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요조

2002/6/25(화) 08:26 (MSIE5.0,Windows98;DigExt) 211.227.69.213 1024x768


내,어린날의 상처(방관자로서)  




*위 사진은 내용과 무관한 것임*





오늘은 '육이오'

난 부산 토박이지만...

아래는 부산으로 피난온... 그 당시 태어난 내 친구들...

그리고 둘 다 부모님은 이북 분이셨습니다.

난 늘 걔들의 도시락 반찬 가자미 식혜를 좋아했었지요.

내 것이 아니어서 엉뚱하지만,

아련한 향수가 일만큼....





누구에게나 그런 짐 하나씩 있는 모양입니다.

어릴 적... 그것을 뭐라 ? 명명한 것을 분명 어디에서 읽었는데..

잊었습니다.



전 자랄 때부터 뚱했습니다.

말이 없이...가만 있는 아이였습니다.

고집이 쎄서 입학하기 전 공부를 가르칠 엄두도 못내셨답니다.

해서 언니랑 함께 학교를 보내기로 하셨답니다.

안되면 2년을 하실 각오를 하시고는...7살에 입학



(실은 제가 위로 똑똑한 언니 컴플렉스에 빠져 언니 잘 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歌舞를 무시하는 것 그때..영향이라고 봅니다)



겨우 10까지 쓰고 제 이름 석자 배워 학교에 보냈더니

뒷전에서 섞이질 않더랍니다.(유치원도 그래서 포기)



차렷,열중쉬엇은 하는데..율동이나 노래가 나오면 굳어버리는 아이였답니다.

얼르고 달래도 막무가내....뒤로 빠져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얻은 내 별명이 선비)

짝꿍이 정해졌습니다.



내 짝꿍은 ...

그 때 무용가 황무봉(부산피난시절)선생님의 무용연구소(학원/충무동에 있는)을 다녔었고...

그 당시.....부산에 역시 김백봉 선생님 무용연구소도 있었고...

각 음반회사... 우리 동네에는 (공장겸)지구레코드사.....

(1950~~ 1960대 말까지...)

피난길로 내려온 예술인들이 양군데에 거점을 둔,,,어중간한 시절이였으므로,

때아닌 무용붐이 일었댔습니다.

언니도 발레복을 입고 무용을 했었고...

학예회 사진 뒤쪽엔 미군들이 서 있었고..

우리는 학교에서 주는 전지분유를 큰 밥통으로 타 와서는

알미늄 도시락에 넣고는 쪄서

딱딱하게 굳힌 우유과자를 지겹도록 먹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피난통에 그나마 제일 경기가 활성화 된 부산에다 왜

그런 혜택을 주었는지...



그 아이가 황무봉 무용학원 갈 때... 몇 번 따라 가 본 나는 그냥 구경만 했을 뿐,,,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는 않았지요.

여태도 에어로빅문전도 못가 보았으니....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부산극장에서 무용발표회 때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에서 '백설공주'를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1에서 1000도 잘 썼고,

예뻤고... 엄마도 우리 엄마보다 젊고 세련되었고...옷이나 구두, 이상하게 머리 땋기, 가방

어디서 구하는지... 정말 백설공주처럼 하고 다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좋아했습니다.

우린 반편성 한 번 없이... 육년을 그대로 있었지요.

순수 여학생 반으로,



일학년 시험 볼 때,

아이는 나에게 자꾸만 보고 쓰라고 답안지를 보여줬습니다.



보았지요.

그랬더니... 걔가 100점 전 95점을 받더라구요.

선생님...칭찬에...상장에....(시험 볼 때 마다 주더군요)

몇 번을 그러다가 제 스스로 도를 깨우쳤습니다.

묵묵히 공부를 했습니다.



둘 다 100점이였습니다.



그렇게 4학년까지 그 아이는 급장 전 부급장 이였습니다.

