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 답안지

 

경상북도 봉화 닭실마을 충재박물관에서 문과 과거시험 답안지를 보았다.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유뮬관, '충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완전한 논술형 답안지다. 여태 상상으로는 웬만한 크기인 걸로 짐작을 했는데, 무려 답안지의 크기가  전지 한 장 크기 세필로 빼곡히 채워나간 방대한 서식에 놀랐다. 

그리고 부정행위 방지에 대한 일목요연함에도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문화해설가님 말씀을 녹음을 해오면 무척 유용했을텐데, 다녀온지 시간이 흐르고 나는 늦게야  답안? 작성에 이 빠진 듯 건성 쓰고 있나니....완전 낙방이다.

화제가 주어지면 전지 한장을 다 메꾸도록 답안지 작성을 논리정연하게 써내야 하는데....이렇게 대처방안이 있는 걸로보아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여전히 존재했었고 부당채점관도 있었나보다,  물론 현재처럼 쪽집게 과외도 있었다는 재밌고도 놀라운 사실이다.

 

 

1/답안지 머릿부분이 잘라진 것은 응시자의 이름을 쓰는 곳이라 한다.

채점자는 누구의 답안지인지 모르게 찢어 따로 보관을 하는데 그 때 검수관의 사인과 일치해야한다. (찢어진 가운데 글씨)

응시자의 이름은 물론 친부의 성명과 조부의 성명, 외조부의 성명까지도 써야한단다.

 

2/답안지 중간 중간에 도장이 찍힌 것은 현장에서 틀린 글자를 바로잡을 때 즉시 현장에서 오자를 정정했다는 도장을 받아두어야 한단다.

아니면 채점할 당시에 고쳐진 것일지도 모르므로,

 

3/三之二...의 뜻은 들었는데 까맣게 잊었다. (맹꽁!)

                    이제와 추측컨대 갈지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응시장 좌석 배열이 아닐까도 싶다. 지금으로 치자면 수험번호?

삼지이(三之二)라는 뜻은 병과의 이등을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사진도 없었던 옛날인데 인물대조는 어떻게 했으며  부정행위를 막는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대처했을지  그 것도 무척 궁금했었다.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조선시대 최고 지배층은 관료였고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통해야 했으며 양반 구실을 하기 위해 유생들은 과거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그 옛날  과거시험에도  커닝은 있었다.

 

①남의 글을 빌려 쓰는 일(차술차작)

②책을 과장에 가지고 들어가기(수종협책)

③과장에 아무나 들어가기(입문유린)

④답안지 바꾸기(정권분답)

⑤과장 밖에서 답안 작성(외장서입)

⑥문제지 사전 유출(혁제공행)

⑦시험관리요원 바꾸어 출입하는 일(이졸환면출입)

⑧답안지에 장난치는 일(자축자의환롱) 등등

 

과거시험장에서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컨닝이나 예비컨닝 행위를 발견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대호지(시험지)에 찍음으로써 급락 판정에 참작토록 했다는 것이다.

① 의영고 : 콧속에 커닝종이를 숨기는 것

② 협서 : 작은 커닝종이를 붓대 끝에 숨기는 것

③ 혁제 :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는 행위. 이것을 막기 위해 암송시험때는 응시자와 시험관을 분리시키는 장막을 쳤다. 
             또한 역서라고 하여 시험관이 과거 응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가 붉은 글씨로 다시 쓰기도 했다.

④ 절과 :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붙이는 행위로, 학력있는 사람과 미리 공모하든지 매수하여 저질렀다.

             또 옆사람과 답안지를 바꾸는 것은 환권이라 한다.

⑤ 차술 :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 시험을 보는 것

⑥ 이석 : 과거 응시자는 시험보는 도중 차를 마시거나 소변을 보기 위해 딱 한번 자리를 뜰 수 있는데, 이것을 이용한다.

⑦ 낙지 : 답안지와 초고지를 땅에 떨어뜨려 답안을 보게 하는 것

⑧ 설화 : 옆사람과 은밀히 말을 나누는 것

⑨ 고반 :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 보는 것

⑩ 음아 : 입속에서 중얼거리는 행위로, 특히 시문을 지을때 많은 암시를 줄 수 있고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커닝 수법이 다양해지면서 그 벌도 엄했는데, 과거장에 책이나 문서를 가지고 들어갔을때는 3~6년동안 과거 시험 자격을 박탈했고, 다른 부정행위때는 곤장 100대와 징역 3년에 처했다.

 

조선시대 <쪽집게과외>

  조선시대 양반들은 원래 4대 이상 과거에 급제하는 이가 나오지 않으면 평민의 지위로 떨어 지게 되어 있었다.

혼례 등을 통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 보다도 과거에 합격 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조선시대 과거에 쪽집게 문제가 횡횡 했다.  이런 책자를 일러 초집(秒集)이라고 하였다.

초집에는 이미 출제된 문제와 모범답안, 그리고 앞으로 출제가 에상되는 예상 문제가 있었다.

마음 급한 선비들은 이 초집을 이용해 시험에 임박 했을때 벼락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07년 6월에 완공된 충재박물관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곁에 건립되었다.

 

 

 원본을 보시려면 click~하세요!

 

 

충재권벌의 연표를 보다가 또 하나 깜짝 놀랄 일이... 

 

 

연산군 10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내시 '김처선'1의 '처'자가 글 속에 있다하여 취소되다.

 라는 글이다. 아마 이 때가 '김처선'이 내처졌을 때 일이었나보다.

 

수정한 곳은 반드시 정정했다는 도장을 즉석에서 이렇게 받아야 한단다.  

 

 

 

근래에 재연한 과거시험장 모습 

충재박물관에 가시면 유서깊고 흥미로운

다양한 옛 문서들을 직접 보실 수가 있습니다. 

가시기 전에 문화해설사님을 요청하세요(봉화군청 문화체육과)

 

이요조

 

 

 

  

김처선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죽은 뒤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고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금되었으며, 본관인 전의도 없어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06년(중종 1)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각주를 사용했으나 text가 길어서 잘린고로 다시 올립니다.

 

 

  1. '?~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