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 을유년의  닭은 문제의 알을 많이도 낳은 알의  한 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김치 기생충알 파동, 줄기세포 난자(卵子) 파동까지~
한국사회를 집단 우울증으로 까지 몰고 간...

 

12월 나 역시 모질게도 우울했다.
맨 처음 황우석 박사의 손을 쉽게 들어 준 나는 초지일관 분명 말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
혼자 생각하며 반드시 기대에 부응 할 옳은 결과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 했었다.

 

한국의 과학자들의 관계는 매우 좁다고 했다.
몇 안되는 과학자중에서도 특히나 황우석과 노성일은 예사 친분관계가 아닌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한다.
나는 11월서부터 불거져 나오던 사건이 12월내내 내 마음까지도 뒤흔들어

 '누가 암까마귀인지 누가 숫까마귀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문득 오성과 한음의 관계가 떠 올랐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부터 배우던 오성과 한음
경기도 포천 어디쯤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검색을 하고 12월 21일 눈 온뒤 매서운 날
막내 아들넘과 같이 포천으로 향했다.

먼저 그나마 찾기가 쉬운 한음 이덕형의 '용연서원'부터 찾아갔지만 ,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제 글은 맨 아래, 위치로 연결)

 

 

 

 

 오성과 한음은 누구인가요?
조선 시대 중기의 인물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오성(鰲城)이라는 호를 가진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이라는

호를 가진 이덕형(李德馨)이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우리에게는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이라는 일화로 오랫동안

전해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오성과 한음:+:+:+:+:+:+:+:+:+:+:+:+:+:+:+:+:+:+:+:+:+:+:+:+:+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이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親舊)로 지내면서 장난(作亂)이 심(甚)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傳染病)으로 일가족이 몰살(沒殺)한 집에 시체(屍體)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膽力)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부인 : 오성이 한음부인(夫人)과 정(情)을 통(通)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부인을 오성을 초청(招請)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부감(新婦)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음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政丞)까지 할 것이란 예언(預言)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칙간(집x則間)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칙간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따.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놓았던 정을 도로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은 방문에 주먹을 찔러놓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 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문학으로서 가치가 있다.
내용출처 :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그외의 이야기

어느 시골 길을 지나다 똥이 마려워 똥을 눕자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러자 하는수없이 길가에서 앉아있다가

번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쓰고있던 흐름한 번거지를 버서 그 똥을 덮은 다음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기 금으로된 새가있으니

꼭 누루고 있어요 하면서 그 곳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그 지나가던 사람은 오성이 오지않자 모자 밑에서 있는

금새를 손을 넣어 꼽잡아 주웠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인변, 떵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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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鰲城) 이항복과 한음(漢蔭) 이덕형의 우정(友情)

               

 오성(鰲城)은 바로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 명종 11-광해군 10) 선생이며, 그의 아호(雅號)는 백사(白沙)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로서 장인(丈人)인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더불어 전란(戰亂) 극복에 힘쓴 결과,

호종(扈從) 1등 공신(功臣)에다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되어,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그를 오성대감

(鰲城大監)이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최종 벼슬은 영의정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변호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적극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사후(死後)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입니다.

 

 오성이 함경도로 귀양가는 길에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인 철령(鐵嶺) 고개를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어, 후일(後日) 이 시조 내용을 광해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령(鐵嶺) 노픈 봉(峰)에 쉬여 넘난 져 구룸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사마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다리.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3

 


 오성 이항복 선생의 절친한 친구가 바로 한음(漢蔭) 이덕형(李德馨) 선생입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 명종 16-광해군 5)은 아호가 한음(漢蔭)이며, 오성 이항복과 같은 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명군(明軍)이 오자 그들을

맞이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서울 수복의 공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한 죄(罪?)로 파직되어 병사(病死)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들은 광해군은

울면서 한음을 복관(復官)시켰다고 합니다. 한음의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입니다.

 


 일찍이 한음(漢蔭)이 명(明)나라로 구원병(救援兵)을 청하러 갈 때 그와 오성(鰲城)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성(鰲城)은 친구 한음을 전송(餞送)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우리나라 의주(義州)]에서

찾게나.”

 


 한음은 대답하기를,

 “아닐세. 만일에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거든 자네는 나의 시체를 노룡[蘆龍 ; 명나라 황성

(皇城)]에서 찾도록 하게.”

 


 말을 마친 두 사람을 굳은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고 합니다.

 서로의 사후(死後)까지 부탁하며 비장하게 작별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우정과 우국지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던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 제거와 인목대비 폐출 사건 때 이를 반대한 대표적 충신이었고, 오성이 탄핵을 당해

북청(北靑)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자 평생의 지기(知己)를 잃게 된 한음은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헤어진 후 연일 귀가(歸家)할 때마다 친구를 생각하고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합니다.

 


 이 때 그가 지은 시조(時調)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큰 盞(잔)에 가득 부어 醉(취)토록 머그며서

 萬古英雄(만고영웅)을 손고바 혀여보니

 아마도 劉伶(유령) 李白(이백)이 내 벗인가 하노라

            ━━━━  출전(出典) : 진본 청구영언 100

 


 이렇듯이 오성(鰲城)과 한음(漢蔭)은 서로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났지만 평생토록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유별나게 돈독했던 우정에 관한 숱한 일화(逸話)들은 지금까지도 야담(野談)으로 각종 책(冊)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객지(客地)에서 만난 사이에 서로 마음이 통하면 10년 미만(未滿) 차이의 범위 내에서 벗으로 지냈으며,

10년 차이가  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兄)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는 공자(孔子)님과 주자(朱子)님도 인정하신

관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이 전통을 오래도록 지켜 내려왔습니다. 

 


 특히 인구가 적은 시골에서는 동갑내기 출생이 드물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 입학하면 다섯 살 정도 차이

나는 동급생(同級生)이 많아 서로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고,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장기간 존속했던 군사 문화(軍事文化)의

영향으로 군대에서 군번(軍番) 순서를 따지듯이 요즘에는 친구도 한두 살 차이 범위 내에서만 사귀게 되어, 그 이상만

차이가 나면 무조건 형(兄)이나 선배(先輩)로 깍듯하게 대접하는 신풍토(新風土)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스운 것은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시어머니 언행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70년대와 80년대의 이른바 386세대의 운동권 출신들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면서도 나이 차이가 별로 없는 선후배사이에

일일이 학번(學番)을 따져서 한 학년이라도 차이가 나면 군대(軍隊)의 고참(古參)과 졸병(卒兵) 관계처럼 서로를 상대

(相對)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관행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386세대가 젊은이들의 주류(主流)가 되면서부터 보다 널리 일반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아무리 대학교 입학 선배라 할지라도 후배가 선배에게 먼저 말을 놓으라는 요청을 하기 전에는

 선배가 함부로 후배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무조건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고, 심지어는 학과(學科) 후배나 동아리(서클) 후배들에게 체벌

(體罰)까지 加(가)하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도 입학년도(入學年度), 즉 학번(學番)이 늦어 후배가 된 사람에게 기강(紀綱)을 잡겠다며

 매를 때리거나 함부로 하대(下待)를 한다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인권적(人權的) 측면에서 이보다 더 부당(不當)

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해 상반기(上半期) 연예가(演藝街)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는 ‘방송국 개그맨 선후배 구타사건’의 경우도 알고 보니,

나이가 한참 어린 선배가 나이 많은 후배 개그맨을 구타하여 입원까지 시킨 사건이었다더군요.

 30년 군사문화의 잔재(殘滓)는 역설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선후배간 질서에까지 심대(深大)한 영행을 끼쳤고, 입학

년도(入學年度)의 학번(學番)이나 나이 한 두 살 차이 때문에 양자(兩者)가 종속관계 내지 불평등한 관계를 맺는 악습

(惡習)은 이제 너무 일반화(一般化) 내지 고착화(固着化)한 감(感)이 있습니다.

 


 정녕(丁寧)코 현대인(現代人)들은 민주화(民主化)가 이루어진 이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살면서 우리의 선인(先人)

오성(鰲城)과 한음(漢蔭) 두 분처럼 서로 마음에 맞으면 나이 몇 살 따지지 않고 평생지기(平生知己)로서 지낼 수 없단

말입니까?

 

예문/검색글 포함

 

 

'용연서원'은 굳게 닫혀있었고 뭐라고 써 논 글은  겨우 새겨 듣고는 담배가게로(슈퍼) 갔더니

안내도 하지 않고 선뜻 열쇠를  건네 준다.

"신분증을 못 가지고 왔지만 서원 사진을 좀 찍을까 하려고요" 란 말이 전달이 됐나보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 간 서원은 한음 이덕형의 초상화와 제사드리는 위패와 문중에서 선출한 

서원을 감찰하는 이들의 사진이 아래 준비하는 제당에 걸려있었고

몇가지 전해 내려오는 제문을 새긴 목판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한음의 서원을 보고 오성 '이항복'의 묘소를 어렵게 (위치가 찾기 어려움)물어 물어(신북 면사무소에 문의)

찾아 들어가니 시간은 그리 깊진 않아도 인가가 없으니 캄캄절벽이었다.

