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활짝 핀 궁궐의 봄!

대한문을 들어서서 중화문 앞길까지 펼쳐지는 왕벚꽃길, 석조전 분수대의 수양버들,
석어당의 살구꽃, 함녕전 후원의 모란꽃밭...
정관헌의 철쭉꽃!

덕수궁에서는 봄맞이 야간 개방행사를 개최합니다.

 

문화재청 제공 행사일정  ☞   ◀click~ 

 

 

 

덕수궁의 봄

 

 

-그 선들의 재발견-

 

하늘을 향해 부드러운 곡선을 결코 오만하지도 않게 살짝 치켜올린 듯한 그 단아한 선이여~

고운 여인의 한복의 선에서,,,그 버선의 코끝에서 또는 궁궐의 팔작지붕에서....그런 일체감을 만난다.

 

아름다움이다.

정적인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않고도 궁글리듯이 가만히 나타내는 정숙함이다.

 

터벅대며 걷는 습관인 나는 어느새 조신한 발걸음으로 내딛고 있었다.

--나는 궁에 들어온 게야~---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기와라고 해서 다 똑같지는 않다네요.

암기와 숫기와가 따로 있답니다. 우습지요?  암키와는 넙적하고, 수키와는 둥근 터널처럼 둥글다네요.

1개의 암키와는 2개의 수키와를 바치고 있답니다.

 

 

여기에는 우리 조상님들의 우주 사상이 담겨 있답니다.

음양오행론이라는 사상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이  사상으로 모든 사물과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였다는군요.

 

기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시면.... 기와의 종류(click)

 

창호지를 위쪽만 바른 이유는?

 
1. 통풍을 위해서 - 사람이 생활하고 있지 않은 목조건물이므로 통풍을 위하여
2. 관람객편의를 위하여- 관람객분들이 건물 내부르 보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3. 구멍뚫기 방지용이라네요.

 

 

 

 

함녕전 문창살로  모란 정원이 보인다.

 

 

 

석어당은 채색되지 않은 단청의 나무색이 은은하고 소박한 잘감을 더하게 한다.
석어당은 2층건물로서 계단이나 그 짜임새가 튼실하고 2층의 마루 칸막이가 없이 넓게 뚫렸다는데 들어가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석어당의 마당에서는 인목대비가 폐위된 광해군을 꿇어 앉혀놓고는 죄목을 들어 취조했다는 곳이다.

 

 

석어당은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

겨울에는 덧문을 내리고 여름에는 들어 올리는 건축적 공간(활용)미학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석어당의 매력에 푹 빠져 들었다.

 

 

  

 

 

 

 

 

 

 

 

 

 

 

 

 

 
겨울에는 온통 은빛세계로 변하는 곳!
그래서 덕수궁은 결혼기념 촬영이나 사진 동호회 모임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웨딩촬영 예약은 주말만 피하시면 가능합니다.

 

 

고궁 웨딩촬영 예약이 주말에는 관람객들로 복잡하니까...좀 어려울텐데....용케도~

중국에서 한참을 머물면서....좀 새카맣고 덜 예쁜 신부(야외촬영)들만 보았는데....역시 서울 신부는

속살도 박속같이 곱고....얼굴도 예쁘더군요 얼굴정면 사진 있는데...보여드려요??

 

 

 

전, 동물들에게 말을 잘 건넨답니다.

이 날도 비둘기야 잠깐이면 돼!....잠깐! 했더니...목고개까지 제대로 쭉 뽑아주고는 날아가더군요.

ㅎㅎㅎ

바닷가에 가서는 갈매기 시선을 잡았으면 좋겠는데...제가 그만 비둘기야하고 불렀지 뭡니까...

당연 반응이 없었지요.

아차 고쳐서 갈매기야~ 하고 불렀더니....가로등에 앉은 갈매기가 정말 고개를 돌려 쳐다보더군요(믿거나 말거나지만요)

 

 

전 궁궐의 벽이 이렇게 붉은 색인 줄 몰랐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붉은 색은 왕의 색이었지요. 심지어 왕후들의 손때 묻은 가구들 마저 주칠(붉은 칠)한 가구로 일반 민초들은 붉은 가구를 사용하지도 못했지요.

 

 

궁궐 아궁입니다. 

 

 화재나 끄으름 연기, 냄새를 피하기 위하여 참숯으로만 난방을 하였다네요.

 

굴뚝들입니다. 굴뚝을 찍으시는지...모란을 찍으시는지...봄을 찍으시는지...영 비켜나시질 않아서

기다리다..... 그냥 모두 함께~~ 업어왔지요.

 

 

 

정원입니다. 아름다운 뒷정원으로 가니 반송도 있고 더 자연스런 숲정원 길이 있습니다.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덕수궁 미술관은 전시 준비기간이고....석조전은 공사중이었습니다.  현대식 분수가 고궁과 잘 어우러집니다.

 

 

 

고궁 나들이 필수는 이제 카메라가 되버린 듯....

 

역사해설가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함들....

 

  

 

 

현대와 근대의 건물이 어우러지는 조화입니다.

 

.....달이 떴군요!! (달과 잡상들)

*잡상/액운을 방지한다거나 악마의 접근을 막는다거나 다복을 누린다거나 하는 것 들의 상징물입니다.

 

 

 

 

궁전·누문(樓門)·신전(神殿) 등 전통적인 지붕의 네 귀 위에 장식하는 짐승 모양의 기와. 맞배집의 경우 내림마루 끝에, 우진각이나 팔작집의 경우 추녀마루 끝에 한 줄로 장식한다.
건물 수호의 상징과 장식을 겸하고 있는데, 신선·법승·기인·괴수 등의 상을 형상화하여, 안쪽에 용머리를 두고 3·5·7 등의 홀수로 늘어 앉힌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상와도(像瓦圖)》에 의하면, 내림마루나 귀마루의 끝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① 대당사부(大唐師傅) ② 손행자(孫行者) ③ 저팔계(猪八戒) ④ 사화상(沙和尙) ⑤ 이귀박(二鬼朴) ⑥ 이구룡(二口龍) ⑦ 마화상(麻和尙) ⑧ 천산갑(穿山甲) ⑨ 삼살보살(三煞菩薩) ⑩ 나토두(羅土頭) 등의 상을 적고 있는데, 이는 《서유기》의 등장인물 또는 중국 토신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가장 앞쪽의 말을 탄 도인상(道人像)을 선인상(仙人像)이라 하고 뒤에 오는 상들은 주수(走獸)라 하는데, 10주수상으로는 ① 용(龍) ② 봉(鳳) ③ 사자(獅子) ④ 기린(麒麟) ⑤ 천마(天馬) ⑥ 해마(海馬) ⑦ 물고기[魚(어)] ⑧ 해치 ⑨ 후[吼(후)] ⑩ 원숭이 등이 있다.
이들이 잡상으로 지붕 위에 놓이게 된 까닭은 전문(殿門) 수호와 불법홍보(佛法弘報)를 위함이었다.
한국에서는 19세기 이후의 것만 남아 있는데, 손오공상이 가장 앞에 놓여져 있고 대당사부인 현장의 상은 없다.
그 숫자도 집의 규모에 따라 다른데, 경복궁 경회루(慶會樓)는 11개, 숭례문(崇禮門)은 9개, 돈화문(敦化門)은 7개,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은 5개 등이다.
여기에는 모두 손오공상이 앞에 있고 그 뒤로 사자·해치·봉 등이 있어 《서유기》의 내용만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이들은 모두 궁전이나 누문의 지붕에서만 보일 뿐 사찰 지붕에서는 그 예를 볼 수 없다./백과사전

 

 

 

 현재 덕수궁의 정문이다. 덕수궁의 본 정문은 정전의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광무 황제가 덕수궁을 중건하면서 동쪽에 있는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명칭을 바꾸어서 정문으로 삼았다.
광무 8년(1904) 소실된 뒤 1906년에 중건하고 高宗 황제가 이름을 대한문이라 개칭한 것이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당시 조정의 중신으로서 예조판서, 한성판윤을 역임한 南廷哲의 글씨이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원주를 사용하고,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돌계단이 설치되었던 것인데, 도시계획에 의해 1968년 덕수궁 담장이 안쪽을 옮겨지고 문도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문은 한일합방과 高宗 승하 때 군중이 문 앞 광장에 모여 항일운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검색글

 

 해는 저물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먼저 갔다가 나오는 길에 돌담길을 찍었습니다.

철망 휀스로 쳤던 때가 있었다니....말이나 됩니까?

이 돌담길은 얼마나 파란만장했던지

일본인들이나 그 친일파들이 우리의 모든 궁궐을 유희화, 공원화 시키려 애를 썼지만...우린 복구해냈습니다.

하마트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덕수궁 돌담길....

봄,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아름다운 길중에 하나입니다.

 

 

글을 쓰려니....한 번은 써지지만....두 번은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난 번에 써 둔 글이 있어서 설명이 필요하시다면...졸필이지만 첨부해 봅니다.

 

 

글/사진: 이요조

 

 

 

▶ click~ 

B0301>463014" name=itemBox> 덕수궁은 그 자체가 모두 미술품

 

 

 

 

 

 

 

 

 

 

 

선사유적지는  입장료, 주차장 사용료 전부 무료입니다. 입구에 비치된 방명록만 작성하면 됩니다.

 

 

한탄강을 막 건느면 어느 방향에서 오시던지 이정표 안내가 잘 되어있습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문화재명 : 전곡리 선사유적지
지 정 별 : 국가사적 제 268호
소 재 지 :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28-1번지
             일원, 고능리
지 정 일 : 1979. 10. 2.

 

 

깍아지른 듯한 한탄강 유역, 우리나라 최고의 구석기 유적지
연천군 전곡읍 선사유적지는 올해로 15회째를 맞아 축제가 열린다.


