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줄 나이 들어 처음으로 구절판을 만들어 본다.
보기엔 그저 그렇게 보였는데, 잔손이 아주 많이 가는 음식이다.

구절판의 유래 역시 초여름 물놀이(탁족)를 나가는 선비들의
풍류놀이 행장(行裝)에 마련하는 음식이었다 하는 글을 어디서 읽었다.
지금은 손님초대요리나 귀한 음식으로 만들어지지만 실상은 술안주에 더 가까운 음식이었다.

구절판은 궁중식과 민간식으로 크게 구분되고 또 진구절판과 마른 구절판으로 2가지로 나뉜다.
시집가서 폐백 올릴 때 내어놓는 신부가 마련한 마른 구절판은 술을 올리며 인사를 올리는 어르신들의 드실 마른안주로 꾸며진다. 구절판은 요리를 담는 기명(器皿)을 말하기도 하는데, 둘레에 8개의 칸과 가운데 1개의 칸으로 모두 9가 동양사상에선 9 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의미한다. 재질은 목기로, 대개 나전칠기로 만들어져 미술공예품으로도 귀하게 여긴다.
구절판은 8방에 나뉜 음식재료를 밀전병에 싸서 먹는데 이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사람의 화합을 뜻하여 옛날부터 궁중음식으로 사랑받고 또는  웃어른들이 드시기도 하고 대표적인 음식으로 쓰기도 한다.

한 이십년 전 음력대보름날 집에 손님들을 모셨다.
오곡밥과 나물거리 그 밖에 김치 두어 가지 마른 나물이야 아무리 아홉 가지 나물이래도 말린 나물은 그 빛깔이 거무튀튀해서 손님을 초청자리가 너무 우중충할 것 같았다.
그 때 고안한 게 무로 대체한 구절판을 응용했던 것 같다.

무가 배처럼 맛있을 때니 무를 선정하고는 유달리 못하는 칼질에 무를 얇게 썰어내느라 절반은 버리고 절반은 건져서
치킨집 무처럼 사이다에 소금약간과 감미당을 넣어 무를 절였다가 건져내고 고기 볶아내고 붉은 당근 채쳐내고 해서 큰 접시 서너 군데에 놓았더니 대단한 찬사를 받았었다. 그 게 바로 구절판이 아니고 무엇이랴?
실은 구절판에는 밀전병을 얇게 부쳐서 쌈 싸먹는 음식인 것이다.
제대로 된 구절판에 밀전병을 택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칼로리도 낮고 개인적으로도 아삭아삭 소리 나는 齒感을 더 소중히 즐기니 무가 당기는 맛에 당연 끌릴 밖에,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뒤 TV요리시간에 쌈 무가 나왔다.
동생들도 그 때가 기억이 나는지...

<어! 우리 엄마요린데!>

<엄마, 엄마 요리 나와요!> 그랬었다.

<그래 엄마요리~ 그건 내 요리였어!>
그랬던 쌈 무가  이제는 보편화 되었고 마트에 가면 아예 만들어져서 시판된다.
칼질 못하는 내겐 얼마나 간편하고 경제적인지 모르겠다.
그 무 쌈이란 게 요즘엔 고추냉이물 들인 것도 나오니 곁들여 고추냉이 장을 따로 낼 필요도 없더라!
그러나 그 맛을 믿을 수 없어서 그냥 흰 무 쌈을 사와서 고추냉이를 직접 개어서 물들였다.

좀 더 궁중식으로 할라치면 전복도 채 썰어 들어가고 석이버섯도 들어가야 하는데 생략했다.
대신 머리에 구구만 외우다가 9가지를 만들어 놓고는 <이런, 이런 일이!> 열절판이 되었다.

구절판은 만드는 방법대로 해보자니 소금에 약간 절였다가 참기름으로 가볍게 볶아내는 그런 양념법이다.
채소의 자연적인 맛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낸다. 파 마늘도 가급적 삼갔다.
거기에다 고추냉이장을 곁들여 냈으니 개운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어디 입만 즐거우랴 눈도 즐거운 것을, 어디서 이런 색채감을 살린 음식이 있을까?

나는 구절판 음식들을 만들면서 옛 여인을 떠 올렸다.
일일이 곰살맞게 아기자기하게 정성들여 만들어 내던 단아한 어떤 여인의 손길, 그 정성의 마음이 저절로 그려져서  아스라한 향으로 피어나더구나.

‘펄벅’ 여사는 구절판의 아홉 가지 극채색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 전한다.
문장가 ‘펄벅’ 여사가 아니더라도 느낌은 다 같을 터!
어디서 이런 담백한 샐러드를 만나볼까?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음식!
색채감이 뛰어나고 자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고 영양마저 고루 균형이 잡힌 음식,

한식으로 손님초대요리를 마련할라치면 식사 전 간단한 건배의 술 한 잔과 더불어 '애피타이저'요리로 좋겠구나.

고루 균형 잡힌 영양소(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등)가 화합하는 이 음식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고나면 어찌 정이 돈독치 않으리?


엄마,

 


재료
쇠고기, 쌈무, 계란, 당근, 오이, 표고버섯, 숙주, 새송이버섯, 

대체할 재료로는 미나리, 전복, 석이버섯 등 아주 다양하다.
기호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재료로 맛을 내어도 좋겠다. 단 채를 썰었으니 모든 재료 굵기와 길이를 통일 시켜야한다.

 

 

만드는 방법
 1/ 쇠고기는 얇게 포를 떠 고기의 결대로 가늘게 채 썰고 표고는 불려서 줄기를 떼고 채썬다.
2/ 약간의 파 마늘을 다져서 양념장을 만들어 쇠고기와 표고를 무친다.
3/오이는 5cm길이로 토막 내어 껍질부분을 돌려 깎기 한 다음 채 썰어서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물기를 짜 놓는다.
4/당근은 채 썰어서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숙주는 꼬리와 머리를 떼고 소금물에 데쳐 낸다.
5/새송이 버섯도 채쳐서 끓는 물에 데쳐둔다.
6/달걀은 황백으로 나눠 지단을 부친다음 각각 채 썬다.
7/절인 오이는 참기름으로 무치고 숙주, 당근, 새송이는 소금과 참기름으로 각각 무친 다음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각각 볶아낸다.
8/고추냉이에 담군 쌈 무를 꺼내어 중앙에 담는다.
9/ 6,7을 구절판에 얌전히 색 맞추어 담고 상에 낸다.

 

 

 

tip/ 밀전병일 때는 고추냉이 장을 앞앞이 내 놓는다.
여기서는 쌈 무에 고추냉이를 넣었으므로 내지 않아도 되겠다.
개개인 앞 접시만 하나씩 놓는다면 쌈을 싸기에 편리하다.

겨자장이라고 쓰인 구절판도 있지만 겨자는 고기가 많이 든 요리에 적합하고
회나 야채나 담백한 맛에는 겨자보다는 고추냉이가 더 맛에 어울린다.
고추냉이는 만들어진 튜브제품보다 가루를 사서 개어 쓰는 게 맛이 훨씬 낫더라.
고추냉이는 밀봉해서 냉장고에 두면  두고두고 사용할 수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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