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야경

 

경주 야경

 


 여행 첫 날은 토요일이라 무척 붐볐다.

일찍 정오경에 입실을 할 때는 한적했었는데, 주차장에 밀물처럼 끝도 없이 몰려드는 차들 인해,

밤에는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요즘 경주는 야경이 좋대~

하면서 형제 부부 팀들의 절반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동생들에게 로비에 가서 안내에게 야경이 어디 어디가 좋으냐고 물어 보고 오랬더니

천마총이란다.

나중에사 해석해보니..아마도 천마총 부근이란 뜻인가 보다.


막 나서려는데..남아있는 팀의 남편이 "그렇게 입고? 춥지...." 그러는 바람에 인사치레로

그저 점퍼 외피만 빼서 입는 시늉을 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안압지 이르기 전 계림, 야경을 바라보며 유령 숲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야경이 멋진 게 아니라 으스스하다.


먼저 안압지에 들렀는데...차에서 내리자 마자 막내 올케는 도저히 추워서 못 보겠다며

관람권 끊어 놓고도 바로 차 안으로 가 버렸다. 연못에 물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나도 추웠다.

정말은 안압지 저 건너편으로 한바퀴 빙돌아 건너가야지만 정원 야경도 좋고  안압지가 둘로

나뉘는 물그림자의 확실한 야경을 얻을 수 있는데,  별수 없이 나도 덜덜 떨렸다.

실내와 같겠지 생각한 잘못이다.

입구에서 요리 뱅글 한 장,  조리 뱅글 두어 장 찍고는 나도 얼른 되돌아 차에 올랐다.

괜시리 입장료만 날린 셈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 이기도 하다.

 

 

여행 첫 날 밤에는 안압지와 첨성대의 야경을 보고는 시내로 나와 야경을 구경했다.

조선호텔 정문이 그 중 제일 나았다.

 

 

이튿날 아침 일출에는 그 많은 불빛도 스러지고, 사람들의 수선거림도 스러졌다.

이튿날은 동해바다로 나가서 한나절을 보내고 들어오니...웬걸, 주차장이 텅 비었다.

일요일 주말 끝이라 사람들이 다 몰려 나갔나보다.

붐비던 오일장터의 무싯날처럼 너른 주차장엔 휑한 바람만 불었다.

나이 든 우리들만 남은 것 같아 스산함에 좀은 서글펐다.

일출

 

이튿날 밤에 전날 밤 다녀온 곳을 생각해 보니 천마총을 깜빡잊고는 다녀오지 않았다.

저녁 산책삼아, 운동삼아 나가자고 부추겨서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어제 토요일 밤은 그렇게나 쌀쌀하더니 일요일 밤은 산책하기 딱 좋은 기온이다.

오늘이 바로 음력 대보름이 아닌가?  천마총은 입장시간이 늦어선지 모두 무료입장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나 보다.  그래서? 불이 다소 꺼졌는지...어두컴컴했다.

산책길에 바로 지금 흐르는 가야금 가락이 흘러 나와 보름달밤의 운치를 더했다.

좋다. 행복한 한가로움이다.  달빛아래 온 가족이 두런 두런 이야기 나누며 산책을 한다는 게,

 

 

천마총 산책길 나무 한 그루도 허수히 여기지 않는 고적지 본연의 모습,  바로 이런 상생의

마음이 길이 보존될 때...우리는 세세토록 무궁한 역사의 긍지를 가질 수 있을게다.

지역사람인지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지만...뛰는 사람은 없었다.

ㅎㅎㅎ 이 음악을 듣고 그 누가 뛰어 다니겠는가 말이다.

경주는 그런 연유로 정적인 사색의 도시가 분명하다.

 

천마총 내부 전시실로 들어갔다.

바로 이 식구들이 몇 년 전 여름에도 이 곳을 찾았는데, 얼마나 더웠는지  큰 능만 가득했지 

그늘진 쉴 곳이 없던  무서운 폭염의 기억들이...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과 천마도장니()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불국사 갔을 때는 또 어쩌고? 불국사 경내는 무슨 영화촬영으로 인산인해~ 출입은 금지되고

내려오는 길에는 스콜 같은 소나기를 만나서 다들 쫄딱 젖고서 일행은 모두 흩어진 채 나중에

모두는 차 안에 올랐지만  와이퍼가 무용지물일 정도로 억수같은 비가 무섭게도 쏟아내린 기억에

그 쪽은 이제 별로 쳐다보고 싶은 맘도 없어졌다.


오늘 밤은 실로 쾌적하다 그야말로 여유 자적이다.

밤에 다닐 일이다. 경주는, 게다가 무료입장이지 않은가? ㅎㅎ~~

천마
미추왕릉지구의 155호 고분이 천마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중 백화수피(자작나무껍질)에 하얀 말이 흰 구름을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신라인의 말에 대한 신앙이 깊음을 느낄 수 있다.


(천마가 그려진 자작나무 수피인데..후래시 조작 실수로 그림이 판독불가~)

 

신라금관은 천마총에서 시신의 머리에서 직접 수거한 것이라 한다.

머리에 쓰는 관이 아니고 투구처럼 마스크처럼 시신 얼굴에다가 씌운다 한다.

진품은 경주박물관 소장이고 그림의 천마총에 있는 금관은 모조품인 모양이다.

 

신라금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주수목 형상의 입식이다. 이 나무 형상의 상징물은 신라금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고대 금관에는 공통적으로 나무 형상이 주요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다.

금관에 표현된 나무들은 평범한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신령한 힘을 가진 신비로운 나무다. 즉 천계를 항해 상징적으로 뻗어 오른 나무를 뜻한다는 것이다.

금관에 달린 나뭇잎 모양의 장식은 원형과 나뭇잎의 아래 끝이 뾰족한 심엽형이 있다. 금관에만 달려 있는 수엽은 신라인이 숭배하던 나무 중 백화나무(자작나무)의 잎을 본 뜻 것으로 보인다.

금관의 산(山)자형 또는 출(出)자형 입식은 생명수를 상징하는 수지형으로 직각형과 자연형이 있고, 수지의 단은 어느 왕계의 초대왕인지 2, 3, 4대를 계속해서 등극한 왕계인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금관 중 4단 입식이 달린 금관은 천마총 금관과 금령총 금관 뿐이다. 두 금관 모두 왕이나 왕의 형제인 인물이 사용하던 것이다. 두 금관 중 크기나 디자인의 화려함은 천마총 금관이 뛰어나다. 높이나 직경도 크다. 뿐만 아니라 천마총 금관에는 수많은 곡옥이 달려 있는데, 금령총 금관에는 단 한 개 곡옥도 달려 있던 흔적이 없다.

