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신라인의 숨결이 흘러 흘러 머금어 전해지는 포석정
경주 여행 3일째,
떠나오는 길에 포석정엘 들렀다.
역시 예전 수학여행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가차이 들어갈 수 없도록 얕은 돌로 담장을 둘러쳤을 뿐,
그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왕이 술잔을 띄우면 흘러 흘러 자기 앞에 올 때까지 詩를 한 수 지어야
한다고
요는 풍류를 즐기는 어른들의 놀이터쯤으로 새겨들었다.
입장료는 쌌다.
매표소에 안내판 글에는 내가 알고 있던 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역사가 씌어져 있었고,
경애왕이 고려의 침략으로 이 자리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먼 훗날, 후손들은 그저 객관적인 평가로는 ...
"음 그래, 그랬으니까 패망했지...그따위 향락에 빠져 노닥였으니...최후를 여기서 맞지"
인과응보적인 단순한 생각으로 누구든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버릴테니...
과거 일제강정기 때 우리 왕조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낭설이라고 하는 말도 있고,
그런데...그 게 아닌 듯하다.
새로운 학설에 귀를 기우려 보니...정말 그 말이 어쩌면 기우였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 전문적인 새로운 학설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대체적으로 경주는 입장료가 좀 비싼 편이다.
예사로 4.000원 5,000원인데 500원이다. 포석정안에 아무도
없다.
아저씨 한 분이 비를 들고 포석정 내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송림이 울창하다.
포석정 물길이 깨어져 지금 같아서는 그 깨어진 곳의 이음새를 막아 어찌 물이
돌아 돌아
흐른다면 죽었던 경애왕이 되살아 나고...패망한 신라가 다시 번성의 꽃을 피우련만
어찌, 그 게...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대체? 어떻게 물이 흘렀을까?
그 물은 남산 자락을 깔고 앉은 포석정은 남산계곡에서 대통으로(지금의 수도관)
이어져 큰 돌거북의 입으로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그 돌거북은 어느 무덤으로 옮겼을 거라
추정해 보지만 찾을 길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복모양같다고 하여 전복(포어:鮑魚)鮑石亭地
정말 나는 鮑石亭이 전복에서 따온 이름인 것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물길 바깥경계는 전복껍질이요.
안쪽 경계는 전복살의 모양이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전복모양으로 만든 것도 다 과학적인 이치가 닿아 흐르는 물의 와류를 이용해서 술잔이
흐르다가 꺽이다가 하기를 아홉구비를 지나...자기 앞에 당도하면 그동안 詩를 한 수 마련했다하니
얼마나 멋진 곳인가?
그러나 그렇게 늘상 즐기고 노는 자리가 아니라...
경주남산 자락은 바로 불교신앙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한다.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난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한다.
안내 팻말에 씌인대로 하자면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는데,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신성한
제사장소이기도 했다는 반론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포석정은 연회도 베푸는 곳이었지만 신성한 남산자락 아래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단다.
포석정이 자리한 곳이 경주에서 춥기로 유명한 냉골이라는 산동네 바로 앞인데 경애왕은
미리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고 이리로 피신을 왔다는데, 연회가 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공격을 받은 때가 음력 11월이였다는데...양력으로는 12월 말이나 1월 초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을 천 년 전에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엄동설한 야외에서 술자리를 벌렸을리 만무할터....
포석정엔 물마저 얼어 붙었을 한겨울이니 그건 억측에 불가하다는 주장이 자명한 사실이라는
학설이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타당성 짙은 내용이라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경주를 방문할 때는 등산을 했으면 한다.
경주의 상징인 토함산과 경주의 성지인 남산을...
경주남산은, 신라천년 불교문화의 흔적이 산골짜기마다 탑과 불상과 절터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노천 불교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우는 경주남산은 나즈막하여 오르는데 1시간정도의 거리로 신라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산으로,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고적답사를 겸해서 오는 아름다운 산!
그 남산 아래에 위치한 나정과 포석정도 둘러 보면서 신라의 흥망과
신라천년의 세월을 느껴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발걸음을 뒤로하며, 이 번 여행에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역사관을 올곧게 정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여행에서 얻은 귀한 소득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앎을 위하여~ 나의 여행은 계속해서 지속 될 것이다.