전곡리안의 숨소리" 라는 테마를 가지고 해마다다른 슬로건을 설정하여 구석기문화와 선사문화를 교육,놀이,체험등을 통해 배우고 즐기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형 축제이다.

 

구석기문화를 이론과 실습을 통해 배워보는 구석기체험학교와 구석기문화를 게임과 놀이를 통해 익히는 선사시대 체험파크, 연천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농경생활 문화체험 등 체험 중심의 가족참여형 축제로 세계최초의 구석기문화 행사로 해마다 매년 60~70만명이 방문한다.

 

개최기간 :2007년 5월 4일~ 5월 8일
개최장소: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선사유적지 일원

 

 

 

지난 초여름, 임진강 유원지에 놀러갔다 오면서 들렀던 곳이다.

그 때는 이미 덥고 지쳐서 너른 유적지를 입구에서 아주 잠깐만 보고 왔을 뿐이다.

그 면적이 방대하여 발굴하느라  나무들은 사라지고 아주 너른 평지가 되었다.

꾸준히 둘레에 나무를 심어서 그런대로 공원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소풍나와서 맘껏 구르기에 딱 제격이다.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구석기축제가 열린다니~ 그 날 특별 운행하는 관광열차를 타고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도 하고, 체험도 한다면 더 이상 바람직한 놀이가 없을 성 싶다.

 

 

사진에는 빠졌는데..미군병사 보웬의 보고서가 꼼꼼하게 기록된 것이 있었다.

매끄러운 글씨체는 아니지만  삐뚤빼뚤한  한글도 기록된 것이 보였다.

단순하게 보아넘기지 않았던 미군병사 한 사람에 의해 이 곳이 선사시대의 유적지로 훌륭한 선사시대의 보고가 될 줄이야~~

 

 

학창시절에 무던히도 외우고 시험치던...문제가 이 곳에? ㅎㅎㅎ

 

무조건 암기한 것이라...참으로 난감할지고~

  

 

 

 

 

 

 

 

주먹도끼~ (무언가 연장이 있어야 사냥해 온 짐승을 해체 할 게 아닌가?)

 

 

강유역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인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렇게 너른자리에 차지한 것 보면...이 곳은 선사시대의 도시쯤??

 

 

 

발굴 당시의 사진

 

 발굴당시 현장모습

 

 

유적지를 발견하면 절대 손을 대지말고 신고부터 해야한다.

이렇게 고 김원용 교수의 세세한 계획과 검토를 토대로 발굴되어진....유적지 발굴현장은 신중을 기한다.

 

 

토층전시관 전경

 

일일이 토층 분석을 하고....

 

선사유적지를 발굴한 당시의  발굴기준점을  표식

 

발굴 현장보존

 

 

(생활)유물전시관

 

 

 

 

 

 

 

 

 

 

 

 

 

가능한 아름다운 여행, 연천을 계속해 볼 참이다.

유적지도 많은 연천, 아마도 연천여행을 끝내고 나면 ....묵묵히 흐르는 말없는 임진강, 한탄강은 알고 있을 유구한 한반도의 역사를 저들은 무언으로라도 가르쳐 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아픈 상흔을....

 

글:사진/이요조

 

 

 

 

 

봄이면 꽃길이 예쁘다.  특히 야생초화에 신경을 더 쓴 것 같아 바람직한 모습을^^*

 

 

기차

  • - 전철 : 1호선 동두천역(05:25~22:09)하차
    ※하차 후 경원선이나 동두천역앞 버스 이용
    - 경원선(신탄리행): 동두천역 매시 50분 출발 - 전곡역 하차 - 행사장(도보20분)
    (동두천역 첫차 06:50. 전곡역 22:27)

버스

  • - 3300번 : 성남(분당)호선 - 가락동시장 - 잠실 - 어린이대공원후문 - 노원역 -의정부 -동두천 -전곡역앞 하차 -행사장(도보20분)
    - 39, 39-1, 39-5 : 도봉산역 - 의정부 - 동두천 - 전곡역하차 - 행사장

승용차

  • - 3번국도 : 의정부(서울외곽순환도로이용시 의정부IC) - 동두천 -초성검문소 - 한탄강다리(한탄대교)건너기 전 우측도로 - 한탄강기차역앞 좌회전 -관람객 주차장
    - 3번국도 : 의정부 - 동두천 - 초성검문소 - 한탄강다리(한탄대교)직진 - 백병원지나 구석기 사거리에서 좌회전 - 관람객 주차장 서울(자유로) - 파주(37번국도) - 문산 - 적성 - 전곡선사유적지- 관람객주차장

관광이벤트열차 운행

  • 5월5일 당일만 운행
    한국철도공사 관광열차 운행
    신촌역 출발 - 용산 - 청량리 - 성북 - 의정부 - 전곡역

관련 문의

  • 연천 전곡리 구석기축제 추진위원회 (031)839- 2561-3
    E-mail 문의 : goosukgi@gg.go.kr

 

 

 

분위기가 좀 그랬나요?

위엣사진들은 박물관 안에나 있지 주변 자연 경관은 또 그지 없이 좋답니다.

사진 몇 장 올려볼까요?

 

 

 

 

아마도 5월이면 보리밭 이랑 한가득  바람에 파도가 일 듯 다 자란 보리가 넘실대지나 않을까?

 

 

곳 곳의 설치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한바퀴 다 돌고 났더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게 정화되더이다.

 

 

 기념품점에서

 

 

 

 

 

측면에서 바라본 대한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우진각지붕집이다.

德壽宮의 동문으로서 그 명칭이 대안문이었습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1904년 4월 덕수궁 대화재 이후 이를 중건하면서 1906년 4월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이 고종황제께 대안문도 수리할 것을 상주, 고종황제가 대한문으로 고쳐 시행토록 해 본래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임. 

 

 

덕수궁(경운궁)은 선조 임금때 궁궐로 쓰이기 시작하여 광해군, 인조, 고종황제께서 거처하시던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주 무대였으며, 궁궐로서는 유일하게 근대식 전각(석조전, 정관헌)과 서양식 정원, 그리고 분수가 있는 궁궐로서 중세와 근대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경복궁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인왕산 줄기 아래 아기자기한 전각들이 오순도순 정감있게 배치되어 자연스러운 정취가 있으며, 함녕전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후원길은 산책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의 푸른 잔디밭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가는 건널목을 따라 건느면 바로 덕수궁 '대한문' 이다. 모임 또는 만남이나 휴식의 장소가 여의치 않을때 덕수궁은 나무그늘, 꽃그늘이 좋다.

도심지 한가운데에 있는 덕수궁, 그, 덕수궁 미술관을 갔다.

덕수궁 미술관에 걸린 그림보다 덕수궁 자체의 미술품에 더 정신을 앗겼다.

 

 

중화문 ....궁궐로 들어가는 중문

 

선조들의 건축을 보면 조화로움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재미적인 요소이다.
그 재미속에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상상속의 동물, 해태와 용이다.

 

 


해태는 바다에서 사는 상서로운 동물이고 용은 하늘에서 사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이 두 동물은 물과 (또는 비) 연관이 있으므로 화재의 재앙에서 피할 수 있을 거란 재미있는 발상이다.

 

 

龍은 동양에서 즐겨 사용하는 문양인데....용은 상서로운 '지혜'의 의미도 담고 있다.

 

 

중화전

 

즉위식과 조회를 비롯한 주 행사를 치르는 덕수궁의 정전

본래 2층이었으나 1904년해에 불타, 새로 1906해애 1층으로 지음.

소실되기 이전에는 이층으로 이 보다 더 크고 화려 웅장했다고 전한다.

 

 

중화전 마당(上)과 내부(下)

일월오악그림 병풍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 백관의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짐. 보물(819호).

 

 

중화전 어좌

 

사진을 출입구, 바로위의 천정까지 3장을 찍어 연결해 본 것!

 

 

덕수궁 중화전 어좌, 옥좌(玉座)인 이 곳이 왕의 집무를 보는 곳.

 

옥좌의 뒷그림 일월오악도

 

일월도(日月圖)·일월오봉산도(日月五峰山圖)·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고도 합니다.

비교적 큰 규모로 궁궐 어좌 뒤,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혼전(魂殿) 뒤에 비치된 그림으로서 조선 후기에는 항간에서도 일종의 장식화로 민화의 범주에서 그려지기도 하였다. 화면의 대부분을 점하는 다섯 개의 큰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폭포·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포치시켜 좌우균형을 갖춘 매우 도식적인 그림이다.
 
임금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발생이나 기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명·청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 소수 남아 있는 작품은 한국과는 묘사와 채색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발달하여 정교한 필치와 화려한 채색을 사용, 장중한 모습의 정형화된 그림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창경궁 명정전(明政殿)·경복궁 근정전(勤政殿)·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그림들이 대표적입니다 애서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검색발췌-
 

 

석어당은 채색되지 않은 단청의 나무색이 은은하고 소박한 잘감을 더하게 한다.
석어당은 2층건물로서 계단이나 그 짜임새가 튼실하고 2층의 마루 칸막이가 없이 넓게 뚫렸다는데 들어가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석어당의 마당에서는 인목대비가 폐위된 광해군을 꿇어 앉혀놓고는 죄목을 들어 취조했다는 곳이다.

석어당은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

겨울에는 덧문을 내리고 여름에는 들어 올리는 건축적 공간(활용)미학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으로 석조전이 보이도 왼쪽으로 덕수궁 미술관이 보인다.

 

 

▲문종이를 바르지 않은 것은 환풍을 위한 듯...

실제 기거를 한다면 문을 여닫아서 자연스런 통풍이 되지만...닫아둔 상태여서 아마도 환풍을 위해

문종이를 바르지 않은게 아닌가...../개인적인 생각을, ▼

 

 

석조전....지하 통로 모습

 

 

단청이 없어도 아름다운 품위가 깃든, 석어전(2층) 모습이 단아하게 보인다.

