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는 누구나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저 하늘 끝엔 뭐가 있을까?
하는의문으로 한 마리 새가되어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붉게 타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그 고운 빛에 흠뻑 젖어도 보았다.
그러나 내 어릴 적 친구의 하늘은 언제나 검붉은 고통과 절망의 하늘이었다.
친구의 붉은 하늘...

어릴 때 내 꿈은 칠장이였다. 꿈이란 게 누구나 어떤 계기나 자극에 의하여
수시로 바뀌는 거지만, 난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다.
초등 학교 1학년 때는 하늘 높이 흰줄을 그리며 날아가는 B29를 보면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4학년 때는 만화에 빠져
만화가가 되어 볼 까도 생각했었다.

별 재주 없는 중생이라 그런지 확고하게 뭐가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칠장이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내 꿈으로 머릿속을 점유했었다.
지금의 간판은 재료가 다양해서 아크릴로 만들어 그 속에 형광등을 넣기도 하고,
유리에는 여러 색깔의 테이프로 글씨를 만들고, 휘황찬란한 네온까지 설치를 하지만,
옛날 60년대의 간판이란 각목으로 틀을 짠 후 함석으로 덮고, 하얀 페인트로 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빨강, 파랑, 검정 색의 페인트로 글과 그림을 그리는데 한두 해가
지나면 함석이 부식되면서 페인트가 벗겨진다,

그러면 칠장이가 사다리를 대고 올라가 다시 칠한 후 작품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첫째: 페인트의 냄새가 좋았고,
둘째: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셋째: 칠장이의 모자와 옷에 묻어있는 형형색색의 페인트 자국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붓이 움직일 때마다, 흰 바탕에서 살아나는 글자와 그림이
너무 좋아서 맞은 켠 잘 보이는 곳에 쪼구려 앉아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4학년 때 가정통신문 조사를 하는데 장래 희망란에 대통령, 의사, 선생님, 군인,
대신 '칠장이' 라고 기재를 했다가 엄마에게 적잖이 혼나고, 그날로부터 만화 보는
것을 금지 당했다. 그래도 난 만화를 마음껏 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 그림
솜씨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대하여 원그림과 똑같이 그리는
기술을 아는 친구들이 만화의 멋진 장면을 접어와선 그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5학년 때 강력한 라이벌을 만났다. 정확히 말해 라이벌이라기보다
그림에서만큼은 나와는 게임도 되지 않는 친구에게 나의 일방적인 참패로 끝난
한판 이였는데...당시 그 충격은 내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모두 같은 실정이었다. 단지 아는 것이라면 그가 다리를 심하게
저는 것과 아주 못산다는 것!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의 아버지는 육이오 때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상이용사이고,
엄마는 안 계시며, 꼬부랑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이외는...

그래선 인지 그는 언제나 어두운 얼굴에 말 한마디 없었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짝꿍까지도 말 한마디 못해봤다는데. 가까이 가려해도 외면해 버리니 그 누구도
다가가지 않았고, 그는 점점 자신을 울안에 가두고 철저한 외톨이로 살아갔다.
즐거운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데, 그 친구는 원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친구라 그가 점심을 먹는지 사라지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반장 엄마가 도시락을 갖다 주러 오다가 수돗가에서 수도꼭지를 빨고 있는
그 친구를 보고는 다음 날부터 두 개를 싸 보냈는데 그 친구는 먹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린 첫날이라 그러려니 하였는데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먹지를 않고,
집에 갈 때 반장의 가방에 슬며시 넣어주었다.

