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 을유년의 닭은 문제의 알을 많이도 낳은 알의 한 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김치 기생충알 파동, 줄기세포 난자(卵子) 파동까지~
한국사회를 집단 우울증으로 까지 몰고 간...
12월 나 역시 모질게도 우울했다.
맨 처음 황우석 박사의 손을 쉽게 들어 준 나는 초지일관 분명 말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혼자 생각하며 반드시 기대에 부응 할 옳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 했었다.
한국의 과학자들의 관계는 매우 좁다고 했다.
몇 안되는 과학자중에서도 특히나 황우석과 노성일은 예사 친분관계가
아닌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한다.
나는 11월서부터 불거져 나오던 사건이 12월내내 내 마음까지도 뒤흔들어
'누가 암까마귀인지 누가 숫까마귀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문득 오성과 한음의 관계가 떠
올랐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부터 배우던 오성과 한음
경기도 포천 어디쯤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검색을 하고 12월
21일 눈 온뒤 매서운 날
막내 아들넘과 같이 포천으로 향했다.
먼저 그나마 찾기가 쉬운 한음 이덕형의 '용연서원'부터 찾아갔지만 ,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제 글은 맨 아래, 위치로 연결)
오성과 한음은 누구인가요? 호를 가진 이덕형(李德馨)이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우리에게는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라는 일화로 오랫동안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이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親舊)로 지내면서 장난(作亂)이 심(甚)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膽力)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들은 한음부인을 오성을 초청(招請)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한음에게 칙간(집x則間)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칙간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따.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끼어다가 모아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놓았던 정을 도로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오성은 권율이 있은 방문에 주먹을 찔러놓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문학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외의 이야기 어느 시골 길을 지나다 똥이 마려워 똥을 눕자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러자 하는수없이 길가에서 앉아있다가 번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쓰고있던 흐름한 번거지를 버서 그 똥을 덮은 다음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기 금으로된 새가있으니 꼭 누루고 있어요 하면서 그 곳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그 지나가던 사람은 오성이 오지않자 모자 밑에서 있는 금새를 손을 넣어 꼽잡아 주웠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인변, 떵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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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鰲城) 이항복과 한음(漢蔭) 이덕형의 우정(友情)
오성(鰲城)은 바로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 명종 11-광해군 10) 선생이며, 그의 아호(雅號)는 백사(白沙)입니다.
호종(扈從) 1등 공신(功臣)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어,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그를 오성대감 (鰲城大監)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최종 벼슬은 영의정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변호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적극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死後)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입니다.
오성이 함경도로 귀양가는 길에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인 철령(鐵嶺)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어, 후일(後日) 이 시조 내용을 광해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사마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다리.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3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 명종 16-광해군 5)은 아호가 한음(漢蔭)이며, 오성 이항복과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명군(明軍)이 오자 그들을 맞이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서울 수복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한 죄(罪?)로 파직되어 병사(病死)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들은 광해군은 울면서 한음을 복관(復官)시켰다고 합니다. 한음의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입니다.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우리나라 의주(義州)]에서 찾게나.”
“아닐세. 만일에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거든 자네는 나의 시체를 노룡[蘆龍 ; 명나라 황성 (皇城)]에서 찾도록 하게.”
서로의 사후(死後)까지 부탁하며 비장하게 작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우국지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던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북청(北靑)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자 평생의 지기(知己)를 잃게 된 한음은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진 후 연일 귀가(歸家)할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합니다.
萬古英雄(만고영웅)을 손고바 혀여보니 아마도 劉伶(유령) 李白(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0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유별나게 돈독했던 우정에 관한 숱한 일화(逸話)들은 지금까지도 야담(野談)으로 각종 책(冊)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10년 차이가 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兄)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는 공자(孔子)님과 주자(朱子)님도 인정하신 관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전통을 오래도록 지켜 내려왔습니다.
나는 동급생(同級生)이 많아 서로 친구로 지냈습니다.
