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생태공원

 의성, 금성면 6개 초등 동기 운동회가 10월 17일에 있을 예정이라는 플래카드가 웬지 부럽게도 정겹다.

이 너른 잔디운동장에서 뛰고 구른다면...

금성산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몰린다는 동네 산운마을로 접어들다.

산운마을 : 금성산 아래 산운마을은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일명‘대감마을’로도 불린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함께하는 산운마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듯한....

저 우물은 그럼....현실과 과거를 넘나들 수 있는 .....블랙홀?

채마밭이 곱다.

산운마을은 자연친화적인 동네~~생태계가 살아있는 그림같은 마을이다.

 녹두와 팥이 열리는 건 아직 보지 못한 나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녹두!

 팥이란다. 지금은 덜 붉지만 붉게 된다고 한다.

 

소우당

 

의성 소우당 중요민속자료237호

소 재 지;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71-3

북쪽의 금성산과 남쪽의 창이들 들판 사이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영천 이씨(永川李氏)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는 운곡당(雲谷堂)·소우당(素宇堂) 등을 비롯하여 10여채가 넘는 전통가옥이 있다. 소우당(素宇堂)은 소유자의 6대조인 소우(素宇) 이가발(李家發)이 19세기 초에 지었다고 전하며, 안채는 1880년대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一자형의 문간채가 있고 그 서쪽에는 외측간이, 안채의 북서쪽에는 내측간이 있다. 안채의 서쪽에는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사랑채 또는 별당으로 불리는 건물을 배치하였다. 주위에는 연못과 각종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몄으며, 안채와 사랑채에서 각각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두었다.

 

 

 

 

 

 

 

 

 

 

 점우당 이희발의 아우, 이가발의 집으로 소우장은 이가발의 소가가 살았다는 집이다.

정원이 아름답고 가옥이 무척아름다와 등급이 높은 건축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명 칭 :  소우당(素于堂)
소 재 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71-3
(원소재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71-3)
건 축 주 :  이가발(李家發, 1776~1861)
건축시기 :  19세기 초
소 유 자 :  이희춘(李憙春)
문 화 재 :  중요민속자료 제237호

건축 이야기
이 건물은 소우(素宇) 이가발(李家發)이 19세기 초에 건립하였고, 안채는 1880년대에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소우당이 위치하고 있는 산운(山雲) 마을은 금성산(金城山) 아래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조선 명종(明宗) 연간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처음 들어와서 정착한 이후로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를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예전에 쓰던 디딜방아가 있고, 문간채 곁에는 양반가의 견공(犬公) 한 마리가 조용하면서도 굳건하게 집을 지키고 있다. 산운마을에 있는 유교문화재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건축물이다.

건축 특징
안채와 사랑채 외에 별당(別堂) 형식의 공간을 담을 둘러 따로 구성한 점이 특이한데, 19세기 상류가옥의 멋을 느낄 수 있으며 별서(別墅, 별장) 건축의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높고 낮은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돌, 연못 그리고 요즘에도 거처하는 모양인 듯 이부자리와 안석 등이 갖추어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동선(動線)을 따라가면서 크고 작은 돌을 이용하여 통행에 편리하도록 길을 만들어 두었다.

건축 구성

가옥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어 ‘튼 ㅁ’자형(字形)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측 전면에는 ‘ㅡ’자형 문간채가 있고 문간채의 서쪽에는 외측간이, 안채의 북서쪽에는 내측간이 있다. 안채, 사랑채 일곽(一郭)의 서쪽으로는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형성하고 원림(園林)을 조성하였다. 원림 중앙부에는 안사랑채 또는 별당(別堂)으로 불리는 건물을 배치하고, 그 남쪽으로는 연못과 수림(樹林) 및 보도(步道)를 조성하여 정원(庭園)으로 꾸몄다. 안채 서북쪽에 나 있는 문을 통해서도 별당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문중 이야기
-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 소우당

