어나되
승상은 어느 꽃이 되리.
화왕발춘풍(꽃 화, 임금 왕, 발기할 발, 봄 춘, 바람 풍)  불어계단상(아니 불, 언어 어, 섬돌 계, 단상 단, 위 상)  분분백화개(가루 분, 가루 분,일백백, 꽃 화, 열 개)  하화위승상(어찌 하, 꽃 화, 할위, 오를 승, 서로 상)
라 하니 사람들은 이를 듣고 장차 재상감이라 여겼다. 또 같은 해에 병자호란이 일자 '창전매'란 시를지어 아이 답지 않은 우국충정을 읊었다.
창 앞의 매화나무 네 그루
으스름 달을 향해 피었구나
그 꽃 아래 즐기려 하되
천한 오랑캐가 대궐을 에워쌌네
총전사매수(창 총, 앞 전, 넉 사, 매화 매, 나무수)  개향황혼월(열 개, 향할 향, 누를 황, 어두울혼, 달 월)  욕음화불주(탐할 탐, 마실 음, 꽃 화,아래 하, 술 주)  노계위성궐(노비 노, 오랑캐 계,둘러쌀 위, 성 성, 대궐 궐)
또 하루는 둘째 휘일이 평생의 뜻을 묻자 서슴치않고 대답했다.
"장수가 되어 오랑캐를 정벌하고 요동 땅을 되찾는일입니다."  뿐만아니라 어려서부터 무에 뜻을 두어'손자' '오자' '무경' 등의 병서를 읽고 평생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현일의 어린 시절이 중원으로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고, 이 땅에서 두 번의 호란이 겹쳤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열 살 안팎에 삼전도의 굴욕을 전해 들은데다 군자의 대명절의가 끼친영향 탓으로 일찍부터 존주의리를 길러간 것으로 보인다. 뒷날 현일이 쓴 '신편팔진도설후' '존주록'은그 성과이다.
현일의 배움은 특별한 사승없이 군자에서 둘째 휘일로 이어지는 가학에 바탕했는데 세상에서는 흔히이 아이를 도산의 삼전 제자로 친다. 가학의 연원이아버님 경당에게 있고, 그 앞에는 도산 이부자의 삼고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일의 총명함은 둘째 휘일에 견주어 결코 뒤짐이없었다. 일곱 살에 십구사략을 읽었으며 열두 살에는'소학' 열셋에는 '논어'를 읽었다. 이 아이의 재주와국량을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으나 자식 자랑이 될까하여 피한다.
현일이 선비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한 것은열여덟에 장가를 들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선대부터 연비가 있었던 무안 박씨 무의공이 손녀로 작배했는데, 그 무렵에 지은 이 아이의 '지경잠'이 볼만하다. '겨태타'는 게으름을 경계하고, '계부전'은 학문에 전념하지 못함을 경계하고, '계언동'은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계하며 '계긍대'는 스스로를높이는 마음을 경계한 잠이다.
셋째는 평생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가장 왕성했던 면학의 시기는 두 번째 과거에 실패하고 난 스무두살 때부터 십여 년이 될 것이다. 현일은한때 학사 김응조를 만나 학문적으로 영향을 받기도했지만 배움의 근간은 아무래도 가학이라는 편이 옳다. 현일은 둘째 휘일과 여러 아우들을 데리고 산사와 산방, 초당을 돌면서 면학에 전념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형제간의 교학상장을 후한의 학자 정연의고사에 비기기도 했다.
그 시기에 학문적인 성취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의 역작인 '홍범연의'는 그때 벌써 휘일과편찬을 시작했으며 서른두 살때 도산서원을 찾을때에는 바로 거기서 '퇴계집'을 강롱할 정도로 학문이익어 있었다. 그때 '홍선양간의유소후'를 지었고 또갈암으로 호를 썼으며 '갈암기'를 썼다. '신편팔진도설후'는 현일이 서른 여덟에 쓴 책이다.
셋째의 이름이 영남 사림에 들이우기 시작한 것에그 나이 불혹에 들면서가 된다.
그해 이른바 유세철의 복제소로 알려진 영남 사람의소본을 지으면서 현일은 우암 송시열의 기년설 뿐만아니라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의 자취 삼년설까지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비록 그 소본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현일이 영남 유린으로부터 예학적 소학을 인정받기에는 넉넉하였다. 이듬해 경광 서원에서 영남서원을 주도하던 목재 홍여하와 금옹 김학배를 만나교유하게 된 것도 그 일이 계기가 되었다.
마흔 둘에 포천의 용주 조경 선생을 방문하여 교유를 근기 남인들에게 까지 넓혔다. 근기 남인의 원로인 용주는 일찍히 군자의 절의를 높이 사서 후한말녹문으로 숨은 방덕공에 견주었으며 또 군자와 일곱아이들을 교양리의 '순씨 팔룡'에 비유하시기도 하신분이었다. 현일이 찾아갔을 때는 이미 연로하시어 교유는 필답에 그쳤으나 그로인해 미수 허목을 비롯한근기 남인들에게 보다 잘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셋째에게도 어려운 시절은 있었다. 마른셋되던해에 둘째 휘일이 죽은 데다 상처까지 깃들이더니 마흔 일곱 되는 금옹이 홀연 세상을 떠났다.또그 이듬해에는 목재가 죽고 다시 천붕까지 당하였다.
아버지로서보다는 스승으로 우러른 군자의 기세와또 다른 스승이자 학문의 동지이기도 했던 둘째의 죽음은 현일은 안일한 적막함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영남사림의 영수로서 학문과 덕망모두에서현일이 의지하는 바 컸던 금옹과 목재의 잇따른 죽음은 더욱 그 아이를 외럽게 했다. 그 때 괴로운심경은 사후들간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둘째 휘일과 금옹, 목재의 죽음은 현일을외롭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영남 사림에서의 위상을더욱 높인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모두 십년가까운 연장자로서, 그리고 저마다 적전에 닿은 퇴도문하의 삼전 제자로서 영남 사림을 이끌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자리가 일시에 비자 사림은전보다 더 현일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중심축으로 여기는 바 되었다.
그러던 중에 현일이 평소 품고 있던 경세의 꿈을펼쳐볼 계기가 왔다. 숙종 갑인년의 예송에서 남인이승리하여 서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낸 일이었다. 오래만에 집권한 남인은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하기 위한세력 결집 과정에서 영남 사림을 이끌던 현일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현일이 처음 조정에 알려지기는 현종 15 년이 된다. 그때 현일은 학행으로 유일에 천거되었으나 마침상중이라 부임하지 못했고 다시 숙종 2 년 사직서참봉으로 천거되었을 때도 역시 상중이라 부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숙종 3 년 미수 허목의 천거로 장악원 주부에 탁배되면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미수 허목은 원래 고향이 경기도 연천이었으나 중년이후 여러 차례 영남에 옮겨 살면서 친분과 기반을확대해온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한강(정구)과여헌(장현광) 문하를 출입하면서 학맥으로도 영남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일을 조정에 천거할 때까지도명성만 들었을 뿐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
미수는 현일을 진정한 선비로 극찬하면서 무엇보다도 경연의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조정의 원로인 미수의 그 같은 천거는 숙조에게뿐만 아니라 대소신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다. 장악원 주부라는 대단찮은 관직이었으나 현일이 그해 4월 한양으로 들어가자신료들은 그를 보기 위해 앞을 다투었고 숙종의 대우도 파격적인 데가 있었다. 9월에는 5 품에 가자되고동짓달에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다. 또 명유의 대우로 관직에 있으면서도 상례에구^36^애받지 않게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떠들썩한 선망과는 달리 현일의 첫번째 출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사헌부 지평으로있을 때 이옥과 유명천의 대립이 조정의 현안으로 불거졌다. 남인 내부의 알력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 현일은 선비다운 공도에 의지에 양비론을폈다.
그러나 이는 양편 모두를 적으로 삼는 격이 되어 체직으로 당하게 된다.
이에 현일은 경연에서 숙종에게 자신을 초야에서뽑아 조정으로 불러들인 진정한 의도를 묻고 '오조소'는 명정학 진기강 회공도 납충간 찰민정의 다섯조항으로 되어 있다. 임금의 수덕과 국가 기강의 확립, 왕법의 공정한 적용, 언로의 확충과 척신 세력의폐해 방지, 그라고 내실 있는 우민 정책이 그골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현일은 그로부터 십 년 동안 산림에서 묻혀 살며 저술과 후학 양성으로 보냈다. 뒤이은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남인 정권이 몰락하매비록 경세의 뜻이 있다해도 펼 길이 없었을 것이다.대신 일찍이 둘째 휘일과 시작했으나 그때것 마무리못한 '홍범연의'에 매다림으로서 못다푼 경세의 꿈을거기에 쏟아 부었다.
나는 경신환국 이듬해에 죽어 그 뒤로 이어지는 셋째의 영욕과 훼^36^예포폄에 대해 직접 보고 듣지는못했다. 그러나 이미 어미 된 혼이 눈감은들 어찌 자식의 일에 무심할 수 있으랴. 현일의 뒷일이 하 애닯아서 후문으로 들었으나마 그 남은 삶을 대강 얽어본다.
현인은 첫 출사에서 돌아온 뒤로 십년이 넘도록 집필과 강도에만 전념했다.
예순에는 마침내 '홍범연의'를 완성하고 예순둘에는'율곡이씨론사단칠정서변'을 지었다. 앞의 책은 형제의 학문적 정화가 아우른 역작이요, 뒤의 글은기호학파의 사상적 압박에 대한 영남학파의 반격이란 점에서 뜻이 있다.
셋째 현일의 두 번째 출사는 그 나이 예순셋에야이루어진다. 그해 기사환국이 있어 다시 집권하게 된남인들은 경신환국의 쓰라린 경험에서 광범위한세력결집의 필요성을 전보다 절실하게 느꼈고, 숙종도 진작부터 영남인의 등용에 관심을 보여오던 터라, 그사이 영남 사림의영수가 되어있던 현일의징소는 의전과 격식을 한껏 갖추어 진행되었다.
내 고택에 남아있는 영양군 석보에는 어로란 길이있었는데 그것은 조명을 받들고 오는 사신을 위해 안동 부사가 닦은 길이 과장되어 붙여진 이름이다.또현일이 안동에서 새재를 넘어 광주에 이르는 세 번의승차를 거듭하여 도성에 이르니 벌써 이조판서가 되어 있더란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다. 그밖에현일이흰 옷을 입고 입궐하였다 하여 백의판서라고 불렸다하는데, 이는 아마도 첫 출사 때 관리로서 관례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이 부풀려진 듯하다.
하지만 두 번째 출사에서 현일의 승차가 파격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성균관 사업으로 고향을 출발한 현일은 곧 사헌부 장령,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예조참판 겸 성균관좨주 원자보양관에이르렀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이 제수되면서 앞서의관작과 겸임하게 되었다. 그 모든 승차가 대략출사이태 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현일은 그 뒤 이조참판에 이어 세조시강원 참선에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병조참판에 이어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그리고 숙종 19 년 마침내이조판서에 이르니 임란 이후 영남 사람으로 전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우복 정경세, 귀암 이원정에 이어 세번째가 된다. 산림을 떠난 지 사년 남짓 만의 일이었다.
현일의 그 같은 눈부신 미수 허목과 하헌 윤후 같은 거두들을 잃은 남인들의 기대와 성원들이 있었다.그러나 현일의 학식과 행검을 높이 산 숙종의 신임도우악스러웠다. 임금이 신하를 대하면서 자신을 소자로 칭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그 두터운 예우를 짐작할만하다.
어미되어 자식의 공과를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시절 현일의 정치적인 입장은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듯 싶다. 그 아이도 남인 일반처럼군존신비, 곧 군주의 절대권을 인정하였으나 이상으로 삼은 것은 군신조화론이었다. 대청 정책에서는 남인의 대표적인 북벌론자였고 예론에서는 자최삼년설의 지지자였다.
경제적으로는 화폐의 시행과 양전을 주장으로 삼았고, 풍 속의 교화와 인재의 등용을 위해서는 향약과선사제를 보완책으로 내놓았다. 표면적인 예우에그친 숙종의 신임과 되도록이면 현일을 경연관으로만묶어두려는 근기 남인들의 비협조로 이렇다 하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 지향만은 그 아이를 낳고기른 어미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하되 지지않는 꽃이 어디있고 다함이 없는 봄이 어디 있으랴. 권도가 무상하여 갑술환국을 당하니남인 정권은 무너지고 어제의 당상은 오늘의 죄인이되었다. 더구나 경싱환국 때 장살 당한 귀암 이원정의 자리에 현일이 있었으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랴.
처음 집권 서인들이 현일에게 물은 죄는 선후를 욕되게 한 조사기를 변호한 일이었다. 조사기는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로 열두 차례나 엄한 국문을 받았으나끝내 불복하다가 참형을 받은 사람이다. 현일은 그를동정하다가 화를 입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홍원으로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으로 한스런 일은 뒤이어 있은 사헌부장령 안세징의 탄핵이었다.
안세징은 몇 해 전 현일이 인현왕후를 보호하기 위해올린 상소를 흉소로 지목하고 국문을 청했다. '왕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스스로 임금의 총애를 끊었으며 '이란 구절과 '사방을 둘러 막으시어 잡인들의드나듬을 엄히 금하소서'란 구절을 들어 현일을 명의를 해치고 강상을 어지럽힌 죄인으로몬 것이다.
