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번, 써보고 싶은 글이었다.
[무의식 속의 의식]
나는 아주 어린 날을 너무도 선명하게 잘 기억해서...가족들을 놀래키는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께 이야기 들어서가 아닌,
위엣 모자는 오래도록 그 모자의 생김새나 질감마저 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기에 그대로 그려본 것이다. 붉은 양단 바닥에 쟈가드 무늬가
있으며 가장자리엔 하얀 토끼털로 둘러진 젖먹이 애기들 방한모자 ~
우리 집 마리(마르티스) 몽(레트리버)이 들이 내가 목줄만 들고 있으면 외출할 것으로 착각을 하고 환장을 하는 것처럼
나도 어린 날...이 모자만 쓰면 엄마 등에 어부바~~ 하고 바깥바람을 쏘이러 나가는 즐거움이
분명 있었으리라.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지만...부모님 고향이 김해라 지금은 부산이 되었지만 김해 녹산 다리는 밀물썰물의 수문 역할을 하는
다리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엄마 등뒤에서 나는 이 모자를 쓰고 고개를 외로 돌린 채
엄마 등에다 귀를 갖다 붙였다 떼었다 놀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녹산교 수문은 바람이 세었던 모양이다.
내 귀에 바람이 쏴아 들어왔다 끊겼다 들리는 소리에 나는 재미가 들려 있었다.
버스에 올라서도 그 짓은 계속되었는데...버스안에 꽉 찬 사람들....
문이 채 닫기기도 전이었는지..."와글 와글 쏴쏴~~" "뚝~~조용" "와글와글 쏴쏴~'
그 소리들을 나는 즐기고 있었다.
그 다음은 정지간(부엌)으로 난 문 쪽으로 기어가면서 울었던 기억이다.
발단은 배가 고팠는지...어쨌는지...설거지를 하시던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셔서 안아 젖을 물려주시던 기억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다.
중학생 즈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 설마~~ 하시는 엄마와 아버지 이모 앞에서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드렸다. 어디로 부엌문이 나 있었고, 나는
여기서 문 쪽으로 기어가며 울던 기억을 되살려~~
물론 다들 놀라며 신기해 하셨다. 잠깐 살았던 집이었단다.
그리고 나는 큰 병은 안 해도 자주 아팠다 한다. 아프기만하면 고열에 늘 시달렸다한다.
업자고 하면 좋아라 업혀서는 바람막이 덮개에 푸욱 둘려 쌓인 채, 한참을 업혀 가다가
"드르륵~"
도구루마?(작은 바퀴)가 구르는 병원문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악을 쓰며 뒤로 뻗대던....
그 바퀴문 구르는 소리는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아마도 그 소리는 곧이어 내 여린 엉덩이를 찌르고 들어오는 주사바늘을 연상해서 겠지만,
그리고 우리 독수리 오형제 모두를 건강하게 오래토록 자라게 해주던 집을 구입해 놓고 엄마 등에 업혀 갈 때 공사중인 빈 마당에 엉성히
키다리로 서서 피어있던 곧 뽑혀 나갈 해바라기 자태며...
어느 동생이 태어날 때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방에는 엄마가 갓난아기랑 누워 계시고
건넌방에는 언니와 나는 아버지의 팔 베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양옆에 누운 딸들은 서로 아버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아보게 하려하자
아버진...
"그래 나는 공평하게 천장을 보고 이야기하마" 시던....
서너살 애기때의 기억은 요기까지다.
.....................
다시 일곱살 여덟살 쯤의 기억들로 이어진다.
언니가 먼저 홍역을 했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큰애(언니)가 놀러나가는데...내가 들어오더란다.
그 길로 누운 나는 심하게 홍역을 앓았는데...인형을 사달라고 하도 보채서 그 당시 등겨로 속을 채운
빨간 모자에 간땅꾸(원피스)를 입은 서양아이 얼굴을 닮은 오무짱(인형)을 선물 받았다.
병석에 있던 어느 날 마당을 내다보니...내 인형을 가지고 언니가 제 친구와 사이좋게
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자지러지게 울다가 그 인형을 받아 바락바락 찢어 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속에 든 등겨를 탈탈 다 털어 내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배우자가 바람을 핀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다.
내가 제일 아끼는 물건을, 언니가 나랑 놀지도 않고 다른 아이와 너무 재미있게 노는 장면을 목격한....
나가 놀지 못하는 짜증, 그 인형을 찢을 때 쳐다보는 가족들의 놀라움! 나 스스로도 너무 아깝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마치 나를 찢는듯한 아픔,
그리고 내가 까무러치던 기억,
엄마에게 반쯤 일어나 앉아 안겼는데...마당을 가리키며 (내 기억에는 도라무깡/드럼통에는 물이 늘 들어 있었으므로) 물! 물!