 

석조전은 공사중으로  임시 닫겨져 있었다. 

 

석조전
 
대한제국고종황제 집무실 및 접견실로 지은, 10해나 걸린(1900~1909) 서양식 3층 돌집.

서샹긴고전주의양식의 국내최초근대건축,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거쳐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궁중유물 전시관으로 사용.

 

 

 

 

 

덕수궁미술관...덕수궁 입장료 1,000원 미술관 입장료 통상 1,000원이지만 때에 따라 미술관 입장료는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 

 

바깥세상의 근대적인 모습과 중세의 고궁모습의 대비~~

 

 

덕수궁 미술관의 주제는

 

[근대의 꿈아이들의 초상]

 

김기창, 이수억, 진환, 박수근, 이인성, 김영덕님..그 외 다수였다.

우리의 옛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화적이기도 하고...역사적이기도,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어르신들이 보셔도 좋으실 듯..

 

 

관람시간

월요일/휴관

화,수요일 /9:00 ~17:30

목,금요일 /9;00~20:30

토,일요일 /9:00~18:30

 

특별전 관람료

어른/3,000원 어린이 1,500원

 2006. 5. 19. - 7. 30

 

 

미술관 오시는 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2번출구, 2호선 시청역 12번출구

 

덕수궁미술관(www.moca.go.kr)

 

 

미술관에서 바라본 석조전

 

 

분수대

 

미술관 출입구

 

 

미술관 이층, 아름다운 창문 창살!

 

비끼는 햇살이 미술관 이층 낭하 깊숙히 어른거리고.....

 

미술관 창문이기에 더욱 고심했을 방범창~ 아름다움을 잃지않고 외려 더한 듯한 창문!

 

이층에서 내려다 본 미술관 입구 로비

 

이층난간의 한국적인 문양

 

햇빛인지..조명인지...은은하게 격자무늬살을 통해 들어오고....

 

시립미술관에 있다가 덕수궁 미술관에 오니 마치 서양집(남의 집)에 있다가

고향집(본가)에 온 것 같은 포근한 마음이 든다.

 

 

돌기둥과 멋진 현대식 정원을 보며 근대적인 조화로움을 느낀다.

 

 

1938년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정동에 있던 흥천사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물시계)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같이 옮겨 세웠다 한다.

 

 

 

 

다시 대한문으로 나왔다.

덕수궁주변은 볼거리 구경거리가 많다. 미술관, 연극, 요즘 새로 단장된 시청앞 광장까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을에는 유난히 노랗게 물든 은행잎 떨어진 낙엽 길이 아름답다.

 

글/이요조(초록글씨)

 

 

겨울에는 온통 은빛세계로 변하는 곳!
그래서 덕수궁은 결혼기념 촬영이나 사진 동호회 모임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웨딩촬영 예약은 주말만 피하시면 가능합니다.

 

 

대중교통안내
   지하철 1호선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덕수궁 방면
   버스 : 시청 앞 하차

덕수궁에는 주차시설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5-1 (우100-120)
전화 : (02) 771-9951 팩스 : (02) 771-9953

 

 

한국어 무료 안내시간
화/수/목
10:00 10:00 10:00 10:00
11:00 11:00 11:00 11:00
    13:00 13:00
    13:30 13:30
14:00 14:00 14:00 14:00
    14:30 14:30
15:00 15:00 15:00 15:00
덕수궁 문화재안내원(덕수궁관리소, 예약바로가기, 02-771-9955)
우리궁궐지킴이(자원봉사 한국의재발견 예약 www.palace.or.kr 02-723-4206)
우리궁궐길라잡이(자원봉사 서울KYC 예약 www.palaceguide.or.kr 02-2273-2276)
덕수궁 문화재안내원 외국어 무료안내

사전예약필수 (예약시간 15분 경과 시는 자동 취소됩니다.)
문의 02-771-9955,
☞예약바로가기

 

덕수궁돌담길

 

이 길을 연인들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주말이면 이 거리에는 볼거리가 쏠쏠하다. 거리의 악사라든지...이벤트가 멋지다.

그러니 그런 말에는 구애받지 마시도록~~ 더구나 멋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는 길이니 포기하지 마시라!

이 길로 데이트를 했던 우리 부부는 흰머리 희끗해지도록 여지껏 잘 살고 있다.

이 돌담길은 얼마나 파란만장했던지...헐렸다가 안이 훤히 드려다보이는 헨스로 둘러쳐지기도 했던 적이 있다는데...다시 옛모습으로 복원된 담장이라고 한다.

 

궁은 신비스러워야한다. 공원도 아니고 철망이라니...가당키나한 말인가?

 

고궁이 모두 어찌 그렇지 않을까마는 고궁마다의 미술품이 어찌 이것 뿐일까마는...덕수궁 미술관은 처음 가본 터라....덕수궁 미술관을 바삐 향하는 길이라, 덕수궁도 아주 일부분만 찍어왔다.

 

고궁을 살펴본다는 것은 역사를 다시금 알게되고  건축, 조형미에서 우리선조의 얼을 읽을 수 있기에

더 이상 좋은 미술품은 없다고 생각되어 진다.

 

 

 

덕수궁 미술관 가는 길에....이요조

 

 

[아이들이 있는 풍경]

 

20세기초부터 1970년대까지 아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통해, 근대기 '어린이에 대한 인식변화를 사회적` 문화적 맥락속에서 살펴본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 ②번 출구, 2호선 ⑫번 출구 덕수궁내 미술관이 있음.


       

 



3 - 10월 오전 9시 ~ 오후 5시 30분 오전 9시 ~ 오후 8시 30분 오전 9시 ~ 오후 6시 30분
11 - 2월 오전 9시 ~ 오후 5시        오전 9시 ~ 오후 8시 30분 오전 9시 ~ 오후 5시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입장 시간 :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가능
야간연장개관 : 매주 목·금요일 저녁 8시 30분까지


성인 19세 ~ 64세 3,000원
초,중,고등학생 7세 ~ 18세 1,500원
    만 7세 미만, 만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무료

단체 관람료 : 30인 이상(일반 2,000원, 학생 1,000원)
덕수궁 입장료 별도 :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 덕수궁 홈페이지 참고 http://www.deoksugung.go.kr

 

 

****옥에 티*****

 

 

아무리 건성 닫아두는 문일지라도 새파란 싸구려 자물통은 좀 그렇지 않은가요?

요즘도 구하려들면 분명 크고 시커먼...격에 맞는 자물통이 있는데...

잠깐... 사진을 찍어 둔 게 어디 있지 싶은데...개인의 문중 재실 자물쇠보다 못해서야 어디,

오래전 사진 확인하니 자물통만 빠져있군요.

황학동에도 있을 텐데...(물론 사진에 보이는 요즘 자물쇠가 편리하시겠지만)

........

 

자세히 보니 문을 잠그는 용도가 아니라 열려진 문, 두 짝을 묶어두는 용도였군요.

밤에는 그저 빗장만 잠그는 모양입니다만...

더 더욱 두 문을 연결하는 자물통까지도 세심한 신경을 써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글쓴이

 

 

 

유배가던 송시열이 쓴 글씐 바위

 

 

 

 

 

 

 

송시열이 제주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때 섬 동쪽 끝 백도리 해변석벽에 자신의 심경을 한시로 새겼으며 택시에 내려서도 동백나무 울창한 숲을 10여분쯤 걸어가면 푸르른 남해와 기암절벽이 만나는 곳에 글씐바위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절벽을 지나야 해요.  아찔하지요?

 

 

송시열의 안각시문을 찾아 나 선 길은 절경이었지요.

 

귀양도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잠시 머물었던 곳 이라는군요.

우직한 충정을 바위에다  새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지요?

우암과 고산...그  두사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여러 각도에서 마음이 착찹했지만 역사가도

또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저 눈으로 풍취나 즐기다 떠나는 한 낱 민초일 뿐....

 

 

흔적이 애매해서 지나쳤다가 막다른 길에서 다시 되돌아 나오며 발견했지요.

얼핏보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습니다.

 

 

송시열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좌상(半身坐像)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등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한 인물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충정을 바위에 새긴 게 아니라....하늘에다가 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과격한 성격의 그는 고산을 공격하고 둘 사이는 좋지않게 됩니다.

고산이 물론 20년 연배인 셈입니다.

고산은 낙향하여.... 세상을 외면했고, 송시열은 강직한 성격에 부러짐을 당한 거라는 개론을 펼쳐봅니다.

고산의 유토피아인 보길도에까지 우연찮게 흘러와서 이렇게 암각화를 만든 그 아이러니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1-

 

 


창덕궁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과거 무차별 개방으로 훼손됐던 창덕궁을 1979년부터 제한된 관람과 가이드와 동행하는 관람 방법 등을 통해 잘 보존해 온 결과였다. 이번 후원 1Km 개방은 자연 상태의 비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면에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부용정, '사정기비각'

 

 

창덕궁 비원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부연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후원은 단지 정원의 의미 뿐만아니라 왕이 여가와 복잡한 현실속에서 벗어나 욕심을 버리고 마음으로 사색을 했던 장소이다.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이라는 버젓한 정궁을 두고도 그보다 작은 창덕궁의 비원에 머물기를 좋아했던 까닭은 자연의 지세에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고 그에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경북궁처럼 좌우 대칭과 같은 정연한 구도가 아니라  인공이 아닌 자연, 기계적인 삭막함이 아니라 따뜻함과 섬세함이 알게모르게 묻어난다는데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정원못지않게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비원 안의 건물들 또한 그러하다.

부용정, 영화당, 애련정 , 연경당등도 그런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무와 벽돌로 집을 짖고, 얇은 창호지로 창과 문을 만들어 밖의 자연의 소리와 함께 동화되고, 햇살의 따사로움 또한 창호지를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란 어느 나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라 생각한다.