원래 현일이 그 상소를 올릴 때는 인현왕후의 일을입에 올리는 것조차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숙종의 엄명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현일은 그 전에도여러번 인현왕후를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번번히 승정원에서 기각당하다가 그 해 여러 재이로 언로가 열린틈을 타 그 상소를 올릴 수가 있었다. 비록폐출된왕비이지만 육례를 갖춰 맞은 정비인 만큼 별궁으로옮겨 신변의 안전을 지킴과 아울러 후하게 대해줄 것을 임금께 청한 내용이었다.
안세징이 들고 나온 구절은 당시 장희빈에게 빠져있던 숙종으로부터 호의를 끌어내기 위한 현일의 고심 끝에 덧붙인 것들이었다. 폐출의 불가함을 따져숙종의 노여움을 사기보다는 일부 인현왕후의 책임을인정함으로서 군왕의 관대함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깔려있었고, 또 당시에는 모두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안세징은 거두절미하고 그 두구절만 들어 현일을 의리죄인으로 몰아버렸다.
갑술환국 직후 정국을 담당한 소론의 실권자 약천남구만이 현일을 극력 변호하여 겨우 극형을 면하나홍원에서 더 멀리 종성으로 옮겨지고 위리안치가더해졌다.
현일의 나이 예순여덟 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 년뒤 위리가 벗겨지고 호남 광양으로 옮겨 귀양살이를하던 현일은 6 년 뒤에야 방귀전리의 명을 받는다.
진주에서 일 년을 머물어 현일이 실제 고향에 돌아온것은 귀양살이를 떠난 지 7 년 만이었다. 그러나 현일은 괴로운 귀향살이를 학구와 저술로 채워나갔다.
'수주관규록' '돈전수어' 사범의의'등이 그 동안의주요 저술인데 특히 '수주관규록'은 현일의 원숙항학문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고희에 이르러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현일은 안동금양에 자리를 잡고 저술과 강학으로 남은 삶을 보냈다. '존주록'을 쓰고 '퇴계선생언행통록'의 편목과서애연보를 산정한 것은 그 무렵이 된다. 또 흔히 갈암학파로 알려진 그의 문도들은 달리 금양학파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학파의 형성이 금양시절의 제자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 많고 말 많은 사람 세상에
앉고 누워 살기 팔십 년이네
평생 무엇을 하려 했던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네
초초인간세(풀 초, 풀 초, 사람 인, 사이 간, 대세)  거연팔십년(거할 거, 이룰 연, 여덟 팔, 열 십,해 년)  생평하소사(살 생, 평평할 평, 어찌 하,곳소, 일 사)  요불괴황천(요긴할 요, 아니 불, 부끄러워할 괴, 누를 황, 하늘 천)
현일이 그 같은 종명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은그 나이 일흔여덟 때였다.
그러나 그삶은 자신의 뜻같이 마무리 되지 못했다.한번 덮씌운 의리죄인이란 오명은 현일이 눈감는 순간까지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 뒤 대를 이어 집권한 노론 세력은 자기들을 마지막까지 위협한 세력의 영수에게 끝내 관대할 수 없었다. 현일이 살아있을 때부터 되풀이되던 전석의 처분과 그 환수는 죽은 뒤에도 200 년 가까이 더 되풀이된다. 그 사이 현일의 억울함을 신원하던 문인의 희생도 있었고, 배양되던 인산서원이 조명으로 훼춸되는가 하면, 현일의 문집애 '갈암집'을 간행한 이가유배되고 문집이 불사라지기도 했다.그러다가 철종에야 겨우 관작이 회복되고 고종애 이르러서야 문경이라는 시호까지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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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숭일(산이름 숭, 편안할 일): 항재(항상 항,가지런할 재)
이 아이는 이름을 숭일이라 하고 자는 응중이며 호는 항재로 썼다. 둘째와는 열한 살, 셋째와는 여섯살 터울로, 학문은 주로 둘째 셋째에게서 배워 기틀을 잡았다.
군자와 여러 형들처럼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경사와백가서에만 전념했다.
숭일의 이름이 뒷세상에 무겁게 알려지지 못한 것은 상일, 휘일, 현일로 이어지는 손위 형들의 위명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바로 소위가 되는 현일의우뚝함은 이 아이에게는 든든함이면서도 답답함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뒷날 숭일을 조정에 천서한 재신은현일과 비하여 학문과 행검 모두에서 '난위형난위제'란 말을 썼을 만큼 그 성취는 컸다.
'진리는 천하의 공기인데 어찌 사심이 끼어들 수있으랴'라는 말은 사림에서 널리 입에 오르는 숭일의명언이다. 학통 학파간의 시비나 학통 내의 적전시비를 겨냥한 말로 보이는데, 넷째는 그런 태도 때문에 외로움을 사기도 했을 것이다.
서른셋에 천붕을 당하자 숭일은 나와 함께 석보로돌아가 한때 군자께서 기거하시던 곳에 새로이 집을짓고 당호를 항재로 했다. 또 그곳의 두 바위 언덕에세심대와 낙기대란 이름을 붙이고 따로 광록정을 지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석보의 병암산을 노래한 시에 넷째의 그 같은 자적함이잘 드러나있다.
백 자 푸른 벼랑 저만치 누웠는데
그 봄 가을 잎을 그려내기 어렵구나
나그네여, 산중 집이 누추하다 웃지 말라
문 앞에 산 그림 병풍이 길게 펼쳐 있는니
백척창애근면횡(일백 백, 자 척, 푸를 창, 벼랑애, 가까울 근, 면 면, 가로우울 횡)  춘화추엽사난성(봄 춘, 꽃 화, 가을 추, 낙엽 엽, 베낄 사, 어려울 난, 이룰 성)  방인막소산가누(곁 방, 사람 인,아닐 막, 웃음 소, 뫼 산, 집 가, 누추할 누)  장전문전활화병(길 장, 펼 전, 문 문, 앞 전, 활동할활,그릴 화, 병풍 병)
나이가 들자 숭일은 문하를 열고 후학을 가르치는한편 저술도 적잖히 힘을 쏟았다. '일원소장도개본'과 '율곡이씨변설론' 등의 저술이 든 '항재집' 여섯 권과 '항재속집' 두 권을 남겼다. 시문을 즐겨 하지는 않았으나 약간이 있는데 조탁해서 만든 것이 아닌 만큼 충담하고 소창해서 속기가 없다.
하지만 숭일도 세사에 무심하지만은 않았다. 포의민초라 해서 나라의 안위를 등한할 수 없다하여 일이있을 때 마다 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가장 널리알려진 것은 오히려 '의응지소'이다. 보군덕 급구현 중책임 재민산 수학도 숭공도의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고, 가학이 연원이 같아서인지 셋째 현일의'오조소'와 주장이 통하는 곳이 많다.
숭일은 세칭 '칠산림'의 하나로 일찍부터 조정에알려졌고 세자세마가 제수된 적도 있으나 벼슬길에나선것은 이순이 넘어서였다. 숙종 17 년 장악원 주부로 제수되었다가 지의령사가 되어 고을에 부임했다. 임금께서는 바로 경연관으로 쓰려 하셨으나 먼저목민을 알게 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논의가 있어그리된 일이었다.
의령에 부임한 숭일은 혁폐 소잔 안민 선속을 시책으로 삼고 향약을 실시하여 칭송을 샀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너그러움과 후덕함을 기려 이불자란별명을 불렀을 정도였다. 그때 영남 안찰사는 송곡 이서우로 귀임길에 태학사 권유를 만나 말하기를 '영남70주에 옛 도리대로 백성을 돌보는 이는 의령의 이사군(숭일)뿐이라' 하였다.
그러나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셋째 현일이 의리죄인으로 몰려 남북으로 귀양길을 떠도는 신세가 되니 숭일 또한 성할 수가 없었다. 서인의 박해가 이르기 전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다시 석보로 돌아왔다. 재주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길이 어찌아쉽지 않으리로마는 숭일은 세상일에 연연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직 학력이 미급한데 가볍게 세로 나갔다.'
숭일은 그렇게 자탄하며 다시 학문과 강도에 전념하다가 예순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학적을 숭모하던 이들이 많아 뒷날 불천위로 모시자는 논의가있었으나 위로 군자와 둘째 휘일 셋쨰 현일이 이미 불천위로 모셔졌던 터라 성사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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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정일(편안할 정, 편안할 일): 정우재(바를정, 어조사 우, 가지른할 재)
이 아이는 숭일보다 네 해 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뒤숭숭하던 때에 태어났다.
이름은 정일이요 자는 경의이며 호는 정우재이다. 어려서부터 지기가 명민하였고 자라서는 부형을 따라학문에 정진하였다. 경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의서에 두루 밝았고 음악의 이치에도 통달했다는 말을 들었다.
숙종 10 년 정시에 응시하였으며, 시종에 관한 상소가 여럿 남아 있으나 관작은 아래 드 아우들과 마찬가지로 통덕랑에 그쳤다. 나이 들어서도 학문을게을리 하지 않았고 문하를 열어 가학을 인근 후생들에게 전했다. 이른바 '칠산림'에는 들지 못했으나 학자라는 이름을 듣기는 족했고 행검도 뒷사람의 우러름을 받을만했다.
문집 네 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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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융일(융기할 융, 편안할 일): 평재(평평할평, 가지른할 재)
여섯째 융일의 자는 자약이요 호는 평재 혹은 인곡이다. 기도가 남다르고 문장또한 뛰어났다. 나이 일곱에 시문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자라서도 문장으로 군자의 기대와 사람을 받았다. 참판을 지낸남곡 권해는 이 아이의 글을 보고 걸출한 안재라 칭송하였다.
둘째와 셋째도 이런 아우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가르치기를 남달리 했다. 일생 과장을 기웃거린 적이없이 산람에 묻혀 지냈으나 학문하는 틈틈히 명농치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집 2권이 전한다. 나라에서 통덕랑을 제수하기는 했으나 실제 벼슬길에 나선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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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운일(구름 운, 편안할 일): 광록(넓을 광,산기슭 록)
계자 운일은 맏이 상일로부터 치면 일곱째 아들이된다. 자는 자진이며 호는 광록이다. 이 아이 역시일찍부터 형들을 따라 학문을 닦았는데 특히 시문이뛰어났다. 현일이 이 아이를 사랑하여 '난제'라 했을만큼 좋은 글이 많았으나 불행이도 스물아홉에 일찍죽었다. 둘째 휘일에다 두 여시과 아울러 내가슴에묻은 아이이다. 일곱 아들중에서 이 아이 운일만 문집과 정자가 없는데 그 또한 이 같은 요절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일찍이 성취가 있었던 학문과 재^36^예를 스스로 버리고 부녀의 길을 선택했다. 그 부녀의 길에서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길이고 그 성취는 자식으로 드러난다.
나는 내 아이들이 으뜸으로 뛰어나고 내가 가장 그아이들을 잘 길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내 아이들보다 더 훌륭한 인물도 많고 나보다 더잘자식을 기른 어머니도 많다. 그러나 나는 처녀적의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큰 성취처럼 아이들을 얘기할 수 있는까닭은 그 아이들이 저마다 삶을 귀하고 무겁게 여겨삼가고 애쓰며 살았음에 있다. 나도 그 아이들에게무엇에든 으뜸이 되는 꿈을 건 적이 있으나 꿈꾸는것은 사람이고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설령 그 이름이 우뢰처럼 떨쳐 울리지도 못하고 남긴자취가 뒷사람을 눈부시게 하지 못했더라도, 사람의도리를 알고 아는 것을 실천하려 애쓰며 살았다면 어미로서 무엇을 더 바라랴.
뒷날 내 고장 사람들은 행실이 반듯하고 학문이 깊은 젊은 이를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안릉씨 자제들임을 알겠구나'라고 했다 한다. 안릉씨는 우리성씨의 별칭으로, 이는 특히 내 아이들 이후의 얘기가 된다.
거기다가 그 아이들로부터 다시 뻗어나간 수백 수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면 옛날이 선택을 자부심으로 떠 올릴 수조차 있다. 백 권의 책을 남기고 천폭의 그림과 만 수의 시를 남겼다 한들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로 이어지는 끝없는 세상과 어찌 바꿀 수있으리. 그런데도 이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여성의 성취에 들지도 못한다니. 어리석고 재주 없는여자나 마지못해 끌려가는 삶이라니.
실로 알지 못할레라, 사람의 일이여. 하늘의
뜻이여.@ff  @[  제4부 지는 해를 바라 보며
사라진 큰 어머니들에게
할머니라는 말의 뜻은 '큰 어머니'이다. 실제로 영남 지방에서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를 큰 어머니라고 불렀다. 요즘 여인들이 곰곰히 새겨볼 만한뜻이다.
어머니보다 더 큰 존재라 함은 먼저 어머니로서의영역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말한다. 바로 자기몸에서난 자식만이 아니라 그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모성이드리움을 뜻하며 나아가서는 이웃과 사회에까지 모성이 드리워야함을 뜻한다.죽을 때까지 핏줄에만 얽매인 어머니는 진정한 '큰 어머니'가 아니다.
