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쇼셔'  

 

홍랑

 

홍랑(洪娘)은 선조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의 기생이다. 이병기(李秉岐)의 <국문학전사>에 의하면, 홍랑은 1573년(선조6) 가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이 북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갔을 때 그를 따라가 막중(幕中)에 머물면서 정이 깊었는데, 이듬해 봄에 고죽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이 저물고 마침 비가 오자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다. 그 후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고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경성에서 7주야를 달려 서울에 왔는데, 그 때 양계(함경도와 평안도)에 통행을 금지했고 명종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여 평일과 같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말썽이 되어 그가 벼슬을 내놓게 되고 홍랑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최경창이 1576년에 성균관 전적으로 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는데 그가 북평사로 나갔을 적에 관비를 첩으로 삼았다는 이유였다.

 

 최경창1은 이 노래를 번역하여 자신의 문집에 ‘번방곡(?方曲)’이라는 이름으로 실었다. 한역은 “버들을 꺾어서 천리 밖 님에게 보내노니 / 나를 생각하여 뜰 앞에 심어보소서. / 하룻밤 사이에 새잎이 나면 아실 것이니 / 초췌하고 근심 띤 얼굴은 바로 저의 모습이리라.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라고 하였다. 이 시조는 헤어지는 님에게 바치는 이별시로 잘 알려진 절창이다. 초장은 한시에서 전통적으로 이별을 상징하는 버들을 소재로 하여 헤어지는 님에게 이 이별의 상징물을 보낸다는 것이다. 버들을 꺾어주는 것이야 관습적인 것이지만 이것을 자신의 상징물로 옮겨가는 독창적 수법이 참신하다고 하겠다. 중장은 이 버들을 가져다가 님이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라고 하여, 제 스스로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자신의 정이 실린 이 분신을 가까이 심어두고 보라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별의 상징인 버들을 자기 자신의 화신으로 변화시킨 독창적 상징물로 삼았다. 종장에서 밤비에 새 잎이 나면 그 새 잎이 돋은 버들가지를 마치 자신인 듯이 반겨달라고 하였다. 헤어질 때에 마침 비가 내렸다고 했다. 그 비에 버들가지는 쉬이 움틀 것이고 그래서 님을 바라는 듯이 여린 잎을 낼 것이다. 그것은 님을 이별하고 울며 돌아가 초췌한 모습으로 님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애틋한 서정을 버들가지 하나에 부쳤으니 그 정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 그의 묘를 지키다 죽었고, 최씨의 선영 한쪽에 묻혔다고 한다. 

 

 

 

어려서는 그저 무삼심하게 여겼던 홍랑의 시 한 수~~

그래선지 곧잘 고어 시험문제로도 나왔지만 어느새 가뭇하게 잊고 있었다.

2008년 10월 영암 여행길에서  왕인박사 유적지를  향하며 시간에 쫓기고 있었지요.

구림마을을 지날 때가 오후 5시가 살풋 넘었으니 서둘러가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다더군요,

왕인 유적지를 다 돌고나니 하늘에는 달도 별도 나오고 아주  캄캄해졌지요.

그냥 버스에서 지나치며 문화해설사가 구림한옥마을을 지나치며 '최경창의 고향집'을 일러주었습니다.

실제 최경창이라는 이름보다 우리에겐 '홍랑'이  어쩌면 더 가차이 들릴지도 모르지요.

'홍랑'을 아십니까? 로 시작된 이야기는 제가 그저 무삼하게 알고 있는 시 한편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그 숨은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알게되었습니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알게 된 후로 얼마나 만나고 보고 싶었던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접한지 무려 5개월이 흐른 후에야 겨우 시간을 내어 달려갔습니다.

 

 

최경창의 호가 孤竹(고죽)입니다.

두 사람은 다 詩에 능하고 악기에 능한 예인들이었습니다.

정작에 저는 보지 못했지만 모tv방송 '역사스페셜'에 '지독한 사랑'으로 방영된 바가 있다네요.

첫 눈에 반하여 출충한 두 남녀가 만났으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임에도 홍랑은 그가 아프다는 전갈에 불원천리하고

7주야를 달려가서 회복시켰으나 이어 최경창이 죽자  얼굴에 자해를 하고 시묘살이를 했다 전합니다.

최경창의 자료가 여태껏 전해지는 것도 홍랑의 덕으로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는데,

해주최씨문중은 홍랑의 시신을 문중선산에다가 모셨다고 하니 그 당시 옛날 양반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

으니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도 그러하려니와 그 사랑을 인정해 준 최씨문중까지도

이 얼마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인지....감동입니다.

