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717호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에 있는 소수서원에서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을 만났습니다.

공사로 어수선한 가운데 있었지만... 선생의 사당에 걸려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로 알고 있는데,  소수서원에서 볼 수 있다니... 사당문은 열려있고 이렇게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아마도 영인본이지 싶습니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그림은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과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군요.

박물관에는 주세붕선생에게 숙종이 하사한 술 항아리가 있더군요. 그 모양은 아주 특이하고 재미나게도 동물형상인데  양, 돼지, 코끼리의 형상이었습니다.

제 소견에는 하사품의 술병들이 교학(敎學) 진흥에 힘쓰는 주세붕 선생에게 賞으로 주어지는 축수의 기원이 담기지 않았나 상상해봅니다.

양은 순하고 어진 백성을 상징하고. 돼지는 富를 상징하고 코끼리는 道를 상징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선생께 숙종은 양민을 잘 다스리고 넉넉한 고장으로 선생의 학식으로 잘 이끌거라 믿는다는 그런 격려차원의 뜻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선생님은 풍기지방에서 조선최초로 인삼의 인공재배를 성공하셨고,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셨을때 개성에도 인삼의 재배를 성공해 개성상인의토대를 만든분이십니다. 유학자일뿐 아니라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아이템을 만드셨죠. 조선의 백자와 더불어 명산품인 인삼의 개발자이십니다. 

 

/글: 이요조

 

 

                                                                                         왼쪽 첫번째가 이황, 다음이 주세붕

 

 

 

 

 소수서원 강학당(보물제 1403호)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소수서원 전사청

 

이 건물은 중종37년(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히였다.

 

서원에서 전사청은 향사 전날 미리 제사상을 진설하는 건물로서, 평소에는 제기와 제례 용구를 보관한다.

이 곳은 제향 공간 가까이에 위치하며 제기고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그 위치는 사당 영역에 인접하고

제수를 마련하는 고직사와도 연락이 잘 되는 곳에 놓인다. 공통적으로 제상을 보관하는 마루방을 설치한다.

 

 

 안내판은 아크릴판이 얼룩이지고 글씨는 얼룩져서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소수서원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음 포스트로 미루고,

 소수서원엔 화초류가 없단다.

젊은 서생들이 봄이오면 마음이 요동하는데

정원에 화사한 꽃마저 피어있다면 ...그 심사를 배려했다한다.

소나무, 오죽, 사철나무,,,,꽃이 없는 나무들로 꾸며져있다. 

담장 너머 강학당으로 고개를 디민 향학열의 소나무

 

 

 

 

    목 보물  제717호
명     칭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소수서원
관 리 자 소수서원
설     명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옷의 깃을 낮게 표현한 것은 다른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1495(연산군 1) 경남 칠원~1554(명종 9).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개요

주세붕 /주세붕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주세붕 /주세붕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성리학 이념의 보급을 통한 교화와 향촌사림(鄕村士林)의 배양을 위해 최초로 서원(書院)을 건립했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생애와 관직생활
아버지는 문보(文)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홍문관의 정자·수찬,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1537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피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으나 이듬해 파직당했다. 이후 승문원교리를 거쳐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성균관사성에 임명된 후,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뒤에 대사성·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중앙에 있을 때는 주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敎學) 진흥에 힘썼다. 지극한 효행과 청빈한 생활로 조야에 신망이 높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교학진흥
그는 도학(道學)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유교 이념의 보급을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행을 건의했다. 풍기군수 재임시에는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썼고 당시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복구했다. 1542년 순흥(順興) 죽계(竹溪)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祠)를 설립했고, 1543년 풍기의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다. 건립 때는 감사 임백령(林百齡)·이언적(李彦迪)·황빈(黃彬)의 도움을 받아 재정을 확보했고, 자주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큰 열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으나 1550년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후 향촌사림의 정치·사회활동 기구로 자리잡았다. 155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여 최충(崔)을 봉사(奉祀)했다.

저서로는 〈죽계지 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 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 心圖彛訓〉·〈심경심학도 心經心學圖〉 등이 있고, 문집으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가 전한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과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서원의 소나무도 공부를 한다? 라는 뜻의 소혼대 소나무도 서원 담장너머로 기울어져 있다.