그 다음으로 어머니보다 더 큰 존재라는 뜻에서'안어른'이란 다른 이름이 숨어 있다. 연륜의 무게는남녀를 구별하지 아니한다. 비록 여서이라 할지라도한 시대의 장로로서 그 몸가짐과 마음씀은 아랫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그 통찰과 사려는 다음 세대의 바른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또 어머니볻 큰 존재라는 뜻에는 삶에서의 전문가혹은 달인이란 일면도 들어 있다. 엉겅퀴와 가시 덤불로 뒤덮인 거친 땅을 반백 년 헤쳐 나오는 동안에쌓인 경험은 그 방면의 전문성을 주장할 만하다. 또숱한 고난과 시련을 통해 익은 지혜는 뒷사람들에게유요한 정보와 지식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그런 뜻의 할머니를 차자보기 어렵다. 이 시대의 할머니 일부는 어머니 앞에 붙는 '큰'의 뜻을 '한물간'이나 '쓸모없는'으로만이해해 무력하게 주저앉거나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버린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차피 지게 되어있는젊은이들과의 경쟁에 헛되게 시간과 정력을소모하고있다.
할머니라 부름받는 것이 싫어서 손자가 태어나는걸 겁내는 여자는 바로 그 '큰'을 '한물간'이나 '쓸모없는'으로 이해한 이들이다. 이제 남은 일은 내한몸 즐겁고 편안하게 건사하는 것이라 여겨 자손도 이웃도 돌보지 못하는 여자도 그렇다.
그들이 살아있으되 그 삶은 죽기만을 기다리는 시간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심하고 보기에 민망스런 것은젊은이들과의 어림없는 경쟁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수술로 주름을 감추고 날마다 우유에 목욕을한들 찬물에 씻는 젊은이의 살결을 어찌 당하며, 비싼천에 솜씨좋은 재단사를 불러 울긋불긋 차려입은들허름한 면바지 차림의 젊음을 무슨 수로 이겨낼 것이랴. 자신에게 남겨진 정작으로 큰일을 잊고 마땅히포기해야 할 젊음에만 안달하며 매달리는 것을 버면다만 가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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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남과 껴안기
한 여인이 언제부터 할머니가 되는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대개는 손자를 안게 되는 때가 되겠지만 스스로 할머니됨을 인식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수밖에 없다.
내가 할머니가 되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럼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 마흔 여덟 되던해부터인 듯 하다. 그때 군자와 나는 시어머님상을당해 석보에서 나라골로 돌아가 있었다. 집아닁 마지막 어른이 없어진데다 나 자신 세 아들과 한 딸을 혼인시켜 손자까지 여럿 본 터라 이미 할머니란 말이어색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할머니가 되었음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다시 한 계기가 왔다.
어느 날 손자 하나가 토사곽란을 일으켜 혼절한 일이 생겼다. 의원이 멀리 있는데다 당장의 일이 급해나는 집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약으로화제(약방문)를 써주었다. 출가 전 서책을 가까이 할 때얼마간 익힌 적이 있는 의방을 기억속에서 되살려본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내 화제대로 지은 약을 다려먹은 지 한 식경도 안 돼 깨어났다. 그러자 놀란 상일과 휘일, 현일 형제가 나란히 석고대죄를 청해왔다. 내 의술을 크게 보고 자식되어 어미를 몰라본 죄를 비는 것이었다.
"소자들이 불민하여 매알 어머니의 훈육을 받으면서 이처럼 자랐으나 어머니의 학식이 어떠한지는 알고자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이렇듯 의술까지 깊이통하신 줄은 전혀 몰랐으니 그 죄가 적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출가하기 전에 모든 학문과 기^36^예를 스스로 봉한 바 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필요한 것이상으로 아는 체한 적없고, 붓을 잡아 글이나 그림을 희롱한 적도 없었다.오직 그 시대 부녀에게 주어진 직분에만 전념해 삼십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내가 할 수 있는일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의술을 드러낸 것도 사세가 위급해서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어엿한 선비로 자란 아이들이 마당에 삭자리를 펴고 죄를 비는 것을 보자 내 마음은 달라졌다. 아직 막내 운일이 품안에 있었지만 성숙한아들들의 그 같은 모습은 드디어 내게도 그들의 어머니만으로는 다 덮을 수 없는 새로운 시절이 열리었음을느끼게 했다.
"그렇게 죄스러워할 것 없다. 출가전 내게 약간의학문과 재주가 있었으나 아녀자의 직분이 아니라 여겨 스스로 폐했다. 더구나 집안에 할아버님과 아버님같은 큰 선비가 계사는데 내가 어찌 학문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일로 너희에게 경계하고 싶은 것은 작은 학문과 재주로 저존망대하는 일이다. 영웅이 함부로 칼을 매면 도적의 이름을 사게 되고 선비가 가볍게 말과 글을 흩뿌리면 그 문호에 욕이 이른느 법이다. 너희는 삼가고 삼가 이름과 문호에 누를 끼침이 없게하라."
나는 그렇게 아이들을 플어주었으나 그 뒤로는 구태여 내가 듣고 배워 아는 것이나 느낀 바 정의를 드러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말과 글로 드러난내성취를 추적해 본 이들은 잘 알고 있듯이, 내가 다시서책을 펴고 붓과 종이를 가까이 하는 것도 그 무렵부터가 된다. 그것으로 나는 가사와 핏줄의작은 어미됨에서 벗어나 보다 큰 어머니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셈이다.
그 이듬해 팔룡수첩을 꾸민 것도 그런 내 마음의한끝을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출가 전 이야기를할때 짐깐 말한 바 있듯이, 팔룡수첩은 나의 시와군자의 글씨 그리고 둘째 며느리의 수 솜씨가 어우러져만들어진 진품이다. 곧 나의 '소소음'과 '성인음'을군자께서 푸른 깁위에 쓰시고, 둘째 며느리가 그 글씨 아래 위로 군자와 일곱 아들을 상징하는 여덟 마리 용을 수놓아 '전가보첩'이라 제한 수첩을 꾸민 것으로, 시와 글씨와 수가 모두 뛰어났다하여 '안룡삼절'이라 불렀다.
뒷날 셋째 현일이 의리죄인으로 몰려 가세가 쇠했을 때 그 팔룡수첩이 어떤 노론 세도가의 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번암 체제공이 이를 알고되찾아 주었는데 그때 번암은 내 후손둘에게 수첩을 넘기기 전에 먼저 정조대왕께 보여드렸다. 그걸 보신정조대왕은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어 수첩뒤에어필을남기고자 하셨으나 번암이 말렸다.
"여기에 성상의 어필까지 더해지면 그로 말미암아마침내 그 자손이 보존할 수 없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이에 정조대왕은 비단으로 포장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새삼 팔룡수첩울 이리 길게 얘기하는것은 그 값짐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 동안 돌아보지 않던 가사 밖의 성취에 다시 눈 돌리기시작했음을 말하려고 함이며 보다 큰 어머니로서의삶을 스스로 껴안 았음을 드러내 보이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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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큰 어머니로서
다시 지필를 가까이 하게 된 내가 나이 이순을 넘어 지은 시에 이런 게 있다.
벗을 떠나보내며 지은 네 시를 보니
성인의 말씀을 배운다는 구절이 있구나
내 마음이 기쁘고 또 네가 가상그러워
붓 들어 항 둘 써서 네게 보낸다.
견미별우시(볼 견, 지을 미, 이별할 이, 벗 우, 시시)  중유학성어(가운데 중, 있을 유, 배울 학, 성스러울 성, 말 어)  여심희부가(내 여, 마음 심,즐거울 희, 다시 부, 가상스러울 가)  일필특증여(하나일, 붓 필, 특별할 특, 증여할 증, 너 여)
이는 손자 신급의 '별우시'를 보고 기꺼움 마음을이기지 못해 지은 '증손신급'이란 시다. 또 그무렵내가 지은 시에 이런 게 있다.
새해에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하니
너의 뜻이 요즘 사람들 같지 않구나
어린 네가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마침내 참된 선비를 이루게 되리
신세작계문(새로울 신, 해 세, 지을 작, 경계할계, 문장 문)  여지비금인(너 여, 뜻 지, 아닐 비,이제 금, 사람 인)  동자이향학(아이 동, 아들 자,이미 이, 향할 향, 배울 학)  가성유자진(어찌 가,이룰 성, 유교 유, 놈 자, 진실할 진)
이 역시 손자 성급에게 내린 '증손성급'이란 시로두 편 모두 내가 손자들의 성장과 성취를 얼마나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낳은 자식조차도 가르침의 대부분은 학교와 선생들에게미루다가 그 아이가 졸업하는 날로 어머니의 가르침도 다한 것으로 아는 요즘 어머니들에게는별나다 못해 극성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지금은 만혼과 핵가족화 풍조로 손자를 곁에 두고 그 자라남을살피기 어려운 시절이 아닌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시절이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할머니의 마음가짐이 있을 것이다.그런데 요즘 할머니들은 자신들에게 '큰 어머니'으로서의 중요한 몫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다. 대신 마땅히 해야할 바를 게을리하는데서 생긴 여가만 못 견뎌하며 온갖 뜻없고 어리석은 일에 멈과 마음을 탕진한다.
흔히 내 자손 중에 빼어난 선비로는 '존 갈 고밀'을 친다. '존갈'은 둘째 아이의 호 존재와 셋째아이의 호 갈암에서 앞 글자만 떠어낸 것이고 '고밀'은 여섯째 집 손자 만의 호고재와 셋째집 손자 재의 호 밀암에서 딴 말이다. 존갈은 얘기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손자 고밀의 삶을 요약함으로서 그 아이들에게 끼친 내 가르침의 흔적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세상에 고재 선생으로 알려진 손자 만은 자를 군직이라 하는데 여섯째 융일의 셋째 아들이다. 나이 열살에 '소학'을 익히고 벌써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는데 애썼다. 셋째 현일이 이 조카를 특히 사랑하여주자께서 수재들을 훈계한 말 '주자훈수재어지'를 손수 써주며 그 면학을 격려했다.
일찍 사서유경에 통달한 뒤에 도산 서원에 들어가'심경' '근사록' '주자전서' '퇴계집' 등 탐독하여학자로서 이름을 쌓았다. 그러나 관운이 없었던지부형의 권유로 향시를 거쳐 여러번 과거에 나갔으나 매양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다가 숙부 현일이 의리죄인으로 몰려 귀양살이 끝에 죽자 벼슬길을단념하고 산림에 몸을 두었다. 묵동에 작은 집은 짓고 고재란 현판을 달았는데 이는 '중용' 의 '말을 하고는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을 하고는 말을 돌아본다'에서 취한 당호이다.
학문이 무르익고 나이가 차자 원그느이 제자들이모여든어 문하를 이루었다. 이 아이는 특히 예학에밝아 의문이나 제도의 급급함을 물리치고 고의를 지키면서도 시의에 맞는 새로운 예론을 세워 칭송을 들었다. 또 관방과 군무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져 임진병자 양란 때 탄금대와 남한산성에서 패한 까닭을 명쾌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뒷날 영의정이 된 녹옹 조현명이 경상감사로 왔다가 그 이름을 듣고 영남의 훈적지임을 맡겼다. 이에마능ㄴ 호계 서원에 나아가 규율을 정하고 홍학에힘썼다.
그 인품과 학식을 높이 산 조현명이 조정에 천거해영희잔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고제문집' 열 권이 전한다.
흔히 뒷사람들에게 밀암 선생으로 불리는 재는 셋째 현일의 셋째 아들이다.
자라서는 자를 유재로 썼으나 어릴 때는 성굽이라 하였는데, 발 어린 나이에 '자경문'을 지어 나를 기쁘게 했던 그 아이이다. 재는 열 살 전에 이미'소학'과 '논어'와 '좌전'을 읽었고 그 뒤로는 주로 넷째 숭일의 가르침을 받아 '태극도설'과 '중용장구''의례'들을 익혔다.
셋째 현일이 갑술환국으로 귀양길에 오르자 재는아비를 따라 함경도 종성에서 전라도 광양에 이르는험난한 길을 시중들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방귀전리로 풀려난 현일이 금양에서 죽자 재는 뒤를 이어금양 학파를 이끌며 영남의 주리론을 대표했다. 호를밀암으로 썼는데 밀은 현일이 '교자시'에서학문하는태도를 강조한 말이다.
뒷날 우담 정시한의 은거지인 법천우사로 옮겨 이기사칠지변 건순오상지덕 인물품수지동이를 갈론하였고 저술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성유록' '금수기문' '주서강록간보' '안증전서' '주어요략' 등을 썼으며 '밀암집' 스물 다섯 권을 남겼다.
영조때 장악원 주부로 불렸으나 가지 않았고, 다시어사로 이름난 박문수 등의 천거가 있었으나 벼슬길에는 끝내 오르지 않았다. 제자로 대산 이상정과소산 이광정이 있어 도산의 적전을 이어갔다.
그밖에 이름을 들 만한 손자로는 내가 첫 번째 시를 보낸 신급이 있는데, 신급은 여섯쨰 융일의 맏아들 은의 어릴 적 자다. 은은 후사없이 죽은 백부상일의 양자로가 나의 사손이 되는데, 자란뒤에는 자는백임이요 호는 벽계로 썼다. 역시 가학을 닦아 선비로서 이름은 얻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남곡 권해는 이 아이를 시대를 잘못 만난 이재로 아까워 하였다.
호를 오촌으로 쓴 의, 홍암으로 쓴 심, 잠와로 쓴반, 유와로 쓴 식, 낙천당으로 쓴 경, 후계로 쓴 영,약천으로 쓴 삼, 이요재로 쓴 수도 내 가르침의입김이 닿은 준총같은 손자들이다. 모두 뛰어난 학문과행검으로 작게는 그 이름을 얻고 크게는 우리 문중에빛을 더했다.