그나마 눈이 있어 좀 덜한 것 같아 보였다. 쌓인 눈을 밟고 가지니 뽀드득 뽁뽁...소리가 났다.

"어머니...어두운데...어느 게 '오성'님의 묘손지 알아 볼 수 있겠어요?"

그 부근 묘소는 이씨의 선산으로써 포천 국회의원 이한동님의 선소인 듯 두 언덕을 나뉘어서 수십개의 봉분이 

너무나 잘 손질되어서 막상 어느 게 '이항복'님의 묘소인지 구별이 안갔지만,

"따라 오너라 본시 조상의 무덤 윗쪽에다가는 자손의 묘를 쓰지 않는 법이니 맨 위에 있는 묘소일게다"

어림잡아 올라갔더니 어둠속에서 산짐승이 후다닥 놀라 숲에서 뛰어 달아난다.

혹? 멧돼진가 싶어 겁이 더럭났으나 다리가 긴 모습이 건들건들 뛰어 가는 것으로 봐선 오루나 사슴 뭐 그런 것

같아 보였다.

 

무섭기도하고 대충 사진을 찍어서 집에서 검색사진과 비교를 하니 역시나 내 말이 맞긴 맞았다.

맨 위에 계신 것이었다.

 

이로써 오성과 한음의 발자취도 밟았는데...오성 이덕형님의 서원도 있다한다.

 

 

 

오성과 한음 1,2,3으로 나눠 올리겠습니다.

 

 

이항복 선생 묘 찾아가는 길:
내촌에서 포천시내로 들어 가다보면 가산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의정부 방향의 316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 진행하면 LG정유 시그마 주유소가 나오고 이 곳에서 좌회전하여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좁은 마을길을 약 1.5k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지 않음이 아쉬움이다.

이덕형 선생의 용연서원 찾아가는 길:
포천에서 경복대학교 이정표를 찾는다. 서원은 경복대학교 옆에 위치해 있어서 비교적 찾기 쉽다.

 

 

한옥의 외관을 보았을 때
저 건물은 엄숙하다, 단아하다, 장중하다, 화려하다, 발랄하다, 날아갈 것같다....
이와같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나 공감하시겠지만.... “지붕”입니다.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물앞에 놓인 안내문같은 것을 읽어보면 팔작지붕이네, 맞배지붕이네.... 설명은 많지만,
팔작지붕이 뭐고, 맞배지붕이 뭐고...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그리고 난해한 건축용어만 잔뜩 늘어놨습니다.
합각이 어떻고, 부연이 어떻고, 사래가 어떻고....^^;
아마 안내문을 끝까지 읽으면서 제대로 이해하고 읽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지붕과 관련해서만 몇 가지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무량수전과 동떨어진 별개의 얘기가 아니니까...




우선 한가지 알고 들어가야 할 개념...
흔히 “산마루”라는 말을 많이들 쓰지요?
산의 이쪽 비탈과 저쪽 비탈이 만나는 능선을 산마루라고 하는데요,
산마루, 고갯마루의 예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은 곳을 가리켜 마루라고 말합니다.
지붕에도 이와같은 마루가 있습니다.
용마루, 내림마루(=합각마루), 추녀마루(=귀마루) 등이 그것입니다.




산마루라는 말에서도 짐작하셨겠지만,
면과 면이 만나는, 산으로 말하면 능선같은 개념을 지붕에서는 마루라고 칭합니다.
지붕에서 “마루”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기와 몇장을 그냥 쌓아올려서 얕으막한 담장같은 것을 하나 만들게 되는데,
앞으로 사진이 나오거든 그 마루에 있는 “얕은 담장”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가지 마루를 모두 가진 팔작지붕 얘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순서가 되겠군요.
여기 쓰인 그림은, 그림 안에 출처를 표시했습니다.
볕 좋은 베란다에서 발가락으로 책 누르고, 발발 떨며 접사한 겁니다.
좋은 책을 내주신 김왕직 선생님께 정말 정말 감사하단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고건축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기와지붕의 형태가 바로 이 팔작지붕입니다.
우선 용마루... 앞의 지붕면과 뒤의 지붕면이 만나는 가장 높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용마루의 끝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선, 그것을 내림마루라고 말합니다.
그림 2개 중에서 측면에서 비스듬하게 보고 그린, 첫번째의 그림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내림마루 2개가 선명하게 삼각형을 이루고 있지요? 그 부분을 “합각”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합각을 이루어주는 내림마루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는 합각마루라고도 불린답니다.




이따가 말씀드리겠지만, 내림마루까지만 갖추게 되면 건물의 지붕은 맞배지붕이 됩니다.
각각의 내림마루 끝에서 네 귀퉁이, 즉 꼭지점을 향해 한 번 더 선을 연장해주면
팔작지붕이 되는거죠.
지붕의 네 귀퉁이에 질러넣는 길다란 부재는 추녀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그 마루의 이름은 추녀마루입니다. 귀마루라고도 하구요.
팔작지붕은.... 됐지요?




무량수전이 바로 이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지요.
오공님의 무량수전 사진을 보시겠습니다.(난도질을 해놔서 원작자께 죄송...)









무량수전이나, 그 앞의 안양루나 모두 크기만 다를 뿐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네요.
내림마루가 이루어주는 삼각형의 합각(노란색)이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무량수전 지붕에 빨간 선으로 표시한 것은 용마루,
흰색 선은 내림마루, 그리고 연두색 선은 추녀마루입니다.




팔작지붕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해보지요.
처마와 추녀라는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보통 섞어쓰기 마련인데,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 여기서 확실히 알고 넘어가시죠. 우선 오공님의 사진 한 장을 보실까요.










아름다운 무량수전의 지붕 한귀퉁이를 찍어주셨습니다.
사실 팔작지붕의 아름다움은
흡사 버선코처럼 저 네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간 곡선미에 있지요.
마치 갈빗대처럼 가느다랗게 여러 개 가지런히 뻗어나온 것이 서까래인데(파란표시 小)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까래가 끝에 덧대어져 있는게 보이시죠?
다시말해 겹으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처마를 겹처마라고 하구요, 끝부분에 덧댄 서까래는 특히 부연(빨간표시 小)이라고 합니다.
부연이 없으면 물론 홑처마가 되겠군요.




눈이 좀 날카로운 사람은 서까래가 둥그렇게 돼있고,
부연에는 변화를 주어서 각이 지도록 깎아놓은 것
도 보이실 겁니다. 아름답지요?




줄지어 선 서까래(겹처마집이니까 부연까지)가 이루는, 모자로 치자면 차양같은 부위....
그것이 처마입니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도 막아주고, 그늘도 지게 해주고...




추녀는 어디 있을까요?
건물 정면의 처마와 측면의 처마가 만나는 부위를 추녀라고 합니다.
처마가 가운데에서는 약간 아래로 처지면서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추녀에 다다르게 되면 그 선이 가장 높아지겠지요.




귀퉁이를 향해 굵은 부재가 뻗어나와있는 것이 보이시죠?
이와같이 추녀를 구성하는 나무를 추녀목이라고 합니다.(파란표시 大)
홑처마집이면 추녀목 하나면 되는데,
무량수전과 같이 부연이 있는 겹처마집이면 추녀목을 하나 덧대줍니다.
덧댄 추녀목을 특히 사래라고 말합니다.(빨간표시 大)
팔작지붕으로서 겹처마집이 있다면, 당연히 부연과 사래가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서까래의 맨 귀퉁이에는 추녀목이 있고,
부연의 맨 귀퉁이에는 사래가 질러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의 말을 빌면, 추녀끝 고드름이란 개념은 있을 수가 없고,
처마끝 고드름이라 해야
한다.... 이해 되시죠?




저도 그분의 흉내를 내어 한마디 보탠다면,
최소한 이 사진에서만큼은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아니라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라 해야
말이 된다고.....
저 위 오공님의 사진을 보시면서 다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큰 지붕의 경우 지붕 네귀퉁이에 기둥을 받쳐서 그 무게를 지탱하기도 하는데,
활주라고 말합니다.(까만 표시)
무량수전의 경우, 활주를 역시 “추녀”의 끝에 대주어서 힘을 받아주고 있군요.
덧대놓은 “사래”에다 기둥을 받칠 경우 활주의 역할에 충실하기 힘들겠지요.



방금 나온 홑처마, 겹처마, 서까래, 부연, 추녀, 사래...를
종합적으로 그림을 보면서 확인해보시길.





 

 

 

 




마지막 이 그림에서 약간 까맣게 나온 놈이 추녀목,
거기서 바깥쪽으로 더 연장된 놈이 덧댄 추녀목, 즉 사래입니다^^







그다음은 우진각 지붕입니다. 다시 그림을....







