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이몽룡 생가

1610년경 건립되었다는 창녕 성씨 '성이성'의 생가에 들렀다. 지금은 그의 대 후손 성원기(61세)씨가 관리하고 있었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일대가  사적 관광지로 개발들어갔다고 한다.

도로에서 250미터 시야에 환히 들어오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번 가을에 우연찮게도 연이어 두 번을 방문할 행운의 기회가 주어졌다. 

 

왜? 이몽룡이라면 이도령이지~ 성도령일까?

TV프로그램 역사스페셜 에서도 이몽룡 실존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다뤄진 적이 있었다.

예전 양반가의 자제가 기생과 염문이 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겨 성도령은 이도령으로 춘향이는 성춘향으로 각기(소설에서)

성씨가 바뀌었을 거란 추측이다.

 

 

가평리 계서당(溪西堂)


  이곳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위치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이 1610년

(또다른 문헌에는 1613년)에 건립하여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팔작 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간 문으로 연이어져 있다. 
 

현재는 정자 1동과 방안간 1동, 강당 1동과 일부 담장 등은 허물어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1984. 1. 10) 관리되고 있다.

 

성이성 실존인물에 대한 문헌사료.

http://tour.bonghwa.go.kr/heritage/heritage_07.html 

 

 대문으로 들어서니

 '계서당' 이 반긴다.

 

▲ 팔작 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간 문으로 연이어져 있다. 

 

▲ 왼쪽이 사랑채와 중간문, 오른쪽이 계서당

계서당은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 곳으로 전해진다.

좌측 열려있는 중간문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나오고, 

중간문으로 들어가면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 안채 마루의 모습이다.

 

 

▼ 성이성 사당(祠堂)


  성이성 선생의 강직 개결(介潔), 소신과 의연(毅然)하였던 청백리 성이성 선생을 추모 흠모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 계서당 건물의 정면향 우측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후손 성원기(61)씨가 감사하게도 사당을 개방해주셨다.

 

 성이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성, 부인의 위패

 

'성이성' 즉 '성도령'의 부인은 '봉성 금씨'로

품계가 숙부인으로 봉해졌나 보다. 

 사당의 문을 열고 계서당으로 다시 나왔다.

 

 그런데....이 건 뭘까?

아주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깜짝놀랐다.

한옥이란 원래 화장실을 불결하다하여 멀리 뚝 떨어져 집 귀퉁이에

숨겨져 있거늘.....어찌된 이유ㄴ지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계서당 오른쪽에 붙은 

 '붙박이장'처럼 생긴 용도는 과연 뭘까?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니 이렇게 생겼다.

 

 남자들만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은 간이 화장실이다.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는 계서당인즉,

공부를 하다말고  먼- 화장실까지 들락이느니.....

바로 곁에서 이렇게 해결을 했던 곳인가 보다.

 

 

아마도 필자가 사진을 찍는 바로 이 자리에

통을 받쳐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에서 위를 보며 찍은 사진

 

 위에서 아래로 보며 찍은 사진

머리부분만 두고 전신은 가려지게 되어있다.

 

마루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남자용 간이 화장실 맞다. 아마도 밤에 계서당에서 주무실, 훈장님이나 어르신들이

어두운 밤에 화장실을 나서기에 계서당이 너무 높으당하기도 했다.

눈이 온 밤이나 비가 온 밤에...칠흑처럼 어두운 야밤에 자칫 높은 곳에서 댓돌을 헛짚기라도 한다면?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갸륵한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고 한다.

 

계서당이란 옥호(屋號)의 유래는 성이성이 서쪽 개울가에서 탄생되었다는 이유로 '계서당' 이라고 지어졌다 한다.

역사적고증이야 자칫 잘못 쓰게되면 (왜곡)오류가 날터...

나같은 길손이야 여행을 다니며 숨겨진 뒷 이야기나

이삭처럼 줍는 재미도 솔솔해서~

만족할 터이다. 

 

글/사진:이요조

 

 

첨부글 

그냥 별 꾸밈없는 집이 맘에 들었어요.
성이성이 <강직 개결(介潔), 소신과 의연(毅然)하였던 청백리>상을 왕으로 받았다는 역사적 고증처럼
웬만한 고택을 둘러보면 멋진 정원을 꾸미고 담장을 높이는 등.....

그런 권위 같은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게....청렴결백 강직한 분 맞습니다.

 

아이콘 어사화(御賜花)
  성이성이 1627년(인조5)에 치러진 신년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임금이 직접내린 종이꽃 어사화 (廣寒香)가 그 꽃받침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아이콘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남원부사, 광주목사, 제주목사 등을 지낸 성의성의 부친 성안의(成安義, 호 芙蓉堂 : 1561∼1629)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계서당으로 부터 우측으로 약 5백 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당의 관리사와 같이 있다.
아이콘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 성덕비(成德碑)
  성이성이 13세부터 16세에 이르기까지  사또 자제로 남원에 머물게 하였고, 뛰어난 이재(吏才)와  간 곳 마다 치적(治績)이 쌓였으며, 남원부사로 5년간이나 있으면서 쌓아온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성덕비가  전라북도 남원시에 소재하고 있다.
 

 

 

본역(花本驛)은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1리에  위치한 중앙선 간이역이다.

1938년 일제 감점기때 지어진 역사라 증기기관차의 급수대와 역사가 일제시대 건물로 보존이 되고 있는 곳이다.

여행을 나름 좋아라 하지만  ktx잡지에 간이역 안내가 나오면 막연한 향수나 그리움 같은 것이 떠오른다.(글이 너무 잘 씌여진 탓일까?)

언젠가는 나도 한 번 간이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하였는데...우연히 화본역을 갔다가 화본역과 급수대에 필이 꽂히듯....그만

간이역과 급수대의 幻影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뭔가에 한 번 마음을 잡히면 뱅뱅도는 물위에서  좀체 떠내려 흘러가지 못하는....낙엽처럼 뱅글뱅글...맴을 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화본역을 보고는 마치 예전에 본 건물처럼 마음에 닿는 이유를 이제사 정확히 알았다.