금관의 입식이 나무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나무에 달려 있는 곡옥이 생명의 열매라면 곡옥이 달려 있는 금관의 주인공은 많은 생명, 즉 많은 자손을 낳은 사람이고, 곡옥이 없는 금관의 주인공은 자손이 없는 인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 左

새 날개 모양 금관 장식
신라시대 관(冠), 또는 머리에 꽂았던 듯한 장식물로 큰 새의 날개 모양이다. 전면에 정교한 당초(唐草)무늬가 투각되어 있으며 원형의 영락(瓔珞)을 금실로 매달아서 화려함을 더하였다. 줄기 부분에는 어딘가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으며 반으로 접었던 흔적이 있다. 

▲ 右

천마총에서는 금관과 함께 금제 조익형관식이 발견되었는데, 폭이 59cm로 아주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핀 것 모양을 하고 있다. 신라무덤에서 새의 날개가 출토된 것은 천마총이 처음이다. 이 또한 신라인에게 흰 새 사상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上 곡옥
한국문화에 곡옥이 등장하는 것은 신석기시대 천하석으로 만든 반결형부터이다. 그것이 청동기시대에는 평북 대평리 유적이나 안면도 고남리 패총의 경우처럼 꼬리와 머리를 갖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곡옥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지만 곡옥의 모양은 태아 즉 생명을 상징한다는 해석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신라금관의 디자인은 나무를 숭배하는 기마민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것이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곡옥들은 나무의 과실로 생각할 수 있다. 과실은 생명을 이어가는 씨앗을 품고 있으므로 신라 금관은 생명의 탄생과 자손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곡옥은 대를 이어 왕이 된 가계의 인물들이 착용했던 금관에만 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천마총 내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관객은 우리 가족들뿐이었다.

정말 찬찬히 마음껏 구경할 수가~  해서 덕분에..실례의 촬영도,

후래시 터트린 죄를 언니가 대신 인사드린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천마총 내부전시실 모습

 

날씨가 포근하다.

천마총 동네가 바로 경주 황남동이다.

정문 옆에 큰 빵 가게가 즐비하다. 언니는 원조 할머니 황남빵 가게를 안다면서

천마총 오른쪽으로 난 길로 총총히 사라졌다. 자연스레 두 패거리로 나뉘어졌다.

오능의 희미한 야경

 

나와 우리팀들은 오릉 쪽으로 다가갔다.  도저히 사진에는 잘 나오질 않는다.

계림도 그러더니... 계림숲의 야경이 얼마나 으스스한지 천년 원혼들이 곧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음산함~~

 

계림숲은 음산하면서도 그 괴기스러움이 멋졌지만 내 카메라는 그 성능이 불가항력!

모름지기 야경 사진을 찍으려면 관광객들이 붐비는 토요일 밤에나 오면 좀 더 밝을래나?

안압지와 첨성대 말고는 그 외 모든 야경이 인터넷에 떠도는 야경과는 전혀 딴 판이다.

아니다~ 검색사진을 보니 안압지도 분명히 조도를 달리했음을 알겠다.


전력절약차원에서 줄였나? 아니면 아직은 손님이 뜸한 겨울이라서?

아무튼 내가 원하던 멋진 야경 사진은 얻을 수 없었다.


대신 오능 옆에 있는 정체불명의 구옥 한 채의 모습과 천마총의 정월 대보름달은 얻었다.

야경의 조도가 낮은 대신에 정월 대보름 달은 확실하게 만끽한 경주의 밤이었다.

 

내일은 경주 남산아래 있는 포석정을 둘러 본 후 또 다른 여정 길에 올라야겠다.

황남빵을 보며 생각했다.

토담, 그래 바로 우리 전통고유의 토담에 박힌 돌멩이처럼 그다지 눈에 낯설지 않는

내츄럴함이다.

황남빵은,


글:사진/이요조.....중간중간 검색 발췌문

오능안에 있는 빈집

 

 

 

 

 

 

 

황병기님의 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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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대와 입장료는 각자부담
65세 이상은 신분증 지참시 무료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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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요시간/8시간(중식시간포함)
3. 버스요금/일반(대학생포함)12,000원  학생(초중고포함)10,000원
4. 사적지 입장료및 중식/개인부담
5. 출발시간 매일 ①08:30출발~16:10종료②10:00출발~18:10종료
6.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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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첨성대

 

 

피사의 사탑, 경주 첨성대


어! 이상하다.

 

사진을 캡쳐하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첨성대 사진을 열 장 가까이 찍었는데....한결같이 사진이 삐딱하게 나온 것이다.

할 수없이 고르고 골라 그 중에서 구도가 반듯한 듯한 사진을 그나마 하나 골랐다.

여러분들도 경주에 가시면  아무 스스럼없이 자연스레 사진을 찍어 확인해 보시기를,

묘하게도 약간 기울어진 첨성대를 손쉽게 얻으실 수가....

첨성대가 정말 피사의 사탑처럼 되어 가는군요.

(미욱하게도 첨성대가 기울었다는 사전 지식이 내겐 없었지요~)

 

 

나는 아직도 첨성대를 바라보면 잘 모른다.

지금의 옥상만도 못한  방범초소 같은 장소에서 무슨 천문대 관측을...?

그런 생각을 그 때도 했었다. 그냥 첨성대가 석조물로써  그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어렸을 적)

어른이 된 지금은 그저 고정된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별자리의 이동을 알면 달력이 없던 시기에 그나마

농사 절기를 알아 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정도였다.

 

음...그러니까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나는 다 아는 척

했다.  동양철학으로는 심오한 주역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천문대라고도 하는데, 거기 까지는 나의 나의 한계 밖이고,

 

첨성대는 언제나 별 볼 것 없다는 실망만 안겨 주었는데,'아는 것만큼 보인다' 는 말을 이젠 알 것 같다.

불교와는 전혀 무관한, 과학적인 석조 건축물이었으니,

 

지역 주민들에 의하면,  6·25 전쟁 이후 첨성대의 기울어짐이 심해졌다고 증언했다며

“당시 첨성대 북쪽에 포병부대가 있었고 탱크들이 지나다녔는데 그것이 지반 약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다.

그런 문화유산이 밤에는 화려한 조명아래 정작 그 아픈 흉터를 가리고 섰으나..

그 훼손의 복원은 우리가 맡아 해야 할 몫인 것을....

 

 

 

 

 

2006년 2월11일 밤,

글:사진/이요조

 

 

 

내용/검색글 편집▼

 
 첨성대가 기울고 있다.
 
북쪽 7.2㎝, 동쪽 2.4㎝  지반 무르고 수분 많은탓

 

 

 

기울어진 첨성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斜塔)처럼 첨성대의 기울기가

‘현재 진행형’인지 여부이다. 2003년 12월의 1차 조사 결과와 오는 9월부터 착수할 2차 조사 결과

를 비교해보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붕괴 가능성’을 막는 방법으로 이어질 것이다.

첨성대가 기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제시됐다.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땅을 분석한 결과 북동쪽이 상대적으로 덜 단단하고

 

▲첨성대 밑 북동쪽 땅에 수분이 많이 포함돼 있는 점

 

▲지하 부분에 대한 레이더 검사 결과 기초에 사용된 돌(일명 호박돌)이 많이 깨지고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 右上 전체가 기울면서 틈새가 벌어진 모습도 보인다. 左 이에 비해 189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첨성대가 똑바로 서있고 틈새고 발견되지 않는다.   右 첨성대가 기울어진 모습은 눈으로도 쉽게 확인된다. 첨성대 아래 '기단석'은 수평과 비교할 때 북측으로 1.91도 동쪽으로 0.745도 기울어져 있다.