글: 이요조
*현재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는 포석정
잔을 띄워 술을 마시도록 즐겼다는 별궁의 하나이다. 남산의 저수지와 같은 곳에서 물을 대나무통이 이어 이곳까지
끌어왔다는데 대단하다.
경주 포석정 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에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통일신라시대 때에 만들어 졌으며,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고, 옛 신라 왕실의 향락의 쉼터이고, 포석정에서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데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잔을 마셔야한다고 ‘난정수희도’에 기록되있다.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다 빠져 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이나 5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를
돌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포석정은 유체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유체학적으로 와류(회돌이: 주 흐름의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현상)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보존상태는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조 구조만이 남아있다. 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던 데에서‘어무산신무’ 또는 ‘어무상심무’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1호이며 왕과 신하들이 쉬면서 시를 짓거나 잔치를 하던곳이다.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http://www.shilla.or.kr/historic-remains/nam_san/po_suk_jung.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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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적 1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입니다.
포석정하니까 혹시 정자를
떠올리실 분도 계실테지만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이 포석정입니다.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다고 전복포자를 써 포석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석정은 지금까지 신라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둘러앉고,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는데..
술잔이 멈추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비운의 현장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이 침입해오는지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신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중요한 이유로 얘기돼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포석정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이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성지인 경주 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포석정.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가로 5m, 세로 10m 정도 크기의 인공수로로 이뤄져있고..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아
포석정으로 불립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927년, 음력11월, 겨울에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때 왕은 왕비
궁녀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줄도 몰랐다는 기록이..
그 근거였습니다.
경애왕은 정말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붙잡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견훤이 쳐들어온 시기는 음력 11월 한 겨울입니다.
이때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제기의 첫번째 이유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동 11월이면 양력으로 치면 12월.
이때 추워서 야외에서 논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이때는 물이 얼어서 유상곡수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무리 왕이 정치에 등한히 해도..
적이 지금
쳐들어오는데 거기서 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견훤의 군대는 경주에서 불과 25km떨어진 영천을 지나..
시시각각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습니다.
포석정의 위치도 의문스럽스만 합니다.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이 남산자락에 있는 것입니다.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130여곳의 절터, 400여개의 불상과 탑들이 들어서 있는 신라의 성지입니다.
따라서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은 정신세계 신앙 그자체. 그 만큼 남산내에 남아있는 유적이 많고..
포석정 자체도 남산내에
포함되는 곳으로..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성소의 의미로 파악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산에 위치한 포석정은 성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엔 신라 건국과 역사에 관련된 수 많은 유적지들이 자리하고
있죠.
포석정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나정.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로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의 첫 궁궐터라는 창림사지도 포석정 근처에 있습니다.
포석정에서 불과 1km 거리에 위치한
오릉.
박혁거세를 포함한 신라 4명의 박씨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왕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남산은 박씨에게 상당히 중요한 발상지입니다."
"포석정이 성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삼국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유포석정연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로 해석되고 있는 유포석정연오.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다(유)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록에서 유자는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중 경덕왕 유백률사 이야기에서는..
"절에 갔다"이지 "놀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이 포석정에 유했다고 하면 그것을 놀러갔다고 번역을 하는데..
다른 부분과 연결하면 무조건 놀러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왕이 절에 갔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을 왕이 절에 놀러갔다 이렇게 번역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중요한 그속에서 그걸 보면 유포석정..
포석정에 갔다는 그저 놀러갔다고 번역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포석정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인식돼 왔습니다.
그 결과 경애왕은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다 피살된 인물로, 포석정은 신라멸망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시대 기록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신라멸망의
당위성, 새로운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기록이라고 볼 때..
그이후 놀이문화 퇴폐 향략문화로 전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입니다.
신라의 혼이 담겨 있는 많은 유적지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
그 주변 상황을 볼 때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성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성스러운 지역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연회를 베풀고 놀이를 즐겼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외국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공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지였는데요.
안압지는 674년 문무왕때 만들어진 인공연못입니다.
