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풀리자 근질거려서 방안에만 있을 수가 없다.

감기기운이 지끈지끈 오는 것 같아 누웠느니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 산뜻한 바람이나  운동삼아 쐬고오자고 나선 길이다.

사실인즉슨 겨우내 참고 살았던...절절히 만나고싶은 인물이 꼭 있었다. 300여년전에 돌아가신 대학자 '미수허목'과 기생 '홍랑'이다.

영암에 갔을 때 홍랑과 최경창(崔慶昌)이 머물었던 곳도 사진을 찍고 시비도 보고,,,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400여년전 고운 사람이  파주에 누워있단다. 난, 홍랑도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홍랑은 <묏버들 꺽어~~>란 시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정도로만 알았는데 기막힌 러브스토리라니~

또 하나, 경북 봉화 여행길에서는 문화해설사님을 통하여 귀동냥으로 처음 만나본 '미수허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만치 캄캄했었다.

우의정까지 오르고 시 서화에 능하며 특히 전서체로는 동양의 제 1인자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가 계신 곳!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만 외우고는 무작정 찾아나선 길이었다.

이상하게 왕징면에만 오면 네비게이션이 기를 못피고 정신줄을 놓는다. 나중에사 알고보니 군사지역이 가까워서 그런 모양인데..

주소만 겨우 적어 온 군남 왕징면 강서리 산 48번지를 내 무슨 재주로 찾는단 말인가?

겨울 산골에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개들만 빈집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군남면, 화이트교를 건느려는 찰나, 도로에서 지나치며 이정표를 보고는 반가움에 무조건 우회를 하고는 그 동네 부근에 비슷한 묘역이 있나싶어

낮으막한 동산을 오르내렸다. 헛수고였다. 동네라고는 한결같이 빈집같은 적막감 뿐~어쩌다 마주친 사람도 전혀 모른다는 도리질 뿐~

이대로 돌아 가야하나 싶었을 때,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고...다행히 너무 자세히 가르쳐주긴 했지만...혼자선 갈 수 없는 곳이란다.

뭔말인고 하니 민통선 안에 묘역이 있다는 것이다.

북삼교를 지나 직진하면 초소가 있단다. 이...그랬어~ 이제사 기억이 난다.

전두환씨의 아들이 만들어 놓은 허브빌리지를 찾아왔을 때, 그 때도 네비게이션이 허브빌리지를 눈 앞에 두고도 빙빙돌려서

골탕을 먹이던..그래서 초소까지 갔다가 물어보고 되돌아나갔던 적이있었다.

징파 나루가 있다는 북삼교, 나루의 기능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민간에서는 미수나루라고도 불린단다.

허목이 나들이를 하려면 당시에는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나루에 당도하여 술막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공에게 “미수 왔다!”라고 고함을 질러 나룻배가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 징파(澄波)나루.

얼었던 강물이 슬슬 풀려나는 정월대보름날 나는 길을 나섰다. 그랬는데......어허...낭패로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겨울 철새떼가 하늘을 가득 덮고있었다.

날씨 풀리자 날아갈 일이 걱정이 되는 움직임 같아 보인다.

 

 

먼-길 떠나기 위한 도약인지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북삼교에서 바라본 허브빌리지 뒷배경

 

 

254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진강 중에서 우리가 만나고 보는 구간은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임진강의 상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한강과 만나는 하류지역도 절반은 모르고 산다.

한강을 만나기 위해 남으로 흐르는 오후 임진강은 햇살을 수직으로 받으며 꽂꽂이 흘렀다.

군데군데 얼음이 눈치를 보듯 슬슬 풀려 녹아났다.

 

난데없이 다리위까지 들려오는 징소리...멀리 좌측 강가에 바짝 세워둔 차가 한 대 보였다.

 

 

부쩍궁금해보여서 줌인으로 당겨보니 굿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음력 정월 대보름!

용왕신에게 기원하는 중인가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다리 아래에 무려 3군데나....말없이 흐르는 강물에

기원을 새기는 걸까?

 

 

줌인으로 당겨보니 돼지머리와,  떡 과일, 쌀푸대등이 보인다. 거창하다.

 

 

바다에서는 만날볼 수 없는 그 무엇...강은 의연하게 침묵한다.  

 

 

얼었던 산골짜기 물들이 흘러흘러 이념따위는 상관없는 철새떼처럼 돌아 흐른다.

 

옛전설에 이 곳  절벽바위에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부엉바위로 부르다가 벙바위로 불려지기도 한다는....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 바위를 보니 고양이 형국이고

강 건너 마을은 쥐형상이더란다. 그래서 그 마을을 찾아가봤더니...쇠미해지고 있는 마을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저 벙바위,,아니지 고양이 바위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주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났더니....마을이 기가돌고 살아나서 한 사람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왕의 신임을 받게되자

안하무인이 되었고 고양이 눈을 가리는 일도 잊어버렸다한다.

끝내는 그 행적이 드러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마을이 다시 피폐해지더라는 ....

<실제 이야기로 검색글에서 그 시대와 왕과 그 사람의 관직까지 알았는데...재차 검색이 되지 않는 애석함>

이 곳 사람들은 붉은 벙바위에게 절을 하고 지나다녔다 한다.

지금은 전두환씨의 아들 전재국이  그 곳에다가 허브빌리지란 이름으로 꽃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봄오자 녹아 흐를 것을 물은 얼어서 빛깔마저 달리하고.... 

모질게도 강물을 다 얼구어버린 한겨울의 江, 그 위로 흰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겨울 임진강을 보고싶다.

 

 

징파나루쪽(右) 

 물그림자 도도하고...

 

징파나루란 이름이 걸맞을 정도로 맑고 잔잔한 여울이 감미로와 보인다.

물이 맑아 징파라 했다지만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임진강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이 곳이 '군남댐'인 모양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임진강은 홍수로 몸살을 앓고 들판이며 민가까지 질편하게 누워버리는 통에 아예 몸풀 곳을

마련해주느라 댐을 건축중인 모양이다.

 

 

이 곳은 기원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새다. 

 

'미수허목'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민통선 안에 모셔져 있다는데, 나는 과연 들어 갈 수가 있을까?

임진강 최북단의 다리 북삼교위에서 지금은 흔적뿐인  그가 드나들었다는 다리 북쪽의 나루를 바라본다.

지난해, 경북봉화를 두 번이나 거푸 방문을 했었다.  늦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조선제일의 아름다운 정자

'청암정'에 올라보고 점점 미수허목의  절필인<청암수석> 을 마지막으로 영면하셨다는 그 분이 궁금해졌다.

아니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는 점점 만나고싶은 간절함에 솔직히 안달이 났었다.

나는 강서리 산 48번지를 찾아 삼북교를 건너 민통선 검문소, 징파리 초소를 향해 곧장 직진했다.

(다음글로 계속........./이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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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이 글을 써 두신 후 15일만인가 운명하셨 전한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미수허목'을 알게되다.

청암수석(靑巖水石) 

전서의 대가였던 미수허목이 보내 온 청암정에 걸린 편액(篇額)

 다양한 옛 문서가 비치된 충재박물관

 

충재권벌은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큰 수석의 등위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둘레에는 물길을 끌어들여

거북이가 물 가운데 정자를 업고있는 형상으로 건축을 했다고 한다.

 

충재권벌이 독서를 하는 곳으로 겨울에는 청암정 바로 앞의 건물에서는 겨울을 나고 바람을 쐬고(下사진 左) 

여름에는 즐겨 독서를 하거나 시문을 지었다는 정자로  닭실마을 황금들판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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