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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문화재 관리 홈페이지에서)


 

개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0호인 용연서원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 선생과 용주 조경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있는 서원이다.

 교통안내
  자가용 : 포천동에서 운천방면 43번 국도 기지리에서 좌회전 344번 지방도 이동 직진,
  신평에서 우회전 진행

 

 

1561(명종16)~1613(광해군5)

포천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5㎞쯤 가면 “서원말” 입구라는 돌 표지판이 왼쪽으로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약 1㎞쯤 가면 신북면 신평리 서원말에 이릅니다. 이곳에 임진란 때 명재상 한음 이덕형과 대제학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청백리 조경을 배향한 용연서원이 있습니다.

이덕형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급하였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만을 위하여 지혜와 정력을 받쳐 난국을 헤쳐나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은 세 정승중의 한분이십니다.
임진왜란하면 이순신과 권율을 생각하는데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분은 유성룡이고 이 두 장군이 공을 세울 수 있게 정치적으로 뒷받침한 분은 이항복과 이덕형입니다. 이덕형은 포천 신북면 용연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이덕형의 자는 명보(名甫), 호는 한음(漢陰)입니다.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입니다.
포천시 자작동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며 양사언 문하에서 수업하고 1580년(선조13) 이항복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홍문관에서 이항복과 같이 근무하였는데 당시 대제학이던 율곡선생이 두 사람을 보고 장차 이 나라의 동량이 될 인물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박사, 수찬, 교리 등을 거쳐 이조좌랑, 대사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25) 31세로 예조참판에 올라 대제학을 겸임하였습니다.

1573년(선조26) 병조판서에 승진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 당상을 겸임하였습니다.
1595년(선조28)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부체찰사(副體察使)를 지냈으며 1598년(선조31) 38세로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서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訓練都監 都提調)를 겸임했습니다.
1601년(선조3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후의 민심수습과 군대정비에 노력하였습니다.
1602년(선조35)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06년(선조3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1613년(광해군5) 정인홍, 이이첨의 무리가 왕의 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이 역모를 한다고 꾸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였습니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폐모론을 일으키니 이를 극렬 반대하다 모든 관직이 삭탈되자 양근(지금의 양평)에 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가 덕형은 필마단기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한 것은 한몸을 바치어 순국하자는 의지요, 명나라에 청병하여 나라를 구한 것은 청사에 빛날 공훈이라 마땅히 공신록에 책록되어야 한다는 유시를 내렸으나 일단 이의가 발의되었으니 책록을 받지 않는 것이 “선비”의 길이요 신자의 도리라 하고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한음의 고상한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음 : 이덕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
호 : 한음 ·쌍송 ·포옹산인, 시호 문익
별칭 : 자 명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작품 : 《한음문고》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정확성 검색 이미지.

 

 

1692년에 '용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경기도 내 남인(南人) 세력의 유력한 근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이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화를 면했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사우와 강당이 남아 있다. 사우에는 이덕형과 조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주는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제도를 새로이 하고 관리를 등용함에 공평하였다.
숙종 17년(1691)에 처음 세워졌으며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되었다.
그 후 용연서원은 경기도 내의 성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해왔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한음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안전하였다.
처음 서원이 세워질 당시에는 사당· 강당 · 동재·서재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사당만 남아있다가 1986년에 강당을 복원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앞면 1칸은 퇴칸 으로 개방하여 제사기능에 들어맞도록 하였다.
양 끝칸의 양쪽 벽에는 이덕형, 조경 두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가운데 칸의 벽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경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풍양(豊壤)
별칭  자 사척 시호 장의(莊毅)
활동분야  군사
 
 
 
 
본문
본관 풍양(豊壤). 자 사척(士惕). 시호 장의(莊毅).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선조 24) 강계부사(江界府使) 때, 유배되어 온 정철(鄭澈)을 우대(優待)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가 되어 황간(黃澗) ·추풍(秋風)에서 싸웠으나 패배, 그 뒤 금산(金山)에서 왜군을 격퇴시키고 상처를 입었다. 이 해 겨울 수원부사(水原府使)로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禿山城)의 권율(權慄)을 응원, 이듬해 권율과 함께 행주싸움에서 대승,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이 되고, 그 해 훈련도감의 설치로 우영장(右營將)을 겸임, 1596년(선조 29)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어 풍양군(豊壤君)에 봉해졌다
 

 

나는 물론 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한다. 통상일반인들은 용연서원 전체가 이덕형(한음)만 모셔진 것으로 안다. 안내도 없이 서원 사당에 들어섰을 때 솔직히 좌우로 영정사진이 전혀 다른 두 사람임에 놀랐다. 어느 분인지는 검색에서 찾아보기로 하고 그냥 왔는데... 이런 일이 있나? 서원을 다녀간 사람들의 오보인가 보다. 왼편의 좀 젊고 둥그스름하고 잘생긴 붉은 옷 입은 사람을 이덕형이라 (대개는)내 세웠다. 내가 알기로는 붉은 옷은 무관을 뜻하는 것 같은데, 오른편 영정은 푸른 옷을 걸치고 연세가 지긋하셨으며  깡마른 얼굴에서 느껴짐이 냉철함을... 포천시에서 꾸미는 홈페이지에는 물론 깡마르고 연만하신 분의 사진이다. 어째서 문무가 나란히 한 곳 서원에 모셔지게 되었는지... 다만 깊이 알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또 하나 이번 일로 재미있는 사실을 안 것은 조경이 권율장군을 응원해 행주산성에서 대승했다는데.. 권율장군의 딸이 바로 오성(이 항복)의 아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당연히 친분이 있고 막역한 세 사람임에 분명하다.

 

 

 

 

오성(이항복)은 가산면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화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한음(이덕형)은 포천읍 자작리에서 출생하여 신북면 소재 용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는 우리시의 명현으로서 맑고 큰 눈을 가지고 재치가 넘치는 어린 도령의 모습을 통하여 어린이에게는 미래의 꿈과 희망을 주고, 어른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용연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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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안 / 龜(땅이름 구)가 뒤집혀 있다.

 

 



숙종 18년(1692)에 ‘용연(龍淵)’이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아 그 후손들은
이 일대에서 아직도 넉넉하게 잘 사는 것으로 검색글에서 읽었던 것 같다.
서원에서는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대대로 선출하는 듯 강당에는 사진이 순번대로 걸려 있었다.
그 직책을 **라 하던데 ...검색까지는 하고(읽고는/재검색 난이도 ㅎ~) 잊었다.
아마도 성씨가 다른 걸로 보아  덕행이 높으면 그 외손들 중에서도 선출 되는 듯...(제 생각)


 

     

    ▲ 사당의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입니다.
    옆에 붙은 판자를 '풍판'이라고 하는데 그 밑 부분을 둥글게하기도 하고
    직선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풍판'의 형태도 지붕의 형태처럼 윗쪽은 둥글게 하는 형식이 많고
    경상도 지역은 직선으로 나타내는 게  그 특징 같습니다만(검색 후, 제 생각)
    풍판의 역활은 비바람을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재가 길면 무위사 극락보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처럼 지붕이 좌우로 쭈욱 길게 나오니
    비바람이 어느정도는 들이치지 못하겠지만,
    목재난이 심각했던 조선조의 맞배지붕들은 그렇게 긴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지붕의 좌우를 짧게 하고, 대신 풍판을 댔던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겠지요.

     

    좌우로 영정 사진이 둘 있었는데...

                                                           용주 조경선생           

     

     

                                                              이덕형선생

     

     

     

     

     

     

     

     

    찾아가는 길에 /경복대학 오른 편, 경기도 포천 신북면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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