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안면도에는 천년 역사의 소나무가 있다.

바로 안면송이라는 쭉 뻗은 토종 소나무(금강송)이다

태안의 안면송을 처음 알았다.

동해의 춘양목이나 금강송등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서해에도 이리 곧은 토종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해송이나 흑송으로 불리는 곰솔과 달리 안면송은

바닷가에서 자라면서도 줄기가 곧고 곁가지가 드문 적송이다

쭉 곧게 자라올라서 재목으로는 손실도 없겠다.

맨 위엣 부분은 파라솔처럼 솔잎이 창정한 것이 좀 특이했다.

안면도에 있는 산림전시관도 둘러보고

숲해설사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처음 배우는 신기한 사실들~~

아하!!

안면송 숲길을 걸으며 힐링!

해풍을 먹고 자란 안면송은 재질이 강하고 속이 꽉차 경복궁을 짓는데도 사용되는 등

높은 품질을 인정받고 . 고궁 재건과 남대문 복원에도 사용된 소중한 재목인데

숭례문 복원공사에 많은 나무가

안타깝게도 목수에 의해 1/10만 쓰이고 나머지는 그의 배로 들어갔단다.

역시 소나무 재질이 뛰어나다.

황장목 하더니....이래서 임금님의 관으로도 씌였나보다.

색깔도 좋고 결도 아름답다.

안면송 소나무는 토종인데도 다들 쭉쭉 곧아있다.

안면송은 잎이 주로 꼭대기에 달려 있다.

위아래 둘레가 비슷한 붉은 줄기가 곧고 매끈하게 뻗은 모습이..해안선을 따라길게 늘어서

빼어난 절경으로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안면송은

곤파스의 영향으로 7,500여 그루가 초토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는군요!! 

 

서해 황금열차(G_Train을 타고 태안에 가기위해 홍성역에 내린 여행길이다.

 

 

홍성역 입구 중앙에는

이 곳 출신 4분의 훌륭하신 충절을 기렸모셨다.

쭉쭉곧은 소나무가 바닷바람을 막아준 탓일까?

만해 한용운님은 일제의 서러움을 한탄하다 속세를 떠나셨지만

그 외 세 분은 다 의로운 죽음을 면치 못하셨다.


 


 

 

이 기회에 네 분의 충절을 다시 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어디서 은은한 솔향이 번져난다.

쭉 곧은 안면송처럼 기상과 절개가 강한 님들이시여~~

 

연대순서별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주이고, 시호는 무민(武愍)이고,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우왕은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 의정부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성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1]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한용운

만해 숙명 한정옥(萬海, 俗名 韓貞玉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1]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에《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만해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김좌진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생 1889(고종 26) 사망 1930
만주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외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했다.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산시역에 있는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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