 

가을이라 하지만 아직은 녹음이 짙은 초가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경북 영주시에 있는 소수서원1을 다녀왔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2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조선 중종37년)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소수서원명륜당, 일신재, 직방재,등이 한참 보수공사중이어서

그렇게 구석구석 상세하게는 살펴볼 수가 없었지만....

어느 한 군데 할 것없이 아주 문화재적 가치가 많고 그 이야기가 무궁무진한지라

감히 어느 부분서 부터 풀어서 필설로 이어가야 할지 난감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나마 다녀온 그 감흥마저 사라지기 전에

미흡하나마 느낌대로 차근차근 요약해야겠다.

 

 

이 곳은 소수서원의 공원, 즉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잠시 머리를 식히던 곳으로,

소혼대(消魂臺)라 불리워지며

유생들의 머릿수대로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한다.

 

 

옮겨쓰자면,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자리로서 <안연소혼자 유별이이의>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詩 <별부>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려말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에 보이는 <숙수루/宿水樓>의<별대>로 比定이 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부다.

국가가 지원했으니 공립의 대학교인 셈이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해설사님을 통해서 절반은 듣고 절반은 흘려도...

얼마나 무궁무진 재미가 나던지...석달하고도 열흘을 다뤄도 끝간 데가 없을 지경이다.

나는 언제나 뒷이야기가 관심사다.

 

 

 

  소수박물관3


박물관 또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사액[賜額]4 으로 받은 현판

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현판(탁본용)을 탁본뜨다.
 

 

실제 현판이나 비석의 탁본은 아니고 탁본이 어떤 것인지 일러주기 위한 양각의 글씨에 손 쉽게

먹물 방망이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 (비석이나 돌에서)탁본을 뜨면 음각위에서 행해지므로 글씨는 하얗고 종이에 먹을 자근자근 묻히면 되겠다.

무슨 탁본이든 그 자체에 바로 먹물을 발라 뜨지는 않는다.

먹물도 화학품이므로 오랜세월 풍화에 시달려온 모든 사물은 독한 먹물에 바스러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발달하지 않던 옛시절에 탁본을 통해 귀한 글씨를 채탁해 서첩으로 꾸며 글씨 연습에 이용하기도 하고,

표구를 해서 걸어두기도 했다 한다.

 

 

 

탁본요령

 

1/탁본판,수건, 솔에는 절대 먹물을 묻히지 않는다.
2/탄본판에 종이를 얹고 분무기로 적당히 물을 뿌린다.(지면이 매끈한 쪽이 윗부분)
3/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다.
4/탁본판의 글씨가 도드라지도록 수건으로 꾹꾹 눌러준다.
5/작은 글씨나 세밀한 부분은 솔로 가볍게 두드린다.
6/먹물을 묻힌 솜방망이를 다른 솜방망이나 종이에 두드려 농도를 엷게 조절한다.
7/솜방망이로 탁본판 글씨를 따라 골고루 두드려준다.
8/완성이 되면 살며시 떼어내어 말린다.

 

 

오른쪽 敬(공경할 경)자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다.

소수서원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물 가 바위에 새겨진 '敬' 글을 탁본해 두었다.

이  한 글자에 아주 재미나고 비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한다. (다음글로~)

 

 

실은 솜방망이 둥근 자국이 나지 않게 깔끔하게 떠야 옳은데...

 

 

탁본의 떠 오는 게인의 의미는 글을 쓴 사람의  글씨를 직접 뜨므로

글씨속에 내포된 정신세계까지 엿보려 함이다.

그런데..마지막 '명종대왕'의  중요한 낙관을 제대로 못찍었다는 점이다.

 

 

흔히들 낙관을 서예나 그림을 그리고 찍는 도장만을 이름하는 줄 흔히 알고있지만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 말입니다.

글씨를 쓴 사람의 연대와 호등을 간단하게 쓰는 것을 총칭 아우러 말함입니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연이어 쓸 생각입니다.

 

글/사진:이요조

 

  1.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본문으로]
  3. 영주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한 공간인 셈이다. [본문으로]
  4.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조정에 상주하여 명종(明宗) 임금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을 받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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