 

*서구림리 상대포*

孤竹 최경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1539년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특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17살 때 왜구가 침입하자 구슬픈 퉁소 소리로 왜적들의 가슴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러가게 할 정도로 악기 연주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1568년 과거에 합격하였고, 5년 후인 1573년 북도평사 발령을 받아 함경도 경성에 근무하게 되었다. 북도평사란 국경을 수비하는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최경창의 이때 나이는 34살이었으며 물론 유부남이었다. 옛날 기생이 가장 많았던 곳은 국경을 지키는 변방의 군대였다.

국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현지처 구실까지 할 수 있는 기생을 나라에서 특별히 배려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최경창은 운명적으로 홍랑을 만나게 된다.

문학적 교양과 감수성을 지니고 재색을 겸비했던 방년의 기생 홍랑을 만나 북방의 겨울 군막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다.
문학적 깊이에서 더욱 살갑고 애잔한 감성이 두 사람을 더욱 저리게 했다. 불장난이 아니라 그건 진정한 사랑이었다.
최경창은 그의 문집에서조차 그 사랑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양반 신분으로 기생과의 진정한 사랑을 솔직히 토로한 그의 자유정신, 예술적 열정이 부럽고 느꺼웁다.


 최경창이 떠나게 됐다. 아무리 사랑했더라도 남자의 임지가 바뀌면 그것으로 인연을 끊어야 되는 것이 기생의 운명이다.
따라가고 싶어도 기생이 관할 구역을 벗어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한 해 겨울 진진한 사랑을 익힌 홍랑은 이듬해 봄, 연인을 떠나보내면서도
무엇을 어찌할 처지가 못되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녀기쇼셔"

 

 홍랑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따라가 연인과 서러운 이별을 하고 돌아가던 길에 날이 저문 함관령에서 하염없이내리는 봄비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사모의 정을 이렇게 적어 연인에게 보냈다. 최경창은 홍랑의 시조편지를 보고 저미는 가슴에 망연히 서성이다가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고죽(孤竹) 최경창이 홍랑의 시조를 편지로 읽고 한역해 애모의 글과 함께 보낸 답서가 지난 1981년 발견되었는데, 2000년 가을 홍랑의 친필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오세창 집안에 내려오는 유물인데 여기에는 1930년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친필 확인 평문까지 실려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한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나라법을 어기고 문병차 서울까지 찾아온다.
그리움으로 속을 태우던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떠했겠는가. 다시 만난 그들은 서울에서 다시 지극한 사랑을 태운다.

그러나, 기생을 서울까지 불러들인 이 사건은 결국 사헌부 탄핵의 빌미가 되고 최경창은 딱하게도 관직에서 파면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때는 명종비의 국상 기간이었는데 관리가 기생과 놀아난다는 풍문이 돌았으니 어찌 온전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황진이 무덤에 술 한 잔 부어놓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고 그리움에 울었던 백호 임제가 관리의 체통과 권위를 망가뜨렸다고
 파면 당한 일만큼이나 이 사건도 멋지고 상큼한 일이로다. 한 여인의 간절한 사랑을 이토록 흐붓하게 받은 사나이라면 그까짓 벼슬이나 체통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최경창은 결국 파당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45세 때 객지에서 암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소식을 들은 기생 홍랑은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다율리 해주 최씨의 선산 최경창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고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안 빗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다.

 

허벅지에 쑥뜸을 떠서 역병이 있는 것처럼 꾸며 수절하였다는 기생 이야기는 있어도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들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은
홍랑말고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대단한 절개가 아닐 수 없다. KBS<역사 스페셜>에 소개된 제목처럼 '지독한 사랑'이다.


해주 최씨 후손의 말에 따르면, 고죽 최경창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절대적인 공로는 바로 기생 홍랑의 공적이란다.

 

임진왜란이 나자 고죽의 작품들을 가지고 고향으로 피난한 사람이 바로 홍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홍랑이 이처럼 절개를 지키고 최씨 문중 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최경창과 애첩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여기의 아들이 홍랑의 아기라는 주장이다.