 


어디서 많이 본 모양 아닙니까? 시골에 가보면 농가의 슬레이트 집이 죄다 이렇게들 생겼지요^^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마루만 가지고 얘기해본다면,
수직으로 떨어지는 마루, 즉 내림마루가 없으니
우진각지붕은 용마루와 추녀마루로만 구성된 게로군요, 그렇죠?^^




지붕의 곡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면만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큰 사다리꼴 두 개와, 삼각형 두 개가 머리를 맞대서 만든 모양의 지붕이네요.
팔작지붕과 마찬가지로 추녀마루가 있는데, 어떤 점이 다를까요?




팔작지붕의 추녀목은 짧은 것을 써도 되겠지만,
우진각지붕의 추녀목은 용마루에서 곧장 뻗어나와야 되므로 상당히 길겠지요.
그래서 어떤 건물에는 팔작지붕, 어떤 건물에는 우진각지붕...
“건물의 레벨”과 관련된 이런 도식화된 공식의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큰 추녀목의 문제때문에라도 우진각의 예는 실제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궁궐이나 성의 출입구같은 곳에서 그 예를 좀 볼 수 있지요.
아래 사진은 남대문의 사진입니다.
아까 무엄하게도 농가의 슬레이트 지붕을 예로 들어서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기 쉽겠습니다만,
이 우진각 지붕은 뭔가 무식해보이면서도 견고해보이고,
상당히 장중한 맛
을 풍긴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 다음은 맞배지붕....
역시 그림을 먼저 보고나서.







 



지붕면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사각형 두 개가 이루고 있는 지붕이 맞배지붕이지요.
마치 책을 펼쳐서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습니다.
용마루는 당연히 있구요.
그림에 내림마루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맞배지붕은 추녀마루가 없이 용마루와 내림마루만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우진각에는 내림마루가 없고 추녀마루가 그 자리를 대신했었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맞배지붕은 너무나도 단아하고, 엄숙하고, 그 효과로 장중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찍은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사진과
기천검이 찍어준 수덕사 대웅전 사진을 차례로 감상하시지요.











위의 사진들은 측면에서 보면 도리며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어 시원하기 짝이 없습니다.
헌데... 같은 맞배지붕이면서도 조선 중기 이후의 맞배지붕들은 다소 답답한 모양을 갖고있죠.
어떻게?









바로 이런 모습들이죠... 옆에 붙어있는 판자들은 "풍판"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풍판의 아래 마무리는 그림에서처럼 둥글게 하기도 하고,
아니면 반듯하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저 풍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비바람을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재가 길면 무위사 극락보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처럼 지붕이 좌우로 쭈욱 길게 나오니
비바람이 어느정도는 들이치지 못하겠지만,
목재난이 심각했던 조선조의 맞배지붕들은 그렇게 긴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지붕의 좌우를 짧게 하고, 대신 풍판을 댔던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지요.




서강님이 찍으신 사진이 하나 있는데, 달라고 제가 졸랐습니다.
그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참 재밌는 사진인데, 뭐가 재밌는지 한번 보시지요^^



지금까지 얘기한 지붕의 형태 3가지가 이 사진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서강님은 물론 의식하지 않고 찍으셨겠지만, 저는 그것부터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제 정자같은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붕의 형태를 보실까요?








용마루가 없는 지붕이 바로 이런 형태입니다. 꼭지점에서 바로 선들이 내리뻗었지요?
몇각형을 이루느냐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 이렇게 나갑니다.
사모지붕 하나 보실까요?
다산초당 옆에 자리잡은 천일각입니다.








지금껏 얘기해온 한옥의 기본개념만 가지고,
무량수전의 제원, 그러니까 그 생김새를 말할 능력이 갖추어지셨겠지요?
(아직 공포부분은 얘기가 안됐지만)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9량집이 되는 겁니다.... 맞죠?
계속 재인용되는 사진이지만, 다시 오공님의 사진을 보시면서 확인!!




♬ 음악 : Chopin - Nocturne No.1 in B flat minor O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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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서린 광통교



광통교를 옮기느라 석축 뿌리 부분을 자르는 문화재 파손이 어떠니 저떠니 말도 많았었다.

옮겨 논 광통교에 와서는 석축의 상하가  거꾸로 놓였다고 웬 일? 웬 엉터리냐고 시시비비였다.


그 석축을 옮겨와서 복원할 당시 상하 정도는 볼 줄 아는 사람의 지시로 석축을 바르게 쌓았는데 도무지 제대로 아귀가 맞질 않아 복원이 안 되더란다.

아무리 해도 전처럼 복원이 되질 않아  거꾸로 놓아봤더니 이가 딱, 맞물려 쌓아지더란다.

바로 세운 그림


그런 사유를 나중에사 알게 되고....

처음엔 거꾸로 라고 비아냥대던 사람들도 거꾸로 위치한 신장석에 얽힌 내막을 알고 난 뒤에야

모두들 침묵했다는.....


(처음 말이 많았던 사건 기사를 종합하여/이요조)

 

 

광통교를 만났다.

모전교에서 조금 내려가자니...그 말 많던 광통교를,

일순 떨리는 듯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나 보다.

좀체 손이 떨리지 않는데

짐짓 카메라가 흔들렸다. 차차 찍은 순서대로 안정을 되찾았다.



광통교는 한이 서린 다리다.

태조 이성계에겐 두명의 아내가 있었고,  당시는 전처, 후처라 부르지 않고 향처, 결처라 불렀다. 향처인 신의왕후에겐 다섯아들이 있었고, 신덕 왕후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 그 가운데 다섯째 아들 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나라를 세우기 전엔 서로 긴밀하게 협력 했고 나라를 세운 다음엔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 했다.


신덕 왕후가 죽자 태조는 지금의 정릉에  묘를 쓰고 잡귀가 접근치 못하도록 봉분 주위에 구름과 당초 무늬가 아로 새겨진 신장석을 둘렀다 한다. 보는 사람마다 신의 솜씨라고 감탄한 이 돌 조각은 당시 8도에서 돌을 가장 잘다루는 제주도 석공의 솜씨라고 한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했던 태종은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이 죽은 뒤에도 증오를 풀지 못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광통교를 흙다리에서 돌다리 로 개축하면서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신장석(神將石)을 뽑아다 교각으로 썼단다.



얼마나  미웠으면 태종은 신덕왕후의 묘의 신장석을 가져다가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으로 교각으로 사용했을까? 그 것도 거꾸로 뒤집어서 말이다.


지난해 청계천 복원공사로 광통교를 발굴했을 때 신덕왕후의 외가인 강씨묘 종친회에서는 광통 교에 깔린 신장석을 정릉으로 돌려 달라고 서울시에 탄원하기도 했다는데,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600여년 전부터 시민들을 품고 흘렀다.

조선 시대의 청계천 다리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 9개가 있었는데,

대부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됐다 한다.

이에 따라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청계천은 이제 제 길을 찾았을 뿐이다.

콘크리트에 갇혀 질식된 청계천이 이제야 숨쉬게 된 것이다.

600년 동안 땅속 썩은 도랑물에 몸을 담근 교각들은 폐수 암모니아에 절어 시퍼르딩딩한 아픈 상흔으로 눈부신 태양아래 섰다.


오랜 세월, 잊은 듯  흐른 다음에야......




글/사진: 이요조

 

 

뉴스-전언에 의하면 서울시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광통교를 복원한 것이라고 밝혔다.

 

 

 

                                                              복원된 광통교

시민들이 서울 청계천 광통교 석축의 받침돌에 불상조각이 거꾸로 된 것을 희한한 듯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바로 세워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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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리즘



icon-x.gif사엽문(四葉紋)

꽃이 피어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늬의 특징은 부귀와 영생을 기도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icon-x.gif십장생문(十長生紋)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 또는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의미한다.
십장생무늬는 부락이나 부족인 전체 또는 천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활의 풍요와 수복을 기원하고 있다.



icon-x.gif매화문(梅花紋)

군자와 고사의 지조와 절개로 비유되고 있는 매화 무늬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있으며 ,
5덕(쾌락, 행복, 장수, 순리, 절개) 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icon-x.gif국화문(菊花紋)

국화는 늦서리를 견딘다 하여 길상의 징조,
또는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 왔으며,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상징하는 길상의 꽃으로 인식되었다.



icon-x.gif난초문(蘭草紋)

난초는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조선시대 청화백자와 옹기의
수화문 중에 사용한 것이 있다.



icon-x.gif죽문(竹紋)

대나무는 계절을 통해 색이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군자의 품격이나 절개의 상징으로 비유되며
기형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은 고려시대이며
조선시대 백자에 문양으로 나타났다.



icon-x.gif포도문

포도문양의 상징적인 뜻은 장수, 다남, 다복, 부귀이다.



