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칭 : 고성 송학동 고분군

구 분 : 사적 제 119호 (1963.1.21지정)  소 재 지 :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470번지 일원

 

“무덤 안이 온통 빨개요. 빨리 와봐요”

늦더위가 한창이던 2000년 8월27일. 일요일인데도 필자는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의 급박한 전화연락을 받았다. 긴급 발굴 지도위원회였다. 긴급 지도위는 ‘깜짝 놀랄 만한 발굴거리’가 생겼을 때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열리는 것. 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가뜩이나 1980년대부터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곳이 아닌가.

◇일출의 광채 같이 나타난 채색고분=필자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발굴현장으로 날아갔다. 현장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터널처럼 마련된 널길, 즉 연도를 따라 무덤방인 석실(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온통 붉은 빛이었다. 전등 불빛에 비친 무덤 내부 천장과 주변은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보이는 광채 같았다.

실로 발굴 인생 30여년에 처음 보는 채색고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채색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한다. 규슈지역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110여기의 무덤에서 확인된, 일본 특유의 무덤내부 장식이다.

“마치 일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요”. 심봉근 교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본 규슈대에 유학하여 일본 고고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의 채색고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채색고분이 이곳 고성에서 확인되다니.

남아있는 부장유물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가야는 물론 신라·백제 토기와 함께 일본의 토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 발굴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가야·신라·백제·왜 문화가 ‘총집합’한 고분=문제가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란으로 ‘민감했던’ 송학동 고분인데 느닷없는 채색고분 발견으로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열도에 보이는 채색고분이 왜 이 지역에 나타나느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야·백제·신라·일본계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발굴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나라에 유적답사차 나와 있던 일본 고고학 관련 연구자들이 일정을 바꿔 현장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그만큼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군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은 이같은 논란 속에 지난해 6월30일, 3차의 발굴조사를 끝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는 일단락됐다. 그 결과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쟁은 종식됐다.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방후원분’의 ‘후원(後圓)’으로 주장됐던 후원분의 위치에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양식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을 중심으로 모두 17기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방(前方)’부로 생각됐던 곳에는 바로 채색고분인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또 이들 무덤 사이에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종합하면 이 고성 송학동 제1호 고분은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등 3가지 무덤 형태가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그런 만큼 외형상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지,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가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형식이 모여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는 이 고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흥미롭다.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그렇다면 과연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일단 이 고분에서 가야·백제·신라는 물론 일본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고분의 ‘다국적’ 출토 유물에서 보듯 고성은 주변과 나아가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여기서 일본식으로 붉게 칠한 ‘굴식 돌방무덤’과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을 주목하자. 먼저 채색된 ‘굴식 돌방무덤’. 이 형태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장식고분의 한 유형임을 감안하자. 그렇다면 피장자 역시 일본과 연관있는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다음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 소가야는 서기 532년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발굴단은 바로 이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소가야 마지막 임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소가야는 가야연맹체 가운데서 해상 루트를 통해 신라·백제·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교류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결국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인 소가야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왕비가 채색고분인 ‘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 아닐까. 이른바 ‘부부묘의 개념’이다. 왜 일본식 채색고분(굴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보는가. 심봉근 교수는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고 밝혔다.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주변국가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만그라스는 4~5세기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지역의 고급 물건들이 교역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왕비는 왜에서 시집온 여인?”=뿐만 아니라 채색고분 안에서 유구열도(琉球列島·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조개인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수습된 것도 이러한 교역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무역상들의 상주지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고성이란 가야지역에 신라계·백제계·일본계 등 ‘다국적 유물’이 나타나고, 그와 함께 일반적인 가야묘제와는 다른 특수한 묘제가 마련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규슈지역 유력집단의 여성이 소가야 왕에 시집와 죽음으로써 마련된 묘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나서 고성에서는 옛 고성의 이름찾기운동 세미나가 열렸다. 즉 가야연맹체 가운데 ‘작은 가야’라는 뜻인 ‘소가야’라는 명칭은 유적발굴조사를 통해 봐서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소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서 5가야에 대한 설명 중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고성이 신라에 통합되고 나서 고자군(古自郡)이라고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란 표기가 있다. 따라서 소가야보다는 원래의 이름인 고자미동국, 또는 고자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유적발굴조사가 이루어지다 보면 이를 통해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등한시했던 고대사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하려는 새로운 노력의 한 형태라 할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heny1004.do?Redirect=Log&logNo=60005311873

 

고성은 가야시대 소가야지역으로서 이 고분군은 당시 정치적 세력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전방후원분으로서 논란이 되어왔던 제1호분을 중심으로 11개의 봉분이 형성되어 있으며, 가야시대 대표적인 축조방법인 수혈식 석실분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호분B 지구 고분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내부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국내최초로 확인된 채색고분이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신라,백제,일본,가야지역의 다양한 유물로 확인되고 있어 일본과의 관계 확인을 위한 고고학계의 중요한 연구자료로 가치가 높아 일본학계에서도 많이 방문하고 있다.

