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의 소나무도 공부를 한다? 라는 뜻의 소혼대 소나무도 서원 담장너머로 기울어져 있다.

 

가을이라 하지만 아직은 녹음이 짙은 초가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경북 영주시에 있는 소수서원1을 다녀왔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2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조선 중종37년)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소수서원명륜당, 일신재, 직방재,등이 한참 보수공사중이어서

그렇게 구석구석 상세하게는 살펴볼 수가 없었지만....

어느 한 군데 할 것없이 아주 문화재적 가치가 많고 그 이야기가 무궁무진한지라

감히 어느 부분서 부터 풀어서 필설로 이어가야 할지 난감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나마 다녀온 그 감흥마저 사라지기 전에

미흡하나마 느낌대로 차근차근 요약해야겠다.

 

 

이 곳은 소수서원의 공원, 즉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잠시 머리를 식히던 곳으로,

소혼대(消魂臺)라 불리워지며

유생들의 머릿수대로 소나무가 심겨져 있다한다.

 

 

옮겨쓰자면,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자리로서 <안연소혼자 유별이이의>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詩 <별부>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려말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에 보이는 <숙수루/宿水樓>의<별대>로 比定이 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부다.

국가가 지원했으니 공립의 대학교인 셈이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해설사님을 통해서 절반은 듣고 절반은 흘려도...

얼마나 무궁무진 재미가 나던지...석달하고도 열흘을 다뤄도 끝간 데가 없을 지경이다.

나는 언제나 뒷이야기가 관심사다.

 

 

 

  소수박물관3


박물관 또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사액[賜額]4 으로 받은 현판

소수서원(紹修書院) -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현판(탁본용)을 탁본뜨다.
 

 

실제 현판이나 비석의 탁본은 아니고 탁본이 어떤 것인지 일러주기 위한 양각의 글씨에 손 쉽게

먹물 방망이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 (비석이나 돌에서)탁본을 뜨면 음각위에서 행해지므로 글씨는 하얗고 종이에 먹을 자근자근 묻히면 되겠다.

무슨 탁본이든 그 자체에 바로 먹물을 발라 뜨지는 않는다.

먹물도 화학품이므로 오랜세월 풍화에 시달려온 모든 사물은 독한 먹물에 바스러지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발달하지 않던 옛시절에 탁본을 통해 귀한 글씨를 채탁해 서첩으로 꾸며 글씨 연습에 이용하기도 하고,

표구를 해서 걸어두기도 했다 한다.

 

 

 

탁본요령

 

1/탁본판,수건, 솔에는 절대 먹물을 묻히지 않는다.
2/탄본판에 종이를 얹고 분무기로 적당히 물을 뿌린다.(지면이 매끈한 쪽이 윗부분)
3/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다.
4/탁본판의 글씨가 도드라지도록 수건으로 꾹꾹 눌러준다.
5/작은 글씨나 세밀한 부분은 솔로 가볍게 두드린다.
6/먹물을 묻힌 솜방망이를 다른 솜방망이나 종이에 두드려 농도를 엷게 조절한다.
7/솜방망이로 탁본판 글씨를 따라 골고루 두드려준다.
8/완성이 되면 살며시 떼어내어 말린다.

 

 

오른쪽 敬(공경할 경)자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다.

소수서원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는 물 가 바위에 새겨진 '敬' 글을 탁본해 두었다.

이  한 글자에 아주 재미나고 비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한다. (다음글로~)

 

 

실은 솜방망이 둥근 자국이 나지 않게 깔끔하게 떠야 옳은데...

 

 

탁본의 떠 오는 게인의 의미는 글을 쓴 사람의  글씨를 직접 뜨므로

글씨속에 내포된 정신세계까지 엿보려 함이다.

그런데..마지막 '명종대왕'의  중요한 낙관을 제대로 못찍었다는 점이다.

 

 

흔히들 낙관을 서예나 그림을 그리고 찍는 도장만을 이름하는 줄 흔히 알고있지만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 말입니다.

글씨를 쓴 사람의 연대와 호등을 간단하게 쓰는 것을 총칭 아우러 말함입니다.

 

 

소수서원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연이어 쓸 생각입니다.

