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3.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6.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8.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름 :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소개 : 조선 중기 무신.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 등을 지내고 사복시주부로 활약

출생 :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

자/호 : 자-여해(汝諧), 시호-충무(忠武)

사망 : 임진왜란 발발중 1598년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던 도중 유탄에 맞아 전사

저서 :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쉽게도 성웅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한다. 문헌(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평소 과묵하고 잘 웃지 않는다셨으니 얼마전 KBS 역사 드라마 '이순신'에서 열연한 김명민의 연기표정이 흡사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다.  모두는 '이순신'에 다시금 열광하였다.

그 이유는 이시대의 영웅 불감증에 의한 갈증이 아니었을까 되짚어 본다. 

이번 드라마에서 재조명된 이순신의 또 다른 고난편을 보고, 漢詩의 깊은 뜻을, 달밝은 밤이면 詩歌를 읊었던 공의 마음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글쓴이: 이요조(검색글기준)

 

 
충무공 이순신

1. 한산도의 밤(閑山島夜吟)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 너머로 칼과 활을 비추네 (이은상 역)(水國秋光暮 驚寒?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수국추광모 경한안진고 우심전전야 잔월조궁도)

 

2. 한산도의 노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나.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何處一聲羌笛 更添愁)(한산도 월명야 상수루 무대도 심수시 하처일성강적 갱첨수)

 

3. 무제육운(無題六韻)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에 에는 양 쓰린 이 마음.(簫簫風雨夜 耿耿不寐時 懷痛如?膽 傷心似割肌)(소소풍우야 경경불매시 회통여최담 상심사할기)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山河猶帶慘 漁鳥亦吟悲 國有蒼黃勢 人無任轉危)(산하유대참 어조역음비 국유창황세 인무임전위)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 했던고 재우치던 곽자의(郭子儀) 그리웁고나, 몇 해를 원수막이 해놓은 일들 이제와 돌아보매 임만 속였네. (이은상 역)(恢復思諸葛 長驅慕子儀 經年防備策 今作聖君欺)(회복사제갈 장구모자의 경년방비책 금작성군기)

 

4. 선거이 수사를 떠나 보내면서(贈別宣水使居怡)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 사생결단 같이 하였소.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들고는 내일이면 우리 서로 나뉘겠구려. (이은상 역)(北去同勸告 南來共死生 一杯今夜月 明日別離情)(북거동권고 남래공사생 일배금야월 명일별리정)

 

5. 진중에서 읊음(陣中吟)...(1)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으로 위태한 몸. (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
바다에 맹세함에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서해어용동 맹산초목지)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다 사양하리오. (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

 

6. 진중에서 읊음(陣中吟)...(2)
이백년 누려 온 우리나라가 하루 저녁 급해질 줄 어찌 아리오. (二百年宗社 寧期一夕危)(이백년종사 영기일석위)
배에 올라 돛대 치며 맹세하던 날 칼 뽑아 천산 위에 우뚝 섰었네. (登舟擊楫日 拔劍倚天時)(등주격즙일 발검의천시)놈들의 운명이 어찌 오래랴 적군의 정세도 짐작하거니 (虜命豈能久 軍情亦可知)(노명개능구 군정역가지)
슬프다 시 구절을 읊어 보는 것 글을 즐겨 하는 것은 아닌 거라네 (慨然吟短句 非是喜文辭)(개연음단구 비시희문사)

 

7. 진중에서 읊음(陣中吟)...(3)
한 바다에 가을바람 서늘한 밤 하용 없이 홀로 앉아 생각하노니 (水國秋風夜 ?然獨坐危)(수국추풍야 초연독좌위)
어느 께나 이 나라 편안하리오 지금은 난리를 겪고 있다네. (太平復何日 大亂屬玆時)(태평복하일 대란속자시)
공적은 사람마다 낮춰 보련만 이름은 부질없이 세상이 아네. (業是天人貶 名猶四海知)(업시천인폄 명유사해지)
변방의 근심을 평정한 뒤엔 도연명 귀거래사 나오 읊으리. (邊優如可定 應賦去來辭)(변우여가정 응부거래사)

 

8. 무제(無題)...(1)
병서도 못 읽고서 반생을 지났기로 위태한 때 연마는 충성 바칠 길이 없네. (不讀龍?過半生 時危無路展?誠)(불독용도과반생 시위무로전규성)지난 날엔 큰 갓 쓰고 글 읽기 글씨 쓰기 오늘은 큰 칼 들고 싸움터로 달리노라. (峨冠曾此治鉛? 大劒如今事戰爭)(아관증차치연참 대검여금사전쟁)마음엔 저녁 연기 눈물이 어리우고 진중엔 새벽 호각 마음이 상하누나. (墟落晩烟人下淚 轅門曉角客傷情)(허락만연인하루 원문효각객상정)개선가 부르는 날 산으로 가기 바쁘려든 어찌타 연연산(燕然山)에 이름을 새기오리. (凱歌他日還山急 肯向燕然勒姓名)(개가타일환산급 긍향연연륵성명)

