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이라지만 비는 흩뿌리고 날씨는 춥고 변덕을 부렸다.
통녕, 세병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세병관은 통영 여황산 자락에 있다는데, 충렬사처럼 번듯한 사거리에 있는 게 아니어서 동네 골목길로 접어 들어야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안에서 대충 촬영을 했다.
충렬로 사거리에 있는 충렬사도 지나치고...
충렬사는 두세 번 왔었지만...그 땐 딱히 여행글을 쓸 때가 아니어선지 아니면 나이 어려 철이 없었는지.......그저 칼이 차암 크구나~ 무지 무겁겠는 걸?
역시 (이순신) 장군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런 생뚱맞은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골목길로 접어 들어간 곳은 마치 동네 주차장을 방불케했다.
복원도를 클릭! 크게 확대해서 보세요~ 국보 305호인 세병관이 통제영의 일부이군요~
복원사업이 어머어마한 규모로군요! 앞으로 복원 완료될 통제영은 통영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 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세병관 오르는 돌계단에서 ..... 고맙게도 어느정도 웃비가 그쳤다.
입구 돌계단 위로 보이는 근대에 복원한 누각 망일루
예전에는 바다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높은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통영시내가 복잡해져서
바다가 있으리라는 짐작뿐인 조선소의 호이스트만 보일 뿐...위치는 아늑한 곳에 자리잡았다.
춘백이 길손을 반긴다.
세월의 궤적이 담긴 돌계단
망일루 사이로 통영시가 바라다 보인다.
지붕위에 있는 용머리는 잡상이 아니고 용의 얼굴을 한 토우다 잡상은 궁궐이나 기타 임금님과 연관있는 건물에만 오릴 수 있다. 홀수로 올린다. 물론 용머리 토우는 뺀 숫자가 잡상의 수인데,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한다.
그 곳에는 봄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나포리라 부르는 미항, 통영! 통영시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전기에 북쪽 변경에서 자주 노략질하던 야인(여진족)의 항복을 받고서 이것을 징표로 남기기 위하여 누각을 짓고 붙인 이름인데, 함북 종성(鐘城)의 성내에 있는 3층 누각
귀한 금목서 나무가 눈에 띄었다. 정성어린 손길에 무척 단아한 모습이다.
남쪽에서만 생육이 되며 만리향이란 다른 이름도 있으며 서향이라고도 불리운다.
노란꽃이 피는 금목서, 흰꽃이 피는 은목서...꽃이 피면 그 향내는 무척이나 대단하다.
격이 있는 선비를 비교하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지과문(止戈門)
'창을 거둔다'는 뜻으로 '세병'과 함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바란다는 의미을 담고 있다.
止와 戈를 합하면 굳셀 무(武)가 된다.
어쩌면 전쟁으로 맞서 싸우는 굳센 의지가 내포되었다는 일설도 있다고 한다.
문화재명 : 통영세병관 (統營洗兵館)
지정번호 : 국보 305 호 (지정일 : 2002-10-14)
소개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건물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1동)
시대구분 : 조선시대 중기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문화동 62-1
왜 이름을 세병관(洗兵館)이라 했을까?
중국의 시성 두보의 시 '洗兵馬行'의 마지막 두 구에 그 답이 있다.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서 /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 /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서 / 다시는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할까?'에서 '병기를 깨끗이 씻는다'는 뜻의 한자말인 '세병'을 따다가 이름을 붙여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다. ------------------- 이봉수<이순신이 싸운 바다>에서
우물마루 연등천장을 설치하여 멋을 한층더내었다.
안쪽의 중안3칸은 한단을 올려 전태단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 하였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을 총지휘하던 통제영의 객사(客舍)입니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목조 건물. 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전면 9칸·측면 5칸의 단층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호나 벽체가 없이 통간(通間)이어서 그 규모가 웅장하다. 보물 제293호.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웅장한 풍채만은 크게 뒤질 바 없는 객사이다. 선조 37년(1604)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세병관을 중심으로 통제영성과 관아를 지었으나 세병관만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보수되었으며 이때 경내도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세병마(洗兵馬)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병마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두보의 대표적인 시다. 세병관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뿐아니라 현판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나 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문들은 다 올려져 있다.* 그림들이 오랜세월 퇴색하여서 흐리다.
꽤나 방대한 객사이다.
문에도 드나드는 법이 있다한다. 東入西出이란다. 중간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한다.
문설주에 작은 해태가 받치고 있었다. 해태는 물에 사는 상상의 동물로 화재를 예방해 준다고 믿었다.
뭘까? 어디선가 말을 매어두는 것과 비슷한데....이 위에는 계단으로 올라....사람이 머무는 객사 지금으로 치면 영빈관인데....웬 주차장? (뭘까?)
비를 머금은 동백꽃~
두륭포기사비
세병관 경내 수항루 뒷편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우리 고장(당시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치적이 새겨진 통영의 뿌리를 밝히는 사적비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3년(1625) 구인후 제19대 통제사가 세웠는데,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가 지은 비문의 내용은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 이경준 통제사의 가문과 약력,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된 이유, 그리고 이경준 통제사의 혜안과 업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는 원래 통제영 남문 밖의 바닷가 큰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무 8년(1904) 이곳 사람 이학재, 이승주 두 사람이 세병관 앞뜰에 옮겨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귀부가 없어진 듯하고 비신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 오랫동안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1996년 4월 12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비각을 짓고 하대를 새로 만들어 옮겨 세움으로써 1세기만에 비신의 하부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수는 운문(雲紋) 위에서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특히 뛰어나다.
아름다운 수항루 모습!
'통영 세병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했던가? ..... 이순신장군과 직접적인 연관이야 없지만...조선 선조 때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통영을 지나치며 안 가볼 수 없는 곳, 세병관이었다.
이순신의 후일담은 드라마로 불멸의 이순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나, 어디까지나 그 건 소설이요 드라마였다. 선조는 난을 피해 다니며 전전긍긍 왕좌를 유지했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계획의 전란으로 무수한 공을 거뒀으나 선조는 그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한다.
학설에는 선조와 이순신은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있다한다.
아무튼 아주 치밀한 전투계략을 도모한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통영를 여러번 왔지만 한산대첩이 있었던 한산도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으로...기약해얄 밖에...
글:사진/이요조
한산도 한산대첩현장/시 홈페이지에서
1) 대중교통
통영시외버스터미널앞 시내버스(도남동,봉평동 방면 승차) → 중앙동 백화점앞에
서 하차 → 세병관까지 도보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2) 자가교통
통영시 원문검문소를 지나 시내 간선도로 진입 → 세종병원(직진) → 북신사거리
(2차선에 붙어 시내 방면 진입) → 중앙동 백화점 앞 신호등 우회전 →문화동 샛
길(사거리 우회전) → 세병관까지 200미터 정도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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