 

글/사진:이요조

 

  1.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 사액한 것이 시초이다. [본문으로]
  3. 영주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한 공간인 셈이다. [본문으로]
  4.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조정에 상주하여 명종(明宗) 임금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을 받는데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함 [본문으로]


 


 

 

拓本이  왜 필요한가,,

 

탁본이란,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음각 또는 양각되어있는 글자나 무늬등을 원형그대로 종이에 찍어내는것을 말합니다,또,탑본이라고도 하지요.
 
어릴적 필통뚜껑에 연필로 그대로 그어본 경험,

이것이 탁본의 일종인 건탁법에 해당하는 기법입니다,


프로타쥬(frottage) 기법인데  그 대상물은 비단,,어릴적 필통뿐아니라,

상당히 다양한곳에서부터 오래전 사용해왔음을 알게됩니다,

 

기와·벽돌·고비(古碑)·판비(板碑)·기념 비·문학비·묘비·조종·마애불·날밑·솥 전·도명(刀銘)·벼루· 등이 그 대상이 됩니다,


엄격히 꼭 말한다면,  책으로 장포(裝袍)된 것만 탁본이고

석각의 탁인(拓印)은 탁편(拓片)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어떻게 부르든,,

우리는 고유적인 사물에 대하여,원초적으로 파고 깍고,기록해놓은것들을,

시간이 흐르면서 뿌리를 찾고 싶어하거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고 싶어하는

바가 있으니. 이에 가장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남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탁본을 손쉽게 예를 들수있습니다,


글자의 점·획 등 미묘한 부분까지 본래 크기로 볼 수 있으므로 고고학이나 비문·종명(鍾名) 등의 문자·문장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 분야에 중요한 자료이며 방법이 아닐수 없지요?

 


또한 흰색과 검은색의 단색으로 표현되는 간소한 미(美)는

채탁자(採拓者)가 어떤이가 하는가..

 

또는  먹의 농담,,즉, 먹을 갈아서 拓을 하는가. 아니면,그냥 성의없이 먹물로 하는가에 따라, 그 탁본의  품격을 잴수있겠죠,,

 

날씨 및 그 밖의 조건에 따라 한 장 한 장의 완성된 모습이 다르고,

수(數)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그 원시성이 예술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될수있다는것은  매우 흥미롭지 않을수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여러곳에 파생되어진 비문이나,유물들을

탁본자가 모두 탁본을 해서  한곳에 집약적으로 전시를 해놓는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감상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여러곳의 역사적 유물들을 한곳에서 감상할수있으며,

더욱 가치가 있는것은,탁본을 해놓은 대상물이

 

천재지변이나,누군가에 인위적으로 파손되거나, 천둥벼락에 소실되었다고 보면,

우리가 해놓은 탁본의 가치는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가 될것입니다,

돈으로 따진다면,,음,,,로또를 맞았다고 할까요?^^

 

탁본이.꼭 비석이나,유물만으로 국한된것은 아닙니다,

 식물의 잎이나 나뭇결·나무껍질의 자연의 조형미를 감상하는 엽탁(葉拓)도 탁본의 일종입니다,

고대의 비석과 유물들은 그 파손범위가 다양해서 고도의 정밀 사진촬영으로도 그 재현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간단히 먹과 종이로 그 기록을 보존할수있는것이기에더욱 가치가 큽니다,

그래서 대학교의 사진학과 학생들은 탁본의 학문을 연구하기도 하더군요,


중국에서는 원래 6세기말 수나라때부터 이런 탁본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어떤이는
탁본의 유래는 남북양조 시대부터, 또는 후한 시대 종이가 발명된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지요,

문헌사의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5세기 말엽부터 탁본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탁본은 인쇄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성행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라하니..그 시기는 정확히 구분해보아야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진적(眞蹟)을 지본묵서(紙本墨書)로 복제할 경우

,

농자(籠子;둘레의 윤곽만 베낀 글자)를 떠내어 윤곽 속을 먹으로 칠하는 쌍구전묵(雙鉤塡墨)이 일찍부터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런것을  모본복각(模本復刻)도 활발히 행해졌습니다,

 

둔황[敦煌(돈황)]석굴에서 발견된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온천명(溫泉銘)》 탁본에 영휘(永徽) 4년(653)이라는 묵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이 무렵에 탁본기술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탁본을 떠서 책으로 만들었다는이야기입니다,