 

9. 무제(無題)...(2)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론 신하 때 못탄 것 한이로구나 (北來消息杳無因 皆髮孤臣恨不振)(북래소식묘무인 개발고신한부진)소매 속엔 적을 꺽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건질 방책이 없네 (袖裡有??勁敵 胸中無策濟生民)(수리유도최경적 흉중무책제생민)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乾坤點?霜凝甲 關海腥?血?塵) (건곤점참상응갑 관해성전혈읍진)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 보낸 뒤 복근 쓴 처사 되어 살아 가리다. (待得華陽歸馬後 幅巾還作枕溪人)(대득화양귀마후 복건환작침계인)

 

10.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祭死亡軍卒文)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그대 혼들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이은상 역)(觀上事長 爾盡基職 抗??疽 我乏其德 招魂同榻 設奠其亨)(관상사장 이진기직 항료연저 아핍기덕 초혼동탑 설전기형)

 

출처 : 忠武公 李舜臣.


새해연휴, 2006, 1월 2일 '아산 현충사'을 둘러 보았다.

온양온천을 가는 길이었는데...가는 길목 어귀에 있는 이충무공의 묘소를 먼저 참배했다.


 

 

이충무공묘소신도비

 

거북위에 세워있는 이 비는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장제하여 남해 각처에서 적을 무찔러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겨레를 구하신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숙종 19년 서기 1693년 건립) 비문은
조선 제17대 효종때에 영상을 지낸 잠곡 김육이 지었다. 또 하나의 비는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
로서 충청도병마절도사 한성부 우윤 등을 역임하고 이인좌의 난때 난군의 급습으로 순국하였다.

 

 

이충무공 신도비

 

 

오후에 현충사에 들렀다.

차례대로 사진을 찍고 그 안내판 문자를 보기싶도록 활자화 했습니다.

 

현충사 성역화 사적기

여기는 이순신장군이 자라나신 거룩한 터전이라  1706년 숙종대왕 때, 이 고장선비들의 힘으로

현충사를 세워 수 백 년 동안 제사를 받들어 왔다. 1931년 일제 때에 빚으로 이 땅을 뺏기게 되자

동아일보사가 앞장서서 온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짓고 충무공의 유적을 보존하게 되었다.

1962년 박 정희 대통령이 국가 원수가 된 뒤로 충무공의 구국정신으로 민족지도 이념을 삼고자

특별한 분부를 내려 경내를 십만 여 평으로 넓히고 사당을 새로 세워 나라와 국민들의 갈 길을 밝히니

이 성역화 사업이야 말로만인이 칭송하는 일이요 이로부터 이곳은 우리민족의 복전이 될 것이다.

1969년 4월 28일

 

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로 잘 단장되어 있었다.

이 길을 오르며 비슷한 연배의 부부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말 한 마디에 쉽게 공감이 가서였다. 이순신장군님 팬이라는 말에...

무슨 말이, 어떤 표현이 더 필요할까? 팬이라는 말에...한민족 한 핏줄임이 끈끈하게 다가오는데야~

 

 

본전(本殿)

 

 이 본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성금으로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이 건립한 것입니다.
염숙하고 경건하게 참배하시기 바랍니다.
● 묘소는 이 곳에서 9Km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충사 본관 경내

 

 

'현충사' 라는 현판의 글씨가 낯 익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체입니다.

 

 

영정

 

 

분향 도우미

 

 

분향을 하고 되돌아 나오며,

 

 

동행을 하게된 부부 역시나 대전에 사시면서도 한 번도 올 수 없었노라십니다.

드라마를 보시고 느낀 바 많아 참배겸 여행겸 오셨다셨습니다.

 

 

제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살아 생전엔 고난의 연속이었는데...후세에서라도 편히~~

 

 

아래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반송의 멋진 모습들 입니다.

 

 

 생가에 들렀습니다.

 

 

옛집

 

이 집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사시던 집으로 종손
이 대대로 살았으며 일부는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 뒤편에는
충무공의 위패(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가묘(집안내 사당)가 있어 매년
기일(돌아가신 날: 음력 11월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충무정(忠武井)

 

이 충무정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족들이 쓰시던
우물로서 현재는참배객의 식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깨끗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충무공의 생가

 

바로 옆에 소화기 보이시죠? (관리가 잘 되는 것 같아)마음에 흡족!!