뒷사람들은 군자로부터 시작하는 조손 삼대에서 군자인 석계 이계명과 맏이 정묵재 상일, 둘째 존재 휘일, 셋째 갈암 현일, 넷째 항재 숭일, 그리고손자고제 만과 밀암 재 등을 아울러 특히 '칠산림'이라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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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당(시골 향, 당파 당)의 안어른: 모성(어머니모, 성품 성)의 확대
내가 스스로 할머니 됨을 껴안은 뒤부터 죽어 눈감을 때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한 일 중에는 아침마다비복을 풀어 내 사는 마을을 들러보게한 것이 있다.이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없나를 살피기위함이었다.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음은 끼니를 거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런 집이 있다 하더라도 무턱댄 동정으로 곡식부터 디밀지는 않았다. 먼저 그 집에 일할만한 사람을 불러서 무언가 일을 시키고 그 품삯으로곡식을 보내주었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으면 별로 긴하지 않는 편지심부름이라도 만들었는데 그 까닭은도움받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나는 가을마다 사람을 사서 도토리를 좁게 하였다. 있는 이건 없는 이건 가을이면 얼마간이 추수를하기 때문에 당장은 배고프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춘궁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또 농사일이 끝나면 일할곳이 없어 품삯은 헐하기 마련이다.
춘궁기에 기민을 먹이다가 가진 곡식이 다하면 도토리를 삶아 내는 것은 시아버님 운악공 이래로 우리집에서 해오던 일이다. 그러나 시아버님도 나처럼 가을부터 사람을 풀어 도토리를 모으시지는 않았다. 때를 당하여 정히 급하면 동네에 모아둔 것을 헐값에구해 쓰셨을 뿐이다.
한 며느리로서 시아버님의 명을 시행할 적에는나도미리 모아두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할머니 되고 향당의 안어른이 되었다는자각이 든 뒤에야 비로소 그 방도를 생각해 냈다. 이제는 내가 '큰 어머니'되어 내 자손들뿐만 아니라 이우스이 모든 굶는 이들을 먹여야 한다는생각에서였다.
의원을 찾아가기 어려울 만큼 가난한 이들에게는내가 지어준 향약방도 얼마간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병이 나서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더러는내히에 겨운 적이 있어도 애써 화제를 지어주었다. 그역시 향당의 어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기때문이었다.
부모 없는 어린 것이나 자식없는 늙은이와 의지할데 없는 과부, 떠도는 홀아비를 돌보는 일도 이제는의미가 달라졌다. 전에는 그들을 손님으로 보아정성을 다한 것이지만 이제는 마땅히 돌보아야할 자식으로 그들을 보았다. 예가 아니라 모성으로 그들을 대하고자 했다.
향당의 어른 노릇에 어찌 저들의 몸을 보살피고 기르는 일뿐이겠는가. 자랑 같아 일일이 다 들지 어렵지만 그 밖에도 마을의 남녀노소가 내게 의지한바는많았다.
특히 내가 한평생 겪은 일과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저들에게 소중한 지식으로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살이가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필요가 늘어나면 그만큼 도움이 필요한 그늘진 곳도 늘어나기 마련이다.따라서 이 시대의 어른들은 나의 시대보다 훨씬보살피고 거두어야 할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남은 삶의 외로움과 무료함만을 한탄하는 이 시대의 할머니들을보면 난ㄴ 묘한 엇바뀜을 느낀다. 베풀어야할 사람들이 스스로 베품을 받아야 할 자리로 물러앉은 격이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의 말을 팔자 좋은 노마님의 물정 모르는 소리로 몰아댈지 모르겠다. 당신이야 배운 것많고 넉넉한 가문에 잘난 아들들두어물심 양면으로 여력이 있었으니 베풀 수 있었겠지만그럴 처지가 못되는 이들은 어떡하느냐고 빈정거릴수도 있다.
틀림없이 나는일생 베풀기에 유리한 처지에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드는 이들이 추측하는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나는 또 그런 이들에게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이 핑계를 찾기 시작하면일생 남에게 단 한번도 베풀 여유는 생겨나지 않을것이라고. 그리고 사람이 늙어 한 시대의 어른이 되었는데도 아래사람에게 베풀 아무것도 없다면 그 사람은 잘못 살아도 크게 잘못 산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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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우희(드물 희, 또 우, 드물 희): 봉우리의 휴식
세상은 비정하고 삶은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삼가고 또 힘쓰며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든 좋은 한 철이 있기 마련이다. 요새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인생의 절정이나 황금기로 일컫지만 나는 봉우리의 휴식이라 이름하고 싶다. 산은 오르고 내리기가 다같이수고로우나 그 봉우리에는 반드시 휴식이 있다.
내게도 일생 여러 번 봉우리의 휴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자족하며 쉬었던 것은일흔이 넘겨 이른 봉우리에서 였을 것이다. 그마음을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 '희우희'라는 시다.
옛부터 일흔까지 사는 일은 드물다 했는데
일흔에 셋을 더했으니 드문 중에 드물구나
드물고 드문 중에 아들까지 많으니
드물고 드문 중에 또 드물고 드물어라
인생칠십고래희(사람 인, 살 생, 일곱 칠, 열 십,옛 고, 올 래, 드물 희)  칠십가삼희우희(일곱 칠,열 십, 더할 가, 석 삼, 드물 희, 또 우, 드물 희)희우희중다남자(드물 희, 또 우, 드물 희, 가운데중, 많을 다, 사내 남, 아들 자)  희우희중희우희(드물 희, 또 우, 드물 희, 가운데 중, 드물 희, 또우,드물 희)
이 시는 일흔 셋에 지은 것을 드물다를 아홉번이나반복하여 희시 같은데 있으되 나의 그득함과 흐뭇함을 드러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돌이켜보아도그때가 실로 내 삶에서 가잘 환하고 넉넉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때 군자께서는 아직 수산 아래 머물러 계셨으나오랜 피세은둔을 끝내시고 문하를 열어 세상과 다시내왕을 시작하셨고 아이들도 저마다 그 성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곧 큰아이 정묵재 상일은 서른둘에 단산 서원 원장을 거쳐 사림에서 높임을 받고 있었으며, 둘째 아이 존재 휘일은 도산 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홍범연의'를 쓰는 중이었다. 셋째인 갈암 현일도 벌써 두 권의 저술을 내고 학자로서 영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넷째인 항재숭일도 손위형들과 난형난제린 소리를 들으며 학문과 행검으로이름을 얻고 있었다. 늦게 태어나 아직 형들만한 성취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다섯째 여섯째도 한 선비로서는 모자람이 없었고 막내는 어린 나이에 벌써 시문으로 기이한 재능을 드러냈다.
어린 손자들도 벌써 그 지학에 만만찮음을 드러냈다. 내가 시를 써서 격려한 신급과 성급이 그러했고만이 그러했다. 특히 성급과 만은 뒷날 세상사람들로부터 밀암 선생, 고재 선생으로 우러름을 받을 만큼성취가 컸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거기다가 여든에 가까우신 군자와 일흔을 넘은 내가모두 병없이늙어가니 어찌 그런일이 흔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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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곤시의방
그러하되 내 봉우리의 휴식도 그리 오래지는 못했다. 이듬내 막내 소일이 나이 서른을 못 채운 채 요절하고, 다시 둘째 휘일이 학자로서는 한창 원숙한나이인 쉰넷에 소갈병으로 죽자 내 삶은 일시에 삭막한 겨울로 접어든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슬퍼함에도 절도가 있는법이다. 힌 해에 잇따라 두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심사가 어떠하랴만 나는 눈물조차 드러내 놓고 흘릴 수 없었다.나날이 쇠해 가시는 군자를 위로하는 일도 급하려니와 무엇보다도 그 일로 가문의 기상이 꺽이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내 슬프고 원통함이 절박하지 않은 것은 선부모님께 받은 이 몸을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죽은 아이들보다는 군자와 산아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리고 헛된 시름에 잠겨 세월을 축내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일을찾아 보았다. '규 시의방'은 그때에 쓰여진 책이다.
열아홉에 시집온 뒤 오십여 년 나는 많을 때에는한 끼에 이백이나 되는 식객을 치르면서 방간을 돌보았다. 친정에서 익혀온 약간의 솜씨와 시어머님진성이씨의 자상한 가르침이 있었으나 반가의 음식 범절이란 게 워낙 까다롭고 미묘한 것이라 방간에 들어서면 낭패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움을겪으며 오랜 세월 먹을 거리를 다루다 보니 듣고 배운 것말고도 나름의 터득이 생겼다.
나는 그런 내 견문과 터득을 글로 남겨 며느리와딸들의 낭패를 덜어주고 싶었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사는 데 유용한 경험은 뒷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앞서 산 사람의 도리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니 그걸 다루는일을 어찌 하찮다 하리.
뜻은 그러해도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 책을 쓰는게 쉽지는 않았다. 기력은 떨어지고 눈도 어두워진데다 읽을 이가 규중 사람들이라 국문으로 길게풀어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떤 조리법은 기억 자체가 희미해져 되살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는 것은 뒷사람에게 물려주지 않고 떠나는 것도 죄라 여겨 늙은 몸을 단속하고 써나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음식지미방'이라 하고 내용은 면병류 조과류 어육류 채소류 주류 식초법 여섯으로 크게 나누었다. 그중에서 면병류와 조과류는 전후양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기억의 부실함을 보충하는 과정에서 생긴 중복이다.
나는 내 견문과 터득 중에서 흔하게 알려지지 않은것을 중심으로 백마흔여섯 가지의 조리법을 적었는데그중에서 술이 쉰세가지로 가장 많은 것은 그담그는법이 가장 까다롭고 세밀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맛질방문은 인근의 조리법뿐만 아니라 먼 문중의 비방까지 찾아 적어든 것이라 그 쓰임이각별할 것이다.
여러 달 걸려 쓰기를 마친 뒤 나는 책 앞자에다 자손들을 행한 당부를 얹었다.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 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라.
딸자식들은 이 책을 베꺼기되 가져갈 생각 말며 부디상치 말게 간수하여 쉬 떨어버리지(떨어지게 만들지)말라.'
그리고 군자께 그 쓴 뜻과 책을 올렸더니 군자께서는 한동안 말없이 살피시다가 고개를 끄덕이시며 붓을 들어 '규곤시의방'이라 다시 제하여 주시었다. 또표지 안쪽에 중당 때의 시인 왕건의 시 한편을 얹어주시었다.
시집간 지 사흘만에 부엌에 내려가
손을 씻고 죽과 국을 끓이네
시어머니 식성을 알 수 없으니
시누이로 하여금 먼저 맛보게 하리
삼일입주방(석 삼, 날 일, 들어갈 입, 부엌 주, 방방)  세수작갱탕(씻을 세, 손 수, 지을 작, 국 갱,끓일 탕)  미음고식성(말 미, 맛볼 음, 시어머니고,먹을 식, 성격 성)  선유소부상(먼저 선, 남길 유,작을 소, 부인 부, 맛볼 상)
여기서 원래 시는 소고상이라 되어 있는 것을 군자께서 소부상으로 바꾸셨는데 그 뜻을 물어보지 않아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토록 힘들여 쓴 이 책은 딸들이 게을러서인지 베껴 가지 않아 문중에서만 돌다가 근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겨유 삼십년전에야한 대학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다시이십년이 지나서야 한 요리 연구가에 의해 현대어로출판되었다. '조선의 요리'란 책 속에 들어가 일본어로 번역된 것도 역시 그 언저리의 일이다.
'규곤시의방'에 대해서는 직접 요리를 담당하는 부녀자가 자신의 경험과 실증을 바탕삼아 쓴 요리 책으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계 요리문화사에서 특별한 이의를 갖는다는 과분한 평도 있다.그러나 가장 정감있게 이 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표시하고 있는 글은 아마도 그책을 현대어로펴낸 황혜성의 해제와 해설일 것이다. 장황할지 모르나 일부만 인용해 오늘날의 요리 전문가가 그 책을 대하는심경을 살펴보자.