icon-x.gif소나무문

소나무의 한결같은 푸르름이 상징하는 것은
지조, 의리, 절개이다. 소나무의 절개나 장수의 상징보다는
탈속의 풍류를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 그림이 있다.
 



icon-x.gif연화문(蓮花紋)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를 연꽃으로 상징하고 있다.
연꽃은 대개 물과 관계가 깊으며 자손을 얻는 것과 함께
과거급제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연꽃은 강한 생명의 기운을 지니고 있으며
순결과 환생을 의미하며 고려청자의 기형이나
문양에서 많이 나타난다.



icon-x.gif모란문(牧丹紋)

모란꽃은 크고 화려해서 부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려청자에서 간결하게 도안화된 모란 무늬가
다양하게 사용되기 시작, 조선시대에는
민화풍의 회화적인 목단문이 많이 나타난다.



icon-x.gif서조문

새그림은 옛사람들이 바라던 가정의 화목과
신분상승에의 용감, 또는 안락한 노후와 장생불사등의
현실적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icon-x.gif당초문(唐草紋)

불교에서 연화장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구도가 도안적이고 편화가 된것도 많다.
당초문에는 여러종류가 있으며 도자기에 장식된 당초는
대개 연속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icon-x.gif포류문(蒲柳紋)

위로수금문이라고도 하는데 갈대밭에 노니는 물새나 철새들이
있는 풍경을 그린 문양이다.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볼 수 있으며
한적한 풍경을 도자기에 담아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여유를
자연에서 찾은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icon-x.gif초화문(草花紋)

초화문은 풀과 꽃의 특징을 간결하게 갈필처리한 그림으로,
주로 분청사기에 철화문으로 나타난다.
여백이 절제된 공간을 내포한 것으로
분청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icon-x.gif화조문(花鳥紋)

자연 섭리의 조화를 작품속에 표현하고자 할때,
꽃과 새는 매우 자연스런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꽃과 새는 동과 정, 음과 양의 대비와 조화를
표현하는 소재로도 적절하다.
고려시대 이후 새의 문양은 자연풍경을 소재로
매우 다양해졌으며, 청자의 운학문을 비롯하여
포류수금, 또는 위로수금 등 갈대숲과
수양버들이 있는 강변의 물새와 철새떼의 풍경은
그 시기 지식인들의 은둔사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icon-x.gif화초담장문(花草담장紋)

경복궁 자경전의 담장이 화초담장으로 유명하며,
해, 산, 구름, 괴석, 물,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불로초 등
장생무늬와 연꽃, 포도, 대나무 등의 서화서초 무늬를
벽돌로 구워 벽면에 박아 장식한다.



icon-x.gif동물문

동물에 대한 공포나, 숭배, 천렵의 대상,
가축과 같은 친근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매우 사실적이나 선묘(線描)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icon-x.gif금수문(禽獸紋)

머리는 짐승의 형상을 하고 몸체는 사람의 형상을 하거나,
반대로 머리는 사람, 몸체는 짐승인 괴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문양이다. 일상이나 월상문양은
매우 유희적이고 동화적인 것으로
불교미술에 습합되는 시기의 과정으로 보인다.



icon-x.gif어해문(魚蟹紋)

물고기는 무리지어 노는 모습이
무애(無碍 : 즐겁고 평화로움)의 상징이다.
물고기의 자유로운 유영이 구속과 제약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를 이룬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쏘가리는 궐이라 하여 궁궐의 궐(闕)과 음이 같아서
관록과 출세를 상징한다. 메기는 흐르는 물을 뛰어넘어
꼭대기에 잘 올라간다고 해서 등용을 의미하며,
한 쌍의 물고기는 화합과 조화를 의미해
부부의 사랑을 의미한다.
분청에는 여러 마리 불고기가 수초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생활의 여유와 즐거움을 의미한다.



icon-x.gif운학문(雲鶴紋)

운학은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학이 길상적인 구름과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2세기 중엽 고려 상감청자에는 운학문과 도자기 형태의
아름다움이 절절에 이른다.
당시 고려인의 자연과의 친화와 심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13세기 중엽부터는 자잘한 인화문으로 바뀌어
추상적인 면을 보인다.



icon-x.gif도깨비문
도깨비 형체의 얼굴을 나타낸 문양으로
도깨비의 형상을 의인화시켜서 문양화 한 것이다.
도깨비문은 주로 건축이나 분묘, 제기 등에 사용하였으며
건축에서는 와당(瓦當)이나 기둥상부의 주두(柱枓),
대접받침에 그려지거나 무덤 안의 기둥 주두에 나타났었다.
귀면문은 수호신(守護神)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와당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icon-x.gif화상문(화상전)

백제시대만의 독특한 산수도 무늬로
193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귀암사 백제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하단은 흐르는 냇물, 그 위로 솟아난 기암절벽이
있고, 그 뒤로 삼봉으로 된 어질게 생긴 산들이
겹겹이 들어선 한 폭의 산수화를 이룬다.
전돌의 중앙부 절벽 뒤에 선묘된 기와집 한 채가 있고,
오른쪽 절벽 사이에 도사인지 승려인 듯 한 인물이
건물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 모습은 백제인의 마음의 모습을 그린 듯하며,
전돌의 무늬는 원형 조각을 만든 후 회색 도토로
대량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icon-x.gif빗살문

주로 신석기시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기형의 변화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 뾰족한 바닥을 가진 단순한 기물로
빗이나 동물의 뼈나 이빨 등과 같은 도구로 사용하였다.
평행렬, 점선에 의한 기하문늬 등이 간소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수렵생활시대 유물이 많다.



icon-x.gif돌림문

기물의 둘레에 띠 장식이 된 문양을 말한다.
농경 생활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며
전시대에 걸쳐 나타난다.
완자문 卍자 ,亞자 문양은 불교적 의미로 이해되며,
부귀, 장수를 의미한다. 시대마다 그 양식은 조금씩 변화된다.
원래 궁궐, 관아, 사당에서 장식으로 쓰였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다)이라 해서
장수를 의미한다.



icon-x.gif성광상문(星光狀紋)

둥근원, 네모진 것, 중간의 팔각형은
각각 하늘, 땅, 우주를 상징한다.
이문양은 신라시대 토기의 고배(高杯)에 나타난 것으로
신라인의 우주관을 엿볼 수 있다.



icon-x.gif기하문(幾何紋)

기원전 8-9세기 아티카를 중심으로 희랍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추상적인 선이나 도형으로 합리적인 규칙성을 지닌다.
원시시대부터 현재까지 나타나는 기하문은
무늬 하나 하나가 자연 숭배, 자연 순응의 마음을 담는다.
도자기에 시문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며
삼국시대에 가장 많다.



icon-x.gif운기문(雲氣紋)

우주의 일부나 현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동양은 스키타이 청동기 문화,
유라시아계 유목민족의 동물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경우 은, 주시대 청동기에서 발전되고,
한나라 때 운기문으로 발전된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 청동기와 ,고려 청자상감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특히, 구름문양이 도식화되어
다양하게 발전한다.



icon-x.gif산수문(山水紋)

청화백자에서 자주 등장하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다양한 생활모습들이 소재가 되어
표현기법과 구도, 색상 등에서
독창적인 산수문이 많이 등장한다.



icon-x.gif모란문(模蘭紋)

모란꽃은 크고 화려해서 부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려청자에서 간결하게 도안화된 모란 무늬가
다양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icon-x.gif여의두문(如意頭紋)

전을 중심으로 한 문양과,
청자과형병의 어깨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여의'라는 것은 승려가 독경이나 설법 등을 할 때에
지니는 불구(佛具:불사(佛事)에 사용되는 도구)를 말한다.
이를 한자의 마음심 '心'자를 전서체로 표현한
구름 모양의 머리장식을 붙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여의'는 마음을 상징하며
도상(圖像)은 구름을 의미한다.



icon-x.gif길상문(吉祥文)

사대부 등 상류층에서 생활 속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길 바라는 상징적인 징표로 쓰인 문양이다.
풍요로운 삶 속에서 질병이나 재액을
물리쳐 줄 것을 기원한다.
조선시대, 기화(수막새), 청화백자의 격자문이
대표적인 길상문이다.



icon-x.gif떡살문

떡살문은 삼다신앙이라는 다수(多數). 다복(多福), 다남(多男)에
대한 강한 기원을 나타낸다.
오래된 떡살일수록, 비, 구름, 벼락 등 문양을 조각하였고,
도교, 불교, 유교의 생활윤리 등을 상징하는
꽃, 짐승, 기호 등을 가미했으며,
점차 단순하고 소박한 백자떡살로 발전 한다.
무늬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icon-x.gif박지문(剝地紋)

