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6) 英陽 이시명 집안
상수리열매로 끓인 죽, 유랑민 200명에 매일 먹여
‘救貧의 철학’실천…병자호란 치욕에 평생 은둔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풍광 좋기로 소문난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급 주택들은 평지가 아닌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올라간다. 서양인들이 언덕 위쪽의 집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전망의 높이와 통찰력은 비례하게 마련이다. 로마의 고택이나 유럽의 주택이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선 전망이 좋은 위치를 ‘○○대’(臺)라고 부른다. 대(臺)는 보통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나 바위 절벽 위를 지칭한다. 조선 선비들이 언덕 위의 대를 좋아했던 이유는 만물(萬物)을 정관(靜觀·고요하게 관찰함)할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의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 종택을 비롯한 재령 이씨 고택들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9~10m 높이의 화강암 암반 층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석계 이시명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수모를 당하자, 산간 벽지로 은둔하여 처사로서 일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가 경북 영해의 본가에서 산간 벽지였던 영양의 석보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40년부터이다.

원리리에는 대략 100여m의 간격을 두고 4개의 대(臺)가 일렬로 자리잡고 있었다. 동대(東臺)·세심대(洗心臺)·낙기대(樂飢臺)·서대(西臺)가 바로 그러하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낙기대(樂飢臺)’다. 풍수적으로 볼 때 이 동네의 지기(地氣)는 낙기대쪽에 뭉쳐있다. 조선 시대 마을 풍수에서 보면 지기가 뭉쳐있는 곳에 그 동네의 가장 중심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낙기대는 지맥도 그렇지만 이름도 독특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 있는 수십 개의 이름난 대에 올라가 보았지만,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란 낙기대 이름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 이웃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긴 ‘낙기대 ’.주변 상수리 나무에서 열매를 거둬,춘궁기때 비상식량으로 활용했다.
/이재우기자
낙기대는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만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대응은 낙기대 주변의 상수리 나무에서 찾아볼 수있다.

낙기대 주변에는 대략 50여 그루의 상수리 나무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수령이 300~400년된 것들이다. 집안 어른인 이병균(72)씨에게 “왜 유달리 상수리 나무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기민 먹이’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기민(飢民)이란 ‘굶주린 백성’이다. 재령 이씨들은 상수리 열매를 통상 ‘기민 먹이’라고 부르고, 상수리 나무를 ‘꿀밤나무’라고 부른다.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가 닥쳐서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낙기대 위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낙기대와 상수리나무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보릿고개에 접어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비상수단으로 그동안 모아 놓은 상수리, 도토리 열매를 갈아서 분말을 만든다. 그런 다음, 커다란 솥 단지를 걸어 놓고 이 분말가루에 물을 붓고 죽을 끓였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굶어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담당하던 집안이 재령 이씨들이었다. 이씨 집안에서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이면 이곳 원리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배고픈 사람들도 모두 와서 먹었다. 보통 하루에 끓이는 죽의 양이 2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수리 죽으로 배를 채운 유랑민들은 “다른 집의 쌀죽보다 이씨 집의 상수리가 더 달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였던 그 성의를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물론 사라졌지만 광복 이전까지도 기민들에게 상수리 죽을 끓여 주던 전통은 살아있었다. 그 전통은 400년 전 장씨 부인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장씨 부인은 바로 입향조인 이시명의 부인이다. 영남 유학의 거봉이었던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로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 특별한 훈도란 남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과 유교적 교양을 전수받았음을 말한다. 그 결과가 굶어죽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나타났고, 보릿고개를 당해서 도토리 죽을 끓여서 같이 먹는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체적인 살림의 운영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비중이 더 크게 마련이다. 안방에서 틀어 버리면 곤란한 법인데, 이 집안의 경우 안방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민구호 사업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 지붕 끝에 마감재를 쓰지 않은 재령 이씨 고택.사치를 경계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안의 재산은 어떠했는가. 16세기 중반 이시명의 조부가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노비가 700명 가량 있었다고 나온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700명이 모두 노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비라기 보다는 라틴어의 ‘클리엔테스’로 개념으로 보는 게 적당할 성싶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의 클리엔테스란 특정한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으로,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가신(家臣) 개념에 가깝다. 가신은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노비는 아니다. 기민 먹이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700명이란 숫자는 이씨 집안에서 최소한의 호구를 책임을 져야 하는 클리엔테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반이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다.

원리리 이씨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한 가지 어색한 부분이 발견된다. 석계종택, 석계서당을 비롯한 기와집들의 지붕 끝에 마감재로 사용하는 앙와(仰瓦)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앙와로 마감을 하지 않으니 기와지붕의 양쪽 끝이 매우 어설퍼 보인다. 집을 짓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을 지을 때 앙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수백년 내려오는 재령 이씨들의 전통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 때문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완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미완이란 겸손을 뜻하기도 한다. 앙와를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사치스럽게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전통 기와지붕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앙와이기도 하다. 궁궐 지붕의 끝에 설치하는 치미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기도 한데, 화려하고 맵시 좋은 앙와로 지붕을 단장하는 것은 선비정신에 어긋난다고 간주한 것이다. 낙기대와 앙와 없는 지붕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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