'^5,5,5^ 이 책은 석보면 원동리에 있는 서고의 정리 중에 나온 것으로 전 경북대 김사엽 교수가 발견하여 '경북대 논문집'에 자료로 실린 것을 보았다.그 원본이 아직 종손에게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고(근년에 되돌아왔음; 필자 주) 경북대 도서관과 석보면 원리동을 수차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5,5,5^(중략) ^5,5,5^  나는 그 책을 찾고자 1965 년 다시경상도로 내려갔는데 세상에 인연이 깊다는 말은 이경우에 꼭 알맞을 성 싶다. 여름방학에혼자서 배낭을 메고 안동에서 석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낯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불안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에깔끔한 청년이 타기에 원리동 재령이씨 댁을 물으니깜짝 놀라며 자기가 종손이란다. 그때 대학생으로 편모를 모시고 있으며 내일 음력 칠월 육일은 정부인장씨의 285주기 기제사로 제수를 사가지고 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문중에서 불천지위를 모시고 있는 것은 그 부인의 공덕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날은 제사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드리고 제사 때는 뜻 밖인 내가 넙죽히 절을 하면서 많이 귀엽게 보아주시고 내가 공부하는 뜻을 꼿 이루게 해달라고 빌지 마지 않았다. 제사 차리는 초닷새는 내 생일이니할머니 덕분에 잘 지내게 되어 잊지 못할 생일이 되었다^5,5,5^'
또 나의 '상화법'에는 이런 해설을 곁들이고 있다.
'중국의 포자 같기도 하고 빵같기도 하다. '악장가사'에 적힌 쌍화법과 이퇴계의 '서어부가'이후의 상화점과 같은 말이라고 하며 '훈몽자회'에는 만을상화 만, 두를 상화 두라 하였다. 세상에서는 만두러고하였으나 지금의 만두와는 다르다. 부풀게 하는점은증병과도 비슷하지만 밀가루를 밑술로 하여부풀게하는점이 매우 다르다.
전문가도 상화가 무엇인지 그 제법이 궁굼하였던 차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수증계 맛질방문'에는 이런 말을 덧붙여 놓고 있다.
'닭을 기름에 지펴 끓이는 것도 이상적이고, 토란순무 동아 오이 파 부추 등 각색 채소를 곁들이고 국물을 깔죽하게 밀가루 즙을 쓴느 법이 중국 음식을많이 닮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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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의식
'규곤시의방을 쓴 이듬해 우리 일가는 안동부 대명동으로 옮기게 된다. 아퍼 말한 바 있듯이 군자께서대명이란 이름에 취하여 수비에서 옮기신 것이나한편으로는 웅부에서 인재를 얻는다는 뜻도 있으셨다.내 나이 일흔여섯 때의 일이다.
군자께서 대명동에 자리를 잡으시자 그 행의를 추앙하던 안동의 선비들이 다투어 몰려들었고 그 강도의 터는 뒷날 단고 서단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그때 군자의 춘추 여든넷, 다시 끌어안은 세상과의 인연이 길 수가 없었다. 군자께서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세를 하시니 어렵게 되살린 육영의염원도 그로서 끝나고 만다.
언젠가 한번은 떠나게 되어 있는 길이지만 보내는사람에게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한 스럽다. 더구나 육십 년을 귀한 손님처럼 받들던 이가, 그리고 육십 년을 귀한 손님처럼 날 맞아주시던 이가 그렇듯훌훌이 떠나시니 천붕이란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이가 있어 군자처럼 날 괴시고 세상의 찬 바람에서 이 한 몸 가려주실까. 해와 달이 일시에 빛을 잃은 듯하고 천지가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군자께서 떠나신 길은 나도 이윽고는 떠나야 하는 길이다. 지금은 보내고 있지만 머잖아 내가떠나야 한다. 예는 삶에 그치지 않고 죽음에도 미친다. 보내는 사람의 예도 중요하지만 떠나는 사람의예도 그에 못지 않다.
나는 애써 군자를 먼저 보낸 애통함과 추스름을 아울러 스스로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나는 그일을 먼저 삶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으로 시작했다. 억지로끌려가는 것은 끌려가는 이도 괴롭지만 보내면서 그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이에게는 더 큰 괴로움이 된다. 나는 서둘러 죽음으로 다가감과 마찬가지로 남겨지는 이들에게 그 괴로움을 끼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불씨나 노장의 부류가 아니라도 삶이 무턱대고 집착할 그 무엇이 아님은 이치로 미루어 넉넉히 알 수있다. 나는 일찍히 삶의 중요한 내용을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서 찾았다.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면삶도 끝이 난다.그런데 세월은 사람의 목숨보다 먼저사람과의 관계를 줄여 나간다.
나를 사랑하던 앞세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버렸고 나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도 거의 죽렀다.내가 낳은 자식 중에도 나를 앞질러 간 아이가 둘이나 되고 군자마저 떠나셨다. 언젠가는 내가 알던 모든이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는 온전희 무관한 사람들만 남아있는 세상을 혼자살아간다면 그 삶은 얼마나 끔찍한 형벌일까.
삶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해 자기 자신에서 끝나는 것으로만 파악하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애착에서가 아니라 죽음 뒤의 허무가 싫어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점에서 나는 내 젊은 날의 선택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일찍히 핏줄을 통한 삶의 연속성과 자아의 확대를 미신으로 골랐다. 우리는 잎처럼피고 지지만 뿌리와 씨앗에 담긴 생명력은 다함이 없음을 믿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것을 기꺼워하고 군자께서곁에 계시지 않음을 애통해한 일이 꼿 한 번 있었다.군자께서 돌아가신 지 세해 뒤 셋째 현일이 늦어서야진연에 오르게 되자 나라에서 곡식과 비단을 내렸다.사람들은 모두 광영이라 했으나 나는 먼저 가신 군자를 떠올리며 목메어했다.
"네 아버님께 이 기쁨이 미치지 못한 게 한스럽구나"  다행히도 그 뒤로는 죽음을 기다리는 내 마음가짐에 하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듬해 넷째 승일이 자리잡은 석보로 돌아간 나는 그곳의 옛 집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심경으로 남은삶을 마감했다. 하루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해가 지는 것이 곧 세상의 끝이다. 그러나 긴세월을 자기것으로 품은 사람에게는 내일의 시작이다. 태음은 소양으로 이어진다.
하늘이 나를 부른 것은 그로부터 나를 부른 것은그로부터 삼 년 뒤 내 나이 여든세 살 때였다. 그 시절 큰 선비의 죽음에는 고종록이 따랐다. 후손으로하여금 몇날 몇달이고 지켜 앉아 발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적는 것이다. 그것이 후손들에게 의연한 죽음을 가르치는 것이든, 자칫 정신을 놓기 쉬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든, 죽어가는 이에게는 유용하기 짝이 없는 고안으로 보인다.
부녀인 내게는 고종록이 따르지 않았으나 나는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나를 지켜보는 자손들의 눈길을 잊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애써 지킨 예였다. 그 뒤로도 내 죽음에 따른 긴이별 의식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이미 나의 몫이 아니었다. @ff
@[  (작가의 말)
아직 펴내지도 않은 책을 두고 그 내용보다는 오도된 반응에 먼저 마음을 써야 하는 야릇한 경우를 이번에 겪었다. 연재라는 발표 양식을 선동적인 매스컴의 속성 덕분일 줄 안다.
원래 이 작품을 구상한 의도는 우리의 삶에 한 본보기가 될 만한 여인상을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내는데 있었다. 그런데 연재 첫회부터 반페미니즘 작품으로 낙인찍혀 그 방면의 논객들로부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았다. 특히 지금은 페미니즘 문학의 선봉처럼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한 일탈이나 왜곡에 지나지 않는 이들과 내가 나란히 논의되는 것은 거의 욕스러울지경이다.
이 작품의 각 부 앞머리에는 틀림없이 페미니즘에대한 비판으로 읽을 만한 구절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선입견 없이 읽어보면 거기서 비판되고 있는것은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임을알게 될 것이다. 편의주의나 개인적인 약점의 책임전가에 내걸고 있는 그 깃발을 나는 비판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 오랫동안이 세상이 남성을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반페미니즘의 논리는 시대 착오적인 구호로 몰려 마땅하다.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다만그것이 지나쳤을 때뿐이다. 한쪽으로 기운 배를 바로세우는 길은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지 모든 짐을 다른쪽에다 옮기는데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첫회 발표 때부터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은 시비 붙이기 좋아하는 대중매체의 선동과 뭔가 요란스러운 일에 편승하기좋아하는 얼치기 논객들의 합작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로서 내가 고민해야 할 일은 그런과장되고 쓸데없이 격양된 논의로부터 나를 방어하는것이 아니었다. 세련된 현대 소설의 표현 양식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얘기해야 하는 점과 요즘 사람들의 근거 없는 반의고적 경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얘기 방식이란 사건의 전개를축으로 얘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과 배경과 분위기를 통해 사건의 전개를 추상케 하는우리의 전통적인 얘기 방식을 말한다. 사건 서술은 한줌도 되지 않고 현대 소설론의 관점에서 보면 부차적인요소만 장황한 그런 얘기 방식을 어떻게받아들일지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의 반의고적 경향, 특히 양반 문화에대한 적의에 대해 그 근거 없고 비뚤어짐을 따지자면따로이 책 한 권이 필요 할 정도다. 그것은 이 나라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는일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 정체성의 부인이 된다.그렇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이 시대의 엄연한 추세이다. 그런데 그 정면을 돌파해야 한 주제를 다루는 게어찌 작가에게 주저스럽지 않겠는가.
거기에다 이 작품의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 정부인장씨가 내게 직계 조상이 된다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자칫하면 타성들에게는 집안 자랑, 양반자랑으로 오해받고 문중 사람들에는 불경의 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펴내는 지금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일은 또 졸속과 불성실로 원고를 마감한 일이다. 갈수록 큰 것과 작은 것, 급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하지 못해 공연히 몸만 바쁘고 이룸은 적으니 절로한탄이 난다. 다만 종아리를 걷고 꾸짖음과 가르침의매를 기다릴 뿐이다.
1997 년 3월
이문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6) 英陽 이시명 집안
상수리열매로 끓인 죽, 유랑민 200명에 매일 먹여
‘救貧의 철학’실천…병자호란 치욕에 평생 은둔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풍광 좋기로 소문난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급 주택들은 평지가 아닌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올라간다. 서양인들이 언덕 위쪽의 집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전망의 높이와 통찰력은 비례하게 마련이다. 로마의 고택이나 유럽의 주택이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선 전망이 좋은 위치를 ‘○○대’(臺)라고 부른다. 대(臺)는 보통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나 바위 절벽 위를 지칭한다. 조선 선비들이 언덕 위의 대를 좋아했던 이유는 만물(萬物)을 정관(靜觀·고요하게 관찰함)할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의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 종택을 비롯한 재령 이씨 고택들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9~10m 높이의 화강암 암반 층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석계 이시명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수모를 당하자, 산간 벽지로 은둔하여 처사로서 일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가 경북 영해의 본가에서 산간 벽지였던 영양의 석보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40년부터이다.

