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비각

 

밀양 무안면 무안리 표충비라고 불리는 이 곳을

 무안면 죽월리에 있는 남편의 친구네가 있어 

오가는 시장통 입구 길목이라 자주 기웃대지는

곳이다.

그러나 표충비가 있는 이 곳이 표충사로

 알고 있었던 이 무지를 어이할까?

 

표충사는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1839년 밀양

동쪽 재약산(載藥山)에 있는 표충사(表忠寺)로

 이전되어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는 홍제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팔작지붕안에 영어(囹圄)의 몸처럼 갇힌건지

소중하게 모셔진 건지..

검은 대리석(烏石) 표충비에 무슨 글씨가 씐 줄도

 모르고 단지 신기하게도 땀을 흘린다는..그 사실 하나만 궁금했다.

년전에 들렀을 때 표충비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얀 면(가제) 1필로 비석은 온 몸을 둘둘 감싸듯 말아섰는데  시간이 흘러 축축해지면 그 걸 짜서 계량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흐르면서 증발하는 양도 무시못할 일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 연일 땀을 흘린다는 소문에 친구가 특별히 안내를 해서 보여준게 아닌가 싶다.

 

왜?  <눈물 흘리는 비>라고 부르지 않고 <땀 흘리는 비>라고 하는 것일까?   비석  전체에서 나오니 땀이라고 그러는 걸까?  해설사는 그랬다.  맛을 보면 찝찔하다고...

 

 그 때는 그 신비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너무 잘 알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홀히 다뤘던 것 같다. 표충비의 땀에 대해서는 사명대사가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흘리는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비석에 그의 혼이 깃들여져 영원히 이 나라와 함께 하겠다는 그의 충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표충비는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처럼 흐르는데 이 것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생각하며 신성시하고 있다.

 

 

 

 

표충비각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비석으로 쓰인 돌은 오석(烏石), 흑요암(黑曜巖)>이라 불리는 검은돌로 경산(慶山)에서 가져왔다
고 하며 귀부와 머릿돌 부분은 따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높이는 2.75m, 비석의 머리부분과 기단석까지 합치면 3.9m에 이르며, 너비는 98cm, 두께
는 56cm에 거대하고 장중한 비석이다.
1742년(영조 1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法孫)인 태허당 남붕선사(泰虛堂 南鵬禪師)가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서산대사(西

山大師)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정면에는
비문의 내용은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이 짓고, 퇴어 김진상(退漁 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지수제 유척기(知守齊 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후면에는 서산대사비명으로 청허덩 서산대사의 찬연한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기린 글을 새겼다.
측면에는 '표충사사적기'와 이 비를 건립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겼다.

 

 

표충사는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1839년 밀양 동쪽 재약산(載藥山)에 있는 표충사(表忠寺)로 이전되어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는 홍제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무안리 향나무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인데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1,1m 이며 수관모양은 녹색의 큰 양산모양이다.
1738년 사명대사의 5대법손인 태하당 남붕선사께서 표충비를 이 곳에 세우고 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이와같은 모양의 향나무는 전국에서 이 곳 밖에 없다.

 

 

 교통편

 

언양IC → 석남사(국도24호선) →산내면사무소 → 금곡삼거리 → 긴늪사거리(국도25호선) → 밀양(시청) → KT밀양지점(지

방도1080호) → 무안삼거리 → 표충비각
 
남밀양IC →밀양경찰서→무안삼거리→표충비각
 
동창원IC → 진영(국도25호선) → 하남읍(지방도 1008호) → 미리벌민속박물관 → 인교교 → 무안면사무소 →표충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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