귀얄로 백토를 바르고 문양을 그린 후
여백의 백토를 긁어내면 문양은 흰색이 되고,
여백은 태토색으로 나타난다.
모란, 모란당초, 연화, 연당호, 모란잎, 물고기 등을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고, 연판, 국화판, 완자문 등이
부수적으로 시문 된다.
특히, 모란, 당초, 모란잎 등은 재구성하여 변형된
반추상 문양은 조선시대 조형적 역량을 보여준다.



icon-x.gif조화문(彫花紋)

박지문과 반대기법으로 귀얄로 백토를 바르고
문양의 윤곽과 내부선을 선조로 긁어내어
바탕색인 회색선으로 나타낸다.
문양은 박지문과 유사한 것이나 변형이 되고
단순화한 문양이 두 가지 이상 기면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통일된 조화를 이룬다.



icon-x.gif귀얄문

귀얄이라는 말은 풀질을 하는 거친 빗자루를 말하며
귀얄문은 분청사기를 제작할 때에 거친 빗자루에
백토로 만든 분장토를 칠하여 기물의 표면에
빗자국이 남도록 칠하여 태토와 백토의 붓자국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분청사기에 많이
사용하였던 방법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귀얄의 붓놀림으로
한국적인 맛이 있는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icon-x.gif과실문

삼다를 상징하는 과일인, 복숭아, 석류, 불수감은
최고의 길상적인 의미로 쓰여진다.
복숭아는 신선들이 먹는 과일이라 하여
장수를 축원하는 과일이다.
석류는 통일신라시대 암막새에 조각된 석류를 볼 수 있는데
본래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다.
석류는 석류알이 들어있는 모습이 다손과 다남을 연상시킨다.
신맛이 임산부의 구미에 맞아 아들생산의 상징과 복주머니 모양이
부귀 다남을 상징하게 된다.



icon-x.gif보상화문

연꽃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꽃이다.
보상화는 천상계를 상징하며 불교예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전에 성인이 득도 할 때 천계에서 내려올 때나
분청사기 대접의 외곽 부분에 청화로 장식된 것이 있다.



icon-x.gif용문(龍紋)

용은 동양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며
사령 중 하나인 상상의 동물로 권위와 조화 능력에
초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겨 왔다.
고려청자의 장식 기형으로,
조선시대 철화, 청화백자와 분청사기의 철화문 등으로
전시대에 걸쳐 골고루 나타난다.



icon-x.gif호랑이문(虎紋)

정초가 되면 궁중이나 일반 민가에서
호랑이 그림을 벽이나 대문에 벽사를 위해 붙이는 풍습이 있다.
호랑이가 사귀를 물리치고 인간을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림에 나타난 호랑이는 작화의 의도에 따라 의미나 상징도 달랐다.



icon-x.gif태양문

신라인들의 우주관을 공간과 대비시켜
간결하게 축소하여 장식한 것으로
신라토기의 고배에 많이
 

 
출처 : 블로그 > 취백당 | 글쓴이 : 취백당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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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서린 광통교



광통교를 옮기느라 석축 뿌리 부분을 자르는 문화재 파손이 어떠니 저떠니 말도 많았었다.

옮겨 논 광통교에 와서는 석축의 상하가  거꾸로 놓였다고 웬 일? 웬 엉터리냐고 시시비비였다.


그 석축을 옮겨와서 복원할 당시 상하 정도는 볼 줄 아는 사람의 지시로 석축을 바르게 쌓았는데 도무지 제대로 아귀가 맞질 않아 복원이 안 되더란다.

아무리 해도 전처럼 복원이 되질 않아  거꾸로 놓아봤더니 이가 딱, 맞물려 쌓아지더란다.


그런 사유를 나중에사 알게 되고....

처음엔 거꾸로 라고 비아냥대던 사람들도 거꾸로 위치한 신장석에 얽힌 내막을 알고 난 뒤에야

모두들 침묵했다는.....


(처음 말이 많았던 사건 기사를 종합하여/이요조)

 

 

광통교를 만났다.

모전교에서 조금 내려가자니...그 말 많던 광통교를,

일순 떨리는 듯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나 보다.

좀체 손이 떨리지 않는데

짐짓 카메라가 흔들렸다. 차차 찍은 순서대로 안정을 되찾았다.



광통교는 한이 서린 다리다.

태조 이성계에겐 두명의 아내가 있었고,  당시는 전처, 후처라 부르지 않고 향처, 결처라 불렀다. 향처인 신의왕후에겐 다섯아들이 있었고, 신덕 왕후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 그 가운데 다섯째 아들 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나라를 세우기 전엔 서로 긴밀하게 협력 했고 나라를 세운 다음엔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 했다.


신덕 왕후가 죽자 태조는 지금의 정릉에  묘를 쓰고 잡귀가 접근치 못하도록 봉분 주위에 구름과 당초 무늬가 아로 새겨진 신장식을 둘렀다. 보는 사람마다 신의 솜씨라고 감탄한 이 돌 조각은 당시 8도에서 돌을 가장 잘다루는 제주도 석공의 솜씨라고 했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했던 태종은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이 죽은

뒤에도 증오를 풀지 못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광통교를 흙다리에서 돌다리

로 개축하면서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신장석(神將石)을 뽑아다 교각으로 썼단다.



얼마나  미웠으면 태종은 신덕왕후의 묘의 신장석을 가져다가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으로 교각으로 사용했을까? 그 것도 거꾸로 뒤집어서 말이다.


지난해 청계천 복원공사로 광통교를 발굴했을 때 신덕왕후의 외가인 강씨묘 종친회에서는 광통

교에 깔린 신장석을 정릉으로 돌려 달라고 서울시에 탄원하기도 했다는데,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600여년 전부터 시민들을 품고 흘렀다.

조선 시대의 청계천 다리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 9개가 있었는데,

대부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됐다 한다.

이에 따라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청계천은 이제 제 길을 찾았을 뿐이다.

콘크리트에 갇혀 질식된 청계천이 이제야 숨쉬게 된 것이다.

600년 동안 땅속 썩은 도랑물에 몸을 담근 교각들은 폐수 암모니아에 절어 시퍼르딩딩한 아픈 흔적으로 눈부신 태양아래 섰다.


세월이 훨씬 흐른 다음에야......




글/사진: 이요조

 

 

서울시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광통교를 복원한 것이라고 밝혔다.

 

 

 

                                                              복원된 광통교

시민들이 서울 청계천 광통교 석축의 받침돌에 불상조각이 거꾸로 된 것을 희한한 듯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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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수로왕 능참봉

 

 

조부님

 

 

 

가락국(금관가야)이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位田)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

 

김해 김씨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능(경남 김해시)을 건사하고자 문중에는 아직도 능참봉이라는 벼슬이 전해진다.


숭선전 춘추제례(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를 주관하며
정월 초하루, 추석, 동지에는 다례를 숭선전 참봉이 올리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을 올린다.

 

 

 

고향엘 다녀왔다.

시할아버님(시조부)께서 살아 생전에 왕능참봉을 하시고 사 후 그 공덕비를 세우고는

추석성묘 전 벌초가 따로 있을리 없이 매일같이 큰댁 아주버님의 일상사가 되었지만...

할아버지 계신 선산에 내, 시아버님 누워계시고..

마침 큰 댁에 우환이 좀 들어서 바쁜 종제(사촌 아우이자 내 남편)대신에 위로차 부랴부랴 고향엘 갔었다.

 

웃자란 잔디를 깎아놓은 벌초의 건초더미가 또 하나의 봉분을 이루고...

태풍 '나비'의 폭우엔...할아버지의 묘소를 씌웠다는 파란 비닐 천막이 상석아래 반듯하게 개켜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같다지만  내 아버님(숙부)의 산소도 늘 돌봐주시는 큰 댁에 감사하다는 말씀만 건넬 뿐,

맏손자 종근이와 나는 낫대신에 성경책을 가져가서 살아생전 아버님 즐겨부르시던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우리에겐(할아버지 차자의 직계손) 바로 그 게 성묘다.

무슨 연유인지 시아버님은 젊어서부터 기독교로 입문하셨고, 그 덕분에 차례나 제사, 시사는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탓도 있지만 그럭저럭 소원해지고...집안에서도 으례히 그러려니 하게끔 되었다.

 

며느리인 내사 시쳇말로 웬 떡이냐 싶게 편해졌지만, 우리 아이들이 문제다.

신앙심 깊은 제 조부모를 못따르는 부모 아래....유교도 그렇다고 올바른 기독교인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들로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내 살아 생전에, 확실한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할 실로 심각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

 

시고모님(아이들의 왕고모)댁에도 들리고...돌아오는 우리 차는 마치 추석쇠러 고향 다녀오는 여느 차들처럼 타이어가  터지도록 무거웠다.

 

갓 찧은 쌀, 찹쌀, 마늘, 양파, 참기름, 누런호박, 추석 때 나물하라시며 주신 박....말린 나물....

 

나는 마치 일년 농사,  세경을 걷으러 간 지주처럼 배부르게 무겁도록 얻어왔다.

