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尹拯]1629 ~ 1714, 조선 중기의 문신
윤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유계(兪棨),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성리학을 기본으로 당대의 정통 유학을 수학하였다.
17세기 조선조의 격동기를 살다간 성리학자, 예학자로서 한국 유학사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분이다. 그는 평생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지만 수많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수없이 임금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며 재야에서 묵묵히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명재는 살아 생전에 영의정까지 제수받았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명재 윤증은 한국적 心學을 태동시킨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하곡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했던 윤증은 훗날 조선 후기의 實學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그동안 조선조 유학을 형이상적 理氣論이나 지리한 心性論으로 재단해 왔었다. 그러나 유학의 실천성을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독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론 중심의 학풍을 좇는 데 주력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서구 철학의 영향이 해방 이후 우리 학계를 지배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명재 윤증은 보기 드문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덕행을 실천하는 데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인 知行兼竝의 참다운 지식인이었다. 선생은 항상 '務實'과 '實心'을 강조하였다. 헛된 담론을 일삼거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잘못된 공부 방법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참된 도리를 제대로 깨우쳐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군자와 소인이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했던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명재 윤증(김길락, 유명종, 윤사순, 한우근외 19명)' 중에서
▲ 고택 안내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고택은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숙종 때 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건물은 19세기 중반의 건축 양식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으로서 조선시대 중기때 상류층의 전형적인 살림집으로 보여진다.
가옥은 상류 양반 가정의 표본이 되는 목조단층 건물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되어 있는데, 안채는 ‘ㄷ’자형이며,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있다. 대청 뒤편 좌우에 고방이 있고, 서쪽에는 정면 2칸과 측면 1칸의 안방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웃방이 있다. 남쪽에는 부엌이 넓게 꾸며졌고, 부엌 위에 다락이 있다.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대청과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그 뒤에 또 다른 방이 이어졌다. ‘ㄷ’자형의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어 ‘ㅁ’자형 구조를 갖추었으며, 대청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되었다. 지붕이 특이하게 조성되었는데, 그 형태가 창경궁의 연경당과 같다. 구조적인 면과 배치 형태, 창호의 처리 등에서 기능성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건축물 남쪽에는 넓고 평평한 바깥공간이 있는데 그 곳엔 네모진 연못이 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수공간(水空間)인 방지원도(方地圓島)로 조성되어 전통적인 연못의 기법을 나타낸다.
특히 대문에서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은 외부사람의 조심스런 접근과 내부사람의 독립성(privacy)을 고려한 완충적인 공간으로 거부감 없이 조절하고 있다.
▲ 안채로 들어가는 길과 우측으로 노출되어 있는 사랑채
사랑채 공간도 남성적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안채와 떨어져 독립성을 주면서도 안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윤증선생 고택의 지혜이면서 멋이다.
윤증선생 고택의 사랑채는 마을을 향해서 열려 있다. 밖으로 자신감 있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사랑채는 한 가족만이 생활공간을 넘어서 마을이라는 공동체로 열린 공간이다. 사랑채 건물을 좀더 분석해보자.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있다. 뒤에서부터 낮아지는 지형의 차이를 활용하여 기단부를 수직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벽체는 전면에서 볼 때 네 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칸은 사랑방, 그러니까 온돌방으로 막혀있고 양축은 한 칸씩은 누마루 그리고 대청으로 비워져 있다. 누마루는 높이 들어올린 마루를 말하는 데, 격식을 갖춘 한옥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누마루는 전면의 연못을 조망하거나 앞의 경관을 감상하는 기분좋게 시야가 열리는 장소이다. 사진에서는 누마루의 창문이 닫혀있지만 이것을 열어서 들어올려 매달면 이 모퉁이 칸은 완전히 개방된다. 여기서 허와 실의 대비적인 구성을 볼 수 있다. 한옥은 독특하게도 온돌과 마루를 한 채 내에 가지고 있는데, 이 두 요소를 잘 결합하여 구성함으로써 여러 가지 미학의 원리들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옆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의 합각이 있는 지붕이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팔작지붕은 위계가 높은 건물에 많이 쓰였다. 팔작지붕은 형태적으로 단정하고 완결적이다. 전통 건물들을 보면 비례적으로 지붕의 비중이 크고 육중해 보인다. 실제로 지붕의 무게는 대단했다. 그래서 그 지붕을 구조적으로 또 ,미적으로 어떻게 지시하는가 하는 것이 전통 건축의 큰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윤증선생 고택의 사랑채에서 그런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비운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육중한 지붕이 부유하는 듯하다. 지붕의 처마 곡선이 휘어 올라간 것도 그러한 느낌에 도움을 준다.
▲ 사랑채의 누마루
완전히 트여있는 구조가 아니라 방처럼 벽과 창으로 막혀있다. 윤증고택에서는 사랑채를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약간의 실비를 내면 숙박이 가능하다.
▲ 우물
▲ 연자방아의 흔적
▲ 도로변에서 바라본 고택 측경
▲ 윤증선생 모친의 정려각
고택 앞 남쪽 작은 언덕이 안산을 이루며, 안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외부로부터 집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또한 안산에는 윤증 모친의 정려각(호란 때 윤증일가는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빠져 나오기를 시도했다. 가족 대부분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고, 모친 공주 이씨는 자결하여 정조를 지켰다)이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우환이 많다고 하여 정려각의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참고
- 현영조(이학박사) : 전통문화연구원
- 한필원 : 한남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김봉렬 교수의 앎과 삶의 공간에서
- 윤증고택 http://www.yunje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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