 

비석에서 직접 떠낸 탁본과 그것을 또 한 차례 돌이나 목판에 새기고 탁본으로 만든 게 있는데, 앞의 것을 원탁(原拓), 뒤의 것을 모본(模本) 또는 모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탁본을 절본(折本)으로 만든 것을 법첩(法帖)이라고 하며, 사실,,

서예가들이 주로 법첩을 보며 공부하는것이.모두 이런 탁본책이 아닐수없습니다,

요즘 법첩들은 예전과 달리  탁본 원본법첩을 또 인쇄하고 또 복사해서,

가의 원본과 틀린 법첩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수있습니다,

서책을 팔아먹기위한 것에만 열중하다보니..그렇겠죠?

.

그러나 실제 탁본이 성행한 것은 금석학(金石學)이 발달하였던 송나라 때부터가 좋은 공부가 될것입니다,

송나라때 편찬된  금석록 30권의 목록서가 전해집니다,

 

 

금석학은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해석하고 연구하여 서체, 문체를 분석하는 학문인데 금석문을 요즘엔 꽤 서예가들이 공부하는것 같습니다,

 

탁본을 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처음에는 서체를 익히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으니.. 전문적인 서예가들이 없어지고 현대서예에
미술적 가치만을 공부하는 요즘 더욱 그 방법이 쇠퇴기에 이르는것이 당연하겠죠,,

 

지금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탁본하고,우리의 서체나 역사에 대해 바로 인식하는 학문의 기틀을 잡는데 주력했으면 합니다,

 

탁본은 금석학을 연구하는 고고학자, 문학가,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서체를 연구하는 서예가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술입니다, 다만,요즘에  세워진 비석이나,비문은 모두 기계로 파낸, 컴퓨터 서체로 만드는것이 참으로 안타까운것이.

모두 쉽게 쉽게..비석을 세우는것을,,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비문을 세우는것은 그 사람의 공덕이나,역사적 사실을 미려한 문체로 작성해서,

좋은 서예가의 필체로 서사를 받은후, 그를 그대로 刻하는것이 옳으나,

요즘은,,어찌된일인지.그저,,아무렇게나 파서 세우면 되는것이 되었으니..

개탄할일이 아닐수없습니다,,의미가,없어졌다고 봐야죠,,

 

 서예가들에게는 옛 선현들의 서체(書體)를 오늘에 되살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고, 역사가들에게는 옛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는데.이런,원천적이유가 없어진다면,,붓을 잡을 이유가 점점 없어진다고 봐야죠^^

 

 과거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역사적 기록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마멸되고 사라졌습니다,

 

다만 탁본을 통해 남은 기록들만 과거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이는 3천년이지난,,오늘에 와서 밝혀지는,대단한,,,흐름이 아닐수없죠..

 

 만약 금석문을 한 자 한 자 베낀다면 오자(誤字)나 결자(缺字)가 생길 수 있으나 탁본을 하면 이러한 염려는 없습니다,

나아가 아무리 읽기 어려운 금석문이라도 탁본을 하여 놓고 보면 해독하기가 쉽고,

 이런 탁본은 금석문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인거죠,,

 

금석학은 인류가 남긴 유물 중에서 새겨진 연대에 의거해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우리가,나이가 들어 부모의 역사와 조상의 발자취를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는기록을 남긴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학문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너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건 아닌지...^^

우리는,

금석류에 문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은 고대로부터 행해져왔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금석문 연구는 고고학적 목적과 서체의 연구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학자들이나 호사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취미로 하고 있는것은 널리 알려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탁본을 응용한 기술이 바로 어탁(魚拓)이며,

 

일상생활에서 취미탁본으로 활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기술인 어탁은 큰 고기를 낚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체를 영원히 기록하는 기술인 거죠,.