실제 그 아이 성적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아~ 왜 둘은 계속 짝꿍이였냐구요?

두 엄마의 치마 바람이 그나마 있는 사람이였거든요

그렇지만 판이하게 다른 두 어머니의 생활양식

제 어머니는 고전적이라면...그애 어머니는 신식여인)



도시락을 보아도

그 아이 도시락통까진 생각나진 않군요

제꺼요?

말씀마세요.

아마 지금 갖고 있다면..

진품명품에도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동그랗고 둔박한 나무통인데요...앙징맞게 귀여웠어요.

위에는 분리된 찬통... 옻 칠기처럼 번쩍 거리진 않는데...

무광으로 붉었어요.

사각 나무 찬합하고는 틀렸어요 일인용이니....

둥글고 불룩한 뚜껑을 보면...통나무로 깍은 것 같았지요.

어느 날..그 나무원통 도시락을 계란말이 넣어 달라고

메다 꽃는 통에 그만 뚜껑이 트는 금이 가 버렸습니다.

다른 형제들...다..이런 도시락 안 쓴 걸 보면...

제가 좋아해서 여기다가 싸달라고 특별 주문한 것 같기도 하고...아무튼

제 반찬은 주로 큰 굴비(그 때는 흔했음)가운데 알(卵)든토막

아니면... 된장에 박았던 깻잎 장아찌...엄마가 만든 단무지....

주로 그랬던 것 같은데(제일 싫어한 것이므로)

그 아이가 계란 말이(계란이 굴비보다 귀했음)를 사오는 게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요.

그 아이가 3학년 때...빨간 다후다 점퍼를 입으면..그 걸 사 달라고 졸라서

사입으면...내 옷의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았었고

그 아이 신은 샌들이 너무 좋아 엄마를 몇 날 며칠 졸라서 신발 가게를 갔더니

내 발이 너무 커서 없다는 말에 얼마나 서운하던지요.(비닐샌들)

그 당시엔 애기들 것이나...숙녀들 것만..있었습니다.

물론 나보다 발이 작은 걔,

아마 멋쟁이 걔 엄마는 그 신발을 어디서든 구해 올텐데, 알고 계실텐데,







이야기가 다른데로 갔지요?

시험을 볼 때면 늘

보여달라고 했지요

제가 누군가요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 아이의 점수는 언제나 차등이였습니다.



그아이가 교문에 떴다하면..

물론 집에까지 가서 책가방 들고오는 시녀가 따로 있지만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우르르 다 뛰쳐 나갑니다.



가히...장관이지요.

와...소리를 지르며...

그냥 나가냐구요?

손에 손에는 제일 귀한 것들을 다 들고 있지요.



연필..먹을 것,,, 귀한 것...

심지어 돈까지도,



난, 언제나 못 마땅했지만...

덤덤했습니다.

왜냐면 그 아이는 나에게 언제나 절반은 나눠 주니까요.

싫어 싫어 하면서도

못이기는체 받아왔습니다.



4학년 2학기 뜸 되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묘했습니다.

아니 이제사 자아가 형성되었다고나 할까요?



수런수런..

그아이의 안티 세력이 합세하여 늘어났습니다.



학교에서 못다한 나머지 이야기를

우리집에 몰려 와서 하곤 했습니다.

전 언제나...

가만 지켜보았습니다.



드디어

D-데이를 정하더군요.



학급회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누구누구를 오늘은 성토하겠습니다.

누구는 시험 볼 때마다 괴롭힌다.

늘 컨닝을 한다.

어떤 비리기 있다.

아무튼 아이들이였는데도 당찼습니다.



그 아이는 게거품을 물고 실신했습니다.

손발이 뻣뻣해졌습니다.



학급회의서부터...

얼굴이 질렸지만 손을 쓰지 못할 만큼 드쎈 아이들 기에

억눌렸던 선생님께서는 급기야

얼굴이 새하얘지셔서

물,,가져 오라고 고함을 치셨습니다.



