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JECT   貞夫人 安東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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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두들마을)

[원리 쉼터]

정부인 안동 장씨(1598∼1680)는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속에서 총기 있던 소녀는 10여세의 어린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敬身吟(몸가짐을 조심하다)> <蕭蕭吟(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

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약포 정탁의 3子/초서의 대가)은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

두들마을은 1640년 石溪(석계) 李時明(이시명 1590~1674)선생이 丙子胡亂(병자호란)을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조선 고종 때 광제원(廣濟院)을 이곳에다 세웠다.  

선생은 석계위에 집을 짓고 호를 석계라 하고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정부인 장씨도 선생의 학명 못 지 않게 효행과 부덕 ,학문 예술, 등을 겸비한 학자로 세인이 신사임당과 동등한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정부인 장씨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녀는 나이 19세에 아버지의 제자 석계 이시명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 김씨와 1남1녀를 둔 27세의 홀아비였다.
남편과는 8살 차이, 게다가 재취로 들어간 자리였으나,
장씨 부인은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다.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업고 다니는 열성을 다해 키웠다한다.

이후 그녀는 6남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완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루는 동네잔치로 이웃들이 모두 모여 기생을 부르고 음악을 베푸는가 하면, 처용무를 펼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임신 중이던 그녀는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접한 친정아버지는 "너는 내게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구나"라며 탄복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택이었을까,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3녀를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 중에서도 둘째 존재 휘일, 셋째 갈암 현일, 넷째 숭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시댁으로부터 200여리 떨어진 친정엔 돌보아 드릴 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는 부모가 계셔서, 무남독녀인 장씨 부인은 친정에 계신 부모가 항상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환갑이 되던 해 한살 연상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차마 떨어질 수 없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 하에 친정에 2년을 머물면서 아버지를 모셨으며, 또한 계모를 맞게 하여 친정의 대를 이었다.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계모와 4남매를 시집으로 데려와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리고 시집 근처에 외가의 사당을 짓고 조상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 살아 계실 제, 아들 상일·휘일·현일 삼형제를 외조부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배려로 슬하의 아들 7형제 모두가 문명으로 현달해, 안릉가 '7룡'으로 알려졌다.

특히 셋째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영남을 대표하는 사림으로 천거되어, 1692년(숙종 18)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창이던 현종∼숙종 연간(17세기 중, 후반)에 남인의 영수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이현일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을 울리게 된 상황에서, 그녀는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라며 늘 자식들의 사람됨을 훈육 하였다.

장씨는 혼담이 오간 18세 이후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서화며 글씨들을 모두 접었다.
10대 초반에 이미 상당한 재능을 드러냈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붓을 잡은 적이 없었다.
손자 온과 재에게 학문을 권하는 시를 쓴 67세 때까지 그녀는 시를 쓰지 않았다.
남편 이시명도 그녀의 나이 46세가 되어서야 어린 시절의 시작 '聖人吟(성인을 읊다)'와 '소소한 빗소리' 등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작품에 감복한 남편 이시명은 詩들을 모아 단아한 행서체로 '傳家寶帖(전가보첩)'이라 이름 붙였고, 둘째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일곱 아들을 상징하는 여덟 마리의 용을 그곳에 수놓았다.  

가문에서 전승되는 八龍繡帖(팔룡수첩)'이라는 서책이 이것이라한다.
청담선사가 애송했다는 아래‘蕭蕭吟(소소음)은 불과 13세 때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투시한 禪詩(선시)의 깊이로 느껴진다.


蕭蕭吟(소소음)


창 밖에서 보슬보슬 비가 나리니

보슬보슬 빗소리 자연스럽네

자연스런 빗소리 듣고 있으니

내 마음 또한 마냥 자연스럽네



聖人吟(성인을 읊다)



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서

성인의 모습 뵈옵지 못했으나

성인의 말씀 들을 수 있어

성인의 마음 쓰심을 넉넉히 알리



敬身吟

이 내 몸은 부모님께서 주신 몸인데

감히 이 몸을 공경하지 않을 손가

이내 몸을 욕되게 한다면

이것은 어버이 몸을 욕되게 함이로다



'鶴髮詩 三章(학발시 3장)'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자식은 멀리 만리 되는 수(戍)자리에 갔구나

만리 밖 수(戍)자리의 내 아들

어느 달에 오려는가               * 수(戍)자리:국경을 지키는 일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지쳐 누었는데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간다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

무심한 하늘은 막막하여 대답조차 없구나




백발 늙은이가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니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네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아들이 옷자락을 끊고 떠나간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부인은 다른 여성들의 글과는 달리 철학적 사색과 학문에 대한 감회를 표현했다.
서민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슬픔과 고단한 삶을 노래했다.  