 

 

정성스런 설명의 검색이미지

 

 

경주 첨성대

 

 

개요

 

      ㅇ  
신라 선덕여왕때 세워진 첨성대는 천문관측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되고 유일한 석조
           구조물이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규모는 높이9.17m, 윗지름3.1m, 아랫지름이5.17m,
           지대석 한 변의 길이가 5.35m이다. 
           이중으로 지어진 지대석과 기단은 네모 형태로 8매와 15매의 장대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27단으로 원통형의 본체를 쌓았는데,밑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윗부분은
           수직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사용된 석재 수는 1년을 나타내는  365개이며, 1단의 높이는 약30cm 이다. 정상에는
           우물  정(井)자 석이  2단으로 쌓여있는 데 이  위에  어떤 관측기를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
           된다.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이 정(井) 자석이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동서남북의 방위 기준이 되었다고도 한다.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보이나 석조부분
           만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매우 보기 드문 유적으로, 국보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 가치

 

ㅇ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경북 경주시 인왕동 안에 보존.

ㅇ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는 634년(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에 세워

졌다.

ㅇ 또한 이 <첨성대>는 종교적 건물을 제외하고는 현재 전하는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기능

 

ㅇ 이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것 외에도, 4계절 24절기를 정하는 역할을 맡아 보았으며,

해석하기로는 신라의 도시계획연구소였을 가능성도 있다.

 

 

모양

 

   ㅇ 전체 계단 수 = 30단(음력으로 한 달 30일을 나타냄)

   ㅇ 밑둘레 기단 돌 = 12개(1년 12개월을 나타냄)

   ㅇ 계단 본체 = 27단(신라 27대 선덕여왕을 나타냄)

   ㅇ 꼭대기의 네모진 이중 석재 = 각각 동, 서, 남, 북을 나타냄(방위)

 

 


종목 : 국보 제31호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 : 1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 : 신라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모양의 원통부(圓筒部)가 올려지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가 얹혀진 모습이다.

원통부는 부채꼴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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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함산 석굴암 일몰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9번지.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석불사, 석굴암

 

 

어린 날의 수학여행, 그 토함산에 다시 올랐어라~

 

 

경주여행 첫 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들(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제 1의 타깃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집에서 싸가지고 간 간단한 점심을 먹고는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었다.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강원도 첩첩 두메산중 길 마냥 꼬불꼬불 실로 구절양장이다.


산길에 눈이 수북히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담임 선생님께서 일일이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주며 잠에 취한 어린 우리들의 등을 떠밀던

바로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의 귀함도 전혀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용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안마용 등 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칠기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모두는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씩이나
이를 닦다가 피가 나는 아이~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 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단숨에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산에 오르기 힘들었다는 기억뿐이니...이거야 원,

어디에서 뭐가 잘 못된 것이었는지..?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머리가 희끗한 나이에 이제서야 천년고도의 여행을 곱씹으며 불교문화와 신라 문화유산이나 뒤늦게사

공부하며 짚고 넘어가야겠다.

 

 

석굴암 향하는 길을 승용차로 오르며 모두는 어린 초등시절, 걸어올라왔던

수학여행길을 반추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도 이렇게 한참 힘겹게 오르는 길을..?

꼬불꼬불 구절양장이 따로 없다. 영낙없는 강원도 두메산길이다.

몇 번 토함산 계곡 절경을 찍으려 멈추어 섰지만 육안으로는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는데 안개때문에

카메라에는 다 잡히지 못했다. 그냥 차 안에서 찍은 근경만 두어장 올려보며...

눈쌓인 설경을 휙휙 뒤로 하고...토함산 정상이 해발 700이 넘는다고 어디서 본 것 같기도...

그렇다면 석굴암은 못해도 어림잡아 600고지 이상은 족히, 될 것이 아닌가?

 

 

사진에는 다 담아오지 못했지만 토함산의 산세나 수목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국제적

관광도시, 경주의 명산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불국사, 석굴암, 보문관광단지, 무열왕릉 등 신라

고적관광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조용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산림내 휴식공간이란다.
그러게...산세가 그 멋이 뭔가 다르더라니 다음에 경주에 올 때는 불국사에서 필히 토함산을 올라야겠다.

토함산 정상에 올라 천년고도의 정기를 다시금 느껴봐야겠다.

 

 

[토함산]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신라 5명산 중의 하나로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또한 소나무, 참나무 숲으로 덮여 녹음이 짙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굴암이 나타나는데 이 길은 산허리를 따라 돌아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관광객들이 이용한 길이다.
60년대 이전에는 이 길을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오르내렸다. 토함산이라는 명칭의 의미는 이 산이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산이 바닷쪽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토함산 자연휴양림(휴양림사무소 054-772-1254)

 

 

주차장에다 차를 두고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다시 걸어야 한다.

눈바람이 차면서도 상쾌하다.

바지런히 걸어가며 불쑥 어린 날 언니의 난데없는 옛 이야기에 모두는 까르르~ 자지러졌다.


너무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눅눅하고

으스스한데, 사천왕도 싫고 무섭고..." 까지꺼 이거 볼려고 힘들게 올라왔나?' 싶어서 들고있었던

지팡이로  겁도 없이 X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로 만든 차단 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꼽을 쥐었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내가 그랬다면 또 몰라도?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ㅎ~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조금 힘들다가 웃음보가 터지는 바람에 가뿐하다.

 

↓ 복원된 바깥 모습 ↑

 

석굴암 도면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
(重祠)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 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복원하며 교체된 구조물들, 귀중한 신라인의 손길이 스민 소중한 유물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랑할만한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시티N님들과 공유하곺은 욕심에 그만,

처음 들어오자 잽싸게 찍느라...센터도 틀어지고, 그랬다. 점점 대담해져서 위엣 사진을 찍었지만

 아미타불  이마에 보석은 일제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눈에 반짝! 되비쳤다.
개보수 때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잘 박혀 있었다.

 

석굴암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그대로 비친다.

석불사 전경

 

무척 단아해 보이는 석불사 사찰 경내, 출입금지란 푯말이....못내 서운~

 

석불사 마당의 감로수 ~ 정말로 물맛이 달았다.

 

↑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을 뒤로 바라보며 ↓

 

토함산 일출은 유명하다.

경주 토함산과 석굴암의 일출 장면은 우리의 자랑거리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끼고 있는 토함산은 동해의 햇살이 가장 먼저 와 닿는 땅이다. 바다가 끓어 오르듯 붉은 구름을 피워 올리다가 순식간에 솟구치는 해돋이는 정초에 한 번쯤 가져 볼 만한 경험일 것이다.