안과 밖이 자연스레 보이는 낮은 담장, 마루 또한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애써 보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이는 그런 점들이 우리나라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동화되려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용정의 자연정원


후원입구 낙선재에서 다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면 문이 두 개 나오는데 동쪽문은 창경궁으로 통하  는 문이고 서쪽문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런대 후원으로 들어가자면 한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 바로 깔끔하게 포장된 포장도로 이다. 이곳은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원이 아닌 말 그대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보존 공간이다. 이 포장도로는 1960년대 군사정부시절 만든 도로라 했다. 산길을 포장한 덕(?)에 양쪽의 생태계를 갈라놓는 꼴이 꼴이 되었다한다.

 

'금마문'안의 좌우모습
 

 

창덕궁을 관람하고,

 

창덕궁 후원 옥류천 특별관람은 입장객의 인원을 제약한다.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회원가입을 하고 후원 특별 관람 신청해야하는데,   내가 갈 때만 해도 동절기라  후원의 백미인 옥류천 등, 특별 관람은 금지 되었단다. 그 것도 6월1일부터 개시가 된다니 언젯적부터 우리나라 동절기가 6월이 와야 끝나는가? 의아스럽다. 나는 작년부터 비원을 보고 싶어서 자못 안달이 났던 게다.

나 같은 사람들의 불평이 잦았는지 앞당긴 3월 28일부터 특별관람을 개시한단다.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가입을 하고 , 특별관람 3월 28일자 예약을 하려고 아무리 클릭을 해도 열리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예약 날자가 따로 있단다.

그 것도 한 달 전 단 하루만, (09:00 부터 인터넷 예약 접수)

3월 관람은 3월17일,  4월 관람은 3월 21일, 5월 관람은 4월 20일, 6월 관람은 5월 23일, 7월 관람은 6월 20일, 8월 관람은 7월 21일, 9월 관람은 8월 22일, 10월 관람은 9월 20일, 11월 관람은 10월 24일,

그러니..특별히 보고자 원치 않는 사람은 오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게 아니고 뭔가?

명심하고 기억해뒀다가 필히 예약을 할 일이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이 과연 바쁜 와중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예약 신청일 마저 외워두었다가 예약을 하고 또 한 달 뒤에, 관람할 날짜에 맞춰 창덕궁을 찾아가야 하고, 아! 너무 어렵다.

다행인 것은 하루에 3번 뿐인 관람에도 1시간 전에 가서 줄을 서있으면 1인 1매에 차례대로 10매 까지는 된단다.

아마도 인터넷 예약 후, 빠진 자리같은데...그 것도 관람객이 총 50명, 한정이라니~~

이번에 둘러 본 관람은 그냥 매시 15분 45분마다 들어가는 팀에 합류를 했는데  창덕궁 왼편 골목길~ 그 길의 좌로, 현대건물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무료주차장이 있긴 했으나....

주차장에는 나오는 차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줄을 서서 기다려야한다.

주차를 잘 하고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30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내가 갔을 때는 어떤 고마우신 분이 대신 주차를 시켜주겠다기에 망정이지 겨울이라 3시 45분인데 그 게 마지막 관람이었다.


안내인을 벗어나 따로 관람이나 행동을 할 수 없는 곳!

관람을 하는 요일마다 관람 순서를 코스별로 정하여서 창덕궁 전체를 다 볼 수 없는 곳!

사진촬영은 단체로 행동할 때는 무료이지만 따로 할 때는 신청하고 4만원을 내는 곳!

 

경복궁내를 구경하고 오른쪽으로는 창경궁을 끼고 올라가는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었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낙엽을 밟으며 즐거워할 운치는 있겠지만, 창경궁과의 생태계를 가로막았다는 길이다.

왼쪽으로는 후원을 들어가는 금마문과 불로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창경궁과 통하는 문이 닫겨져 있었다.  곧장 바로가면 비스듬한 산 언덕으로 내려다보면 애련궁이 있는 애련지와 후원뜰이 거지반 보인다는 곳!

창덕궁 후원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 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 고쳐 쌓게 하여 궁밖 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쪽담장과 서쪽담장 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 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 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안내의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겨를 없이 나는 셔터 누르기에만 급급했다.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금천교 다리를 그냥 지나쳐서 대충 윗부분만 찍은 게 마음에 걸려서 제대로 찍어보고자 다리 북쪽을 좀 자세히 찍으러 퇴장하는 무리에서 잠시 이탈했다. 조각이 다르다는 다리 맞은편 남쪽도 찍어왔어야 하는데...

출구 쪽에서 안내를 하던 아가씨와 관리인이 내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미안해서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나 나왔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그 아름다운 석축의 다리 모습에 감탄!!  너무 너무 마음에 흡족했다.

잡귀를 쫓는다는 도깨비 얼굴도 보이고 큰 거북이도 한 마리도 엎드려 있다.

비록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창건되었지만 이 돌다리만은 그대로라니...

거의 600년이 넘은 창덕궁의 진짜배기가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고싶었던 낙선재를 보았고, 그래도 후원 입구를 들어서서 후원의 일부인 아름다운 애련각과 부용정을 보고, 금천교(북)를 외쪽이지만 찍어 온 일이다.

 

창덕궁의 출입제한이 심하다고 불평한 점, 정말 바르지 못한 관념의 인식에 나 자신, 부끄럽게 생각한다.

너무나 안일하게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궁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도 물론 없었음이다.

궁은 역사의 현장이고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지 소풍장소가 아닌 것이다.


우선 창경궁을 한 번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하에 저들은 우리의 궁에다가 짐승들을 모아놓고 창경원이라 비하한 이름을 붙여놓고 가볍게 소풍을 오는 곳으로 만들었다.

 


일인들은 자기들의  궁을 황궁이라 부르며 신궁으로 떠받들면서 우리 궁은 도시락 싸들고 놀러나 가는 관광유원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창덕궁의 출입이 그만큼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자긍심을 고취시킬 일이다.

 


다시금 올곧게 새겨보는 민족 혼,

어려울수록 그만큼 보존도 잘 될 것이 아닌가!

이제라도 우리 후손들에게만은 바른 문화유산을 물려줘야겠기에,

나는 이제  출입의 그 어려움을 달갑게 감수할 것이다.


 


글:큰사진/이요조

○작은 사진과 해설은 검색

 

◎ 창덕궁 홈페이지 정보

 

○일반관람/ 예약 필요없음(매시 15분 45분 입장 겨울은 3시45분 종료)
약 2,1Km 소요시간 약 1시간 20분
관람료:대인 3,000원 소인 1500원

 

○특별관람(옥류천)은 필히 예약 개장일로 부터 하루 3회
인원제한있음(50명)
관람료:5,000원
인터넷예약 40명 현장판매 10매(1인1매)


10시 관람은 9시부터, 13시 관람은 12시부터, 14시 관람은 13시부터,
3,1Km  소요시간  2시간 내외
예약은 인터넷 홈페이지로 매월 4째주 하루만 9:00부터 다음 달 한 달분을 예약 받습니다.

 

 

       

금마문과 불로문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남쪽에는 금마문이 있고 북쪽에는 불로문이 있다. 금마문은 왕이 드나들었던 문이라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입신양명하고 불로문으로 들어가면 건강하게 오래산단다.

 개중에는 이탈해서 금마문으로 들어가는 이, 두엇을 빼고는 대부분 불로문으로 우르르~~ 불로문은 통으로 조각된 돌문이다. 물론 나도 입신양명보다는 그저 잘먹고 잘살기, 불로문을 택했음은 물론이다.

 


▲ 애련정

불로문과 애련정


금마문 옆 담장 중간에는 담장을 끊어 2개의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이 위에  모양으로 한 장의 통 돌을 깍아 세운 불로문이 있다. 본래에는 문짝을 달았었는지 돌쩌귀 구멍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문을 드나들면 늙지 않기를 기원했던 모양이다, "궁궐지"에도 불로문 앞에 연못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볼때  이"궁궐지"의 기록이나 "동궐도"의 내용이 서로 같으며 또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동궐도"에는 순조 27년(1827)에 지은 기오헌과 의두각이 없고 대신 양안제와 거림운이라 쓴 2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가 필자가 밝현던 순조 24년

(1824)에서 28년(1828)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을  1년 앞당겨 1827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이 복쪽 연못가에 애련정이 자리잡고 있다. 애련정은 숙종 19년 (1692)에 지은 것이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사모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기둥과 창방 아래에 낙양판을 붙여 정자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이나 정자를 바라볼 때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기둥에는 주련 들이 걸려 있는데 그시는 다음과 같다.

 

비맞은 연잎 위에 진주알 흩어지고

활짝 핀 연꽃은 단장한 고운 볼일레

정자는 여래 자리에 가깝고

못은 태을주를 띄웠네

꽃이 사랑스러워 군자라 일컫고

거북이 나이를 성상께 바치네

푸른 연대로 어주를 드리고

찬란한 놀 천화의 향기 흩도다

 
 

▲주합루 어수문


주합루/어수문
 


주합루는 부용정 북쪽 맞은편 부용정 연목의 북쪽 놓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으로 우뚝 서 있다. 이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 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 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 어간을 마주하게 된다. 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밖으로는 방주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주합루, 규장각

 

 


 
▲사정기 비각덕궁


 

사정기 비각


부용정 큰 못 서쪽물가에 서 있는 이 비각은 숙종 때 세운 것이다 본래 세종 6년 영순 군과 조산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주합루 근처에서 우물을 찾도록 하였는데 마침 두짝 씩 찾아내어 이것들을 마니, 파려, 유리(琉璃), 옥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뒷날 숙종 16년(1690)에 이를 기념하여 옛 술정각 자리에다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사정기 비각이다.