 

그러고도...뭐 더 줄께 없을까 싶어....뱅뱅 맴을 도시던 고모님! 아주버님!  형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2005년 9월7일 산소 다녀오다.

 

시할아버지의 공덕비 (click~ 큰글씨)

 




 
예배드리고  성묘후, 장남(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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拓本이  왜 필요한가,,

 

탁본이란,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음각 또는 양각되어있는 글자나 무늬등을 원형그대로 종이에 찍어내는것을 말합니다,또,탑본이라고도 하지요.
 
어릴적 필통뚜껑에 연필로 그대로 그어본 경험,

이것이 탁본의 일종인 건탁법에 해당하는 기법입니다,


프로타쥬(frottage) 기법인데  그 대상물은 비단,,어릴적 필통뿐아니라,

상당히 다양한곳에서부터 오래전 사용해왔음을 알게됩니다,

 

기와·벽돌·고비(古碑)·판비(板碑)·기념 비·문학비·묘비·조종·마애불·날밑·솥 전·도명(刀銘)·벼루· 등이 그 대상이 됩니다,


엄격히 꼭 말한다면,  책으로 장포(裝袍)된 것만 탁본이고

석각의 탁인(拓印)은 탁편(拓片)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어떻게 부르든,,

우리는 고유적인 사물에 대하여,원초적으로 파고 깍고,기록해놓은것들을,

시간이 흐르면서 뿌리를 찾고 싶어하거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고 싶어하는

바가 있으니. 이에 가장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남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탁본을 손쉽게 예를 들수있습니다,


글자의 점·획 등 미묘한 부분까지 본래 크기로 볼 수 있으므로 고고학이나 비문·종명(鍾名) 등의 문자·문장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 분야에 중요한 자료이며 방법이 아닐수 없지요?

 


또한 흰색과 검은색의 단색으로 표현되는 간소한 미(美)는

채탁자(採拓者)가 어떤이가 하는가..

 

또는  먹의 농담,,즉, 먹을 갈아서 拓을 하는가. 아니면,그냥 성의없이 먹물로 하는가에 따라, 그 탁본의  품격을 잴수있겠죠,,

 

날씨 및 그 밖의 조건에 따라 한 장 한 장의 완성된 모습이 다르고,

수(數)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그 원시성이 예술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될수있다는것은  매우 흥미롭지 않을수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여러곳에 파생되어진 비문이나,유물들을

탁본자가 모두 탁본을 해서  한곳에 집약적으로 전시를 해놓는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감상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여러곳의 역사적 유물들을 한곳에서 감상할수있으며,

더욱 가치가 있는것은,탁본을 해놓은 대상물이

 

천재지변이나,누군가에 인위적으로 파손되거나, 천둥벼락에 소실되었다고 보면,

우리가 해놓은 탁본의 가치는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될것입니다,

돈으로 따진다면,,음,,,로또를 맞았다고 할까요?^^

 

탁본이.꼭 비석이나,유물만으로 국한된것은 아닙니다,

 식물의 잎이나 나뭇결·나무껍질의 자연의 조형미를 감상하는 엽탁(葉拓)도 탁본의 일종입니다,

고대의 비석과 유물들은 그 파손범위가 다양해서 고도의 정밀 사진촬영으로도 그 재현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간단히 먹과 종이로 그 기록을 보존할수있는것이기에더욱 가치가 큽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사진학과 학생들은 탁본의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더군요,


중국에서는 원래 6세기말 수나라때부터 이런 탁본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어떤이는
탁본의 유래는 남북양조 시대부터, 또는 후한 시대 종이가 발명된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지요,

문헌사의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말엽부터 탁본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탁본은 인쇄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성행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라하니..그 시기는 정확히 구분해보아야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진적(眞蹟)을 지본묵서(紙本墨書)로 복제할 경우

,

농자(籠子;둘레의 윤곽만 베낀 글자)를 떠내어 윤곽 속을 먹으로 칠하는 쌍구전묵(雙鉤塡墨)이 일찍부터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런것을  모본복각(模本復刻)도 활발히 행해졌습니다,

 

둔황[敦煌(돈황)]석굴에서 발견된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온천명(溫泉銘)》 탁본에 영휘(永徽) 4년(653)이라는 묵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이 무렵에 탁본기술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탁본을 떠서 책으로 만들었다는이야기입니다,

 

비석에서 직접 떠낸 탁본과 그것을 또 한 차례 돌이나 목판에 새기고 탁본으로 만든 게 있는데, 앞의 것을 원탁(原拓), 뒤의 것을 모본(模本) 또는 모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탁본을 절본(折本)으로 만든 것을 법첩(法帖)이라고 하며, 사실,,

서예가들이 주로 법첩을 보며 공부하는것이.모두 이런 탁본책이 아닐수없습니다,

요즘 법첩들은 예전과 달리  탁본 원본법첩을 또 인쇄하고 또 복사해서,

가의 원본과 틀린 법첩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수있습니다,

서책을 팔아먹기위한 것에만 열중하다보니..그렇겠죠?

.

그러나 실제 탁본이 성행한 것은 금석학(金石學)이 발달하였던 송나라 때부터가 좋은 공부가 될것입니다,

송나라때 편찬된  금석록 30권의 목록서가 전해집니다,

 

 

금석학은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해석하고 연구하여 서체, 문체를 분석하는 학문인데 금석문을 요즘엔 꽤 서예가들이 공부하는것 같습니다,

 

탁본을 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처음에는 서체를 익히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으니.. 전문적인 서예가들이 없어지고 현대서예에
미술적 가치만을 공부하는 요즘 더욱 그 방법이 쇠퇴기에 이르는것이 당연하겠죠,,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탁본하고,우리의 서체나 역사에 대해 바로 인식하는 학문의 기틀을 잡는데 주력했으면 합니다,

 

탁본은 금석학을 연구하는 고고학자, 문학가,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서체를 연구하는 서예가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술입니다, 다만,요즘에  세워진 비석이나,비문은 모두 기계로 파낸, 컴퓨터 서체로 만드는것이 참으로 안타까운것이.

모두 쉽게 쉽게..비석을 세우는것을,,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비문을 세우는것은 그 사람의 공덕이나,역사적 사실을 미려한 문체로 작성해서,

좋은 서예가의 필체로 서사를 받은후, 그를 그대로 刻하는것이 옳으나,

요즘은,,어찌된일인지.그저,,아무렇게나 파서 세우면 되는것이 되었으니..

개탄할일이 아닐수없습니다,,의미가,없어졌다고 봐야죠,,

 

 서예가들에게는 옛 선현들의 서체(書體)를 오늘에 되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고, 역사가들에게는 옛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는데.이런,원천적이유가 없어진다면,,붓을 잡을 이유가 점점 없어진다고 봐야죠^^

 

 과거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역사적 기록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마멸되고 사라졌습니다,

 

다만 탁본을 통해 남은 기록들만 과거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이는 3천년이지난,,오늘에 와서 밝혀지는,대단한,,,흐름이 아닐수없죠..

 

 만약 금석문을 한 자 한 자 베낀다면 오자(誤字)나 결자(缺字)가 생길 수 있으나 탁본을 하면 이러한 염려는 없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읽기 어려운 금석문이라도 탁본을 하여 놓고 보면 해독하기가 쉽고,

 이런 탁본은 금석문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인거죠,,

 

금석학은 인류가 남긴 유물 중에서 새겨진 연대에 의거해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우리가,나이가 들어 부모의 역사와 조상의 발자취를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는기록을 남긴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학문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너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건 아닌지...^^

우리는,

금석류에 문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은 고대로부터 행해져왔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금석문 연구는 고고학적 목적과 서체의 연구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학자들이나 호사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취미로 하고 있는것은 널리 알려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탁본을 응용한 기술이 바로 어탁(魚拓)이며,

 

일상생활에서 취미탁본으로 활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기술인 어탁은 큰 고기를 낚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체를 영원히 기록하는 기술인 거죠,.