 

내가 만난 토함산 일몰

 


 

석굴암의 건축 개요가 설화에 기인하자면,

이 설화(아래내용글)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는데....

 

니체가 그랬던가?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미래를 알려면 지금 행하고 있는 나를 보면 된다는,

 

되돌아 나오는 길에 일출 못잖은 토함산 일몰을 만났다.


'석굴암 일출' 대신이다.

 

역시나 유수깊은 천년고도 경주의 토함산다운 장관이다.

 

 

 

 

 

글/사진:이요조(2006년2월11일)

 

 

 

 

'토함산 - 송창식'

 

 


김대성 [金大城, 700~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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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경주여행 첫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이참에 검색하여 문화유산이나 공부하며 짚고 넘어갈 일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경주여행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언니 말이 더 우습다.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집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으스스해서 그 지팡이로
부처님 떵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를 잡았다.
무지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그 것만해도 힘들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여러님들과 공유하자는 욕심에 그만,
부처님 이마에 보석은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누에 반짝! 비쳐왔다.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 Vitalli Chaconne - Zino Francescatti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비친 모습이 더 재미난다.

나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다.
일출대신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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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 송창식

 

 

흐르는 곡은 이수인작곡의 "석굴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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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의 묘소  (0) 2006.01.09

 

 

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8.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름 :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소개 : 조선 중기 무신.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 등을 지내고 사복시주부로 활약

출생 :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

자/호 : 자-여해(汝諧), 시호-충무(忠武)

사망 : 임진왜란 발발중 1598년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던 도중 유탄에 맞아 전사

저서 :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쉽게도 성웅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한다. 문헌(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평소 과묵하고 잘 웃지 않는다셨으니 얼마전 KBS 역사 드라마 '이순신'에서 열연한 김명민의 연기표정이 흡사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다.  모두는 '이순신'에 다시금 열광하였다.

그 이유는 이시대의 영웅 불감증에 의한 갈증이 아니었을까 되짚어 본다. 

이번 드라마에서 재조명된 이순신의 또 다른 고난편을 보고, 漢詩의 깊은 뜻을, 달밝은 밤이면 詩歌를 읊었던 공의 마음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글쓴이: 이요조(검색글기준)

 

 
충무공 이순신

1. 한산도의 밤(閑山島夜吟)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 너머로 칼과 활을 비추네 (이은상 역)(水國秋光暮 驚寒?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수국추광모 경한안진고 우심전전야 잔월조궁도)

 

2. 한산도의 노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나.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何處一聲羌笛 更添愁)(한산도 월명야 상수루 무대도 심수시 하처일성강적 갱첨수)

 

3. 무제육운(無題六韻)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에 에는 양 쓰린 이 마음.(簫簫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膽 傷心似割肌)(소소풍우야 경경불매시 회통여최담 상심사할기)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山河猶帶慘 漁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산하유대참 어조역음비 국유창황세 인무임전위)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 했던고 재우치던 곽자의(郭子儀) 그리웁고나, 몇 해를 원수막이 해놓은 일들 이제와 돌아보매 임만 속였네. (이은상 역)(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회복사제갈 장구모자의 경년방비책 금작성군기)

 

4. 선거이 수사를 떠나 보내면서(贈別宣水使居怡)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 사생결단 같이 하였소.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들고는 내일이면 우리 서로 나뉘겠구려. (이은상 역)(北去同勸告 南來共死生 一杯今夜月 明日別離情)(북거동권고 남래공사생 일배금야월 명일별리정)

 

5. 진중에서 읊음(陣中吟)...(1)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으로 위태한 몸. (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
바다에 맹세함에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서해어용동 맹산초목지)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다 사양하리오. (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

 

6. 진중에서 읊음(陣中吟)...(2)
이백년 누려 온 우리나라가 하루 저녁 급해질 줄 어찌 아리오. (二百年宗社 寧期一夕危)(이백년종사 영기일석위)
배에 올라 돛대 치며 맹세하던 날 칼 뽑아 천산 위에 우뚝 섰었네. (登舟擊楫日 拔劍倚天時)(등주격즙일 발검의천시)놈들의 운명이 어찌 오래랴 적군의 정세도 짐작하거니 (虜命豈能久 軍情亦可知)(노명개능구 군정역가지)
슬프다 시 구절을 읊어 보는 것 글을 즐겨 하는 것은 아닌 거라네 (慨然吟短句 非是喜文辭)(개연음단구 비시희문사)

 

7. 진중에서 읊음(陣中吟)...(3)
한 바다에 가을바람 서늘한 밤 하용 없이 홀로 앉아 생각하노니 (水國秋風夜 ?然獨坐危)(수국추풍야 초연독좌위)
어느 께나 이 나라 편안하리오 지금은 난리를 겪고 있다네. (太平復何日 大亂屬玆時)(태평복하일 대란속자시)
공적은 사람마다 낮춰 보련만 이름은 부질없이 세상이 아네. (業是天人貶 名猶四海知)(업시천인폄 명유사해지)
변방의 근심을 평정한 뒤엔 도연명 귀거래사 나오 읊으리. (邊優如可定 應賦去來辭)(변우여가정 응부거래사)

 

8. 무제(無題)...(1)
병서도 못 읽고서 반생을 지났기로 위태한 때 연마는 충성 바칠 길이 없네. (不讀龍?過半生 時危無路展?誠)(불독용도과반생 시위무로전규성)지난 날엔 큰 갓 쓰고 글 읽기 글씨 쓰기 오늘은 큰 칼 들고 싸움터로 달리노라. (峨冠曾此治鉛? 大劒如今事戰爭)(아관증차치연참 대검여금사전쟁)마음엔 저녁 연기 눈물이 어리우고 진중엔 새벽 호각 마음이 상하누나. (墟落晩烟人下淚 轅門曉角客傷情)(허락만연인하루 원문효각객상정)개선가 부르는 날 산으로 가기 바쁘려든 어찌타 연연산(燕然山)에 이름을 새기오리. (凱歌他日還山急 肯向燕然勒姓名)(개가타일환산급 긍향연연륵성명)

 

9. 무제(無題)...(2)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론 신하 때 못탄 것 한이로구나 (北來消息杳無因 皆髮孤臣恨不振)(북래소식묘무인 개발고신한부진)소매 속엔 적을 꺽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건질 방책이 없네 (袖裡有??勁敵 胸中無策濟生民)(수리유도최경적 흉중무책제생민)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乾坤點?霜凝甲 關海腥?血?塵) (건곤점참상응갑 관해성전혈읍진)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 보낸 뒤 복근 쓴 처사 되어 살아 가리다. (待得華陽歸馬後 幅巾還作枕溪人)(대득화양귀마후 복건환작침계인)

 

10.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祭死亡軍卒文)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그대 혼들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이은상 역)(觀上事長 爾盡基職 抗??疽 我乏其德 招魂同榻 設奠其亨)(관상사장 이진기직 항료연저 아핍기덕 초혼동탑 설전기형)

 

출처 : 忠武公 李舜臣.


새해연휴, 2006, 1월 2일 '아산 현충사'을 둘러 보았다.

