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오방색 차림에 신나는 풍물놀이

 

어린 나는 대문간에 기대서서 실로 가슴을 콩닥대며 풍물놀이패를 기다렸다.

뭔가 모를 흥이 넘쳐나고  주체할 수 없도록 신이나는 경사스런 잔치 분위기를 우리집 마당에도 얼른 풀어놨으면 싶은 그런 마음에서 였을게다.

어머닌 장독간을 반질반질 윤나게 다시 행주질 치시거나  풍물 걸립패들에게 내어놓을 주안상을 마련하시곤 하셨다.

우리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간단하게 서서 웃고 마시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는 차림상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정초에  풍물놀이(지신밟기)로 해서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한 해의 평안과 강녕을 빌고 믿어왔다.  

토템적이라 하기엔 우리의 오랜 전통이자 풍속이고 문화였다.

 

나, 어렸을때는 설을 쇠고나면 동네나 마을에서 걸립패1들이 풍물놀이단을 형성하고 가가호호 방문을 시작하였다.

풍물소리가 들리는 음력 정원 보름경이 되면 그 소리만 들어도 뭔가 새해에는 길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생길 것 처럼 모두 즐겁게 반겨 맞았다.

얼른 우리집에도 얼른 왔으면 하고 기다리던 옛 추억의 시절이었다.

 

막상 집에 당도하면 먼저 어머니는 상에다가 간단한 술과 안주등 음식을 마련해서 내어놓고 풍물패는 부엌과 장독간을 돌며 한 해의 무사안일을 빌어주었다.

물론 시골이면 고방과 외양간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였다.

 

시골에서는 곡식으로 도시에서는 현금으로 조금씩 갹출되어서 그 돈은 동네나 마을을 위해서 쓰이는 자금이 되곤 했다. 

풍물패가 오면 동네 모든 구경꾼들은 그저 웃으며 신나게 즐겁게 새해를 맞아드렸던 것 같다.

 

근간에 와서 잊혀지지않는 영화로 <왕의 남자>에서사당패들의 줄타기를 멋진 영상으로  사당패들의 예술성을 심도있게 재조명해주었다.

요즘엔 시내 상가를 도는 간단한 풍물놀이패는 간간이 봐왔어도 제대로 된 안성 남사당 놀이는 난생 처음 맞닥뜨리는 날이다.

안성시에 바우덕이 남사당풍물놀이를 보러가게 생겼다.

보러가기 전, 내 상상은 뭐 대충 2~300여명정도의 관객을 생각했다가 주차장에서부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찌감치 온 사람들의 스용차가 주차장에 가득했다. 이렇게나 전통예술에 관심이 높을 줄 미처 몰랐다.

언제나 무려 1,000여명이 넘는단다.

토요일 오후마다 공연을 하는데 공연료는 무료이며 오후 7시에 시작 8시 30분에 끝나는 1시간 30분의 공연 도중 아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우리에겐 우리의 것이 좋은 것이여~~~ 관객들 모두가 얼쑤~~ 조오타~~ 추임새를 넣으며 하나가 되어가는 우리를 느꼈다.

재담, 해학, 익살, 사회비판의 요소가 군데군데 기지를 번득이며 살아있으므로 진정 대중화된 놀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실로 신나는 남사당놀이 한마당에 여름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마지막엔 모두 나와서 한 데 어우러졌다.

풍물놀이 뒷풀이~~   남녀노소 모두 하나가 되는 감동이다.

 

상모놀이

 안상시 문화체육관광과에서 마련한 홍보책자!

이 그림에서 처럼 풍물놀이는 이젠 그림에서 조차 익숙해진 예술이다.

여백의 선을 즐겨 그리는 건 한국미술의 기초다.

선 몇 개로도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그림 ~~

거기다가 오방색만 넣으면 살아있는 풍물놀이 그림이 된다.

징과 꽹가리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면 우리는 한민족이 맞다.

 

 

관람하기 전, 숲속 공연장에서 남사당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

남사당토요상설공연을 기획하는 류정석 단무장이다.  이야기 하는 음성하며 대화중 몸짓 하나 하나가 바로 연극이다.

끼로 똘똘 뭉친 재담꾼이다. 우리의 마당놀이는 재담으로 우선한다.

남사당은 기예단이라기엔 중국이나 북한 기예단을 따를수는 없다.  단지 하나 더 보태자면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재담이 섞여 흐른다. 재치가 있고 해학이 있고 그 해학뒤에서 한과 슬픔을 두리뭉실 어우르게해서 그 아픔을 보듬는데 있다.

그는 진정한 이야기꾼이자 재간꾼이었다. 연극계에 있다가 남사당에 미쳐 이 일을 하고 있다 한다.

관객들을 얼르고 다독여가며 공연을 진행하는 무대는 아마도 우리네 뿐이지 싶다.

 

 숲속 공연장

  관람장 입구 저잣거리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먹거리장터는 찍지못했다.

