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정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했다.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된  조선 중종 문신인 충재권벌(1474~1548) 선생의 유적지이다.


냇물을 끌어들여 그 물이 거북처럼 생긴 바위에 세워진 청암정을 돌아나가게

만들고 亭內에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허목(許穆)이 쓴 편액(篇額)이

걸려있어 옛날 시골 연못의 모습을 지금껏 보여주고 있다.

경북 봉화읍 유곡리에는 오래묵은 정자가 무려 101개나 존재한다.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태백산 백설령하에 금계포란형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어서 '닭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100여호의 가옥이 산자락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다.
닭실마을은 충재권벌의 입향조인 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고풍스러운 모양의 안동권씨 종가집이 있다.
종택에는 반달형월문과 자연석상에 지어서 둘레에 물을 대어 연못형식으로 만든

청암정이있다.
청암정은 충재 권벌이 15년간 은거하면서  도학연구에 몰두하며 장자 권동보와 함께

초가을의 청암정 모습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등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 일대는 사적및 명승 제 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초가을이지만 날씨가 아직은 더운날,

전날 밤에 이곳에서 야외음악회가 열렸다고한다.

가설무대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냇가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500m

이렇게 죽 이어져서 청암정에 물을 대어주고 돌아 흐른다.

 

충재는 독서를 즐겨했다고 한다.

왼쪽 가옥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른쪽 청암정에 올라 머리를 식히고...

겨울엔 충재당에서 여름엔 시원한 청암정에서,  

 

본시 이자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을 깎아 자연석 계단을 만들고 정자를 올렸다는데,

거북이는 물에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고 ....물을 끌여 들였다 한다.

 

 

물속에는 참개구리 한 마리~~ 

 

  

유배된 충재는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
(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
(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순당에서 '문정왕후'와 충재권벌 선생의 독대장면 연출디오라마 

을사사화당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소윤일파)에게 화를 입은 윤임등...에 대한 무고함을 간헌을 올리는 모습이다.

의로움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된 일이라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재권벌은 평안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닭실마을 담장은 흙으로 쌓았다.

사이사이 돌멩이를 지지대로 삼아서...

권씨의 종가

대문이 반달형(월문)으로 특이하다. 

 

종가집 마당 

문화해설가님께 들었는데..잊었다.(짚으로 엮은 것)

이 표시는 아직도 삼년상을 끝내지 않았다는 표식이란다. 

 한여름에 올라서면 드넓은 들판이 탁 트여서 무척 시원하다.

단촐하게 지어진 ' 충재당' 의 서실인 셈이다. 

지붕 양 옆으로 풍판을 대었다. (비바람을 가리는 용도) 

  

 

종가집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청암정이다. 

 청암정의 가을 

 물을 대지 않았다.

물이 없는 청암정의 가을 

 

  

 

 

이 바위의 용도가 무엇인가 궁금했더니 봉화는 지역 특성상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

소나무를 베어와서 쐐기를 박아 나무를 키대로 길게 4쪽으로 나누어 놓고는

하나씩 이 곳에 지지대로 삼아 눕혀두고는 불을 밝혔다 한다.

다타면 또 당겨서 이 돌위에 걸쳐놓고 하면서,

 

밤에 야간집회(공부?) 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불붙은 소나무 가지를 걸쳐두었던 돌이라 한다.

소나무는 송진이 많아 바람에 불도 잘 꺼지지않고 오래가고 밝았다고 한다. 

 

 

 

 <닭실마을의 한과> 

닭실마을은 또 제사때 쓰는 한과로도 유명하다.
문중 부녀자들이 500년간 전해내려오는 방식으로 한과를 빗는다.
고추실로 문양을 넣고 쌀 튀밥으로 고명을 얹어 한과에 눈꽃이 핀 듯 빗어낸다.
시중 한과와는 달리 바삭한 느낌과 고소한 뒷 맛이 월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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