원리리에는 대략 100여m의 간격을 두고 4개의 대(臺)가 일렬로 자리잡고 있었다. 동대(東臺)·세심대(洗心臺)·낙기대(樂飢臺)·서대(西臺)가 바로 그러하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낙기대(樂飢臺)’다. 풍수적으로 볼 때 이 동네의 지기(地氣)는 낙기대쪽에 뭉쳐있다. 조선 시대 마을 풍수에서 보면 지기가 뭉쳐있는 곳에 그 동네의 가장 중심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낙기대는 지맥도 그렇지만 이름도 독특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 있는 수십 개의 이름난 대에 올라가 보았지만,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란 낙기대 이름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 이웃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긴 ‘낙기대 ’.주변 상수리 나무에서 열매를 거둬,춘궁기때 비상식량으로 활용했다.
/이재우기자
낙기대는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만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대응은 낙기대 주변의 상수리 나무에서 찾아볼 수있다.

낙기대 주변에는 대략 50여 그루의 상수리 나무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수령이 300~400년된 것들이다. 집안 어른인 이병균(72)씨에게 “왜 유달리 상수리 나무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기민 먹이’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기민(飢民)이란 ‘굶주린 백성’이다. 재령 이씨들은 상수리 열매를 통상 ‘기민 먹이’라고 부르고, 상수리 나무를 ‘꿀밤나무’라고 부른다.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가 닥쳐서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낙기대 위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낙기대와 상수리나무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보릿고개에 접어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비상수단으로 그동안 모아 놓은 상수리, 도토리 열매를 갈아서 분말을 만든다. 그런 다음, 커다란 솥 단지를 걸어 놓고 이 분말가루에 물을 붓고 죽을 끓였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굶어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담당하던 집안이 재령 이씨들이었다. 이씨 집안에서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이면 이곳 원리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배고픈 사람들도 모두 와서 먹었다. 보통 하루에 끓이는 죽의 양이 2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수리 죽으로 배를 채운 유랑민들은 “다른 집의 쌀죽보다 이씨 집의 상수리가 더 달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였던 그 성의를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물론 사라졌지만 광복 이전까지도 기민들에게 상수리 죽을 끓여 주던 전통은 살아있었다. 그 전통은 400년 전 장씨 부인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장씨 부인은 바로 입향조인 이시명의 부인이다. 영남 유학의 거봉이었던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로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 특별한 훈도란 남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과 유교적 교양을 전수받았음을 말한다. 그 결과가 굶어죽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나타났고, 보릿고개를 당해서 도토리 죽을 끓여서 같이 먹는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체적인 살림의 운영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비중이 더 크게 마련이다. 안방에서 틀어 버리면 곤란한 법인데, 이 집안의 경우 안방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민구호 사업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 지붕 끝에 마감재를 쓰지 않은 재령 이씨 고택.사치를 경계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안의 재산은 어떠했는가. 16세기 중반 이시명의 조부가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노비가 700명 가량 있었다고 나온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700명이 모두 노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비라기 보다는 라틴어의 ‘클리엔테스’로 개념으로 보는 게 적당할 성싶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의 클리엔테스란 특정한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으로,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가신(家臣) 개념에 가깝다. 가신은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노비는 아니다. 기민 먹이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700명이란 숫자는 이씨 집안에서 최소한의 호구를 책임을 져야 하는 클리엔테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반이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다.