온양온천을 가는 길이었는데...가는 길목 어귀에 있는 이충무공의 묘소를 먼저 참배했다.


 

 

이충무공묘소신도비

 

거북위에 세워있는 이 비는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장제하여 남해 각처에서 적을 무찔러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겨레를 구하신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숙종 19년 서기 1693년 건립) 비문은
조선 제17대 효종때에 영상을 지낸 잠곡 김육이 지었다. 또 하나의 비는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
로서 충청도병마절도사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하고 이인좌의 난때 난군의 급습으로 순국하였다.

 

 

이충무공 신도비

 

 

오후에 현충사에 들렀다.

차례대로 사진을 찍고 그 안내판 문자를 보기싶도록 활자화 했습니다.

 

현충사 성역화 사적기

여기는 이순신장군이 자라나신 거룩한 터전이라  1706년 숙종대왕 때, 이 고장선비들의 힘으로

현충사를 세워 수 백 년 동안 제사를 받들어 왔다. 1931년 일제 때에 빚으로 이 땅을 뺏기게 되자

동아일보사가 앞장서서 온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짓고 충무공의 유적을 보존하게 되었다.

1962년 박 정희 대통령이 국가 원수가 된 뒤로 충무공의 구국정신으로 민족지도 이념을 삼고자

특별한 분부를 내려 경내를 십만 여 평으로 넓히고 사당을 새로 세워 나라와 국민들의 갈 길을 밝히니

이 성역화 사업이야 말로만인이 칭송하는 일이요 이로부터 이곳은 우리민족의 복전이 될 것이다.

1969년 4월 28일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로 잘 단장되어 있었다.

이 길을 오르며 비슷한 연배의 부부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말 한 마디에 쉽게 공감이 가서였다. 이순신장군님 팬이라는 말에...

무슨 말이, 어떤 표현이 더 필요할까? 팬이라는 말에...한민족 한 핏줄임이 끈끈하게 다가오는데야~

 

 

본전(本殿)

 

 이 본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성금으로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이 건립한 것입니다.
염숙하고 경건하게 참배하시기 바랍니다.
● 묘소는 이 곳에서 9Km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충사 본관 경내

 

 

'현충사' 라는 현판의 글씨가 낯 익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체입니다.

 

 

영정

 

 

분향 도우미

 

 

분향을 하고 되돌아 나오며,

 

 

동행을 하게된 부부 역시나 대전에 사시면서도 한 번도 올 수 없었노라십니다.

드라마를 보시고 느낀 바 많아 참배겸 여행겸 오셨다셨습니다.

 

 

제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살아 생전엔 고난의 연속이었는데...후세에서라도 편히~~

 

 

아래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반송의 멋진 모습들 입니다.

 

 

 생가에 들렀습니다.

 

 

옛집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사시던 집으로 종손
이 대대로 살았으며 일부는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 뒤편에는
충무공의 위패(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가묘(집안내 사당)가 있어 매년
기일(돌아가신 날: 음력 11월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충무정(忠武井)

 

이 충무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로서 현재는참배객의 식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깨끗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충무공의 생가

 

바로 옆에 소화기 보이시죠? (관리가 잘 되는 것 같아)마음에 흡족!!

 

 

인걸은 간 데 없고...무심한 낙숫물만......똑, 똑,

 

아주 정갈한 장독대입니다.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두 그루가 쌍을 이루고 호령하듯 그 위풍을 자랑하고
있어 현충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 이 곳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이 은행나무 옆에서
활쏘기 훈련을 하셨기에 충무공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충정의 숨결이 서려있는 나무라는데 그 상징성이
큰 나무이다. 나무높이 20m, 나무둘레는 각각 460cm(whk), 420cm(우)로 웅장한 모습이며 특히
가을날 노란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현재 충청남도 도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수명이 길고 수형(樹形)이 웅장하며 병충해가 없어 정자목(亭子木)으로 많이 심었으며 열매인 은행은 식용으로
귀하게 먹으며 최근에는 은행잎에서 심장병 치료약 성분을 추출하여 약재로 이용하고 있다.

 

 

나란히 쌍으로 서 있는 은행나무

 

 

바로 이 자리에서 활도 쏘시고...이충무공의 氣가 서린 것 같은 은행나무를 쓰다듬으며, 

 

"너도 참 장하구나! 나무야~"

 

 

이 충무공 후손 묘소들

 

 

궁장(활터)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녘과의
거리는 145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숲 사이로 과녁판이 보이시지요? 145m 라네요.

 

 

정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며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산는 것이다. 이 정려는 이충무공 집안에서 난 네분의 충신과 효자 한 분을 표창한 것이다.


1. 충무공 이순신(생략)


2. 강민공 이 완 : 완은 충무공의 조카로서 임진란 때에 충무공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진란이 끝난 다음 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충정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게 되자 몸을불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3. 충숙공 이홍무 : 충무공의 4대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조카인 충정병사 봉상과 함께 싸우다 옥중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이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4. 충민공 이봉상 : 충무공의 5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이인좌의 난 때 난군의 급습을 받아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5. 이제빈 : 충무공의 8대손으로 어머니 임종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이 정려문을 읽으며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올곧은 성정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원래 문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형님 두 분 모두 돌아 가시고 그 조카들을 잘 걷어주셨다니 어찌 그 후손들이 본을 받지 않으리오~~

언제나 반듯하고 선한 결과는 그 끝이 보이나니~~

 

 

이제는 현충사를 나왔습니다.

나오고 보니...입구 왼쪽에 있는 '타루비' 부하들이 얼마나 충무공을 기리다 못해 비를 세운

눈물을 흘리며, 라는 심오한 뜻을 가진 碑

 

 

타루비(墮漏碑)복제품

 

보물 1288호

 이 석비(石碑)는 조선(朝鮮)중기의 명장인 중기의 명장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유덕(有德)을 추모(追募)하기 위해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宣祖) 36년(1603)에 세워졌다.
석비의 형태는 화문(花文) 대석(臺石)위에 연화(蓮花)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우고, 운문(雲文)과 연(蓮)봉오리형으로 이루어진 개석(蓋石)을 얹었으며, 비문에는 비의 명칭에 대한 유래(由來)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써 있는데,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 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양陽人思洋祐而望其碑즉漏必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중국양양사람들은 양우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것이니라.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바퀴 천천히 다 돌고나니 어느새 서산에 해가 까무룩~ 지고있었습니다.

을유년은 그 분에게로 새삼 가까이 다가간 한 해였습니다.

병술년, 새해 첫 나들이를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한 해를 엽니다.

