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재령 이씨 도토리 죽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 조용헌
우리나라에서 도토리 죽으로 가장 유명한 집안이 바로 영덕군 영해에서 살았던 재령 이씨(載寧 李氏) 집안이다. 지난번 칼럼에 나간 영양군 석보에 있는 400년 된 참나무 이야기를 읽고 소설가 정동주(61) 선생이 이 집안 도토리 죽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써야 한다!'고 필자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영해의 재령 이씨들이 1년 동안 수확한 도토리의 양이 자그마치 200가마 분량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두 가마도 아니고 어떻게 도토리를 200가마씩이나 수확을 했단 말인가!

이씨들은 당시 '마당 6000석'을 하던 부자였다.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창고의 쌀은 제외하고 추수가 되면 본가의 마당에 쌓인 쌀이 6000석이었다는 의미이다. 영남에서 5위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도토리 죽을 끓여 주었다. 배고픈 이웃을 돕는 것이 양반이 해야 할 처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경상도는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도토리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집안에서는 하인 수백 명을 시켜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모으도록 하였다. 그 분량이 1년에 200가마였다.

영해의 재령 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의 안주인인 진성 이씨 부인과 그 셋째 며느리인 장 부인(張桂香)이 중심이 되어 대문 밖의 은행나무 밑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하루에 평균 300명분의 도토리 죽을 쑤었다고 한다. 이 죽을 먹으려고 경북 북부 일대의 기민(饑民)들이 몰려들었다. '이씨 집에 가면 죽을 준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에 700명분의 죽을 끓여야 할 정도였다.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

영양군 석보로 분가를 한 석계 이시명과 장 부인은 이사오자마자 도토리나무부터 심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도토리 죽을 끓여 댔고, 선대의 그 공덕으로 재령 이씨 후손들이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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