원리리 이씨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한 가지 어색한 부분이 발견된다. 석계종택, 석계서당을 비롯한 기와집들의 지붕 끝에 마감재로 사용하는 앙와(仰瓦)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앙와로 마감을 하지 않으니 기와지붕의 양쪽 끝이 매우 어설퍼 보인다. 집을 짓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을 지을 때 앙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수백년 내려오는 재령 이씨들의 전통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 때문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완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미완이란 겸손을 뜻하기도 한다. 앙와를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사치스럽게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전통 기와지붕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앙와이기도 하다. 궁궐 지붕의 끝에 설치하는 치미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기도 한데, 화려하고 맵시 좋은 앙와로 지붕을 단장하는 것은 선비정신에 어긋난다고 간주한 것이다. 낙기대와 앙와 없는 지붕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 

보고픈 아부지,
.
그리운 어무이,
 
 
 
우린...2남3녀,  모두가 다섯이다.
예전부터 우린...가칭...[독수리오형제]라 불렀는데....
요즘에사 누가 기밀을 누설했는지 리바이벌된 독수리오형제 야그가 다시금 
떠 돌기 시작한다.
우린 만나면 늘 싸운다.
형제간에 싸움질이냐고? 오우 노!!
각기 하나씩 델꼬 들어 온 [非 독수리 오형제派]랑 곧잘 싸운다.
저들이 [독수리오형제]알기를 물로보고 깔고 뭉개려든다.
서로 자기네 패꺼리가 더 잘나고 똑또카다고....
맨날 해봐야 승산없는 싸움질을....흐~~
 
.
지난 달, 다 모여서 각자 집에 있는 사진들 모두 내어 놓기로했다.
속속,,,발굴되어 햇빛을 보러 나오는 사진들~~
세상 차암 좋아졌다.
집집마다 디카로 찍어서 홈페지로 올리니..
곰팡내 나는 사진은 아직도 무궁무진한데...
이제 독수리오형제도 옛사진의 추억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미니홈페이지가...이젠..독수리 오형제들의 후손들로 설왕설래한다.
자판도 못 두들기는 독수리 3代째인 넘이 ...이모, 외삼촌...
할아버지...이모할머니 홈페이지까지 들어와선 '어바바브'라며 찍더니
어느새 제대로 찍기도 하는...[바보]라는 두 글자..
독수리오형제 차세대들은...분명 지구를 지키는 사이버특공대 후손들이다.
마악...우주로 뻗쳐나가는...
 