이외 어떠한 대상물이든 요철이 뚜렷하면 채탁이 가능합니다,

 

  탁본이 성행하게 되고 지금까지 적게나마 문헌으로 남아 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수많은 금석학자와 서예가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수없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금석문 보존을 위해 우리 모두 애써야 할 것이며, 현재 자신이 위치한,,고향이나,주변에 보존되고 있지않은 유물들을 탁본해놓는것은 후대에게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아닐수없습니다, 꼭,,,사진 찍어야만,,판독이 되는건 아니죠^^

 

탁본을 이야기하자면 중국을 논하지 않을 수 없기에 잠시 중화문화를 살펴봅니다,

간단히 기술하자면,

중국은 은시대부터 갑골문자와 종정문(鐘鼎文)이 불완전한 문자부호로 사용되었고

서주시대에 종정문자가 진시황의 천하통일 후 급격한 대전(大篆)문자로 발전했으며,

 한 대의 예(隸), 위, 진, 남북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자가 단순한 부호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갑골문자나 종정문의 탁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마멸되고 사라졌가

 간간이 적은 양이 출토 되어 육안으로 분간키 어려운 것은 탁본으로 판독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남해 금산의 거북바위의 상형문자는 가까운 나라들의 상형문자나 갑골문자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은것을 알수있습니다,

 

 이들은 자형의 동일성과 거북바위라는 점, 거북등에 새겨진 문자의 배치성을 주목할 만합니다,

 

 어쩌면 쉽게 판독될 것 도 같은 거북바위의 문자는 회화성 또한 배제할 수 없고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은 점을 생각할 때

 

한층 문자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중국의 문화는 크게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로 나눌 수 있으며,

옛날 중국 북쪽의 종이는 무늬가 옆으로 들어 있는데다 바탕이 두껍고 거칠어 먹이 잘 받지 않았답니다,,

먹은 송연먹을 많이 썼는데  소나무 그으름을 이용한 먹이지요, 가능하면,,탁본을 할때 갈아서 하시는게 좋습니다,

갈아서 탁본을 하게되면,

그 빛 또한 푸르고 엷으며,작품성도 있으니 일석2조죠^^

 

금석에 칠할 때 유납(油蠟)을 섞지 않기 때문에 북탑(北榻)은 빛이 엷고 무늬와 주름이 있어 마치 엷은 구름이 청천에 흐르는 것 같아 협사(夾紗)라든가 선시탑(蟬翅榻)이라고 불립니다,또는 협사탁,선시탁,오금탁이라는 말은,탁본 빛깔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말입니다, 선시탁법은 일본에서 잘 사용하고 우리나라는 자주 사용치 않습니다,

 

그중에 오금탁이라는 말은, 까마귀 烏 字를 써서  문자외에  종이면을 새까맣게 채탁하는 방법입니다,이때 전체 색깔이 동일하게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선시탁이란,蟬 (매미선)字를 써서 매미의 날개와 같다고 합니다,

둘다 장단점이있지만, 선시탁은 반대로 문자의 주변이나 글자만, 엷게 먹색으로 탁본하는 방법이니. 감상 가치는 선시탁이 더 좋와서, 많이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외.인주탁(印朱拓)....색탁, 집자법 등은,모두 물감의 원료나 다른 방법의 탁본일종입니다,

 

 

반면에 남쪽의 종이는 무늬가 세로로 들어 있고 먹은 유연을 쓰며 납과 오금지를 섞어 물에 두들겨서 비문에 바릅니다,

 그러므로 빛은 순흑이며 광택이 있어 오금탁(烏金拓)이라 불렸다고 하는군요

 

요즈음은 학문을 하는 이나 서예가들은 많으나 금석에 대하여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는 적습니다,중국의것이기는 하지만,,중국것을 알아야,,우리것도 하지요,,^^

 

 사람이 글씨를 배우자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여럿 있습니다,

 

자체(字體)와 형세 전측(轉側) 결구(結構)를 연구하되,우리는 그당시 선인들이

남겨놓은 수백년시대동안 내려온 필사를 직접 온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은,,매우 조심스럽지 않을수없습니다,,경건한 마음이죠^^

 

참다운 고법(古法)이 가진 서에의 맛과 멋을 추구하려면

비(古碑)와 탁본을 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뜨거운 물인가 찬 물인가는 마셔본 자만이 알 수 있다 "라는 옛 스님의 말씀은 이를 두고 이르신 것같습니다,

 

오래전 발견된

울진 봉평신라비,

영일냉수리비,

야고비는 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며 하루속히 완독되어 새로운 기록으로 역사에 올려지길 바라마지 않지요? 제대로 완독되길,,바랍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영원히 빛낼 유산이다!!라고 말하지만,,,,내곁에있야,,내거죠,,

일본녀석들,,등살에..못살겠습니다,,

 

 중국은 예부터 탁본을 중요시하여 탁본한 것을 금과 맞바꾸었다고 할 만큼 귀중하게 취급하였답니다,,

여하튼,,이제 탁본의 중요성을 알았으니..탁본방법이나 말해보죠^^

탁본에는,

 

건탁(乾拓)과 습탁(濕拓)이 있습니다,

앞서말했듯이.

동전이나 메달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심을 비스듬히 뉘어 문지르는 방법으로, 원물 위에 종이를 대고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누른 뒤 탁본먹으로 구석구석 남김없이 문지르면 높은 곳은 짙게, 낮은 곳은 묽게 찍힙니다,

 

이것이 건탁이며,

 

습탁은,

소품이나 섬세한 무늬가 있는 것, 또는 적실 수 없는 목각작품 등에 주로 쓰입니다,

 

원물 표면에 댄 종이를 위에서부터 물을 발라 붙이고,
먹이 묻은 탐폰(가죽이나 헝겁으로 싼 솜방망이)으로 두들겨 모사하는 방법입니다,


(탐폰 만든것, 예시)

 


1.탁본의 순서
 ① 원물의 치수를 재고, 진흙이나 먼지를 털어낸다. 다만, 이끼 등은 되도록 그대로 두고 현상태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② 화선지를  탁본할곳의 크기보다 조금 크게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비면에 대어 솔로 물을 바르거나 분무기로 골고루 적십니다,분무기가 없으면,

솔에다가 물을 묻혀서 문지르세요,,

 



그리고 물을 묻히기전에

 

네 모퉁이를 셀로판 테이프로 가볍게 붙여 놓으면 일하기 편합니다,

다만,유적지마다,, 테이프 등 점착제 사용을 금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테이프쪽은 물을 묻히지 마세요,,떨어집니다,,(조심조심)

 


 ③ 비면과 종이 사이에 생긴 기포를 문자 속이나 비면 밖으로 밀어내어 종이를 비면에 밀착시킵니다,즉, 물을 묻히고 난후 다시 화선지를 손으로 들어서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정확히 뗬다가 다시 붙히는겁니다,

 여기에는 나사(羅紗)나 적신 타월을 단단하게 말아서 사용할수있는데요,

수건이 제일입니다 꾹꾹 눌러주세요,


 ④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마른 헝겁을 비문 전체에 감싸 덮는겁니다,


그리고,  옷솔로 직각으로 두드립니다,그이유는 비문의 양각이나 음각의 홈에

화선지가 확실하게 세세히 붙어버리도록 하는거죠, 다다다다다,,,이때가 제일 신나지만,

팔이 아플겁니다,,그래도 천천히 세밀하게 홈을 두들겨주세요

 

 

 


⑤ 종이에 어느 정도 습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되면, 탐폰으로 채탁합니다,

 


위의 비문은 성종대왕 어필본을  채탁하는과정인데

위부분에 조금 하얗게보이는 부분이있을겁니다,적당히 말랐다는거죠^^

 

이제 드디어 탁본이 시작되는겁니다,

 



탐폰은 2개를 가지고 한쪽 탐폰에 먹을 묻히고 다른 1개와 맞비벼 먹물을 알맞게 조절하며,

남은 종이로 농도가 확인되면 재빠르게 지면 전체를 두들겨 나가는데.

보통 초보자들이 실수하는건 먹물을 너무 많이 찍는다는겁니다,,아주 엷게 시작해보세요, 찻잎이 권장하는 방법 키포인트,, 아주 부드럽게 두드린다^^

 

 

 

처음에는 엷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두들겨 먹의 농도를 고르게 합니다,

 한참을 고르게 두드리는데.

중요한것은 비석의 원몬 크기대로 모두 탁본을 하시기 바랍니다,

글씨만 나왔다고 그냥 멈추는분이있거든요,

원본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비문의 원본 크기를 알수있도록 모두  채탁을 하시기 바래요


 ⑥ 이제 모두 두드렸고,완벽히 끝났다고 생각하면,

조심스럽게 뗘내세요,,

 


 


2)준비물


⑴ 종이:건탁에는 반수(礬水)처리를 한 얇은 미농지가 좋고,

습탁에는 일반적으로 화선지를 사용한다.

 중국산 화선지는 풀기가 있어서 탁본에 가장 알맞은데.요즘은 탁본지가 나온다는군요,

 


⑵ 먹:건탁의 경우 탁본묵[石花墨(석화묵)]으로 문지른다.

 

습탁에는 유묵(油墨)을 사용한다.