그 당시 양반집 출신의 많은 여류 시인들의 시적 주제는 자연, 효심, 님에 대한 그리움, 옛날의 회한 등. 주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이에 비춰 볼 때 인류애를 희구하는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鶴髮詩 三章(학발시 3장)'은 이같은 인간미를 보게 된다.

학의 털과 같이 뽀얗게 센 머리의 할머니를 읊은 3장의 詩라는 의미다.
열다섯살에 아들과 남편을 변방에 보낸, 이웃 동네의 어느 가난한 집을 다녀온 후 지은 이 시는 사언(四言)의 고시(古詩)로 "장부인 實紀(실기)" 마지막 부분에 초서로 쓰여 있다.  

내용만 보면 그 나이에 지은 詩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초들의 처절함이 알알이 배어 있다.
시를 지은 동기부터 갸륵하기 그지없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겨 시어머니를 모시지만 만리 먼 변방에 군역 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이 없다.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깜박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80이 넘은 애절한 시어머니를 보고 나도 슬퍼 이 시를 짓는다.”

그 내용은 지금도 보는 이의 애를 끊는다.

기다림에 지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삶.
불쌍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환영을 찾아 병든 몸을 이끌고 찢어진 속옷을 펄럭이며 아들의 환영을 찾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를 쫓아 뛰어나가 붙잡고 함께 운다.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며 눈물과 한숨 속에서 몸부림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貞夫人 安東 張氏

 

 

 

 


 

한국 음식학의 기초를 놓은 貞夫人. 안동 장씨

 

 

 

 

 

 

조선시대 각각의 음식에 대한 조리과정과 음식을 종류별로 체계화시켜 펴내 장씨는 330년 전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요리책 저자이다. 안동 양반집 정부인의 삶 속에서 요리는 어떠한 가치였을까. 그녀를 통해 조선시대 식생활문화와 여인으로써의 그녀의 삶을 엿본다.



“녹두 껍질을 벗기고 뉘 없이 되게 갈아서
기름을 잠기지 않을 만큼 붓고 끓여라.
간 녹두를 조금 떠놓고,
껍질 벗긴 팥을 꿀에 반죽하여 소를 넣어라.
그 위에 녹두 간 것을 덮어 기름종이 빛처럼 구워야 맛이 좋다.”



이 글은 정부인 안동 장씨張氏가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에서 빈대떡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146가지의 조선시대 음식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을 지은 장씨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인에게 조선시대의 어머니로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보통 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년이나 한석봉의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 중의 한 사람으로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1598∼1680년를 빠뜨릴 수 없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어떤 사람일까. 가족과 이웃에 미친 장씨 부인의 행실과 인품, 탁월한 어머니로서의 역할, 뛰어난 예술적 재능, 그리고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등 그녀가 이룩한 다양한 업적을 알게 되면, 그녀가 왜 조선의 어머니로 기억되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 미친 자애로움


 

 

 

정부인 장씨는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1598년에 태어났다. 19세에 재령 이씨 집안의 이시명과 혼인하였는데, 장씨 부인이 살았던 집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두들 마을)의 석계고택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시명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온 장씨는 육남이녀를 두었는데, 전처의 자식까지 거두어 모두 칠남삼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다.

 

 

장씨 소생의 둘째 아들 현일은 미수 허목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셋째 숭일은 현감을 지냈으니, 두들 마을의 재령 이씨 가문에서 장씨 부인에게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마을 앞에 유적비를 세우는 까닭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집안을 이렇게 크게 일으켰으니 장씨 부인이 남자였다면 가히 중시조 대접은 받았을 듯하다.

 

 


정부인 안동 장씨 실기’에는 그녀의 인품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왜놈이 일으킨 임진왜란 병화로 백성들의 기근이 참혹할 때, 가마솥을 마당에 내걸어 놓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니 원근에 의탁 없는 가련한 인생들이 부지기수로 모여들어 조석에 이백여 권구眷口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 때 행랑에 있는 한 양반이 향사 모임에 가려 하나 도포가 없어서 가지 못하자 이시명이 입었던 옷을 벗어 주려 하였다. 장씨 부인이 가로대 “남을 주면 새 옷을 주어야지 어찌 입던 헌 옷을 주리오” 하면서 갈무려 두었던 새 옷을 주면서, “이 옷을 다시는 찾지 아니할 것이오”라 하였다.