 관객이 속속 모이기를 기다리는 시간

 시작을 알리는 기가 꽂히고 꼭두쇠의 인삿말과 함께 장내를 정돈한다.

 기대에 찬 객석의 저 표정들

대기실에 쪼그리고 앉은 이 처자가 바로 얼음위를 조심스럽게 걷 듯 한다해서 어름(줄타기)을 할 어름산이인데

여고생이란다. 역시 이름을 잊었다.

줄타는 간간이 사설을 넣어가며 줄을탄다.

줄위에서 하늘로 치솟으며 기예를 부리는데 손에 땀을 뒤게하는 어려운 동작들은 사진이 흔들렸다.

( 갠적으로 마음이 긴장되거나 흥분하면 사진이 흔들리는 버릇이다)

 줄 아래 있는 꼬마 양반과 주거니 받거니 웃음 자아내는 댓거리질이다.

능수능란한 줄타기

앞으로가지 뒤로가기 허궁잽이등....묘기는 달라진다.

 예전에도 이렇게 흥행료?를 받아들였겠지? 주로 어린아이를 앞 세운 감사의 표시다.

 풍물놀이패가 들어서고 흥을 돋군다.

먼저 다소곳이 객석으로 인사를 올리고

역시 눈을 끄는 건 미녀와 어린아이들...

 예전에는 가난한 농가출신,또는 고아들로 구성되었다 한다. 그래도 규율만은 엄격했다는,

아름다움을 열심히 렌즈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카메라맨들~~

 아름다운 전통의 오방색을 알기

무극에서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다섯 가지 원소를 생산하였는데 이것이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이다.

 이 오행에 상응하는 오색은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이며 오행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하고 낳아주기도 하며 극(剋) 하기도 하면서 물고 물리며 주고받는 관계를 가진다.

음양 오행 사상의 색채 체계는 동서남북 및 중앙의 오방을 이루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우주인식과 사상체계의 중심원리로서 우주의 본원에는 음(陰) 양(陽) 두 기(氣)가 있음으로 천지 만물은 이두개의 기로 이루어졌다는 역학적인 이론과 천문학적 철학으로 발전했다

우리 선조들은 전통의 오방색을 단순한 빛깔로써의 색만이 아닌 방위와 계절을 더 나아가 종교적이며 우주관적 철학관을 형성하였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행에 따른 오방색을 용도와 신분에 맞게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황 :오행 중 토(土)로 우주중심에 해당하고 오방색의 중심으로 가장 고귀한 색이며 임금색
◎청 :오행 중 목(木)으로 동쪽에 해당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며 요사스러운 기운과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
◎백 :오행 중 금(金)으로 서쪽에 해당하고 결백과 진실, 삶, 순결의 뜻(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는 원인이기도 하다)
◎적 :오행 중 화(火)로 만물이 무성한 남쪽이며 태양, 불, 피, 등과 같이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함
◎흑 :오행 중 수(水)로 북쪽이고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

 ◀전통오방색의 예▶
※혼례 때 부인들의 가례복인 녹의홍삼- 장수와 부귀의 충만 기원 /※신부의 연지곤지- 음귀의 축출/※색동저고리- 나뿐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 기원/ ※장독에 붉은 고추 끼운 금줄- 나뿐 기운의 근접 막기/ ※팥죽, 시루떡- 음기운 물리치기/ ※국수- 무병장수 기원/ ※국수에 올려진 오색고명- 오행에 순응하는 복을 빈다

 풍물놀이의 판굿은 28여종으로 짜여져 있다 한다.

 관객도 그렇겠지만 하는 이도 무아지경이 아니고는 이런 신나는 판굿을 벌일 수가 없을게다. 

 파도처럼 들이밀다가 잠잠하다가....숨 쉴 겨를도 주어진다.

 살판(땅재주)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판이란데서 유래한 땅재주

앞곤두, 뒷곤두, 자반뒤집기등이 있다.

 무등타기 기예의 놀라움보다 오방색의 화려함의 극치를 바라 본 날이었다. 

다산을 기원하는 깊은 뜻이 있다한다.

  외국에 공연나갔다가 아동학대죄로 잠시 중된된 적이 있단다.

 무등태우기(다산기원)

 버나돌리기

 몸놀림이 유연하다.

 마지막 함께 어울러지는 피날레장이다.

 부모와 함께 손잡고 나오는 어린 아이들...

남녀노소 스스럼없이 한 데 어우러지는 마당굿판이다.

 

 

 http://baudeogi.com/tour/tour_03.asp

 

 

 우리나라 연예인의 시초 스타가 된 바우덕이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 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쑤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집단인 안성남사당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令旗)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 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旗拜)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한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 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시킨 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1. 걸립패:무리를 지어 풍장과 복색을 갖추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풍악과 연예를 베풀어 돈이나 곡식을 모으는 무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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