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재와 사우단에 가려진 서하원
주일재는 사우단이 있는 곳의 서재이고
서하원은 서쪽 노을이 깃드는 마루를 이름이다.
네 벗을 이르는 매란국죽의 그림자가 서하원의 서녘 햇살을 가려준다.
↗
사우단
네 벗을 위해 쌓은 단 위에
매란국죽을 심어 둔 곳으로
사우단이라 불렀다.
2009년에 도 왔었으니 실로 8년만이다.
서석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석지가 어떻게 생겼지? (서석지가 들었으면 서운할테다.)
글도 올렸었다. 그런데도 뇌리에서는 잊혀진 연못이 되었으니...그래도 새삼 다시 공부하는 느낌으로 임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자연의 풍광을 거스르지 않고 한데 어우러지는 예천의 초간정같은 정자는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어
문화재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객실에 온가족을 불러 모아 밤새 물소리 들으며 1박도 했거늘~~
敬亭은 정원 서석지로 더 알려졌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그 대단한 개인의 정자는 담장으로 둘러쳐져서 아무나 드려다 볼 수 없게끔 폐쇄된 공간인 셈이다.
영남좌도에서 이퇴계의 덕행을 우러러 그의 학문사상을 따르려는 유파가 생겨나며 이 학파를 퇴계학파라고 한다.
퇴계학파의 유파를 계승하고 배우는 학풍을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혼자 생각을 해본다.
정자의 이름은 공경할 敬에 정자 '亭'' 경정'이었고 목적은 수신(修身)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는 즉 공부하는 곳이었다.
이황의 가르침대로 유교사상의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든 조선시대 민가 연못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정자는 두 가지 형태의 것이 있는데...하나는 풍류를 위한 것과 또 하나는 수신을 위한 것으로 나뉜다는 것으로 배웠다.
敬亭의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108호인 ''서석지'는 우리나라 조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전남 완도에 있는 '부용원'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 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3대 정원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 서석지(英陽 瑞石池)
서석지는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선생은 1577(선조10年)에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선생이 우산(愚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수업하여 경학(經學)의 지결(旨訣)을
배웠다. 선생은 성리학과 시(詩)에 능하였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1627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1636년(仁祖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 1동)에서 살았다 한다.
선생은 서쪽의 구릉 하에 흰 돌이 서있는 곳에 못을 파고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우로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을 두고 경정(敬亭)이라 일컫었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건물이 방박하고 사방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좌편에 서실 두 칸을 별도로 개축 하였으니 주일제라 말한다.
못 가운데는 부용화(연화)가 있어 여름에는 정자위로 향기를 풍기며 꽃을 구경할 만하다.
정영방은 어떤분일까?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조선 중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 호는 석문(石門). 할아버지는 정원충(鄭元忠),
친아버지는 정식(鄭湜)
정영방은 경상도 용궁현(지금의 예천)포내리(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아버지의 사촌형제였던 정조(왕이 아님)의 양자가 되어 송천으로 이사하였다.
상주의 우복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정경세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확하였다. 1605년(선조38)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료로 진출할 생각을 거두고 산림처사로 살았다.
1636년 예천 용궁의 가산을 맏아들 정혼에게 맡기고 영양의 입암으로 이주하여 서석지, 경정, 주일재, 운서헌, 유종정 등을 짓고
영양 인근에 사는 이시명, 조전, 조임과 교류하였다. 1650년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읍취정을 지었다.
문집으로 4권 3책의 <석문집(石門集)>이 있다.
예천 마산리사(馬山理社)에 제향되었다.
누마루 난간에서
그 틈새로 바라보다.
보호수/ 400년된 은행나무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경관을 더욱 좋게 하며 경정의 역사(현재 수령이 400살이 넘었다)를 말하여 준다.
은행나무 등걸에 핀 곰팡이와 연이은 기와담장의 푸른 이끼와 곰팡이가. 말없이 세월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보였다.
四友壇(사우단)이라 이름 지음은?
그럼? 인근 영양에 살며 교류했던 이시명, 조전, 조임과 본인 정영방을 이름인가?
아마도 그럴꺼란 혼자만의 생각을...
(서석지를 관찰하느라 해설사님 이야기를 놓치고 뒷북치는...)
또한 이 서석지는 1982년 2월 20일 서울 산림청 임업시험장 강당에서『한국정원문화연구회』주체로 열린
『서석지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문화재 전문위원 민경현(閔庚玹)씨가 이 정원(庭苑)이 갖는 독특한 양식과
조경술(造景術)등을 분석 평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하였다.
주일재
사우단에 접한 서재
서하헌:석양이 비친다는 마루~
사우단에 함께 심어진 소나무가 자라나 오후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다.사우단을
살펴본 결과....대나무와 매화나무 그리고 국화가 자라나고있었다.
난은 어디갔는고?
2009년도 연꽃이 지고 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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