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사회문화회관 조감도 (석정님의 공모 출품작 디자인 송윤호)


7년 전에,
역삼동에 한 설계사무소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건축의 축자도 모르는 내가 특공대로 초빙되어 간 꼴이다.
설계비 20억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이므로,
회사의 사활을 걸고 일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동생 친구의 부탁이고, 사장도 동향에 동갑내기이라 흔쾌히 입사했다.
나름대로 "컴도사" 소리를 들으면서 전직원 교육도 해 주었다.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면서.....

일상근무 시간에도, 툭하면 직원들이 불러댔다.
내 일을 하면서도, 사무실을 이곳 저곳으로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고집 쎈 컴맹들을 수준까지 올려 놓았다.
IMF가 터지고, 이름 있던 사무실들이 쓰러져 갈 때에,
우리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두가지 대형 프로젝트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설계실 직원들이 3개월 째 일이 없어 놀게 되었다.
결국 두 개의 사무실을 하나로 뭉쳐서 구조 조정을 했다.

오산에서 출퇴근하려니, 어쩔 수 없이 자가용을 이용하였다.
기름 값은 폭등하고, 주차비에 도로비에, 절반은 땅에 버리면서,
열심히 다녔다.

처 자식들 장래를 위해서 끝까지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정월, 비장한 각오로 두개의 프로젝트를 해결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살 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30 여일을 철야를 했고, 한가지만 통과 되기를 빌었던 것이,
2월 중순에,
두가지 모두 통과되었다. 무려 30억을 딴 것이다.
기대 밖의 성과에 다른 직원들은 축제가 벌어지고,
나는 집에서 죽은듯이 밀린 잠을 잤다.

축하와 위로의 전화를 받으면서.....

그렇게 일어났는데.....

일간지에 직원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건축사 한명 뽑는데, 이력서가 수천장!, 가히 경제난을 알만 했다.

사장 입이 찢어졌다.
나는 그로써 만능인이 되어 버렸다.
관공서에까지 초대되어, 전산망을 휘젖기도 했다.

결국 40여명이던 직원이 300여명이 되었고, 사무실도 크게 이전했다.
꿈에 부푼 사장은, 합병도 하고 연구실도 차리고,
일본,독일,프랑스 유학파들과 석사급을 대거 기용했다.
방계 사업도 벌리고, 사장 식구들이 사업을 분담했다.
회장도 세우고, 부사장도 둘을 두고, 임원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자동차도 고물 그랜져를 버리고 에쿠스로 바꾸었다.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은 사장은,
오늘의 자기를 있게 해 준 직원들을 도태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대망의 프로젝트들은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도,
전혀 진척이 되지 않았다.

홀로 실장인 나는,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 속에서 시달림만 받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실적에 목마른 사장의 안달에,
정든 직원들은 하나 둘씩 떠나갔다.
결국 나 홀로 남아서 신입 사원들과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사공이 많아서인지 뜻대로 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발언권도 없어졌고,
그저 로보트처럼 일만 했다.

과거에는 두어달씩 연구해서 하던 일들을,
언제부터인지 두어 주만에 처리해야만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겹치기로, 이쪽 저쪽 사무실에서 계획한 일들도 하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년,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운전대에 앉을 수도 없을 지경으로 다리와 온 몸에 통증이 왔다.
진통제를 먹으면서 지팡이를 짚고서도 태연하게 일을 계속했다.

결국 쓸모 없는 퇴물 취급을 당하고,
물갈이를 하려 하면서도,
그래도 눈치는 보여서 함부로 하지를 못하더니,
명색이 공신인데...

결국 사장 입에서 생트집이 나오고 말았다.

병원에서도 오지도 말고, 경보를 많이 하란다.
바로 근골격증이다.
진단도 없고 산재도 안된다. 걸을 수도 없는데 환자가 아니란다.
백약이 무효이고, 오로지 운동을 해야만 하는데,

왜 그토록 미련하게 살았는지.....

그래서, 마침 후배들의 부탁으로 조금 편한 일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만 쉬라는 것을 뿌리치고 직장을 옮겼다.

쉽게 생각했던 일이, 몇명 안되는 직원들과 하려니까 어려워졌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위해서, 강원도까지 택시보다 더 뛰었다.
그렇게 해서 4개월 만에 일은 성사되었다.

그런데.....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사람이 오래도록 준비를 해서,
남에게 빠지지 않는 주단가게를 차렸다.

제법 장사가 되는 것 같더니,
월드컵에, 비수기가 닥쳐서 많은 적자를 내고 있다.

몇개월 쉬었지만, 여전히 몸에는 자신이 없다.
산책을 일삼다가 너무나도 무료해서,
법률서적도 뒤져보고,
사이버 공간에서 얼굴 모르는 제자들도 두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은 미련이 남았다.
이 시대에 컴퓨터디자인의 원조라는 자부심이 그것인데,
어느 분야 보다도 더욱 빨리 늙어야 하는 것이,
요놈의 직업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사무실을 개설하려고 보니까, 집사람이 선수를 쳐 버렸다.
셔터맨이나 하고 운전기사나 하면서 지내기에는,

진짜로 속이 터질 지경이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
저마다 살기가 바쁘니까, 시간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30년 만에 시골의 국민학교 스승도 찾아 뵈었고,
소꼽친구들도 찾아 보았지만,

아직은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정말로 화가 치민다. 세상은 왜 이 꼴이고, 나는 왜 요 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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