불현듯 철원 월정역에 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7년 전 쯤에 필름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도 어딘가에 있을텐데....월정역을 둘러본 느낌이 그랬다.

지금은  기차는 커녕 잡초 가득한 마지막 간이역으로 먼 북녘땅만 바라보는 염원의 역이 되었지만....

크기가 작고도 얇은 유리창, 위로 들어 올려 여는 길죽한 유리창문~

안을 드려다보며 얇은 건물벽에 혹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너무도 걱정스러웠던 역사였다.

간이역 역사는 그래서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모든 철도나 역사는 대개가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것이다.

우리민족에겐 나라를 빼앗기고 압박과 설움의 궤적이 되었지만...문화재청 철도문화재로 등록이 된 대부분의 급수대들!

온전하게 남아있는 급수대도 있고......뼈대만 남아있기도 하다.

 

난, 급수대가 뭔지도 몰랐다. 증기기관차가 물을 급수받아야만 석탄을 때서 그 증기로 달릴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증기관차를 확실히 아는 나는 이모부가 부산역에 근무를 하셨기에 이종사촌들과함께 역에 놀려 갈 때는 시커멓고 크다만 기차들이

시도때도 없이 꽤액꽥~~ 거려서 가슴이 늘 울렁대곤했으나...지금도 무서운 액션영화를 괴로워하면서도 보듯 기차소리가 무서우면서도 야릇한 끌림에

역에 심부름 가는 사촌들과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내 어린 기억에는  역에는 늘 석탄이 지천이었고 철길은 얼마나 깊고 움푹 패였는지....

 

화본역 역사만 바라보며...나는 지난 날 그 역사의 모습을 마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처럼 ....둘러보았다.

그런데...대충 보고 달랑 한장 얻은 사진에 영 찜찜해서 ...그 용도의 이용방법에 대해서도 궁금해서 견딜수 없었다.

역으로 전화를 했고  고맙게도 사진을 손수 찍어 보내주셨다.

그런데....내용은 없다.  또 전화를 할까 하다가 ...야근을 하고 주무시면?  하는 생각에  관두기로 했다.

내용은 없어도  이젠 여기저기 검색을 하면서  샘솟는 의구심은 어느정도 정립되었다.

사진을  보면서 나름  정립한 이야기가 어느정도의 근사치가 있는지 함께 보자구요.

 

 

 급수대에 집착하도록 불을 지른 문제의 <화본역과 급수대>

이우섭님 보내주신 사진 (5장) 감사합니다.

 가까운 영천역 급수대(아래 문달린 사진)와 같은 형태로

문이 달렸을 것이라는 판단~

 

 

지금은 문이 없어졌지만...

 

 

기차역은 나무보다는 석탄이 편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안에는 늘 불을 땔 수 있는 석탄과 무쇠로 만든 석탄난로 정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석탄난로정도면 온기를 급수대까지 올리기엔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석탄으로 불을 때면.......그 열기는 윗쪽으로 올라가 늘 온기가 되어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석탄을  때지만 사람이 기거하지 않으므로

아취형 나무틀 유리 창문은 빛을 위해서 만든 듯...

물이 오르고 내리고...물을 급수하고난 빈 급수조는 또 다음 기차를 위해  천천히 물을 올려 채워두어야 하고

기차기 즐어오면 빠른 시간안에 높은 곳에서 물을 급수할 것입니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지고~

오랜세월 그을음이 깨어진 유리창문 틈새로 들어 온 빗물이

닦아내린 흔적이 보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맞은 편 유리창 그림자나 제일 아래에 있는 그저 난 배기 구멍으로 보이는데 까지도

아직까지 나무틀이 남아있거나 높은 곳에는 온전한 아취형 유리창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빛이 많이 들어와서 배수관의 상태를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추풍령 급수대의 모습입니다. (검색이미지 모음)

 

온전하게 보존된 영천 급수대 모습입니다.

좌측에 보시면   'ㄱ'형으로 구부러진  소방차에 급수하는 소화급수전과  흡사한 모습이 보이시지요?

 

 

 

화본역과 같은 '중앙선' 아래에 위치한 경북 '영천역 급수대' 정면입니다.

화본 급수대와 모습이 동일합니다.

계단까지도 똑같지요?

이렇게 문이 달려있는 온전하게 보존된 급수대의 모습입니다.

문화재 등록 표시가 붙었습니다.

 

좌측 두 개는 삼랑진역 조금 낮은 급수대 모습이고,  오른쪽은 유난히 키가 낮은 도계역 급수대입니다.

 

그 외 연천역에도 급수대가 있고 작은 간이역에 아직도 이런 급수대가 몇 군데 더 남아있다합니다.

혹, 여행가시는 길에 간이역 부근을 지나치실 때는 잊지 마시고

들러서 꼭 살펴봐 주세요!!

 

사진 보내주신 <이 우섭>님께 감사드리고요.

덕분에 급수대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게되어 즐겁습니다.

그저 지나치는 작은 간이역일지라도

눈여겨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요조

 

 

간이역의 아름다움(화본역 급수대와 페치카) 블로거 기자단 뉴스에 기사로 보낸 글  | 여행발전소 2008.11.13 09:19

화본역을 찾아갔다. 화본역(花本驛)은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1리에 위치한 중앙선 간이역이다. 1938년 일제 감점기때 지어진 역사라 증기기관차의 급수대와 역사가 일제시대 건물로 보존이 되고

 

 

 

 '삼존석굴'과 '삼존석굴모전석탑'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했으며 석굴은 지상에서 20m 높이에 위치하고 굴 입구 높이는 4.25m, 굴 속 길이는 4.3m, 바닥은 평면이고,

네모 반듯한 형상으로  천장은 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주위는 차차 낮아지는 하늘 형상을 하고있다.
석굴 내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로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있고 본존불의 결가부좌한 모습과 깍은 머리, 얼굴모습은 풍만하며 거대하고

엄숙한 기품이 있다. 당초에 석굴 앞에 절이 있었으나 폐허가 되고 당시의 주춧돌만 남아 있어, 사찰 복원사업으로 1989년부터
선방, 산신각, 종무소, 법당, 소하천 등을 증개축 하였으며,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여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한다.