영향으로 군대에서 군번(軍番) 순서를 따지듯이 요즘에는 친구도 한두 살 차이 범위 내에서만 사귀게 되어, 그 이상만 차이가 나면 무조건 형(兄)이나 선배(先輩)로 깍듯하게 대접하는 신풍토(新風土)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이른바 386세대의 운동권 출신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면서도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선후배사이에 일일이 학번(學番)을 따져서 한 학년이라도 차이가 나면 군대(軍隊)의 고참(古參)과 졸병(卒兵) 관계처럼 서로를 상대 (相對)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관행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386세대가 젊은이들의 주류(主流)가 되면서부터 보다 널리 일반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아무리 대학교 입학 선배라 할지라도 후배가 선배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는 요청을 하기 전에는 선배가 함부로 후배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무조건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고, 심지어는 학과(學科) 후배나 동아리(서클) 후배들에게 체벌 (體罰)까지 加(가)하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도 입학년도(入學年度), 즉 학번(學番)이 늦어 후배가 된 사람에게 기강(紀綱)을 잡겠다며 매를 때리거나 함부로 하대(下待)를 한다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인권적(人權的) 측면에서 이보다 더 부당(不當) 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해 상반기(上半期) 연예가(演藝街)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는 ‘방송국 개그맨 선후배 구타사건’의 경우도 알고 보니, 나이가 한참 어린 선배가 나이 많은 후배 개그맨을 구타하여 입원까지 시킨 사건이었다더군요. 30년 군사문화의 잔재(殘滓)는 역설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선후배간 질서에까지 심대(深大)한 영행을 끼쳤고, 입학 년도(入學年度)의 학번(學番)이나 나이 한 두 살 차이 때문에 양자(兩者)가 종속관계 내지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악습 (惡習)은 이제 너무 일반화(一般化) 내지 고착화(固着化)한 감(感)이 있습니다.
오성(鰲城)과 한음(漢蔭) 두 분처럼 서로 마음에 맞으면 나이 몇 살 따지지 않고 평생지기(平生知己)로서 지낼 수 없단 말입니까?
예문/검색글 포함
'용연서원'은 굳게 닫혀있었고 뭐라고 써 논 글은 겨우 새겨 듣고는 담배가게로(슈퍼) 갔더니 안내도 하지 않고 선뜻 열쇠를 건네 준다. "신분증을 못 가지고 왔지만 서원 사진을 좀 찍을까 하려고요" 란 말이 전달이 됐나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 간 서원은 한음 이덕형의 초상화와 제사드리는 위패와 문중에서 선출한 서원을 감찰하는 이들의 사진이 아래 준비하는 제당에 걸려있었고 몇가지 전해 내려오는 제문을 새긴 목판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한음의 서원을 보고 오성 '이항복'의 묘소를 어렵게 (위치가 찾기 어려움)물어 물어(신북 면사무소에 문의) 찾아 들어가니 시간은 그리 깊진 않아도 인가가 없으니 캄캄절벽이었다. 그나마 눈이 있어 좀 덜한 것 같아 보였다. 쌓인 눈을 밟고 가지니 뽀드득 뽁뽁...소리가 났다. "어머니...어두운데...어느 게 '오성'님의 묘손지 알아 볼 수 있겠어요?" 그 부근 묘소는 이씨의 선산으로써 포천 국회의원 이한동님의 선소인 듯 두 언덕을 나뉘어서 수십개의 봉분이 너무나 잘 손질되어서 막상 어느 게 '이항복'님의 묘소인지 구별이 안갔지만, "따라 오너라 본시 조상의 무덤 윗쪽에다가는 자손의 묘를 쓰지 않는 법이니 맨 위에 있는 묘소일게다" 어림잡아 올라갔더니 어둠속에서 산짐승이 후다닥 놀라 숲에서 뛰어 달아난다. 혹? 멧돼진가 싶어 겁이 더럭났으나 다리가 긴 모습이 건들건들 뛰어 가는 것으로 봐선 오루나 사슴 뭐 그런 것 같아 보였다.
무섭기도하고 대충 사진을 찍어서 집에서 검색사진과 비교를 하니 역시나 내 말이 맞긴 맞았다. 맨 위에 계신 것이었다.
이로써 오성과 한음의 발자취도 밟았는데...오성 이덕형님의 서원도 있다한다.
오성과 한음 1,2,3으로 나눠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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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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