이외 어떠한 대상물이든 요철이 뚜렷하면 채탁이 가능합니다,

 

  탁본이 성행하게 되고 지금까지 적게나마 문헌으로 남아 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수많은 금석학자와 서예가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수없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금석문 보존을 위해 우리 모두 애써야 할 것이며, 현재 자신이 위치한,,고향이나,주변에 보존되고 있지않은 유물들을 탁본해놓는것은 후대에게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아닐수없습니다, 꼭,,,사진 찍어야만,,판독이 되는건 아니죠^^

 

탁본을 이야기하자면 중국을 논하지 않을 수 없기에 잠시 중화문화를 살펴봅니다,

간단히 기술하자면,

중국은 은시대부터 갑골문자와 종정문(鐘鼎文)이 불완전한 문자부호로 사용되었고

서주시대에 종정문자가 진시황의 천하통일 후 급격한 대전(大篆)문자로 발전했으며,

 한 대의 예(隸), 위, 진, 남북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자가 단순한 부호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갑골문자나 종정문의 탁본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마멸되고 사라졌가

 간간이 적은 양이 출토 되어 육안으로 분간키 어려운 것은 탁본으로 판독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남해 금산의 거북바위의 상형문자는 가까운 나라들의 상형문자나 갑골문자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은것을 알수있습니다,

 

 이들은 자형의 동일성과 거북바위라는 점, 거북등에 새겨진 문자의 배치성을 주목할 만합니다,

 

 어쩌면 쉽게 판독될 것 도 같은 거북바위의 문자는 회화성 또한 배제할 수 없고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은 점을 생각할 때

 

한층 문자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중국의 문화는 크게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로 나눌 수 있으며,

옛날 중국 북쪽의 종이는 무늬가 옆으로 들어 있는데다 바탕이 두껍고 거칠어 먹이 잘 받지 않았답니다,,

먹은 송연먹을 많이 썼는데  소나무 그으름을 이용한 먹이지요, 가능하면,,탁본을 할때 갈아서 하시는게 좋습니다,

갈아서 탁본을 하게되면,

그 빛 또한 푸르고 엷으며,작품성도 있으니 일석2조죠^^

 

금석에 칠할 때 유납(油蠟)을 섞지 않기 때문에 북탑(北榻)은 빛이 엷고 무늬와 주름이 있어 마치 엷은 구름이 청천에 흐르는 것 같아 협사(夾紗)라든가 선시탑(蟬翅榻)이라고 불립니다,또는 협사탁,선시탁,오금탁이라는 말은,탁본 빛깔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말입니다, 선시탁법은 일본에서 잘 사용하고 우리나라는 자주 사용치 않습니다,

 

그중에 오금탁이라는 말은, 까마귀 烏 字를 써서  문자외에  종이면을 새까맣게 채탁하는 방법입니다,이때 전체 색깔이 동일하게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선시탁이란,蟬 (매미선)字를 써서 매미의 날개와 같다고 합니다,

둘다 장단점이있지만, 선시탁은 반대로 문자의 주변이나 글자만, 엷게 먹색으로 탁본하는 방법이니. 감상 가치는 선시탁이 더 좋와서, 많이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그외.인주탁(印朱拓)....색탁, 집자법 등은,모두 물감의 원료나 다른 방법의 탁본일종입니다,

 

 

반면에 남쪽의 종이는 무늬가 세로로 들어 있고 먹은 유연을 쓰며 납과 오금지를 섞어 물에 두들겨서 비문에 바릅니다,

 그러므로 빛은 순흑이며 광택이 있어 오금탁(烏金拓)이라 불렸다고 하는군요

 

요즈음은 학문을 하는 이나 서예가들은 많으나 금석에 대하여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는 적습니다,중국의것이기는 하지만,,중국것을 알아야,,우리것도 하지요,,^^

 

 사람이 글씨를 배우자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여럿 있습니다,

 

자체(字體)와 형세 전측(轉側) 결구(結構)를 연구하되,우리는 그당시 선인들이

남겨놓은 수백년시대동안 내려온 필사를 직접 온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은,,매우 조심스럽지 않을수없습니다,,경건한 마음이죠^^

 

참다운 고법(古法)이 가진 서에의 맛과 멋을 추구하려면

비(古碑)와 탁본을 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뜨거운 물인가 찬 물인가는 마셔본 자만이 알 수 있다 "라는 옛 스님의 말씀은 이를 두고 이르신 것같습니다,

 

오래전 발견된

울진 봉평신라비,

영일냉수리비,

야고비는 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며 하루속히 완독되어 새로운 기록으로 역사에 올려지길 바라마지 않지요? 제대로 완독되길,,바랍니다,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영원히 빛낼 유산이다!!라고 말하지만,,,,내곁에있야,,내거죠,,

일본녀석들,,등살에..못살겠습니다,,

 

 중국은 예부터 탁본을 중요시하여 탁본한 것을 금과 맞바꾸었다고 할 만큼 귀중하게 취급하였답니다,,

여하튼,,이제 탁본의 중요성을 알았으니..탁본방법이나 말해보죠^^

탁본에는,

 

건탁(乾拓)과 습탁(濕拓)이 있습니다,

앞서말했듯이.