고구려에서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자락에서 꽃피워지고 신라왕도(王都) 경주로 전해져 결실을 맺었단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이곳에서 거대한 바위산 절벽을 이루었고,  이 절벽허리 20m 높이에 남으로 향한 둥근 천연동굴에

삼존불상을 봉안하였으니 삼존석굴이라 한단다.

신라의 불교 공인(법흥왕)전 핍박받던 시대에, 숨어서 오로지 불심(佛心)으로만 수도하던 곳으로서, 8세기 중엽 건립된 경주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되었다는 이야기!!

 

세상사람들에게 군위군에 위치한 삼존석불은 <제 2의 석굴암>이라고 불리워져 마치 석굴암의 아우인 것처럼 느껴지나 천만의 말씀이다.

1세기나 앞 서 만들어진 석굴이라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군위의 문화해설사는 이야기꾼이었다.
경주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된 삼존석굴의 이야기도 어찌나 재미나케 하던지...
학소대에 조금 이상한 느낌이 있어서 어떤이가 줄을 매어 절벽을 내려와 살펴보니  숨겨지듯 자연으로 가리워진 나무가지와  얽히듯 덮혀진 덤불을

헤쳐내고 보니 동굴 같은 게 있더라...그 안에는 오랜세월동안 나무가지와 덤불로 가득 엉겨서 겨우 굴이 아닌가 싶을 정도더란다.
일단 신고를 하고 처음 발견한 그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석굴 아래로 사람이 겨우 다니는 길을 내고 그러던 차 여러사람이 함께 동참하게 되었고
지금의 사찰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까마득한 절벽 허리에 뚫린 굴이었다 한다.

애초에 민둥 암벽에 동굴을 내기는 어려웠을테고 자연 동굴에 사람이 제법 서있을만한 공간만 확보되면 그 곳에다가 불상을 앉혔을 것이다라고 추측만 할 뿐...

그 동굴은 나무에 가리워져 불교가 핍박받던 시절, 숨어서 오로지 불심을 닦는 곳으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그런 동굴이다.


아침을 먹은 식당에서 뒷문으로 나가 조금 접어들면 바로 삼존석불이 있는 곳이란다.
식당에서 동쪽으로 조금 걸어나가자  대략 500미터 전방에 삼존 석굴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게 아닌가?
기암절벽에 둥글게 뚫린 석굴이  멀리서 바라만 봐도 그 자체로도 신기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얼른 몇 컷 찍었다.

그런데 한참을 'ㄴ'자로 꺽어져 걸어 내려가 극락교를 건느고  식당에서 'ㄷ' 자로 꺽어진 비로전앞에 서서 바로보니 이게 웬일!!
삼존석불의 석굴이 또 정면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이건 말로만 듣던 매직이다.
전에 스펀지에도 나왔던 움직이는 부처님 얼굴처럼 이 석굴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다.
처음 석굴을 보고 사진을 찍은 곳은 비로전, 석굴, 처음자리는 석굴을 축으로 60~70도의 각도에서 바라본 석굴이었다.

집에와서 사진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석굴의 형태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정면으로 보이지만
우측에서 바라보니 본존불과 좌측의 대세지보살만 보였고

비로전에서 바라보니 본전불과 관음보살만 보였다.
가까이 중앙에 서니 석불 모습은 막상 높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근간에 와서 사찰이 지어지고 축대가 그만큼 놓아지고도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의 출입은 제한하게끔 문은 잠궈 두었다.

특별히 잠긴 문을 연 특혜로 우리는 모두 가까이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장구한 세월 석굴의 천장에서 황토 빗물이 스며들어 본존불의 좌대는

진흙으로 오염되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맑은날,  아침해가 뜨고  '섬존석굴'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석굴안으로  빛이 은은히 스며들고 

석불은 황금빛으로 서서히 변해간다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날씨마저 꾸무리한 날 오전녘에 별 의식않고 사진을 퍽퍽 찍어대어도  그 모습 그대로 그 황금빛이 스며든 듯, 전혀 어색하지 않다.

상상만으로도 황금빛을 좋이 느낄 수 있었다.

 

 

삼존석불을 찾아간 날은 잔뜩 흐렸다가 석굴을 벗어난 좀 후에 가을비가 추적추적내리기 시작했다........................./이요조

 

 

 

 군위 삼존석굴 /국보 제 109호
소재지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 15 위치에 있는 이 불상은 八公山 북쪽 계곡 학소대(鶴巢臺)의
천연절벽 자연동굴안에 모셔진 미타 삼존석불이다.

이 석굴사원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조성연대가 1세기 앞 선 것으로 석굴사원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석굴은 둥근 입구와는 달리 바닥은 평면의 2단으로 되어있고 천장은 입구의 높이보다 더 파 들어간 유선형 모양이다.
깊이 4,3미터, 폭 3.8미터, 높이 4,25미터의 동굴 전면에는 간단한 석축을 쌓아 의식장소를 마련했고 안쪽으로 턱을
만들고 그 앞에는 별도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의 대좌를 놓고 그 위에 본존상을 봉안했으며 좌우에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을 모셨다.
본존불은 높이 2.88미터로 머리에 무수히 가늘고 얕은 음각의 선들이 나타나 있으며 정상육계는 아주 크게 표현되어 있다.
좌우의 협시 보살상은 입상으로 거의 같은 양식이다.
이 석불은 손의 모양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로 7세기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본존 아미타불 광배의 문양

필자의 청맹과니 눈에는 얼핏 신라의 천마총이 떠오르기도 하고

고구려 벽화가 생각나기도 하는

본존불의 뒷면 굴안에 직접 새겨진 광배무늬! 

아주 눈에 익은 아름다운 음각이다.

 

 

줌인으로 당겨찍은 모습, 석굴은 분명 나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석굴안에 형상은 좌측 대세지보살과 본존불만 비쳐보인다.

 

 

석굴은 90도 각도 내에서는 다 마주 바라보이는 석굴로 비쳐보인다.