※ '99∼2000년 송학동 고분군 시굴 및 발국조사 경과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3개의 쌍분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 조사됨

출처 : http://www.gngs.net/sitemap/s-fram512.htm 

 

 

"장고형 고분, 그러니까 전방후원분은 어떤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 건가요?"
"원형(圓形)의 분구에 직사각형 또는 사각형 분구를 붙여놓은 평면형을 나타내는 무덤을 말하는 거지."
"저기 있는 제1호분이 한때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일었던 그 고분 아닌가요?"

국내 최초의 채색고분이라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으로 가는 차창에서 바라보는 남도의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아직도 단풍 빛이 울긋불긋하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 누가 스러져 가는 단풍 빛과 기세 등등하게 다가오는 동장군을 막아낼 수가 있으랴.

추수가 모두 끝난 텅 빈 들판. 한 아낙네가 방금 뽑은 듯한 싱싱한 무와 배추를 한아름 안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마에 연초록 빛 띠를 두른 채 성숙한 여인의 장단지처럼 통실하게 잘 자란 허연 무. 노란 속내를 행여나 누구에게 들킬까 봐 부끄러운 듯 동그랗게 말아 올린 배추. 어디로 가져가는 것일까.

빈 들판 위에 놓인 푸른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제법 떠 있다. 차창을 조금 열자 아까부터 씽씽 소리를 내며 버스를 뒤쫓아오던 싸늘한 찬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 안으로 세차게 몰려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동행한 이선관 시인이 헛기침을 몇 번 내뱉는다. 추우니 얼른 차창을 닫으라는 신호다.

"강인구 교수는 장고형 고분의 원류가 우리나라라고 했다면서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에 대해서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지."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던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지난해 6월 30일, 3차 발굴조사에서 이 고분이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전방후원분)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판명됐어."

 
 
▲ 지상으로 돌출된 봉분은 모두 11기다 
 
ⓒ2003 이종찬

 

고성 송학동 고분군. 지방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송학동 고분군은 고성시외버스터미널 오른쪽 진주, 사천으로 가는 길목 50m쯤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가운데 제1호분을 중심으로 지상으로 돌출 된 봉분은 모두 11개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모두 17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고분군은 대부분 가야시대 대표적인 축조방법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발무덤)과 횡혈식(굴식 돌방무덤),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 석실분으로, 특히 1호분 B지구의 횡혈식 석실분은 국내 최초의 채색고분으로 내부가 아주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또한 다양하다. 가야는 물론 신라, 백제 토기에 이어 일본 토기까지 출토되었단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라고 한다. 또한 이 때문에 일본에서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올 정도로 이 고분군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내부가 붉은 색으로 채색된 채색고분은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으로 논란이 일었던 이 고분군에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채색고분은 주로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리고 이곳에 가야와 신라, 백제, 일본의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채색묘의 주인은 왜에서 시집 온 여인이다? 
 
ⓒ2003 이종찬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출토유물을 보면 6세기 전반에 해당되니까 그때 이 지역에서는 신라, 백제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류도 빈번했다고 볼 수가 있지.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공은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겠지."

송학동 고분군에 채색묘가 발견되면서 일어난 논란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심봉근 교수는 채색묘에서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 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면서 왕비가 왜에서 시집 온 여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채색묘에서 발굴된 유물이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있으나 이는 무역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전방후원분도 결국 3∼4세기경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발굴조사결과 송학동 제1호 고분은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발무덤) 구조와 횡혈식(굴식 돌방무덤), 횡구식(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3개의 쌍분이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특이한 현상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 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이 모여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가야지역에서는 고성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 제1호분 내부 
 
ⓒ2003 고성군
"그렇다면 수혈식 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인 소가야의 마지막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그 왕비가 뒤에 죽어 채색고분인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여튼 이 제1호분은 부부묘의 개념이니까. 하지만 무덤의 주인이 소가야 마지막 왕인지, 왕비가 일본에서 건너온 여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 않았어."

지금의 고성에 있었던 소가야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후 소가야는 삼국사기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소가야를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소가야가 아니라 '쇠가야'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건 왜요?"
"당시 이곳에서 쇠를 많이 생산했다는 기록에서 연유한 것이겠지. 하여튼 이곳 사람들은 소가야, 즉 '적은 가야'라는 이름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국가의 이름을 '적은 가야'라고 썼을 까닭이 없다는 거지."

 
한국사 미스터리](13)‘장고형 고분’(下)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上)편에서 밝혔듯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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