 

 

 

▲ 부용정



 

부용정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동산바치는 오늘날의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  고궁문화재 무료안내

 

               한국어 : 3월(16회)      : 09:15 ~ 16:4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4월~10월(17회) : 09:15 ~ 17:1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11월~2월(14회) : 09:15 ~ 15:4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영  어 : (3회) 11:30 / 13:30 / 15:30
               일  어 : 3월~10월(5회) - 09:30, 10:30, 12:30, 14:30, 16:30
                        11월~2월(4회) - 09:30, 10:30, 12:30, 14:30
               중국어 : (2회) 11:00, 15:00
               ※ 문의 02)762-8262

특별 관람코스
 - 실시시기  2006,3, 28 ~ 2006.11.30 (휴궁일인 매주 월요일은 제외)
 - 매일 3회 (10:00, 13:00, 14:00)
 - 입장료 : 5,000원
 - 문의 및 예약 : 02-762-0648  www.cdg.go.kr

                  10시(1회)               1시(2회) / 2시(3회)
   ===============================================================
   제 목       옥류천 산책 관람           옥류천 안내 관람
   안내방법   별도의 설명없이 안내자와   안내자의 해설과 함께 관람
              동반 관람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보존, 관리 및 외국어 안내.
02-762-0648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휴게소
02-762-6268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5-4

 

▶여행길잡이


▲창덕궁=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5분 거리. 개별 관람을 할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동절기(12~2월)에는 오전 9시45분부터 오후 3시45분까지 매시 45분에 입장이 가능하다. 1회 입장객을 50명 선으로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 예매가 편리하다. 창덕궁 홈페이지 참조(http://www.cdg.go.kr)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창덕궁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과거 무차별 개방으로 훼손됐던 창덕궁을 1979년부터 제한된 관람과 가이드와 동행하는 관람 방법 등을 통해 잘 보존해 온 결과였다. 이번 후원 1Km 개방은 자연 상태의 비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면에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부용정, '사정기비각'

 

 

창덕궁 비원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부연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후원은 단지 정원의 의미 뿐만아니라 왕이 여가와 복잡한 현실속에서 벗어나 욕심을 버리고 마음으로 사색을 했던 장소이다.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이라는 버젓한 정궁을 두고도 그보다 작은 창덕궁의 비원에 머물기를 좋아했던 까닭은 자연의 지세에 별다른 변경을 가하지 않고 그에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경북궁처럼 좌우 대칭과 같은 정연한 구도가 아니라  인공이 아닌 자연, 기계적인 삭막함이 아니라 따뜻함과 섬세함이 알게모르게 묻어난다는데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정원못지않게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비원 안의 건물들 또한 그러하다.

부용정, 영화당, 애련정 , 연경당등도 그런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무와 벽돌로 집을 짖고, 얇은 창호지로 창과 문을 만들어 밖의 자연의 소리와 함께 동화되고, 햇살의 따사로움 또한 창호지를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란 어느 나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라 생각한다.

안과 밖이 자연스레 보이는 낮은 담장, 마루 또한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애써 보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이는 그런 점들이 우리나라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동화되려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용정의 자연정원


후원입구 낙선재에서 다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면 문이 두 개 나오는데 동쪽문은 창경궁으로 통하  는 문이고 서쪽문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런대 후원으로 들어가자면 한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 바로 깔끔하게 포장된 포장도로 이다. 이곳은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원이 아닌 말 그대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보존 공간이다. 이 포장도로는 1960년대 군사정부시절 만든 도로라 했다. 산길을 포장한 덕(?)에 양쪽의 생태계를 갈라놓는 꼴이 꼴이 되었다한다.

 

'금마문'안의 좌우모습
 

 

창덕궁을 관람하고,

 

창덕궁 후원 옥류천 특별관람은 입장객의 인원을 제약한다.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회원가입을 하고 후원 특별 관람 신청해야하는데,   내가 갈 때만 해도 동절기라  후원의 백미인 옥류천 등, 특별 관람은 금지 되었단다. 그 것도 6월1일부터 개시가 된다니 언젯적부터 우리나라 동절기가 6월이 와야 끝나는가? 의아스럽다. 나는 작년부터 비원을 보고 싶어서 자못 안달이 났던 게다.

나 같은 사람들의 불평이 잦았는지 앞당긴 3월 28일부터 특별관람을 개시한단다.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가입을 하고 , 특별관람 3월 28일자 예약을 하려고 아무리 클릭을 해도 열리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예약 날자가 따로 있단다.

그 것도 한 달 전 단 하루만, (09:00 부터 인터넷 예약 접수)

3월 관람은 3월17일,  4월 관람은 3월 21일, 5월 관람은 4월 20일, 6월 관람은 5월 23일, 7월 관람은 6월 20일, 8월 관람은 7월 21일, 9월 관람은 8월 22일, 10월 관람은 9월 20일, 11월 관람은 10월 24일,


그러니..특별히 보고자 원치 않는 사람은 오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게 아니고 뭔가?

명심하고 기억해뒀다가 필히 예약을 할 일이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이 과연 바쁜 와중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예약 신청일 마저 외워두었다가 예약을 하고 또 한 달 뒤에, 관람할 날짜에 맞춰 창덕궁을

찾아가야 하고, 아! 너무 어렵다.

다행인 것은 하루에 3번 뿐인 관람에도 1시간 전에 가서 줄을 서있으면 1인 1매에 차례대로 10매

까지는 된단다.

아마도 인터넷 예약 후, 빠진 자리같은데...그 것도 관람객이 총 50명, 한정이라니~~

이번에 둘러 본 관람은 그냥 매시 15분 45분마다 들어가는 팀에 합류를 했는데  창덕궁 왼편

골목길~ 그 길의 좌로, 현대건물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무료주차장이 있긴 했으나....

주차장에는 나오는 차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으니 줄을 서서 기다려야한다.

주차를 잘 하고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30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내가 갔을 때는 어떤 고마우신 분이 대신 주차를 시켜주겠다기에 망정이지 겨울이라

3시 45분인데 그 게 마지막 관람이었다.


안내인을 벗어나 따로 관람이나 행동을 할 수 없는 곳!

관람을 하는 요일마다 관람 순서를 코스별로 정하여서 창덕궁 전체를 다 볼 수 없는 곳!

사진촬영은 단체로 행동할 때는 무료이지만 따로 할 때는 신청하고 4만원을 내는 곳!

 

경복궁내를 구경하고 오른쪽으로는 창경궁을 끼고 올라가는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었다. 가을이면 사람들은 낙엽을 밟으며 즐거워할 운치는 있겠지만, 창경궁과의 생태계를 가로막았다는 길이다.

왼쪽으로는 후원을 들어가는 금마문과 불로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창경궁과 통하는 문이 닫겨져 있었다.  곧장 바로가면 비스듬한 산 언덕으로 내려다보면 애련궁이 있는 애련지와 후원뜰이 거지반 보인다는 곳!

창덕궁 후원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 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 고쳐 쌓게 하여 궁밖 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쪽담장과 서쪽담장 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 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 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안내인의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겨를 없이 나는 셔터 누르기에만 급급했다.

마지막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금천교 다리를 그냥 지나쳐서 대충 윗부분만 찍은 게 마음에 걸려서

제대로 찍어보고자 다리 북쪽을 좀 자세히 찍으러 퇴장하는 무리에서 잠시 이탈했다.

조각이 다르다는 다리 맞은편 남쪽도 찍어왔어야 하는데...

출구 쪽에서 안내를 하던 아가씨와 관리인이 내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미안해서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나 나왔다.


집에 와서 사진을 보니, 그 아름다운 석축의 다리 모습에 감탄!!  너무 너무 마음에 흡족했다.

잡귀를 쫓는다는 도깨비 얼굴도 보이고 큰 거북이도 한 마리도 엎드려 있다.

비록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창건되었지만 이 돌다리만은 그대로라니...

거의 600년이 넘은 창덕궁의 진짜배기가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고싶었던 낙선재를 보았고, 그래도 후원 입구를 들어서서 후원의 일부인

아름다운 애련각과 부용정을 보고,

금천교(북)를 외쪽이지만 찍어 온 일이다.

 

창덕궁의 출입제한이 심하다고 불평한 점, 정말 바르지 못한 생각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무나 안일하게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궁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도 물론 없었음이다.

궁은 역사의 현장이고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지 소풍장소가 아닌 것이다.

우선 창경궁을 한 번 생각해보자 저들은 우리의 궁에다가 짐승들을 모아놓고 창경원이라 비하한 이름을 붙여놓고 가볍게 소풍을 오는 곳으로 만들었다.


일인들은 자기들의  궁을 황궁이라 부르며 신궁으로 떠받들면서 우리 궁은 도시락 싸들고 놀러나 가는 관광유원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창덕궁의 출입제한이 심하다고 불평한 점, 정말 바르지 못한 관념의 인식에 나 자신, 부끄럽게 생각한다.

너무나 안일하게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궁에 대한 경외심이 나에게도 물론 없었음이다.

궁은 역사의 현장이고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지 소풍장소가 아닌 것이다.

우선 창경궁을 한 번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하에 저들은 우리의 궁에다가 짐승들을 모아놓고 창경원이라 비하한 이름을 붙여놓고 가볍게 소풍을 오는 곳으로 만들었다.


일인들은 자기들의  궁을 황궁이라 부르며 신궁으로 떠받들면서 우리 궁은 도시락 싸들고 놀러나 가는 관광유원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창덕궁의 출입이 그만큼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자긍심을 고취시킬 일이다.


다시금 올곧게 새겨보는 민족 혼,

어려울수록 그만큼 보존도 잘 될 것이 아닌가!

이제라도 우리 후손들에게만은 바른 문화유산을 물려줘야겠기에,

나는 이제  출입의 그 어려움을 달갑게 감수할 것이다.