하더니...
그냥 죽더란다. 거기까지는 어제 일처럼 아직도 기억이 완연하다.
.....................
이젠 거의 십 년쯤 되어 가는 일,
디스크 수술을 했다.
수술이라곤...내 몸에 칼을 대리라곤 상상도 않고 살아왔다.
심지어는 아직 귀도 뚫지 못하는 나일진대...
수술 전...공포에 수술을 먼저하고 나온 선배> 들에게 일일이 물었다.
모른다고..잠만 자고 나면 끝나있다고 그 후론 무통주사가 고통을 잊게 해 준다고
좋은 세상이라는 말들만 해 줬다.
나는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에 임했다.
마치 내 몸에 나쁜 버러지 하나 잡아죽이는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
며칠동안 낯이 익은 주치의에게 농담도 건네면서 마취에 빠져들었다.
회복실에서 병실로 올라와서 웃지 못할 일이,
사람은 마취가 덜 깼을 때...자기 비밀을 자기가 폭로하거나...성질이 다 나타난다는데...
우리 막내아들 왈,
"에이 음마두...나 쪽 팔려서 죽는지 아라써여~~"
"왜?"
"음마 땡깡 부린지 몰라?"
"뭘?"
아들 얘기를 들으니...대충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난다.
"누가 수술이 안 아프다고 내게 거짓말 해줬어.....엉~엉, 난 너무 아팠단 말이야....엉엉~
누가 그랬어, 거짓말쟁이들~~ 너무 너무 아팠는데....누구야? 누가? 터무니없는 그런 거짓말을 왜 했어? 앙~ 앙~~ 꺼이
꺼이~~"
'오! 세상에 이런 창피스럴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어쩌자고 그런 말들을? 근데....정말 나는 그렇게 아팠을까?
무의식 도중에도 정말 느끼는 것일까?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한가지 더 웃기는 것은 위에 말한 땡깡은 막내 아들이 일러주지 않았음 영영 모를 뻔한 무의식의
일이고....그 다음...의식이 좀 돌아 온 상태에서 마취는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였는지
내 눈에는 환각이 보이는데....병실 천장 석고보드 무늬가 온통 벌레가 되어서
오른편으로 좌르륵..쏟아지듯이 기어가다가 왼편으로 화르르 기울어지는....기이한 현상이...
이 환각상태를 입으로 일일이 생중계 쑈를 했다는 거다.
말이 많아지면서....온갖 소리를....
우리 가족들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 후로도 갑상선 수술 한 번 더...
이 번에는 조카사위가 과장으로 있는 병원이라 이번에도 또 그러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 정신 바짝 차리고 수술에 임했다. 정신을
곧추 세우고...또 세우고.....그래서 그랬는지
다행이 별일은 없었는데,
그 후로도 병원, 수술실에서 올라오는 환자들 많이 봐왔지만 나 비슷한 사람 여태 하나도 못 만나봤다.
무의식 속의 너스레~~
과연 내가 수술 중 아팠었노라 너무 아팠노라...엉엉 운 것은
실제 느껴서 그랬는지...
아니면 ?? 도대체 무엇인지.....데쟈뷰(기시감)였을까? 그 게 아직도 궁금하다.
글/그림:이요조
*어릴 적 일어는 반쯤 생활언어였습니다.
그 당시 사용했던 언어들을 그대로 살려 보았습니다.
의자를/고시가께....유리문짝을/아마도 라고 했습니다.
맞는지 안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튀김은 덴뿌라..... 그 이 후 우리말 순화운동으로
많은 글들이 바뀌었습니다.
아직도 목수일이나...미장원 식당같은 데서 아직까지 일어의 잔재가 좀 남았음을 봅니다.
※유전자 적인 답변
우리몸의 DNA에는 진 코드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기억 경험같은 것이 저장됩니다..
위 경우
말고에도.. 조상이 무언가를 경험을 심각하거나 강하게 했으면은 진코드에
저장이되. 후손에게도 전해집니다.. 예를 들어 쥐나 그런 것을
이상하게 남보다
더 싫어하고 무서워 하면 멀지않은 조상이 쥐때문이 무지 고생한 적이 있을 수도 있읍니다.
그게 진코드에 적혀
후손에게 전해진거죠
※데쟈뷰
deja-vu (기시설) 현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시간여행이나 영혼과 관련된
현상으로 추측해 보기도 하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일종의 착각, 즉 기억의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신경세포 정보전달의
혼란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