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極東)의 진미’ 은어, 여름 강에 오르다

 

영남의 한 선비가 “더 이상 못먹고 죽는 건 괜찮으나 상놈의 입에 들어갈까 슬프다”고 유언했다는 ‘은구어(銀口魚)’. 중국 서진(西晋)의 장화가 쓴 박물지에 “먹고 남은 뼈를 강물에 버리니 그것도 물고기로 되살아났다”고 표현한 ‘샹위(香魚)’. 미 스탠퍼드대 초대총장이자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조던 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 “가장 맛있는 물고기가 뭐냐”고 묻자 일본인이 내놓았다는 ‘아유(鮎)’. 조던 박사가 맛을 보고 무릎을 치며 내뱉은 “Sweet fish!”. 이것은 모두 은어(銀魚)를 가리키는 각 나라의 이름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에서만 나는 은어는 2000년 세월 동안 사랑받아온 극동(極東)의 진미다.

‘민물고기의 귀족’ 은어는 날고기건 익힌 고기건 맛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1급수 여울에서 물이끼만 먹고 살아 잡내가 없고 대신 은은한 수박향이 살 속에 배어있다. “쏘가리, 꺽지, 산천어가 담수의 미어(味魚)로 손꼽히지만 은어의 맛에는 못 미친다”는 게 물고기 전문가인 낚시인의 중평. 은어는 연어와 같은 모천회귀어로 한해살이다. 바다에서 겨울을 난 치어는 강물과 바닷물의 수온이 엇비슷해지는 4월부터 강으로 소상한다.

 

은어의 성장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하루에 1.5㎜, 0.37g씩 자란다. 6~8월 뜨거운 여름이 은어의 청춘기다. 강의 중류에서 20~28㎝ 성어로 자란 녀석들은 물줄기가 세찬 여울의 돌밭에 자리를 잡고 밤을 틈타 이끼를 갉아먹거나 상류로 이동한다.

은어가 가장 맛있는 시기는 6~7월. 유리아미노산 중 단맛이 강한 글리산, 프롤린이 이때 최고치를 보인다. 버들잎(15㎝)만큼 자란 ‘버들은어’를 최고급 횟감으로 꼽기도 하지만 18~23㎝ ‘댓잎은어’라야 짙은 향이 밴다. 8~9월 25㎝ 이상 자란 것은 굽거나 훈연해서 먹는다.

 

9~11월 산란기에 접어든 은어는 하류로 내려가서 한 마리의 암컷과 7~9마리의 수컷이 뒤엉켜 모래자갈을 헤집는 격렬한 난교 끝에 숨을 거둔다. 2주 만에 부화한 치어는 바다로 향한다.

 

 

횟집서 파는 은어는 양식한 것

 

은어의 계절 여름이 오면 섬진강 상류 곡성군부터 하류 하동군까지 은어를 맛보려는 관광객이 긴 행렬을 이룬다. 동해안으로 흘러드는 영동 지역의 울진 왕피천, 삼척 오십천, 양양 남대천도 이름난 은어 산지다. “씨알은 섬진강이 앞서나 맛은 영동산이 낫다”고들 한다.

 

 

강을 끼고 드라이브하면 물소리 시원한 여울목마다 긴 낚싯대를 펼쳐든 은어낚시인을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그들로부터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연산 은어를 몇 마리 얻을 수도 있다. 사실 섬진강변 횟집에는 섬진강 은어가 없다.

 

횟집에서 파는 은어는 모두 양식산이기 때문이다. 동작이 잽싸고 돌 밑에 박혀 사는 자연산 은어는 투망이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아 횟집에 그 양을 조달할 수 없다. 양식 은어도 쫄깃하고 담백한 맛은 그대로지만 물이끼를 먹지 못해 수박향이 안 난다. 아무렴 맛이 자연산만 하겠는가. 횟집 주인이 은어낚시꾼이라면 모를까 ‘진짜 은어’를 사먹기란 극히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어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푸른 대숲의 바람, 물새 한가로운 강변에서 그 이상 어울리는 먹거리를 찾기란 힘들다. 올리브그린 등판에 은빛 복부, 아가미뚜껑의 황금빛 테…, 회를 싫어하는 사람도 은어를 보면 군침을 삼킨다.

 

배 주리던 옛날 기름진 은어는 강촌의 식량이었다. 그물을 치거나 돌로 물길을 막아 은어를 잡았다. 30년 전만 해도 두만강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모든 하천에서 떼지어 살았으나 1970년대 이후 진양호(1970·남강), 팔당댐(1973·한강), 안동호(1976·낙동강), 대청호(1980·금강), 영산강 하구언(1981), 낙동강 하구언(1987) 등의 댐과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은어의 물길은 차례차례 막혔다. 왕실에 진상하던 낙동강 상류의 봉화 은어는 멸종했고 밀양강 은어와 탐진강, 금강 은어도 거의 사라졌다. 현재 큰 강으로 유일하게 댐이 없는 섬진강과 동해안의 몇몇 천변만 은어가 소상하는 하천으로 남아 있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1820)에는 “양주 왕상탄(현재의 왕숙천)의 은어가 가장 맛이 좋다”고 했으니 한강에도 은어떼가 소상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등뼈 사이에 지방이 뭉쳐 있어 맛이 담백하며 비린내가 없다. 살아있을 때 오이향기가 난다.… 소금으로 간한 것을 먼불에 은근히 구워먹으면 맛과 향이 좋다”고 했으니 그 맛과 먹는 요령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는 은어를 신성시하기도

 

 

 

한·중·일 삼국 가운데 은어를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 9년(209) 기록에 “황후가 화전국 송포현의 물가에서 굽은 바늘을 드리우며 ‘나는 서방에 있는 재국(財國:신라를 지칭. 신공황후가 연오랑과 함께 건너간 신라의 세오녀란 설이 있다)을 구하려 한다. 이 일이 성공할 것이면 이 강의 물고기는 내 바늘을 물어다오’ 하면서 낚싯대를 걷어올리자 세린어(細鱗魚·은어)가 올라왔다”는 대목이 있다. ‘鮎’이란 이름은 물고기로 점을 쳤다는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본인은 은어를 신성시하기까지 한다.