조선중기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산운마을로 들어와서 거처한 이래로 이곳에는 영천이씨(永川李氏)가 대를 이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광준의 후손들이 생활하는 여러 채의 옛날 가옥들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지만, 그 중에서도 멋스러움으로 말하자면 소우당이 단연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소우당의 한 켠에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별당 구역이 멋진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와 멋지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날 정도이고, ‘나도 한 번 이런 집을 가져 봤으면...’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꿈꾸기도 한다. 별당 앞쪽에 있는 우리나라 지도를 응용하여 조성하였다고도 하는 연못은 부정형의 곡선으로 되었고, 호안(護岸)은 자연 경사면으로 되었는데 입수구가 없이 과거에는 물을 길어다 채웠다 하며 출수구는 남측 담장 밑으로 배수되도록 하였다. 별당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정면 앞쪽에는 3칸 규모의 마루를 설치했고, 우측과 뒤쪽에는 툇간을 두었다. 여기에는 별도의 현판은 없다. 특이한 것은 좌측 뒤쪽에 화장실이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별당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완벽한 원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소우당의 또 하나의 재미있는 볼거리는 측간에 숨어있다. 측간은 물론 수세식이 아닌 푸세식으로 근래에 수리를 하여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측간 내부에는 판자를 깔고서 그 가운데에 볼일을 볼 수 있도록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대변이던 소변이던 볼일을 보면 그 배출물은 측간 아래에 우뚝 솟아 있는 돌기둥에 부딪히게 된다.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 가장 불편하고 두려운 점이 바로 물이 튀어 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다. 돌기둥 덕분이다. 볼일을 볼 때 엉덩이에 물이 튀지 않도록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지점에는 옛날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있는데, 그 곁에는 요즘에 사용할 수 있도록 수도꼭지를 갖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사랑채 앞마루는 근래에 교체 작업을 해서 깔끔하게 바뀌었고, 사랑채 방문에는 샤시와 비닐을 설치하여 추운 겨울철을 대비하고 있다. 소우당은 운곡당(雲谷堂)과 민가 한 채를 사이에 두고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운곡당에서 소우당으로 통하는 길 가의 공터에는 2008년 4월 5일에 의성군수가 ‘민선4기 2주년 기념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 성공기원’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수와 표석이 있다.

 

 

관련인물

- 검소한 삶을 추구한 소우(素宇) 이가발(李家發, 1776∼1861)

 

 

 

 

 

 

 산운마을 : 금성산 아래 산운마을은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일명‘대감마을’로도 불린다.

금성산과 비봉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에는 학록정사와 운곡당, 점우당, 소우당 등의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다.

마을에 들어선 생태공원에는 자연학습원, 잔디광장, 연못, 산책로, 생태전시관, 분수, 나무다리 등이 갖춰져 있어 체험학습장으로 그만이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산운마을의 유래,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 공룡화석, 지진과 화산활동, 인류의 진화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산운생태공원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전통가옥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운마을 뒤로 현대 농촌의 전원 풍경이 펼쳐져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함께하는 산운마을

 

영교/개나리 열매

특이하게도 의성에만 개나리가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 열매는 영교라고 하며 약재로도 쓰인다. 그 열매를 까보니 참깨같은 씨앗이 가득한데
입으로 깨물어 보니 맛은 매우 쓰며 한약재 냄새가 났다.

 

점우당

 

 

옛 조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경덕왕릉 사적지와 문익점 면작 기념비를 지나면

금성산이 나타난다.
금성산은 가마와 비슷하다고 하여 가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내륙분지에 솟아 있는

조그마한 산으로, 한반도 최초의 사화산이다.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때문에 정상에 1,000여 평의 평지가

남아 있다.
화산 폭발의 흔적인 정상의 평지는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로서 이곳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의성에 가뭄이 들면 군민들은 가장먼저 이곳을 찾아와 땅을 파헤쳤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이 남몰래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한다.

 

그런 이곳의 금성산 자락 수정계곡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감돈다는 산운(山雲)마을이다.

 

 

 

운곡당

 

 

의성에는 오래된 고택과 회화나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통마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운곡당, 소우당, 정우당, 학록정사 등 지정문화재와 전통가옥이 유명하다.

 

앞서 운곡당을 찾았을 때는 이 댁 어르신(자부)이 계셨다.


시어머님이 뒷마당에 앉아 금성산 자락을(부군의 묘소) 바라보며 늘 앉아계셨다는 의자며~
이 마을 중 고가중에 대표적인 건물이라는데, 그 아름다움에 넋을 앗겼는데..
운곡당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번길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싶었으나 대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해설사는 더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쉬움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나오다.
 