올곧은 우국충정의 그 마음, 감히 그림자라도 뒤따라 보고자,

 

 

 

 

사진/글: DAIM 시티N 여행마스터 이 요조

 

 

 

 

 

 

 

▼검색글

李 舜臣 :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선조 때의 명장.
[개요]

이순신 영정, 이상범이 제작했으며 1932년 6월 현충사 중건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출생과 가족관계]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 )·열( )·면( )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임진왜란 때의 행적]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징비록 懲毖錄〉). 원균은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막하 장령들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터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다(→ 한산도대첩).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事大文軌〉 권24의 〈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8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이순신의 전사에는 의자살설[擬自殺說]이 남게 되었다. 즉 그것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과 더불어 7년 전란에 위태로운 전투를 몇 십 회나 치르면서도 그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인품과 문학]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高尙顔:당시 삼가현감)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끼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泰村先生文集〉 권3).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1에는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는 시〉·〈무제육운 無題六韻〉·〈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漢譯)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는데 그중에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은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朴惠一 글

인평대군 묘(麟坪大君 墓) 및 신도비,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인평대군의 제문을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네 임금이 직접 짓고 쓰신 어제어필을
비석에 새긴 것인데 인평대군묘 좌측에 비각을 짓고 두 개의 쌍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합니다.



인평대군 신도비

 

 

 

 

지정번호 : 130
명칭 : 인평대군묘 및 신도비
수량/보유종별 : 일원
소유자(보유자 ): 전주이씨

           인평대군파종중종회
소재지 : 신북면 신평리 산 46-1

 지정년월일/고시년월일 92, 6,5

 

 

 


묘역은 곡담이 둘러져 있고 묘비1기 상석1기 문인석 4기(소형2, 대형2)향로석1기 망주석2기 장명등1기가 배치되어 있다. 묘역봉분 좌측에는 비신이 없는 귀부가 있어 또다른 비석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묘비에는 유명 조선국 인평대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경공지묘 복천부부인오씨부좌(有明朝鮮國麟坪大君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忠敬公之墓 福川府夫人吳氏 左)의 명문과 무술구월초삼일(戊戌九月初三日) 의 건립기문이 있다.

상석의 고석(鼓石)은 사면에 사자상이 양각으로 조식되어 있고 문인석, 장명등의 재질은 대리석이다. 묘역은 묘전을 장대석으로 치장하였고 장명등은 안상문(眼像文),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하였다.

원형의 호석을 두른 봉분은 직경 550, 높이 175cm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을 진설할 때 사용하였던 판석이 놓여있고 마주하여 묘비의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문인석은 두손으로 홀을 잡고 있는 모습이며 관복의 앞자락에는 운문(雲文)이 조식되어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60여m 전면하단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총고325, 폭115, 두께35cm의 거대한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귀부와 이수는 사실적표현의 정교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은 오정일(吳挺一)이 한것으로 되어 있다.

인평대군 이요(李 )는 인조의 3남, 효종의 동생으로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서예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어 제자백가에 정통했다. 인조8년(1630) 인평대군에 봉해지고 인조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부왕을 남한산성에 효종했다. 인조18년(1640)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효종1년(1650)부터 4차에 걸쳐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병자호란의 비분을 읊은 시가 전해온다. 호는 충경(忠敬)이며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등이 있다.

묘역은 1800여평으로 매우 광대한 편이고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어필로 된 치제문비가 있어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인평대군 묘소인지 몰랐습니다.

한음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묘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경기도 포천 신북면, 경복대학 부근일 거라고 찾아갔는데...

경복대학을 기준으로 경복대학 우편(남측)에 묘소가 있기에 달려갔더니 .....

오성과 한음을 찾아서 다니다가 어부지리로 간 곳이었습니다.

이덕형님의 서원은 경복대학 왼편 (북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묘소 뒷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 했고 석양은 날카롭게 눈을 찔렀습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나 친필을 직접 새긴 것이라기에

궁금해졌습니다.

글시체를 볼 수 있다기에, 전 보았지만 해를 등지고 있어도 카메라도 석양빛을 버거워했습니다.

묘소 둔덕에 올라가니 얼마나 바람이 쎈지 칼바람이었습니다.

묘소 앞에 인석과 석물이 잘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묘소아래 사당도 열어 보았습니다.

사당 앞에는 묘소를 지키는 분의 집인지 인가가 한 채 있엇고

추운 날씨 탓에 텅빈 주차장엔 쌓인 눈이 추위에 엉겨 있었습니다.

귀한 문화재를 만난 기쁨,

추운 날시 탓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포천하면 예로부터 물이 좋아서 온천도 유명하고 막걸리도 유명하지요.

막걸리 두어 잔에 온천욕 보다는 역사탐방을 하고 선조들의 발자취 흔적을 보고

포천 일동 막걸리에 이동갈비도 아무렴 좋지만....

쨍한 바람에 역사적 문화체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바쁜 절구질에도 손 들어 갈 짬 있다는데 이 추위에 어느 하루 포근한 날 없을까요?

자~ 아이들과 함께....우리 떠나 보실까요? 

 

 

 

글:사진/ 이요조

 

 

 

 

인석(人石)혹은 석인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무덤앞에는 이런 인석을 두는 걸 우리 선조들은 좋아했습니다.

무덤을 잘 지키라는 뜻이겠지요.

인석에는 아주 다양한 모습과 종류가 많습니다. 아마 검색해 보시면 재미 있으실 듯~~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인평대군의 묘소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묘소는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경볻대학 가기전 진입로 1Km 전방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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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오성 이항복(李恒福)


오성 :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 경주(慶州)
호 :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별칭 : 자 자상(子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주요저서 : 《백사집》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 ·박사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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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텁텁한 막걸리와 감칠맛 나는 갈비만 논하랴” 한북정맥 산줄기에 기댄 ‘물의 고을’

 

 


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면서 43번 국도를 타고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축석령을 넘으면 포천시 소흘읍(蘇屹邑)이다. 읍소재지인 송우리는 조선시대에 강원·함경의 양도에서 한양으로 드는 길목이었지만, 소나무가 무성해 ‘솔모루’로 불리던 마을답게 제법 운치 있는 동네였다. 허나 이건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즘은 아파트 공사 차량 등으로 매우 번잡하다. 택지개발이 한창인 것이다.

소흘과 이웃한 가산면 궁말은 ‘오성과 한음’의 개구쟁이로 유명한 오성대감,
곧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고향이다. 방축리엔 이항복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금현리 벌판 한쪽의 나지막한 언덕엔 그의 묘소가 있다.

장난기 많아 해학의 현신으로도 불리는 이항복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당파 속에서 살았으나 어느 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평생을 대처럼 꼿꼿이 살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구하려 힘쓰는 등 집권당파의 부당함에 저항하다 관작을 박탈당하고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유배 가는 길에 불렀다는 이 시조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엔 그의 충심이 구절마다 드러나 있는데, 유배지에서 지은 다른 한편의 한시 ‘雪後(설후)’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참 쓸쓸하다.

눈 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시내 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다.

화로에 묻은 불은 열기가 모락모락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유배지 북청의 눈 덮인 산속, 사립문조차 굳게 닫힌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그는 홀로 밤을 구워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그토록 호방하고 장난기로 가득 찬 백사 이항복에게도 이런 쓸쓸한 내면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럽다. 허나 앞길 불투명한 유배지에서 모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유도 엿보인다. 홀로 먹는 그 군밤은 어떤 맛이었을까.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간 그해 5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항복은 곧 복관됐고 청백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살아있을 땐 그토록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죽은 뒤 이렇게 챙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어쨌든 이항복의 유해는 북청에서 이곳 포천으로 옮겨와 금현리 선산에 묻히게 됐다.

