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서린 광통교
광통교를 옮기느라 석축 뿌리 부분을 자르는 문화재 파손이 어떠니 저떠니 말도 많았었다.
옮겨 논 광통교에 와서는 석축의 상하가 거꾸로 놓였다고 웬 일? 웬 엉터리냐고 시시비비였다.
그 석축을 옮겨와서 복원할 당시 상하 정도는 볼 줄 아는 사람의 지시로 석축을 바르게 쌓았는데 도무지 제대로 아귀가 맞질 않아 복원이 안 되더란다.
아무리 해도 전처럼 복원이 되질 않아 거꾸로 놓아봤더니 이가 딱, 맞물려 쌓아지더란다.
그런 사유를 나중에사 알게 되고....
처음엔 거꾸로 라고 비아냥대던 사람들도 거꾸로 위치한 신장석에 얽힌 내막을 알고 난 뒤에야
모두들 침묵했다는.....
(처음 말이 많았던 사건 기사를 종합하여/이요조)
광통교를 만났다.
모전교에서 조금 내려가자니...그 말 많던 광통교를,
일순 떨리는 듯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나 보다.
좀체 손이 떨리지 않는데
짐짓 카메라가 흔들렸다. 차차 찍은 순서대로 안정을 되찾았다.
광통교는 한이 서린 다리다.
태조 이성계에겐 두명의 아내가 있었고, 당시는 전처, 후처라 부르지 않고 향처, 결처라 불렀다. 향처인 신의왕후에겐 다섯아들이 있었고, 신덕 왕후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 그 가운데 다섯째 아들 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나라를 세우기 전엔 서로 긴밀하게 협력 했고 나라를 세운 다음엔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 했다.
신덕 왕후가 죽자 태조는 지금의 정릉에 묘를 쓰고 잡귀가 접근치 못하도록 봉분 주위에 구름과 당초 무늬가 아로 새겨진 신장식을 둘렀다. 보는 사람마다 신의 솜씨라고 감탄한 이 돌 조각은 당시 8도에서 돌을 가장 잘다루는 제주도 석공의 솜씨라고 했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했던 태종은 신덕왕후와 그 자식들이 죽은
뒤에도 증오를 풀지 못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광통교를 흙다리에서 돌다리
로 개축하면서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신장석(神將石)을 뽑아다 교각으로 썼단다.
얼마나 미웠으면 태종은 신덕왕후의 묘의 신장석을 가져다가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으로 교각으로 사용했을까? 그 것도 거꾸로 뒤집어서 말이다.
지난해 청계천 복원공사로 광통교를 발굴했을 때 신덕왕후의 외가인 강씨묘 종친회에서는 광통
교에 깔린 신장석을 정릉으로 돌려 달라고 서울시에 탄원하기도 했다는데,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600여년 전부터 시민들을 품고 흘렀다.
조선 시대의 청계천 다리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 9개가 있었는데,
대부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됐다 한다.
이에 따라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청계천은 이제 제 길을 찾았을 뿐이다.
콘크리트에 갇혀 질식된 청계천이 이제야 숨쉬게 된 것이다.
600년 동안 땅속 썩은 도랑물에 몸을 담근 교각들은 폐수 암모니아에 절어 시퍼르딩딩한 아픈 흔적으로 눈부신 태양아래 섰다.
세월이 훨씬 흐른 다음에야......
글/사진: 이요조
서울시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광통교를 복원한 것이라고 밝혔다.
복원된 광통교
시민들이 서울 청계천 광통교 석축의 받침돌에 불상조각이 거꾸로 된 것을 희한한 듯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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