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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오성 이항복(李恒福)


오성 :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 경주(慶州)
호 :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별칭 : 자 자상(子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주요저서 : 《백사집》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지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저작(著作) ·박사 ·정언(正言) ·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로 갔으며,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9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시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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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텁텁한 막걸리와 감칠맛 나는 갈비만 논하랴” 한북정맥 산줄기에 기댄 ‘물의 고을’

 

 


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면서 43번 국도를 타고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축석령을 넘으면 포천시 소흘읍(蘇屹邑)이다. 읍소재지인 송우리는 조선시대에 강원·함경의 양도에서 한양으로 드는 길목이었지만, 소나무가 무성해 ‘솔모루’로 불리던 마을답게 제법 운치 있는 동네였다. 허나 이건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즘은 아파트 공사 차량 등으로 매우 번잡하다. 택지개발이 한창인 것이다.

소흘과 이웃한 가산면 궁말은 ‘오성과 한음’의 개구쟁이로 유명한 오성대감,
곧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고향이다. 방축리엔 이항복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금현리 벌판 한쪽의 나지막한 언덕엔 그의 묘소가 있다.

장난기 많아 해학의 현신으로도 불리는 이항복은 관직에 있는 40년 동안 당파 속에서 살았으나 어느 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평생을 대처럼 꼿꼿이 살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구하려 힘쓰는 등 집권당파의 부당함에 저항하다 관작을 박탈당하고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유배 가는 길에 불렀다는 이 시조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엔 그의 충심이 구절마다 드러나 있는데, 유배지에서 지은 다른 한편의 한시 ‘雪後(설후)’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참 쓸쓸하다.

눈 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시내 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다.

화로에 묻은 불은 열기가 모락모락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유배지 북청의 눈 덮인 산속, 사립문조차 굳게 닫힌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그는 홀로 밤을 구워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그토록 호방하고 장난기로 가득 찬 백사 이항복에게도 이런 쓸쓸한 내면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럽다. 허나 앞길 불투명한 유배지에서 모든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유도 엿보인다. 홀로 먹는 그 군밤은 어떤 맛이었을까.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간 그해 5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항복은 곧 복관됐고 청백리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살아있을 땐 그토록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죽은 뒤 이렇게 챙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어쨌든 이항복의 유해는 북청에서 이곳 포천으로 옮겨와 금현리 선산에 묻히게 됐다.

풍수가들은 무덤 자리가 주산인 한북정맥 죽엽산(600.6m)에서 청룡이 평지로 쏜살같이 내려왔다가 몸을 틀어 일어서면서 들판으로 달리다 여의주를 물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오르려는 형국, 곧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라 한다.
조선조에 8 정승과 3 대제학, 178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주이씨들의 활약은 조선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이러한 명당자리에 이항복을 잘 모신 덕이라고 한다.

잘 단장된 묘소는 명당이라 그런지 차분한 맛이 있다.
작은 공장들이 붙어있는 주변의 어수선함과는 달리 철마다 피어나는 무덤가 들꽃들이 장난꾸러기 대감의 넋을 위로하는데, 이번에 들렀을 때엔 갑자기 묘소 앞 수풀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의 날갯짓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성대감이 이 가난한 길손을 놀래주려고 꿩을 날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빙긋 웃음이 나왔다.

 

이상은 검색글인데...어찌나 공감이 가든지,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다 쓰신 듯, 재 검색해서 저자의 이름을 알려니.....실력이 너므 조아 재검색 불가

 

43번 국도에서 316번 지방도로로 올라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서울 근교의 어설픔이 물결치는 비닐하우스와 공장과 너른 인삼밭과
들판을 가로질러 1.9Km쯤 달리면 오른쪽으로 가산면 금현리 궁말로 가는 길이 나온다.
궁말로 들어서면 큰 길 옆보다 더 많은 공장들이 촘촘이 들어서 있어 마을 이름 '궁말'이 풍기는 시골의 정취는 찾아 볼 수 없이 산만하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이 항복이 살다가 고을은 풍광좋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을 터이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


 

바로 이 글도 검색,

더 말해 무엇하리요. 실제가 딱 그러한데...사람의 느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어차피 내가 글을 빌어 그 광경을 옮겨 쓰드라도 이와 다를 바 없어 이 사람의 글을 도용했다 할 것이고 나는 순순히 오성 이 항복님의 묘소 입구 전경은 남의 글을 빌어 올 수 밖에 달리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무척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도 신북면에서 잘 가르쳐 주셔서 찾아가긴 했는데, 겨울, 짧은 해는 꼴깍 넘어가 버렸다.

