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나의 비둘기**


잿빛 하늘에 그려진 신도림역의 비둘기.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아리고 저려서,
불가항력인 존재에게 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악마적 쾌락이 절망적이어서,
벌써 읽고 돌아서 나가기를.........

신도림동은 내 성장기의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나가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거주한 동네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동네이다.

나는 도림동 철뚝길 몰랭이 개발도상국의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다.
어느 날 전철이 생기면서 집 앞으로 다니던
숱한 통행인의 발길을 막아 버리고
우리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머니로 하여금 전업(輾業)을 하게 하였다.

전셋집 장독대너머 엄청난 도림교회는
나날이 그 교세를 확장했으며 바벨탑처럼
웅장한 교회 건물의 그림자가
우리집에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는
동시에 햇볕을 착취해 가버렸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볕을 쬐이지 못하는 장독대의 기이한 운명
그 가난하고 비전 없는 동네에서
우리가족은 이십 오년을 버텨냈다.

기차와 전동차의 파열음이 고막을 찢었고
철뚝길 옆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외쳐대는
소리는 기차나 전동차의 그것보다도 더 요란했다.
늘상 희부염한 하늘은 절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에 충분했다.

신도림동과 이웃하고 구로동과 이웃하는
햇살만이 무상으로 쏟아지던 속이 말간 동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신도림동에 전철역이
생기더니 도림동을 저만치 밀쳐내고 급부상했다.
덩달아 더 초라해진 도림동의 우울한 모습은
한동안 우리를 버석거리는 한숨으로 몰아 갔다.


가장 어둡고 번잡한 도시의 한복판.
그곳에 둥지를 튼 발가락이 부러진
비둘기와 그의 친구들.
공포와 회유의 간극에서 길들여진
가엾은 나의 비둘기, 내 사랑의 비둘기.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울고 있다.
내 뼈가 자라고 내 비둘기가 나머지
발가락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시.

그의 유린당한 생명이, 공포에 떨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야 하는 신도림동이 애처로워서
심각한 불균형의 성장기 어느 쯤으로 퇴행한
자아는 고스란히 두 뺨으로 설움을 받는다.

내가 살았던 도림동은 내 기억의
가장 절실한 부분을 도배하고 있으며,
피와 살이 엉켜서 나를 키우고 살찌운 동네이다.

철길이 막히기 전 수 많은 노동자들이
철길 위 육교를 줄타기하며 문래동으로,
양평동으로, 구로동으로 생계를 위해서
힘차게 또는 고달프게 발걸음을 내딛던
간이역과 같던 동네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들의 부산하고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어둠을 걷어 내고
또 혼곤한 수마 속으로 빠져 갔다.

점심 때가 설핏 지나면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온 새끼소녀가 자잘한 찐고구마를
양은쟁반 위에 올려 놓고 바삐 지나치는
행인들의 발치 아래에서 희망의 눈빛을
저울질하며 궁색한 가계의 한 몫을 분담했다.

홍합을 보도블럭 위에 질펀하게 쏟아붓고
한 깡통에 백 원씩 호객하던 미경아빠의
걸죽한 음성이 오늘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지금도 나는 우리의 가슴팍을 훈훈하게 뎁히던
그 겨울날의 애환어린 홍합 국물을 잊지 못한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뿌연 국물이 우러나면
식구수대로 머리를 맞대고 '후루룩 쩝쩝'거리며
홍합껍질로 떠서 마시던 기찬 국물의 맛.

방림방적의 어린 여공들은 삼 월 중순이면
벌써 맨다리에 반팔인 회색빛 유니폼을 입었다.
저당잡힌 젊음 위로 흐르던 고단한 찌꺼기들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혹은 가문을 일으킬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책임진다는
명제를 안고 그렇게 시들어갔다.

그 시대의 공원들이 굳이 '전태일의 분신'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니더라도
파리한 목숨줄을 이어가기에는
시대의 엄청난 불행으로 여겨졌다.
산업역군이란 미명아래 스러져간 그들의 피빛 청춘.

다림질이 되질않아 구겨질대로 구겨진
양복 바지를 입고 나선 곱슬머리 총각은
나를 보자 쑥스러운듯 멋적게 웃었다.

허옇게 바랜 그의 무기질 웃음은
내 심장에 노오란 현기증으로 촘촘히 박혀 왔다.

그 청년의 백지장같던 미소가 가여워서
저만치 내려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주시하던 기억이 난다.

'그가 선택받은 소수의 신분이었더라면
저렇게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을텐데' 하는
그 때 비추어진 나의 편협한 사고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몰랭이 골목에 사는 남루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세나 신분 상승은 외면한 듯,
언제나 그렇게 가난하게 초라하게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내 마음의 상심으로 남아 있었다.

노모가 물려준 손바닥만한 집터에서
노가다로 실업자로 그날그날을 전전하던
소갈딱지 없는 아들은 낮술에 취해 날마다
아내와 싸움질을 하다가 어느 날 첫 단추의
오류를 깨우친 여자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중의 버거운 직분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렸고,

세탁소를 하던 집의 맏딸은 옆방의 호스테스를 따라
가출 이 년만에 머리털이 노오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마음이 아파서 제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했던
닭집의 막내 아들은 끝내 동네 똘마니로 전락했으며,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던 주인 집 외아들은
소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스스로가 거머쥔
주홍글씨의 수인으로 덧칠의 명수가 되어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오금이 저려서
"짱구 오빠" 하면서 반색을 했다.
이미 그 시절 나는 삶의 횡포와 타협하는
친절한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내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짱구다.

나는 짱구오빠에게 무엇을 해 주고 싶었을까!
두렵고 답답한 그 때의 내 심정은
그에게 맘껏 달릴 수 있는 도주로를,
절대로 체포가 불가능한 자유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정의하는 그의 범죄성의 해악과는 무관하게
그는 생포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처럼 보였다.
살아서 쓸개에 끊임 없이 빨대를 꽂혀야 하는
비운의 곰을 닮아 있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박제된 삶을 연명했으며,
제도권 속의 우월한 인간들이 내세운
그릇된 율법사관의 희생양이 되어
처참한 전생을 되풀이 하는듯 보였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내 인식의 궁핍한 도림동.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버렸다.

사 년전 아버지가 페암으로 세상을 뜨신 뒤에,
죽어도 도림동을 떠나지 않겠다던 어머니를
반강제나 다름없는 협박으로 등을 돌린 뒤
그 후로는 가보질 못했다.

나의 질긴 운명의 사슬이 묶여 있으며
우리 가족사의 생생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곳.
어머니의 끈끈한 인정이 살아 있는 골목쟁이 사람들.

팔 할의 바람이 미당을 키웠다면
팔 할의 동경에 대한 굶주림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초라하게 쇠락하고 쓸쓸하여도,
내가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 안달했던
애증의 동네라 하여도,
나는 도림동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내 성장기를 잿빛으로 찌들게 한 동네이며
희망이란 기차 대신 절망이란
기차만을 떠나 보냈던 동네이지만
나는 그 시절이 없으면 부유하는
한 마리의 유충에 불과하다.

도림동에서의 윤택했던 기억의 회로를
지워버린다면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신도림역에서 신음하는
발가락이 잘리운 비둘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 비둘기.
내 서러운 눈물의 비둘기
내 황량한 사막의 비둘기.

내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네 어찌 내 가슴을 쓰라리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도림역의 비둘기(발가락 잘려나간)를 읽고**


글/이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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