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마을 : 금성산 아래 산운마을은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일명‘대감마을’로도 불린다.

금성산과 비봉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에는 학록정사와 운곡당, 점우당, 소우당 등의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다.

마을에 들어선 생태공원에는 자연학습원, 잔디광장, 연못, 산책로, 생태전시관, 분수, 나무다리 등이 갖춰져 있어 체험학습장으로 그만이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산운마을의 유래,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 공룡화석, 지진과 화산활동, 인류의 진화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산운생태공원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전통가옥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운마을 뒤로 현대 농촌의 전원 풍경이 펼쳐져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함께하는 산운마을

 

영교/개나리 열매

특이하게도 의성에만 개나리가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 열매는 영교라고 하며 약재로도 쓰인다. 그 열매를 까보니 참깨같은 씨앗이 가득한데
입으로 깨물어 보니 맛은 매우 쓰며 한약재 냄새가 났다.

 

점우당

 

 

옛 조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경덕왕릉 사적지와 문익점 면작 기념비를 지나면

금성산이 나타난다.
금성산은 가마와 비슷하다고 하여 가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내륙분지에 솟아 있는

조그마한 산으로, 한반도 최초의 사화산이다.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때문에 정상에 1,000여 평의 평지가

남아 있다.
화산 폭발의 흔적인 정상의 평지는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로서 이곳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의성에 가뭄이 들면 군민들은 가장먼저 이곳을 찾아와 땅을 파헤쳤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이 남몰래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한다.

 

그런 이곳의 금성산 자락 수정계곡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감돈다는 산운(山雲)마을이다.

 

 

 

운곡당

 

 

의성에는 오래된 고택과 회화나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통마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운곡당, 소우당, 정우당, 학록정사 등 지정문화재와 전통가옥이 유명하다.

 

앞서 운곡당을 찾았을 때는 이 댁 어르신(자부)이 계셨다.


시어머님이 뒷마당에 앉아 금성산 자락을(부군의 묘소) 바라보며 늘 앉아계셨다는 의자며~
이 마을 중 고가중에 대표적인 건물이라는데, 그 아름다움에 넋을 앗겼는데..
운곡당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번길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싶었으나 대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해설사는 더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쉬움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나오다.
 

 

 

 

 

 

 

 

 

 

 

 

 

운곡당에서

 

 

명 칭 :  운곡당(雲谷堂)
소 재 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58
(원소재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58)
건 축 주 :  이희발(李羲發, 1768~1849)
건축시기 :  1800년대 초기
소 유 자 :  이병직(李炳稷)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

건축 이야기
이 건물은 현 소유주 이병직의 6대조인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1768~1859)이 영월부사로 재직하던 1800년대 초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집이다. 안채는 60여년 전에 일부를 다시 지었다. 북쪽에 솟은 금성산을 뒤로 하고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으나, 이 마을의 고가옥 중 대표적인 건물이라 볼 수 있다. 예전 안내판에는 ‘현 소유주 이목의 5대조’라고 하였는데, 이목은 이병직의 아버지이고, 운곡당의 현판을 쓴 이홍은 이병직의 할아버지이다. 운곡 선생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순종(純宗) 3년 계해(癸亥) 즉 선생이 36세 되던 1803년에 ‘정침(正寢)을 세우고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03년으로 볼 수 있다. 61세가 되던 1828년에 ‘거실에 정재(定齋)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였다.

건축 특징
최근에 복원한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囗’자형(字形)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정침의 양측 칸은 전면(前面)으로 익사(翼舍)가 돌출되어 대문채와 함께 ‘日’자형(字形)의 배치형태를 이루게 하였으며 정침의 좌후측(左後側)에는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중문칸 앞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 ‘ㄴ’자형(字形)의 차면담을 설치하였다.

건축 구성
건물은 간단한 민도리집으로 안채에 사랑방, 고방 등이 한 동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평면구성은 ‘ㅁ’자형인데 앞채의 좌우에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의 한 유형에 속한다. 안채의 왼쪽 뒤쪽에는 사당이 있고 문간채는 조선말기에 화적떼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2002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사랑대청의 윗부분은 5량가구로 꾸몄는데, 초각한 대공을 두는 등 안채에 비해 격을 높였으며 비교적 규모가 큰 살림건물로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으나 산운마을의 고가옥 중 대표적인 건물이라 볼 수 있다. 평면 형태는 ‘ㄷ’자 형태의 안채와 그 앞 좌측에 ‘ㄱ’자형의 사랑채, 우측의 ‘ㄱ’자형의 고방채는 중문간을 통해 연접되어 ‘ㄷ’자형을 이루어 안채와는 상하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현판
운곡당(雲谷堂)
운곡당(雲谷堂)이란 현판이 두 개가 있는데, 운곡당 건물에 걸린 현판은 현손(玄孫) 이홍(李鴻, 1887~1972)이 쓴 것이고, 대문에 게시되어 있는 현판은 을사년(1965년) 12월에 현손 이태완(李泰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태완은 이홍의 옛날 이름이다.
정재(定齋)
현손 이홍이 썼다. 운곡 선생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828년에 거실(居室)에 정재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중 이야기
-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던 운곡당
이 운곡당이란 건물은 관리인의 조부인 이홍(李鴻)이란 분이 양진사숙(養進私塾)이란 이름으로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일제 치하에서 학동들을 모아서 교육하였다고 한다. 운곡당과 담을 이웃하고 있는 점우당(漸于堂) 대문 앞쪽에는 1999년 4월에 건립된 ‘자헌대부형조판서시희정공운곡이선생신도비(資憲大夫刑曹判書諡僖靖公雲谷李先生神道碑)’가 있는데, 전면의 큰 글씨는 광산인(光山人) 김택진(金澤鎭)의 글씨이고, 4,000여 자의 신도비문 글씨는 대종손(大宗孫)인 이시하(李時夏)가 썼고, 5대손 이목(李牧)이 감수(監竪)하였다. 신도비를 세우면서 문중에서 <희정공운곡선생연보(僖靖公雲谷先生年譜)>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가문에 대한 긍지를 고취시켰다. 이 책자에는 운곡선생의 연보(年譜)뿐만 아니라 신도비명(神道碑銘)까지고 우리말로 풀고 한문 원문도 곁들였다.