동전이나 메달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심을 비스듬히 뉘어 문지르는 방법으로, 원물 위에 종이를 대고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누른 뒤 탁본먹으로 구석구석 남김없이 문지르면 높은 곳은 짙게, 낮은 곳은 묽게 찍힙니다,

 

이것이 건탁이며,

 

습탁은,

소품이나 섬세한 무늬가 있는 것, 또는 적실 수 없는 목각작품 등에 주로 쓰입니다,

 

원물 표면에 댄 종이를 위에서부터 물을 발라 붙이고,
먹이 묻은 탐폰(가죽이나 헝겁으로 싼 솜방망이)으로 두들겨 모사하는 방법입니다,


(탐폰 만든것, 예시)

 


1.탁본의 순서
 ① 원물의 치수를 재고, 진흙이나 먼지를 털어낸다. 다만, 이끼 등은 되도록 그대로 두고 현상태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② 화선지를  탁본할곳의 크기보다 조금 크게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비면에 대어 솔로 물을 바르거나 분무기로 골고루 적십니다,분무기가 없으면,

솔에다가 물을 묻혀서 문지르세요,,

 



그리고 물을 묻히기전에

 

네 모퉁이를 셀로판 테이프로 가볍게 붙여 놓으면 일하기 편합니다,

다만,유적지마다,, 테이프 등 점착제 사용을 금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테이프쪽은 물을 묻히지 마세요,,떨어집니다,,(조심조심)

 


 ③ 비면과 종이 사이에 생긴 기포를 문자 속이나 비면 밖으로 밀어내어 종이를 비면에 밀착시킵니다,즉, 물을 묻히고 난후 다시 화선지를 손으로 들어서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정확히 뗬다가 다시 붙히는겁니다,

 여기에는 나사(羅紗)나 적신 타월을 단단하게 말아서 사용할수있는데요,

수건이 제일입니다 꾹꾹 눌러주세요,


 ④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마른 헝겁을 비문 전체에 감싸 덮는겁니다,


그리고,  옷솔로 직각으로 두드립니다,그이유는 비문의 양각이나 음각의 홈에

화선지가 확실하게 세세히 붙어버리도록 하는거죠, 다다다다다,,,이때가 제일 신나지만,

팔이 아플겁니다,,그래도 천천히 세밀하게 홈을 두들겨주세요

 

 

 


⑤ 종이에 어느 정도 습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되면, 탐폰으로 채탁합니다,

 


위의 비문은 성종대왕 어필본을  채탁하는과정인데

위부분에 조금 하얗게보이는 부분이있을겁니다,적당히 말랐다는거죠^^

 

이제 드디어 탁본이 시작되는겁니다,

 



탐폰은 2개를 가지고 한쪽 탐폰에 먹을 묻히고 다른 1개와 맞비벼 먹물을 알맞게 조절하며,

남은 종이로 농도가 확인되면 재빠르게 지면 전체를 두들겨 나가는데.

보통 초보자들이 실수하는건 먹물을 너무 많이 찍는다는겁니다,,아주 엷게 시작해보세요, 찻잎이 권장하는 방법 키포인트,, 아주 부드럽게 두드린다^^

 

 

 

처음에는 엷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두들겨 먹의 농도를 고르게 합니다,

 한참을 고르게 두드리는데.

중요한것은 비석의 원몬 크기대로 모두 탁본을 하시기 바랍니다,

글씨만 나왔다고 그냥 멈추는분이있거든요,

원본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비문의 원본 크기를 알수있도록 모두  채탁을 하시기 바래요


 ⑥ 이제 모두 두드렸고,완벽히 끝났다고 생각하면,

조심스럽게 뗘내세요,,

 


 


2)준비물


⑴ 종이:건탁에는 반수(礬水)처리를 한 얇은 미농지가 좋고,

습탁에는 일반적으로 화선지를 사용한다.

