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dzislaw Beksinski





보랏빛 보(褓)


작은큰통



비가 오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비가 오면 감성이 증폭되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지.

비가 오면 세상이 눅눅해지고,
비가 오면 활성이 감소되고,
그래서 기분이 침잠 되지.

시인은 비를 노래하고
주당은 술을 마시지만
그래도 비는 비일 뿐이지.

그래...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간에,
누구든지 멋진 보랏빛 보를 쓰고자 하지.

그 보랏빛 보에 수를 놓지.
치장과 각색으로 자가발전(發電)이 계속되면
마침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지.

이상한 나라로 가면
멋진 탈과 멋진 보를 만나게되고
잘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만날 수 있지.

그런데 조심해야돼.
그 아름다운 보를 절대로 열어보면 안되지.
자칫하면 공을 들인 그 보가 물거품이 돼버리거든.

우리가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유전자에 그렇게 프로그램이 되어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이구...
우리가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유전자 프로그램일까?

아닐지도 몰라.
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우리와 유전자의 존속에 도움이 될까?

누가 그러더군.
유전자가 우리를 만들고
유전자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우리 두뇌가 너무 똑똑해져서
이따금은 반항을 할 수 있다더군.

그래서...
어떤 이는 그 보랏빛 보를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안의 괴물을 보고 경악하기도 하지만,
보를 들추고 경악하는 나는 누구일까.

보랏빛 보일까?
괴물일까?








Re:보랏빛 보(褓),, 놀라운 진실




느티나무



푸른 들과 산 속에는 생물들의 쟁탈전

느릿느릿 기어가는 굼벵이를 개미들이 산채로 물어뜯고,

사마귀는 작은 곤충들을 노리고 새들은 사마귀를 잡아먹고,

새는 매들이 노린다.



농부들이 들판에서 일하는 모습, 참 아름답다.

자연의 한 모퉁이에서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저 사람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이다.

젊은 시절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다 장가도 들지 못한 채,

마흔을 넘겼다.

일을 너무해서 허리가 굽어 걸을 때는 땅을 봐야한다.

늘 빚으로 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초라한 집마저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아들은 무너지는 억장을 주체할 수 없어 술로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자포자기이다.




도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몸담고 있는 직장의 윗사람들이나 일에 대해서 밤이면 한 잔 술기운을 빌려 욕을 하고는

아침에 눈뜨면 다시 그 거대한 조직으로 들어가 사근사근 열심히 일한다.

어젯밤 내가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비켜서서 바라보면 열심히 움직이는 이 사회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삶의 단면들의 밑바닥은 차라리 비극이다.




사람들은 보랏빛 보를, 때로는 색색의 보로 삶의 깊은 곳을 덮고 있다.

몇 겹인지 알 길이 없는 두터운 보, 이것은 가식이다.

세상은 '보랏빛 보' 가식으로 덮은 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가식을 무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어낸다면, 즉시 사회에서 격리됨을 느낀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으며 스스로 사회와 함께 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혼자의 방황을 이어가게 된다. 자신의 의견이 인정받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으로부터

우매하다는 말을 들어도 반론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보랏빛 가식의 보를 들춰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사고의 격리이다.

거기에는 서로서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덮고 있던 보랏빛 가식의 보를 걷고 깊은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본성을 보는 것이다. 초라하고 여태껏 생각해왔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정립한다면,

이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리라.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삶들은 자신의 본성을 들춰보면, 회의와 허탈에 빠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을 덮고 있던 '가식의 보랏빛 보'의 색깔이

너무나 찬란한 행복으로 기워져 있기 때문에

그 행복에의 유혹을 절대로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며,

주위의 사람들 즉 사회로부터 쏟아질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다.

가식의 행복과 비난을 감수하며 혼자의 외로운 삶, 사무치는 고독을

참아 낼 수 있을 만큼 성숙된 지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지적능력이 특출하여 일찍이

이 자연과 생물들의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천재들의 삶이 우리 범인들에게는 비극으로 비춰지는 까닭이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내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엽총을 입에 넣었다.

이상은 총독부 토목기사의 자리를 그만 두었다.

니체는 세상을 향해서 발광을 해 버렸다.

까뮈는 뫼르소를 내세워 살인을 하고도 눈도 꿈쩍 않더니

자동차 사고로 위장하여 가버렸다.

로렌스는 사막을 돌며 자신을 채찍질하더니 오토바이의 속도로
타고 가버렸다.

베토벤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슬퍼한 슈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파먹는 병고를 내버려 둔 채, 작곡에만

몰두하다 건강을 헤쳐 죽었다.




천재들의 삶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이다.

그러나 그 천재들은 자신의 삶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여긴다.

선택의 여지없이 세상의 괄호 밖으로 자신을 기꺼이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덮고 있는 휘황한 보를 열어볼 능력도 없고,

열어볼 엄두를 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저 색색이 수놓인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그 삶이 허망하다는 주체할 수 없는 자괴감이 덮칠지라도,

세상과 함께 살아야만 숨을 쉰다는 것을 느끼는 한 우리는

그 보랏빛 보를 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망으로 살아온 삶의 허구를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산이나 산기슭의 밭 가운데 큰 혹을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보랏빛 보' 참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글이며,

오늘 밤 나는 내 마음에 그 보를 한 장 더 추가한다.

스스로 더 어리석어지기를 바라면서...










Parlez Moi d'Amour (샹송) - Lucienne B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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