 

 

 

 

 

 

 

 

 

 

 

 

운곡당에서

 

 

명 칭 :  운곡당(雲谷堂)
소 재 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58
(원소재지 :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158)
건 축 주 :  이희발(李羲發, 1768~1849)
건축시기 :  1800년대 초기
소 유 자 :  이병직(李炳稷)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

건축 이야기
이 건물은 현 소유주 이병직의 6대조인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1768~1859)이 영월부사로 재직하던 1800년대 초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는 집이다. 안채는 60여년 전에 일부를 다시 지었다. 북쪽에 솟은 금성산을 뒤로 하고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으나, 이 마을의 고가옥 중 대표적인 건물이라 볼 수 있다. 예전 안내판에는 ‘현 소유주 이목의 5대조’라고 하였는데, 이목은 이병직의 아버지이고, 운곡당의 현판을 쓴 이홍은 이병직의 할아버지이다. 운곡 선생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순종(純宗) 3년 계해(癸亥) 즉 선생이 36세 되던 1803년에 ‘정침(正寢)을 세우고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03년으로 볼 수 있다. 61세가 되던 1828년에 ‘거실에 정재(定齋)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였다.

건축 특징
최근에 복원한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囗’자형(字形)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정침의 양측 칸은 전면(前面)으로 익사(翼舍)가 돌출되어 대문채와 함께 ‘日’자형(字形)의 배치형태를 이루게 하였으며 정침의 좌후측(左後側)에는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중문칸 앞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 ‘ㄴ’자형(字形)의 차면담을 설치하였다.

건축 구성
건물은 간단한 민도리집으로 안채에 사랑방, 고방 등이 한 동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평면구성은 ‘ㅁ’자형인데 앞채의 좌우에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집의 한 유형에 속한다. 안채의 왼쪽 뒤쪽에는 사당이 있고 문간채는 조선말기에 화적떼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2002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사랑대청의 윗부분은 5량가구로 꾸몄는데, 초각한 대공을 두는 등 안채에 비해 격을 높였으며 비교적 규모가 큰 살림건물로 1920년대에 일부 개축되었으나 산운마을의 고가옥 중 대표적인 건물이라 볼 수 있다. 평면 형태는 ‘ㄷ’자 형태의 안채와 그 앞 좌측에 ‘ㄱ’자형의 사랑채, 우측의 ‘ㄱ’자형의 고방채는 중문간을 통해 연접되어 ‘ㄷ’자형을 이루어 안채와는 상하 병렬로 연결되어 있다.

현판
운곡당(雲谷堂)
운곡당(雲谷堂)이란 현판이 두 개가 있는데, 운곡당 건물에 걸린 현판은 현손(玄孫) 이홍(李鴻, 1887~1972)이 쓴 것이고, 대문에 게시되어 있는 현판은 을사년(1965년) 12월에 현손 이태완(李泰完)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태완은 이홍의 옛날 이름이다.
정재(定齋)
현손 이홍이 썼다. 운곡 선생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1828년에 거실(居室)에 정재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중 이야기
-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던 운곡당
이 운곡당이란 건물은 관리인의 조부인 이홍(李鴻)이란 분이 양진사숙(養進私塾)이란 이름으로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일제 치하에서 학동들을 모아서 교육하였다고 한다. 운곡당과 담을 이웃하고 있는 점우당(漸于堂) 대문 앞쪽에는 1999년 4월에 건립된 ‘자헌대부형조판서시희정공운곡이선생신도비(資憲大夫刑曹判書諡僖靖公雲谷李先生神道碑)’가 있는데, 전면의 큰 글씨는 광산인(光山人) 김택진(金澤鎭)의 글씨이고, 4,000여 자의 신도비문 글씨는 대종손(大宗孫)인 이시하(李時夏)가 썼고, 5대손 이목(李牧)이 감수(監竪)하였다. 신도비를 세우면서 문중에서 <희정공운곡선생연보(僖靖公雲谷先生年譜)>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가문에 대한 긍지를 고취시켰다. 이 책자에는 운곡선생의 연보(年譜)뿐만 아니라 신도비명(神道碑銘)까지고 우리말로 풀고 한문 원문도 곁들였다.


관련유물
- 운곡집(雲谷集)

운곡 이희발 선생의 문집인 『운곡집(雲谷集)』 권11에 실려 있는 <운곡서당개기고유문(雲谷書堂開基告由文)>이란 글이다. ‘개기고유문’이란 묘소나 집 지을 터를 정하고서 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이 땅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겠으니 앞으로 잘 보살펴서 아무 탈이 없도록 해 달라’고 아뢰는 글을 말한다. 이 글은 운곡 이희발 선생이 운곡서당이란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마련한 뒤 건물을 세우기 전에 신에게 아뢴 것이다. 크게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에서는 이 땅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형세를 말하였고, 둘째 부분에서는 자신이 이곳에 서당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이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고 아껴주었으니, 복잡다단한 세속의 티끌에서 벗어나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삶의 지표를 말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고유문의 끝에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좋을 날짜를 골라서 이와 같이 아뢴다는 내용이다. 이 글이 운곡당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운곡 선생이 세운 서당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에 소개한다.