제가 물을 갖다 드리자

팔다리를 부지런히 주무르고 계셨고

벌써...심부름 보낸 아이의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달려왔습니다.



그 때부터...

그 아이는 다른 아이였습니다.

멍해졌습니다.

그 예쁜 얼굴이 살이 디룩디룩 붙으며 멍-해졌고...

왕 여드름 마저 툭툭 불거지는 미운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날이후와 5,6학년 급장은 당연히 제가 했지요.

그렇게

아이들의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지고 자아가 발달하고

중학교를 가면서 헤어졌습니다.



전 부산여중을 갔고

그 반란의 주동자는 경남여중을갔었고

(훗날 왜 서구관내에서 먼 그학교 갔냐니까?

세라복이 예뻐서 그랬데요 ㅎ~)



바로 그 아이는 모여중을 갔습니다.

그리고 전설의 그 아이는 잊혀져갔습니다.



외모도.뛰어날 것도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아이로.



난, 미안하다는..부담감...늘 남모르게 지니고 살았습니다.

걔가 그런 것은 내 탓이라고 늘 찜찜하게 맘속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고등학교는 나중에...야간인지..아무튼 이름없는 학교밖에 못갔다는 말만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늘 가슴 한 구석..

또아리 틀고 있는 ..내 최초의 배신감으로

난 괴로워했습니다.

그 고운 아이를 평범으로 몰 고 간

내가 저지른 범행같았습니다.



사느라고...바빠서...아이 셋에다

시집살이에다, 병치레 잦은 한넘에다

또는 성장지를 멀리 떠나 온

이질감에다

난 나를 정말 잊고 살았습니다.



인터넷 세상이 오고 난 친구를 만났습니다.

주동자..

김 영희,

몇 년전...우린 극적으로 만났는데..약속을 하고



우려했지요

못 알아 볼까봐서...



그런데...기우였습니다.

그얼굴 그대로였습니다.

그애도 그런 말 했습니다.

우린 동시에 알아보고 껴 안았습니다.



영희, 그애는 형제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우리 집 언니 동생 이름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 걸린 그림까지도 기억해냈습니다.

"아~ 맞어,그랬었구나...나도 잊었는데...너가?"



그날...우리의 만남 장소는 잘못 선택되었습니다.

바로 모텔로 직행했어야 하는데...

해서 푹신한 물침대위에 나란히 누워서

끝간데 없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초저녁에 만난 우리의 수다는 장소를 옮겨가며 밤 2~3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왔습니다.

"얘, 걔 말이야 소식 아니?"

"응 ...미국살어...올 때마다 나 만나는걸"

"맙소사...이럴 수가?"

"아니 네가 걔에게 그래놓고선?"

"뭐 어때,,,어릴 때 일인걸..."

"걔는 몰라?"

"걔, 암 것도 몰라...ㅎㅎ 이상해...푼수가터...

미국에서 잘 사나봐..그러니 job도 없이 맨날 빈둥거리며...

비디오만 보다가 심심하면 고국에 날라들지..

걔, 골 아픈 얘기는 전혀 듣지도 못해..."

"아~ 어쩜........"

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억울해서....쓸데없는 것에 얽매여 왔던 내가 억울해서,,

'난 평생을 죄의식에 억눌려 살아왔는데...

난..얼마나 그 일로해서...괴로와 했는데...'



"요조야, 잊어...ㅎㅎ..니도 참 우낀다야~~"



"담에 오면 연락해줘? 같이 만나?"



"싫어, 됐어."



추억은 추억대로 묻어두는 것입니다.

아마 난 똑부러지고 잘난 언니 둔 덕에

그열등감을 내심 걔에게 만회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난 영희를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그 날 이후~

그 아이가 잘 산다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정말 반가운,

해서, 내 마음을 밝게 하는 창을 한 켠에 뚫어논 기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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