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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헌
이씨들은 당시 '마당 6000석'을 하던 부자였다.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창고의 쌀은 제외하고 추수가 되면 본가의 마당에 쌓인 쌀이 6000석이었다는 의미이다. 영남에서 5위 안에 들던 부잣집이었던 이 집에서는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도토리 죽을 끓여 주었다. 배고픈 이웃을 돕는 것이 양반이 해야 할 처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경상도는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도토리를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이 집안에서는 하인 수백 명을 시켜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모으도록 하였다. 그 분량이 1년에 200가마였다.
영해의 재령 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의 안주인인 진성 이씨 부인과 그 셋째 며느리인 장 부인(張桂香)이 중심이 되어 대문 밖의 은행나무 밑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하루에 평균 300명분의 도토리 죽을 쑤었다고 한다. 이 죽을 먹으려고 경북 북부 일대의 기민(饑民)들이 몰려들었다. '이씨 집에 가면 죽을 준다'는 소문이 일대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에 700명분의 죽을 끓여야 할 정도였다. 도토리를 만지다가 고부간에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죽을 끓였다.
영양군 석보로 분가를 한 석계 이시명과 장 부인은 이사오자마자 도토리나무부터 심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도토리 죽을 끓여 댔고, 선대의 그 공덕으로 재령 이씨 후손들이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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