물론 본존불인 아미타불은 그대로 보이지만 좌우 양쪽의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보였다가 안보이는 것만 다를 뿐이다.

 

 

검지를 쥔 비로자나불좌상의 손모습이 궁금했는데...모든 것은 하나다라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한다.

 

 

비로전에서 바라본 석굴...본존불과 우측 관음상만 보인다.

 

 비로전에서 바라본 석굴

석굴에서 마주 바라다보이는 정경  '삼존석굴모전석탑' 이 눈 아래 보인다.

 

'삼존석굴모전석탑' (문화재자료 241호)

다층 기단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특이한 형태로서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는 근세에 다시 축조되어 원형에서 변형되었으나 탑형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 유물이다.

 

좌대까지 부처의 옷자락이 내려와 유연한 곡선을 지어내었다.

빗물이 스며들어 흙탕물로 오염이 된 상태다.

 

 

팔공산 학소대 벼랑 허리에 있는 동굴이라 계단을 축조 가까이 가게 만들었으나 보존을 위해 일반인은 못들어가게끔 차단해두었다.

 

click~하시면 글씨를 보실수가...

 

 

 

 

 

 

 

백제인의 자긍심을 고무시킨 왕인박사님 동상

 

 

 왕인박사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자칫 볼 것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기 쉬운 곳입니다.
문화해설사(전갑홍)님 께서 얼마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주시던지 유적지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좋은 기를 받아온 듯한 기분이 들게끔 유익하고 재밌는 설명을 곁들여 주셨읍니다.

왕인박사 유적지는 백제인의 자긍심 그 자체였습니다.
4세기 후반 무렵 일본(倭國)에 건너가서 선진문물을 전해주는 활동한 백제의 학자 왕인박사님의 묘는
비록 일본땅에 모셔져 있다하여도 그 英靈은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산 18번지에 계신다는 것을,


*****백제는 왜국과 오랜 교섭을 가졌고 많은 인물이 직접 건너가서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다.
왕인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우리 기록에는 없고 일본측 기록에만 실려 있다.
그러나 기록마다 연대를 비롯하여 이름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활동연대는 대략 근초고왕대(346~375)에서 아신왕대(392~405) 사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지키 古事記〉에는 화이길사(和邇吉師)로 되어 있는데, 길사는 백제 인명에 붙는 존칭이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에는 왕인으로 되어 있다. 화이와 왕인은 발음이 모두 '와니'(Wani)이다.
근초고왕대에 건너간 아직기(阿直岐)가 왜국으로 건너가서 말을 기르는 일을 하다가 경서(經書)에
능함이 알려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태자 우치노와 키이로츠코[兎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다.
왜왕이 아직기에게 "(백제에)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는가" 하고 묻자
 "왕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우수하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왜국에서 학덕이 높은 학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백제에서는 제철기술자·직조공·양조기술자 등을 함께 보냈다.
왕인은 우치노와의 스승이 되었고, 경서에 통달하여 왜왕의 요청에 따라 그 신하들에게 경(經)과
사(史)를 가르쳤다.
그의 후손들은 일본의 가와치[河內] 지방에 살면서 문서기록을 맡은 사가 되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일본 히라카타[枚方]에는
그의 무덤으로 전하는 장소가 있다.*****

 

그냥 무심히 왔다가는 무심하게 되돌아 나갈지도 모를 왕인박사 유적지!
방명록을 보면서 거의 일본인들의 서명이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해설사님은 일본관광객들이 왕인박사님 조사당에 와서 무릎을 꿇을때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민족 문화적
자긍심으로 뿌듯하다셨습니다.

천인천자문 앞에서  손자를 본 조부께서 그를 어여삐 여겨 각계 존경받을만한 분들에게 천인천자문을 받아
왕인 유적지 박물관 마당에 조형물로 꾸며 놓았더군요.

바로 그 것입니다.
후세에게도 왕인 박사님을 귀감으로 삼아 그렇게 되도록 간절히 바라는 것!
저 역시나 미출가전인 자식을 셋씩이나 두었지만  손자가 생긴다면 돌이나 백일기념으로 아기를 데리고
왕인박사 유적지를 찾아서 그 땅을 밟아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게 바로 후손을 위한 기도하는 절실한 마음일 것입니다.


박사의 탄생지에는 큰 너럭바위가 있고 너르고 부드러운 잔디밭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왕인박사님이 탄생하신 아주 좋은 地氣가 흐르는 땅이니 실컷 느껴보라시더군요.
해설사님은 이 좋은 곳에 왔으니 氣를 받고 가야한다시며 무거운 등산화 양말등을 전부 벗게하고
氣 체조를 하게끔 도우셨습니다.
새벽 일찌감치 버스로 영암땅까지 달려와 월출산에 올랐다가 도갑사에도 드른 후라 몹시 피곤하고 지쳐 있었습니다.
잔디밭에 드러누우니 얼마나 홀가분한지....세상사 시름이 다 달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야 알고보니 <영암氣건강체조 보급사업단장>이시더군요. 어쩐지...
아무튼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몸을 개운하게 풀고는 왕인박사가 마셨다고 전해오고 있는 성천(聖泉)으로 향했습니다.
 
성천물을 마시면 왕인박사님처럼 현자(총명한 아들)를 낳을 수가 있다는 말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저도 물을 맛있게 마셨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해는 까무룩 잠겨버리고 어둠이 깔린 서산 노을이 아직은 붉게 걸려있었습니다.
왕인박사유적지에서 바바라보는 노을도 꽤나 아름답게 보입니다.

한 번 더 뒤돌아서서 왕인박사님께 읍하고 돌아 나왔습니다.
열사흘 상현달이 몸을 불리며 밝게 왕인님 흉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안내하고 해설해주시던 전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위치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산 18번지 
문의/안내왕인박사 유적지
관리사무소 061-470-2561
이용시간
하절기 9:00∼18:00
동절기 09:00∼17:00

해설사/전갑홍/011-607-0516

 동상뒤로는 월출산의 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월출산 중턱에는 박사가 공부를 했다고 전해오는 책굴(冊窟)과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가 있답니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왕인박사님의 현명하신 氣를 받고자...

