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녹차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추사가 이곳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차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하자 다승(茶僧) 초의선사가 봄마다 차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글을 보냈으니 그 우정이 지금의 한라산 자락 푸른
차나무의 물결로 다시 태어난 것일 게다. 인근에는 추사가 머물렀던 적거지가 있다. 복원된 옛 초가와 함께 기념관이 있어서 추사의
호쾌한 글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니 다향만리 제주 다원 여행의 덤인 셈이다.
아랫글은 조선후기 서화가 김정희(金正喜)편/펌글입니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으니 <세한도>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세 한
도
한때 초막에서 샘물 길어 차 달이노라 때는 동지섣달 긴긴 밤 차거운 달빛이 문풍지 뚫고 소나무 그림자 청한(靑寒)한
기운 일으키고 돌샘물 길어 차 마시던 추사(秋史)의 넋은 제주도 거센 바람되어 머물고 돌 여자 바람이 많아
삼다(三多) 거지 도둑 문이 없어 삼무(三無) 바람 홍수 가뭄이 심해 삼재(三災)의 땅 유배지 탐라에는 아직도 칼바람이
부는데 정한(情恨)이 많아 애틋한 제주에 청풍명월로 머물고 있나니 돌하르방으로 지켜보고 있나니