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을 찾았다. 흰 이팝나무 눈 부시게 피어 하늘거리는 5월 중순~~

숭의전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 정상부 못 미쳐 징파강이 내려다 보이는 잠두봉에 위치해 있다.

제례만 지내는 엄숙한 이 곳!! 뭐라 표현 할 길 없는 ....선조들의 위패들 앞에 그저 바라만 보고 돌아 나올터인데

숭의전에 숨겨진 전설같은 옛 이야기를 알고나니 더욱 더 유적지가 친근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한다.

 

 

 

지정별 사적 제223호
소재지 미산면 아미리 7번지 일대
지정일자 71.12.28
지정면적 17,851㎡

 

 

숭의전지는 미산면 아미리 임진강변의 아미산 자락 정상부 못 미쳐 조성된 아늑한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임진강이 북동방향에서 남서방향으로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유적 현황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 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였으며, 이를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


 

숭의전전경(군청 홈페이지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숭의전지[高麗 崇義殿址]는 고려의 종묘라고 말할 수 있으며,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며 숭의전[崇義殿]은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고 임진강변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 10에 위치해 있다.

 

징파강(임진강의 별호) 내려다 보이는 곳

어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나 해볼까나!!

가운데(중앙)문은 제례때 영혼이 드나들게 열어두는 문!!

숭의전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 유;洪 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 희;徐凞, 강감찬;姜邯贊, 윤 관;尹 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 충;趙 冲, 김방경;金方慶, 안 우;安 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배신청

태조의 위패와 영정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중작숭의전

 

숭의전을 지은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이 어W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위에 떠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조선은 생색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 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이 칠언절구는 1789년(정조 13년)마전군수였던 한문홍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담아 숭의전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 절벽에 새겨둔 것이다.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제례를 올리기 전 의관을 정제하고 준비하는 곳!!

 

 

 

 

 

숭의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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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소개

요약설명

조선시대의 사당 터. 고려 왕조 7명의 왕의 신위와 16명의 공신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터만 사적으로 지정한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태조 왕건을 위해 앙암사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짓고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그리고 현종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세종 때 조선도 다섯 명의 왕 제사를 받드는데 고려 왕조의 8명의 왕을 모시는 것은 맞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네 명의 왕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문종 때 이르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16인의 고려 충신들의 제사도 지내게 되었다.

현재 숭의전지의 전각은 1972년에서 1973년까지 복원된 것으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외에 16공신의 위패가 모셔진 배신청, 숭의전을 청소하거나 보수할 때 위패를 잠시 모셔두는 이안청, 제사 때 쓸 음식을 장만하는 전사청, 향이나 초와 같은 제례를 지낼 때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를 준비하는 앙암재와 다른 부속 건물이 있다. 숭의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500년 도읍지는 무너지고 인걸은 간 데 없는 망국의 한, 숭의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먼저 고려 왕조의 상징인 고려 왕들의 위패를 걷어 배에 실어 강물에 띄어 보내버렸다. 그렇게 나라를 잃고 배에 실려 떠돌던 배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동이리 썩은소에 닿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쇠닷줄을 매어 놓고 사당을 지을 곳을 물색하였는데 하루 만에 그 쇠닷줄이 다 삭아 그만 배가 떠내려가고 말았고 배가 멈춘 곳이 ‘누에머리’라 불리는 잠두봉 절벽 위의 앙암사 아래였다. 사람들은 앙암사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의 숭의전이다. 그 후부터 쇠닷줄이 하룻만에 삭아버린 곳의 지명이 ‘썩은쇠’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썩은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상세설명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후 세종 5년(1423), 문종 2년(1452)에 고쳐 지었다. 문종 때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의 충신 15명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 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완강하게 조선을 거부하였던, 고려시대의 왕씨 문중들이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옛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숭의전지 → 연천 숭의전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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