반장이 투덜댔다. (바보! 주면 못이기는 척하고 먹을 것이지. 또 울 엄마에게 뭐라고
말하지? 저러고서는 밖에 나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우리가 뛰어 놀 때 그는
언제나 교실 앞 느티나무에 기대앉아 아무 것도 없는 하늘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6월초 미술시간에 육이오에 대한 그림을 그리란다. 주제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평소 만화로 단련된 머리라 재까닥! 떠오르는 장면을 정신없이 그려댔다.
맨 위에는 "상기하자 6. 25!" 라고 쓰고, 북괴군의 탱크가 철조망을 깔아뭉개며
내려오며 하늘엔 비행기가 폭탄을 퍼붓는 장면인데, 20분도 안되어 완성하였다.
킥킥킥 내가 봐도 참 잘 그렸다. 친구들이 (와~ 잘 그렸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비슷하게 그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친한눔의 것 두 장을 비슷하게 윤곽을
잡아주고는 그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선생님이 그 친구 옆에 붙어 서서 꼼짝도 않고 계신다.
아주 팔짱까지 끼고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눔이 무슨 대작을
그리고 있나? 살며시 다가가 보았더니 (에계 계~ 저게 무슨 그림이야!)
저절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온통 검붉은 색깔뿐이다. 좀더 다가가
자세히 보니 저 밑에 조그맣게 그려진 탱크가 박살이나 검은 연기를
내고있었고 찢어진 철모하나, 그리고 한쪽 구석엔 할머니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저 그림이 뭐가 좋다고 선생님이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계실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지 칠했다가는
다시 손톱으로 긁어내고 다시 칠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칠하고 또 칠한다.
칠을 하더라도 우리처럼 조심조심 하는 게 아니고, 마치 황칠하듯 격렬한
손길로 칠하는 모습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저눔이 미친것이 아닐까?
생각되면서 갑자기 내 가슴을 세차게 때리는 듯한 북소리가 (둥~둥~둥~) 들렸다.
붉고, 검고, 흰색의 소용돌이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바로 그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 마당에 굿판을 벌렸을 때,
온 마당이 비좁다며 미친 듯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전교 조회시간에 시상식이 있었다, 그는 가작! 나는
입선이었다. 선생님은 그림에다 리본을 달아 교실 뒤에 나란히 붙여두었다.
그림이라면 난데...자존심이 무척 상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그림 보다
훨씬 못한 저 그림이 가작이라니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엄마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지만 시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못 밟던 시절이라 여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간 나는 대로
그의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암만 잘 봐 줄려고 해도 내 눈에는 그림이
아닌 황칠로 밖에 보이지를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우리 분단이 당번이라 청소를 마치고 점검을 받으려니 선생님이 안 오신다.
교무실에 가봐도 안 계시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선생님은 옥수수빵을
나누시는 당번이셨다.(옥수수빵! 이것은 미군 구호물자인 옥수수가루를 쪄서
가난한 가정의 자녀에게 방과후 갈라주었다) 그 옥수수빵을 갈라주느라
늦으시는 모양이다... 생각하며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친구가 옥수수빵을
먹으며 절뚝절뚝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선생님이 당번이셔서 특별히 많이 주었는지 가슴에 4개를 안고,
오후 내내 굶주린 배를 채운다고 부지런히 빵을 뜯어먹으며 간다.
아마 가슴에 안은 빵은 집에 계신 할머니와 아버지께 드리라고 주신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에 울먹해졌다.

또 그의 그림을 바라본다. 하늘을 가득 채운 저 검붉은 황칠이 뭘까?
또 슬피 울고있는 할머니는? 순간 내 머리는 망치에 얻어맞은 듯 핑 도는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아 바로 이 것이야! 이런 것이 그림이야!
똑 같은 전후 세대인 우리였지만 육이오에 대한 느낌은 천양지차로 난
그냥 말로만 듣는 육이오였고, 그에게는 피부로 겪는 아픔이었다.
그는 저 그림에서 아버지의 잘려나간 다리와, 엄마의 가출, 할머니의
울부짖음, 또 자신의 장애와 불우한 환경이 바로 전쟁이었다는 것을
토해내며 혼을 담아 그렸던 것이다.

저 검붉은 기운이 밀물처럼 내 몸을 덮친다.
난 다시 그를 찾았다.
그는 후문 밖으로 긴 그림자를 끌며 힘들게 절뚝절뚝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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