 천인천자문

한 글자 한 글자 천사람에게 글을 받아 이루어 논 조형물

 후손들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 나기를

기도하는  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만들어 낸 조형물~

박물관<靈月館>

 

 왕인박사님의 英靈을 모신 사당<廟>

방명록을 쓰고

 참배를 드리고

 방명록엔 거의 일본 관람객들의 서명이다.

 

 깨끗한 길이다. 왕인박사유적지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절경이라는 곳

 왕인박사의 탄생지에는 큰 너럭바위만 있는 고운 잔디밭으로 되어있다.

 문화해설사님이 영암기건강체조 보급단장이시라더니...

이 땅의 지기를 온 몸으로 받아가라신다.

기를 실컷 받았으니 성천으로 향하는 데

날은 까무룩 저물어버렸다.

 성천이라 이르는 왕인박사님이 마시던 샘물

성천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성천물 마시고 땅의 기운도 받았으니 조만간 현자를 낳게되실 것입니다.

ㅎ`ㅎ`

 

야간모드로 찍었더니 흔들렸지만...훤하게 나온다.

어둠이 내려앉았는데도, 

음력 열사흘 달빛이 왕인박사님을 비추고...

 

 어두웠는데도 노을의 잔영이 곱다.

 

 

글/이요조

 

 

첫 방문인 부석사에 '문화해설사'가 빠진다는 것은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여행기를 즐겨쓰는 내게 있어

'영주부석사'는 그만큼  힘에 부칠 정도의  태산준령같은 미션이기 때문이다.

 

영주여행길에 오르면서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다시 한 번 더 뒤적여 볼까 생각다가 관 두었다.

일전에도 어느 글에 그런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여행준비를 혹자는 미리 세세히 뒤져서 공부를 하고 정보를 익히고 떠나는 일이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냥 떠나는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은 책으로 두고 그냥 아무것도 머리에 담지말고 천진한 어린 아이처럼 그냥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여행길 나만의 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히.....아주 우연히....오래전에 읽었던 글들이 소화되어  살이되고 피가 되어 흐르던 것이 따악 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쁨을 맞볼 수 있게 된다.

- 아! 내 청맹과니 눈에도 그랬어...그 것이 보였어!!- 바로 그런 기쁨인 것이다.

이번 여행길에도 부석사 구석구석 산재해 있는 건축미학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나는 룰루랄라~ 어린아이들 마냥 즐겁게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여행은 여행이다.  공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먼저 눈으로 마음으로 충분히....느낀 다음 해설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이다.

처음부터 해설사의 도움을 받노라면 자기가 발견한 소중한 느낌 따위는 점점 퇴색되기 때문이다.

 

길가다가 동행이 셋만있어도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했거늘...

적어도 부석사는 네 번을 와야지만 제대로 알수 있다는 데... 몇 번 왔다는 강경원님이 급조한 해설사가 되어주기로 했다.

무량수전을 지나 조사당까지 다다라 흠씬 느낌을 받고 내려오는 길에 늦게 당도한 해설사님이 아까부터 설명하고 계신단다.

 

-이런~ 이런~

저 아래  종무소 앞마당에 우르르 모여있다.

막 들어오기 시작한 관광객들과 뒤섞여서 ...해설사님이 누구신지 얼굴도 못뵈었다.

그 때  일행 한 분이 앞뒤 설명 제하고 무조건 나를 끌어당겨  저기 부처님 그림을 보란다.

-어디에 어디?

-뭐가 보여요?

-안양루에 부처님들이 가부좌하고 앉아 계시잖아요!-

눈이 나쁜 내게는 희미하기만 하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줌으로 당기니....<아! 보여요!!>

딱 이자리에서만 서서봐야 보인단다. <뭔 그런 그림이 있어?>

여섯분이 다 보여야 한단다. 난 속으로 그랬다. (무슨 매직아이 하는 것도 아니고...원 참!!!)

 

무지한의 소치

 

그랬다. 내 눈에는 다섯분만 보였다.

한 분은 으례히 나무기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거라고...단정짓곤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부석사를 떠나왔었다.

집에 와서 사진을 불러 모니터로 보고서야.....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내 눈에는 흰 옷에 붉은 가사를 어슷하게 걸친 부처님들로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흰 수염과 흰 옷과 붉은 가사는 분명 형광색으로 찬란하게 보이기 조차했다.

 

그 그림의 실체를 더 크게 확인한 순간....그 것은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라..안양루의 공포의 공간으로  보이는 저절로 생겨난 그림이었다.  안양루 공포는 유난히 화려한 구조였다.

붉은 가사는 무량수전의 처마 바로 아래의 채색이었던 것이다.

그 공포의 각도에 따라 가부좌 자세는 같아도 다른 형상으로 각각의 여섯부처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어쩌면 시야의 각도가 그리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는지...우연이라 치기엔 너무 아름답다.

 

과연 우연일까?

  

무량수전/고려 공민왕 친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라 불리우는 무량수전은 완벽한 조화와 비례 그리고 기능과 구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데,

 글 하나 더 보태어서 최순우1(미술사학자)님의 저서로 인해 배흘림기둥의 미학은 더욱 유명해졌다.

 작은 이미지는 클릭하시면 크게 보입니다. 

 

'배흘림기둥'을 감히 설명하기엔 능력밖의 일이지만 배흘림기둥은 마치 항아리 모양 가운데 부분을 불룩한 모양을 한 기둥으로 멀리서 보면 가운데 기둥이 가늘어 보이는 시각적 착시를 현상을 막아주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란다.

그러면 벌써 건축을 짓기전부터...착시와 시각의 안정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얼마든지 한 군데 쯤 멋진 착시의 그림 하나 쯤 숨겨 놓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나의 깨달음은 건축물 구조를 그렇게 시각적인데 까지 속속들이 배려해서  

 (무량수전의 기둥의 안쏠림이란 건물 모퉁이 기둥의 윗부분을 수직선보다 약간 안쪽으로 기울여 세우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지붕하중에 의해 건물의 양끝이 벌어져 보이는 것 같은)

보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안정감을 주는 건축양식이라는데...참으로 아득한 옛날 선인들의 지혜에 차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기법들이 적용되었기에  무거운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지만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우리 함께

숨은 부처님, 현현불을 찾아볼까요? 