지난 1975년 발굴 당시 이 연못에서 3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엔 연회때 사용하던 놀이기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에서는 이런 흔적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이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석정은 도대체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포석정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의 헌강왕 관련 기록에 처음 나타납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임금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옆에 있던 신하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왕만이
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장소였으며..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만났다는 것
또한..
이곳에서 행해진 제사의식을 통해 신과의 교류가 이뤄졌음을 뜻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엔 왕들이 참여해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고..
왕과 신령의 세계가 직접 교류한다는 것이
왕권의 안정, 특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며..
다른 일반인이 신과 교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신과 교류해 왕권의 안정 국가의
안정을 기원해..
왕이 직접 제사하는 친사의 경우가 많았던 것이 바로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러면 경애왕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포석정에 간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포석정에서
이뤄졌던 제사의식이 호국제사인 팔관회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때는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팔관회를
열은바 있습니다.
신라의 팔관회는 토속신앙과 불교의식이 결합된 것으로 호국제사의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이 호국제사는 고려때까지
이어졌으며 모두 매년 11월에 개최됐습니다.
견훤의 침입을 받은 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았던 때도 11월이었습니다.
팔관회는 주로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했던 의식이었다는 공통점을 나타냅니다.
시기가 일단 음력 11월로 맞고 궁예도
11월에 했고 고려때도 11월. 신라도 기록에보면 11월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던 그때..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았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닐까요?
"왕건에게 군사적 요청을 내놓은 상태에서..
아마도 왕은 왕실 또는 측근과 남산에 있는 호국신에게 나라가 지탱될
수 있게..
또는 왕건의 군대가 빨리와서 견훤의 군대를 막아달라는 제사의례를 지내러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포석정은 호국제사를 지내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석정이 이처럼 성스러운 곳이었다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가 이뤄졌다는 돌로 만든 물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것을 유상곡수라고 합니다.
유상곡수 - 굽이치는 물위에 술잔흐른다는
뜻으로..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진 포석정.
당시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유상곡수터만이 남아있습니다.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즐겼다는 유상곡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유상곡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방탕한 연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상곡수는 구곡으로 흐르는 물가에 술잔을 띄우고 술한잔 먹고 시한수 낭독하고..
자연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정을 시로 표현해..
후대에 남기는 청류의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당시 문인이나 현사들이 놀이를
하는 것 중에 가장 깨끗하고..
왕들은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법으로 이것을 했습니다."
이처럼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 행해지는 신라의 성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놀이를 벌이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포석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유상곡수터만을 가지고 포석정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포석정이 놀이터가 아니라
호국제사가 행해지던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해석들이 제기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포석정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유상곡수터만 남아 있지만 신라시대 포석정 주변엔 수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남산을 포함한 포석정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성지였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포석정.
현재 포석정 근처의 일부 건물터만이 발굴됐지만..
이 일대에
대한 발굴이 좀 더 진행되고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포석정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펌글)
포석정 안에서 담장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민가를 촬영해 보았다.
경주는 문화관광도시라...허가없이 취향대로 집을 짓거나 개보수 할 수 없다한다.
경주시내에는 민가는 거의 기와지붕을 필수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주변경관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리라~~
남산을 벗어나며 간혹 양옥이나 스라브지붕이 눈에 띄었지만...대개는 기와집으로 여느 집은
문화잰가 보다 할 정도의 멋진 집들도 더러더러 눈에 띄었건만,
포석정에 바로 인접한 이 집 지붕은 조금 그렇다.
말이 기와지 흉내만 낸 기와모양의 프라스틱 같기도 하고...분명 흙으로 구운 기와는 아니다.
폼새가 영 그렇다.
그 느낌이나 모양새가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여실하다.
경주에서는 그 많은 입장료들을 받아...주민들의 개보수도 제한하면서 지붕 이을 돈은 어떻게
장기 저리 융자로 마련을 해주는 방법은? 분명 있겠지만...
흙으로 구운 기와보다 나은 실용성을 따졌는지. 경제성을 따졌는지 몰라도,
제대로 된 기와집이었으면 하는 나의 욕심은 너무 사사로운 이기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