 

글:큰사진/이요조

○작은 사진과 해설은 검색

 

◎ 창덕궁 홈페이지 정보

 

○일반관람/ 예약 필요없음(매시 15분 45분 입장 겨울은 3시45분 종료)
약 2,1Km 소요시간 약 1시간 20분
관람료:대인 3,000원 소인 1500원

 

○특별관람(옥류천)은 필히 예약 개장일로 부터 하루 3회
인원제한있음(50명)
관람료:5,000원
인터넷예약 40명 현장판매 10매(1인1매)


10시 관람은 9시부터, 13시 관람은 12시부터, 14시 관람은 13시부터,
3,1Km  소요시간  2시간 내외
예약은 인터넷 홈페이지로 매월 4째주 하루만 9:00부터 다음 달 한 달분을 예약 받습니다.

 

 

       

금마문과 불로문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남쪽에는 금마문이 있고 북쪽에는 불로문이 있다. 금마문은 왕이 드나들었던 문이라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입신양명하고 불로문으로 들어가면 건강하게 오래산단다.

      개중에는 이탈해서 금마문으로 들어가는 이, 두엇을 빼고는 대부분 불로문으로 우르르~~ 불로문은

      통으로 조각된 돌문이다. 물론 나도 입신양명보다는 그저 잘먹고 잘살기, 불로문을 택했음은 물론이다.

 


▲ 애련정

불로문과 애련정


금마문 옆 담장 중간에는 담장을 끊어 2개의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이 위에  모양으로 한 장의 통 돌을 깍아 세운 불로문이 있다. 본래에는 문짝을 달았었는지 돌쩌귀 구멍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문을 드나들면 늙지 않기를 기원했던 모양이다, "궁궐지"에도 불로문 앞에 연못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볼때  이"궁궐지"의 기록이나 "동궐도"의 내용이 서로 같으며 또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동궐도"에는 순조 27년(1827)에 지은 기오헌과 의두각이 없고 대신 양안제와 거림운이라 쓴 2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가 필자가 밝현던 순조 24년

(1824)에서 28년(1828)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을  1년 앞당겨 1827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이 복쪽 연못가에 애련정이 자리잡고 있다. 애련정은 숙종 19년 (1692)에 지은 것이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사모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기둥과 창방 아래에 낙양판을 붙여 정자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이나 정자를 바라볼 때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기둥에는 주련 들이 걸려 있는데 그시는 다음과 같다.

 

비맞은 연잎 위에 진주알 흩어지고

활짝 핀 연꽃은 단장한 고운 볼일레

정자는 여래 자리에 가깝고

못은 태을주를 띄웠네

꽃이 사랑스러워 군자라 일컫고

거북이 나이를 성상께 바치네

푸른 연대로 어주를 드리고

찬란한 놀 천화의 향기 흩도다

 
 

▲주합루 어수문


주합루/어수문
 


주합루는 부용정 북쪽 맞은편 부용정 연목의 북쪽 놓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으로 우뚝 서 있다. 이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 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 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 어간을 마주하게 된다. 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밖으로는 방주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주합루, 규장각

 

 


 
▲사정기 비각덕궁


 

사정기 비각


부용정 큰 못 서쪽물가에 서 있는 이 비각은 숙종 때 세운 것이다 본래 세종 6년 영순 군과 조산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주합루 근처에서 우물을 찾도록 하였는데 마침 두짝 씩 찾아내어 이것들을 마니, 파려, 유리(琉璃), 옥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뒷날 숙종 16년(1690)에 이를 기념하여 옛 술정각 자리에다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사정기 비각이다.



 

 

 

▲ 부용정



 

부용정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동산바치는 오늘날의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  고궁문화재 무료안내

 

               한국어 : 3월(16회)      : 09:15 ~ 16:4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4월~10월(17회) : 09:15 ~ 17:1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11월~2월(14회) : 09:15 ~ 15:45 매시15분, 매시45분 입장

               영  어 : (3회) 11:30 / 13:30 / 15:30
               일  어 : 3월~10월(5회) - 09:30, 10:30, 12:30, 14:30, 16:30
                        11월~2월(4회) - 09:30, 10:30, 12:30, 14:30
               중국어 : (2회) 11:00, 15:00
               ※ 문의 02)762-8262

특별 관람코스
 - 실시시기  2006,3, 28 ~ 2006.11.30 (휴궁일인 매주 월요일은 제외)
 - 매일 3회 (10:00, 13:00, 14:00)
 - 입장료 : 5,000원
 - 문의 및 예약 : 02-762-0648  www.cdg.go.kr

                  10시(1회)               1시(2회) / 2시(3회)
   ===============================================================
   제 목       옥류천 산책 관람           옥류천 안내 관람
   안내방법   별도의 설명없이 안내자와   안내자의 해설과 함께 관람
              동반 관람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보존, 관리 및 외국어 안내.
02-762-0648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휴게소
02-762-6268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5-4

 

▶여행길잡이


▲창덕궁=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5분 거리. 개별 관람을 할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동절기(12~2월)에는 오전 9시45분부터 오후 3시45분까지 매시 45분에 입장이 가능하다. 1회 입장객을 50명 선으로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 예매가 편리하다. 창덕궁 홈페이지 참조(http://www.cdg.go.kr)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숨은 그림찾기 고래를 찾아라!/국보 285호

 

숨은그림찾기,고래를 찾아라! 

 

 

반구대(盤龜臺) : 거북이를 닮았다하여 반구대라 부른다.사진은 거북이 머리모습,

혹은 포은(정몽주)대라 부르기도...

 

녹음이 짙은 여름인데도 대곡천이 말랐다.

아마도 심한 여름 가뭄인 듯.../한국관광공사 이미지

 

위치설명

암각화 까지는 입구에서 대략 2Km

오른쪽 하단부/반구대 집천정

왼쪽아래/ 반구서원, 유허비 팻말을 2~300m 지나온 곳,  

중간 붉은 표지/ 공룡발자국화석이 있는 바위

대곡천 마지막 부분/암각화가 있는 위치는 더 내려가서 있다네요. 그러니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진을 보고 어림짐작한 개인적인 생각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조만 하시라고,

 
 
 

경치가 그냥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부근에 '선사문화전시관' 을 세우느니..말도 탈도 많다.

반론의 주장은 요는 물이 오염되면 암각화가 그 영향을 받을까 우려해서이고 울산시 당국은

폐수처리로 문제없다고 큰소리 친다는데..... 

 
 

 

겨울이라 건천이 된 모습, 그 덕에 암각화는 요행으로 볼 수 있었다.
바짝 가까이 가 보는 것은 겨울 건수기에도 드물다 한다.
누가 놓았는지...징검다리대신 폐타이어를 놓아서 겨우 가까이 다가갈 수가...

 
 

암각화 부근, 역시나 침수되는... 

 
 

이 곳이 물로 가득 찬다고 한다 일년중 8개월이 만수라는데...동안 암각화는 물 속에 잠긴다.

 

여행후기


 

나 어렸을 적에는 울산이라면 맨 처음 고래를 연상했었다.

40년도 더 전에 일이니, 봄이 오면 리어카에 고래 고기를 실은 아저씨들이 고래 고기를 사라고 외치고 다녔었다.

울산 방어진에서 잡은 고래라며 고래 고기는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맛이 더 난다하였지만 어렸을 적 먹어본 고래 고기 맛은 처음엔 맛있다가 이내 어린 아이 입맛으로는 질리게 만들었다.  내 유년의 입맛에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울산을 물어보면 아마도 고래보다는 공업도시로 먼저 쉽게 떠 올릴 것이다. 그 울산에 고래그림이 있단다. 반구대라는 경치 좋은 곳에, 그런데 일년 12달 중 8달은 물에 늘 잠겨있단다.

울산 공업도시로 물을 대기 위한 댐이 건설되고 이 암각화는 그만 물 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암각화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말이 많았을 터이지만... 암각화의 발견은 그 후의 일인 듯 하다. 1995년 6월 23일에 국보 285호로 지정되었으니,

 

절경이라기에 들어섰는데,  두동 방면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길이 좁고 가파르고, 과연 그런 귀한 그림을 만나 볼 있을까 부쩍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 곳은 지금 KTX의 굽은 철로를 천성산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통과할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차 들어갈수록 길이 좋아지며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뭔가 소중한 보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보물보다는 주변경관이 좋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인데도 푸른 대나무 숲과 굽이 흐르는 물길과 아주 큰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닌가?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없다. 인가도 보이지 않는다.


울산은 나 어릴 적의 실체도 보지 못한 그림 속의 기억만 가진 지구상의 제일 큰 동물! 그 고래가 많이 잡히는 줄 알았는데, 그 고래는 이 곳 그림을 보니  먼-옛날 선사시대부터 포경되어 왔었나보다.


울산 태화강 상류, 이 조용하고도 멋진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이 골짜기에 고래그림이 있단다. 믿기지 않 는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자는 노래는 있지만 이 첩첩산중 오지에 고래그림이라니..? 의아했지만 분명 있었다. 그림은 선사시대 것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미하게 보였다.

숨은그림찾기처럼 고래, 사람, 사람 얼굴, 물고기, 배, 그물...

그 외, 고래는 자세한 해설을 빌리자면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이다.

'새끼고래를 업은 어미고래, 작살이 박힌 고래, 등에서 물을 내뿜는 고래등 48마리의 고래 떼가 절벽 바위그림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또한 함정에 빠진 호랑이, 새끼를 밴 사슴, 교미하는 멧돼지, 토끼등 육지동물도 있다.

그 사이로 7명의 사람들이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고래사냥에 나섰고 가장 꼭대기에 한 사내가 크고도 긴 나팔을 남근이 곧추서도록 힘껏 불고 있다.

일본벽화에서도 더러 나타나는 이런 그림은 신성한 것으로 종족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례에도 직접 벌거벗고 남근을 과시, 상징했다고 한다.