나무가 가렸지만 안양루의 공포 사이로 보이시지요?

멀리서 바라보면 이렇게 보입니다.

부러 그림을 작게 만들었습니다.

 

 

다섯분이 보입니다.

왼쪽 기둥에 한 분이 가려졌습니다. 

 

 

한 분의 가사자락만 약간 보입니다. 

 

 

안양루의 공포는 매우 화려하게 조각되었군요.

바로 이 공포2(栱包/貢包)의 공간 사이로

무량수전의 채색벽과 맞닿아 (멀리서 바라보면)

불현불이 보이는 것입니다. 

 

 

욕심많게 자리를 제일 앞으로 당겨 섰습니다.

그중 제일 잘 보입니다.

여섯 불현불의 형체가... 

 

'부석사' 현판은 故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사진을 잘라내기 했더니

우측에서 두 번째 기둥에 가려져 보이는군요,

이제 여섯분의 불현불을 저와 함께

다 보신 것입니다.

 

 

또 하나 부석사를 둘러보다가 급조한 강해설사(블로거), 석축과 담쟁이 넝쿨을 보라더군요.

그 말인즉슨  사진도 찍어 두라는 말도 내포되었지요.

 

그 말에 생각없이...댓바람에 <그깟 담쟁이를 뭐라고...>했더니 묵묵히 통과~~

 

여행 후,

돌아와서 자료수집 정보검색에...<아차!> 했습니다.

석축과 돌계단 역시나 그저 만든 게 하나도 없는 의미깊은 것이었음을..

어찌나 부끄럽던지...늦게서야 스스로 깨달아 후회하면서  다른 이미지에서 급하게 잘라 오려 붙입니다.

안양루 아래로 보이는 무량수전의 석축입니다.

 

 

부석사에 한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 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 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다.

부석사 계단은 모두 9개 석단 108개로 이루어졌다.

이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단계로 속세, 수행,극락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현현불 이야기/이요조 2008, 9월

 

 

 

 

 

  1. 최순우 (한국 미술사학자) [崔淳雨] 브리태니커 1916 경기 개성~1984 서울.미술사학자·미술평론가.최순우 /최순우본명은 희순(熙淳). 호는 혜곡(兮谷). 개성 송도고등학교를 나와 개성박물관에 근무했으며 당시의 관장 고유섭(高裕燮)의 감화로 한국미술사를 연.... [본문으로]
  2. 공포/[명사] [건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연관단어 : 포작 [본문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수군의 본영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만을 극복한 한산대첩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장군이 활을 쏘시던 한산정 충무공께서 홀로 앉아

우국충정의 시를 읊은 '수루'등 20동의 건물과 내삼문을 위시하여

일곱문등 18만여평의 풍치림이 장관을 이룬다.(사적 제 13호, 1959,8,19 지정)

 주변관광및 소요시간 약 1시간

선착장에서→ 제승당까지 도보 7~10분소요→ 제승당 관람

 한산대첩의 맑은 바다를 먼저 눈으로 확인하고....

 호수처럼 잔잔한 남쪽바다!!

 제승당의 제일 안쪽에 있는 충무사 영당(影堂)먼저 참배를 올린 후  둘러보기로 했다.

향을 피우고,

 충무공에게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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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영당

 

성웅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

1976년 정화사업시 확장

새 영정을 모시고 '충무사'라 이름함 

  

 

참배의 예 

문을 드나드는 데에도 법도가 있다. 

<東入西出>동쪽문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서쪽문으로 나오게 되는데

가운데 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 한다.

 

 

 

 

 


 

제승당 가는길에서 만난 한산도 식물들 뭐가 있을까?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8만여평의 풍치림이 장관을 이룬다는...

해풍을 맞고 얼마나 잘 자라주었는지...보기에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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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열매/동백꽃 떨어진 자라미다 꽃처럼 붉고 둥근 열매가...

 처음엔 유도화(협죽도화)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다.

 야왜나무? 처음듣는 식물 이름이다.

남쪽 바닷가에 풍치림으로 자라는 사철나무란다. 

 반송1/아래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소나무 수형이 특히 아름답다.

 

방풍림 소나무가  울창한 제승당가는 길, 산책로

 

 소나무 금강송

 

 이 나무는 잘 살펴보지 않았는데....서향이 뛰어난 목서과가 분명할 듯....

은목선지..금목선지? 

 배롱나무2(목백일홍) 자주색 꽃이 피므로 '자미화'라고도 부른다.

 적송이 군락을 이루고 잘 자라고 있었다.

 

산책로 길가엔 맥문동 보랏빛 꽃이피고.... 

 팔손이나무3

 반송

 은목서4

 금강송,5 육송이라고도 하고 속이 노랗다고 황장목이라고도 불리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금강송은 재질이 단단해 잘 썩지 않고 뒤틀리지도 않아

예부터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였다.

숭례문 복원에도 금강송이 쓰였다. 

벌채대상은 

강릉 대관령에 6그루, 양양지역에 20그루로 올 봄부터 현장조사를 거쳐 엄선됐다고 전한다.

 

 

 

 


 

 

 충무문을 들어서면 제승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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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루에서 바라본 제승당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수가....학익전법의 한산대첩도 

 


 

수루

적의 동정을 염탐하던 망루이다.

충무공게서 홀로 앉아 우국충정의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수루 주앙에는 승전고가 놓여져 있다는데...보진 못했다.

신발을 벗어두고 수루에 올라갈 수가 있다.

 

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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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에서 바라 본

한산대첩의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마루는 정갈하게 반짝이고....

여기에 앉으셔서.....한산섬 달 밝은 밤에 시를 읊으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구나!! 

 

 


 

한산정/과녁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시던 곳

한산정과 과녁과의 거리는 145m로 바다건너 과녁이 있는 전국 유일의 활터!! 