 중국산 화선지는 풀기가 있어서 탁본에 가장 알맞은데.요즘은 탁본지가 나온다는군요,

 


⑵ 먹:건탁의 경우 탁본묵[石花墨(석화묵)]으로 문지른다.

 

습탁에는 유묵(油墨)을 사용한다.

한 두 장 떠낼 정도면 품질이 좋은 먹을 짙게 발라 사용합니다,,아끼지 마세요^^

 

 전문가는 식물성기름과 매분가루를 끓여, 여기에 잘게 썬 낡은 솜을 섞어 갠 묵육(墨肉)을 사용하는데. 백납이라는 한약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구하기는 어렵죠^^

 

 먹즙은 얼룩을 만들고 물이 닿으면 번지므로 탁본에 부적당합니다,

일반 시중에서 파는 먹물,,가능하면 쓰지 마세요,,


⑶ 탐폰(tampon):솜을 헝겊으로 싼 것으로 먹을 묻혀 지면을 두드리는 데 쓰입니다,

맨앞에.사진 올려놓았습니다,

 

 헝겊은 풀기 없는 견직물이나 홍견(紅絹)이 발이 가는 화학섬유가 좋습니다,세밀하게 찍히거든요,

 

 또한 삼베 같은 거친 헝겊을 써서 특수한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속에는  좁쌀이나,쌀을 이용하기도 합니다,저는 좁쌀을 주로 씁니다,

솜은 금방 뭉그러지거든요,

 

 밑동쪽에 동그랗게 자른 두꺼운 종이를 얹고,

헝겊에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조여당겨 끈으로 밑동을 단단히 맵니다, 테이프도 좋와요,

 

 별도로 솜이나 헝겊을 막대처럼 만든 것을 손잡이로 해서, 조여맨 중앙부에 붙인다.

 

손잡이는 쥐기에 알맞은 길이로 만든다. 탐폰은 대(지름 7.8㎝) 2개, 중(지름 5㎝) 1개. 소(지름 2㎝) 1개를 준비한다. 큰 면은 큰 탐폰을 사용하고 가는 윤곽은 작은 탐폰으로 두들긴다.

 

★주의: 탐폰을 만들때는,탁본을 하고자하는 대상물에 따라 크기를 정합니다,

아주 세밀한것은 아주 작게 만들어야하기 떄문이죠,

 


⑷ 기타:솔은 털발이 길고 부드러운 것을 선택합니다, 손잡이 달린 옷솔이 최고입니다

 

 두들기는 솔은 털발이 짧은 것으로 양복 브러시 등으로 대용할 수 있다.

 

 습탁에는 물이 필요하므로 물통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2인 1조 3인1조로 함께 탁본조를 짜서, 함께 떠나시면,,

각각 준비물을 분담하세요, 물통과 분무기.탐폰준비, 벼루준비.붓준비.

등등,,

 

 

☆간탁(刊拓)의 시기
탁본의 간탁(刊拓)에 알맞는 기후는 봄, 가을로

 청명(양력 4월5일)후와 하지(6월 21일) 전,

추분(9월 22일) 후,

 입동(11월 7일)이 적시라 합니다,

사찰에서는  목판경의 인출을  이시기에 좋다하니.. 이때가

판본을 상하지 않게 채탁하는 시기이며,여름이나 겨울에는, 판본이 얼거나,불어터져서

쉽게 원본이 상하는경우입니다,

여름철의 직사광선을 피하는것이 좋고,겨울이나,비오는날을 피해하는것이 당연하겠죠ㅡ,

바람도 적은 날이 좋습니다,,(좋은날,,택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이 좋와요^^

 

이때가 인사(印寫)함에 판본과 돌이 잘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먹도 갈아 쓰기에 좋고 일하기도 가장 좋기 때문이다

 

 

★ 정말 주의사항 한가지..

 

비문과 문화재는 모두 허가를 받아서 탁본하는것이 원칙입니다,,

꼭  당국(?)의 허기를 득하셔서 하시기 바랍니다,,

간첩으로 오인되면 큰일이지요^^

 

★각종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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