 

그런 일본인이 첫손에 꼽는 은어는 공교롭게도 한국산이다. ‘조선 은어’의 명성은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을 건넜다. 오늘날에도 매년 150~200명의 일본낚시인이 개인으로 혹은 여행사투어로 은어낚시 관광을 오고 있다.

한국의 은어낚시인이 불과 300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다. 지난 6월 21일 산청군 경호강에서 만난 안도 요시미(58·나고야)씨는 “한국 은어는 크고 맛이 좋으며 성질이 용맹하여 파이팅이 좋다”고 했다. 안도씨 일행을 안내한 이운(41·서울)씨는 “일본엔 은어 낚시터가 훨씬 많지만 마릿수나 씨알이 한국에 못 미친다”고 했다.

 

은어는 지렁이 따위의 미끼를 먹지 않기 때문에 ‘놀림낚시’(일본에선 ‘도모츠리(友釣)’라 부른다)라고 하는 대단히 독특하고도 어려운 낚시로만 걸어낼 수 있다.

 

은어(씨은어)를 미끼삼아 다른 은어(먹자리 은어)를 낚는 것이다. 바윗돌을 끼고 ‘먹자리’를 형성한 은어는 제 영역을 침범하는 은어를 매몰차게 공격하는데 그 습성을 이용, 씨은어를 코 꿰어 낚싯줄에 연결하고 배지느러미에 세발갈고리바늘을 달아서 여울의 바위 뒤쪽으로 이끌어주면 먹자리은어는 침입자의 배를 들이박다가 갈고리바늘에 걸린다.

 

안도씨 일행은 천혜의 은어 품종을 보유한 한국의 정부가 수산자원과 낚시자원으로 개발하지 않는 데 대해 의아해했다. 은어낚시인 박경환(48·수원)씨는 “연어보다 은어가 더 투자가치 있는 어종이다. 우리나라 남대천을 찾는 연어는 실버나 레드새먼보다 하급의 첨새먼(chum salmon)인 반면 은어는 세계 제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어는 정부의 보호정책이 없이도 가혹한 환경변화에 스스로 적응해나가고 있다. 바다로 내려가는 물길이 끊기자 크고 깊은 호수를 바다 삼아 겨울을 나는 ‘육봉형(陸封型) 은어’로 변모한 것이다. 육봉은어가 처음 발견된 곳은 1995년 안동호였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청평내수면생태연구소 이완옥 박사는 “안동호와 상류의 명호천에서 자연발생적 육봉은어군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안동호 은어는 정치망에 의한 남획과 배스의 공격을 못 견디고 1997년경에 멸종했다.

 

영덕·봉화 등 은어축제도 확산

 

 

그 후 9년간 사라졌던 육봉은어가 최근 다시 살아났다. 작년 여름 진양호 상류 산청군의 경호강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은어떼가 발견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대청호 상류 옥천군의 금강 유역에 또 그만한 양의 은어가 발견됐다.

 

산청군은 1992년부터 밀양내수면연구소에서 채취한 수정란 500만개씩을 매년 방류해온 결과지만, 옥천군의 경우는 난데없이 나타난 노다지다.

 

이승로(55) 옥천군 축산계장은 “1997년에 봉화군에서 채취한 은어 수정란 300만개를 대청호 상류에 방류한 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작년 가을에 ‘이상한 물고기가 빙어망에 든다’는 어민의 얘기를 듣고 충북내수면연구소와 공동조사해 은어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산청군과 옥천군은 은어자원의 보호 증식, 은어축제 등 은어를 주민소득으로 연계할 수 있는 사업기획에 착수했다.

 

낚시인에 의하면 “순천시의 상사호 상류, 단양군의 충주호 상류에서도 제법 많은 양의 은어가 발견됐다”고 한다. 옥천군이 은어 방류 사실을 9년이나 잊었듯이 각 시군과 지역 어촌계, 양식업자 개인에 의해 소량씩 산발적으로 이뤄진 방류량과 방류시기는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은어를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은어축제도 확산되고 있다. 올해로 6번째를 맞는 영덕군의 ‘오십천 은어축제’를 비롯해 ‘봉화 은어축제’ ‘왕피천 섬머페스티벌’ ‘탐진강 은어축제’ ‘서귀포 강정천 은어축제’ 등이 7월 말과 8월 초에 잇달아 열린다. 경북수산자원개발연구소에서는 지난 3월부터 왕피천 은어의 수정란에서 부화한 은어 치어 40만마리를 키워서 봉화군을 비롯한 경북도내 12개 시군의 하천에 무상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육봉은어가 아무리 번성해도 바다에서부터 올라온 해산(海産) 은어의 순수한 맛과 추억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한여름으로 치닫는 이 시간, 모든 하구에는 은어가 서성이고 있다. 낙동강 하구둑에 막힌 은어는 마산 해안이나 거제도로 들어간다.

 

그러나 물길이 짧은 옹색한 하천에선 크게 자라지 못한다. 바닷가 하천에서 간혹 잡히는 은어는 10~15㎝에 머물고 향기도 약하다. 돌아갈 강이, 여울이 쾅쾅 쏟아져내리고 이끼가 파릇파릇 자라는 강이 그들에겐 없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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