현재 상황판 스코어는
열심히 알까서 새끼를 키우거나
(그 손자 독수리 대표 하나가 바보라 자판을 두둘기는..)
짝을 찾아 혈안이 돼있다거나
아직까지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찧고 있는 넘들....넘들,
도합
1번째 (여) 독수리 /3 (여1 남 2)  독수리손자세대(여2 남1)
2번째 (여) 독수리/3 (여1 남 2)
3번째 (남) 독수리/2 (남 2)
4번째 (여) 독수리/2 (여1 남 1)
5번째 (남) 독수리/2 (남 2)
웃기는 게...
막내는 한 방에 스트라잌이다. 쌍둥이,
울엄니가 그리도 아들 타령이시더니..
남동생들은 아들만 둘 다 두었다.
 
울엄마 아부지..두 분이 만나 독수리 오형제를 낳으시더니
곧,,,독수리오형제를 따블로 불리시고
딱...한-타스의 손자 독수리들을,
곧이어 
제짝을 다 데불고 오면 
24?
우와
국력은 인력이다.
우리 모두 힘껏 많이 나읍시다!! 
(구래야 지구를 슈파슈파 지키지요~)
 
슈파 슈파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 소리 독수리 5형제 
쳐부수자 알렉터. 우주의 악마를.
불새가 되어서 싸우는 우리 형제
태양이 빛나는 지구를 지켜라.
정의의 특공대 독수리 5형제!
초록빛 대지의 지구를 지켜라
하늘을 날으는 독수리 5형제!
우주를 누비는 독수리 5형제!
윗 사진은 막내 여동생에게서 나온 사진인데...지는 이 사진이 젤 좋단다.
세 자매가 같은 간땅꾸를 입은 모습이.....크흐~~
 
사진에서 아직 막내 독수리는 요람에서 잠자는 중이다.
너무 애기라...늘 빠져있는 것 같다.
 
우리 아부지는 내가 스무살이 훨 넘도록도

날 무릎에 뉘이시고 귀지를 후벼주시던 분이셨다.

난 아부지 식사머리에 드러누워 신문을 읽는 처녀로 자랐다.

그 게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그냥 그 게 정상인 줄로만 알았다.

울 아부지

차츰 연세 들어가시면서

그 표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정감이 있는지...

중학교 때...난 [노틀담의 꼽추] 영화를 보고 영화속 꼽추에게 연민을 느끼고 

집에 와서 가만히 보니..영낙없는 울 아버지 얼굴이랑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난 안소니퀸을 무지 좋아한다.
그 표정에는 사랑하는 내 아버지의 사랑이..
그 모습이 녹아있다.
/남들이야 뭐라든...내가 그렇다면 그런거다 모....

.

 

 

우리 어머니는 

유난히 헤엄을 잘 치셨는데....

그 덕에 우린 모두 수영복을 차려입고 여름만 되면 바다로 자주 나갔다.

흐~~ 물모자를 쓰긴 썼는데...한껏 뒤로 제껴 썼으니....

참참...늘 튜브를 타고 노느라...오히려 바닷가에 살면서도 맥주병이었다.

우리 모두가..../믿기지 않는 사실

 

[바다 가까이 사는 우린 맥주병이고...강 가까이 자라시던 부모님은 수영선수시고...]

 

 

.

 

 

나는 우량아였다한다.

이미 뱃속서 부터~~

그래서 중년부인들이...굵어진 허리로 모여서서

[난 처녀적 안이랬어요~~] 그 소리 차마 듣기 민망해서~~

[난..지금이 젤루 날씬하다 모..]로 멘트를 바꿔버렸다. 오래전에,

거..아줌마들...그 소리 좀 이제 그만합시다.

 

★(별표, 중요하니께)

여기서 내 자랑하나 하고 넘어가야지~~

우리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셨다.

너무 그러시니 오히려 천성이 찬 어머니는 냉냉하셨고

맨위로 (맏딸)언니 하나가 더 있었다는데...

아파서 실패보시고, 또 태어난 언니는 천성으로 몸이 약했다 한다.

그 때 구하기 힘든 마이신인지...페니시린인지? 암튼

아픈 언니를 그렇게 또 겨우 구해내시고...

 

나를 잉태하신 어무이...

태몽이 대단터라시며...아들일 것이라는 착각하에

나는 뱃속서 부터 보약을 얻어 마시는 행복하고 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단다,

(그러니..내게 우찌 다이어트가 멕히냐고요~~)

발길질도 우찌나 세던지...아들에 아들이라는 확신만...

그 덕에 나는 목욕통(나무 조각을 돌려서 엮어 만든)도 새 것,

호사는 다 부렸다한다.

 

그래서 태어난 아인 섭섭하게도 그 걸(?) 두고 나오더란다.

언니가 애기일 적에는얼마나 징징짜고 보채고 극성인지....

엄마가 힘드셨다는데...

나는 배만 부르면 울지도 않더란다.

 

지금도 누가 내 다리를 굵은 무시다리라고 나무라면

난 일격에 가하는 한 소리를....

[야~~ 그러지 마러, 한 남자가 이 다리를 월매나 사랑한줄 아냐?]

울 아부지는 건강한 내 다리를 참 이뻐라 하셨다.

[치마 짧게 입혀라]가 당부셨다한다.

[큰애는 다리가 삐적말라 약하니 좀 길게 입히고..

요조는 다리가 통통하니..짧게 입혀라~]

얼마나 건강한 게 한이 맺히셨으면....

유달리 건강해서 아버지의 이쁨을 많이 받은 내가

터억하니 고추밭에 터까지 팔아놨으니...

 

초딩때 아버진 심심하시면 말을 씹히셨다.

[요조야 요조야...니가 맨 처음 한 말이 뭐게?]

[음마 아니믄 아빠겠지...]

[ㅎㅎㅎ~~ 마시따(맛있다)라는 말부터 하던데....]

힛~

얼마나 돼지처름 잘 먹었으면...

아마도 이 게 앞으로 엄마의 요리편지 나부랭이나 쓸려고

맛으로 승부한 대단한 여걸 이요조의 시원이었음을...

음핫핫하 ㅎ~~~

 

아들일거라는 확신 때문에 보수동(지금의 부용동)사거리

꽤나 이름난 조산소(그 당시로 치면 병원)에 가서 나았는데...

병원에서 난리도 아니었다네...이런 건강한 아인 첨 본다고,

출산 후..운듯 만듯 하더니...쭈욱 쭉...소리가 나서 보니까...

글쎄 제 주먹을 쭐떡 쭐떡~ 빨고 있더라는..../믿거나 말거나~~전설이올시다.

엄마등에 엎혀서 자다가 내려졌는지...부수수한 모습,

아직 뛰뚱이는 애긴데도 언니만한 체격,

구래선지 아직까지도 너부데데한 큰바위얼굴~~

 

.

사진 뒤엔 아버지가 만년필로 쓰신 글씨가...

용두산공원, 요조 8세 ..경호......단기.......4月

.

옛날 유모차....木馬

막내 여동생

우리 형제들이 번갈아 자주 끌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언니 집에도 사진이 꽤나 있던데....

이달 말에 부산, 내려간김에 내가 챙겨와야지~~

참..잊은 것 또 하나,

저희 아버님 함자는 이, 봉짜 현짜시고

저희 어무이  함자는 배, 대짜 금짜시다.

독수리 10형제가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함짜에서

모임회의 명칭을 따 오기가 좀 머시기했다.

 

[봉대회?][봉금회?]

[현금회??][현대회?]

[대봉회] 그래 이 걸로 하자....

우먼파워시대니...우리 어무이도 아버지 앞에 함자로 서시누나~~

어무이요~ 아부지요~~[대봉회] 우야든동...사이좋게 잘 살겠씸더~~
걱정마시이쏘~~
 
이질(姨姪)들,
.
보면 볼수록 기분 좋아지는 사진! 
언니네 아이들
막내는 코도 이마도 깨 먹고 뭐가 좋은지...
둘은 결혼했고 막내는 낼 모레 상견례가....
오지랖 넓은 이모인..나도 참석이당~~

[야들아 뭐가 그리도 존노?]

 
하늘 / 박두진 詩 서유석 曲 양희은 & 서유석 노래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온몸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에 
호흡 호흡따가운 햇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의 내가 능금처럼 내마음 익어요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온몸이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에호흡 호흡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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