 

 

집안의 비복들이 부인의 어진 마음씨에 저절로 감화되어 마음으로 복종하니 동네의 다른 집 하인들이 “우리 몸이 이렇게 세상에 나서 저 댁의 노복이 되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 늙고 의탁 없는 이와 어린 고아를 구제하여 평생 유덕함이 이러하니 사람들이 왕왕이 지성으로 축수하는 말이, “이 아기씨님, 수복 무강하옵소서. 우리 몸이 죽어 귀신이 되어도 이 은덕을 한 번 갚기 소원이라” 하였다.

 

 



내로라하는 문학과 예술적 재능


 

 

 

'장씨 부인은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준다. 장씨 부인이 지은 한시와 그것의 유묵들이 몇 점 전하는데 부인이 열다섯 살에 지은 ‘학발시’鶴髮詩 등이 있다. 부인이 어렸을 때 80세의 이웃 할머니가 자식을 수자리에 보내고 해포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숨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노파의 슬픈 사연을 시로 지었으니 이것이 곧 학발시이다.




鶴髮臥病 行者萬里

          흰머리 늙은이 병들어 누웠는데 멀리 간 자식은 만 리 밖에 있구나.
行者萬里 曷月歸矣

         멀리 가 만 리 밖에 있으니 달이 차도 어찌 돌아오리.
鶴髮抱病 西山日迫

   흰머리 늙은이 병을 안고 있으니 저무는 인생의 해는 서산으로 달려가네.
祝手于天 天何漠漠

           하늘에 축수하여 빌어 보건만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한고.
鶴髮扶病 或起或?

           흰머리 늙은이 병든 몸을 붙들고 일어나다가 또 넘어지는구나.
今尙如斯 絶?何苦

           지금 오히려 이와 같으니 헤어져 사는 것이 어찌 괴롭지 않으리.

 

 



군대 간 아들의 무사 귀향을 기다리는 백발 노파의 안타까운 모습이 열다섯 살 처녀의 눈에 애틋하게 비쳐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했으니 이웃에 대한 부인의 자애로운 마음은 천성이었던가 보다. 이 자애로운 천품이 팔십 평생 동안 가족과 이웃에게 두루 미쳤으니 그 훈화의 넓고 깊음이 어떠하였겠는가. 시구에 녹아 있는 연민과 애정은 부인의 익숙한 붓놀림으로 더욱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부인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학발시의 글씨가 예사롭지 아니하다. 빼어난 기품에 유연한 부드러움이 획을 따라 미끄러지듯 흐른다.

 

 



한국 음식학의 기초를 놓다 - <음식디미방> 저술

 

 


 

 

'장씨 부인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한국 음식 연구의 토대가 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흘러간 시간 속에 묻혀 버렸지만, <음식디미방>은 현대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원천 자료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1670년경에 저술된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쓴 조선 최고最古의 음식조리서로서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부인은 당시의 음식 조리법을 대대손손 전하려는 뜻에서, 노년의 침침한 눈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동안 익혀온 각종 조리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만두법, 상화법, 빈자법, 박산법 등 약 146개 항목에 달하는 각종 음식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붕어찜, 족탕법, 연계찜, 개장국, 누른 개 삶는 법 등 흥미로운 조리법도 나온다. 그리하여 한국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오늘날 전통 한식을 연구하고 옛 음식을 복원하는 전문가들은 이 책의 도움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음식디미방>의 권말에는 부인이 직접 쓴 다음과 같은 필사기가 씌어 있다.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라.”

 

 



노년의 어두운 눈으로 간신히 이 책을 썼으니 그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책은 본댁에 간수하여 오래 전하라고 당부한 내용이다. 이 당부가 후손들에 의해 그대로 실천되어서 오늘날까지 온전한 모습 그대로 경북대학교 고서실에 보존되어 있고, 그 영인본이 여러 번 간행되어 한국 음식학의 고전이 되었다. 부인의 멀리 내다보는 생각과 선조가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이 책을 지켜 온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서로 감응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 글_ 백두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_ 백두현, 경북영양군청 문화관광과

게시일 2008-07-29 09: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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