한 두 장 떠낼 정도면 품질이 좋은 먹을 짙게 발라 사용합니다,,아끼지 마세요^^

 

 전문가는 식물성기름과 매분가루를 끓여, 여기에 잘게 썬 낡은 솜을 섞어 갠 묵육(墨肉)을 사용하는데. 백납이라는 한약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구하기는 어렵죠^^

 

 먹즙은 얼룩을 만들고 물이 닿으면 번지므로 탁본에 부적당합니다,

일반 시중에서 파는 먹물,,가능하면 쓰지 마세요,,


⑶ 탐폰(tampon):솜을 헝겊으로 싼 것으로 먹을 묻혀 지면을 두드리는 데 쓰입니다,

맨앞에.사진 올려놓았습니다,

 

 헝겊은 풀기 없는 견직물이나 홍견(紅絹)이 발이 가는 화학섬유가 좋습니다,세밀하게 찍히거든요,

 

 또한 삼베 같은 거친 헝겊을 써서 특수한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속에는  좁쌀이나,쌀을 이용하기도 합니다,저는 좁쌀을 주로 씁니다,

솜은 금방 뭉그러지거든요,

 

 밑동쪽에 동그랗게 자른 두꺼운 종이를 얹고,

헝겊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조여당겨 끈으로 밑동을 단단히 맵니다, 테이프도 좋와요,

 

 별도로 솜이나 헝겊을 막대처럼 만든 것을 손잡이로 해서, 조여맨 중앙부에 붙인다.

 

손잡이는 쥐기에 알맞은 길이로 만든다. 탐폰은 대(지름 7.8㎝) 2개, 중(지름 5㎝) 1개. 소(지름 2㎝) 1개를 준비한다. 큰 면은 큰 탐폰을 사용하고 가는 윤곽은 작은 탐폰으로 두들긴다.

 

★주의: 탐폰을 만들때는,탁본을 하고자하는 대상물에 따라 크기를 정합니다,

아주 세밀한것은 아주 작게 만들어야하기 떄문이죠,

 


⑷ 기타:솔은 털발이 길고 부드러운 것을 선택합니다, 손잡이 달린 옷솔이 최고입니다

 

 두들기는 솔은 털발이 짧은 것으로 양복 브러시 등으로 대용할 수 있다.

 

 습탁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물통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2인 1조 3인1조로 함께 탁본조를 짜서, 함께 떠나시면,,

각각 준비물을 분담하세요, 물통과 분무기.탐폰준비, 벼루준비.붓준비.

등등,,

 

 

☆간탁(刊拓)의 시기
탁본의 간탁(刊拓)에 알맞는 기후는 봄, 가을로

 청명(양력 4월5일)후와 하지(6월 21일) 전,

추분(9월 22일) 후,

 입동(11월 7일)이 적시라 합니다,

사찰에서는  목판경의 인출을  이시기에 좋다하니.. 이때가

판본을 상하지 않게 채탁하는 시기이며,여름이나 겨울에는, 판본이 얼거나,불어터져서

쉽게 원본이 상하는경우입니다,

여름철의 직사광선을 피하는것이 좋고,겨울이나,비오는날을 피해하는것이 당연하겠죠ㅡ,

바람도 적은 날이 좋습니다,,(좋은날,,택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이 좋와요^^

 

이때가 인사(印寫)함에 판본과 돌이 잘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먹도 갈아 쓰기에 좋고 일하기도 가장 좋기 때문이다

 

 

★ 정말 주의사항 한가지..

 

비문과 문화재는 모두 허가를 받아서 탁본하는것이 원칙입니다,,

꼭  당국(?)의 허기를 득하셔서 하시기 바랍니다,,

간첩으로 오인되면 큰일이지요^^

 

★각종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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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검색(대웅전에서 앞산을 바라보며 찍은 듯)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쌍계사(雙溪寺)라 하다가 애장왕(800~809재위)이 다녀간 후 장안사라 개칭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인조 16년(1638) 태의선사가 중건하였으며, 효종 5년(1654) 원정, 학능 충묵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다.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7호로 지정되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에 있는 사찰.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신라
창건자  원효대사
소재지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본문
불광산(659m) 자락에 있는 고찰로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673년(신라 문무왕 13)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부르다가 809년 장안사로 고쳐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탄 것을 1631년(인조 8) 의월대사가 중창하고, 1638년(인조 16) 태의대사가 중건하였다. 1654년(효종 5) 원정·학능·충묵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1948년에는 각현이 대웅전과 부속 건물을 중수했으며 1987년 종각을 세우고 요사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 대웅전(부산기념물 37)·명부전·응진전·산신각과 석가의 진신사리 7과를 모신 3층석탑이 있다. 입구에는 5기의 부도가 있고 법당 앞에는 가지들이 엉켜 올라가는 모습을 한 높이 2.5m의 단풍나무가 서 있다.

사찰 뒤쪽에는 원효대사가 수도중에 중국 중난산 운제사의 대웅전이 무너지는 것을 알고 소반을 던져 대웅전에 있던 1,000여 명의 중국 승려들을 구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척판암이 있다. 주변에 수산과학관, 해동용궁사, 임량해수욕장, 고리원자력발전소 전시관, 이길봉수대 등 명소가 많다. 기장시장에서 장안사행 마을버스가 다니며, 승용차로 가려면 기장에서 좌천을 지나 사찰로 갈 수 있다.
 

 


이미지 검색(대웅전을 오르며 찍은 듯)

 

 

 

음력 5월 초하루 기장군에 있는 장안사를 찾았다.

장안사 부근에는 유원지로 더 알려져서 유명한 먹거리가 아주 많았다.

여동생이 하도 "언니야 장안사는 새벽에 오면 안개 낀 계곡이 너무 좋아~"

하면서 함께 간... 장안사~

 

사월초파일 연등이 달리기 시작하는 아담하고 알찬 사찰이었다.

다른 사찰에 비해 석조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휴홍준님의 글을 되새기며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사찰을 구경 오면 말이다.

첫째 그 절이 얼마나 오래 된 절인지...그 건축물을 눈여겨보고...

대웅전에 올라서서 그 절터를 한 번 가늠해 보는 거다.

예부터 사찰은 다들 빼어난 곳에 자리 잡았으니...왜 어떻게 좋은지 그 지색을 어림잡아라도

느끼려 살펴 보고

어디가 다른 사찰과 다른 점이 있는지...잘 살펴보고

대웅전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고.....해우소도 들러보고,,,,문 창살도 유심히 보고

 

탑의 모양도(미술사적 가치)유심히 볼 것이며...

언니랍시고(정작 내 언니는 안 갔으므로) 아는 척  썰을 풀었다.

 

대웅전 천정 탱화가 오래된 듯...특이하고 벽화 그림도 이야기가 있는 듯 보였지만...

일주일 앞둔 초파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붐볐다.

 

화단에 꽃들도 아주 정갈하게 잘 가꿔진 절이었다.

장안사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서 이, 가똑똑이도 실은 코끼리 꼬리만 잡아보고 왔다.

 

물론 동생이 말하던 들어가는 입구 계곡은 아마도 여름이면 세인들로 발 붙일 곳 없어 보였다.

 

그 날 들어서면서 계속 테이프로 스님의 독경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늘 같은 구절만 되풀이되었다.

 

아마도 끝절은 混尼佛(혼니불) 불교의 무지함에.....구개음화로 들리는 홑이불의 환청!

"더퍼라...혼니불, 더퍼라 혼이불, 더퍼라...혼니부울 더퍼라~~"....

같아서 웃음이..절로.....( 죄송합니다. 정말 그렇게 들리데요)

 

아래 이야기가 늦게사 생각이 나서 덧붙입니다.

비록 '덮어라 혼니불' 이지만...'짚신 세 벌'과 무에 다를꺼 있나 싶어 혼자 웃어 봅니다.

 

 

짚신 세벌


옛날 무식한 짚신 장수 한 사람이 도를 닦겠다는 결심을 하고 고승에게
찾아가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승은 사심이 없는 즉각적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뜻으로 ‘즉심시불’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 짚신 장수는 무식한 까닭에 ‘짚신 세 벌’이라는 줄 알고 여러 해 동안
‘짚신 세 벌’을 외우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도를 깨우쳤고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장안사 큰스님~ 사찰 오른 켠에 큰돌로 조각된 달마스님이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그리고 그 앞에  크고 깊고 투명한 아크릴 통에 돈이 들어 있는 것도 이상하고요"

"달마대사의 위엄이나....친근감은 전혀 없고요. 마치 삥 뜯으러 서 있는 불량배 같았어요.

조각으로서 좀 질이 떨어진다는 말씀을....따라서 아름다운 장안사의 품격에 저해 될까하여 감히...무식한 소인배가  한 말씀~~"

 

 

사진/글:이요조

달마대사 사진은 찍어오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예 찍지 않았습니다. 그럴 생각이 안들어서.....이렇게 용기내어 이야기 드릴 줄 알았음 찍기라도 할 걸...

 


 

기분 좋아지는 아주 재밌는 약숫터
 
사람들이 오가며 얼마나 만졌으면... 
 
참조/꼬리글
balma 2005.05.16 20:07:10

밑에서 두번째 불상은 포대화상 스님인 것 같소....
서양 기독교에서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에 해당되오....포대화상 살아 생전에
무엇이든 포대(자루)를 들고다니며 퍼주며 나눔과 베품을 몸소 실천한 생불이었소!!

 

돌담과 뒷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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