 

 

한산정과 과녁간에는 바닷길이 갈라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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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겉씨식물인 소나무과(―科 Pin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키는 10m까지 자라며 소나무의 한 품종이다. 그러나 줄기 밑동에서 굵은 가지가 10~30개 정도 갈라져 나와 나무 생김새가 우산 같은 점이 다르다. [본문으로]
  2. 백일홍은 초본식물 국화과이고 배롱나무는 목본식물 부처꽃과에 속한다 . 꽃모양도 비슷하고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것은 같지만 , 두 식물은 식물학적으로 무관하다 . 또 백일홍은 원산지가 멕시코이며 배롱나무는 중국이다 . 배롱나무는 백일홍 ㅡ 배기롱 ㅡ 배롱나무로 변했다 . 목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배롱나무가 맞다 . [본문으로]
  3. 한국에서는 경상남도 남해도와 거제도에서 자라고 있는데,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비진도의 팔손이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잎이 보통 8갈래로 갈라지기 때문에 팔손이나무라고 부르는데, 꽃은 10~11월쯤 줄기 끝에 달리는 산형(傘形)꽃차례로 무리져 하얗게 핀다. [본문으로]
  4. 중국 원산이다.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 또는 타원상 넓은 바소꼴로 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거나 밋밋하다. 잎의 길이 7∼12cm, 폭 2.5∼4cm이다. 잎맥은 들어가고 뒷면에서는 잎맥이 도드라진다. 꽃은 2가화(二家花)로 10월에 피고 황백색으로 잎겨드랑이에 모여 달리며 금목서보다 향기가 약하다. 꽃받침과 꽃잎은 4개로 갈라지고 2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다. 열매는 핵과(核果)로 다음해 5월에 익고 타원형이며 길이 2cm 정도이고 털이 있다 [본문으로]
  5. 금강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재질이 단단하고 결이 아름다우며 껍질이 얇고 나무속은 붉은색 또는 적황색을 띄며, 나이테가 조밀하여 가공이 용이하고 잘 썩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상족암은 늘 가도 가도 신비롭다.(3번째 방문)

세계적인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상족암>이 지정되려나 보다.

주민들은 여러모로 생활에 규제를 겪는다는 것이 불편을 초래한다고 생각 ,,결사반대중인가 보다.

 산중턱에 <공룡박물관>이 있고 해변아래 <청소년수련관>이 있다.

 전경이 보이기 시작하고,

 끄트머리 자라목처럼 생긴 곳으로 향하면서 해변일대가 전부 공룡의 발자국으로 뒤덮혀있다.

수련관쪽으로 난 주차장 길이 차단되어서 박물관길(산길계단)에서 하산하기엔 좀 힘들 것 같아.

돌고 돌다가 아랫쪽으로 향했다.  해변아래로 내려섰다.

백악기 공룡테마파크

 언제봐도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곳!!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저 모롱이를 돌아가야는데

밀물일 때는 거북이 목부분으로 난 데크 계단을 이용하여 넘어가면 된다.

 바닷물이 푸르다.

 

너무나 선명한 공룡발자국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공룡발자국인줄 모르다가 92년에야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한다.

 해안가로 데크로난 길이 있어 걷기에 매우 편리하다.

 이번길에는 그냥 경관만 찍었다.

공룡에 대해 더 자세한 사진들은 아래에 링크해둔 지난 번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듯하다.

 이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이라 물이 빠지질 않고 출렁인다.

며칠전 파도가 휩쓸어 관광객들이 실종된 뉴스생각에 조금 무서웠다. 어린이들이 있으면 계단을 이용!

 

 군데 군데 동그란 웅덩이는 다 공룡 발자국이다.

 유람선도 오가고...

 

 

 

 이런 상인 없었는데...ㅎ~ 관광객들에겐 눈요기....맛요기,

 나올때는 산길 계단을 이용

 

 

 청소년수련원앞 바다가 참좋다. 작은 자갈밭 해수욕장이다.

 청소년수련원

 카메라 앵글을 낮추어... 

 

 

 앉은김에 쉬었다가지 뭐.....지난해(2번째방문) 우습게 보고는 구두를 신고 왔다가 신발을 망가뜨렸다.

올해는 아주 편한 신발로...

 물이 남실대는 저 바위절벽을 돌아가야한다.

 제일 재미있는 곳이기도....그 곳 신비스런 굴안 풍경은 이번에는 생략했다.(링크된 저번 글 참조)

 

 

사진 좀 찍어달랬더니...

 

 

상족암군립공원 공룡발자국을 따라서~ 2007-08-24

모양 같다 하여 상족 , 여러 개의 다리모양 같다 하여 쌍족 또는 쌍발이 라고도 불리고 있다. 굴로 형성된 상족암은 높고 낮으며, 넓고 좁은 굴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돌들이 많은 전설 을 담고 있다....

 

 

상족암은 하이면에 위치하고 하일면에도 그 흔적은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희귀한 발자국이란다.  실은 고성군 당항포 공룡축제가 열리는 곳에는 막상 공룡의 흔적은 없다.

공룡의 발자국은 하이면 상족암에 와야지만 확실하게 볼 수가 있다.

하이면에도 있지만...처음간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 곳은 특별한 보존이 없이 조개더미가 길을 막고 있다.

청정해역 자란면에 위치하므로 바다 경관이야 나무랄데 없다.

 

 

자란만에 위치한 하일면/경남고성 블로거 기자단 뉴스에 기사로 보낸 글  | 문화유산 기행 2007.06.30 07:02

1억년 전, 태초에 공룡이 살았던 고성 어촌마을 하일면에도 공룡의 흔적이 무수히 많건만 좌(東)로는 당항포 공룡축제, 우(西)로는 상족암! 좌청룡 우백호에 가려져 공룡발자취 입구는 진입하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고성군 하일면과 상족암군립공원 이 있는 하이면으로 넘어가......

 

 입구에는 조개더미기 가로막혀있다.

이 곳은 물이 많이나면 청각이 많이 밀려오는 곳이다. 아무나 주워 담아와도 괜찮은 곳!!

이번엔 한 주먹밖엔(조금이라)

 5~6 번째나 오니...그 발자욱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곳은 미국 FDA가 인정한 청정해역이다.