금성특립(金城特立) 금성산이 우뚝 솟아서
진아소읍(鎭我韶邑) 우리 의성을 어루만지고
일록남주(一麓南走) 한 기슭이 남쪽으로 달려
기종영숙(氣鍾靈淑) 신령하고 맑은 기운 모으니
용반계포(龍盤鷄抱) 용이 서린 듯 닭이 품은 듯
향양개국(向陽開局) 남쪽을 향해 형국을 열었네
간비백사(慳秘百禩) 오래도록 아껴온 이유는
유대금일(有待今日) 오늘의 일을 기다려서니
자영소축(玆營小築)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서
이부여년(以付餘年) 남은 인생을 보내려네
포각속용(抛却俗冗) 속세의 티끌 씻어버리고
수습잔편(收拾殘編) 성현의 말씀 읽으리니
초서지졸(鷦棲之拙) 작은 거처는 초라하더라도
녹문지안(鹿門之安) 녹문산처럼 편히 지내리라
유신수척(維神垂隲) 신께서 돌보아주시어
영보우한(永保優閒) 영원토록 편안케 하소서
자이길신(玆以吉辰) 이에 길한 날짜를 택하여
근고궐유(謹告厥由) 삼가 그 사유를 고합니다

녹문산(鹿門山)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후한(後漢) 시대의 은자(隱者) 방덕공(龐德公)의 고사이다. 방덕공은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처자를 데리고 이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 생을 마쳤다. 당(唐)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맹호연(孟浩然)도 이 산에 가서 숨어 산 적이 있다.

 

관련인물
- 삼조(三朝)의 명신 형조판서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1768~1850)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초명(初名)은 영발(英發)이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자암 이민환의 6대손으로 학성(울산)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경주 하곡(霞谷)의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문하에 들어갔는데, 선생께서 이르기를 “군의 학문은 천성이라 할 수 있으며 반드시 대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곡에서 고향인 수정암(水淨庵)으로 돌아와서 22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했으나 친상을 당해 3년의 집상을 마치고 정조 을묘 식년시(1795년)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초계문신으로 특선되어 6년 동안 봉직하였다. 예조, 병조좌랑, 정언, 지평, 장령, 동부승지, 대사간, 병조참판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영월부사, 한성좌우윤을 거쳐 형조판서로 벼슬을 마감하였다. 80세에 기로소에 들었는바 정조, 순조, 헌종 삼조를 섬긴 명신이다.
초계문신으로 있을 때 호학(好學)하는 군주 정조의 총애는 남달랐다. 왕이 말하기를 “학문이 깊고 의리가 분명함에 앞으로 기대함이 크다.”고 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전정, 군정의 문란함과 매관매직, 과도한 세금과 부역 등을 줄이는 국정쇄신에 관한 상소를 자주 올렸으며 외직으로 있을 때는 탐관오리의 수탈을 막고 학풍을 진작시키는 등 이름 있는 목민관이 되었다. 부임하여 다스리는 고을은 인근 유민(流民)들이 몰려와 항상 호구가 불어나고 사풍(士風)이 일신되었다. 영월부사 때는 봉록을 털어 양사재(養士齋)를 지어 강학에 힘썼는바 이 고을의 학풍을 진작시켰음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검소하고 청렴하여 그 생활은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관리의 귀감이 되었는바 82세에 형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조선후기 남인학자에게 이런 은전을 베푼다는 것은 오직 공의 불편부당한 처신 때문일 것이다. 희정(僖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으로 『운곡집(雲谷集)』22권이 있으며, 「용학강의(庸學講義)」와 「주서고식(朱書故寔)」은 왕명에 의하여 정조의 문집인 『홍재집(弘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금성면 산운리 점우당(漸于堂) 대문 앞쪽에 1999년 4월에 건립된 ‘자헌대부형조판서시희정공운곡이선생신도비(資憲大夫刑曹判書諡僖靖公雲谷李先生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판서(判書) 홍우순(洪佑順, 1791~?)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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