관련유물
- 운곡집(雲谷集)

운곡 이희발 선생의 문집인 『운곡집(雲谷集)』 권11에 실려 있는 <운곡서당개기고유문(雲谷書堂開基告由文)>이란 글이다. ‘개기고유문’이란 묘소나 집 지을 터를 정하고서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이 땅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겠으니 앞으로 잘 보살펴서 아무 탈이 없도록 해 달라’고 아뢰는 글을 말한다. 이 글은 운곡 이희발 선생이 운곡서당이란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마련한 뒤 건물을 세우기 전에 신에게 아뢴 것이다.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에서는 이 땅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형세를 말하였고, 둘째 부분에서는 자신이 이곳에 서당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이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아껴주었으니, 복잡다단한 세속의 티끌에서 벗어나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삶의 지표를 말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고유문의 끝에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좋을 날짜를 골라서 이와 같이 아뢴다는 내용이다. 이 글이 운곡당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운곡 선생이 세운 서당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에 소개한다.

금성특립(金城特立) 금성산이 우뚝 솟아서
진아소읍(鎭我韶邑) 우리 의성을 어루만지고
일록남주(一麓南走) 한 기슭이 남쪽으로 달려
기종영숙(氣鍾靈淑) 신령하고 맑은 기운 모으니
용반계포(龍盤鷄抱) 용이 서린 듯 닭이 품은 듯
향양개국(向陽開局) 남쪽을 향해 형국을 열었네
간비백사(慳秘百禩) 오래도록 아껴온 이유는
유대금일(有待今日) 오늘의 일을 기다려서니
자영소축(玆營小築)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서
이부여년(以付餘年) 남은 인생을 보내려네
포각속용(抛却俗冗) 속세의 티끌 씻어버리고
수습잔편(收拾殘編) 성현의 말씀 읽으리니
초서지졸(鷦棲之拙) 작은 거처는 초라하더라도
녹문지안(鹿門之安) 녹문산처럼 편히 지내리라
유신수척(維神垂隲) 신께서 돌보아주시어
영보우한(永保優閒) 영원토록 편안케 하소서
자이길신(玆以吉辰) 이에 길한 날짜를 택하여
근고궐유(謹告厥由) 삼가 그 사유를 고합니다

녹문산(鹿門山)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후한(後漢) 시대의 은자(隱者) 방덕공(龐德公)의 고사이다. 방덕공은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처자를 데리고 이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 생을 마쳤다. 당(唐)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맹호연(孟浩然)도 이 산에 가서 숨어 산 적이 있다.

 

관련인물
- 삼조(三朝)의 명신 형조판서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1768~1850)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초명(初名)은 영발(英發)이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자암 이민환의 6대손으로 학성(울산)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경주 하곡(霞谷)의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문하에 들어갔는데, 선생께서 이르기를 “군의 학문은 천성이라 할 수 있으며 반드시 대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곡에서 고향인 수정암(水淨庵)으로 돌아와서 22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했으나 친상을 당해 3년의 집상을 마치고 정조 을묘 식년시(1795년)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초계문신으로 특선되어 6년 동안 봉직하였다. 예조, 병조좌랑, 정언, 지평, 장령, 동부승지, 대사간, 병조참판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영월부사, 한성좌우윤을 거쳐 형조판서로 벼슬을 마감하였다. 80세에 기로소에 들었는바 정조, 순조, 헌종 삼조를 섬긴 명신이다.
초계문신으로 있을 때 호학(好學)하는 군주 정조의 총애는 남달랐다. 왕이 말하기를 “학문이 깊고 의리가 분명함에 앞으로 기대함이 크다.”고 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전정, 군정의 문란함과 매관매직, 과도한 세금과 부역 등을 줄이는 국정쇄신에 관한 상소를 자주 올렸으며 외직으로 있을 때는 탐관오리의 수탈을 막고 학풍을 진작시키는 등 이름 있는 목민관이 되었다. 부임하여 다스리는 고을은 인근 유민(流民)들이 몰려와 항상 호구가 불어나고 사풍(士風)이 일신되었다. 영월부사 때는 봉록을 털어 양사재(養士齋)를 지어 강학에 힘썼는바 이 고을의 학풍을 진작시켰음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검소하고 청렴하여 그 생활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관리의 귀감이 되었는바 82세에 형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조선후기 남인학자에게 이런 은전을 베푼다는 것은 오직 공의 불편부당한 처신 때문일 것이다. 희정(僖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으로 『운곡집(雲谷集)』22권이 있으며, 「용학강의(庸學講義)」와 「주서고식(朱書故寔)」은 왕명에 의하여 정조의 문집인 『홍재집(弘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금성면 산운리 점우당(漸于堂) 대문 앞쪽에 1999년 4월에 건립된 ‘자헌대부형조판서시희정공운곡이선생신도비(資憲大夫刑曹判書諡僖靖公雲谷李先生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판서(判書) 홍우순(洪佑順, 1791~?)이 지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