국보 제 285호로 지정된 반구대의 암각화, 바위그림을 일컬어 바위동물원, 사냥 그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부분 참조

울산이 공업화하면서 공업용수를 대기위해 댐을 만들고 이 곳은 댐 물이 가득 차서 겨울 건수기 때가 아니면 볼 수가 없다는 곳을, 겨울도 비가 잦으면 가까이 볼 수도 없다는데, 요행히도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보니 돌비석에 새긴 글씨를 알아보는 기간은 대략 500년 전후였다. 장소가 마침 좋아서 풍화작용이 덜 한 곳은 7~800년까지도 가는 걸 보았지만 아무리 바위에 바로 새긴 거라지만, 선사시대의 그림이 여태까지 있다니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다가가서는 설명이 없었다면 어디에 무슨 그림인지 정말로 숨은그림찾기 해야 할 듯 하였다.

그 말 많던 도롱뇽보호 때문에 대구에서 부산까지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던  KTX가 새로 뚫리는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이 곳!

산 너머 바깥에는 21세기 고속철도가 다니는데 산 안쪽에는 수려한 풍광자체도 마치 선사시대의 모습 그대로 정지된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있는 곳이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선생의, 그 학덕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고 대나무 숲을 벗어나면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는 터도 나오는 그런 선사시대의 냄새마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다.

 

 "우리나라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라고 한 '유 홍준'님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어로(漁撈)의 행위를 묘사한 고기잡이배와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실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빌고 그들에 대한 위령(慰靈)을 기원하는 주술 및 제의(祭儀)를 행하던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는 안내 글을 접하며 그들의 성소이자  그림은 그들이 추구하는 기도 같은 신앙임을  알 것 같았다.

산길이라 굽이굽이 좁은 길을 되돌아 나오며 마치 오래전 옛날로 꿈을 꾸듯 거슬러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글:사진/이요조

 

 

 
 
 
울산공업단지가 설정된 후인 1960년대 중반 공업용수를 위하여 범서읍(凡西邑)사연(泗淵)에다
반구천(盤龜川)의 하류를 막아 사연댐을 축조하자 집수(集水)로 수위가 높아져서 귀중한
암면각화가 수중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 아래는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 도중 사진 중앙부에 너럭 바위에 '공룡발자국화석' 이 있는 곳이다.

 

 

○ 다리도 건느고.....

 

 

○ 대나무 정원을 지나는 스치는 바람처럼...한참을 더 지나쳐 가야한다.

 

 

○ 대나무 정원을 바로 지나 (右/공룡발자국화석)

한참을 더 걸어들어가면 드디어 나타나는 곳! '반구대암각화'

 


 

암각화를 보기에 제일 좋은 건수기라는데도 징검다리를 두 개나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 

 

 

▲ 盤龜臺 부근 모습, 겨울과 가을 단풍모습(가을이미지검색) ▼

 
 

○ 가로지른 직선으로는 1Km 도 안 되는 지척인 곳에 또 다른 그림이 돌에 새겨져 있다는데.

이름하여, '천적리 각석'

 

 

 

○ 이 곳 절경은 산 속에 묻혀서 계속 알려지지 않다가 고려말엽 포은 정몽주 선생이 유배되자

언양요도에 귀양와서 우거할 때 여기를 자주 찾아와서 경관을 즐기면서 알려졌으며, 그를 찾는

유생들에게 학문의 영향을 주게되었다 한다.

 
 

▲ 반구대 포은선생의 유허비/거북의 머리자리에 비각이 서있다.

반구대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맞은편에는 중창한 반구서원이 있다.

 

▼ 대곡천 집청전

집정천 오른편에 아마 반구서원이었지 싶은데...조금 들어 앉은지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지역인들의 힘으로 다시 중창했다 한다.



 

 

○ 울산대곡리반구대 암각화

종   목   국보   285호
명   칭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  (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분   류   각석
수   량   1기
지정일   1995.06.23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시   대   기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울주군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 여행정보

좀 더 상세한 학술적인 것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 :  www.ulju.ulsan.kr/bangudae


 

 

▲ 암각화의 그림들/실제로는 가려내기 힘들 정도로 무척 희미하다.

▼ 홈페이지에서 가져와 편집한 이미지

 
 

 

여느때는 이 곳에서(약 300m거리)암각화가 어디쯤에 있을거라는 짐작만 하고 간단다.  

 

 

 

▼ 반구대 공원 조성길에서 암각화 상징 벽화

 

 

◈또 다른 볼거리

◈대곡리 공용발자국화석.


이곳의 공용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전의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공용들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공용들은 아열대 기후 아래 우기와 근기가 반복되고 열대 역풍의 영향을 내치는 사바나 지역의 하천광야 일대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대천곡에는 여러 장소에서 공용발자국이 확인되지만 이곳의 공룡발자국화석은 보존 당대가 가장 양호한것이다. 이곳의 공룡발자국은 약 100m 넓이의바위에 세겨져 있으며 용각류 팔용과에 속하는것 (60)톤급과 조각류 이구아나과에 속하는 것 고성 용족인 등 24개 다 일정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공룡들도 이 일대를 평화롭게 배회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이곳의 지층은 정상계 하향층군 시연지층 중회색 사질이 암층에 속하며 이 공용발자국 화석은 지질시대 울산 지역에 대한 자연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바로 이 대나무 숲을 돌아 나가면 제법 큰 너럭바위가 나오고 안내팻말이 서있고,

 
 

○ 일억년 전, 공룡 발자국이 여러군데~ 그 흔적이 널려 있었다.

 
 
 

○ 찾아가시는길

 

교통안내 : 1) 공항, 역->울산시외버스터미널->언양시외버스터미널->반구대,천전리각석 입구하차
           2) 울산공항 -> 울산시외버스터미널 : 1-2,126,305,313,314,315,317,318,319,327,345번
           3) 울산역 ->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305,313번
           4) 울산시외버스터미널 ->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513,515,516,313,314,317번
           5) 언양시외버스터미널 -> 두동,두서방면 : 361,365,369,373번

정보제공자 : 울산광역시청 관광과 052-229-3852
 
 작성기준일   2005년 11월16 일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daum여행마스터 이요조의 블로그

 

'나비야 청산가자'

 

 

 


                               x-text/html; charset=iso-8859-1" hidden=true width=300 src=" http://www.penart.co.kr/ndata/poemmusic/poem-gayo/036.asf" invokeURLs="false" autostart="true" x-x-allowscriptaccess="never" EnableContextMenu="true">

 

  

'여행발전소 > 문화유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 신비의 정원을 품다.  (0) 2006.03.15
창덕궁을 가다.  (0) 2006.03.15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0) 2006.02.21
경주 야경  (0) 2006.02.20
기울어진 첨성대  (0) 2006.02.20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신라인의 숨결이 흘러 흘러 머금어 전해지는 포석정

 

경주 여행 3일째,
떠나오는 길에 포석정엘 들렀다.
역시 예전 수학여행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가차이 들어갈 수 없도록 얕은 돌로 담장을 둘러쳤을 뿐,

그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왕이 술잔을 띄우면 흘러 흘러 자기 앞에 올 때까지 詩를 한 수 지어야 한다고
요는 풍류를 즐기는 어른들의 놀이터쯤으로 새겨들었다.

 

 

 

입장료는 쌌다.

매표소에 안내판 글에는 내가 알고 있던 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역사가 씌어져 있었고,

 

경애왕이 고려의 침략으로 이 자리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먼 훗날, 후손들은 그저 객관적인 평가로는 ...

"음 그래, 그랬으니까 패망했지...그따위 향락에 빠져 노닥였으니...최후를 여기서 맞지"

인과응보적인 단순한 생각으로 누구든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버릴테니...

 

과거 일제강정기 때 우리 왕조를 폄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낭설이라고 하는 말도 있고,

 

그런데...그 게 아닌 듯하다.

새로운 학설에 귀를 기우려 보니...정말 그 말이 어쩌면 기우였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 전문적인 새로운 학설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대체적으로 경주는 입장료가 좀 비싼 편이다.
예사로 4.000원 5,000원인데 500원이다. 포석정안에 아무도 없다.
아저씨 한 분이 비를 들고 포석정 내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송림이 울창하다.
포석정 물길이 깨어져 지금 같아서는 그 깨어진 곳의 이음새를 막아 어찌 물이
돌아 돌아 흐른다면 죽었던 경애왕이 되살아 나고...패망한 신라가 다시 번성의 꽃을 피우련만

어찌, 그 게...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대체? 어떻게 물이 흘렀을까?

그 물은 남산 자락을 깔고 앉은 포석정은 남산계곡에서 대통으로(지금의 수도관)

이어져  큰 돌거북의 입으로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그 돌거북은 어느 무덤으로 옮겼을 거라

추정해 보지만 찾을 길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복모양같다고 하여 전복(포어:鮑魚)鮑石亭地

정말 나는 鮑石亭이 전복에서 따온 이름인 것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물길 바깥경계는 전복껍질이요.

안쪽 경계는 전복살의 모양이 아닌가?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전복모양으로 만든 것도 다 과학적인 이치가 닿아 흐르는 물의 와류를 이용해서 술잔이

흐르다가 꺽이다가 하기를 아홉구비를 지나...자기 앞에 당도하면 그동안 詩를 한 수 마련했다하니

얼마나 멋진 곳인가?

그러나 그렇게 늘상 즐기고 노는 자리가 아니라...

경주남산 자락은 바로 불교신앙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한다.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난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한다.

 

안내 팻말에 씌인대로 하자면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는데,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신성한
제사장소이기도 했다는 반론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포석정은 연회도 베푸는 곳이었지만 신성한 남산자락 아래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단다.

포석정이 자리한 곳이 경주에서  춥기로 유명한 냉골이라는 산동네 바로 앞인데 경애왕은

미리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고 이리로 피신을 왔다는데, 연회가 당키나 하냐는 말이다.

공격을 받은 때가 음력 11월이였다는데...양력으로는 12월 말이나 1월 초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을 천 년 전에 임금이 신하들을 데리고 엄동설한 야외에서 술자리를 벌렸을리 만무할터....

