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몹시도 따뜻하던 어느 봄날에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어떤 할머니께서 좌판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하시고 계십니다. 지나가며 우린 이다음에 나이가 들어 부자는 아니더라도 우리 부부 손잡고 공원에라도 산책하는 여유와 국수 한그릇 사 먹을수 있는 형편이라도 되어야지 우린 저렇게 되게 낭비말고 부지런히 살자며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런 한달 후 친정 엄마께서 우리 집에 다니려 오셨습니다. 아침에 식구 모두 직장에 나가고 혼자 심심하셨는지 운동 삼아 동네 한바퀴 도시다가 할머니를 발견하시고 과일 좀 사오셨다며 저녁 먹은 후 내 놓으십니다. 그러면서 젊을땐 고왔겠다며 "그 연세에 쯧쯧" 혀를 차시며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 다음날 엄마께서 좋아하시는 메밀국수를 하려고 장국 만들어 식혀두고 국수를 삶아 놓고 냉장고를 뒤져 파를 찾으니 다 먹었는지... 할 수 없이 수퍼에 파를 사러 가다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나서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께로 향했습니다.



"할머니 잔파 천원치만 주세요. 봉투는 여기 있으니 여기에 담아 주세요." 파가 담긴 봉투를 내미시며 한줌 덤으로 더 주시며 고마워 하십니다. 봉투까지 들고 와서 더 주는 거라며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푸근해 보이고 비록 자판에서 장사를 하고 계시지만 고운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시장 다닐 때면 꼭 장바구니와 비닐봉투를 가지고 다닙니다. 내게는 비록 하찮은 봉투이지만 장사꾼들에게는 돈이니까요. 좀 귀찮더라도 가져갑니다.



난 가끔 할머니께 뭘 사러 갔다가 놀다 오기도 하며 시장에서 사고 받은 봉투는 깨끗이 씻어 차곡차곡 말려 두었다 할머니께 갖다 드리면 고마워 하시며 과일 몇개 집어 주십니다. 내가 받지 않으면 도리어 할머니께서 미안해 하실까봐 그중에 못생기고 흠 있는 걸로 몇개 골라 도망가듯 뛰어 가면 할머니께서는 나를 부릅니다. 그건 팔지 못해서 할머니께서 먹을려고 두었던 거라며 좋은 것 가져 가라고 고함을 지르십니다. 난 뒤돌아 보며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고는 얼른 집으로 갑니다.



어느날 할머니께 김치지짐 몇개 구워서 갖다 드리면서 가족이 없으시냐고 여쭈니 "놀면 뭐하노 힘 있을때 움직여 손자 용돈도 주고 내도 좀 쓰지" 하시면 씁쓸하게 웃으십니다. 젊은 시절때 참 고왔던 얼굴이며 그런대로 사셨던 인품인데 어찌하여 저 연세에 길거리 자판에서 장사를 하시며 사시게 되었을까 가슴이 아픕니다.



난 가끔 남편과 다투거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엔 지짐 몇개 구워 할머니께 갑니다. 어린 시절 동네 머슴아들에게 맞고는 친할머니께 이르듯이 할머니께 남편 흉도 보며 화를 내기도 하면 할머닌 사람 좋은 웃음으로 "참거라" 하십니다.
"참는 사람이 이기는 기다. 남정네들 알고 보묜 불쌍하데이 그래도 색시 신랑은 그만하몬 된기다, 꼭 시장 같이 댕기고 심부림도 잘 하드마이 천난만날 젊인기 아이라 쌔움 하지 말거라" 하십니다.
난 할머니 말씀에 잠시 내 자신이 부끄러워 집니다. 그런 내 투정을 항상 잘 받아 주시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말씀을 더러 해 주시는 할머니가 참 좋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 밤에 남편이 내게 그럽니다. 비오는데도 천막밑에서 찬밥 드시고 계시기에 인사도 않고 얼른 와버렸다고 하는 남편도 마음이 안쓰러운가 봅니다. 내내 그말이 가슴에 맺혀 있었습니다. 그날도 남편이 늦는다는 전화에 남편줄 밥을 도시락에 담고 지짐 몇개 굽고 된장찌개 가지고 할머니께 갔습니다. 비닐을 덮어 쓰시고 계시는 초라한 모습에 공연히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가족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그들이 미웠습니다. 한사코 마다하시는 할머니께 던지듯 도시락을 드리고는 돌아서는데 내 눈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밤 늦게 들어 온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잘 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 주는데 갑자기 왈칵 또 눈물이 쏟아집니다. 아마도 예전에 내가 고생하던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가 봅니다. 울면서 나 늙어서 할머니처럼 그렇게 살기 싫으니 돈 많이 벌라고 하니 남편은 웃으며 알았다며 그런 내가 어린애 같다고 꼬옥 안아줍니다. 그런 남편이 듬직해 보입니다.




(2002,3,24, 새침이님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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