 

 

인걸은 간 데 없고...무심한 낙숫물만......똑, 똑,

 

아주 정갈한 장독대입니다.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두 그루가 쌍을 이루고 호령하듯 그 위풍을 자랑하고
있어 현충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 이 곳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이 은행나무 옆에서
활쏘기 훈련을 하셨기에 충무공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충정의 숨결이 서려있는 나무라는데 그 상징성이
큰 나무이다. 나무높이 20m, 나무둘레는 각각 460cm(whk), 420cm(우)로 웅장한 모습이며 특히
가을날 노란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현재 충청남도 도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수명이 길고 수형(樹形)이 웅장하며 병충해가 없어 정자목(亭子木)으로 많이 심었으며 열매인 은행은 식용으로
귀하게 먹으며 최근에는 은행잎에서 심장병 치료약 성분을 추출하여 약재로 이용하고 있다.

 

 

나란히 쌍으로 서 있는 은행나무

 

 

바로 이 자리에서 활도 쏘시고...이충무공의 氣가 서린 것 같은 은행나무를 쓰다듬으며, 

 

"너도 참 장하구나! 나무야~"

 

 

이 충무공 후손 묘소들

 

 

궁장(활터)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녘과의
거리는 145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숲 사이로 과녁판이 보이시지요? 145m 라네요.

 

 

정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며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산는 것이다. 이 정려는 이충무공 집안에서 난 네분의 충신과 효자 한 분을 표창한 것이다.


1. 충무공 이순신(생략)


2. 강민공 이 완 : 완은 충무공의 조카로서 임진란 때에 충무공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진란이 끝난 다음 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충정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게 되자 몸을불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3. 충숙공 이홍무 : 충무공의 4대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조카인 충정병사 봉상과 함께 싸우다 옥중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이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4. 충민공 이봉상 : 충무공의 5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이인좌의 난 때 난군의 급습을 받아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5. 이제빈 : 충무공의 8대손으로 어머니 임종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이 정려문을 읽으며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올곧은 성정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원래 문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형님 두 분 모두 돌아 가시고 그 조카들을 잘 걷어주셨다니 어찌 그 후손들이 본을 받지 않으리오~~

언제나 반듯하고 선한 결과는 그 끝이 보이나니~~

 

 

이제는 현충사를 나왔습니다.

나오고 보니...입구 왼쪽에 있는 '타루비' 부하들이 얼마나 충무공을 기리다 못해 비를 세운

눈물을 흘리며, 라는 심오한 뜻을 가진 碑

 

 

타루비(墮漏碑)복제품

 

보물 1288호

 이 석비(石碑)는 조선(朝鮮)중기의 명장인 중기의 명장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유덕(有德)을 추모(追募)하기 위해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宣祖) 36년(1603)에 세워졌다.
석비의 형태는 화문(花文) 대석(臺石)위에 연화(蓮花)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비신(碑身)을 세우고, 운문(雲文)과 연(蓮)봉오리형으로 이루어진 개석(蓋石)을 얹었으며, 비문에는 비의 명칭에 대한 유래(由來)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써 있는데,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 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양陽人思洋祐而望其碑즉漏必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중국양양사람들은 양우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것이니라. 1603년 가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바퀴 천천히 다 돌고나니 어느새 서산에 해가 까무룩~ 지고있었습니다.

을유년은 그 분에게로 새삼 가까이 다가간 한 해였습니다.

병술년, 새해 첫 나들이를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힘차게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한 해를 엽니다.

올곧은 우국충정의 그 마음, 감히 그림자라도 뒤따라 보고자,

 

 

 

 

사진/글: DAIM 시티N 여행마스터 이 요조

 

 

 

 

 

 

 

▼검색글

李 舜臣 :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선조 때의 명장.
[개요]

이순신 영정, 이상범이 제작했으며 1932년 6월 현충사 중건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출생과 가족관계]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 )·열( )·면( )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임진왜란 때의 행적]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징비록 懲毖錄〉). 원균은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막하 장령들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터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다(→ 한산도대첩).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事大文軌〉 권24의 〈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8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이순신의 전사에는 의자살설[擬自殺說]이 남게 되었다. 즉 그것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과 더불어 7년 전란에 위태로운 전투를 몇 십 회나 치르면서도 그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인품과 문학]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高尙顔:당시 삼가현감)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끼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泰村先生文集〉 권3).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1에는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는 시〉·〈무제육운 無題六韻〉·〈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漢譯)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는데 그중에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은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朴惠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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