풍수가들은 무덤 자리가 주산인 한북정맥 죽엽산(600.6m)에서 청룡이 평지로 쏜살같이 내려왔다가 몸을 틀어 일어서면서 들판으로 달리다 여의주를 물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오르려는 형국, 곧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라 한다.
조선조에 8 정승과 3 대제학, 178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주이씨들의 활약은 조선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이러한 명당자리에 이항복을 잘 모신 덕이라고 한다.

잘 단장된 묘소는 명당이라 그런지 차분한 맛이 있다.
작은 공장들이 붙어있는 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철마다 피어나는 무덤가 들꽃들이 장난꾸러기 대감의 넋을 위로하는데, 이번에 들렀을 때엔 갑자기 묘소 앞 수풀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의 날갯짓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성대감이 이 가난한 길손을 놀래주려고 꿩을 날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빙긋 웃음이 나왔다.

 

이상은 검색글인데...어찌나 공감이 가든지,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다 쓰신 듯, 재 검색해서 저자의 이름을 알려니.....실력이 너므 조아 재검색 불가

 

43번 국도에서 316번 지방도로로 올라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서울 근교의 어설픔이 물결치는 비닐하우스와 공장과 너른 인삼밭과
들판을 가로질러 1.9Km쯤 달리면 오른쪽으로 가산면 금현리 궁말로 가는 길이 나온다.
궁말로 들어서면 큰 길 옆보다 더 많은 공장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어 마을 이름 '궁말'이 풍기는 시골의 정취는 찾아 볼 수 없이 산만하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이 항복이 살다가 고을은 풍광좋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을 터이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


 

바로 이 글도 검색,

더 말해 무엇하리요. 실제가 딱 그러한데...사람의 느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어차피 내가 글을 빌어 그 광경을 옮겨 쓰드라도 이와 다를 바 없어 이 사람의 글을 도용했다 할 것이고 나는 순순히 오성 이 항복님의 묘소 입구 전경은 남의 글을 빌어 올 수 밖에 달리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무척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신북면에서 잘 가르쳐 주셔서 찾아가긴 했는데, 겨울, 짧은 해는 꼴깍 넘어가 버렸다.

묘소까지 이정표가 딱 2개,

그나마 입구 동네가 어둡고 퀴퀴해서 막내 아들 늠이랑 함께 가지 않았으면 이정표도 놓치기 십상 아마도 그 주변을 헤매다가 왔을 것이라~~

 

LG시그마 주유소 부근이랬는데...건너편 SK주유소 옆에 작은 이정표가 있었다.

Sk주유소를 끼고 골목길로 진입

 

이하 설명 불가 .....

 

다음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숱하게 갔던 길을 되돌리고 다시 묻고.....캄캄해졌다.

다행히 이정표를 찾았다. 아들이...


어림짐작으로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마을 어귀에서 동네 사람을 만나다. 동네사람 말로는 외딴 인가가 한 채 있고 바로 그 곳이 생가터란다.

바로 그 위라고 그랬다.

.................찾기 쉬울 것 같았다.

아니~ 다 찾은 거나 진배 없는 줄 알았다.

 

불도 꺼진 빈 집이 한 채가 있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농기구나 넣어두는 창고로 쓰는 듯한 너와집이었다.

 

 

그 집 앞에 비가 하나 있었는데...글씨가 없다.

오랜 풍화작용에 그냥 돌같은 비이다.

이 비석이 맞겠거니 생각하는데...새로 단장한 비가 나란히 서 있다.

검색을 하니 산소 초입에 비가 있다고 된 것을 분명 읽고 갔었다.

벌써  500년이 넘게 흘렀으니~~


나란히 곁에 있는 걸로 어림잡아 아래 사진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 비를 재건립한 듯 하였다.

구릉 아래 평지에 세워져 있는 비(묘소와는 200m 정도의 거리)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한문에 능통하지도 않지만 비석글은 커녕 어느 묘소가 어느 묘소인지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양 언덕으로 묘소가 빽빽하다.

 

한쪽 둔덕에 대충? 15~20기씩? 무덤들도 다들 잘 가꾸어져 있다.

무덤마다 비석마다 높은 관직을 했는지..비석들은 갓머리를 쓰고 있고 묘소앞에는 인섯(석인)

들이 각자 제 주인 무덤을 지키느라 옹송그린 추은 겨울 밤이다.

 

오른 편은 대충 훓어보니...그렇게 오래된 비석들은 없는 듯 하여 골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구릉 입구에 크고 시커먼 향나무가 길을 가로 막을 듯 서 있었다.

무덤들은 양지쪽 잔디가 좋아서 쌓인 눈들은 다 녹았지만....

산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순간...

20m 전방에서 뭔가 휙 나타났다.

일순 멧돼진가 싶어 놀랐으니...개처럼 다리가 긴 걸로 보아...사슴이나 노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

아무튼 아무리 묘소가 좋아도 기분은 으스스했다.

앞 글에서도 찾아 간 분은 까투리에 놀라 웃었다고 했지만  음력 11월 20날 밤은 더구나 묘지뿐인

산 속에서  좀 머시기 했으나 ....산으로 스적 스적 오라갔다.

아들을 끌고 방금 뭔가 산 쪽 숲 사이로 사라진 윗쪽으로 올라가 후래쉬를 터트렸다.

 

아니면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에.

 

선조들 묘소 위로는 자손이 누울리 없으니 그저 생각한 것인데..

집에 와서 검색이미지와 일치 했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참으로 세월은 무섭다.

500여년만에 돌도 풍우에 삭아 내리다니,

곰팡이 피 듯. 검버섯이 피는구나, 돌도 늙으니...


 

부인은 권율장군의 딸이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산 둔덕 밑, 비석(상)까지는 차가 갈 수 있었던 길,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그 외 다른 곳에 있어 둘러보지 못했던  오성 이항복의 '화산서원'/다음 기회에 찾아 볼 기약을 하며,

 

...............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 46호
지정년월일: 1975년 9월 5일
소재지 : 가산면 방축리 산 16-1

 

창건 당시에는 백사서원이었으나 지금의 자리인 '꽃뫼'로 이전하면서 화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1868년(고종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이때 모시던 위패를 땅에 묻었다가 포천유림에 의해 향사를 이어왔으며 사우인 인적전을 복원하고 지속적으로 동·서재 담장, 내·외삼문, 동·서협문, 각 세칸의 필운재와 동강재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1580(선조13)알성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승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입니다. 이항복 선생의 영정과 '문충공배사이항복'이라고 쓴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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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개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0호인 용연서원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선생과 용주 조경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있는 서원이다.

