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가던 송시열이 쓴 글씐 바위

 

 

 

 

 

 

 

송시열이 제주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때 섬 동쪽 끝 백도리 해변석벽에 자신의 심경을 한시로 새겼으며 택시에 내려서도 동백나무 울창한 숲을 10여분쯤 걸어가면 푸르른 남해와 기암절벽이 만나는 곳에 글씐바위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절벽을 지나야 해요.  아찔하지요?

 

 

송시열의 안각시문을 찾아 나 선 길은 절경이었지요.

 

귀양도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잠시 머물었던 곳 이라는군요.

우직한 충정을 바위에다  새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지요?

우암과 고산...그  두사람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여러 각도에서 마음이 착찹했지만 역사가도

또는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저 눈으로 풍취나 즐기다 떠나는 한 낱 민초일 뿐....

 

 

흔적이 애매해서 지나쳤다가 막다른 길에서 다시 되돌아 나오며 발견했지요.

얼핏보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습니다.

 

 

송시열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좌상(半身坐像)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등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한 인물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충정을 바위에 새긴 게 아니라....하늘에다가 새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과격한 성격의 그는 고산을 공격하고 둘 사이는 좋지않게 됩니다.

고산이 물론 20년 연배인 셈입니다.

고산은 낙향하여.... 세상을 외면했고, 송시열은 강직한 성격에 부러짐을 당한 거라는 개론을 펼쳐봅니다.

고산의 유토피아인 보길도에까지 우연찮게 흘러와서 이렇게 암각화를 만든 그 아이러니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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