 

 

 

 

 

 상족암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해안에 있다. 1983년 11월 10일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5,106㎢에 이른다.
지형적으로 해식애()에 해당한다. 파도에 깎인 해안지형이 육지쪽으로 들어가면서 해식애가 형성되었으며, 그 앞에 평탄하게 있는 암반층은 파식대이다. 상족암 앞의 파식대에는 공룡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해식애 암벽은 시루떡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는 수성암()인데, 모습이 밥상다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족()이라고도 하고 여러 개의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쌍족()이라고도 부른다. 암벽 깊숙이 굴이 뚫려 있으며, 굴 안은 파도에 깎여서 생긴 미로 때문에 변화무쌍하다.

상족암 바닷가에는 너비 24㎝, 길이 32㎝의 작은 물웅덩이 250여 개가 연이어 있다. 1982년에 발견된 이 웅덩이는 공룡 발자국으로 1999년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1억 5천만 년 전에 호숫가 늪지대였던 이곳은 공룡들이 집단으로 서식하여 발자국이 남았다가 그 위로 퇴적층이 쌓이면서 암석으로 굳어졌고 그 뒤 지층이 솟아오르면서 퇴적층이 파도에 씻기자 공룡 발자국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상족암 바닷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가까이에 남일대해수욕장이 있다. 부산과 여수·사천을 오가는 배가 드나든다.

 

* 족흔수 - 2000여족 (세계 최다)
* 족흔분포현황 -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일원 지금까지 알려진 화석중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산출되고 있어 지질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1999년 9월 14일 공룡발자국 천연기념물 411호로 지정

입 장 료
무료
길안내
* 사천방면
사천 - 삼천포항 방면(국도 3호선) - 하이면 방면(국도77호선) - 상족암 군립공원 (군 도 4호선)

* 마산방면
마산(통영방향, 국도 14호선) - 고성읍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우회전(사천방면) - 상리 부 포 사거리 직진 - 상리 척번정리 좌회전(삼천포항 방면, 지방도 1016호선) - 하이면 삼 거리(봉현 주유소 좌회전) - 하이면 신덕 좌회전(국도 77호선) - 상족암 군립공원(군도 4호선)

* 통영방면
통영(마산방향, 국도 14호선) - 고성읍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좌회전(사천방면) - 상리 부 포 사거리 직진 - 상리 척번정리 좌회전(삼천포항 방면, 지방도 1016호선) - 하이면 삼 거리(봉현 주유소 좌회전) - 하이면 신덕 좌회전(국도 77호선) - 상족암 군립공원(군도 4호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는다는 청령포,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던 곳으로 삼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절벽에 가로막혀 나룻배가 없으면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단종애사가 깃들어서 더욱더 애잔해보이는 강은 말없이 흐르는구나!!

삼면이 강으로 둘러쌓였고 서쪽은 절벽과 맞딱뜨리니 유배지는 배 없이는 오갈데 없는 섬이나 진배없다.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오락가락 하는 날인데도 청령포는 꽤나 붐볐다.

마침 영월에서는 단종문화제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비는 내리고.....문화제 구경은 커녕 강을 돌아나오다가 강변고수부지에 잔뜩 세워진 먹거리촌만  바라보였다. 축제라 등은 사방팔방에 달렸더니만.....좋은 유적지는 많은데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에겐 썩 입맛 댕기게 만들어 놓진 않았다.

둘러볼 시간을 주었지만....아무도 하차하지 않았다.  날씨가 개일거라는 일기예보에 아무도 짐스런 우산을 챙겨오지 않은 이유도 한 몫 거들었지만...아마 비가오는 날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청렴포 나룻삯도  축제기간에는 공짜란다.

건너가면 족히 한 시간 너머 걸린다는데..... 생략한단다.

(할 수 없지머...단체가 그런다면)

 

천만리 머나먼 곳 찾아와  먼- 눈으로 바라본 청령포!

맴이사 님을 느끼려 가차이 가고잡고,  보고잡고,

에혀라!!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울어 흐르네~~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단종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강 부근 마을 경치 

 

 

 

 

 

 섬자락이 울고있는 것 같다.

 짙은 솔숲 그림자가

마치 엎디어 흐느끼는 한 마리 짐승처럼~

 

  

억지 상왕이 되버린 단종이 유배되어 온지 두어달만에

홍수로 물이 불어 이 곳을 벗어난 곳이지만,

이 곳에서 단종은 500여년 뒤

기차가 이 뒤를 스쳐지나갈 줄이야

꿈엔들 알았을까??

 

청령포에 세워진 노래비 

 

단종문화제중인 영월을 지나치며 버스에서~

멀리보이는 강변에 즐비한 먹거리촌(?)  

 

영월의 형승(形勝)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평창군 진부면 우통수에서 발원하여 주천강 어우러져 흘러오는 西江과 정선군 임계면에서 발원하여 영월로 흐르는 東江, 이 두 갈래 강물이 합쳐져 충청북도 단양으로 흐르면서 곳곳에 아름다운 절경을 남기고 있다. 그리하여  <영월읍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칼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키어 있으며,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래서 예부터 이 고장은 산수의 경관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 곳 선비들에 의해 곳곳에 영월팔경이라는 명칭이 남아있게 되었다.
이러한 영월의 승경들과 더불어, 단종이 승하하기 전까지 이 곳 청령포.금강정. 금몽암 등의 유적지는 영월의 승경을 보기 위해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청령포는 영월의 서남쪽 8리쯤에 위치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67번지의 일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의 최초 귀양지로 유명한 청령포는 강수의 회곡이 심하며 동.남.북 삼면은 깊은 강물이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육육봉의 층암절벽이 둘러있어 외부와 단절된 전형적인 유배지라 할 만하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456년 6월28일에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 복위 움직임이 누설됨으로써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붉게 핀 진달래마저 애처로움을 더했다.

 

‘청령포도’

어린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원 영월군 청령포의 모습을 그린 ‘청령포도’. 화첩 ‘월중도’에 들어 있는 8폭 그림 가운데 하나다.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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