 

옛날 서자 기록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 그것을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홍랑이 병구완을 하고 시묘를 할 수 있었던 정황이나, 오늘날 선산에 묻힌 당당한 연유를 추리하는 논거로 귀담아 들을 대목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홍랑은 기생 신분으로 사대부가의 선산에 자랑스럽게 묻혀있다.
그리고 후손으로부터 '할머니'호칭을 받고 있으며, 시제때면 따로 한 제물을 받고 후손들 음복하는 자리도 바로 홍랑의 무덤 벌안이라고 하니
비록 그녀는 갔어도 시조와 함께 후손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기생 신분으로 절대 사랑을 추구한 자유 문인 홍랑의 삶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기생 애첩의 신위를 받아들여 단정한 묘소를 가꿔오고 있는
해주 최씨 문중의 넉넉함도 저으기 아름답다. 참 좋은 일이로다.

 

홍랑은 관북인 즉 홍원 태생의 기생으로서 고죽의 풍류반려였다는 기록 외에 어떠한 자료도 없다.
기생의 운명인 것이다. 홍랑의 무덤은 본래 파주군 월롱면에 있었으나 1969년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출처] 백광훈, 서익, 홍랑의 시조 (정암 서당)

 

영암을 다녀온 5개월 후, 드디어 궁금했던  파주 홍랑의 묘를 찾았다.

찾기가 좀 애매해서 다음 <스카이뷰> 항공사진을 올리려니 아마도 군사지역이라 안내가 안되는 모양인갑다.

네비게이션에 친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산 102-2 를 쳤지만

부근에 도착하였습니다로 끝나는 멘트..

주변엔 신설 아파트공사가 난립하고 딱히 물어 볼 곳이 없다.

 

부근 언덕배기에 다다르면 좌측으로 경동택배가 보이고 그다음은 운정성당이 보인다.

더 가면 좌측으로 청석교회가 보이지만 청석교회까지는 아니고

좌측 청석자동차가게 옆으로 작은 소롯길이 2시 방향으로 나있다.

200m만 더 들어가면 11시 방향에 묘소가 보인다.

제대로 된 입구길이 없었던 것 같다.

 

묘소 제일 가까운 곳의 집 주인인듯한 아저씨가 궁금해 하시길래(아마도 최씨문중분인 듯)

묘소왔다고 이야기 드리고 아직은 빈밭인 밭둑을 걸어 가로질러 갔다.

낯 선 방문객에 놀란

산옆에서 키우는 댓마리의 개가 줄을 끊고 달려올 듯이 온 산을 컹컹대며 짖기 시작했다.

 

 바로 마주 바라보이는 저 곳이다.

 나처럼 빈밭을 많이 가로질러 나닌 듯...길이 나있다.

 고죽(최경창)시비

 홍랑가비

 

 

 본래는 무덤이 월롱면에 있었으나 1969년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홍랑의 묘

 비의 후면

 홍랑비의 측면

 

상수리 낙엽이 오그르르 상석아래로

바람을 피해 모여있었다.

 

 양쪽, 낙엽을 걷어냈다.

한 잔의 술을 올리는 대신  .....

 

 지독한 사랑이 아니라....참 대단한 사랑을 한 그녀 '홍랑'

 윗무덤은 정부인이씨와 최경창의 합장묘

바로 그 아래가 '홍랑'의 묘

 

 파주군 월릉이나, 다율이나 지척이니 마찬가지 심심산골 이런 곳에

아릿다운 기녀가 묘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으니

그 얼굴 누가보면 혹 흑심을 품을세라 자해를 하고 몸담장을 기피하고  이런 외진곳에서 기거를 했다니... 

어느새 세상은 바뀌어 아파트 빌딩숲이 점차 자리를 넓혀가며 포위하기 시작한다. 

 

 동그마니 매달린 까치집 하나~

 고개를 내미는 쑥.....

 

 떼구르 굴러떨어진 작은 도토리야~
나뭇가지 진흙이겨 집을 지은 까치야~
지독한 겨울을 이기고  고개를 디밀어 쏘옥 돋아나는 새 쑥아~
여기가 어떤 이의 무덤곁인지 알고나 있느냐?

사랑, 사랑이란다.

오로지 사랑에 목숨 건 아름다운 여인의 무덤이란다.

 

사랑이 실종한 시대............................이요조

 

 

 

좌측에서 바라 본 능 봉의 선이,  

실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나의 눈에 비치기를

홍랑의 젊은 시절 아미(蛾眉)를 연상시키 듯  가늘고 길게 굽어져 단아하게 보였다.

 

 세월은 흐르되....아름다운 사랑은 정녕 퇴색되지 않고녀~~

  1. 최경창/조선시대 시인. 본관 해주(海州). 자 가운(嘉運). 호 고죽(孤竹). 박순(朴淳)의 문인.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리었고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三唐派)이라고도 일컬어졌다. 1568년(선조 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지냈다. 1583년 방어사(防禦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죽었다. 시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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