 교통안내
  자가용 : 포천동에서 운천방면 43번 국도 기지리에서 좌회전 344번 지방도 이동 직진,
  신평에서 우회전 진행

 

 

1561(명종16)~1613(광해군5)

포천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5㎞쯤 가면 “서원말” 입구라는 돌 표지판이 왼쪽으로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약 1㎞쯤 가면 신북면 신평리 서원말에 이릅니다. 이곳에 임진란 때 명재상 한음 이덕형과 대제학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청백리 조경을 배향한 용연서원이 있습니다.

이덕형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급하였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만을 위하여 지혜와 정력을 받쳐 난국을 헤쳐나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은 세 정승중의 한분이십니다.
임진왜란하면 이순신과 권율을 생각하는데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분은 유성룡이고 이 두 장군이 공을 세울 수 있게 정치적으로 뒷받침한 분은 이항복과 이덕형입니다. 이덕형은 포천 신북면 용연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이덕형의 자는 명보(名甫), 호는 한음(漢陰)입니다.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입니다.
포천시 자작동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며 양사언 문하에서 수업하고 1580년(선조13) 이항복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홍문관에서 이항복과 같이 근무하였는데 당시 대제학이던 율곡선생이 두 사람을 보고 장차 이 나라의 동량이 될 인물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박사, 수찬, 교리 등을 거쳐 이조좌랑, 대사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25) 31세로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하였습니다.

1573년(선조26) 병조판서에 승진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 당상을 겸임하였습니다.
1595년(선조28)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부체찰사(副體察使)를 지냈으며 1598년(선조31) 38세로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서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訓練都監 都提調)를 겸임했습니다.
1601년(선조3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후의 민심수습과 군대정비에 노력하였습니다.
1602년(선조35)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06년(선조3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1613년(광해군5) 정인홍, 이이첨의 무리가 왕의 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이 역모를 한다고 꾸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였습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폐모론을 일으키니 이를 극렬 반대하다 모든 관직이 삭탈되자 양근(지금의 양평)에 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가 덕형은 필마단기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한 것은 한몸을 바치어 순국하자는 의지요, 명나라에 청병하여 나라를 구한 것은 청사에 빛날 공훈이라 마땅히 공신록에 책록되어야 한다는 유시를 내렸으나 일단 이의가 발의되었으니 책록을 받지 않는 것이 “선비”의 길이요 신자의 도리라 하고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한음의 고상한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음 : 이덕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
호 : 한음 ·쌍송 ·포옹산인, 시호 문익
별칭 : 자 명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작품 : 《한음문고》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정확성 검색 이미지.

 

 

1692년에 '용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경기도 내 남인(南人) 세력의 유력한 근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화를 면했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사우와 강당이 남아 있다. 사우에는 이덕형과 조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주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제도를 새로이 하고 관리를 등용함에 공평하였다.
숙종 17년(1691)에 처음 세워졌으며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되었다.
그 후 용연서원은 경기도 내의 성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해왔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한음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안전하였다.
처음 서원이 세워질 당시에는 사당· 강당 · 동재·서재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사당만 남아있다가 1986년에 강당을 복원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앞면 1칸은 퇴칸 으로 개방하여 제사기능에 들어맞도록 하였다.
양 끝칸의 양쪽 벽에는 이덕형, 조경 두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가운데 칸의 벽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경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풍양(豊壤)
별칭  자 사척 시호 장의(莊毅)
활동분야  군사
 
 
 
 
본문
본관 풍양(豊壤). 자 사척(士惕). 시호 장의(莊毅).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부사(江界府使) 때,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優待)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황간(黃澗) ·추풍(秋風)에서 싸웠으나 패배, 그 뒤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상처를 입었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水原府使)로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율(權慄)을 응원, 이듬해 권율과 함께 행주싸움에서 대승,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이 되고, 그 해 훈련도감의 설치로 우영장(右營將)을 겸임, 1596년(선조 29)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나는 물론 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한다. 통상일반인들은 용연서원 전체가 이덕형(한음)만 모셔진 것으로 안다. 안내도 없이 서원 사당에 들어섰을 때 솔직히 좌우로 영정사진이 전혀 다른 두 사람임에 놀랐다. 어느 분인지는 검색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그냥 왔는데... 이런 일이 있나? 서원을 다녀간 사람들의 오보인가 보다. 왼편의 좀 젊고 둥그스름하고 잘생긴 붉은 옷 입은 사람을 이덕형이라 (대개는)내 세웠다. 내가 알기로는 붉은 옷은 무관을 뜻하는 것 같은데, 오른편 영정은 푸른 옷을 걸치고 연세가 지긋하셨으며  깡마른 얼굴에서 느껴짐이 냉철함을... 포천시에서 꾸미는 홈페이지에는 물론 깡마르고 연만하신 분의 사진이다. 어째서 문무가 나란히 한 곳 서원에 모셔지게 되었는지... 다만 깊이 알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또 하나 이번 일로 재미있는 사실을 안 것은 조경이 권율장군을 응원해 행주산성에서 대승했다는데.. 권율장군의 딸이 바로 오성(이 항복)의 아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당연히 친분이 있고 막역한 세 사람임에 분명하다.

 

 

 

 

오성(이항복)은 가산면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화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한음(이덕형)은 포천읍 자작리에서 출생하여 신북면 소재 용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는 우리시의 명현으로서 맑고 큰 눈을 가지고 재치가 넘치는 어린 도령의 모습을 통하여 어린이에게는 미래의 꿈과 희망을 주고, 어른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용연서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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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안 / 龜(땅이름 구)가 뒤집혀 있다.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아 그 후손들은
이 일대에서 아직도 넉넉하게 잘 사는 것으로 검색글에서 읽었던 것 같다.
서원에서는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대대로 선출하는 듯 강당에는 사진이 순번대로 걸려 있었다.
그 직책을 **라 하던데 ...검색까지는 하고(읽고는/재검색 난이도 ㅎ~) 잊었다.
아마도 성씨가 다른 걸로 보아  덕행이 높으면 그 외손들 중에서도 선출 되는 듯...(제 생각)


 

     

    ▲ 사당의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입니다.
    옆에 붙은 판자를 '풍판'이라고 하는데 그 밑 부분을 둥글게하기도 하고
    직선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풍판'의 형태도 지붕의 형태처럼 윗쪽은 둥글게 하는 형식이 많고
    경상도 지역은 직선으로 나타내는 게  그 특징 같습니다만(검색 후, 제 생각)
    풍판의 역활은 비바람을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재가 길면 무위사 극락보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처럼 지붕이 좌우로 쭈욱 길게 나오니
    비바람이 어느정도는 들이치지 못하겠지만,
    목재난이 심각했던 조선조의 맞배지붕들은 그렇게 긴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지붕의 좌우를 짧게 하고, 대신 풍판을 댔던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겠지요.

     

    좌우로 영정 사진이 둘 있었는데...

                                                           용주 조경선생           

     

     

                                                              이덕형선생

     

     

     

     

     

     

     

     

    찾아가는 길에 /경복대학 오른 편, 경기도 포천 신북면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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