묘소까지 이정표가 딱 2개,

그나마 입구 동네가 어둡고 퀴퀴해서 막내 아들 늠이랑 함께 가지 않았으면 이정표도 놓치기 십상 아마도 그 주변을 헤매다가 왔을 것이라~~

 

LG시그마 주유소 부근이랬는데...건너편 SK주유소 옆에 작은 이정표가 있었다.

Sk주유소를 끼고 골목길로 진입

 

이하 설명 불가 .....

 

다음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숱하게 갔던 길을 되돌리고 다시 묻고.....캄캄해졌다.

다행히 이정표를 찾았다. 아들이...


어림짐작으로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마을 어귀에서 동네 사람을 만나다. 동네사람 말로는 외딴 인가가 한 채 있고 바로 그 곳이 생가터란다.

바로 그 위라고 그랬다.

.................찾기 쉬울 것 같았다.

아니~ 다 찾은 거나 진배 없는 줄 알았다.

 

불도 꺼진 빈 집이 한 채가 있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농기구나 넣어두는 창고로 쓰는 듯한 너와집이었다.

 

 

그 집 앞에 비가 하나 있었는데...글씨가 없다.

오랜 풍화작용에 그냥 돌같은 비이다.

이 비석이 맞겠거니 생각하는데...새로 단장한 비가 나란히 서 있다.

검색을 하니 산소 초입에 비가 있다고 된 것을 분명 읽고 갔었다.

벌써  500년이 넘게 흘렀으니~~


나란히 곁에 있는 걸로 어림잡아 아래 사진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이 비를 재건립한 듯 하였다.

구릉 아래 평지에 세워져 있는 비(묘소와는 200m 정도의 거리)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한문에 능통하지도 않지만 비석글은 커녕 어느 묘소가 어느 묘소인지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양 언덕으로 묘소가 빽빽하다.

 

한쪽 둔덕에 대충? 15~20기씩? 무덤들도 다들 잘 가꾸어져 있다.

무덤마다 비석마다 높은 관직을 했는지..비석들은 갓머리를 쓰고 있고 묘소앞에는 인섯(석인)

들이 각자 제 주인 무덤을 지키느라 옹송그린 추은 겨울 밤이다.

 

오른 편은 대충 훓어보니...그렇게 오래된 비석들은 없는 듯 하여 골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구릉 입구에 크고 시커먼 향나무가 길을 가로 막을 듯 서 있었다.

무덤들은 양지쪽 잔디가 좋아서 쌓인 눈들은 다 녹았지만....

산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순간...

20m 전방에서 뭔가 휙 나타났다.

일순 멧돼진가 싶어 놀랐으니...개처럼 다리가 긴 걸로 보아...사슴이나 노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

아무튼 아무리 묘소가 좋아도 기분은 으스스했다.

앞 글에서도 찾아 간 분은 까투리에 놀라 웃었다고 했지만  음력 11월 20날 밤은 더구나 묘지뿐인

산 속에서  좀 머시기 했으나 ....산으로 스적 스적 오라갔다.

아들을 끌고 방금 뭔가 산 쪽 숲 사이로 사라진 윗쪽으로 올라가 후래쉬를 터트렸다.

 

아니면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에.

 

선조들 묘소 위로는 자손이 누울리 없으니 그저 생각한 것인데..

집에 와서 검색이미지와 일치 했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참으로 세월은 무섭다.

500여년만에 돌도 풍우에 삭아 내리다니,

곰팡이 피 듯. 검버섯이 피는구나, 돌도 늙으니...


 

부인은 권율장군의 딸이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산 둔덕 밑, 비석(상)까지는 차가 갈 수 있었던 길,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그 외 다른 곳에 있어 둘러보지 못했던  오성 이항복의 '화산서원'/다음 기회에 찾아 볼 기약을 하며,

 

...............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 46호
지정년월일: 1975년 9월 5일
소재지 : 가산면 방축리 산 16-1

 

창건 당시에는 백사서원이었으나 지금의 자리인 '꽃뫼'로 이전하면서 화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1868년(고종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이때 모시던 위패를 땅에 묻었다가 포천유림에 의해 향사를 이어왔으며 사우인 인적전을 복원하고 지속적으로 동·서재 담장, 내·외삼문, 동·서협문, 각 세칸의 필운재와 동강재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1580(선조13)알성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승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입니다. 이항복 선생의 영정과 '문충공배사이항복'이라고 쓴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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