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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첫날이다.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석굴암의 부처가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이참에 검색하여 문화유산이나 공부하며 짚고 넘어갈 일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경주여행

몇 번을 왔어도 석굴암은 중간에 한 번 본 듯도 싶고 아닌 듯도 하여
이참에 가족(친정형제) 모두는 석굴암을 타킷으로 삼았다.

여장을 풀고 간단한 점심을 먹고 토함산으로 올랐다.
모두는 초등, 어린시절 힘들게 올랐던 기억만 간직하고들 있다.
석굴암가는 길은 강원도 길마냥 꼬불꼬불 구절양장이다.

눈이 쌓였다.
이 길을...이 산을 수학여행 온 뒷날 아침 곤히 자는 어린 넘들을(초등 5~6학년 때)
일깨워 아직은 컴컴한데 이른 아침을 먹여 도시락을 하나씩 건네어 주고 등 떠밀던
그 곳이 아닌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두는 일출도 모르고..그저 시커먼 굴안에 아니 먼저 무서운 사천왕 얼굴을
먼저 보고는 컴컴하고 눅눅한 굴안에 버티고 앉은 석굴암 석불을 그냥 한바퀴 돌았을 뿐이다.

경주 불국사 여행은 부모님 주신 돈으로 그저 효자손이나 암마용 등두둘게 정도만 구입한 뒤
다보탑 그림이 새겨진 나무필통을 사면 기분이 그저 좋아진 그런 기억밖에 없다.

집에서는 양치질 습관도 잘 안되었다가...죄 가방에서 꺼내 온 치약치솔을 물고는 그것도 한참을
닦다가 바가지나 물컵이 딸려 우물가에서 치약이 너무 매워 맴맴거렸던 웃지못할 기억도,

이렇게 높은 토함산을(정상까지 해발 720)땀을 닦으며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그저 올랐으니~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뿐,

언니 말이 더 우습다.
힘들어서 나무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집고 올라와서는, 석굴암 입구부터 으스스해서 그 지팡이로
부처님 떵침을 놓았더란다.

아마도 무지한 자기 탓으로 훼손되어 유리보호막을 한 듯 하다는 말에 모두는 배를 잡았다.
무지 얌전한 성격에 어디서 그런 생각이?
"이번에 가믄 용서를 구해~" 그러면서 다들 웃었다.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 매표소부터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2km가까이 되는 성 싶으다.

그 것만해도 힘들다.

석굴암안에는 촬영을 못하게 되었으나 여러님들과 공유하자는 욕심에 그만,
부처님 이마에 보석은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했는데, 쳐다본 순간 내 누에 반짝! 비쳐왔다.
복원했나보다.  이마 중앙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 Vitalli Chaconne - Zino Francescatti

어린아이의 놀란 표정이 비친 모습이 더 재미난다.

나오는 길에 석양을 만났다.
일출대신이다.

 

 

 

 

 

 

 

 


 
석굴암 :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습니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하여 둥글게 쌓아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그래서 석굴암은 건축물이라 합니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돌판에 조각하여 붙이고 그로부터 반듯반듯한돌로 교묘하게 쌓아올려서 천정을 돔형으로 만들고 천정중심엔 연화무늬를 새긴 커다란돌로 마무리하여 본존상의 바로위에 놓이게한 정말 그렇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허나 불상은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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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 송창식

 

 

흐르는 곡은 이수인작곡의 "석굴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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