포석정엔 물마저 얼어 붙었을 한겨울이니  그건  억측에 불가하다는 주장이 자명한 사실이라는

학설이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타당성 짙은 내용이라 생각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경주를 방문할 때는 등산을 했으면 한다.

경주의 상징인 토함산과  경주의 성지인 남산을...

 

경주남산은, 신라천년 불교문화의 흔적이 산골짜기마다 탑과 불상과 절터등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노천 불교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우는 경주남산은 나즈막하여 오르는데 1시간정도의 거리로 신라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산으로,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고적답사를 겸해서 오는 아름다운 산!
그 남산 아래에 위치한 나정과 포석정도 둘러 보면서 신라의 흥망과 신라천년의 세월을 느껴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발걸음을 뒤로하며, 이 번 여행에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역사관을 올곧게 정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여행에서 얻은 귀한 소득이라 생각하며...

새로운 앎을 위하여~  나의 여행은  계속해서 지속 될 것이다. 

 

 

 

 

글: 이요조

 


*현재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는 포석정

 

잔을 띄워 술을 마시도록 즐겼다는 별궁의 하나이다. 남산의 저수지와 같은 곳에서 물을 대나무통이 이어 이곳까지 끌어왔다는데 대단하다.

 경주 포석정 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에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통일신라시대 때에 만들어 졌으며,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고, 옛 신라 왕실의 향락의 쉼터이고, 포석정에서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데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잔을 마셔야한다고 ‘난정수희도’에 기록되있다.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다 빠져 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이나 5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를 돌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포석정은 유체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유체학적으로 와류(회돌이: 주 흐름의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현상)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보존상태는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조 구조만이 남아있다. 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던 데에서‘어무산신무’ 또는 ‘어무상심무’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1호이며 왕과 신하들이 쉬면서 시를 짓거나 잔치를 하던곳이다.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
http://www.shilla.or.kr/historic-remains/nam_san/po_suk_jung.asp



-------------------------참고 ----------------------------

 

 

 

포석정은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적 1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입니다.
포석정하니까 혹시 정자를 떠올리실 분도 계실테지만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이 포석정입니다.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다고 전복포자를 써 포석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석정은 지금까지 신라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둘러앉고,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는데..
술잔이 멈추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비운의 현장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이 침입해오는지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신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중요한 이유로 얘기돼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포석정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이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성지인 경주 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포석정.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가로 5m, 세로 10m 정도 크기의 인공수로로 이뤄져있고..
그 모습이 전복껍질같아 포석정으로 불립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927년, 음력11월, 겨울에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때 왕은 왕비 궁녀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줄도 몰랐다는 기록이..
그 근거였습니다.

경애왕은 정말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붙잡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견훤이 쳐들어온 시기는 음력 11월 한 겨울입니다.
이때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제기의 첫번째 이유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동 11월이면 양력으로 치면 12월.
이때 추워서 야외에서 논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이때는 물이 얼어서 유상곡수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무리 왕이 정치에 등한히 해도..
적이 지금 쳐들어오는데 거기서 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견훤의 군대는 경주에서 불과 25km떨어진 영천을 지나..
시시각각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습니다.
포석정의 위치도 의문스럽스만 합니다.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이 남산자락에 있는 것입니다.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130여곳의 절터, 400여개의 불상과 탑들이 들어서 있는 신라의 성지입니다.
따라서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에게 남산은 정신세계 신앙 그자체. 그 만큼 남산내에 남아있는 유적이 많고..
포석정 자체도 남산내에 포함되는 곳으로..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성소의 의미로 파악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산에 위치한 포석정은 성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엔 신라 건국과 역사에 관련된 수 많은 유적지들이 자리하고 있죠.

포석정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나정.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했다는 우물로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박혁거세가 세운 신라의 첫 궁궐터라는 창림사지도 포석정 근처에 있습니다.
포석정에서 불과 1km 거리에 위치한 오릉.
박혁거세를 포함한 신라 4명의 박씨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왕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남산은 박씨에게 상당히 중요한 발상지입니다."

"포석정이 성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삼국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유포석정연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로 해석되고 있는 유포석정연오.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다(유)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록에서 유자는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중 경덕왕 유백률사 이야기에서는..
"절에 갔다"이지 "놀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이 포석정에 유했다고 하면 그것을 놀러갔다고 번역을 하는데..
다른 부분과 연결하면 무조건 놀러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왕이 절에 갔다 이렇게 되는데..
그것을 왕이 절에 놀러갔다 이렇게 번역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중요한 그속에서 그걸 보면 유포석정..
포석정에 갔다는 그저 놀러갔다고 번역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포석정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인식돼 왔습니다.
그 결과 경애왕은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른채..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다 피살된 인물로, 포석정은 신라멸망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려시대 기록이라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신라멸망의 당위성, 새로운 왕조인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기록이라고 볼 때..
그이후 놀이문화 퇴폐 향략문화로 전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입니다.

신라의 혼이 담겨 있는 많은 유적지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
그 주변 상황을 볼 때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성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성스러운 지역에 둘러싸여 있는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연회를 베풀고 놀이를 즐겼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라시대에 왕들이 놀이를 즐기거나 외국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공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지였는데요.
안압지는 674년 문무왕때 만들어진 인공연못입니다.
지난 1975년 발굴 당시 이 연못에서 3만여점의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그중엔 연회때 사용하던 놀이기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들의 놀이터라는 포석정에서는 이런 흔적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곳이 신성한 공간이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석정은 도대체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포석정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의 헌강왕 관련 기록에 처음 나타납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임금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고..
옆에 있던 신하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왕만이 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신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장소였으며..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만났다는 것 또한..
이곳에서 행해진 제사의식을 통해 신과의 교류가 이뤄졌음을 뜻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엔 왕들이 참여해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고..
왕과 신령의 세계가 직접 교류한다는 것이 왕권의 안정, 특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며..
다른 일반인이 신과 교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신과 교류해 왕권의 안정 국가의 안정을 기원해..
왕이 직접 제사하는 친사의 경우가 많았던 것이 바로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러면 경애왕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달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포석정에 간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포석정에서 이뤄졌던 제사의식이 호국제사인 팔관회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때 전몰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처음 팔관회를 개최했고..
선덕여왕때는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팔관회를 열은바 있습니다.
신라의 팔관회는 토속신앙과 불교의식이 결합된 것으로 호국제사의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이 호국제사는 고려때까지 이어졌으며 모두 매년 11월에 개최됐습니다.
견훤의 침입을 받은 경애왕이 포석정을 찾았던 때도 11월이었습니다.

팔관회는 주로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했던 의식이었다는 공통점을 나타냅니다.
시기가 일단 음력 11월로 맞고 궁예도 11월에 했고 고려때도 11월. 신라도 기록에보면 11월입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왕도로 진격해오고 있던 그때..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해 놓은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았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닐까요?

"왕건에게 군사적 요청을 내놓은 상태에서..
아마도 왕은 왕실 또는 측근과 남산에 있는 호국신에게 나라가 지탱될 수 있게..
또는 왕건의 군대가 빨리와서 견훤의 군대를 막아달라는 제사의례를 지내러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포석정은 호국제사를 지내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석정이 이처럼 성스러운 곳이었다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가 이뤄졌다는 돌로 만든 물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것을 유상곡수라고 합니다.
유상곡수 - 굽이치는 물위에 술잔흐른다는 뜻으로..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진 포석정.
당시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유상곡수터만이 남아있습니다.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포석정에서 신라왕들이 즐겼다는 유상곡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유상곡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방탕한 연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유상곡수는 구곡으로 흐르는 물가에 술잔을 띄우고 술한잔 먹고 시한수 낭독하고..
자연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정을 시로 표현해..
후대에 남기는 청류의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당시 문인이나 현사들이 놀이를 하는 것 중에 가장 깨끗하고..
왕들은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법으로 이것을 했습니다."

이처럼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 행해지는 신라의 성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은 신라왕들의 놀이터로..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놀이를 벌이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포석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고려건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유상곡수터만을 가지고 포석정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포석정이 놀이터가 아니라 호국제사가 행해지던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해석들이 제기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포석정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유상곡수터만 남아 있지만 신라시대 포석정 주변엔 수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남산을 포함한 포석정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성지였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포석정.
현재 포석정 근처의 일부 건물터만이 발굴됐지만..
이 일대에 대한 발굴이 좀 더 진행되고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포석정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펌글)

 

 

포석정 안에서 담장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민가를 촬영해 보았다.

경주는 문화관광도시라...허가없이 취향대로 집을 짓거나 개보수 할 수 없다한다.

경주시내에는 민가는 거의 기와지붕을 필수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주변경관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리라~~

남산을 벗어나며 간혹 양옥이나 스라브지붕이 눈에 띄었지만...대개는 기와집으로 여느 집은

문화잰가 보다 할 정도의 멋진 집들도 더러더러 눈에 띄었건만,

 

포석정에 바로 인접한 이 집 지붕은 조금 그렇다.

말이 기와지 흉내만 낸 기와모양의 프라스틱 같기도 하고...분명 흙으로 구운 기와는 아니다.

 

폼새가 영 그렇다.

그 느낌이나 모양새가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여실하다.

경주에서는 그 많은 입장료들을 받아...주민들의 개보수도 제한하면서 지붕 이을 돈은 어떻게

장기 저리 융자로 마련을 해주는 방법은?  분명 있겠지만...

흙으로 구운 기와보다 나은 실용성을 따졌는지. 경제성을 따졌는지 몰라도,

제대로 된 기와집이었으면 하는 나의 욕심은 너무 사사로운 이기심일까?

'여행발전소 > 문화유산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을 가다.  (0) 2006.03.15
울산대곡리반구대 암각화  (0) 2006.03.07
경주 야경  (0) 2006.02.20
기울어진 첨성대  (0) 2006.02.20
토함산 석굴암의 일몰  (0) 2006.02.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