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는 잘 모르지만 나는 미수 허목의 팬이다.

미수 허목의 서체를 안동여행에서 하회마을  예안이씨 충효당에서 만나고는

입이 헤~ 벌어지며 기분이 급 좋아졌다.

씩씩하게도 그를 찾아 군사분계선까지 군인을 하나 달고 찾아가지 않았던가?

 

충효당

예안이씨 충효당은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준교이다.
예안이씨 충효당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이홍인의 충과 이홍인의 8세손
이한오의 효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을 띤 유서 깊은 집이다.

 

 

대문이 어디있지?

집안으로 출입하는 기와 얹은 토담이 트여 있는 곳의 모양이 재미있는데,
왼편은 토담이 허물어진 듯 절개된 면이 가지런하지 않지만 오른편은 담장이 마당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감겨 있다.

나선형으로 감겨 있는 담장 안은 화장실이다.

 

 

담장안을 들어오니 솟을 대문이 또 따로있다.

마주보이는 곳이 충효당 본채이다.

 ▼

 

눈에 띄이는 여러게의 소화기만 봐도

충효당 가치의 무게를 알 것만 같다.

보물 제553호

 

 

현재 후손이 충효당 왼켠의 또 다른 담너머 안채에 기거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분위기가 그윽하다.

 

 

장마철이라도

그렇게 (습기로)누지진 않겠다.

습기를 피해 전체 돌을 쌓아 지은 것이 꽤나 보기에도 좋고

실용성도 있어보인다.

 

 

 

충효당 현판은 정침의 사랑마루에 게첨되어 있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미수의 전서체가 아주 재미있다.

충성충忠은 가운데 받들어 모시는 태양 즉 임금을 뜻하며

효는 孝 노인老을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며

집당堂은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형상의 전서체가 볼수록 그림으로 다가오듯 재미있다.

 

미수를 꼭 만나보러

나는 2009년 2월에 연천군 왕징면 군사분계선

안에 있는 미수의 묘역을 찾았다.

 

미수 허목을 만나보다. http://blog.daum.net/yojo-lady/13745268
미수 허목'의 생애와 '척추 동해비' http://blog.daum.net/yojo-lady/12420754

 

 

예안이씨 충효당
종목 보물 553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안채

 

주소 경북 안동시 풍산읍 우렁길 73 (하리1리)
전화번호 054-858-4768

 

 

 

청암정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걸린 '청암수석(靑巖水石)' 허목의 마지막 절필▲

 

허목선생은 호가 미수여서일까?  우연일까?  88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

(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보물 제592-1호 
 동해비첩(東海碑帖) 

 

조선시대 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이다.

허목은 전서체에 뛰어난 유학자이며,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매개체역할을 하였다.

동해비는 본래 ‘척주동해비’로 현재 삼척군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은 많이 유포되어 있다.

원래 동해비의 글씨는 현재의 비보다 더 컸는데 파도에 침몰되어

선생이 따로 작은 글씨로 써둔 것을 보고 다시 새겼다. 크기는 가로 32.7㎝, 세로 50㎝이다.

이것은 허목의 전서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금석운부*

 

*고문운부*


 

 

경북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청암정에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

충재박물관에 있는 원본

 

 생전에 써 두신 전서체의 비문으로
일월석(日月石)이라는 귀한 흰 돌에 새겼다 한다.

 

6,25동란중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난무하다.


문인석은 연천에 있는 돌은 아니고 삼척에서 가져온 강원도 해안지방의 돌이다.
멀리 남해안을 돌아 임진강으로 실어서 이 곳까지 가져온 돌이라는 설이 있다.

 

 

미수 허목과 우암송시열의 일화

 

또 한 예화로는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연천군 홈페이지 http://www.iyc21.net/_yc/tour/a06_b05_c03.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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